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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일전쟁과 동아시아
    청일전쟁(淸日戰爭)과 동아시아〈목 차>Ⅰ. 머리말Ⅱ. 대만사건(1874)Ⅲ. 청불전쟁(淸佛戰爭;1884~1885)Ⅳ. 청일전쟁(淸日戰爭;1894~1895)Ⅴ. 청일전쟁의 영향Ⅵ. 맺음말Ⅰ. 머리말1876년의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은 점차 문호를 개방하게 된다. 그리고 중국은 아편전쟁이후로 동아시아에서의 주도적인 위치에서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전통적으로 조공관계를 유지하던 청 외에도 일본을 비롯하여 여러 서구 열강들이 조선에 개입하였다. 특히, 조선 내에서 일본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강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결국 점차 영향력이 증대되고 있던 일본과 기존의 영향력을 고수하고자 하는 청과의 직접적인 대립이 청일전쟁이라는 하나의 무력 충돌로 일어나게 된다. 청일전쟁은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를 변화시킨 사건으로, 동아시아 역사에 있어 그 비중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청일전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Ⅱ. 대만사건(1874)1. 원인과거 중국에 조공을 바쳤던 일본은 1871년 중국과 근대적인 조약인 청일수호조규)와 통상장정을 체결했다. 그런데 같은 해 말 청일 양국에 조공을 바치던 유구(流球)의 표류민들이 대만의 토착민에게 살해된 사건이 일어났다. 청일수호조규의 비준을 위해 북경을 방문했던 일본 관리는 관련토착민의 처벌을 요구했고, 청조는 토착민이 청조의 통제 밖에 있는 사람들이라 하여 책임을 회피했다. 근대의 중요한 요소인 영토주권을 사실상 방기한 셈이었다.2. 과정1874년 5월에 일본군은 정부의 원정 연기를 무시하고 육군 중장 사이고 쓰쿠미치(西鄕從道)의 명령으로 원정군이 출발하여 대만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청조에서는 일본과의 무력대결을 위한 준비 태세를 갖추다가 상대적으로 군비가 열세라는 분석이 나오자 한 발 물러서기로 했다. 그래서 일본군의 출병을 정당한 행위로 인정하고 살해된 유구민에 대한 보상금과 대만 점령지에 일본군이 설치한 시설물의 대가를 지불하기로 했다. 이는 유구에 대한 중군을 공식 인정하여 지원하기로 했다.그리하여 1883년 12월부터 송코이 삼각주 일대에서 양측의 1차 무장출동이 일어났다. 여기서 프랑스군이 승리를 거두어 송코이 델타지대를 장악했다. 청조 내에서는 주전론자들이 지구전을 각오한 강경한 저항을 주장했지만 이홍장(李鴻章;1823~1901)은 프랑스와 화의를 추진해 이홍장-푸르니에(F.E.Fournier)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의 내용은 프랑스의 베트남에 대한 보호권을 규정한 후에조약을 승인하고 중국군 철수, 프랑스의 청 영토 불침범 등을 포함한 것으로 청조 내에서는 이홍장에 대한 규탄이 빗발쳤다.그런데 베트남 현지에서는 이 협정의 실행 단계에서 군대 철수 문제를 둘러싸고 양자 간에 분규가 빚어져 다시 전투가 재개되었고 협정은 무위로 돌아갔다. 이후 재개된 전쟁에서 프랑스 해군은 승전을 거듭했다. 육지에서는 중국과 프랑스가 승패를 거듭하는 가운데 청조 안에서는 1884년 말부터 강화론이 일어났다. 프랑스도 강화에 동의해 1885년 4월 전쟁이 종결되고 양 군은 텐진조약(天津條約)을 맺었다.3. 결과텐진조약의 결과 프랑스와 베트남 간의 조약을 중국은 인정하게 되었다. 조약에 따라 중국과 베트남 간의 변경무역을 개방하고 통상항을 열어 특혜과세를 인정하였으며. 또한 청조 남부의 여러 성에 철도를 부설할 때에는 프랑스 업자와 상의한다는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있다. 이로써 후에조약을 중국이 승인하게 되어 중국의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이 상실되었다.베트남에 대한 종주권 상실은 본토 방위의 중요한 울타리가 떨어져 나간 것으로 여겨져 큰 충격이었다. 그래서 양무운동(洋務運動)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나타났으나 아직까지는 양무운동이 완전히 파탄되었다는 인식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무력의 열세를 보강하기 위해 해군력을 중심으로 한 군사력 증강을 적극 추진하는 방향으로 양무운동이 지속되었다.Ⅳ. 청일전쟁(淸日戰爭;1894~1895)1. 원인메이지유신 후 조선에 진출할 기회를 엿보던 일본은 일본 측량선 운요호 사건을 구실로 조선과 강화도조약7일 청조의 출병통고를 받자 1885년의 텐진조약(天津條約)을 근거로 곧 일본의 출병을 통고한다. 그리하여 인천에 일본군함 12척이 집결한 가운데 6월 10일 해군육전대(海軍陸戰隊) 430명이 한성(漢城)에 입성하고 16일까지 총 4,000여명의 병력이 인천과 한성에 집결하였다.하지만 6월 11일 조선정부에서 동학군의 요구를 수용키로 한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성립되어 농민군이 요구하는 개혁의 실행과 농민군의 철수가 서로 약속되었다. 이리하여 청일 양국 군대의 조선주둔 명분이 소멸되었으나, 일본군은 군대의 철수를 거부하고 조선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청과의 전쟁을 유도했다.2. 과정1894년 7월 23일 새벽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명성황후 세력을 무너뜨리고 대신 대원군을 정점으로 하는 친일내각을 구성케 했으며, 그 내각으로 하여금 청과 맺은 상민수륙무역장정(商民水陸貿易章程)) 등을 폐기토록 했다. 그리고 1894년 7월 25일 일본해군의 기습공격, 즉 풍도(豊島) 앞바다에서의 해전으로 청일전쟁에 돌입하게 되었고 선전포고를 한 것은 청일 양국 모두 8월 1일이었다.북양대신 이홍장의 휘하에는 회군을 근대화해서 재편성한 북양육군(北洋陸軍)과 청불전쟁 후에 독일로부터 구입한 진원호(鎭遠號)와 정원호(定遠號)의 주력함대로 조직된 북양해군(北洋海軍)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내외의 일반적 예상을 뒤엎고 영국과 미국을 배후에 둔 일본은 전국(戰局)을 유리하게 진행시켰다. 9월 16일 평양전투에서, 10월 7일의 황해전투에서 청군은 대패했다. 일본군은 10월 24일 압록강을 건너 청 영내로 진군했으며, 11월 24일에는 여순(旅順)을 점령했다. 다음해 1월 산둥반도(山東半島)에 상륙한 일본군이 위해위(威海衛)를 점령하자 그 곳에 후퇴해있던 북양함대(北洋艦隊)의 제독 정여창(丁汝昌)이 자결하고 청군은 항복했다.일본군에게 연전연패한 청군은 1895년 3월 강화 전권대사 이홍장을 파견하여 30일에 휴전, 4월 17일 시모노세키에서 강화조약에 조인하였다. 