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영화감상문 송일곤 감독창세기 4장 : 5,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 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 벨을 쳐 죽이니라창세기 4장에는 인류 최초의 역사적인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다. 가인으로서는 하나님이 아벨의 재물은 받으시고 자신의 재물은 받지 않는 것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고 기록된다. 하나님은 카인에게 죄를 다스릴 것을 말하지만 그는 끝내 질투를 이기지 못하고 아우 아벨을 죽이게 된다. 그 뒤 카인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된다. 이 것이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 형제 이야기이다.『간과 감자』의 송일곤 감독은 성경의 가인과 아벨 형제의 살인이야기에서 영화의 모티브를 따오고 있다. 영화 속 카인은 아벨을 살리기 위해 군인들의 눈을 피해 죽은 듯한 아벨을 들쳐업고 반군의 의사에게 데리고 온다. 간신히 총알을 빼내는 수술을 한 후 아벨을 살려내긴 하지만 곧 숨을 거둘 것을 예견한다. 의사는 카인에게 제안한다. "카인, 내 말 좀 들어봐" 제안의 내용은 영상으로 대신 설명된다. 형 카인은 이 제안을 듣고 괴롭게 고민한다. 아벨은 희미하게 의식을 차린 듯 두 눈을 힘겹게 뜨고 있다. 의사의 제안을 들은 후 줄곧 담배를 피우며 괴로워하는 형 카인을 느끼는 아벨은 두 눈을 힘겹게 뜨고 있다가 뭔가를 결심한 듯 두 눈을 꼭 감는다. 이때 이미 아벨의 용서는 시작된다. 의사는 희미하게 의식이 있는 아벨을 마취시키고, 카인은 수술실 너머에서 불안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이 광경을 지켜본다. 폭격 소리와 흔들리는 천정, 번개처럼 깜빡이는 불빛, 일그러진 병원의 창문은 카인에 대한 카인의 죄의식을 표현하고 있다.영화 속의 카인은 성경 속의 카인 이야기를 모티프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살인의 동기는 다르다. 성경 속 카인의 살인의 근원은 질투심이지만 영화 속 카인은 다른 동기와 과정으로 아벨을 죽음으로 내몰게 된다. 처음에 영화 속 카인은 아벨을 살리기 위해 의사에게 데리고 왔지만, 의사는 가망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젖는다. 그리곤 의사는 아벨의 간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간을 팔라고 제안한다. 여기서부터 카인의 죄악은 시작된다. 그의 질투심은 신의 사랑에 대한 질투심이 아닌 높으신 분 들의 식량 창고에 있는 식량에 대한 질투다. 굳이 성경의 모티프를 가져왔다고 해서 전후 사항을 다 따라야하는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성경에서 카인의 살인과 영화에서 카인의 살인은 다르다. 또 하나 주목하고 싶은 점은 아벨의 태도이다. 성경 속 아벨은 카인의 살인을 하나님에게 호소하고 있다. 창세기 4장 10절에 보면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라고 쓰여있다. 아벨은 카인에게 죽임을 당한 후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핏소리로 하나님께 자신의 죽음을 알린다. 하지만 영화에서의 아벨은 형 카인을 용서한다. 희미한 의식으로 카인의 고뇌를 엿본다. 그는 형이 자신을 살리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는 것과 굶주려있는 조카와 형수를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그냥 죽음으로 슬픔만을 안겨 줬을 지도 모르는 자신에게 자신의 간을(그냥 죽었다면 아무런 쓸모도 없었을 것) 감자와 바꿀 수 있게 해준 것에 관해 감사했을 지도 모른다. 나는 힘겹게 깜빡거리다가 마침내 눈을 감아버리는 아벨의 모습에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진정한 희생이란 자신이 희생하고 있다는 그 자체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결코 아벨의 눈빛에서 형에 대한 증오는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는 살아서는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서 싸웠을 군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배경은 정의되지 않은 동유럽의 불특정내전이라고 감독이 말한 바 있으므로) 그에게는 형이 한 명 있고, 조카들이 있다. 