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는 글‘펄 벅’의 「대지」삼부작을 읽고 그 느낀점을 쓰고자 한다. 무엇보다 이 세 권의 책을 한 권씩 읽어 나가면서 느낀 점은 어떻게 미국인이 이렇게까지 중국인의 외양적인 생활과 모습뿐 만 아니라 내적인 면까지 속속들이 자세히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작가인 펄 벅이란 어떠한 인물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펄 벅의 인생관이 자리 잡히게 된 배경’을 살펴본 후에 ‘대지가 쓰여진 그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고 세 권의 ‘줄거리를 요약’한 후에 그 ‘느낀점’을 써 나가도록 하겠다.Ⅱ. 올리는 글1. Pearl Buck펄 벅은 1931년 「대지」가 발표된 후 전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당시 중국에 그다지 많은 관심을 가지지 않으리라는 예상을 깨고 많은 서양인들이 그녀의 소설에서 중국인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묘사력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작품을 통해서 1938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이처럼 펄 벅의 소설에는 중국인들의 삶의 모습을, 대지를 향하는 그들의 내면적인 모습까지도 잘 잡아내어 묘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이런 능력을 키우게 된 배경이 된 것은 그녀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중국에서 보내면서 어린아이 특유의 호기심과 흡수성으로 중국의 문화를 가슴속 같이 담아 두었기 때문이다. 뿐 만 아니라 어떤 나라든 사상과 문화를 배우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언어를 충분히 이해해야만 했으며 펄 벅은 중국어를 먼저 배웠을 정도로 언어에 탁월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나이가 찬 후에도 미국에서 학위를 얻은 후 중국으로 건너와 미국인 남편과 함께 중국에서 선교사 활동과 영문학 교사 활동을 계속하면서 중국인들의 삶에 깊숙이 다가서게 된다. 이러한 그녀의 삶이 작품에 그대로 묻어났으며 중국인들을 이해하려는 마음가짐이 작품에 드러난 것이리라 생각한다. 그녀의 이러한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도 한 명은 중국인, 한 명은 미국인이었다. 즉 그녀의 유모였던 王 씨와 그녀의 어머니였다. 왕 유모로부터 중국 고대의 역사와오란은 아이들과 비럭질을 하면서 근근이 먹고 살고 있었다. 이 남쪽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북방에서 농사질을 하다가 곤궁해져 내려온 사람이 많았다는 것, 한 번도 본 적 없는 코쟁이들이 돌아다닌 다는 것, 그리고 머지 않아 무슨 큰 전쟁이 발생할 것 같다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는 항상 북쪽의 자신의 집과 그리운 땅을 생각했으며 오란이 살기 위해 아이들에게 도둑질도 눈감아주었으나 왕룽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땅을 가진 농민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자신의 아이들이 비럭질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도둑질이라도 하면 크게 호통을 쳤다. 그러던 중 어떤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왕룽은 큰 저택의 옆에 오두막집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그날 아침 큰 고함소리와 함께 깨었으며 어떤 무리를 따라 그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남들은 약탈을 했으나 그는 그들의 하는 양을 처다만 보고 있다가 어느 방에서 겁에 질린 뚱뚱한 남자를 보았고 그가 살려주는 대신 돈을 지불하겠다는 말을 듣고 돈만 있으며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돈을 받고 가족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 사이에 북 쪽의 자신의 고향은 많이 변해 있었다. 여전히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호사스럽던 황부자네 집은 거의 몰락 직전이었으며 자신의 토담집은 간신히 지붕만 붙어있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땅은 그대로였다. 변함 없이 자신을 기다려준 땅에 그는 다시 씨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근이 있을 당시 자신의 아내와 아버지를 위해 콩을 나누어 주었던 진서방을 만나 돈으로 산 씨앗을 담뿍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그는 계속 땅을 사들이고 경작하며 돈을 벌었으며 진서방에게 자신의 토지를 경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왕룽은 아내 오란이 목에 무언가를 걸고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 하며 그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것은 오란이 남방에서 왕룽이 돈을 받고 있을 때 그 건너방에서 발견한 보석들이다. 자신이 부잣집에서 기거했었으므로 부자들이 어떠한 산 분배 후 왕싼은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형들에게 토지는 필요 없으니 되도록 돈으로 바꾸어 달라고 부탁하고 자신의 돈을 챙겨 다시 남쪽으로 내려갔다. 왕룽이 죽기 전에 유언하였던 땅을 팔지 말라는 것은 그의 3년 상이 끝난 다음에 바로 깨어졌다. 왕이는 자신의 부유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버지가 남겨준 땅을 왕얼에게 팔았으며 왕얼은 장사꾼의 기질을 이용하여 많은 이자를 굴리며 돈을 벌고 필요없는 땅은 비싼 값에 팔아서 소작인들에게 돈을 뜯어내었다. 이를 제지하고자 한 것은 리화 단 한 사람뿐이었으며 그녀는 아직까지 자신에게 잘 해주던 왕룽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한 편 왕싼은 남쪽의 어느 노장군 밑에 있었으나 그 노장군이 젊었을 시절 말했던 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왕싼이 생각했던 것과 같은 거대한 이상의 실현이 아니었고 자신의 욕심만 채우려고 하는 노장군을 경멸하게 되었다. 그래서 기회를 봐서 자신을 따르려는 군사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키려고 계획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들고 아버지의 유산만이 이를 해결해 줄 수 있었다. 때 마침 부고가 들어왔고 유산을 받아 다시 군영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상인 새로운 세상의 건설과 그 건설의 주도적 인물이 될 자신을 생각하며 군자금을 확보한 후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대동하여 야밤에 남쪽의 군영을 탈출하였다. 그는 믿을만한 심복으로 언청이가 있었으며 스스로는 자신감에 차있고 자존심이 강했으며 훤칠한 키에 잘생기고 남자다운 얼굴을 하였고 성질이 불 같았기에 사람들은 그를 호랑이 같다 하여 왕후라고 불렀다. 그는 이것을 실행에 옮기기 전 믿을만한 부하가 더 필요했기에 두 형들에게 그들의 자식을 보내달라고 했다. 