시모노세키조약(식인은 정관응(鄭觀應,1841∼?), 황준헌(黃遵憲, 1848∼1905) 등 일부 변법론자나 지일파를 예외로 하고는 일본의 움직임에 대하여 이렇다 할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에 의하면 일본은 ‘해동(海東)의 일소국(一小國)’에 지나지 않았고, 패배할 리가 없는 상대 혹은 패배해서는 안 되는 상대에게 완전히 완패했다는 것은 과거 영국이나 프랑스에게 패배한 것과는 달리 더 큰 충격을 중국 지식인에게 안겨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변법운동 지도자의 한 사람인 양계초(梁啓超, 1873~1929))가 《무술정변기(戊戌政變記)》 첫 부분에서“우리나라가 4천여 년의 큰 꿈을 깬 것은 실로 갑오전(甲午戰)에 실패하여 대만을 할양하고 2억 냥을 배상한 이후에 비롯되었다. 우리 황상(皇上)이 분연히 발분하여 군의(群議)를 물리치고 비난을 무릅쓰고 변법자강정책을 실행한 것은 실로 교주(膠州), 여순(旅順), 대련만(大連灣), 위해위(威海衛)를 상실한 이후에 시작되었다.”고 쓰고 있는 데서도 엿볼 수 있다.그리고 아편전쟁에 의해 시작된 열강의 중국침략은 그 후 점차 가속화되어 중국의 영토 및 세력권은 각지에서 잠식되는 정세였지만, 대만할양은 고유한 영토이며 독립된 하나의 성(省)이었던 만큼 아편전쟁에서의 홍콩할양이나 청불전쟁에서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 상실과는 비교가 안 되는 큰 타격이었다.그런데 청일전쟁이 주목되는 것은 그 같은 일시적인 큰 충격 때문이 아니고 그 결과가 중국 및 동아시아의 정치정세에 결정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전쟁이 중국근대사에서 어떠한 위치를 점하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패전이 가져온 영향을 중심으로 다음의 여섯 개 항목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①양무운동의 파산. 이것은 양무운동의 표면적인 슬로건이었던 자강의 기만성이 이 전쟁의 패배로 여지없이 폭로되었다는 것과 양보와 후퇴로 열강과의 대결을 회피해 온 이홍장의 외교의 파탄, 이 두 가지 점으로 집약될 수 있을 것이다.②청 내부에서 서태후파의 일시적 후퇴와 황제파현 체제를 전제로 하면서도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분야에 걸친 발본적인 개혁을 요구하여공거상서(公車上書))를 감행함으로써 변법운동을 출발시켰다. 그리고 손문 등은 현 체제의 부정, 즉 만주지배의 타도와 공화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하여 흥중회(興中會))를 결성함으로써 중국을 재생시키기 위한 혁명운동에 나섰다. 이들 두 운동은 개량주의와 혁명주의라는 차이점은 있지만 밑바탕에 공통적으로 흐르고 있는 것은 청일전쟁의 패배로 격발된 구국의식이었다.⑤중국민중에 의한 반제국주의 투쟁의 고양. 전후 민중은 청조 봉건지배체제하에서 가혹한 수탈을 당하는데다가 패배로 발생한 배상금 부담, 더욱이 그 후의 열강의 침략 격화로 인해 더 강화된 중압 앞에 아무런 방비도 할 수 없게 되어 견디기 어려운 생활을 강요당했다. 그 중압이 인내의 한계를 넘었을 때 이들 민중은 악의 근원을 중국에 있는 ‘양인(洋人)’의 존재에서 찾고, 무기를 들고 격렬하게 배외운동을 전개하였다.⑥조선?중국?일본 관계의 커다란 전기(轉期). 이 전쟁은 조선?중국?일본 3국에서 큰 시대적 전환점이 되었다. 일본은 조선 병합부터 중국대륙 진출로 나아가는 제국주의적 침략의 기본적 방향은 이 시점에서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전쟁을 계기로 일본인의 중국관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예부터 일본인에게 확실한 가치의 소재였던 ‘중국’은, 메이지유신 이래 일본이 서방으로 기울어져 가는 이면에서 멸시의 대상으로 그 위치가 변하여 갔다. 한편 중국이 일본을 직시하게끔 된 것도 이 이후의 일이며 무술개혁의 배경으로 메이지유신이 과도하게 이상화된 형태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중국에서 일본으로의 유학생 파견도 일반적으로는 청일전쟁 이후부터 시작되며 러일전쟁을 경과하면서 일본에 대한 국제적 평가가 높아지는 가운데 이런 흐름은 한층 더 가속화되었다. 다만 그것이 상호이해와 자연스러운 우호를 바탕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었던 점, 또 그 고유한 문명의 평가에 뿌리를 두지 않고 바로 가까이 있는 ‘서양’의 대체물로서 추구되었다것이다.
    인문/어학| 2012.10.24| 9페이지| 3,000원| 조회(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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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서문화의 교류
    東西文化의 交流1. 동서간문화의통로2. 漢, 동서 교통로를 개척하다3. 唐, 실크로드의 전성기를 달리다4. 元, 세계의 문물이 한자리에5. 明淸, 고립을 자초하다1. 동서간 문화의 통로문화교류란 구성요소를 달리하는 이질 문화 간의 상호전파와 수용을 말한다. 문화는 자생성과 모방성을 동시에 갖기 때문에 교류를 통해서 발달한다. 중국 대륙을 지배한 왕조 중에는 개방적인 왕조와 국수적인 왕조 모두 존재하였다. 사실 중국은 역사상 문화수준도 매우 높고 그 영역도 넓어서 타 문화 수용의 필요성이 크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唐과 같은 왕조는 개방적 정책으로 인해 동아시아 문화권의 꽃을 활짝 피웠다. 그리고 중국의 인쇄술, 제지법 등 발달된 문화가 서구문명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동서 교류의 양태에 대한 역사적 파악은 왕조의 국가 발전과 더불어 세계사적 발전의 의의까지 찾을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문화교류의 시대적 파악에 앞서 살펴봐야 할 것은 교역루트를 알아보는 것이다. 동서교류는 크게 세 가지 루트로 이루어졌는데, 초원길, 오아시스길, 바닷길이 그것이다.초원길은 동서 교역로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한 대의 서역 착공(鑿空) 이전 시대의 문화교류는 주로 이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초원길은 북위 50도 부근의 북방 유라시아 스텝지대를 횡단하는 길이다. 길은 중국의 화북지방에서 몽골 고비사막을 거쳐 준가리아 분지, 카자흐스탄을 지나 남러시아의 카스피 해와 아랄 해 연안에 이른다.초원길 주변에는 고대로부터 유목기마민족 문화를 비롯한 여러 갈래의 문화가 발생하였으며 이 길을 따라 동서로 전파되었다. 약 1만년 전에는 비너스상이 이 초원길을 따라 북방 유라시아의 초원지대에 동서로 널리 전파된 것으로 짐작된다.) BC 4000~3000년에 채도 문화가 이 길을 거쳐 서아시아에서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 전파되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러한 의미에서 초원길을 ‘채도의 길’이라고도 부른다. 