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론1896년 뤼미에르 영화사가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장면을 촬영하면서 영화라는 매체가 처음 소개되었다. 러시아는 1908년부터 본격적으로 영화를 직접 제작하기 시작였으며 이후 급변하는 시대상에 큰 영향을 받으며 지금까지 발전해왔다. 100년이 넘는 영화사를 거치며 러시아 영화는 많은 걸작들을 남겼다. 그러나 다른 국가들에서 그랬었던 것처럼 러시아에서도 영화는 이데올로기의 선동과 선전의 도구로 사용되는등 순탄하지만은 않은 역사를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세계 영화사적 의미는 상당한 것으로 현대 영화에도 그 모습이 남아 있다. 이러한 러시아 영화사 중에서도 가장 혁신적인 발전을 보였던 1920년대의 소비에트 무성 영화에 대하여 알아보자.? 본 론(1) 1917-두 번의 혁명과 영화러시아는 1917년 한 해 동안 두 번의 혁명을 겪었다. 2월에 일어난 첫 번째 혁명은 짜르의 귀족 통치를 종결시킨 브루주아의 혁명이었다. 이 혁명으로 로마노프 왕조는 폐위 되었고 그 자리에 개혁주의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이 혁명은 러시아 영화산업에 비교적 적은 충격을 던졌다. 혁명 직전에 만들어진 영화들도 공개되었고 정치적 주제를 다루고 있는 영화 몇편이 급하게 제작되는 정도였다.) 게다가 러시아의 주요 제작사들은 급속히 쇠퇴되어갔다.10월에 블라디미르 레닌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수립, 두 번째 혁명을 이끌었다. 볼세비키 정권은 마르크수주의적 강령 하에서 영화산업의 국유화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영화산업을 직접 접수할 만큼 강력한 기반을 갖고 있지 못했다.) 대신 이닌교육위원회(Narkompros)라는 관리기구를 만들어 영화를 관장하게 하였다. 다행이도 영화에 호의적이었던 수장 아나톨리 루나찰스키의 덕분에 몽타주 감독들은 유리한 여건에서 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다.그러나 소비에트 영화제작 여건은 1918년,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혁명 이후에 해외로 도피한 영화사들이 각종 기재들을 모두 가져갔기 때문에 장비와 필름의 부족이 극심했다. 게다가 개인 제작사가 가 공식적으로 분리된다. (세계영화사 강의 55) 이는 마침내 영화산업이 국유화 되는 것이었다. 많은 영화 제작사들은 해체되고 제작자드도 사라진다. 이를 대신한 것이 국립영화학교이다. 후에 쿨레쇼프 효과라는 편집 기법을 정립한 레프 쿨레쇼프 감독이 교수진에 합류하는등 영화 이론적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지만 이들역시 필름과 장비의 부족으로 직접적인 영화 제작 실습은 거의 불가능했다고 한다.(2) 신경제정책(NEP) 이후- 복구와 발전1차 대전과 내전으로 인해 더욱 황폐화 된 러시아 혁명 정부는 혹독한 경제 상황을 받아들여야 했다. 당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본 자원이 없었고 영화 제작 산업은 더욱더 악화되었다. 앞서 말했듯 혁명전 러시아에서 활동했던 외국영화사들은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자 모든장비와 인력을 가지고 러시아를 떠났다.그러나 신경제정책(NEP)으로 국가 산업은 점차 활기를 띠게 되었다. 위기에 직면한 레닌은 사적 소유와 자본주의적 방식의 분배를 제한적으로 재도입한 한이다.) 그 결과 국민들에게 어느 정도의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여유를 제공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고스키노(1922, 소련 국가영화위원회)와 함께 국가 및 개인의 영화 산업이 활성화 되었다. 