혈육은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형들은 서로 왕후가 크게 성공했을 때 자기 아들 때문이라는 것을 밝히고 싶다고 생각했기에 주저하지 않고 왕이는 둘 째를 왕얼은 첫째를 왕후에게 보냈다. 그리고 계속 군자금도 붙여주었다. 그러던 중 리화가 왕이와 왕얼이 왕룽쳐 나왔다. 그는 한동안 교관을 피해있어야 하므로 할아버지의 토담집에 가서 숨어있겠다고 했으나 왕후의 아들에 대한 희망이 깨어지면서 군벌의 자식이 아니라며 호통을 치고 다시 언청이가 따라주는 술을 마시며 괴로움을 달랬다.- 3부그러한 아버지를 보며 자신이 한 일이 과연 잘 한 일인가 되돌아 보았다. 결국 교관이 그에게 가르쳤던 것은 종국에 가서 아버지를 배반하고 그 군대를 혁명군을 위해 쓰라는 것이었으나 왕후의 아들 왕위안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아버지 왕후를 두려워하기도 하였으나 사실은 그 위엄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가 다시 미워져서 밤에 토담집으로 내려와 버린다. 그리고 난생 처음으로 자유를 맛보게 된다. 그가 원할 경우 농부들이 밭 가는 모습을 계속 쳐다볼 수도 있었으며 땅을 만지고 자연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는 조국의 자연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그를 곱게 쳐다보지 않았다. 그의 삼촌들인 왕이와 왕얼은 대지주로써 농민들의 피 같은 식량과 돈을 착취해갔기 때문이다. 결국 왕위안은 환영 받지 못하는 인물이 되고 어머니로부터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다시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진짜로 왕후는 안색이 나빠 보였다. 계속 술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심복인 언청이 만이 옆에서 힘든 듯이 앉아 있었다. 둘 다 늙고 약한 노인이 되어버렸다. 왕위안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연민의 감정을 느꼈으나 왕후가 그에게 결혼을 강요하며 속박하려고 하자 그는 분노를 터뜨리며 집을 뛰쳐나간다. 그리고 그의 또 다른 어머니인 학식있는 부인을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그곳에는 예전의 여동생과 백부인 왕이 역시 가족들과 그곳 해안 도시로 옮겨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으로 그는 향했다. 그 새로운 도시는 그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노부인은 온화한 사람으로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왕후에게는 걱정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글을 써 줄 것을 약속했다. 그의 배다른 동생 아이란은 아름다운 여성으로 성장해 있었으며 고 자신은 아버지에게로 떠났다. 왕후는 토담집에 죽은 듯이 누워있었는데 아직 죽지는 않았으나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듯 했다. 아직 비적 패거리가 남아있을지도 모르고 그 주변의 농민들이 자신이 그들의 땅을 다시 빼앗으러 온 줄 알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곧 노부인이 도착했고 메이링도 함께 인 것을 보고 놀랬다. 메이링은 왕후의 치료를 돌봐주었다. 왕후가 더 이상 기력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그날 저녁 그들은 토담집 밖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위안은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왕위안은 그녀에게 앞으로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4. 느낀 점먼저 앞에서도 적었듯이 외국인인 펄 벅이 중국인의 삶을 이다지도 정교하게 표현한 것을 보고 놀랐다. 솔직히 말해 이와 같은 중국을 이해하는 한 편의 소설이 다른 매체에 비해 중국인의 문화를 몇 배 잘 표현해 준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녀는 이 글을 영어로 잘 표현했을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동양의 문화를 사실적으로 표현해 준 그녀에게 감사하고픈 마음이 들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중국의 문화나 일본의 문화는 여러 매체를 통해 겉으로나마 이해하고 있지만 그 사이에 있는 한국의 문화는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호미 바바가 이야기 했듯이 문화의 다양함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화의 차이를 발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그녀의 글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펄 벅은 왕위안의 눈으로 중국의 문화와 미국의(서양의) 문화의 차이점을 적절히 묘사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다양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위 아래의 격차보다는 차이점으로 인해 발생하는 두 문화의 대등함으로 연결된 것 같다.그리고 대지를 읽고 중국인과 한국인의 많은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번에 처음 듣는 사학 수업이었고 이전에 중국 관련 수업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인지, 배경 지식이 미약했기 때문인지 그들의 삶을 묘사한 부분을 보고 무척 놀랐다1
Ⅰ. 들어가는 글대지를 읽은 후 독후감을 내는 날까지 며칠 남아있어서 ‘홍루몽’이라는 중국장편소설을 읽어보기로 생각하였다. ‘홍루몽’이라는 책에 대해 언뜻 들어보기는 하였지만 친구들 사이에서도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고 꽤 선정적인 책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궁금증이 생기기도 해서 세 권을 빌려 한 권, 한 권씩 읽어 나가는데 정말 낯뜨거운 장면이 많이 나왔다. 특히 1권의 앞부분에서 성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왜 이 책이 독후감 목록 중에 있었는지 의아해 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1권에서는 주로 여성과 남성과의 관계, 다시 말해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바라보게 되었으나 2, 3권을 읽으면서 중국인들의 일상생활에 대한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복선으로 나타났듯이 주인공의 가문이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을 보았을 때는 그 비극성과 그 비극성 가운데서도 왠지 그 뒷 이야기가 남아 있을 것 같은 운치를 남기게 하였다. 세 권을 모두 다 읽은 후에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왜 이 책이 독후감의 도서목록에 들어있었는지 그 타당성을 찾아 보았다. ‘홍루몽’에 대한 평가를 읽어 본 후에야 ‘아~ 그랬구나.’하는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따라서 앞으로 작가 ‘조설근’과 이 글의 당시 시대상황, 그리고 그 시대상황에 따라 ‘홍루몽’이 최고의 중국 고전소설로 칭송 받게 되는 내용에 대해 조사한 바를 약간 적어보고, 줄거리를 요약한 후에 느낀점을 적어보도록 하겠다.