목 차Ⅰ. 서론범위의 경제란?Ⅱ. 본론ⅰ. 나의 주변 사례ⅱ. 기업의 사례1. 한국통신 ADSL2. 편의점의 택배서비스3. 신문사(주간지+월간지+잡지..)4. 삼성전자의 다양한 제품들5. 메일서비스에서 포털 사이트 다음으로의 변화Ⅲ. 결론Ⅰ. 서론범위의 경제란?빵과 과자를 따로 만드는 것보다 빵과 과자를 같이 만드는 것이 비용을 절감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빵을 만드는 회사가 빵 1000개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50만원이고 과자를 만드는 회사가 과자 2000개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80만원이라면 한 회사가 빵과 과자를 같이 만들면 보다 싼 비용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빵과 과자를 따로 생산하기 위해서 각자가 밀가루 반죽하는 기계나 빵이나 과자를 굽는 오븐이 각각 필요하게 된다. 빵을 생산하고 나면 기계를 놀려두는 시간이 많아집니다. 과자를 생산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빵과 과자를 같이 만들면 따로 따로 기계를 구입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기계를 놀려두는 시간도 줄어들게 된다.기업이 생산하는 상품의 범위가 커짐에 따라 비용이 절약되는 현상을 범위의 경제라고 한다. 범위의 경제가 생기는 이유는 앞에서 예로 든 생산시설을 공동 이용하는 것 말고 경영진이나 관리인을 따로 둘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만큼 비용이 절감되기 때문이다.공동투입요소(public inputs)가 있는 경우 생산하는 재화의 범위를 넓히는 데 더욱 유리해 지는 효과를 '범위의 경제 효과가 있다'고 얘기한다. 전략경영적으로 얘기하면, "가치사슬(value chain)中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 다각화에 유리해질 때 범위의 경제가 있다" 이다.요즘 기업들을 보면 상품 하나 만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여러 가지 물건을 동시에 생산하고 있다. 라면회사는 라면뿐만 아니라 스낵도 만들고 과자로 만들고 컵라면도 만드는 것을 보면 범위의 경제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범위의 경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큰 규모의 기업에서만 일어 갖추어진 사무실과 배달원, 오토바이 등 이 모든 것들을 공유해 사용하는 것에 조금에 인력의 보충으로 두 종류의 신문을 배달함으로서 신문지국에 많은 수익을 가져다주고 있는 것이다. 난 오늘 일어나자마자 범위의 경제의 사례 하나를 경험했던 것이었다.평소와 같이 신문을 읽고 학교에 갈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나에겐 누나가 결혼을 할 때 주고 간 오래된 차 한대가 있다. 항상 같은 코스와 비슷한 시간대에 등교하는 나는 충남대 백마게시판에 나와 비슷한 시간대와 내 등교 길 중간에 같이 등교할 카풀 할 사람을 찾는 다는 글을 올렸었다. 올린 바로 그날 카풀하자는 연락이 왔고 그래서 나는 한 달 전부터는 등교 길 중간에 우리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을 태우고 같이 등교를 하고 있다. 나 혼자 타고 올 때와 한사람을 더 태우고 올 때의 기름 값에는 차이가 없다. 두 명이 타고 등교를 하든지 나 혼자 타고 등교를 하든지 유지비용은 사실상 차이가 없고 혼자 타고라도 학교에 와야 한다. 카풀을 함으로서 등교 길이 심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큰돈은 아니지만 약간에 돈을 받음으로서 그만큼의 기름 값을 아낄 수 있게 되었다. 카풀은 내가 아침에 일어나서 겪은 두 번째 범위의 경제의 사례이다.아침 8시에 학교에 도착한 나는 문과대학 128강의실에서 총학이 주체하는 중국어 강좌를 듣고 있다. 새 학기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외부에서 중국어 강사님을 초청하여 학교에서 중국어 강의를 한다고 수강생을 모집하는 것을 보고 평소에 중국어에 관심이 있던 나는 신청을 하게 되었다. 내가 수강신청을 하게 된 이유로는 학교에서 수업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따로 시간을 내서 학원을 찾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과 무엇보다도 외부의 학원보다 수강료가 50%도 안 되는 저렴한 가격으로 배울 수 있다는 점이 나에게는 큰 매력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수강료가 저렴할 수 있던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우리학교에 수업시간은 1교시가 9시부터 이다. 8시에는 수업이 없기 때문에 수업이 없는 시간을 이용해서 강의를 볶음밥을 만들기 위해 갖춰진 것들을 모두 사용해서 새우볶음밥이란 요리법만을 개발해 새우볶음밥 메뉴를 늘려 새우볶음밥을 좋아하는 손님들에게 인기를 얻어 많은 수익에 증가를 가져 올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점심을 먹으면서 범위의 경제의 사례를 경험 한 것 이었다.