어린 조카는 죽은 군인들의 시체 사이를 오가며 그들이 남긴 밥알들을 물에 씻어 먹는다. 그 아이의 얼굴을 처음 보았을 때 흡사 오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았다. 그처럼 비참하고 병약하고 말라있었다. 간과 감자를 바꾸었다는 것에서 프로메테우스가 생각났다. 그는 신의 명령을 어기고 인간에게 불을 전해주었다는 죄로 독수리에게 간을 먹히고 있는 끊임없는 형벌을 받고 있는 신화 속 인물이다. 그가 자신의 간을 희생하고 인간에게 불을 선물해주었듯이 아벨은 자신의 간을 내어주므로 굶주려있는 한 가정에 만찬을 제공한다. 카인의 아내는 불을 피워 감자를 삶아 소박한 저녁을 준비한다. 아벨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 후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 소리없이 나타나듯이, 아벨도 형의 소박한 만찬자리에 나타난다. 아벨은 형에게 환한 웃음을 지어주며 용서의 마음을 전한다. 성경 속 아벨이 핏소리로 하나님에게 호소한 것과는 달리 그는 프로메테우스처럼, 혹은 예수그리스도처럼 자신을 넘기고 죽인 카인을 용서하고 카인이 따러 주는 술을 한잔 마시고 미소를 지으며 비가 새는 지붕을 바라보며 조용히 사라진다.
블레이드 러너인문문화학부 20011636염 수현『블레이드 러너』는 암울한 지구의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지구의 파괴와 엄청난 인구증가 때문에 다른 행성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움직임 속에 경찰들은 최첨단 장비로 통치를 유지한다. 인간들은 생체공학의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인간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 수명 4년의 복제인간을 만든다. 그런데 4명의 복제인간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탈출한다. 복제인간들이 지구에 사는 것이 불법인데 그들은 인간과 같은 모습을 이용해 인간 행세를 하며 지구에서 살아가려 하고, 경찰들은 이를 막기 위해 블레이드 러너를 호출한다. 고도의 감정이입과 반응 검사를 통해 복제인간을 유일하게 감지해내는 블레이드 러너는 배반한 복제인간을 찾아서 제거하는 임무를 갖고 있다. 블레이드 러너인 전직 경찰 데커드는 유능한 복제인간 사냥꾼이다. 데커드는 탈출한 4명의 복제인간들을 잡으라는 임무를 맡는다. 그는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치다가 총에 맞아 인간처럼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복제인간들을 보면서 점차 인간의 잔인성을 깨닫게 되고 자신의 임무에 회의를 느낀다. 비인간적인 것은 복제인간이 아니라 인간들이었던 것이다. 마지막에 복제인간은 자신을 죽이려 한 데커드를 살려준 채 죽는다. 데커드는 사랑하는 복제인간인 레이첼과 함께 탈출을 시도한다. 그들이 탄 엘리베이터의 문이 불길한 금속음을 내며 닫히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이 마지막 장면에서 데커드를 따라다니며 계속 지시를 내린 또 다른 블레이드 러너로 보이는 가프가 종이로 접은 유니콘을 들고 있다. 유니콘은 데커드의 꿈속에 나왔었다. 이 것은 데커드도 복제인간일 수 있다는 중요한 암시중의 하나다. 즉 유니콘이 말과는 다른 종류의 동물이라는 것에서 데커드의 존재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 데커드의 꿈을 가프가 알고 있다는 것이 바로 데커드도 기억을 이식받은 복제인간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순간,『식스센스』의 반전이 떠올랐다. 자꾸 유령을 본다는 아이를 고쳐주고 난 후, 바로 자신이 유령이었다는 사실에 놀라는 주인공의 얼굴이 떠올랐다. 복제인간을 해고 시키는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이 복제인간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데커드가 알아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데커드가 복제인간일 수도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영화 『식스센스』에서 주인공이 유령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처럼 순간 섬짓해졌다. 