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와 함께한 짧은 여행-『석가모니(문태식 지음)』를 읽고 난 후3월 20일 月, 힘겨운 동반이 시작되다.허겁지겁 교실로 향한다. 땀방울이 맺혀있는 이마를 살짝 가리면서 교실로 들어온다. 많은 설렘을 가지고 자리에 앉는다. 교수님께서 아직 오시지 않으셨다. 그 사이 재빨리 사들 고온 빵과 우유를 먹는다. 왼쪽에는 싱긋 미소를 보이는 학생이 있는 반면, 오른쪽에는 졸음과 싸워 결국 항복하고 만 학생이 있다. 인간 박물관이 따로 없다. 교실을 꽉 메운 학생들 하나하나마다 특징적인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을 조심히 관찰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누군가 앞문을 열고 들어온다. 교수님이시다. 월요일의 첫 수업시간이 완벽하게 시작되는 순간이다.오늘은 따분한 발표를 들어야만 할 것 같다. 잠자리에 들고 싶어 하는 눈살을 억지로 들어 올려 보면서 알아듣기도 힘든 표현들이 허공에서 맴돌다 사라져버리는 광경을 지켜본다.더 이상의 고통은 없기를. 이것이 불교가 추구하는 이상적 목표가 아닐까. 발표가 끝이 나고 교수님께서 결정적인 발언을 하신다. 듣기에도 너무 많아 보이는 과제에 대해 차분한 어조로 설명을 하고 계신다. 첫 출발이 너무 버겁기만 하다. 컴퓨터 앞에서 그 과제를 작성하고 있는 나의 표정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다. 나에게 지금 당장 할애된 시간은 앞으로 40여분. 그 시간동안 내가 궁금해 하는 그 표정을 완벽하게 찾아낼 수 있을까? 현재 나는 불교가 시작된 역사에 대해서 듣고 있는 중이다. 오늘 밤 과제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앞자리에 앉아 있는 덥수룩한 뒷머리를 응시하고 있는 중이다. 혀끝에 남아 있는 아주 작은 빵 조각을 음미하고 있는 중이다. 형언할 수 없는 권태감을 몸소 느끼고 있는 중이다. 저마다 따로 따로 행동하고 있는 감각들은 수업이 끝나서야 일제히 하던 행동들을 멈춘다. 그리고 가슴 속 깊숙이 응축된 한 마디의 말이 입 밖을 뚫고 나온다. “아 답답해…….”강의실 밖을 당장에 뛰쳐나온다. 봄을 알리는 수많은 것들이지하철에서 싯다르타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비범한 출생을 뒤로 마야 부인을 잃는 비극을 겪게 되지만, 궁전에서 아무 걱정 없이 호화호식하기 때문에 궁전 밖에서 일어나는 고통과 죽음, 슬픔 등을 보지 못한다. 어쩌면 이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한 나라의 왕자가 곁에 없어진다는 사실을, 그의 아버지가 비통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훗날 싯다르타가 크게 일반인들을 구제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예언을 통해서 아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인위적으로 막으려고 하는 싯다르타의 아버지는 꽉 막혀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부모들은 단지 자식을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서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석가모니의 아버지가 보인 권위주의적인 면은 내가 책을 읽으면서 치를 떨었던 부분이다.하지만, 싯다르타의 두 눈에는 이미 고통과 번뇌, 아픔과 노화 등 물리적으로 거역할 수 없는, 인간이 직면하게 될 것들이 보여주는 고통의 모습들이 단단히 박혀있다. 그에게 목표라는 것이 생기게 된 것이다. 얼마나 신나고 즐거운 일이 아닌가! 그 꿈이 지나치게 원대할 수도 있겠지만, 그가 사춘기 시절에 가진 그런 생각들은 나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한다. 그 때 그 시절, 오직 물질적인 집착에만 신경을 곤두세웠던 나였다. 맛있는 군것질거리와 친구들과의 잡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이런 것들의 고리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었던 나였다.하지만, 싯다르타는 벌써 그 시기에, 이러한 보통 인간들이 겪는 것들에서 어떻게 인간들이 걱정 없이 자유롭게 그러한 것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고민했으니 그 징조가 알만하다. 