중앙 배급 독점사를 창설함으로서 영화 산업을 재조직 하고자 해던 것이다. 그러나 지나친 영화 수출입 관장은 몇몇 개인회사들 때문에 더 큰 문제를 야기 시킨다. 영화 산업의 대부분은 국내 영화 제작보다는 외국 영화 임대에 더욱 집중되었다. 따라서 20년대 초의 영화들은 독일, 프랑스, 미국의 수사 범죄 영화, 코미디 영화, 멜로 드라마로 가득했다. 이 시기의 작품은 '독창성'보다는 '양'에 치중하게 되었던 것이다.그러나 점차적인 상승세에 힘입어 차츰 생필름이 확보되고 극영화 제작도 늘어났다. 이들의 대부분은 선전물이거나 시대상을 반영하는 작품들이었다. 국립영화학교의 쿨레쇼프 워크샾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처음으로 장편 극영화를 만들었다. 이라는 이 영화는 마지막에 뉴스릴과 연기된 장면을 결합함으로서 쿨레 양식의 예술 방법을 채택한다. 따라서 이 시기의 영화는 새로운 형식과 표현 수단을 창출해냈다. 소브키노가 거둔 업적중의 하나 역시 몽타주 운동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이자 큰 성공을 거둔 아이젠쉬쩨인의 을 만든 일이다. 이러한 변화는 소비에트 영화의 발전과 다양화를 가져다 준 혁신적인 발견이었다. 또한 이 시기에 개발된 영화 기법들은 전 세계의 영화 제작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중에서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 이론은 영화의 구성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간단히 언급하자면 그의 몽타주는 관객을 자극하고 선동하는 방법으로서 상반된 쇼트들을 변증법적으로 합하는 편집 방법이다.) 즉 그의 몽타주 이론은 정과 반의 충돌에 기초하여 쇼트들의 병치들을 유도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몽타주 이론은 혁명 후의 소비에트 무성 영화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몽타주 이론에 관해서는 뒤에 좀더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20년대 중후반은 가장 유명한 소비에트 무성영화들이 만들어진 시기이다. 이 시기를 대표할 만한 작품들로는 에이젠쉬테인의 , 베르토프의 , 뿌도프킨의 , , 도브젠코의 , 등을 들 수 있다. 20년대는 그야말로 소비에트 영화의 황금 시대였다. 이 시기에 비로소 소비에트 영화는 표현의 다양성을 획득하고 확장한 것이었다.(3) 1920 소비에트 무성영화의 특징젊고 진보적인 혁명 영화인들의 영화에 대한 태도는 20년대 소비에트 무성영화의 혁신적인 특징을 결정하였다.) 이들은 이전 시기의 영화 표현 방법과 내용에 있어 각기 독창적이고 개인적인 양식의 예술적 방법을 채택하였다. 사회적으로 유용한 미술을 추구했던 구성주의의 영향을 받아 이들은 선전적이고 교육적인 의도를 갖은 영화를 제작하였으며, 미술에서의 몽타주의 개념을 영화에 적용시켜 쇼트와 쇼트의 구성을 통한 여러 가지 표현과 그 효과에 대한 많은 시도들을 하였다.또한 이들은 뉴스 영화 창작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동시에 뉴스 영화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에이젠쉬테인의 영화에서 감독은 실제적 사건을 촬영화들을 만들었다. 이러한 사실성 고향을 위해 제재의 선택, 촬영이나 연출적인 요소들도 많이 달라졌지만 가장 혁신적인 발전을 이룬 것은 편집 이론이었다.-몽타주 이론몽타주 이론을 정리,체계화 시칸 것은 에이젠슈테인이다. 하지만 그가 몽타주 이론을 창시했다고 말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이는 쿨레쇼프에서 베르토프를 거쳐 에이젠슈테인에 이르기까지 점점 복잡하게 심화되고 발달하였다.