데커드가 복제인간이라는 증거는 영화 여기 저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실 영화를 보면서 은퇴한 데커드, 자신이 블레이드 러너를 하기 싫다는데도 억지로 복귀시켜서 데커드를 부려먹으려는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은퇴한, 실력있는 경찰을 불러들여서 다시 일을 시킨다는 구성은 경찰영화에서 자주 있는 것이지만, 그를 복귀시키려는 브라이언 반장이 데커드를 설득시키면서, 데커드를 향해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서 단호하게 말하는 것은 뭔가 경우에 맞지 않는 대사라고 생각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라는 말은 블레이드 러너로 다시 복귀하지 않으면 죽이기라고 하겠다는 것으로 들렸다. 또한 위험한 일은 복제인간들에게 다 맡기는 인간들이 복제인간들을 제거하는 위험한 임무를 맡을 리가 없으며 데커드가 복제인간들을 해고하고 나면 꼭 나타나는 가프가 진짜 블레이드 러너인 것이다. 그리고 이때 삽입된 장면은 가프가 만든 종이닭인데, 미국 속어로 닭고기를 이르는 치킨(chicken)은 '겁이 많은' '비겁한'의 뜻을 가지고 있어서, 가프가 데커드를 향해서 겁쟁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첫 번째 암시를 보여준다.그 후 데커드는 타이렐 회사에 타이렐을 만나러 간다. 데커드는 회장의 비서인 레이첼을 만나게 되고 복제인간 탐지기를 통해 레이첼도 복제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그 후 데커드가 레옹이 묶고 있던 호텔로 단서를 찾으러 간 장면에서 가프로부터 두번째 암시를 보게 된다. 가프는 종이 성냥으로 만든 발기한 남자인형을 만드는데 이는 데커드가 타이렐사의 레이첼을 사랑한다는 암시로 쓰인다. 즉 나는 네가 레이첼에게 마음이 간 것을 알고있다는 그런 의미로 사용된다. 더불어 데커드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또 하나의 주요한 부분이 있는 데 바로 복제인간들의 대장인 로이와 데커드의 결투장면이다. 건물 아래로 떨어지려는 데커드를 로이가 구해주는 것은 로이가 데커드의 실체를 알고 있다는 것이며 이는 나도 너와 같은 복제인간이다라는 의미로 작용한다.
춘향이가 아직 사랑 받는 이유는?20011636 인문문화학부 염수현서양에 로미오와 줄리엣이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춘향전이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시대를 초월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영화로도 많이 만들어 진 것처럼, 춘향전도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오고 있으며 이 또한 영화로도 많이 만들어져서 사랑을 받고 있다. 판소리계 소설이 갑오경장 이후로 개화기 소설에 밀려서 쇠퇴 한 것처럼 보이지만, 1930년대까지 딱지본 소설이 발간 될 정도로 더 넓은 독자층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작년에는 임권택 감독이 우리 고유의 판소리와 영상을 잘 조화시켜 만든『춘향뎐』이 칸 영화제에 진출 할 정도로 국제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었다. 춘향전이 이렇게 시대를 거듭해 오면서 끊임없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가 뭘까? 그 이유를 나름대로 한 번 생각해 보았다.춘향전이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로 첫 번째 스토리의 재미를 들 수 있다. 보통 영화를 한 편 보고 나서 꼭 코믹영화가 아니었어도, 그 영화 참 재밌었다고 말한다. 더구나 슬픈 영화를 보고서도 말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우선은 스토리가 재미가 있어야 함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춘향전은 재미가 있다. 우선은 남녀의 사랑, 그것도 양반집 도령과 퇴기의 딸 사이의 사랑이야기니 만큼 독자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할 것이다. 