좋아하는 여학생과 맛있는 밥을 먹다보니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시계를 보니 다음 강의 시간이 다되어 가는 것이었다. 나는 급히 학교로 돌아와 강의 시간에 늦을까 뛰기 시작했다. 강의실에 거의 도착해서 늦었나 하고 뛰면서 시간을 보기 위해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내다 실수로 핸드폰을 떨어트렸다. 이런 핸드폰 액정에 아무것도 안 나오는 것이었다. 그래도 수업에 늦지 않고 무사히 수업을 듣고 고장난 핸드폰을 고치기 위해 A/S 센터를 가야했다. 019를 쓰고 있는 나는 우선 LG텔레콤에 상담 서비스에 전화를 걸어 A/S 센터의 위치를 알아보았다. 내 핸드폰은 팬택이란 회사 제품이었다. 제품 회사 별로 A/S 센터가 다른 곳에 위치하고 있었고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A/S점을 문의 해본 결과 유성 사거리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안내 받고 마침 강의가 없어 A/S센터를 바로 찾아 갈 수 있었다. 유성 사거리에 도착한 나는 주위를 돌아보다가 팬택 A/S센터를 찾았다. A/S센터는 LG텔레콤이 아닌 KTF 핸드폰 대리점과 같은 사무실 안의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고 A/S 기사 한분이 있었다. 팬택이란 회사가 아직 많은 제품을 팔지 못해서 인지 한사람으로도 유성 지역의 A/S 업무를 볼 수 있는 것 같다. 핸드폰을 수리하는 데는 20분이 채 걸리지 않았고 다행히도 저렴한 비용으로 핸드폰을 고칠 수 있었다. KTF와 A/S 센터가 자라 잡은 그곳 사무실은 꽤 넓은 공간을 사용하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이 KTF대리점으로 쓰이고 있고 한쪽 구석에 A/S 센터를 운영하고 있었다. 만약 팬택회사에서 따로 사무실을 임대해 A/S 센터를 운영한다면 그 비용은 지금과는 비교 할 수 없는 비용이 들 것이다. A/S 기사 한분을 범위의 경제를 실현한 사례인 것이다.한 시간 남짓 공부를 했을까. 저녁밥을 조금 먹었더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밥을 먹기엔 시간이 늦었고 귀찮기도 해서 난 집근처에 편의점에 가서 컵라면을 먹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마침 집근처에 편의점이 새로 생긴 것을 보고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새로 생긴 편의점은 내가 늘 다니던 편의점과는 뭔가 다른 형태의 편의점 이었다. 다른 편의점들에서 흔히 파는 것들을 갖추어놓고 그 외에 책과 비디오를 함께 대여해 주고 있었다. 나는 라면을 하나사고 평소에 내가 읽고 싶었던 책이 있어서 혹시나 하고 그 책이 있나하고 대여코너 쪽으로 갔다. 마침 내가 읽고 싶던 책을 발견했고 나는 라면과 함께 그 책을 대여했다. 라면과 책을 들고 집에 온 나는 방금 편의점에서 범위의 경제 사례 중에 또 하나를 보고 온 것이었다. 24시간 영업을 하는 편의점에 책과 비디오를 대여 해줌으로서 한 공간에서 여러 종류의 서비스를 가능하게 함으로서 편의점 하나만을 운영했을 때의 수익보다 약간의 인력과 자본을 들여 많은 수익을 얻게 함으로서 범위의 경제를 실현했다고 볼 수 있다.밤 10시가 다 되어가는 늦은 시간에 친구에게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여자 친구랑 헤어졌다면서 술 한 잔 하자는 전화였다. 나는 피곤하기도 했고 다시 옷을 입고 나가기 귀찮기도 해서 망설이다가 예전에 내가 여자친구와 헤어졌을 때 그 친구와 술을 같이 먹었던 기억에 거절하지 못하고 다시 집을 나서게 되었다. 우선 집근처에서 친구를 만난 나는 친구가 가끔 가는 괜찮은 포장마차가 있다고 해서 친구를 따라 갔다. 15분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걸어서 도착한 곳은 주유소였다. 분명 입구엔 주유소 간판과 함께 주유기들이 이었다. 이 주유소는 번화가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고 공간 또한 주유소란 특수성 때문인지 상당히 넓은 공간을 확보 하고 있었다. 낮에는 주유소를 운영하고 10시가 넘으면 주유소의 넓은 공간을 활용하여 포장마차를 하고 있었던 것 이다. 이곳은 번화가에 위치해 있으면서도등으로 구분되는데, 이 중에서 ADSL은 초고속 멀티미디어시대를 앞당길 수 있는 대안의 하나로서 각광을 받았다. 