물론, 친구들과의 소중한 잡담과 맛있는 군것질거리가 부질없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짧은 순간의 행복이자 도취일 뿐, 그 이상을 얻을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죽으면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싯다르타의 출가 결심은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상당히 존경할만한 부분이 아닌가 싶다.벌써부터 싯다르타의 결심에 내 마음까지도 굳어진다. 하지만, 배에서 나는 꼬약간 어처구니가 없게 느껴졌다. 자신 또한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후에 출가를 했고, 만인을 구제함에 있어서도 그렇게 늦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라후라에게 일찍 출가를 하도록 권유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결국 석가모니의 아래로 들어간 라후라가 수행을 잘 할 수 있었을까? 역시나 아니었다. 게으름을 피우고, 아직 마음에 일어나는 사사로운 욕망들을 이겨낼 수 없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에 대해 꾸짖기 보다는 라후라에게 삶의 바른 이치에 대해 간접적으로 깨닫도록 한 석가모니의 행위이다.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서 말이다.“라후라야, 나의 발 좀 씻어 다오.” 라후라는 무릎을 꿇고 석존의 발을 씻었다.“라후라야, 너는 이 물을 마실 수 있겠느냐?”“석존이시여, 어찌 그 물을 마시라고 하십니까?”“왜 마실 수 없느냐?”“그것은 발을 씻은 더러운 물이잖습니까?”“라후라야, 이 물도 처음에는 맑은 물이었다. 하지만, 자기주장대로 되지 않는 대로 성을 내는 진에와, 올바른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인 우치와, 자기 물건에 대해 쉽게 만족하지 못하는 탐욕과 같은 삼독을 가슴에 가득히 안고 있다면, 이 더러운 물과 다를 바가 없지 않느냐?”)사문인 라후라에게 수행할 생각이 없다면 이와 같은 더러운 물이 담긴 그릇, 즉 마음이 더럽혀진 상태를 라후라에게 일깨워주기 위해 한 말이었다. 석가모니는 라후라를 아들이 아닌 한 사람의 제자로서 깊은 진리를 이해시키기 위해 누구보다도 노력한 흔적이 나타난 대목이었다.그 후, 나는 학교에서 자아와 명상이라는 수업을 듣게 되었고, 마침 싯다르타의 출생과 수행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싯다르타가 수행 길에 이르기 위해 괴로움을 견디면서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방법과, 쾌락을 즐기며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방법 중 고민을 했다는 이야기였다. 중요한 것은 괴로움을 느끼는 근원, 쾌락을 느끼는 근원은 모두 육체에 있다는 것. 따라서 영혼이 한 순간 머무는 육체를 상대로 깨달음을 얻기 보다는 정신적인 상태, 즉 마음의 수행을 선택한 당시악행 등 말이다. 하지만 이미 마음을 한 곳에 정하고 진리의 자리에 들어선 싯다르타에게 그러한 것들은 한낱 연기와 같이 잠깐 머물렀다가 사라질 뿐이다. 그리고는 광채를 내며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 아! 그 얼마나 영광스러운 순간인가!인류 최초의 인간적인 구원자가 탄생한 순간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에서는 싯다르타가 최고의 깨달음의 지혜인 무상정진의 도에 이르렀을 때, 새벽 별이 반짝였다고 한다.지금 나는 싯다르타와 함께하는 동반자로서 그 새벽 별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인간의 역사가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것은 우주에 박혀있는 새벽 별일 것이다. 많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그 존재를 통해서 어떻게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깨달았을까? 나와 같은 보통 사람들은 무심코 자연을 넘기기 쉽다. 싯다르타는 동쪽 머리 위 새벽 별의 무한함 속에서 자연이 지닌 영원이라는 것에 대해서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나뭇가지가 바람을 따르듯이』)의 저자 고산스님도 그의 책에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같은 날, 같은 새벽, 같은 별을 보면서도 싯다르타가 느꼈던 성도를 느낄 수 없다고 말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일상생활이 주는 유혹에 빠져 진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산스님은 이러한 생각을 “우리는 아직껏 샛별을 등지고 어둠 속을 헤매고 있을 뿐이다”라고 표현했다. 