재미있다는 것이 대중성, 통속성과 연관되어서 작품의 수준이 낮게 평가될 수도 있겠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춘향전을 단순한 사랑 놀음으로 보지 않고, 사랑을 매개로 하여 신분제도의 벽을 허물어뜨리려 했던 노력으로 본다면, 아니 노력이 아닌 이야기 속에서 만으로라도 신분제도의 틀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였던 민중들의 삶을 엿볼 수 있으므로 그 스토리의 재미라는 것이 통속성을 벗어난 재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완성된 이야기가 있어 그대로 전해져 내려온 것이 아니라, 구연자들의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것을 채록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변화, 발전, 첨가, 완성되었을 것이다.두 번 째, 부분적인 독자성을 들 수 있다. 부분적이라는 것은 전체적이라는 말과 반대되는 말일 것인데, 반대로 말하면 어떠한 통일되는 느낌이 없다라는 말도 될 것이다. 서양의 오페라를 구분하는 희극, 비극이라는 말에서도 즐거운 연극이면 즐거움만, 슬픈 연극이면 슬픔만 드러내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우리의 춘향가를 보면 마치 자연의 일부처럼 보이게 하는 우아미, 일상에서 벗어난 웃음을 주는 해학미, 춘향이가 님을 잃어 애닯아 하는 비장미, 일반 사람들과 다른 계층의 모습을 보여주는 숭고미를 동시에 비빔밥처럼 담고 있다. 서양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통일성이 없는 난잡한 삽화의 부분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점을 판소리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실제로 70년대에 조동일 등이 부분적인 독자성 이 판소리의 장점으로 내세웠다. 실제로 춘향가에서는 변학도가 남원 고을로 부임해 오는 장면을 가장 크게 할애하고 있다. 전체적인 스토리상 그 장면이 그렇게 중요한 장면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재미 가 있기 때문에 늘려서 소리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판소리는 같은 춘향가라 할지라도 사랑가만 따로 떼서 들어도 충분히 즐길 수가 있는 것이다.셋째, 춘향전이 오랫동안 사랑을 받는 이유로 이야기가 진행되어 감에 따라 변해가는 리듬의 변화를 들 수가 있다. 가장 느린 장단인 진양 장단은 사설의 극적인 상황이 느슨하고 서정적인 대목에서 흔히 쓰인다. 서울로 가는 이도령을 보내는 장면에서 춘향이가 술 한잔 받고 가시라고 우는 장면이 진양조로 불려진다. 극의 비장미를 느낄 수 있는 장단이라 할 수 있다. 판소리 장단 가운데서 진양 다음으로 느린 것인데, 그 빠르기에 따라 다시‘늦은 중몰이’,‘중몰이’,‘잦은 중몰이’로 가르기도 한다.‘중몰이’라는 말은‘중간 빠르기로 몰아가는 장단’의 뜻으로 풀이된다. 사설의 극적인 상황이 어떤 사연을 담담히 서술하는 대목이거나, 진양 장단과 마찬가지로 서정적인 대목에서 흔히 쓰인다. 춘향전에서는 서울에 가기 위해 나귀를 타는 이도령을 묘사하는 장면이나 몽룡이가 춘향을 달래는 대목에 중몰이 장단이 사용되고 있다. 중중몰이는 중몰이와 박이 거의 비슷한데, 중몰이보다 더 빠른 장단이다. 사설의 극적인 상황이 춤추는 대목, 활보하는 대목, 통곡하는 대목일 때에 흔히 쓰인다. 춘향전에서 이방이 변사또에게 기생 명단을 불러주는 대목에서 중중몰이를 쓴다. 중중몰이에서는 우아미를 느낄 수가 있다. 전혀 현실성 없이 기생들을 묘사하는 이방의 모습이 바로 판소리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잦은몰이는 말 그대로 잦게, 곧 빠르게 소리를 몰아가는 빠른 장단이다. 늦은 잦은몰이는 사설에서 어떤 일이 차례로 벌어지거나 여러 가지 사건을 늘어놓는 대목에서 흔히 쓰이며, 잦은몰이는 격동하는 대목에서 흔히 쓰인다. 몽룡이 남원에 내려와서 구경을 나가기 위해 방자가 나귀안장을 채우는 부분을 잦은몰이로 부르고 있다. 판소리에서 가장 빠른 장단인 휘몰이는 말 그대로, 휘몰아 나가는 장단으로 풀이할 수 있다. 어떤 일이 매우 바쁘게 벌어지는 대목에서 흔히 쓰인다. 엇중몰이는 절름거리는 박자로, 판소리의 다른 장단은 박이 일정한 느낌을 주지만, 엇몰이는 박이 길고 짧아 절름거리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좀 색다른 장단이라고 할 수 있다. 신비한 인물이 나오는 대목에서 흔히 쓰인다. 판소리에서 매우 드물게 쓰이는 장단이다. 중몰이의 절반 길이인데, 그런 점으로 보아, 판소리의 맨 끝부분인 뒤풀이에 흔히 쓰인다. 춘향가의 뒤풀이에도 이 장단이 사용된다.