일반가입자의 광케이블화가 최소 10년 이상 걸리고 시설투자비가 과다하게 소요되는 점을 감안, 동선로인 기존 가입자선로를 이용하여 고속데이터회선을 부가적으로 확보함으로써 초고속가입자망을 구축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전국에 포설된 2,000만 전화회선을 활용하는 ADSL 서비스망을 적은 투자비로 단기간에 완성할 수 있었다.1999년부터 한국통신은 서비스 제공 지역을 본격적으로 확대하였다. 그런데 고속통신서비스로 ISDN과 ADSL 어느 것을 주력 상품화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그 결과 고속인터넷서비스를 위한 대안으로 ISDN을 적극 보급한다는 계획 아래 한국통신은 1996년부터 교환기 교체 등 지속적인 투자 활동으로 ISDN 가입을 받을 수 있는 전화국을 서울지역 49개를 포함, 전국 350개 전화국으로 확대하였다. 하지만 ADSL이 기술상으로 ISDN보다 뛰어나고, 광케이블 등과 같은 별도의 통신시설이 필요하지 않다는 장점 때문에 여타 통신사업자들에 의해 ADSL 상용서비스가 속속 이루어졌다. 또한 인터넷 등 데이터통신 수요자들의 통신속도 제고와 가입자망 구축에 대한 요구가 계속됐다. 급기야 한국통신은 그 동안 집중적으로 투자를 해왔던 ISDN(최대 128Kbps) 서비스에 대해 추가 투자를 중단하고, 대신에 Mbps급 전송속도를 제공하는 ADSL 등의 초고속 인터넷 회선서비스를 중점적으로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먼저, 서울과 부산지역 1,000명을 대상으로 DMT(Discrete Multi-Tone) 방식의 고속인터넷 시범서비스를 시작했다.1999년 6월부터는 상용화를 본격화하고자 이용자가 자신의 용도에 맞는 상품을 선택할 수 있도록 인터넷서비스 코넷 (KORNET)과 다양한 초고속기술을 결합한 ADSL 패키지 상품을 잇따라 출시했다. 서울의 영동·광진전화국, 부산의 연산·남울산전화국, 대전의 둔산전화국 가입자를 대상으로 상용서비스를 .
1.머리말“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초등 교육을 마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아니 외울 정도로 들었을 것이다.1592년 부터 그 후 7년간 계속되어온 임진왜란(정확히 정유재란)에서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으며, 마지막 해전에서 불의의 일격으로 전사할 때까지 장병들의 안위를 걱정하여 마침내 죽은 뒤에도 노량 해전에서의 대승리를 일구어 낸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군 제독, 충무공 이순신이 적의 유탄에 맞아 돌아가시면서 남긴 최후의 유언이라고 알려져 있다.여기서 ‘유언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유언이라고 알려져 있다고 말을 하는 이유는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두고 여러 가지 이견(異見)이 분분(紛紛)하기 때문이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등학교까지의 국사 시간에 배운 일반적인 이순신 장군의 죽음은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라는 문구와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라고 배워왔다. 이 보고서를 작성하기 전까지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이순신의 죽음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없다. 나뿐만 아니라 나와 같은 교육을 받아온 대다수의 한국 사람이라면 다들 그렇게 알고 있을 것이다.이순신 장군의 사망에 대한 설은 크게 3가지로 나뉘어 진다. 첫 번째는 이순신은 우연히 전사한 것이 아니라 자살하기 위해 일부러 전사하였다는 ‘자살설’이다. 두 번째는 당시 이순신은 전사한 것이 아니라, 친족 및 측근들의 합의하에 노량 해전에서 몰래 빠져 나와 은둔하여 살아갔다는 ‘은둔설’이며, 세번째는 기존의‘전사설’이다.나는 지금부터 이순신 장군의 기존의‘전사설’ 외에 ‘자살설’, ‘은둔설’의 두가지설의 내용과 그 학설들이 제기 될 수 있었던 몇 가지 이유와 근거를 시대적 배경과 함께 알아 볼 것이다.2.본론기존에 전사설에서 벗어난 자살설, 은둔설이 제기되는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그 시대의 정치적 상황 보다는 이순신이 사인(死因)에 대한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이순신의 죽음을 두고 논란이 일어날 수 있는 근본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이순신의 죽마지우시는 물론, 방탄을 할 수 있도록 개량되었다. 