Ⅱ. 올리는 글1. 작가 – 조설근작가 조설근이 홍루몽과 같은 성격의 글을 쓴 배경에는 역시 그의 어린 시절의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는 명문귀족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나 자신의 代에 이르러서는 집안이 몰락하였으므로 소년시절의 호화로운 생활과 이후의 빈곤한 삶이 극적으로 대비를 이루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홍루몽과 같이 초기에 주인공 집안의 호화로운 삶과 후기에 가서 차차 몰락해 가는 모습을 자신의 경험과 빗대어 표현할 린 딸 영련이 행방불명 되고 집도 불타 장인의 집에 얹혀살게 된다. 그러나 곧 도인의 시를 듣고 인생무상을 느끼며 도인이 되기 위해 길을 떠난다. 후에 가우촌이 과거에 급제하여 진씨의 아내 봉씨와 교행이 살고 있는 마을로 오게 되고 사실을 알게 된 후에 그 집을 도와주게된다. 그리고 교행을 첩으로 맞이한다. 그러나 곧 가우촌의 곧은 행실을 눈엣가시로 알던 사람들의 술책으로 관직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도 집을 떠나와 이곳 저곳을 떠돌다가 ‘임여해’의 딸 ‘임대옥’의 가정교사를 잠시 하게 되는데, 임여해는 몸이 약하고 어미를 여읜 딸 대옥을 부인의 친정인 가씨 가문으로 보내기로 결정하고 가우촌을 함께 가도록 한다. 가우촌 역시 관직을 다시 얻기 위해 가씨 가문의 세력을 빌리려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임대옥은 영국부로 가게 된다.제3부 – 대옥과 보채, 영국부로 오다대옥이 영국부로 온 후 여러 집안 사람들을 만난 후 보옥을 보게 되는데 순간 그 모습에 반하게 된다. 이야기는 다시 진사은의 딸 영련에게로 넘어가는데 그녀는 어렸을 때 어떤 잡패에게 팔려 여기저기 떠돌다가 결국은 그 잡패의 계략으로 ‘풍연’이라는 자에게 팔리고 ‘설반’이라는 자에게도 팔리게 된다. 그러나 설반에게 먼저 가게 되고 후에 풍연이 와서 따지다가 설반에게 맞아 죽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가우촌이 맡게 되고 그녀가 곧 영련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설반이 세력가인 가씨 집안의 ‘왕부인’의 동생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씨집안에게 유리하게 판결을 내려주고 설반의 가족들은 영국부로 도주하게 된다. 이때 설반의 어머니 ‘설부인’과 여동생 ‘설보채’도 영국부로 함께 도주한다. 이들이 영국부에 도착했을 때 보채도 역시 보옥을 보고 첫 눈에 반하게 된다. 먼저 와 있던 대옥이 자주 이러한 보채와 보옥을 보고 질투를 했으며 보옥 역시 보채에게 마음이 있기는 하였으나 대옥을 더 좋아하였다.제4부 – 상사병에 걸린 가서그러던 중 녕국부의 ‘가용’의 아내 ‘진가경’이 큰 병 가경은 보옥과 친척들 손님들을 데리고 그 별채로 가서 이름짓기를 시작하였다. 보옥은 여러 이름을 대었으나 평소 아들의 행동을 방자하다고 여기던 가경은 한편으로는 그의 시짓는 솜씨를 자랑스러워 하면서도 계속 꾸짖기만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후비 원춘이 집으로 방문하게 되었으며 화려한 별채를 보고 이렇게 까지 화려하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하면서 가족들을 만나보며 회포를 풀었다. 그리고 원춘이 마지막으로 그 별채의 이름들을 고쳤으며 전체 이름을 대관원(大觀園)이라고 지었다.제8부 – 아늑한 밤과 고요한 낮궁중으로 돌아간 후비 원춘은 집안 일을 자세히 아뢰었으며 밤에는 황제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영국부의 보옥은 오랜만에 집으로 간 습인을 만나러 나갈 채비를 하였다. 그녀의 집에 도착해서 습인은 울고 있는 듯 했는데 그녀가 보옥에게 이제 영국부를 나오게 될 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보옥은 절대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 말하며 가지 말라고 부탁한다. 습인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보옥에게 앞으로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 것, 대옥과 보채에게 너무 자주 드나들지 말 것 등을 약조하였다. 사실 습인은 영국부를 떠날 생각이 없었으나 보옥을 위해 그런 일들을 계획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보옥의 아버지 가경의 첩의 아들인 ‘가환’이 등장하게 되는데 보옥의 세력을 시기 질투하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보옥과 대옥은 서로 사랑하면서도 싸우고 그러면서도 결코 사랑을 멈출 수 없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던 중 ‘상운’이라는 친척 아가씨가 놀러 왔는데 이 때 특히 대옥은 자신이 과연 보옥에게 어울리는 신부감인지 생각해 보고 사실 자신은 천애 고아라는 것과 질투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더욱 우울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이러던 중 가련의 딸이 홍역을 앓게 되고 희봉이 그 일에만 전념하게 되자 그녀의 남편 가련은 다관의 아내와 관계를 가지게 된다. 이 일이 그만 하녀 평아에게 들키게 되고 가련은 평아에게도 역시 잘 대해줄 것을 약속하고 평아와도 관계를 가진다.제9부 – 영국부 여인들의 밴대질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이를 목격한 보옥은 더욱 대옥을 그리워하게 된다. 그리고 대옥이 고향 소주로 내려갈 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고 혼절한 후 시름시름 앓다가 그 소문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자신이 대옥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 된다.제12부 – 낙엽 진 뜨락에 석양빛 비끼고드디어 마지막 장으로 대옥과 보옥의 애틋한 사랑의 결말에 대해 나오는 부분이다. 어느날 가경이 약을 잘못 만들어 먹고 죽어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후비 원춘 역시 훙서(薨逝)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듣고난 얼마 후 보옥은 자신이 늘 목에 차고 다니던 통령보옥이 없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보옥은 놀라며 여기저기 찾아보았지만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설반은 다른 지방에서도 살인사건을 일으켜 관아에 잡혀가게 된다. 통령보옥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찾지 못하고 보옥은 미친사람처럼 행동하게 된다. 대옥과 보채는 이런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고 보옥이 연극을 하는 것이라 마음을 달래었으나 만나 본 후에 안타까움을 없애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한 도사가 와서 보옥을 제정신으로 돌려놓으려면 금의 기운을 가진 사람과 혼례를 치뤄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그 금의 운명을 타고 난 사람이 바로 보채였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보옥 몰래 이 혼례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보옥이 보채와 결혼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반응할 지 몰라서 처음에는 대옥과 결혼하는 것이라고 거짓 소문을 퍼트린다. 