최초의 몽타주 기법은 러시아 영화의 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하는 레프 쿨레쇼프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는 이전까지 시간과 공간에 충실하게 연결되었던 영화의 쇼트들을 충돌, 병치시킴으로서 똑같은 필름이라도 관객들에게 전해지는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내세웠다. 즉 기본적인 시공간의 재현인 a-b-c-d가 아니라 a-d-b-c, 또는 a-b-d-c라는 식으로 편집하는 것인데, 예를 들어 어두운 지하실에 앉아있는 남자의 모습을 담은 쇼트라고 하면 그 중간에 무장한 군인들이나 도시를 가로지르는 탱크의 모습을 담은 쇼트를 끼워 넣음으로써 관객들은 군인들의 쿠데타로 인한 독재정권의 억압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남자의 모습을 담은 쇼트가 다른 쇼트와 아무런 충돌도 일으키지 않고 그대로 정상적인 시간과 공간의 질서를 유지한 채 진행된다면 그 순간 관객이 느끼는 것은 다음 사건으로 쇼트가 바뀔 때까지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이를 쿨레쇼프 이팩트라 부른다.(주-세계영화사207) 결국 두 개의 쇼트를 자체적인 시공간의 질서를 무시한 채, 빠르게 병치시킴으로써 그것들이 충돌 할 때마다 그 시간과 공간을 실제보다 늘리거나 줄이는 편집을 통해 새로운 질서 를 만들고 관객들의 시선에 새로운 이미지를 전해줄 수 있다는 것이 초기 몽타주 이론이다.그 후 몽타주 기법을 이어받은 대표적인 인물로는 푸도프킨과 에이젠쉬테인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둘의 몽타주 기법은 약간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뿌도프킨은 몽타주 이론을 벽돌쌓기에 비유하였는데, A+B=AB라는 공식에 의거해서 커트와 커트의 연속지로 체계화 하였다.* 에이젠쉬테인의 다섯가지 체계화된 몽타주운율의 몽타주-길고 짧은 커트가 충돌하는 것.율동의 몽타주-정지된 것과 움직이는 커트를 대비시킨 것.음조의 몽타주-어둠과 밝음이 부딪히는 것.배음의 몽타주-운율.율동.음조의 몽타주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지적인 몽타주-은유적이고 상징적으로 연결된 것.그리고 베르토프는 그들과 달리 기록영화적이며 사실적인 형태를 띤 카메라의 눈 방식을 선호하였다.(4) 소비에트 무성 영화시절의 감독들과 대표작- 지가 베르토프기록영화와 뉴스릴을 만들었다. 1919년에 베르토프는 키노 아이 그룹(Kino Eye Group)을 창설했다. 그는 어떤 것도 각색되거나 연출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카메라를 통해 현실을 실제적으로 인간의 눈 보다 더 정확히 장면 포착할 수 있다고 믿었다.)베르토프는 구제적러시아 때의 뉴스 영화의 쇼트들과 새로운 쇼트들을 병치시킴으로써 새로운 의미들을 창출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몽타주는 하나의 기법이라기보다는 제재의 선택, 촬영 그리고 영화적 사실들의 선별과 결합 모두를 포함하는 필름 조합과 같은 제작 과정 전체를 의미했다.주요 작품으로 1922년에서 1925년까지 매달 촬영한 와 이 있다.- 레프 클레쇼프영화감독이고 이론가이며 대학 강사였던 클레쇼프는 국립영화학교에서 워크샵을 통해 여러 가지 편집 실험을 하게 된다. 그는 한 장명에 대한 설정화면을 주지 않고 관객으로 하여금 분리된 요소들을 지닌 쇼트들로부터 공간적 또는 시간적 연속성을 추론케하는 것에 기반 했다. 기존의 필름을 재편집하면서 영화 장면에 대한 실험을 하였다.- 세르게이 에이젠쉬테인에이젠쉬테인은 일본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강렬한 관심을 발전시켰는데, 그것은 후에 영화에 대한 그의 심오하고 박식한 이론의 내용이 되었다.) 그는 일본의 상형문자에 매혹되었는데, 도출된 두개의 상징이 결합하여 영화의 쇼트들처럼 제3의 다른 의미를 제공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口(입)+鳥 (새)=鳴(울다)// 門(.