서아시아에 기원을 둔 청동기 또한 이 길을 따라 시베리아나 동북 아시아에 전파되 이와 같이 기원전 6세기부터 서아사이 지대에는 이미 상당히 발달된 교통로가 줄줄이 뻗어 있었다.파미르 고원 동쪽인 동오아시스로를 이용하고 그에 관한 기록을 남긴 사람은 기원전 138~126년에 제 1차 서역사행에 나선 전한 무제때의 장건이다. 그는 흉노에 압송되었다가 도주해 파미르 고원을 넘어 대완?강거를 거쳐 목적지인 대월지에 이르렀다. 이 길은 오아시스 북로에 해당한다. 돌아오는 길은 오아시스 남로를 따랐는데 대월지로부터 파미르 고원을 넘어 강중을 경유해 장안으로 귀향하였다. 그의 서역 착공을 계기로 오아시스로가 비로소 파미르 고원을 관통해 동서로 이어지게 되었다.개척된 이후 변경무역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남북조 시대에는 돈황 등에서 석굴 사원이 조성되었다. 그리고 비잔틴 제국과 당나라가 건국되고 불교의 발전과 함께 오아시스길 인근이 황금기를 누렸다. 그러나 당의 멸망와 더불어 쇠퇴하고 만다.바다길을 통한 동서 교류는 고대로부터 시작하여 항해술과 조선술이 발달한 중세에 이르러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범위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어 왔는데 대체로 지중해에서 홍해와 아라비아 해를 지나 인도양과 서태평양에 이른다. 이 길을 통해 동방의 비단, 칠기, 도자기, 향료, 차 등이 서방으로 대량으로 운반되었다. 그리하여 이 길을 일명 ‘도자기의 길’, ‘향료의 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후한은 안정기에 접어들어 서아시아와의 교류에 관심을 나타냈고, 전성기에 접어든 로마제국이 남해로를 통한 동서 교역에 적극성을 보였다. 그리하여 로마의 항해사였던 히파루스가 아라비아인들로부터 인도양 계절풍의 비밀을 알아낸 후, 로마의 대동방 원거리 무역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되었다. 이리하여 166년 베트남에서 중국과 로마의 첫 공식 교섭이 이루어졌다. 3세기에 접어들어 중국에서는 위진남북조의 분열기가 도래하고 유럽에서는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로마가 동서로 양분되었다. 이러한 정세 변동으로 동서 교류는 전반적으로 소강상태에 빠졌는데, 페르시아와 인도, 그리고 남쪽 해안에 인접한 국가들의 활서역에 파견하였다. 장건은 오손에서 다시 부사들을 대원, 강거, 대월지, 대하(박트리아) 등에 파견하여 이들 국가들과 정식으로 교통하였다. 이후 무제는 해마다 사신을 이들 국가에 파견하였고 이들 국가도 한에 사신을 보내왔다오손과의 연합에 실패한 무제는 표기장군 이광리를 파견하여 사마르칸트 부근의 대완(大宛) 정벌에 나섰다. 2차에 걸쳐 정벌에 성공하여 한혈마)를 얻게 되었고 파미르 고원 서쪽의 여러나라가 한에 조공해왔다.대완 정벌은 무제의 실크로드 개척의 완성이었고 동서문화 교류의 계기가 되었다. 이는 문제?경제 시대의 경제적 축적을 배경으로 흉노에 대한 적극적 대외정책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또한 월지에 장건을 파견한 것도 무제가 주도하였다. 그러나 실크로드 개척에 대한 평가에서 무제의 개인적인 능력을 지나치게 과장한 점이 없지 않다. 무제의 흉노 토벌 성공은 한의 역량도 바탕이 되었겠지만 흉노 내부 정세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즉 한의 흉노 공격이 성공했던 때는 흉노 내부의 왕위계승 다툼이 전개된 때와 일치한다. 이후 실크로드의 번영과 방기는 흉노의 내정과 관련되어 前後漢의 역사에서 반복된다.)왕망이 신을 건국하여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 흉노가 다시 서역을 침략해왔다. 후한이 건국된 다음 흉노의 침략을 받은 서역국가가 한에게 도호를 설치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명제 때 두고가 흉노를 정벌하여 이오(伊吾)에 둔전구를 설치하고 반초가 서역에 파견되었다. 반초는 31년간 서역 도호가 되어 이 지역을 다스렸다. 그리고 부하 감영을 대진(로마)에 파견하였으나 현재 이라크 동쪽의 조지(條支), 안식국(파르티아) 상인들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안식, 조지의 사정이 처음으로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다.동서 문물의 교류는 이미 한 대 이전에도 있었다. 서방의 채도가 중국에 전파되었고, 은주시대의 옥 중에는 곤륜산맥의 산물도 있었다. 춘추전국시대의 천문, 역법, 지리, 신화전설에도 인도를 비롯한 서역의 영향이 나타난다. 그렇지만 본격적인 동서문물의 교류는 비단 처음 목적이 어쨌든 간에 동서교류의 시작을 알렸다. 그리고 당대에 이르러 실크로드는 최고의 부를 안겨주는 번영의 길로 통했다.3. 唐, 실크로드의 전성기를 달리다한이 붕괴되고 중국은 위진 남북조의 분열기를 맞는다. 따라서 이 시기는 전후 시대만큼 서역 경영에 적극성을 띠지 못하였다. 서역 각 국은 이틈을 이용하여 독자 세력을 구축하고 발전을 꾀하였다. 그런 나라 중에 투르판에 건설한 고창국의 발전이 두드러졌다.남북조를 통일한 수나라는 다시 적극적으로 서역 경영에 나섰다. 수 양제는 하서회랑 일대를 지배하고 동서 중개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토욕혼을 정벌하고 이 지역에 서역 4군과 이오군을 설치하고 동서 무역로를 확보하였다.수를 이은 당은 초기에 하서 4주(凉州, 甘州, 肅州, 瓜州)를 설치하고 태종 대에는 동돌궐을 멸한 후 이주(伊州)를 설치하였다. 세력이 강대하여 한때 고조 이연이 칭신(稱臣)을 하기도 한 동돌궐이 내분으로 무너지면서 그에 복속하고 있던 토욕혼, 고창국 등이 차례로 당에 정복되었다. 고창국은 천산산맥의 동부 요충지에 위치하여 이곳에 서주(西州)를 두고 천산산맥 북쪽 오아시스 지대에는 정주(庭州)를 설치하였다. 이주, 서주, 정주는 이후 당의 서역경영 전진기지로 활용 되었다.이어 7세기 중엽 서돌궐의 내분을 틈타 천산산맥을 넘어 고기, 구차, 소륵, 우전 등 타림분지 전역을 평정하는데 성공하였다. 구차에는 안서도호부, 언기에는 안서4진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신강성 북쪽 준가르 지대로 진출하여 서돌궐을 멸명시켰다. 이로써 당나라는 동서교역로를 완전히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당대에는 위와 같이 장안과 소그트까지 직접 이어지는 통로를 장악하였기 때문에 실크로드는 유례없는 번영을 누린다. 소그트 상인은 상업활동의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이들은 중국, 인도, 페르시아, 아라비아, 동로마에까지 상권을 확대하고 도시국가를 건설하였다. 이들 소그트인 카라반(隊商)의 방울 소리가 시끄럽게 매일 찾아온 장안은 세계의 중심도시로 완전한 국제 도시가 되었다.현종의 개원 연간 이래 호곡(胡曲)을 사용하고 귀족의 식사는 호식(胡食)을 올리고 여성의 화장술에도 호장(胡粧)이 유행하였다.이 밖에 마술사의 마술이 대중을 상대로 행해졌고 씨름, 닭싸움, 무마(舞馬) 등이 유행하였다. 특히 페르시아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타부(打孚-말 타고 치는 골프)는 당 현종이 즐길 정도로 상류 사회에서 유행하였다.