대옥도 처음에 이 말이 사실인 줄 알았으나 자신이 아니라 보채와 결혼 할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몸져 눕고 죽기 직전 자신이 평소에 지었던 시와 소중히 간직하던 보옥의 손수건을 태운다. 이러던 중에서 희봉의 남편 가련은 새로이 첩을 몰래 얻어 놓았는데 희봉이 이 사실을 발견하고 계략을 써서 첩 ‘우이저’를 우선 자신의 거처 근처로 옮기게 하여 잘 대해 준다. 가련이 이 사실을 발견하고 걱정하며 돌아왔지만 생각외로 둘 다 잘 지내고 있길래 얼마 후 ‘추련’이라는 시녀를더러운 진흙으로 되어있기에 깨끗한 여성들에 의해 정화되어야 한다고 말한 부분에서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보옥이 평소에 하는 행동을 보더라도 다른 남성 등장인물들과 현저히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둘 째로 작가 조설근이 교묘하게 엮은 소설의 구성에 대한 부분이다. 특히 이 부분을 느낄 수 있었던 곳이 보채가 대옥과 보옥이 지내고 있는 영국부에 오게 되는 부분을 묘사한 부분이었다. 다시 말해, 보채의 오빠 설반의 행동에 의해 결국은 그 지방에 살지 못하고 영국부에 오게 되는 것인데 이때 영란을 등장시켜 가우촌과도 연관시킨 것을 보고 구성이 참 정교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또한 첫 부분에 나오는 경환선녀와 보옥의 만남에서 드러나는 많은 복선 부분도 구성의 탄탄함을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즉, 선녀들이 부른 홍루몽 12곡은 자신이 앞으로 엮어 나갈 홍루몽 책의 12부를 일컫는 것이었으며 보옥이 금릉성의 여인들의 운명을 본 것은 앞으로 일어날 영국부와 녕국부 여인들의 대사에 관한 이야기 들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탄탄한 구성이 있었기에 수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하는데도 불구하고 결코 헷갈리거나 이야기가 끊어진다 라는 느낌은 결코 들지 않는 것이다.셋 째로 각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성격과 양면성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주인공인 보옥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자신이 남자임에도 여성과 가깝게 지내며 그녀들의 삶에 많은 신경을 써주고 착한 부자집 도련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성적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시녀들을 추근대기도 하여 사건을 일으키지만 스스로 인륜에 어긋나는 행위는 절대 하지 않았다. 이는 친척들의 첩들에게는 성욕이 생기더라도 스스로 자제하였다는 부분에서 알 수 있으며 심지어 당시 다른 남성들이 결코 하지 않았을 것 같은 자신의 하녀 습인을 위해 일을 도와준다거나 그녀가 아플 때 다른 시녀와 시시덕 거리지 않는다든가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외에도 흥미로운 인물은 희봉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녀는 남편 가련이 다른 여성과 관계를 가질 때 심한 질투를 느끼며 강력하 11
1. William butler Yeats의 생애아일랜드의 시인이자 극작가였던 예이츠는 1865년 6월 13일 아일랜드의 더블린 샌디마운트에서 태어났다. 최초의 시 작품은 2편의 짧은 서정시 로 1885년에 발표되었다. 같은 해에 예이츠는 비술에 관심이 있는 단체, 즉 더블린 연금술협회의 결성을 도왔다. 1887년 가족이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자 예이츠는 ‘신지학협회’에 가입하였다. 이 협회는 신비주의를 통해 지헤와 형제애를 추구하는 국제적인 운동으로 점차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마술은 일상세계에서 멀리 떠난 상상의 삶의 한 방식이었기 때문에 그를 사로잡았다. 반면 과학의 시대는 혐오스러웠으며 천문학보다 점성술에 훨씬 관심이 많았던 신비주의자로서 자신이 시적 영상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주장했다. (1889) 에 수록된 초기시는 탐미주의 작품으로 아름답지만 난해하며 사소한 문제로부터 해방되고 싶어하는 한 영혼의 외침이었다.1889년 예이츠는 열정적이고 화려한 미모의 아일랜드 여인 모드 곤을 만났다. 그는 그 순간부터 “내 인생의 고뇌는 시작되었다”라고 기술하였다. 예이츠는 그녀의 사랑했다. 모드 곤은 그를 좋아하고 존경했으나 사랑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열정을 아일랜드에 아낌없이 바쳤기 때문이었다. 예이츠가 아일랜드 민족주의 운동에 가담했을 때 부분적으로 신념 때문이었으나 대부분은 모드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다. 1891년 논쟁의 여지가 많은 아일랜드의 지도자 찰스 스튜어트 파넬의 급속한 몰락과 죽음 이후 예이츠는 아일랜드의 정계가 희망을 잃었다고 느꼈다. 정치가 남긴 텅빈 공간을 문학, 예술, 시, 희곡, 전설이 채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에세이집 (1893)은 이런 목적을 향한 예이츠의 첫번째 노력이었다. 1896년 오거스타 그레고리 부인을 만나 더욱 진전되었다. 그레고리 부인은 귀족으로서 극작가가 되었고 그의 한 친구가 되었다. 예이츠가 아일랜드의 민속을 엄격하고 고매한 문제로 표현하면 순수한 시를 창작할 수 있고 개인적인 용어로 그 자신의 정체성에 접근할싶었다. 그 결과 1925년 의 초판이 출간되었다. 그러나 예이츠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몇 년간 계속적으로 연구하여 1937년 결정판을 냈다. 한편 그의 시는 날이 갈수록 기량을 더해가고 있었다. (1928)은 그가 고트에서 구입한 무너진 노르만 성의 이름을 따서 붙인 제목으로 그의 작품 중 가장 도도한 것 중의 하나이며 매우 노련한 예술가의 작품이다. 그렇지만 예이츠의 가장 위대한 작품들 가운데 일부는 그 뒤에 씌어진 (1929)로 나왔다. 예이프는 60대 후반에 이르러서도 계속 작품을 썼다. 그의 감정은 예전처럼 강렬했지만, 이 시기의 시는 대부된 상상력의 병적인 흥분 때문에 손상되었고 현실과 정의 사이의 균형도 불안정했다. 귀족적 스타일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독재적인 이데올로기에 봉사해 말년에는 파시스트라는 비난을 받았디-, 산문으로 된 소책자 (보일러에 관하여 On the Hoiler) (1939)에서 자신의 분노와 절망을 부패한 세상에 토로했다. 그는 아일랜드 상원의윈으로서 정치적 권력을 실질적인 것에 쏟았다.즉 검열, 레인의 그림들, 건강 보험, 이혼, 아일랜드어, 교육, 저작귄 럴호,아일랜드의 국제연합 가입 문제 등에 관심을 가졌다. 상원의 화폐위원회 의장이기도 했다. 예이프의 말년은 긴장의 연속이었었다. 그의 건강은 좋지 않았고 그래서 아일랜드의 습한 기운을 피해 여행을 다녔으나 은퇴하지는 않았다. 1936년 자신이 사랑했던 시이며 대부분 자기 친구들이 쓴 시모음집 (옥스퍼드 현대시 모음집 1892~1935, Oxford Book of Modern Yerse1892~1935) 가 발간되었다. 여전히 그의 마지막 연극 작품들을 쓰면서 예이츠는 그의 시 중 가장 귀에 거슬리는 시 (헌의 알 The Heme's Egg)을 1938년 완성했다. 그 후 1년도 채 되지 않아 그는 외국에서 죽었다. 아일랜드에 매장하기 위한 최종적인 준비는 성사될 수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의 로핀드륀에 뭍혔다. 