■ 서 론영화에 편집이라는 개념이 도입된 이후 고안된 편집 기법은 상당히 많다. 그 중의 대다수는 컷과 컷(편집에서의 쇼트와 쇼트의 연결의 개념이므로)간의, 혹은 씬과 씬간의 즉. 장면 간의 원활하고 효과적인 전환을 위하여 개발된 것들이다. 수만은 영화의 장면 전환 기법들 은 어떤 것들은 시도되어지고는 바로 소멸하였으나 어떤것들은 현재까지도 개선 보완되어 가며 사용되고 있다. 게다가 많은 영화에서 새로운 장면 전환 기법에 대한 시도들이 행하여 지고 있다.다니엘 아루혼이 지은 제28장에는 수많은 장면 전환 기법들중 가장 잘 알려진 방법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을 토대로 국내외의 대표적인 영화들에서 나타나는 장면 전환 기법들을 직접 확인하는 작업을 통해 영화의 장면 전환기법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 더 나아가 그 활용 방안을 모색해보고자 한다.본론을 위해 선정된 세편의 영화는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 강우석 감독의 , 그리고 이시명 감독의 이다. 세 편을 선정한데에는 나름대로의 의도한 바가 있었으며 이는 본론에 자세히 명시하려 한다.■ 본 론#1. < 대 부 > (원제 : The Godfather) - 1972년 미국감독 :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Francis Ford Coppola)원작 : Mario Puzo 줄거리 : 돈 꼴레오네의 호화 저택에서는 막내딸 코니와 카를로와의 초호화판 결혼식이 거행되고 있다. 시실리아에서의 이민과 모진 고생 끝에 미국 암흑가의 보스로 군림하는 마피아의 두목 돈 꼴레오네는 재력과 조직력을 동원, 갖가지 고민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해결해 사람들은 그를 '대부(代夫)'라 부른다.돈 꼴레오네는 9세때 그의 고향인 시실리아에서 가족 모두가 살해당하는 불행을 겪으며 미국으로 도피하여 밑바닥 범죄 세계를 경험하면서 확고한 기반을 다지게 된다. 세월이 흐른 후 부모의 복수를 위해 시실리로 돌아온 그는 조직적 범죄를 통해 비약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돈 꼴레오네의 라이벌인 타탈리아 페밀리의 마약 밀매인 소롯소가 돈 꼴레오네를사살하고 시실리로 피신한다. 시실리아에서 시골 아가씨와 결혼하지만 집요한 추적으로 아내를 잃는다. 장남 소니는 자신의 여동생 코니를 학대하던 카를로를 혼내주나 이에 앙심을 품은 카를로는 자신의 패밀리와 소니를 배반하게 되고 이로 인해 소니가 처참하게 암살당한다. 돈 꼴레오네의 일가는 붕괴직전에 직면한다. 돈 꼴레오네 일가를 위해 귀국한 마이클은 대학시절 애인인 케이와 재혼한다. 얼마 후 손자와 뜰에서 놀던 돈 꼴레오네가 심장발작으로 급사, 마이클이 자리를 이어받아 이 집안의 양자로 오른팔 역활을 하는 변호사 톰을 참모로 조직을 단결시켜 적의 격퇴를 해 나간다.본 영화를 선정하게 된 이유 : 이 영화는 1970년대에 만들어진 헐리우드 영화로서 미국내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명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전 세계에서 큰 흥행에 성공했을 뿐 아니라 제4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남우주연상, 각본상을 휩쓸며 작품성 또한 인정받은바 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부터 명작으로 불리워 지던 영화의 장면 전환 기법을 알아보는 것은 현재의 그것과의 비교, 분석이 가능할 뿐 아니라, 그 고유성또한 옅볼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 영화를 선택하였다.