한편 중국 문화의 서역 전파도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단연 제지법의 전파이다.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포로가 된 제지공에 의해 사마르칸트에 제지술이 전파되면서 서방에 알려졌던 것이다. 사마르칸트에서는 서역 최초로 제지 공장이 들어섰고 이에 자극받아 10세기 경에는 바그다드를 비롯한 아랍의 여러 지역에도 제지 공장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슬람의 제지술은 12세기 이베리아 반도에 전파되었고 이는 유럽의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고 지식산업을 일으켜 신문명 사회를 여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또한 중국의 도자기도 서역에서 인기가 높았다. 페르시아의 수도 수사에서는 당나라때 무덤의 부장품에 쓰였던 당삼채가 출토 되었다. 이 당삼채는 조형예술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이라고 평가 받고 있는데 이것이 페르시아에서 발견된 것은 서방의 도기 제작에 중국적 요소가 영향을 주었음을 시사한다.물품 이외에도 중국의 관혼상제 같은 풍습도 서역에 영향을 끼쳤는데, 주로 파미르 동쪽의 투르판 일대를 중심으로 한 신강성 지역에서 유행하였다.당 대의 세계주의적 개방주의 대외관은 황실의 호족적 혈통과 불교문화의 발전에서 비롯되었다. 이로써 당이 전통문화 위에 서방 문화를 수용하여 국제적인 문화를 발전시켰고 주변국은 각기 당의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7~8세기에는 한자, 유교문화, 불교문화, 율령체제 등을 공유하는 동아시아 문화권이 성립하게 되었다.4. 元, 세계의 문물이 한자리에원대에는 동서간의 문물교라가 세계 역사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융성하였다. 원과 4한국으로 구성된 몽고 제국의 영역은 서유럽과 .
    인문/어학| 2012.10.24| 9페이지| 2,000원| 조회(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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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의 농민반란
    『중국의 농민전쟁』1. 농민전쟁의 원인과 성격2. 역대 중국의 농민전쟁- -1. 농민전쟁의 원인과 성격중국은 ‘주’나라 때부터 이어온 봉건적 왕토사상에 근거를 둔 나라이다.주나라 왕은 숭고한 정치적 지위에 의지하여 모든 토지와 백성들을 하늘이 자신에게 내려준 재산으로 여겼기 때문에, 토지와 백성을 제후들에게 분배하고), 제후들은 다시 토지와 백성을 경이나 대부에게 분배하였)지만, 제후들의 토지소유권을 크게 제약하였고 토지관계에 등급구조의 색체를 가미하였다. 이러한 피라미드형 구조에서 왕은 제후들에게 그들이 관리하는 토지와 백성에 대한 행정과 사법의 권한을 줌으로서, 이중적인 수취구조의 모형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한정적인 토지구조와 등급구조의 부패함이 드러나고, 토지의 균등분배에 실패하면서, 당대의 정치가 문란해지고, 기근으로 인해 수취의 이중부담이 더욱 심화될때, 주요수취대상인 ‘민’이 사라지게 되는 ‘민괴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농민들은 국가의 체제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당대의 지주세력이나, ‘지식인’들과 결합하거나, ‘대동사상’)을 부르짖는 종교와 결합하여, 국가가 민란을 초기에 진압하지 못하는 혼란기를 이용하여 발생하였다.농민전쟁은 또한 한 왕조의 말기에는 반드시 발생한다고 할 정도로 중국 전근대사회를 특징짓는 전제왕조체제와 땔래야 땔 수 없는 정치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농민전쟁에 대해 이해한다는 것은 중국의 전근대사회를 해명하는 열쇠가 된다.) 농민전쟁과 전제왕권의 밀접한 관련에는, 한편으로 양자를 단순히 대립관계로 취급할 수 없다는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 대체로 중국의 왕조들은 농민전쟁에서 직?간접적으로 발생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로들어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난은 前漢제국으로의 길을 열었으며, 또 그 창건자인 유방(劉邦) 자신이 농민전쟁의 한 지도자였다. 또 後漢정부를 수립한 光武帝의 성공도 왕망(王莽)정권을 탈취한 綠林軍의 봉기를 직접적인 배경으로 하고 있다.그 밖에도 황건군(黃巾軍)을 흡수한 조조(曹操)정권, 조성되었다.그런 와중에 기원전 209년, 둔장을 맡고 있던 진승과 오광이 일행 900명과 함께 어양에서 병역을 지게 되었다. 그들은 어양으로 가던 중 기현 대택향에 이르렀을 때, 며칠동안이나 큰비가 와서 기한 내에 어양에 도착할 수 없었고, 법률에 따라 사형을 당할 처지였다. 그래서 진승과 오광은 위험을 무릅쓰고 봉기를 일으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들은 600 ~ 700량의 전차, 천 명 이상의 기병, 수만 명의 보병 등을 거느린 대군으로 발전하였는데, 진나라에 반대하는 물결이 한 순간에 모두 일어나서 온갖 사람들이 뒤섞이게 되었다.진나라에 정복당한 6국의 구귀족들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아버지와 형의 원수를 갚고 땅을 되찾을 계획”을 세웠다. 전담과 같은 자는 독자적으로 봉기를 일으켰고, 장이나 진여 같은 자들은 진승의 무리에 가담하였다. 장이와 진여는 진승이 왕을 칭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6국의 후예를 추대하라고 요구하였다. 당시 진승의 무리에 가담한 공자의 8세손 공부도 진나라 통일 이전의 6국 체제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진승은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왕이 되어 국호를 장초라고 하였다.이러한 장초정권의 수립으로 전국적인 반진(反秦) 항쟁이 고조되어, 각지에서 고통받던 백성들이 분분히 일어나 진나라 관리들을 죽이고 진승에 호응하였지만, 반진(反秦) 항쟁이 전개되면서 반란군 내부에서는 지휘부가 분열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진승이 오만해져 주변의 충고를 듣지 않고 동료들을 죽임으로써 대중들과의 관계가 날로 소원해졌기 때문이다. 각지에 파견한 장수들은 진승의 통제에 따르지 않고 이권을 쟁탈하다 서로 죽이는 상황까지 발생하였다.영양을 포위하고 있던 반란군 장수 전장(田臧)은 오광과의 의견 불일치로 진승의 명을 빌어 오광을 죽여 버렸으며, 그 결과 영양을 포위하고 있던 반란군은 전멸하고 말았다. 진의 장한(章邯)은 반란군의 영양에 대한 포위망이 풀어지자 전력을 다해 진현(陳縣)으로 달려갔다. 