그의 시신을 슬라이고에 매장하려는 의도는 1939년 가을 제그러나 그것은 무역, 국방, 외교권이 제외된 불완전한 타협이었다. 이 자치법Home Rule Bill에 의하여 형식적으로는 아일랜드 공화국이 선포되어 1949년 완전 독립에 이르지만, 북아일랜드 즉 얼스타의 6개 주가 아일랜드 공화국에서 떨어져 별개의 정부를 세워 영국 연방의 지배아래 남음으로서 아일랜드는 분열되어 오늘까지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3. William butler Yeats 의 문학에 드러난 사상예이츠의 문학에 대해 이해하면 그의 사상과 생활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정직하게 자기의 사생활을 시의 소재로 삼아 그것을 예술품이 되도록 한 특이한 시인이다.그는 초기시에서 신화 속의 인물이나 장미와 같은 막연한 상징적 이미지들에 매달려 추상적 상상 세계를 더듬다가, 1910년 `푸른 투구와 기타의 시편들` 이 후의 시에서는 당시의 사회문제 혹은 개인 생활에서 부닥친 문제들을 직접 소재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이츠의 시의 발전과 현대 시인으로서의 성장은 그가 시의 소재를 자기의 사생활에서 택하여 사물과 사건과 인물을 리얼리즘의 레벨로 끌어내려 구어체 언어로 제시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예이츠는 시는 머릿속으로 생각한 막연한 생각이어서는 안되고 몸으로 생활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시인이다.예이츠는 원래 몽상적이고 시적이고 자의식이 강한 반면 행동성은 약했었다. 그러나 그가 첫눈에 반한 모드 곤은 정치 운동에 인생을 바친 사람이었다. 그녀의 곁에 있기 위해 예이츠 역시 정치운동에 참가했으나 행동인으로 생활하면 자신을 부정하고 인위적인 자아를 가지는 것이고 결국 모드 곤에게도 속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래서 90년대의 예이츠 시는 행동과 주저, 정신과 감각의 중간 상태, 황흔의 불확실한 세계를 노래했다. 후에 극력 혁명 단체 등에 가입하지만, 정치 집단들의 혁명적이고 과격한 행동을 견디기 어려워 직접 활동에서 손을 뗐지만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정치문제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은 언제나 즉각적이고 민감하여, 그 결과가 그의 수많은 정치시 •사lloleness)를 이상으로 삼고서 흔히 무시되기 쉬운 육체적 세계의 인정과 수락이 전체성으로 가는 출발점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육체는 더러운 것이라는 dogma에 사로잡힌 Bishop은 Jane에게 늙은 육체를 버리고 영적인 곳인 'heavenly mansion'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Jane은 아름다움과 더러움은 양면이기 때문에 그 양면은 모두 필요한 것이라고 응수한다 '아름다운 것에는 퍼러운 것이 필요하다는 역설적인 진리는 육체와 영혼, 극 'bodily lowness'와 'heart's pride'의 양면을 지닌 인간 본질에서 나온 것이다.' 아름다운 것에는 더러운 것이 필요하다는 시인의 mask인 Jane의 말은 인간의 양면성을 지적하는 것으로, 이 양면성은 Yeats의 대립과 갈등의 세계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특히 마지막 두 행에서 Yeats는 Jane의 입을 통해 그의 이론적 철학을 요약하고 있다. '어떤 것이고 갈라지는 것'은 사물의 일면이어서 불완전하며, 선과 악, 육체와 영혼과 같은 것이 합쳐져야만 완전하다. Yeats는 이 완전성을 ‘Unity of Being’이라 표현하는데, 이 통합의 경지가 곧 조화와 영원의 상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Yeats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시를 쓰는 것이었으며, 시의 주류즐 이루는 사상은 두 개의 상반되는 의식의 움직임에서 발생하는 이원론적 갈등의 해설에 있었디·. 그는 극적긴강감이 부족하다는 초기의 단점을 극복하고 중기에는 보다 현실과 밀착된 시를 썼으며 이후 자아와 반자아의 갈등에 대한 조화를 추구 대상으로 삼아 더욱 성숙된 시 세계를 추구하게 되었다.이러한 가정을 거쳐 후기 시에 이르면 Yeats 자신이 생의 노경에 처하면서 Yeats시의 기본축을 이루는 상반물의 대립 양상은 육체와 영혼의 갈등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미 60세를 넘은 시인은 생동하는 육욕의 세계에 애착을 느끼지만 욕망을 수용할 수 없어 수없이 갈등하고 괴로워한다. 이런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영혼 세계를 , 즉 Yeats가 추구하고자 하는 존재의 통합을 구현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② THE Wll,D SWANS AT COOLEThe trees are in their autumn beauty,The woodland faths are dry,Under the October twilight the waterMirrors a still sky;Upon the brimming water among the stonesAre nine- and-fifty swans.The nineteenth autumn has come upon meSince I first made my count;I saw, before I had well finished,All suddenly mountAnd scatter『 wheeling in great broken ringsUpon their clamorous wings.I have looked upon those brilliant creatures,And now my lleart is sore.All's changed since I, hearing at twilight,The first time on this sllore,The bell-beat of their wings above my head,Trod witll a lighter tread.Ijnwearied still, lover by lover,They faddle in the coldCompanionable streams or climb the air;Thelr hearts have not grown old;Passion or conquest, wander where they will,Attend upon them still.But now they drift on the still water,Mysterious, beautiful;among what rushes will they buildBy what lake`s edge or poolDelight men`s eyes wh요소