그렇다. 내가 아침에 오면서 했던 생각들. 그냥 일상생활의 반복되는 하루에 묻혀 살아가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작은 행복들을 찾는 것. 그러한 것들에 잡혀서 고산스님이 이야기하는 성도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성도를 느끼기 위해서는 일상생활의 그물에서 벗어나 조용히 명상에 잠길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나에게 이러한 용기가 아직 있는지는 의문이다.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오는 밤길. 그 명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용기가 아직 없다는 나 자신에 대해 상당히 부끄러움을 느낀다. 머리 위는 왜 이렇게 깜깜한 것일까.‘그렇지만, 석가모니는 알겠지……. 깊다. 그의 말씀에는 불교와 인간 수업 시간에 공부한 연기(緣起)의 개념도 있고, 중도(中道)의 개념도 있다.게다가 키사는 여성이었다. 불교계에서도 성차별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의심을 품었지만, 키사의 귀의는 이러한 의심이 부질없는 것임을 드러내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다만, 석가모니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여성보다 남성이 많은 이유에 대해서 여성이 출가를 하면 힘든 고행과 수행의 순결을 유지하기가 힘들 것이라고 본 것이다. 어떻게 보면 여성의 능력을 천시하는 듯이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여성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이 승단에 입단할 경우에 주변에서 일어나는 문제점들을 걱정한 것이다.여성자체가 남성수행자들에게는 유혹이다. 심지어 수행 중 일어나는 음욕을 참기 힘들어 자신의 생식기를 잘라버린 한 비구도 있다. 그에게 물론 석가모니는 이렇게 말했다.“그는 잘라 버릴 것을 잘못 골랐구나.”)수행자가 버려할 것은 마음속의 욕망이지 육체적인 것이 아닌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일이 벌어지니 여성의 출가는 당연 수행자들에게 반가울 것이 못 되었던 것이다.하지만 진정한 수행자들은 이성에 대해 느끼는 육체적인 반응에 집착하기 보다는 그러한 생각이 일어나는 마음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모두가 다 같이 한 자리에서 참된 수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석가모니도 그랬듯이 말이다. 물론 여성들은 모두 석가모니의 수행을 방해하기 위한 악의 형태들이었지만 말이다.그리고 키사외에 또 하나의 여성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녀는 바로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이다. 그를 낳고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난 그녀. 책에서는 석가모니의 마지막 설법이 그녀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수미산 꼭대기에 있는 도리천에서 마야부인과 만난 아들의 한 마디는 열반을 얻으라는 것. 그리고는 그 자신이 열반에 들게 된다.감동스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는 데, 어머니를 위해 마지막으로 설법을 하고 초연한 자세로 열반에 이른 석가모니는 이 시대의 진정한 구원자가 아닐까 싶다.그렇게 석가모니가 열반에이다.
‘무정’한 사회에 전하는 힘찬 목소리-이광수의 『무정』을 읽고나서1910년, 그 끔찍했던 순간은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국권을 상실함으로서 언론을 비롯한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모두 빼앗기고 헌병 경찰 통치가 이루어졌던 때로 기억된다. 교과서를 비롯하여 수많은 역사책으로부터 이러한 내용을 습득하였지만, 정작 그 시대를 살았던 많은 조상들의 삶을 몸과 마음을 통해 진실로 느끼지는 못했다. 그 때의 삶은 그냥 단순히‘혹독하고 힘든 삶’,‘독립을 향한 끊임없는 투쟁의 삶’등으로 여겼다. 이와 같은 모습들의 삶을 살았던 당시 조상들은 하나같이 뿌리 깊은 유교사상에 메여있어 고지식한 틀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더한다.