대표적인 장면 전환- 소토구를 이용한 장면 전환 및 시간의 경과 표현 : 다른 조직의 총격에 큰 부상을 당한 대부 돈 꼴레오네가 오랜 입원끝에 본가로 돌아오는 장면. 이 영화에서는 이 장면을 신문기사와 병원엠뷸런스의 돈 꼴레오네 이송 장면 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시실리아로 피신해있던 아들 마이클이 어느정도 시간이 지났으므로 다시 귀환할 수 있다는 점과 결부되어저 있다. 영화 에서는 이 장면 외에도 신문 기사를 자주 사용하여 시간의 단축과 효과적인 서사 효과를 동시에 노리고 있다.- 서술상의 쉼으로 사용되는 단일 쇼트 : 이영화에는 블랙 스크린이 몇차례 등장한다. 이는 관객을 완전한 정서적 정지상태로 유도하여 관객이 전혀 다른 시공간, 또는 분위기를 맞이할 여유를 제공한다. 대표적인 부분으로는 시실리아로 피신 귀환 시키려는 병들고 늙은 돈 꼴리오네의 회의 장면의 연결에서 볼 수 있다.- 인물을 통한 장면의 시작 : 인물의 유도에 의해 장면이 자연스럽게 시작되거나 보여지도록 하는 방법이다. 연기자가 어떤 행동을 하거나 이동을 하면서 주위를 환기시키거나, 자연스럽게 카메라를 옮겨 놓을 수 있는 것이다. 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 기법의 좋은 예를 옅볼 수 있다. 조직의 새로운 보스가 된 마이클이 남편이 살인을 일삼는 사람임에 실맣하려는 아내 케이를 달래고, 케이는 술을 꺼내려 문밖으로 나간다. 마이클은 방안에서 문밖의 아내를 응시하고 있다. 이때 조직의 수뇌부 몇 명이 마이클 곁으로 다가와 그를 “마이클” 이란 이름대신 “돈 꼴레오네” 라고 높여 부른다. 남편을 걱정스럽게 처다보는 아내의 시선을 뒤로한체 한 조직원이 방문을 닫는다. 이 장면은 다른 조직들을 과격한 방법으로 격퇴하고 꼴레오네 패밀리의 새로운 출발을 암시하며, 엔딩 크레딧으로 이어진다.#2. - 2003년 한국감독 : 강우석줄거리 : 북으로 간 아버지 때문에 연좌제에 걸려 사회 어느 곳에서도 인간대접 받을 수 없었던 강인찬. 역시 어두운 과거와 함께 뒷골목을 전전하다가 살인미수로 수감된다. 그런 그 앞에 한 군인이 접근, '나라를 위해 칼을 잡을 수 있겠냐'는 엉뚱한 제안을 던지곤 그저 살인미수일 뿐인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는데...누군가에게 이끌려 사형장으로 향하던 인찬, 그러나 그가 도착한 곳은 인천 외딴 부둣가, 그곳엔 인찬 말고도 상필, 찬석, 원희, 근재 등 시꺼먼 사내들이 잔뜩 모여 있었고, 그렇게 1968년 대한민국 서부 외딴 섬 '실미도'에 기관원에 의해 강제차출된 31명이 모인다. 영문 모르고 머리를 깎고 군인이 된 31명의 훈련병들, 그들에게 나타난 예의 그 묘령의 군인은 바로 김재현 준위, 어리둥절한 그들에게 "주석궁에 침투, 김일성 목을 따 오는 것이 너희들의 임무다"는 한 마디를 시작으로 냉철한 조중사의 인솔하에 31명 훈련병에 대한 혹독한 지옥훈련이 시작된다.684 주석궁폭파부대라다...본 영화를 선정한 이유 : 2003년 강제규 감독의 와 함께 한국 영화 관객 천만 시대를 연 대작 영화이다. 88년부터 많은 연출작을 성공시켰을 뿐 아니라 제작자로도 한국 영화계를 이끌고 있는 강우석 감독의 영화에서는 어떤 기법들이 사용되어졌는지를 알아보았다. 이는 너무 낡고 진부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극도로 감각적이고 새롭지도 않은,한국영화의 현주소에서 드러나고 있는 장면 전환 기법들에 대한 관찰이라고 생각한다.대표적인 장면 전환- 카메라와 인물의 반복 움직임 : 영화의 처음 부분에서 사용되어 앞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갈 중심 인물들을 소개한다. 