진승은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그를 맞이하여 싸웠지만신 내린”사람으로 믿게 하였다.또한 당시 한중을 중심으로 한 삼보 파촉지역에서는 ‘오두미교’가 유행하였는데, 이는 도교의 또 다른 파로서 신자들이 쌀 5두를 내었다는 데서 얻은 이름이었다. 장각이 중편 원년 기의를 일으켰을 때, 장수도 파군에서 기의를 일으켰다. 오두미도의 다른 지파인 촉군의 장노도 장수 기의의 영향을 이용하여 한중에서 오두미도를 전파하고 스스로 ‘사군(師君)’이라 칭하며 그 아래 ‘제주(祭酒)’를 두었다. 작 부의 제주는 큰길가에 공동 가옥을 짓고 그안에 쌀과 고기를 두고 길 지나는 사람들에게 돈을 받지 않고 숙식을 제공하였는데, 이것은 일종의 정치와 종교가 결합한, 노동력과 무력이 결합한 소농 경제를 기초로 한 사회조직과 같은 것으로서, 당시 영향력이 아주 컸다.이런 현상은 도가의 평균주의 사조-“넘치는 곳에서 덜어다가 부족한 곳을 보충하다”-에 근원을 두고 있으며, 당시 그리고 후세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1950년대 후반, 이러한 소농경제에 기반을 둔 평균주의적 ‘대동(大同)’이상이 다시 잠시 왕성해졌던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황건 기의는 20여 년간 지속되어 부패한 동한 왕조를 유명무실한 상태로 빠뜨렸다. 그러나 그들은 정부군과 지방 세력의 양면협공에 직면하였고, 결국 연이은 실패로 말미암아 ‘황천당립(黃川當立)’은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기의의 주력인 청주 황건의 환상은 조조의 합작을 얻었고 조조는 이런 심리를 이용, 청주 황건을 자신의 군대로 끌어들였고, 황건 기의를 진압하는 과정 중에, 각지의 세력가들은 무장 병력을 조직하고 마을 보루를 쌓고 자신들의 세력 근거지를 확보함으로써 크고 작은 할거 세력을 형성하였다.- 황소의 난 -당조는 목종, 경종 이후부터 몰락의 시기로 진입하게 되는데, 80년간 환관은 정권을 잡고, 조신은 붕당을 결성하여, 양자가 야합하거나 투쟁하는 형상을 낳았다. 이러한 통치집단의 정치적 부패는 전국 백성에 대한 통제할 역량을 삭감시켰고, 통치집단의 사치와 음란한 생활과 토지겸병 등으로 백성들의 노역 장안에 정권을 세우고, 국호를 대제(大霽)라 하였으며, 금통(金通)이라고 건원 했다. 기의군은 유동 작전을 펼쳐 새로운 지역을 점령하면 곧 예전 지역을 내버렸다. 당의 풍상절도사 정전은 투항을 가장하여 기의군의 서진을 지연시켰으며, 은밀히 남쪽으로 달아난 당왕조와 연결을 가졌고, 남아있던 관중의 당 중앙 금군을 자기 주위에 규합하였으며 또 인근의 번진(藩鎭))과 고동으로 기의군에 항거할 것을 밀약하여 기의군의 큰 적으로 부상하였다. 그리하여 기의군의 주력이 장안 부근의 협소한 지역 안에 압축되자 당은 기의군을 분열시킬 음모를 써서 기의군의 주요 대장인 주온(朱溫)을 회유하여 기의군의 전력을 크게 감소시켰다.중화 3년 기의군은 장안을 철수하여 하남으로 향하였다. 이때 이극용 등의 군대가 추격하여 오자 기의군은 앞뒤에서 적을 만난 연유로 중화 4년 황소는 진주를 철수하여 군대를 이끌고 변수(弁水)를 건너 태산아래 낭호곡(狼虎谷)으로 물러났고, 얼마후 자살하였다. 황소의 기의군이 실패로 돌아갈 때쯤 각 지역의 기의농민 역시 잇달아 각지의 당군과 지주무장 토단(土團)에게 진압되었다.황소의 난은 전국의 범위에서 대규모의 유동작전을 진행하였으며 이는 농민의 전쟁 전략에 대한 하나의 발전이었으나 튼튼한 근거지를 건립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에는 실패하였다. 하지만 당왕조의 부패한 정치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구귀족 문벌의 세력을 철저히 제거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후 번진간 지역 다툼의 혼전은 더욱 심화되었고 환관과 조신의 모순도 첨예해졌다. 황소의 부하였던 주온은 환관의 무리를 처형하고(896), 당 소종을 시해하고 애제(哀帝, 소선제)를 세웠다. 그러나 다시 907년 주온은 애제마저 폐위시키고 자립하여 국호를 양(梁)이라 하였고, 당조는 멸망하고 오대십국(五代十國)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결국 황소의 난은 당의 멸망을 가속화하였던 계기가 되었던 것이었다.- 홍건군의 난과 주원장의 명 건국 -원나라 후기의 정치는 부패하여 1308년에서 1333년의 25년 사이에 여덟 명이 체결되면서부터 중국 경제는 영국을 비롯한 서구 자본주의 국가의 상품 시장에 편입되었다. 1844년부터 영국의 근대화된방직 공장에서 생산되던 면포 등 값싼 공산품의 수입이 급증하게 되어, 중국의 소농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던 토착 수공업 중의 하나인 방직 공업은 타격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거액의 전쟁 배상금은 중국의 농촌을 파탄으로 몰고 갔고, 급증하는 아편의 수입은 농민의 피폐를 가중시켰다. 국제 수지의 적자를 메우기 위해 청조(淸朝)는 농민들로부터 여러 가지 명목으로 한층 더 무거운 세금을 징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경제적 부담은 주로 생산성이 높은 양쯔강 유역과 그 이남 지역에 집중적으로 지워졌기 때문에 이 지역 주민들의 불만은 더욱 더 높아질 수 밖에 없었다.이러한 때에 가장 오래 된 개항지인 광둥 지방에서는, 이질적인 외국 문화와 토착 문화의 혼돈 상태하에서 반청 민족주의와 크리스트교 신앙이 결부된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불길이 일어났고, 이 불길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전국을 뒤덮게 되었다.태평천국운동의 지도자인 홍수전은 1814년 1월11일 광둥성 북방 화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객가(客家)라고 불리던 이주민 출신의 자작 소농민이었다. 홍수전에게는 형이 둘 있었는데 그들은 일찌감치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왔다. 그러나 어렸을 적부터 총명하다고 인정받았던 홍수전은, 과거에 급제하여 집안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는 가족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글공부에만 전념했다.홍수전은 7세에 서당에 들어가서 글공부를 하였고, 15세 때 처음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예비 시험에는 합격하였으나 본 시험에는 낙방하였다. 이후 그는 마을 서당의 훈장으로 있으면서 평생동안 네 번에 걸쳐 과거시험에 응시했지만 모두 실패 하여 관료가 되기 위한 길을 포기하였지만, 이 네 번의 과거 준비 기간 중에 홍수전은 두 번의 중대한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이러한 변화를 통해 홍수전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둘째 아들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이라고 자처하며, 지상에 내려와 .