하지만, 이러한 나의 좁은 생각의 틀을 확실히 넓혀준 책하나가 있었으니 흔히 고등학교 시절이라면 이름정도는 들어봤을, 그러나 깊게 탐구하지는 않았을 이광수 작가의 『무정』이라는 책이었다. 나 역시 대부분의 다른 학생들과 같이 수능시험위주의 공부방법 때문에 단편소설이 아닌 장편소설은 간략한 줄거리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한 권의 장편소설이 지닌 주제가 실로 어떤 문장으로 표현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번에 『무정』을 필독도서로 읽게 되면서 단순히 내가 알고 있었던 『무정』의 주제의식이 이렇게 흥미롭고 깊게 표현이 되는 것을 보고 적잖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그 주제의식이라 함은 당시 조선 사람들이 지녔던 기존의 봉건적 사고관을 버리고 서구의 새로운 근대사상을 비롯한 근대문명까지 수용함으로써 국력을 배양시키자는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주제의식을 굉장히 흥미로운 인물들을 대신하여 역설하고 있다. 형식을 비롯한 선형, 영채, 병욱 그 외의 여러 인물들을 통해 당시 숙명적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도록 만든 구시대의 가치관을 계몽하고자 한다. 어떻게 보면 이광수 작가의 『무정』은 평범한 애정소설로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이 소설은 기존이 지녔던 애정관의 잘못된 점을 꼬집고 있는데다가 마지막 결말 부분에는 오히려 네 인물들이 조선인들의 계몽이라는 사명을 약속하는, 실로 거대하고 도전적인 결말을 보여준다. 이러다 보니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주인공들의 애정관계는 작품을 읽으면서 초점을 맞춰야 할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책을 읽으면서 또 한 가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책 속의 인물들이 지닌 생각들이 지금 시대에도 현저히 존재하는 문제들을 꼬집고 있고, 또 도움이 될만한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려 100년이 가까운 전 시대에 이와 같은 생각을 이미 가지고 있었던 작가의 놀라운 면을 엿보자 내가 여태껏 잘못 알고 있어도 한참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깊이 반성하게 되었다. 이 책을 이렇게 실제로 읽기 전까지 1910년대 ‘계몽’이라고 해봤자 얼마나 진보적인 사상을 깨우치려했을까 하고 비아냥거렸던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이 지닌 가치관 하나하나가 정말 가슴 속 깊숙이 못 박혔다.대표적으로 혼인문제를 한 번 살펴보면, 요즘에도 상대방의 외형적 조건에만 이끌려 주저 없이 혼인을 하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유명 연예인들의 결혼 생활을 보면 더욱 그런 것 같다. 순식간에 만나서 불꽃같은 사랑을 하고 만인 앞에서 호화로운 결혼식을 올린 뒤 얼마 안 가서 그 때는 제정신이 아니었다며 서슴지 않고 이혼을 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 우리나라에 한해서 아직도 부모님의 무조건적인 주선에 의해 원치 않는 결혼을 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 이러한 현실은 상류층들이 폐쇄적인 혼인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불과 몇 년 전, 한 대기업의 회장 딸이 결혼 반대에 부딪혀 자살을 한 사실은 이러한 상류층사회에서 권위를 잃지 않기 위해 원치 않는 결혼을 주선하는 풍습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위와 같은 혼인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혼인을 약속한 상대방이 서로에게 외형적으로 뿐 만아니라 정신적인 사랑을 느낄 수 있느냐는 간단하지만 심오한 사랑의 섭리에 맡겨야 한다. 하지만 기존 우리나라의 봉건적 혼인제도는 부모님이 혼인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혼인 당사자는 싫든 좋든 부모님의 의사에 거의 순종적으로 따라야 했다. 이러한 타율적 혼인관의 문제점을 이 책은 잘 꼬집고 있고 새로운 혼인관이 성립되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나는 형식이 선형을 앞에 두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아내가 되었으니까 지아비를 사랑합니까, 또는 사랑하니까 아내가 됩니까?”)