『집으로 가는 길』에서 본 영화 속의 심리묘사인문문화학부 20011636 염 수현보통 예술 영화라고 해서 보며 말이 거의 없다. 아버지께서 예술영화라고 하시기에 재미있는 건 줄 알고 본 영화가 『피아노』이다. 초등학교 때 본 영화라서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대화가 거의 없는 굉장히 조용한 영화였다는 것만 뚜렷이 기억난다. 왜 예술영화라고 하면 대부분 말이 없고, 조용한 영화라는 선입견을 가지게 되는 걸까? 단편소설도 잘 된 소설이라고 해서 읽으면 앞의 한 두 장은 배경묘사로만 채워져 있지 대화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어릴 때에는 예술 영화라는 것이 말없이 조용한 영화다라고 생각했지만, 『집으로 가는 길』을 본 후 음악, 그리고 자연의 변화만으로도 인간의 심리를 드러낼 수 있고, 그러한 심리묘사 방법이 직접적인 대화보다 더 많은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예술영화가 왜 예술인가를 조금은 알 수 있었던 좋은 계기였다.영화에서 보통 인물의 심리를 묘사할 때 대화, 행동, 자연의 묘사, 전경의 묘사, 소도구의 묘사, 음향, 계절의 변화 등 7가지의 방법을 사용한다. 대화와 행동이 인물의 심리를 묘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오디가 정성스럽고 예쁘게 만든 공밥을 선생님이 먹기를 기다리는 모습이나, 가까운 우물에서 물을 뜨지 않고, 학교를 지나쳐야 하는 먼 곳에 떨어진 우물에 가서 물을 떠오는 모습 등을 통해서 자오디의 마음을 가볍게 엿볼 수 있었다. 이 외에도『집으로 가는 길』은 다양한 심리묘사 방법을 통해서 자오디라는 시골 처녀의 심리를 묘사하고 있다. 전체적인 영화감상을 짧게 말해보자면 배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을 흘렸던 영화이다. 외부이야기가 흑백으로 시작하자 조금은 답답한 느낌을 주었다.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낡아 보이는 자동차가 울퉁불퉁 달리는 모양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고향을 찾게 된 아들의 힘겨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어머니를 만나 뵙고 아버지의 교실에서 잠을 자게 된 아들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혼사진을 보며 두 분의 연애시절을 회상하게 된다. 다음 순간 칙칙하고 답답한 흑백에서 화려한 칼라로 바뀌게 된다. 중국여인들의 울긋불긋한 옷은 외부 이야기의 흑백과 큰 대조를 보였다. 현재가 흑백이고 과거가 칼라라는 건 어떻게 보면 과거가 더 아름답고 소중했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여인의 生에서 18세라는 나이는 늙어서도 가슴 설레게 하는 추억이 될 것이며, 특히 어머니 자오디에게는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게 되었던 시간이었으므로 그녀의 기억 속에 더 선명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도시에서 젊은 남선생이 부임해 왔다는 소식에 마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반기게 되고, 자오디 역시 구경을 나오게 되는데 그때 마차를 타고 온 선생님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18세의 예쁜 소녀인 자오디가 선생님을 바라보는 표정에서 느낄 수 있었다. 자오디는 적극적으로 선생님과의 접촉을 시도한다. 자오디가 선생님이 학생들을 데려다 주는 길목에서 선생님과 마주치기만을 기다리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고 또, 선생님을 향한 자오디의 심리를 가장 잘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자오디가 사는 마을의 모습은 장면 하나 하나에 빠져들 만큼 아름답다. 바람이 불어서 풀들이 부딪쳐 사그락거리는 소리, 까치가 날아다니는 모습, 동산과 동산이 부드럽게 이어진 모습은 넘어져도 아플 것 같지 않고, 가을이라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내가 보기엔 은행나무 같았다.) 물결치듯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은 정말로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런 자연적인 배경 속에 님을 기다리며 앉아있는 자오디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이런 풍경 속에 피리소리 같기도 한 신비스러운 음악이 흘러나온다. 음악이 나무를 흔들어 대는 것 같았다. 음악이 갈대밭을 흔드는 것 같았다. 음악이 노란 가을을 흔들어 대며 자오디 앞으로 성큼 성큼 다가서는 것 같았다. 작은 동산에 앉아서 선생님을 기다리는 장면에 흘러나온 음악은 마치 선생님이 자오디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처럼 그 조그만 세계를 물결치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 겨울이 되어도 자오디의 마음은 변함 없이 선생님을 사랑하고 있다. 