    인문/어학| 2012.10.24| 8페이지| 3,000원| 조회(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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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세의 동점과 동아시아
    西勢의 東漸과 동아시아사교 035059 유승준목 차1. 14세기의 유럽세계2. 르네상스3. 대항해시대4. 절대주의 시대5. 제국주의의 출현6. 서구 열강의 동양 진출1. 14세기의 유럽세계14세기는 중세 유럽사회가 위기에 봉착해 서서히 붕괴되어 가던 시기이다. 封建制와 敎會의 두 가지 큰 요소에 의해 지탱되어오던 중세는 14세기에 이르러 봉건제의 해체와 莊園의 붕괴, 교회의 폐단에 의해 종교개혁의 움직임이 서서히 나타남으로서 무너져가고 있었다.14세기 들어서면서부터 중세는 경제적 위축의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각 국가의 경제가 침체되고 국가 간의 무역도 쇠퇴하였으며 당시 유럽 경제의 중심이었던 이탈리아의 은행이 파산하는 등의 상황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경제의 위축과 더불어 인구의 감소까지 발생하였다. 11세기부터 발전을 거듭하던 유럽사회에 경제 위축과 인구감소가 발생한 원인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유리한 開墾地의 고갈’이 그 중요한 원인 중 하나라고 추측할 수 있다.) 즉 11세기로부터의 유럽의 인구증가는 경작지에 압박을 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개척과 개간으로 그러한 압박을 소화할 수 있었는데 13세기에 이르러 비옥한 토지는 대부분 개간이 되었고 척박한 토지는 개간을 하는 비용에 비해 그 수확이 미치지 못하였던 것이다. 즉 경제적으로 유리한 개간지의 부족으로 유럽의 경제가 14세기에 이르러 위축되었다고 할 수 있다.중세의 경제적 기반은 莊園制였다. 장원제의 핵심은 領主 直營地의 경영을 위하여 부자유한 農奴가 제공하는 부역, 즉 勞動地代였다. 따라서 14세기에 발생한 장원제의 붕괴는 기본적으로 부역의 소멸, 직영지의 소멸 또는 그 경영형태의 변화, 농노해방, 즉 농노제의 소멸을 뜻하는 것이었다. 장원제 붕괴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져있다. 중세의 말기적 현상에 의한, 사회경제적 내지는 정치적 요인까지도 관련된 전체적인 역사적 상황의 소산이었다. 몇 가지 중요한 요인으로 언급되는 것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12세기 이래 새로 발달하였다.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등 이 시기의 예술가들은 궁정이나 교황, 피렌체나 베네치아, 밀라노 등의 대도시 상인들 - 대표적으로 메디치 家 - 에게 후원을 받으면서 자신들의 능력을 발휘하여 근대 문화를 발달시켰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지적인 일부 지식층에 국한되어 이루어 졌다는 한계가 있고 특히 자연과학 분야는 교황과의 대립 가능성 때문에 발달하지 못하였다. 이에 르네상스는 알프스를 넘어 북유럽으로 전파되게 된다. 당시 북유럽사회는 도시가 발달하고 봉건사회가 무너지고 있었으나 정치의 중심은 絶對君主요 그의 宮廷이었다. 따라서 북유럽 르네상스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와는 성격이 차이가 있다. 북유럽 르네상스는 宗敎的이며 社會批判的이고 초기 기독교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북유럽 르네상스의 후원자는 바로 절대군주였으며 주로 聖書 연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북유럽 르네상스는 문학 분야에서 특히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에라스무스, 토마스 모어, 셰익스피어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다. 북유럽 르네상스는 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어 광범위한 계층에 전파되었다는 점에서도 이탈리아 르네상스와는 차이가 있다.중요한 점은 르네상스의 合理主義 정신에 따라 자연과학 및 기술의 발달이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전래된 나침반이나 화약 및 화포의 발달,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등은 유럽인을 중세적 세계관에서 벗어나게 하였으며, 근대의식을 일깨우는 원동력이 되었다. 결국 르네상스를 통해 인간과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발생하게 되었고,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신항로의 개척이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유럽인의 세계관이 넓어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3. 대항해시대르네상스의 과학적 정신과 기술의 발달은 결국 유럽의 신항로 개척과 신대륙 발견을 가져왔다. 이는 곧 유럽의 경제적 위기와 지식의 발달과 맞물려 발생한 현상으로 후에 서구 열강이 식민지를 경영하게 되는 始發點이라 할 수 있다.르네상스 외에도 大航海時代가 나타나게 게 그 권력을 부여받은 것이며 따라서 왕의 권력은 신성불가침이라는 사상이다. 관료제는 절대왕정의 정치적 기반으로 봉건귀족들을 절대왕정의 체제에 편입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주로 관직의 매입이라는 형태로 이루어 졌다. 상비군은 절대왕정의 군사적 기반으로 국왕이 필요할 때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이다. 이는 국왕이 봉건세력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중상주의는 절대왕정의 경제적 기반이 되는 사상이다. 절대왕정의 기반인 관료제와 상비군을 유지 강화하기 위해서는 많은 국가 재정이 필요했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실시한 경제정책이 중상주의이다. 이는 국가가 경제활동 전반에 개입, 통제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금이 곧 국부(重金主義)라는 인식하에 금을 될수록 많이 보유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수입을 억제하고 수출의 증대를 꾀하였으며 각국과 통상을 체결하고 식민지 경영에서 힘을 기울였다. 절대왕정의 식민지 경영은 식민지를 원료공급지와 상품시장으로 활용하기 위함이 주된 목적이었다. 따라서 절대왕정의 유지를 위한 재정력의 증대를 위해 각국은 식민지 건설에 많은 국력을 쏟아 부었고 그 대상이 동양과 아프리카가 됨으로 인해 서양의 동양 진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되었다.이후 産業革命)을 거치면서 공장제 기계공업에 따른 대량생산이 가능해짐에 따라 값싼 원료 공급과 상품시장 확보가 더욱 중요하게 부각되었고 이는 곧 19세기의 帝國主義의 출현을 가져오게 된다. 19세기 중엽~20세기 초에 이르러 동양의 대부분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열강들의 과도한 식민지 경영과 대립은 결국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가져오고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제국주의는 서서히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현재 세계 전체에 걸쳐 일어나는 현상인 강대국에 의한 경제적 식민화 현상 또한 제국주의의 연장선으로 파악해 新제국주의의 출현으로 생각해 볼 필요성도 있다.5. 제국주의의 발전산업혁명 이후 1880년대부터 유럽의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은 새로운 열기를 띠며 앞을 다투어 해외진출에 모방해서 만들어 보도록 하였다. 포르투갈인은 광주 진출이 실패하자 福建, 浙江 연해로 들어가 당시 왜구와 힘을 합하기도 하였다. 1533년부터 포르투갈은 다시 중국과 교섭을 벌여 1555년 광주에서 교역을 허락받았다. 그리고 1557년부터 포르투갈은 매년 20,000냥을 납부하고 마카오(Macau)에 정박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고 포르투갈 인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그 후 이곳은 해로로 서양인이 중국으로 오는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포르투갈 다음으로 동양에 진출한 나라는 에스파냐였다. 에스파냐에서는 콜럼버스가 신항로 개척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본래 이탈리아 출신이던 콜럼버스는 포르투갈 국왕에게 항해 지원을 건의하였으나 거절당하였고, 다시 에스파냐의 여왕에게 지원을 받아 1492년 신대륙, 즉 지금의 아메리카를 발견하였다. 