형식이 선형에게 묻는 이 질문은 결혼 후에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인가, 사랑이 있고나서 결혼이 이루어지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자 동시에 그동안 당시 조선사회가 지녔던 혼인관에 대한 도전인 셈이다. 사랑이 없다면 결혼도 없다. 그것을 개인과 사회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외형적 조건을 떠나서 충분한 정신적 교감이 서로에게 있을 때, 서로가 서로를 정말 영원히 아낄 수 있다고 확신할 때 비로소 혼인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소설 또한 이러한 육체와 정신이 합쳐진 사랑을 추구하고 있고 조선의 혼인제도를‘수백 년래 사람의 가슴 속에 하늘에서 받아 가지고 온 사랑의 씨를 다 말려 죽이는 흉악한 혼인제도’라고 표현하고 있다.)혼인문제 이외에 내가 눈여겨 본 부분은 당시 조선에서 시행되고 있었던 교육제도 부분이었다. 이 소설에서 형식은 경성학교의 교사로 등장한다. 권위주의적인 다른 교사들과 한 자리를 같이 하지만, 그는 약간 다르다. 학생들의 의사를 되도록 존중해주고, 수업 시간에 삶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학생들과 조금씩 이야기하는가 하면 학교에 잘못된 일이 있으면 학감 앞에서 가끔씩 위험한 발언도 꺼내는 인물로 등장한다. 이러한 인물을 이상적 교사형으로 내세웠다는 것은 기존 권위주적인 교육체제에 대한 또 다른 도전이다. 이 소설에서는 형식적으로 가르치는 옛 지식보다는 실용적이면서 학생들이 앞으로 자라나서 살아가는데 진정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식을 가르치는 것을 교육이라 말한다.나는 덧붙여 교육이라는 것은 이러한 참된 지식을 학생들이 흥미를 가지고 자발적으로 탐구할 수 있도록 사랑을 가지고 학생들을 이끄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라고 말하고 싶다.『무정』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취지로부터 어긋난 현 사회의 잘못된 교육제도에 대해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보았다. 현재 시행되는 교육제도를 봐도 획일화된 하나의 틀 안에서 무조건적으로 지식을 받아들이는 교육현장이 안타깝다. 실제로 얻게 된 지식을 충분한 시간을 두고 끊임없는 탐구와 생각을 통해 학습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지만 요즘 교육 현장에서는 학생들에게 단편적인 지식만을 빠른 시간 내에 흡수시키고 있다. 나 또한 이러한 교육제도의 희생자라는 것이 안타깝지만 책을 읽는 와중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며 좀 더 주체적으로 교육현장에서 내 능력을 발휘해야겠다는 일종의 다짐을 한 것은 내 스스로도 자랑스럽다.또한 이 소설에서는 한 시대의 변화를 위해서 교육이 가장 중요한 수단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형식은 이와 관련하여 조선 사람을 전혀 새 조선 사람을 만들려면 교육밖에 없다는 말과 특별히 사회제도와 윤리학을 공부하는 데에 힘쓸 것이라는 말을 한다.) 이렇듯 교육이 가지는 힘은 실로 위대하며 그야말로 소리 없는 혁명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형식이 특별히 사회제도와 윤리학을 공부하겠다는 것은 기존의 사회제도와 윤리의식이 상당한 문제를 안고 있었고 교육과 관련하여 의식전환을 이루기 위한 중요한 외적 장치들이었기 때문이다. 소설 속 형식의 이러한 생각은 몇 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시사하는 바가 역시 크다. 현재 사회를 보면서 형식이 말했던 생각들이 아직도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봉건적 윤리관으로 인한 각종 문제들이 현실에서 그대로 일어나고 있고 봉건적 가치가 현재 사회제도에도 곳곳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현재에도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하나의 거울과도 같은 것이다.