선생님이 떠난 학교의 문에 노란 문풍지를 다시 바르고 빨간 무늬를 붙여 놓고 칠판을 다시 닦고, 청소를 한 후 의자에 앉아 있는 자오디는 봄이 곧 올 것 같음을 느끼고 있는 듯 보였다. 밖은 아직 춥고 눈이 내리고 있지만 노란 창호지를 통해 들어온 노란빛으로 가득 찬 교실은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것이 당연하듯이 선생님이 약속한 날에 다시 돌아 올 것을 기대하는 희망으로 가득 차 있는 듯 했다. 이 때 변함없이 교실 한가득 메우고 있는 노란빛과 함께 영화 전체를 줄곧 감싸고 있었던 피리소리 같기도 한 음악이 더 부드럽고 웅장하게 들려온다. 같은 멜로디이지만 음악의 질감이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웅장하며 때로는 딱딱하여 선생님에 대한 자오디의 마음을 상황에 맞게 잘 표현하고있다.
4차원 세계에 사는 작가와「책」인문문화학부 20011636 염 수현{1. 머리말2. 리얼리즘,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사이버리즘3. 사이버 소설의 환상적 요소4.「책」의 작가와 서술자5. 마무리, 감상▲참고 문헌1.머리말2+2=5 라는 노래가 있다. 라디오를 듣다가 약간은 매니아적인 음악이 흘러나와서 귀를 기울여보니 제목이 2+2=5 라고 한다. 틀을 깨는 제목이다. 어쩌면 데카르트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이때껏 2+2는 4라고 악마에게 속아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틀을 깨는 것, 틀 안의 세상에서 벗어나서 틀 밖으로 나오는 것, 이 것이 탈 근대 사회의 주된 특징이 아닌가 생각된다. 근대에 규격화된 각종 틀 을 벗어나는 것, 그것이 포스트 모더니즘 문학에서 꿈꾸는 것이다. 송경아의 『책』이라는 소설을 읽었다. 책 제목이 『책』이라니 특이하기도 하다. 특이 라는 말은 보통 것에 비하여 두드러지게 다름 이라는 뜻이다. 소설『책』은 진짜 특이했다. 근대의 틀을 가지고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소들을 작가와 서술자 모두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받아들이고 있다.『책』을 읽어내려가는 동안 나 또한 그러한 세계에 빠져들어서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왔을 때는 정신이 산만하고 아리송했다. 현실과 현실이 아닌 세계를 동시에 접한다는 것, 소설이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성과일 것이다. 또 그안에서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는 작가와 서술자의 모습은 참으로 매력적이다.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 과 작가 와 소설 에 대해서 살펴봄으로써 틀이 없는 세상에서 적응해나갈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자.2. 리얼리즘,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사이버리즘(『사이버리즘과 사이버 소설』(김재국)참고 )우리나라의 문학 이론은 80년대 중반까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대결 구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비역사적, 비정치적, 비 참여적이라는 리얼리즘 진영의 비판과 모더니즘의 연장선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가열 찬 가운데 새로운 이론인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 문학 속으로 침투하였다. 모호해지고 있는 디지털시대 상황을 모두 반영할 수 없다는 점이 한계점으로 지적된다.먼저 사이버리즘이란 용어는 다소 어색하고 생소한 느낌을 준다. 그렇다면 디지털시대라 불리는 오늘날의 사회문화적 변화상태를 어떻게 인식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디지털 시대란 라키토프의 말처럼 사회적, 테크놀러지적,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메커니즘들이 단지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용해되어 단 하나로 합쳐지는 과정을 말한다. 특히 지식의 창출, 재연구, 보전, 그리고 확산을 위해 진보적으로 증대하는 정보 테크놀러지의 사용 과정이다.