이 후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사이에 대립이 일어나자 당시의 교황이었던 알렉산더 6세는 1494년에 대서양 중앙의 자오선을 경계로 동쪽은 포르투갈, 서쪽은 에스파냐에게 속하도록 하여 대립을 종식시켰다. 따라서 에스파냐의 동방진출은 포르투갈에 비해 늦어졌다. 후에 마젤란이 1519년 에스파냐 국왕의 도움으로 세계일주에 성공하였고 에스파냐는 그에 힘입어 동방에 진출하여 1571년 필리핀을 점령하여 필리핀 군도가 에스파냐에 귀속되고 에스파냐는 필리핀의 이름으로 중국에 통상을 요구하여 福建에서 무역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그러나 에스파냐는 필리핀에 있는 복건의 장주, 천주 상인들을 탄압하여 1593년 그 곳의 중국인들이 에스파냐 총독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일로 인하여 필리핀에 살고 있던 중국인들이 상당수 희생되었다.네덜란드는 1581년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하여 해외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리스본(Lisbon)에서 동양의 향료를 받아 중계하는 무역에 종사하였는데 리스본에서 네덜란드선박의 출입을 금지하여 직접 동방무역에 나서게 되었다. 네덜란드는 1602년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1619년에 바타비아(Bat하고 1664년에 다시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해외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당시는 루이 14세 치하로 콜베르의 시대였다. 프랑스가 처음으로 인도에 근거지를 설립한 것은 1674년에 마드라스(Madras) 남쪽의 퐁디세리(Pondichery), 1676년의 캘커타 근처에 있는 찬데르나고르(Chandernagor)였다. 그러나 후에 영국와의 플라시 전투 이후 프랑스는 인도를 영국에게 내어주고 인도차이나 반도로 진출하게 된다. 프랑스는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등을 차례로 점령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을 수립하였다. 프랑스는 17세기 후반부터 중국무역을 시작하였다. 프랑스 상선이 처음으로 廣東貿易을 시작한 것은 1660년이었고 1668년에 廣州, 마카오에 商務代理人을 두었다. 당시 프랑스의 중국무역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종교적인 것에 관심이 더 많았다. 강희제 때 유명한 선교사인 게빌론, 부베는 루이 14세가 파견한 인물이었다.미국은 1783년 9월에 파리조약에 의하여 독립을 인정받았다. 영국의 지배를 받는 동안 이곳에서 필요로 하는 중국차는 동인도회사가 영국을 경유하여 공급하였다. 그런데 미국인 레드야드가 영국 탐험대를 따라 태평양을 탐사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미국의 서해안에서 중국으로 진출할 것을 주장하였다. 1784년 미국 국회가 발행한 허가증을 가진 중국황후호가 뉴욕을 출발하여 마카오에 도착 후 곧 廣州에 도착하였다. 4개월간 정박하는 동안 막대한 이득을 올렸는데 이 상선은 동인도회사의 특권지역에 처음으로 들어간 미국상선이 되었다. 이 소문이 퍼지자 중국으로 오려는 소문이 많아 한때 중국 붐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對중국무역은 적자였다. 그 이유는 미국의 상품보다 멕시코 은을 더 많이 가지고 중국으로 와서 상품을 구입하였기 때문이었다. 1792년에 이르러 미국은 이미 중국에서 네덜란드, 프랑스, 덴마크를 추월하여 영국 다음이 될 만큼 제 2의 무역국으로 성장하였다.영국은 그동안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이후 .
    인문/어학| 2012.10.24| 10페이지| 2,000원| 조회(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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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영웅소설과 여성의식
    Ⅰ. 서 론1. 연구의 목적본 연구는 조선후기에 폭넓게 유통된 여성영웅소설의 대표작품과 그와 반대되는 작품을 선정하여 각각의 작품에 나타나거나, 혹은 나타나지 않은 여성의식을 검토하고, 그를 통하여 여성영웅소설 일반의 여성의식을 밝히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여성영웅소설은 영웅소설에서 파생된 유형이지만, 유통과 향유의 측면에서 영웅소설 못지않은 위상을 차지한다. 특히 여성영웅소설은 여성과 관련된 문제의식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여성독자의 호응을 많이 받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문학은 작품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지 않고 항상 당시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즉 작품이 형성될 당시의 생활상이나 사회의 저변의식이 어떤 방식으로든 작품에 반영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문학 작품을 이해할 때 항상 작품 형성 당시의 사회상과 사회의식을 주목해야 한다. 이 점은 여성영웅소설을 이해하고자 할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여성영웅소설은 예컨대 이나 과 같은 영웅소설이 유통된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나 과 같은 작품의 주인공은 남성이고, 그 남성주인공이 자신의 능력으로 나라에 공을 세우고 몰락한 가정을 회복하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낸다. 작가는 남성주인공의 이러한 형상을 통해 충효와 같은 유교이념을 강조하고 사회적 지위의 보상을 희망한다. 뿐만 아니라 작가는 유충렬이나 조웅과 같은 남성주인공의 행위와 형상을 통해 당대의 남성적 지배이데올로기와 남성들의 사회적 역할을 선양하면서 그것을 더욱 공고히 한다. 여성영웅소설에 반영된 작가의식이나 문제의식 역시 이와 같은 각도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2. 선행연구검토그동안 여성영웅소설에 대한 논의는 여러 방면에서 다채롭게 전개되었다. 여성영웅소설의 주요 작품을 선정하여, 거기에 나타난 여성의식과 작가의식을 구명하기도 했고, 또 개별 작품론의 차원에서도 각 작품의 여성의식이나 여성성의 구현양상 등이 논의되어 왔던 것이다. 여기서는 본고의 전개와 관련되는 주요 성과물을 간략히 검토함으로써, 논지전개에로 불리는 등 그 의미의 폭이 대단히 넓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페미니즘이란 말이 포괄하는 모든 의미를 다 고려할 수는 없기 때문에, 편의상 여성의식이란 말로 대체하여 사용하기로 한다.여성의식의 주요 성격은 각 사회 안에서의 구체적인 실천운동의 사례를 통해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데, 대체적으로 여성의 경험을 억압의 경험) 으로 전제한다는 점이 공통적인 시각이다. 서구에서의 여성주의 운동은 19세기말에 일기 시작한 자유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출발했으며, 각종 사회운동이 폭발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 매우 다양하고 활발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여성의식은 그 사상적 기반을 볼 때 두 가지 방향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한 가지 방향은 타자성이라는 개념으로 요약되는 시본느 보봐르의 입장을 수용하면서, 여성의 가치관이나 감수성, 노동의 형태를 남성의 그것에 비추어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고, 실존적 입장에서 세계를 정복하고 자아를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여기에 보편적인 합리성, 양성주의적인 입장이 부과되어 갖가지 평등이론이 전개되고 있다. 또 하나의 입장은 근래에 들어 활발히 전개되는 것으로서, 낸시 초로우나 쥴리아 크리스테바에 의해 대표되는 여성중심적인 여성의식으로 문화주의적 여성의식 이라고도 한다. 이 이론은 타자라는 개념에는 이미 남성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우월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려는 남성적 세계관이 결국 전쟁과 자연파괴의 상태를 초래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남성적 가치관 자체의 몰락과 해체를 주장한다. 