비극이 낳은 사랑-고전 영화 68년 작 을 중심으로 와 96년 작을 비교하다.이미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비극적 사랑이야기로 유명한 은 1998년 존 매든 감독의 상상력에 의해서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탄생한다. 그렇다고 이 지닌 원작의 성격에 과 같이 괴상한 변화를 준 것은 아니다. 어떤 과정과 계기에 의해서 아름다운 비극이 탄생했는지를 셰익스피어의 생애에 조명해서 다루게 된다. 그 결과 아카데미가 주목했던 감동적인 작품 가 탄생하게 되었다. 여기서 고전 이 갖는 예술적인 의미와 영화적인 장치들, 그 외의 텍스트들이 어떻게 에서는 변화되었는지에 대해 탐구해 보려고 한다.문제에 깊이 들어가 보기 전에 은 프란코 제페릴리 감독의 1969년 작품)이 아닌 버즈 루어만 감독의 1996년 작품임을 밝힌다. 물론 고전에 비해 많은 부분이 달라졌지만, 와 비교를 해보는 것 또한 새로운 시도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고전을 중심으로 96년 작 과 가 어떻게 다른 면을 보이는 지 지금부터 살펴보자.우선 두 작품 모두 눈에 띄는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멋진 영상으로 그리고 있다. 시끌벅적한 기타 음과 성가 음이 조화된 96년도 작 을 보고 있노라면 벌써부터 마음이 들썩인다. 세련된 화면과 강조되는 색채들, 아주 빠른 장면전환과 어울리지 않는 듯하지만 최상의 조화를 이루는 로미오의 대사들. 이 모든 것을 갖춘 은 나의 두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아무래도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는 고전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탄생시킨 감독의 창의성이 엿보인다. 그렇다면 에서 나타나는 창의성은 어떠한가? 물론 옛날 의상과 분장, 무대, 배경 등 거의 모두가 고전의 느낌을 그대로 살리듯 만들어졌고, 영화 속의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또한 비올라라는 여성이 무대에 올라서 멋진 연기를 펼치는 놀라운 장면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각본을 맡은 마크 노먼의 창의성이 그대로 영화에서 묻어난다. 셰익스피어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신기하고 그럴 듯하게 보이는 것 또한 큰 매력이다.위의 형식적인 부분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부분이 아닐까 한다. 등장인물들의 변화를 보더라도 고전에 비해서 많이 달라진 96년 작 은 극명하게 변화된 인물들을 보여준다.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은 로미오의 벗이자 슬픈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머큐쇼였다. 여장을 즐기는 흑인으로 설정해 코믹하면서도 고전의 틀을 자유롭게 깨버리는 멋진 말투와 행동을 지닌 인물로 등장한다. 고전에서 머큐쇼의 죽음은 친구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더욱 애절하게 화면으로 나타나지만, 96년 작에서는 싸늘한 분위기에 멍한 친구들의 표정이 그의 죽음을 맞이한다. 에서는 비올라라는 가상의 인물이 굉장히 의미 깊었다. 꼭 영화 속에서 로미오의 연인인 줄리엣을 보는 듯했다. 감독의 의도였든지 간에 영화는 에서 꽃피었던 사랑을 셰익스피어가 경험했던 것처럼 보여주기 때문에 비올라라는 인물은 영화 감상 내내 내 눈을 혼란케 했다. 는 마치 마법처럼 영화 같은 사랑이야기를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아리송한 상황을 만들어 낸 것이다.이렇게 영화 속의 감명 깊은 등장인물의 가치관을 이루는 배경에는 무슨 심오한 철학이 숨어 있을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96년 작 에서 등장한 아리따운 소녀 줄리엣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고전의 올리비아 핫세가 연기한 줄리엣에 비해 더욱 저돌적이면서 톡톡 튀는 줄리엣은 원치 않는 결혼에 목숨까지 포기하려는 인물이다. 고전이나 96년 작이나 외부 요인과는 상관없이 애처로운 죽음을 로미오와의 만남으로 이끄는 여성이다. 상당히 앞선 사고를 가지고 있었으며 시대가 내놓은 비극적 사랑을 꾸며나간다. 하지만 의 비올라는 비슷하면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그녀 또한 절세미녀인 데다가 시적인 감성, 순수한 마음을 지닌 인물이다. 하지만 끝까지 전통적 가치관에 매여 사랑을 포기하면서 셰익스피어와의 이별을 감행한다. 결국 고전과 96년 작 이 보여주는 이별과는 약간 다르고, 이러한 부분은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성격을 지녀왔던 가 결정적으로 성격전환을 이루는 부분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영화가 일관성이 없다기보다는 지나치게 형식적인 탈피를 피하려는 감독의 의도로 해석해 볼 수 있다.