수사이며 후에 3도수군 통제사를 겸한 이순신에게는 특제의 갑옷을 제작하여 착용 하였을 것이다. 그는 23회의 격렬한 해전을 지휘한 역전의 명장이었다. 자신의 신병 방호를 그렇게 소홀히 했을 리가 만무하며, 평소대로라면 지휘탑에는 방패를 빙 둘러쳤을 것이고, 이순신 자신은 당연히 우수한 갑옷을 입었을 것이며 왜군의 유탄이 이순신 장군의 갑옷을 뚫고 등 뒤로 나 올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나는 그의 사망 사인에 우선적으로 의문점이 제시되면서 앞으로 논하게 될 학설들이 나오게 된 공통적인 배경이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외에도 몇 가지의 논란의 배경들이 나왔는데 각각의 학설과 연관지어 알아볼 것이다.1)자살설이순신은 단순한 전사가 아니고 실제는 자신이 스스로 취한 죽음이라는 설이 있다. 이것은 후대에 새롭게 제기된 문제가 아니고 이미 이순신이 죽은 당시부터 있었던 얘기이다. 왜 그와 같은 의문이 제기되는 걸까? 자살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논거로는 다음과 같은 것 들이 있다.금산군(錦山君) 이성윤(李誠胤 : 1570~1620, 이순신보다 25살 아래며, 문장가임)이 노량 충렬사에 서 붙인 시 가운데 이런 글이 있다.공로 커도 상 못 탈 것 미리 알고서 제 몸 던져 충성 뵈러 결심했던가.서하 이민서(西河 李敏敍 : 1633~1688, 대제학·이조·예조·호조)는 청렴하여 다섯 차례나 전관(銓官)을 맡았어도 청을 들어주지 않으므로, 문간에 잡객이 출입이 없었다. 이러한 대쪽같은 그가 명량 대첩 비문도 지었는데, 충장공 김덕령(忠壯公 金德齡)장군의 전기에 쓴 내용에 이런 글이 있다....김 장군이 죽은 뒤로 모든 장수들이 제 몸 보전하기도 어려울 것으로 의심했던 것이어서, 곽재우는 마침내 군사를 해산하고 생식하면서 화를 피했고, 이순신은 한참 싸울 적에 갑옷을 벗고 스스로 적탄에 맞아 주었다.최석남(催碩男) 은 죽음을 선택하여 전사하였다고 했다.과연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적탄에 맞나 격침시켜 승리는 눈앞에 와있었다. 그 상황에서 그가 그날 새벽에 한 행위는 참으로 무모하다고 할 수 있다.이순신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당시의 영의정 유성룡의 징비록에는 “이순신은 낮에는 물론이고 한밤에도 반드시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평시에도 절대로 갑옷을 벗는 일이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러한 그가 전투를 선두에서 지휘하면서 갑옷을 벗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가 없다.둘째는 난중일기를 비롯한 임진 중의 그의 어록과 그가 마지막전쟁을 앞두고 그 전날 밤에 수행한 의식 때문이다. 그는 마지막 전쟁을 앞둔 전날 밤에 “이 원수를 멸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다짐을 했으며 ‘향을 피우고 하늘에 맹서하는’ 의식을 병행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승리에 대한 필사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딘지 죽음을 앞둔 비장의 행위로 비춰진다. 승리를 쟁취하려는 자세를 갖는 것이 당연한 것이긴 해도, 그렇다고 승리가 예고된 전쟁종식의 마지막 전투에서 스스로 목숨을 내던지면서 까지 전쟁을 해야만 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셋째는 당시의 정치상황과 관련해서이다. 불행하게도 조선시대는 당쟁과 시기와 음해, 비방과 모략이 판을 치는 시대였다. 투옥·유배·처형·옥사가 거의 끊이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은둔하는 선비가 유독 많았던 시대이기도 하였다. 그러 정치와 군사방면에서의 대부분의 인재들은 하나 같이 정쟁에 휩쓸려 비운의 생으로 마감을 하였다. 구국의 일념으로 의병을 일으킨 김덕령 장군이 모략으로 체포되었다가 누명을 벗고 간신히 석방되었으나, 후에 다시 참소로 투옥되었다가 끝내 옥사하고 말았는데 그 주요 요인은 그가 공을 많이 세웠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신망이 두터웠기 때문이었다. 곽재우 장군까지도 군대를 해산시키고 산 속으로 들어가 죽을 때까지 은둔생활하게 만들었던 것이다.이순신 또한 이미 임진왜란 전에도 모함을 받아 파직된 적이 있었고, 다시 복직되어 북쪽의 오랑캐와 싸워 공을 세웠지만 시기하는 무리들이 모함으로 투옥되었다가 겨우줄 사람이 거의 없었다. 서인은 이순신을 제거하고 자파의 인물을 기용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들이 볼 때에 이순신은 공이 만만치 않은 데다 백성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어 반드시 제거해야할 요 주의 인물이었다.