다음으로 포스트 모더니즘과 사이버리즘은 전혀 단절되어 있지 않다. 둘은 다음의 몇 가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첫째, 두 이론은 기존의 전통과 인습에 도전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둘째, 기존 이론보다 전위적 실험성과 일탈성 그리고 행위와 참여를 중시한다. 기존 이론이 고립과 무관심적 형식을 지녔다면 포스트모더니즘과 사이버리즘은 참여와 관심 실천적 행동으로 특징 지워진다.셋째, 파편화 현상과 임의성, 우연성, 유희적 성격을 지닌다. 결합보다는 단절, 질서보다는 혼돈, 그리고 청체성이나 종합보다는 해체나 분열을 더 중시한다.넷째, 계급적 질서의 붕괴와 초소설적 성격을 지닌다. 억압된 것의 복귀나 마이너리티의 부상이 그것이다.다섯째, 비결정성과 비종결성 혹은 불확정성이다. 다원성이나 상대성 그리고 대화주의의 다성성, 이어성, 다어성 등이 부각된다.여섯째, 장르 확산을 들 수 있다. 패러디와 패스티쉬를 새로운 문학장르로 인식할 때 이것은 장르 확산에 기여하는 샘이다.일곱째, 기존 이론이 자기 외부 현실의 반영에 관심이 있다면 두 이론은 자기 반영에 관심이 있다. 자기 반영이란 문학 텍스트가 텍스트 밖에 존재하는 세계를 반영하거나 재현시키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그 자체를 반영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유형의 소설을 메타픽션이라고 한다.사이버 소설이라는 용어가 정말 적절한 것인가? 그 정체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줄 것인가? 소설은 만들어진 력과 의식적 상상력이 사이버소설의 전개양상에 미치는 영행을 시대상황과 작품을 중심으로 알아본다.첫째, 가상공간은 시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 있으므로 새로운 문학적 영토로 인식된다.둘째, 사이버소설은 주체와 타자를 새롭게 인식시키고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셋째, 사이버 소설은 디지털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재현의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넷째, 사이버소설은 소설의 생산과 소통 양식의 혁명적 변화를 예고한다. 익명의 작가 출현은 문학의 생산적 논쟁을 가능하게 하는가? 공동창작은 진정한 작가와 독자의 길트기 역할을 수행하는가?다섯째, 사이버소설은 기존 글쓰기의 금제를 범제 시키고 있다.이상 김재국의 『사이버리즘과 사이버 소설』을 참고로 다른 문학이론과의 관계와 용어의 적절성 문제, 리어리즘과 사이버리즘의 유사성등을 알아보았다. 컴퓨터와 통신기기의 발달로 인터넷이 대중화 되었다. 그래서 이른바 디지털 시대가 되었다고들 한다. 시대가 바뀌면 인간의 사고도 바뀌는 법, 인간의 사고가 바뀌면 인간이 향유하는 또는 향유하고 싶어하는 문화도 바뀐다. 문화의 변화와 함께 문학 또한 변하지 않을 수 없다. 인터넷이라는 가상 공간의 다매체가 끝없이 생산하는 환상과 이미지는 그것이 진짜 인가 가짜인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그것이 사이버 라는 자체가 이미 환상적인 요소일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시대 상황으로 인해 이른바 환상소설이 맞물려서 사이버공간안에서 이미 환상소설이 만들어 지고 이어쓰고 고쳐쓰여 지며 그것이 현실로 출판되기도 한다.사이버소설의 범위를 정하는 일은 어렵고도 중요한 과제이다. 이 레포트에서는 실제 사이버 상에 창작되고 읽혀지고 또는 사라지기도 하는 것들과 함께 인쇄되어 나온 책들 중에서 사이버적인 장치들과 기법들을 사용한 것들을 모두 사이버소설이라고 칭하겠다.앞으로는 김설의 『게임오버』와 송경아의 『책』에서 보여지는 사이버소설의 특징들과 그 환상적인 요소들을 알아보겠다.3. 사이버 소설의 환상적 요소꿈이 현실인가 현실이 꿈인가. 그 사이에 도대체 어떤 구별이 있 수가 없다. 생각을 조금만 잘못하면 사회 부적응자(?)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공유하는 현실을 형상화하고 경험적 사건을 재현함으로써 완성되지 못한 삶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해야하는 작가들의 마음은 어떠할까? 아마도 나비에 대해 쓰려니 장주가 아쉽고, 장주에 관해 쓰려니 나비가 억울하게 느껴지지는 않을까? 그 안에서 혼란을 겪고, 마침내는 서사형식의 역할을 - 인간이 자기 자신, 타자와 세계를 향해 제기한 문제에 구체적으로 답하는 것-포기해버리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까?90년대의 국내적 상황을 본다면, 사회주의가 붕괴되면서 양극화현상이 힘을 잃게 되었고, 진보적인 문학이 위기에 이르게 되었다. 