는 한 사람이 이야기를 주도하기보다는 여러 인물들의 행동과 변화에 의해 이야기가 전개된다. 실미도로 이동하는 배 안에서 찌뿌진 인상의 인물들을 각각 비슷한 자세와 고개를 치켜드는 행동, 그리고 같은 사이즈의 카메라로 잡아 주어 관객에게 인물들을 소개한다. 하지만 각 인물들의 표정에서 조금씩 차이를 두어 그 성격을 암시하기도 한다.- 서술상 쉼(pause)로 사용되는 한 시퀸스 : 두 시퀸스 사이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완화 시키고 관객에게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돕는 역할을 하기 위해 완충제의 역할을 하는 시퀸스를 삽입하는 방법이다. 영화 전반에 흐르고 있는 긴장된 분위기를 완화시키고자 이 기법이 사용되어 지고 있다. 남,북 화합의 분위기가 고조되자 정부에서는 실미도와 684부대의 존재가 꺼림직하다. 때문에 이를 완전 소멸 시키고자 김재현 중위를 불러들여 부대 해체 및 부대원 전원 사살을 명한다. 재현은 이를 강력히 반발하고 나서지만 대세는 어쩔수 없이 흘러간다. 결국 이 사실은 684부대원들에게 알려지게 되는데, 이 사이에 한가로운 부대원들과 기간병들의 화합된 모습, 그리고 인찬이 어머니의 사진을 빼앗기고 분노하는 모습을 넣어 매인 플롯이 급속도로 전개되어 지는 것을 완화 시키고 관객에게 실미도에서의 사람냄세를 맡아 볼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이는 앞으로 있을 파국을 더 비극적으로 느끼게 하는 장치이기도 하의 사건 기록을 담은 파일은 서류장에 보관된체 세월이 흐른다. 이 서류장이 낡아 녹이 스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오랜 시간의 경과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3. - 2002 한국감독 : 이시명줄거리 : 2009년 미래, 동아시아 일대는 '일본제국'이라는 이름 하에 '대동아 공영권'으로 재 통합 된지 이미 100년의 시간이 흘렀으며, 이제 조선이라는 이름은 지구상 어디에도 자취를 잃은 지 오래다. 그러나... 정체를 알 수 없는 반정부 레지스탕스 후레이센진들과 모든 음모의 원흉인 이노우에 재단 사이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일본 제3도시 서울, 반정부 레지스탕스 후레이센진(不令鮮人)들이 정계의 거물급 인사 이노우에가 주최하는 유물 전시장에 침투, 파티장을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만든다. 이 테러를 진압하기 위해 JBI(Japan Bureau of Investigation) 특수 수사 요원 사카모토 마사유키와 그의 절친한 친구 사이고 쇼지로가 투입된다. 테러는 발생 10분만에 완전 진압되지만, 사카모토는 비정치적 전시 행사를 습격한 이들의 불분명한 테러 목적과 단 한명의 민간인 희생자도 없는 절묘한 테러 방식에 의문을 품게 된다.이 테러 사건의 면밀한 재조사를 주장하는 사카모토는 사건을 축소 은폐시키려는 JBI 수뇌부들과 갈등 하게 된다. 사카모토는 독단적으로 수사를 감행하고, 후레이센진들이 지속적으로 이노우에 재단과 관련된 테러를 벌여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이 사건들의 배후에는 거물급 정계인사 이노우에의 음모가 숨어있음을 발견하게 된다.그러나 JBI 수뇌부들은 이런 사카모토의 주장을 묵살, 정직처분까지 내리고, 그의 친구 사이고마저 사카모토에게 수사 중단을 강권한다.혼자서 후레이센진들의 조직을 파헤쳐나가던 사카모토는 급기야 JBI의 조작극에 의해 동료 경찰 살해라는 누명까지 쓴 채 체포되고 사이고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탈출을 감행하지만 심한 부상을 입고 만다. 거기다 유일한 친구 사이고 마저 다시 만날 땐 총구를 겨눌 수 밖에 없을 거라는 말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