『선조실록』을 보면 선조는 언제나 이순신에 대하여 흔쾌하지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선조는 결코 이순신을 보호하려 하지 않았다. 옥에 갇힌 이순신은 거의 고립무원의 상태로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한 우의정 정탁 등의 공개적인 구명상소로 말미암아 이순신은 겨우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다. 이러한 정국에서 이순신이 자신의 삶과 역할에 어지 회한을 품지 않을 수 있으랴! 죽음을 한해 앞둔(1597년)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다만 어서 죽었으면 한다.”, “왜 어지 죽지 않는지!”, “일찍 죽느니만 못 하도다”,“선대의 사당에 가서 울면서 절을 하였다.”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 마지막 싸움을 앞두고 그의 일기에는 “죽고 싶다“ 등의 기록이 무려 8번이나 나온다. ”죽고 싶다“는 말이 반복되는 것은 그의 죽음에 대한 다짐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게다가 유일하게 자신을 알아주고 옹호해 주던 영의정 유성룡이 노량해전 40일 전인 1598년 10월에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마침내 파직을 당하자 이순신의 충격은 이루 형용하기 어려워을 것이다. 유성룡이 파직을 당하기전에도 이순신은 조정의 인사정책에 불만과 분노를 표하면서 “이를 어찌하랴, 이를 어찌하랴”라고 탄식을 하였는데 이제 그 불신은 극에 달했을 것이라고 보여진다.2)은둔설‘은둔설’이란, 이순신은 전사한 것이 아니라, 미리 친족 및 측근들과 합의하고서 노량 해전 당시에 야음을 틈타서 몰래 빠져 나가 그 후 약 16년간 은둔하여 살아갔다는 주장이다. 『유물의 재발견』 의 5장 ‘이순신과 거북선’에서 한 부분을 할애하여 ‘이순신의 은둔설’을 제기한 남천우씨에 의해 최근 제기된 것이다, 이 주장을 직접적으로 뒷받침하는 사료는 많지 않다. 다만 이순신이 생전에 부하 장수들에게 말했다는 포격전을 주로 구사하였기에, 야간보다는 주간에 해전에 임하였다. 하지만 노량 해전만큼은 야간에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야음을 틈타 이순신을 도피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셋째,『이충무공 전서』에 부록으로 수록된, 이순신의 조카인 이분(李芬)이 기록한 행록(行錄)의 이순신의 최후의 모습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한둘이 아니다. 그 기록에는 이순신이 적의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을 당시 이순신의 사망을 알았던 인물은 아들 회와 조카 완, 그리고 몸종 김이(金伊)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순신이 사망한 뒤 임시로 함대의 지휘를 맡은 이 역시 이들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참모들과 부하 장수들로 가득한 기함 지휘소에서 함대 사령관이 저격을 당해 사망하였을 때에 그것을 단지 3명밖에 알지 못했다는 점, 그리하여 그 지휘권이 고참 부하 장수가 아닌 신출내기인 아들과 조카에게 돌아갔다는 점은 극히 의심스러운 점이다. 결국 이것은 이분의 기록은 이순신의 은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조작한 것이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넷째, 네 번째로 논하게 될 이부분이 나에게는 가장 신빙성 있게 생각되었던 부분이다. 이순신의 묘지문제이다. 이순신이 남해에서 죽은 날이 1598년 11월 19일 이었으며 그의 고향인 충남 아산으로 시신을 옮긴 것은 12월이 되어서다. 그런데 장례를 치른 날은 다음해 2월 1일 이므로 죽은 후 무려 80일이 경과한 것이며, 그로부터 다시 15년 후에 산소를 600m 떨어진 곳으로 이장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상례는 당시의 예법과 맞지 않는다. 또 장례를 치르지 않은 이순신의 빈소에 악취를 무릅쓰고 조석으로 상식을 올렸다고 했는데, 이러한 기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러한 요인들 때문에 이순신의 죽었다는 것은 꾸며낸 말에 불과하고, 실제로 이순신이 살아 있었으며 그가 마땅한 정착지를 찾는 기간이 길어져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또 이장의 문제인데, 일이 있으면 이장을 하는 것이 우리네 풍습이라 해도 80일이라는 충분한 날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