현대적 상황에서 보여지는 삶의 수수께끼를 리얼리즘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게 되었다.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모더니즘이 리얼리즘의 재현방식과 갈등하면서 서술행위, 표현과정에 대한 자의식을 표나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즉, 리얼리즘이 현실을 재현하는 데에 치중한다면 모더니즘은 재현자체를 문제시하고 서술장치, 즉 작가가 작품 속에 등장하여 직접 소설을 쓰고 있노라고 말해버린다.90년대 이후 사회전반에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한 것이 타자 이다. 이것은 이분법적인 근대적인 인식에 대한 반발로 나온 것이다. 이원대립의 문제는 우열을 가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그것은 주체가 타자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이고 타자에게는 결국 상처만이 남게됨을 뜻한다. 유태인 대량학살이 그러했고, 히로시마 원폭투하, 무절제한 생태계 파괴, 핵전쟁 위협 등이 그러한 것이다. 그래서 90년대 이후로 주체가 아닌 타자를 적극적으로 소설에 등장시키게 되었다. 결국엔 나 도 너 를 전제로 해야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그렇게 억압했던 타자가 나를 존재하게 하는 이유가 됨으로써 인식의 변화가 생겨났다. 소설 전반에도 타자를 끌어와서 소설이 씌여지게 되었다. 무당, 전생, 귀신등 전근대에서 근대로 오면서 무시했던 것들을 다시 부활시키게 되었다. 즉, 고정 불변하이때껏 미신으로 여겨왔던 이른바 환상이라는 요소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것이 인터넷의 대중화와 맞물려서 가상현실내의 소설들이 가상현실의 소재들을 다루게 된 것이다. 하지만 사이버 소설에서는 있는 현실 그대로를 묘사한다는 리얼리즘 기법을 사용한다고 볼 수도 있다. 사이버공간 내에서는 정말로 가능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김설의 『게임오버』와 같은 소설 전개구조는 실제 사이버 게임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여러번 죽고 여러번 살아나는 오락게임들의 주인공처럼 소설속의 주인공도 그런 인생을 사는 여자이다. 이 세상에서의 죽음은 게임 속에서의 수로 바이러스에 감염된 죽음의 하나라고 『게임오버』에서는 이야기하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김수로라고 하는 여자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어떤 한 사건을 겪게 되고 그로 인해 무수한 죽음을 겪게 되고 게임을 처음 시작한 것처럼 죽음 후 다시 살아나게 된다. 다시 살아나게 되면서 한가지의 방향으로 가지를 쳐 똑같은 모험 속에서 죽지 않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향, 새로운 길로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방향을 항상 같은 과정과 결말을 가진 것이 아니라 끝이 보이지 않는 미로 속을 헤매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즉 그 과정이 수로의 삶 자체이다. 이러한 수로의 삶은 1분 1초만에 죽을 수도 있는 것이고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멋진 모습으로 성공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가능한 면들은 네버 엔딩 스토리처럼 이야기 속에서는 영원히 생산해 낼 수 있게 된다. 이 소설을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생각해볼 시에는 위에서 말 한 것 외에 타자에 복귀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3차원적 세계를 유일한 존재의 영역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4차 5차 이상의 다차원적인 존재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소설을 특히 이 게임오버는 새로운 플롯 양상을 가지고 있어 신선하지만 우리가 소설을 읽을 때 같은 내용이 난무하기 때문에 소설의 본체가 빠져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