‘이제 세계의 중심은 서양에서 동양으로 다시 돌아 온다.’ 아직 고등학교에서 사회수업을 받던 당시에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 세계지도를 펼쳐보면 세계의 중심은 아시아지역 그 중에서도 한국에 집중될 것만 같은 기대감을 가지곤 했다. 이런 기대감 속에서 아시아가 정말 세계의 중심에 서있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앞지를 수 있을까 생각하곤 했으며 역사적으로 서양의 발전과 과학화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한 때 아시아가 세계의 패권을 잡을 것이라는 말이 나돌다가 아시아의 경제위기가 찾아왔고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의 세계중심에 대한 이야기는 꿈과 같이 보여졌다. 하지만 이번 독후감의 책인 리오리엔트를 읽으면서 유럽과 미국이 세계경제를 잡은 시기가 불과 몇 백 년 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는 이론을 접하게 되고 놀라게 되었다. 솔직히 신선한 충격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한 방향으로 해석되어오던 역사를 사실로 믿고 있었던 한 사람의 아시아인으로서 이 책을 읽어나갔고 많은 생각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리오리엔트는 '동양문화권을 새롭게 보아야한다', '이제 동양문화권이 다시 뜨고 있다'는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문화가 문제인지 구조가 문제인지의 큰 틀 속에서 저자는 아시아 세계체제의 시각으로 동양을 다시 읽는다. ‘다양성 속의 통일성’, ‘생태계 중심적 이론과 그 실천’을 토대로 지금과는 달라진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한다. ‘서양의 발흥’, ‘자본주의의 발전’, ‘유럽의 패권’, ‘강대국의 흥망’, ‘동아시아의 기적’ 등을 글로벌한 관점으로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이 단순히 유럽 예외주의로 이룩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먼저 필요하다. 아시아는 최근 몇 세기 간의 우위를 점하지 못했을 뿐이며 근세까지만 해도 유럽의 우위였다는 여러 정황자료를 제시한다. 몇 가지 예를 통해 근세의 유럽에 대한 아시아의 상대적인 우월성을 증명할 수 있다.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 3세기 동안 중국 인구는 3배로 늘었다. 이 근세는 절대 유럽중심이 아니었다. 각 지역들간의 관계를 따져 볼 때 그 중심에는 중국이 있었고 유럽은 주변국의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 은에 대한 수요가 폭등하고 은 수입량이 증가했다. 이 시절 중국 대륙에 가장 많은 은을 수출한 국가는 유럽이 아니었다. 일본은 자그마치 30%에 달하는 은을 공급했고 한창때는 40%까지도 육박한 적이 있다. 세계의 유동성을 가능케 한 일본의 공헌은 다시 한번 되짚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일본이 중국에 대한 은 수출이 없었을 경우 세계사가 어떻게 되었을까. 또한 아메리카에서 은이 쏟아지면서 일본을 견제하지 않았다면 일본은 세계 은 시장에서 가장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하여 아시아 전역의 정치 및 경제를 지배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세계 통화체제라는 시각에서 보았을 때 중국이나 일본이 세계 경제에서 고립되어 있었다는 것은 사실에 반하는 터무니 없는 주장임을 입증할 수 있다.유럽은 세계를 상대로 공산품을 수출하는 산업중심지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유럽은 수출할 만한 마땅한 공산품이 없었다. 유럽은 무역을 통해 주로 수입을 올렸다. 1500 ~ 1800년의 3세기 동안 유럽이 생산하여 수출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상품은 화폐였다. 때문에 만성적 무역적자에 시달렸고 은이 유럽에서 아시아로 쉴새 없이 흘러 들어 갔다.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가 아니었다면 유럽은 세계경제에서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1400년부터 1800년까지 아시아, 특히 중국과 인도의 인구는 유럽 인구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아시아 인구가 급증했다는 것인 불어나는 인구를 지탱할 수 있을 만큼의 생산력 향상이 뒷받침 되었기 때문이다. GNP수치를 보면 1750년 전세계 GNP는 1,550억 달러인데, 그 중 80%가 아시아, 나머지가 서양이다. 1750년 세계인구의 66%를 차지한 아시아 인구가 같은 시기 전세계 GNP의 80%를 떠맡고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아시아인의 생산성이 유럽인의 생산성을 능가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유럽은 부족했기 때문에 동양은 그저 지지리 궁상의 아직은 머나먼 나라로 인식되었다. 레닌에 와서야 세계경제체제가 겨우 인정되었지만 그 또한 유럽중심주의자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다행히도 최근에는 블로트, 펄린, 호지슨등의 많은 학자들이 제대로 다시 동양을 이해하려한다. 호지슨은 모든 사람들이 서양주의 가정에서 벗어나 시공간의 영역을 파악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모든 유럽중심적인 관점의 한계는 사회문화, 생태, 경제 등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려는 가능성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1400년부터 1800년까지의 근세경제체제에는 세계차원의 분업이 존재했다. 여기서 동양의 쇠락 후 서양의 발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15세기 항해 이후 신대륙에는 '콜럼부스식 교환'과 '생태제국주의'를 통해 세계의 문호가 개방된다. 무엇보다, 신세계에서 들어온 금, 은으로 유럽의 자금사정이 호전되었다는 것은 근세사의 핵심 부분이다. 또한 유럽인이 신세계로 가져온 것 중에 말 설탕 등은 훗날 유럽 경제 활동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세계무역에서 중요한 네 가지는 지역주의, 무역 디아스포라, 기록의 일방성, 생태학 등이다. 이는 목적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집단의 문화적 정치적 경계에 따라 존재했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언제 어떤 형태로 존재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동양 대 서양의 무역에서 입은 무역적자를 은으로 메우다 보니 동쪽으로 향하는 은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거의 모든 유럽국가가 대금을 은으로 지불했다.18세기 무렵에는 대서양을 무대로 한 삼각무역이 아프로 유라시아 무역에서 중요 쟁점으로 떠올랐는데 영국은 제조업을 중심으로, 아프리카는 노예의 공급원으로 역할을 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파생무역은 상품운송, 금융, 그리고 노예무역이었다. 이와 비교해서 아프리카는 사하라 횡단 무역을 중심으로 개오지 조가비와 아프리카산 직물이 화폐로 애용되었다. 유럽은 우선 전체 수출에서 금, 은이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했다는 것만 봐도 구조적인 무역적자에 시달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럽은 했다. 이것에서 양으로나 비율로나 압도적 우위에 있던 것은 아시아 경제, 그 중에서도 중국이었다. 낮은 비용의 높은 생산성을 바탕으로 전 세계 은의 최종적인 배수구 역할을 할 정도였다.설탕, 은화에서 시작된 화폐경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경제유통의 중심이 된다. 은과 동은 중국에서 일본으로, 금은 일본에서 중국으로 흘러갔다. 이와 같은 세계경제 차원의 거래에서 화폐는, 그리고 이를 통한 경제체제의 순환은 세계 무역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상품 구입기능을 바탕으로 화폐는 결국 유효수요를 지원, 창출했으며 이 수요가 다시 공급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거시적인 측면에서 볼 때, 화폐의 생산과 수출은 무역수지 적자를 메우고 단일 세계경제가 유지되게 한 요인이었다. 