그 다음으로 영화에서 등장했던 푸른 물결을 떠올려 본다. 에서는 케퓰렛가의 미녀 줄리엣의 방을 넘어서 맑고 투명한 수영장을 보여준다. 그 수영장은 로미오와 줄리엣이 만나 껴안고 이야기하고 키스했던 공간이다. 특히 수중 키스 신은 꽤 인상적이었는데, 이는 물처럼 맑고 투명한 그들의 사랑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영화에서 가끔 물 속에 잠겨있는 두 남녀의 얼굴을 보여준다. 결국 물은 그들이 온갖 어지러움과 혼란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해결책과도 같다. 덧붙여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장면에서 수족관을 맞대고 눈빛을 교환하는 그들을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매개체로도 볼 수 있다. 반면에 에서는 영화의 초반부에 비올라가 사는 커다란 성 앞에 흐르는 강을 보여준다. 셰익스피어가 그녀를 만나기 위해 거쳐 가는 장애물과 같은 장소로 보여주는데, 셰익스피어가 달밤 아래 강물 위에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비올라와 진실한 사랑을 교환하는 장소로도 볼 수 있다. 96년 작 보다는 그 의미와 느낌이 약간 떨어지지만, 역시 물이 그들의 사랑과 그들이 놓여있는 분위기에 상징적인, 표현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공통적으로 엿볼 수 있다.마지막으로 두 작품을 감싸고 있는 아름다운 선율을 살펴보자. 우아한 여성 톤의 목소리로 테마곡을 뽐내는 남성이 고전에서 분위기를 매료시켰다면 96년 작 에서는 흑인 여성 가수가 등장해 역시 둘의 만남을 아름답게 꾸며준다. 제목 또한 “Kissing You”. 이처럼 음악은 영화의 느낌을 고전과 확실히 다르게 보이도록 하는 결정적 장치로써 쓰였다고 본다. 테마곡 외에도 고전과 와는 다르게 시끌벅적 파티음악과 괴상한 그런지 음악, 빠른 리듬의 팝송, 장면 전환을 직접적으로 알리는 효과음 등이 영화 전반을 지배하면서 희극적인 느낌까지 가미한다.)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성량이 풍부한 성가대의 흑인 꼬마를 보여줌으로써 맑고 어린 그들의 사랑을 분명히 보여준 부분이었다. 반면 는 음악을 통해 영화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지는 않는다. 고급스러운 클래식만을 영화 전반에 깔아서 단순히 영화의 사실성과 분위기 맞추기를 고집한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영화의 희극적인 느낌은 대사와 행동을 통해서 드러낸다. 그 대표적인 예는 술집 장면이다. 그 장면에서 등장인물은 “Bill, Not Billy”라는 언어유희를 사용해서 영화의 희극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꾸밈없는 아름다운 사운드를 영화 내내 감상할 수 있지만 특별히 그 음향 효과로부터 어떤 특별한 의미를 발견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중도(中道)를 찾아 떠나는 여행-영화 ‘리틀 부다’를 보고 나서석가는 어떤 고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게 되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 싶다면 빽빽하고 두꺼운 종교 서적을 읽는 방법도 있겠지만, 한 편의 아름다운 영상을 통해 아는 방법도 있다. 와 같은 명작의 연출을 도맡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90년대 초반 잘나가던 스타 키아누 리브스, 브리짓 폰다와 손을 잡고 만든 영화가 바로 이다. 이 영화는 싯다르타의 깨달음에 이르게 된 과정을 감각적인 영상과 감성적인 대사를 통해 완성해낸 작품이다. 나는 베르나르도 감독의 불교의 대한 깊은 식견에 우선 놀랐지만, 그것보다도 영화가 주는 올바른 불교적 해탈의 과정과 의미에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어서 놀라웠다.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재미있는 우화를 이용했다. 염소와 승려 간의 의미심장한 대화가 바로 그것이다. 염소는 승려와의 대화에서 자신은 인간으로 태어날 것에 대해 기뻐서 슬프다가도 웃지만, 자신도 승려였던 적이 있었다고 말하며 웃다가도 슬퍼하는 역설적인 말을 내놓는다. 그 대화가 담긴 깊은 뜻을 정확하게 짚어낼 수는 없지만, 어쨌든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써 앞으로 등장하게 될 중심 내용 중의 하나인 도제라마의 환생에 대해 어느 정도의 그럴듯함을 가져다준다.