동시에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대립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는 관계로 해석하는 여성적인 가치관과 세계관만이 남성에 의해 파괴되는 세계를 구할 수 있다는 여성우월론적 주장을 펼친다.본고에서는 여성의식의 이와 같은 성격을 염두에 두고, 고소설 중 영웅소설에 나타난 여성인물들의 인간가치의 사회적 실현에 대한 여성주의적 지향을 구체적인 작품을 통해 고찰해 보사를 찾아 삭발위승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것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삭발이라는 행위는 곧 여성성을 포기하는 것이므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부정하는 형태임을 알 수 있다. 이런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여성들은 정절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일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였으며,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 죽음이란 극단적인 방법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의 성적 속박을 보여주고 있다.(2) 여성의식이 부분적으로 표출된 작품여성의식이 배제된 앞선 작품들과는 달리 여성의 성역할과 기능이 부분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작품들이 있다. 특이 여성의식이 사회적 문제의식에서가 아닌 가정 내적인 가족원의 문제와 불가항력적인 가난에 직면했을 때, 그리고 배우자의 선택에 있어서 남성보다는 여성들의 적극성과 극복의지가 돋보인다는 점에 주목해야할 작품과 여화위남(女化爲男)의 측면에서 주목해야할 작품이 있다. 전자는 , , 과 같은 작품들이고, 후자는 과 같은 작품이다.우선적으로 가정 내적 문제를 형상화하는 것을 보면 가부장제하에서 볼 수 있는 가정 내적인 문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여성들의 시각을 들 수 있다. 이 유형에서는 대체로 가정 내적인 문제가 고난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다른 유형에서 볼 수 없는 다처축첩에 따른 문제와 계모와 전처자식간의 관계망을 통해서 이들이 보여주는 자신의 영역과 존재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것은 궁극적으로 보면 남성중심적 가정 내에서 볼 수 있는 여러 문제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지만 여성으로서의 존재가치가 싹트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현상이기도 하다.전통적으로 여성이 시집을 가서 부딪치는 가장 커다란 변화는 남편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가족관계의 형성이라 하겠다. 가족관계는 수직적 관계와 수평적 관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여성의 입장에서 볼 때 시부모의 존재는 전자에, 남편과 남편의 형제 그리고 동서들의 존재는 후자에 해당된다. 수직적 관계를 통한 문제의 발생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에게 부과된 억압과 봉건적인 윤리의식에 의한 것으로 나타의 소산은, 가문의 형성과 재건이 남성에 의해 주도된다는 유교의 규범과 대치되는 것으로 남성의 영역과 여성의 영역이 동등하다는 의식 속에서 발현된 것이다.이러한 여성우위의 소설적 수용현상은 임병 양난을 겪고난 후 민족적 치욕에 대한 울분이 외적에 대한 적개심과 동시에 남성들의 무능을 질타하는 정신적 보상행위로서의 꿈의 실현, 즉 백일몽의 표출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영웅소설은 여성들이 남성들에 대해 가진 열등의식이 어디서 기인되고 아울러 근본적인 해결책이 무엇인가 하는 등의 진지한 해부에서 기인된 것이 아니고, 단지 치기어린 심리적 복수에 불과하다는 데서 여성의식의 한계로 볼 수 있다.)2. 개별 작품으로 살펴본 여성의식(1) 홍길동전에 나타난 남성주의적 시각과 배제된 여성의식영웅설화의 구조를 가진 은 사회 부조리에 대한 비판과 항거 정신이 표출된 소설인데, 특히 서얼과 관련된 부조리가 중심에 놓여 있다. 그렇다보니 여성 인물의 등장은 매우 제한적이다. 홍길동의 어머니 춘랑과 자신의 위치에 위협을 느껴 길동을 해치려는 기생 출신의 첩 초란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으며, 관상녀와 무녀가 모두 여성 인물로 그려지고 있어 작품에서 악한 역할은 주로 여성이 맡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여성 인물이 여종, 기생, 첩, 관상녀로서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생각이 짧고, 이기적이며, 자신의 영욕만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는 반면, 남성 인물의 경우 8세에 불과한 어린아이임에도 길동은 이미 입신양명을 소망하며 대장부의 꿈을 품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특히 길동은 서자 출신으로 사회 진출의 앞길이 막혀있음을 알고 괴로워하나 길동의 어머니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체념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어, 그 차이를 더욱 크게 한다.길동은 서당에서 글을 읽다가 문득 책상을 밀치고 탄식하기를,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공맹을 본받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병법이라도 익혀, 대장 인을 허리춤에 비스듬히 차고 동정서벌 하여 나라에 큰 공을 세우고 이름을 오래도록 빛내는 것이 장부의지에 의해 죽을 위기에 처하자 이들은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하면 부모의 관인대덕에 누가 되며, 자신들이 강세(降世)함은 하늘의 유의(有意)하신 것이므로 입신양명하여 돌아오자고 남복을 개착하여 집을 나선다. 이는 곧 사회적 이념인 효 윤리를 보전하고 개인적 야망인 입신양명을 위해 가출을 하게 되는 것이다.에서는 이 부분에서 특이한 장면이 있는데, 딸들이 남자행세를 하려고 하자 자식을 죽이려고까지 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다른 여성영웅소설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는 장면으로, 여주인공의 남성 지향성을 가로막는 이데올로기의 억압이 여전히 폭력적이고 강함을 볼 수 있다.이들 여주인공은 당대의 성 역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적극적이고, 여성에게 요구되었던 수동성을 벗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도 남성과 같이 똑같은 일을 할 수 있고 똑같은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의도는 좋으나, 실제로 그것이 제대로 구현되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이들은 결국 여성으로서 그 모든 일을 이룬 것이 아니라, 남성의 가면을 쓰고 입신양명을 이루었기 때문이다.세 자매의 여화위남은 여성의 현실에 대해서 일정하게 인식을 하고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현실에서 벗어나 당대의 출세한 남성과 같이 입신양명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들이 꿈꾸는 출세는 결국 유교적 이데올로기를 벗어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이러한 그들의 모습은 여성을 벗어나 남성을 지향한다는 차원과는 다르게 논의를 해야 할 듯하다. 남성과 여성의 문제로 볼 수만은 없는 것이다. 만일 이들이 여성이 아닌 남성이 되기를 원했다면 구태여 출세한 남성을 본받을 까닭은 없기 때문이다. 출장입상은 당대의 남성이라면 대부분 꿈꾸는 출세의 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출세는 쉽지가 않다. 먼저 일정한 신분을 지닌 사람만이 가능했고, 또 그러한 신분의 소유자 중에서도 능력이 있는 남성만이 획득할 수 있는 자리이다. 그런데 이는 당대의 유교적 이데올로기 내에서는 당연히 꿈꿀 수 있는 전형적인 모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
    인문/어학| 2012.08.02| 15페이지| 2,500원| 조회(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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