새로운 지불수단은 새로운 유효수요를 창출했으며 이렇게 해서 아시아 각국의 국내시장의 경제가 활성화된다. 중국은 은본위제가 정착되면서 1620년대 이후 급속한 성장을 한다. 즉 외부로부터의 수요증대가 상업화를 진전시키고 농경 및 취락의경계가 확대 되고 생산자극, 인구증가로 이어졌다는 것이다.18세기가 끝나가는 지점에서 시작하는 400년은, 아시아에게는 절대적인 성장 발전의 돋움대 였을 것이다. 인구증가도, 생산도, 경제성장도 모두 유럽이 성장했던 속도보다 빨랐고, 세계 여느 지역보다도 생산성과 경쟁력에서 압도적의 우위에 있었다.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서 산더미처럼 이고 지고 들어온 유럽의 은도 아시아에서는 역부족이었다. 이렇게 아시아가 우위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제조업과 세계무역에서 두드러졌던 생산력과 경쟁력, 그리고 기술력과 경제제도의 뒷받침 때문이었다. 이런 모든 아시아의 성장은 단일한 글로벌 경제의 시장구조 및 역동성과 관련이 있었다. 나아가서 아시아의 성장에 관련된 증거자료들은 르네상스 시기를 거치고 산업혁명과 맞물려 유럽이 발전하였다는 기존의 고견들을 뒤집어주는 역할을 한다. 차라리, 유럽의 발전은 그 이후 1800년대 이후 상승곡선을 탔고, 그 이후 아시아와 유럽의 판도가 뒤바뀌었다는 말이 더 정확할 듯싶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아메리카의 화폐를 사용하였고,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생산기지와 수입원, 나아가서는 수출시장으로 활용하여 여기에서 벌어들인 막대한 화폐로, 유럽은 아시아의 부를 사들인 것이다. 다시 말해, 유럽은 아메리카의 금과 은을 가지고 아시아 제품을 구입하였으며 아시아의 지방무역에도 관여하였고 이것은 곧 바로 세계경제의 구조변화로 연결된다. 상대적인 공급과 수요의 차이는 세계 전체 속의 상호관계 속에서 지역마다 부문마다 다른 비교비용과 비교우위를 낳는다. 더욱이 빠르게 불어나는 인구와 농촌의 잉여 노동력이 도시로 대거 이동하면서 제조업을 위한 잠재적인 노동공급도 증대했다. 식민지와 무역이라는 수단을 통해 유럽 국가들은 인도로의 만성적인 자본유출 흐름을 역전시키기에 이르렀고, ‘세계의 공장’은 자유무역을 통해 ‘해외시장’을 마침내 정복했던 것이다.책의 두께에도 불구하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동안 믿고 있었던 진실이 진실이 아니게 되는 그 순간에 희열을 느껴서 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문학을 공부하고 있기 때문에 서양에서 Canon이라고 불리는 책들과 이름난 상들을 받은 저서들을 읽어보면 은연중에 동양에 대한 비하와 인종적 차별이 스며들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서양인들 스스로 세계의 중심을 이끌어 가는 것이 서양이라는 자부심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서양과 동양을 재조명해 본 결과를 살펴보면 유럽과 미국이 패권을 잡기 훨씬 오래 전부터 아시아 즉, 중국, 일본, 인도 등이 세계경제를 주도하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들은 아시아가 세계2차 대전 후 아시아만의 독특한 가치로 발전을 거듭해 오는 것을 보고 초기에는 아시아적 가치로 그들의 지적 궁금증을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 등 동아시아국가들이 서양의 뒤를 바짝 추격해 오자 아시아적 가치를 격하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아시아의 위기가 다가왔을 때 그 이전까지는 신기루에 불과하였다는 듯이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아시아의 가능성을
Ⅰ. 서론금세기에 와서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세인의 주목을 끄는 환경대참사가 여러 차례 있었다. 이들 중에 대표적인 사례들은 이탈리아에서의 쎄베조 화학공장사고(1976), 인도 보팔 시에서의 화학공장폭발사고, 구소련의 체르노빌 원자로사고(1986), 스위스의 산도스 화학공장창고화재사고(1986)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사고들은 한 국가가 책임을 다 짐으로써 끝나지 않는다.{ 전경휘, (독일 환경사법론), 법원사, 서울, 1998. p220환경문제와 파괴는 오늘날 전 지구적인 문제이다. 환경 분야에 있어서 남북한 교류,협력은 이념과 체제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이해에 부합되는 분야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대북지원을 통해 북한이 식량 및 에너지난을 해결할 수 있도록 협조하면서 남북간 신뢰를 구축한다면 비정치적인 분야인 환경 분야 사업의 효과를 극대화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진상문, (북한의 환경문제와 남북환경협력의 추진방안), 연세대학교 경제대학원, 1998. p1남북의 통일은 우리 민족 모두의 염원이지만 50여년 동안 서로 다른 체제로 분단되어 있었기에 통일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수많은 어려움을 초래할 것이다. 특히, 통일독일의 통합과정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남북간의 환경통합에 있어서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으로 전망된다. 6.15 남북 정상회담을 정점으로 남북 화해 분위기가 적극 조성되고 통일에 대한 구체저긴 논의가 진행되는 현재의 상황은 우리에게 독일 환경 통합의 문제를 다시금 고찰해 볼 필요성을 던져 준다. 특히 IMF 결제 위기 이후 남한에서 진행되는 신자유쥬의적 경제 구조 재편의 압박 속에서 진행되는 남북 경협은 통일 의 문제에 대해 좀더 근원적으로 접근해 볼 필요성을 요구하고 있다. { 송태수 「독일의 환경 통합에 대한 평가: 비용인가, 철학인가?」, 환경과 생명, 2001독일 통일이전 동독 전문가들이 동독 환경문제의 실상을 거의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은 남북간에 정치적, 경제적, 학술적 교류가 거의 없는 현 상황에서 남북한따른 명령’을 공포하여 모든 환경관련 자료 및 통계의 공개를 금지하였다. 그 결과 국민들은 물론 오염자들 조차도 환경문제의 현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권력 분립의 제약성과 시민 사회의 미발달에서도 환경 파괴와 관리 소홀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구동독에서는 권력 분립이 이루어지지 않아 통제하는 측과 통제받는 측이 여러 측면에서 동일한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한 지역의 물 공급 회사와 폐수 처리 회사가 실질적인 하천수 이용자이면서 하천수 오염자였는데, 하천 부문의 통제 조직, 곧 국가 하천 감독 기관은‘환경보호 및 수리(水利)경제부’장관의 관할 아래 있었다. 그가 기업 운영에 반대되는 결정을 내리면 자기가 맡은 생산 목표를 달성할 수 없게 되며, 하천 감독기관에 반대되는 결정을 내리면 환경보호법이 무용지물이 되었다. 계획 목표 달성에 가장 커다란 중점을 두고 있고, 환경 파괴를 감시할 수 있는 시민 사회도 미발달한 상태에서 담당 부처는 결국 후자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동독의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는 환경보호를 위한 투자는 단지 비용증가일 뿐 직접적 효용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여 환경보호를 위한 투자를 회피하였다. 