영화에서는 도제라마라는 위대한 종교계의 현인을 설정하고 그의 혼이 옮겨간 육신을 찾는 노부라마의 임무 수행과정과 교차적으로 싯다르타의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보면, 제시라는 파란 눈의 소년이 등장하는 데, 그는 싯다르타의 이야기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는 아이이다. 제시의 비범함을 알아 챈 노부라마는 그에게 접근을 시도하고 라주와 지타라는 또 다른 후보들을 그와 함께 찾아 나선다.이것이 현실을 보여주는 부분이고 이 이야기 속에 싯다르타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위에 언급했던 현실을 다룬 부분을 통해서도 싯다르타의 수행 과정이 전해주는 의미만큼의 상당히 심오한 불교적인 이치를 알 수 있었다. 우선 세 아이의 우연적인 만남은 불교라는 종교가 지닌 신비함을 그대로 반영하는데, 이러한 신비성은 노부라마가 임무를 끝내고 초탈한 자세로 열반하는 부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세 아이는 놀랍게도 도제 라마의 육신과 말씀, 생각이 각기 따로 환생한 것으로 영화에서 드러나는 데, 이러한 시도는 결국 서로 유기적으로 하나에 속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그 생각에 대한 근거는 위에서 언급한 ‘신비한 후보들의 만남’이 결정적으로 해답을 품고 있고, 뒷부분에 후보들이 모자를 고르는 장면, 후보들이 싯다르타가 최절정의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모두 함께 체험하는 부분 등에서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노부라마의 마지막 충고에는 이러한 소중한 가치들을 남들에게 전파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서 나중에 후보들이 불교의 길에 오르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만약 뒷이야기로 후보들의 전파가 이루어진다면 세상이 ‘참’으로 구현되는 순간에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다. 이렇게 영화는 심오한 불교적 이치들을 통해서 실제로 참세상의 구현이 미래에 가능할 것이라는 높은 희망을 나에게 품도록 해준 면에서도 정말 의미가 컸다.아무래도 영화 속의 현실 세계가 보여주는 부분이 그러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면 과연 싯다르타의 이야기가 지닌 또 다른 커다란 의미는 무엇일까 ?영화에서 알 수 있듯, 싯다르타의 기이한 출생과 어머니 마야 왕비의 죽음, 비범한 자의 예언은 벌써 그가 남다른 인물로 성장하리라는 것을 알게끔 해준다. 싯다르타는 힘겨운 고행 과정과 악마의 유혹을 결국 견뎌 내는데, 그 순간 그가 꿈꿨던 진정한 마음의 평온에 도달한 것으로 보였다. 그는 몇 년간의 고행 도중에 어느 순간 의미 깊은 문장 하나를 떠올려 내는데, 그것은 바로 ‘중도’가 가지는 의미를 잘 나타내주는 줄에 관한 말이었다.“줄을 너무 팽팽히 하면 끊어지고 너무 느슨히 하면 연주를 할 수 없다.”이 심오한 대사에는 많은 의미가 숨겨진 영화적 텍스트들을 발견할 수 있다. 걸핏 보기에는 그럴듯한 말처럼 보이지만, 좋은 연주를 하기 위해서 알맞게 줄을 잡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연주가 꾸밈없고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울릴 정도로 알맞게 줄을 잡는 것, 그것이중도(中道)인 것이다.불교에서는 중도를 팔정도(八正道;正見·正語·正業·正命·正念·正定·正思惟·正精進)의 실천에 의해서 구현되는 도(道)라 하여 그 비중을 크게 두고 있다. 참고로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파되기 전, 원시 불교라는 이름으로 싯다르타가 수행한 중도의 의미가 괴로움과 즐거움(영화에서는 출가하기 전의 즐거움과 출가 후 겪고 보게 되는 괴로움으로 볼 수 있다.)의 양극단에서 중심을 바로 잡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더 나아가 영화의 현실 부분이 지닌 유기적인 조화의 내용과 연결 지어볼 때, 싯다르타가 영화에서 지녔던 도(道)는 육신과 정신의 조화라는 측면에서 많이 비슷한 부분들을 공유하고 있다. 이렇게 싯다르타가 밝힌 으뜸이 되는 수행의 과정인 중도의 자세는 실로 내 몸이 마음과 달리 치우쳐 있을 때 최대한 평온과 안정을 취할 수 있는 본보기가 되는 좋은 자세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