특히, 동독은 서독의 복지수준을 따라잡기 위해 엄청난 자원을 소비하였고, 그 과정에서 외환 보유의 부족 등으로 인해 자립경제를 추구하는 것이 불가피했으며, 이는 환경개선을 위한 현대적 기술을 도입하는데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하였다. 환경개선에 대한 투자의 결핍으로 인해 동독의 산업은 자원을 더 많이 소비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환경오염도 더 많이 유발하게 되었다.환경보호에 대한 관심은 계획경제 체제에서 완전히 소홀하게 취급되었다. 즉 단기적인 계획 목표를 달성해야 했으므로 불량 시설은 현대화되지 못했고 경제적으로나 생태적으로 문제가 많은 시설들에서 나오는 유해성 물질이 처리 시설을 거치지 않고 환경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로 인한 전체적인 경제적 손실은 단기적으로 성취한 계획 달성의 성과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환경보호가 늦으면 늦을수록 추가 건설이 거의 없었으며, 이와 함께 동독에서 자동차에 의한 대기오염이 서독에 비해 절반 수준에도 미치지 않았다. 통일 전 동독지역의 대기 이산화황 총량은 서독의 대기의 11.5배, 먼지량은 8배에 달했고, 전체 산림의 36%가 황폐화 됐다. 이는 동독정부가 전력생산을 위해 오염저감장치를 부착하지 않은 채 석탄을 연료로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독일의 공기오염물 배출 추세, 1970-1988(1975년=100 기준){연도이산화황산화질소총분진일산화탄소탄화수소이산화탄소*************04103104*1*************00*************1**************************04*************93103자료: Rose-Ackerman 1995:22면*는 1989년 데이터임. 1988년의 이산화황과 산화질소의 배출 수준 비교{국가인구화석연료이산화황산화질소백만천조J(연간)10억J(연간1인당)킬로톤(연간)Kg/1조J(연간)Kg/(연간,1인당)킬로톤(연간)Kg/1조(연간)Kg/(연간,1인당)서독62*9,3641511,250133202,85030446동독16*3,7332285,2501,*************1자료: Rose-Ackerman 1995:22aus.*는 1989년 데이터임.{{{{{(2) 수질 오염1 북한북한의 환경오염 실태를 살펴보면 먼저 수질오염의 경우 대동강, 두만강, 압록강 등 북한지역의 모든 하천과 해안이 심하게 오염되어 있다. 평양의 식수원 대동강의 경우 서해갑문 건설이후 남포지역의 공장, 기업소서 나온 폐수가 역류하면서 악취가 심하게 나고 댐 상류에는 평균온도가 상승하는 등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진상문, (북한의 환경문제와 남북환경협력의 추진방안), 연세대학교 경제대학원, 1998.p2두만강 유역의 생태계파괴가 특히 심각한데 두만강의 오염은 강변 양쪽 주변의 식수난과 농작물 피해, 물고기 멸종 등 자연생태계 파괴를 가져오고 있다. 중국학계에 의하면 두만강에 살고 있는 물고기는 송어, 뱀장어, 연어, 산천어되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강창규, 「환경정책의 역사제도적 비교와 생태전략적 접근의 함의 - 미국과 독일의 환경 정책을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대학원 행정학과, 1999. p71-723 공동1970년대부터 동·서독간의 경제 및 문화 교류가 추진되었지만 동·서진영의 대결은 양 독일이 협력하는데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기본조약 제 7조에 의해 양 독일은 환경보호 영역에서도 협력해야 했지만 1970년대의 냉전 때문에 궁극적 합의를 도출할 수 없었고, 1982년에야 비로소 개별적 합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1987년 9월 8일 양측은 모든 환경보호 구역들에 관한 정보교환을 통해 상호 협력한다는 내용의 환경협약에 서명하였으나 동 협약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실제로 거의 이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 양 정부는 서독의 재정적 지원에 의해 동동 지역에 6개 환경복구 사업을 실시하게 됨을 공동으로 발표하였는데 이에 따라 동·서독을 가로질러 흐르는 엘베강의 중금속 오염저감과 공업지역의 스모그 저감 등을 우선적으로 진행하였다.{ 조승국, 통일 환경통합의 사례와 교훈 ,『북한 인프라 구축을 위한 남북 환경. 에너지 경협방안세미나 中 제 3주제』, 국회환경경제 연구회, 교려대학교 경제 연구소(공편), 2000. p5(2) 북한과 남북공동1 북한북한은 공해문제를 비롯한 제반 환경문제가 자본주의의 체제가 갖는 소산으로 선전해 왔으며 이러한 문제는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라고 주장해 왔기 때문에 북한 환경문제에 관한 자료나 정보의 부족은 당연한지도 모른다.한편 북한은 아직까지 환경에 대한 법적, 제도적 장치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이며 환경에 대한 전반적인 의식도 극히 낮은 수준으로 평가된다. 북한은 1986년 환경보호법1997년 8월 26일에는 평양에서 1977년 8월에 장립되었다는 환경보호 연구소 창립 2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고 한다. 연구소는 그 동안 평양의 주요 산업지구들, 대동강과 압록강 두만강 유역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환경을 조사연구소를 폐쇄하지 않고 폐광지역의 효율적인 오염방지대책, 화학공장지대의 생물학적 복원방안, 사막화된 지역의 생태계복원대책, 오염지역 정밀조사 등을 맡도록 했다. 정부는 연간 1억2천 마르크라는 막대한 재원을 이 연구소에 투자하고 있다.{ {http://chonnam.chonnam.ac.kr/~chgmin/environ/ddr.htm구 동독의 환경문제 해결▣ 구동독 지역 재정지원정화를 필요로 하는 지역은 불행히도 불규칙하게 분포되어 있었는데 오염지역으로 의심이 가는 구 동독 지역은 8만 곳 이상이었고 1995년에는 그중 7만 곳 이상이 파악되었다. 구 동독지역에 산재해 있는 오염지역은 주로 페기물 저장소, 페기물 매립지, 중화학공단, 군 주둔지, 유해물질 저장소, 갈탄 광구가 있는 지역, 에너지 관련 지역 등인데 이들의 정화사업에는 엄청난 비용이 소요될 것이다. 이런 지역으로 라이프치히/비터펠트/할레/메르제부르크/만스펠트 공업지역, 광산.에너지 지역인 니더라우지츠, 작센과 튀링겐의 우라늄 광산지역, 그리고 메클렌부르크-포에포메른의 해안지역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1993년 말 현재 국방부는 구 동독지역의 소련 서부전투군단(WGT)과 구 동독 국민방위군 주둔지역에서 일어난 심각한 페유 유출 ,각종 군사화학물질의 무분별한 관리로 인한 유독물질 및 방사능의 누적을 고려해 이들 지역을 심각한 과거오염가능지역으로 추가 지정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통일 교섭이 이루어지고 있던 1990년 9월 서독연방환경부는 구 동독지역의 생태적 복구와 재건을 위한 개괄서(Eckwert Paper)"를 작성하였는데 이 개괄서는 동독지역의 환경복구를 위한 일련의 행정지원책으로써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공동으로 시행해야 할 긴급대책과 장기계획을 제시하고 있다.이 개괄서가 제시하는 긴급대책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구 동독 지역의 식수개선 대책수립과 리터당 90mg 이상의 질산염이 추출되는 우물의 페쇄* 스모그 방지를 위한 스모그 조기 경보체제의 도입.* 더 이상 복구가 불가능한 공업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