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建國準備委員會의 정치?사회적 성격에 대한 일고찰20010201이 용 만Ⅰ. 서론Ⅱ. 해방 전후의 일반적 상황1. 해방 전후의 사회적 구조2. 국내 정치세력의 준비상황Ⅲ. 建國準備委員會의 형성과 활동상황1. 建準의 형성2 建準의 활동상황Ⅳ. 建準의 정치?사회적 성격Ⅴ. 결론참고문헌☞ 目 次 ☜Ⅰ. 서 론해방직후부터 정부수립까지의 격동기는 새로운 국가건설의 시기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그 전개과정과 양상은 한반도의 분단과 냉전구조속의 대립문제, 정치권력의 정당성과 민주화문제, 경제의 대외의존문제 등 현실의 우리 정치?경제 상황을 이해하는데도 커다란 시사점을 전해준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현재 나타나고 있는 이러한 여러 문제는 이 기간 동안에 미소의 이익이라는 외부적 제약조건과, 독립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한민족 내부의 민족적 또는 통일적 자세의 결핍 등이 초래한 결과이기 때문이다.이에 본 논문은 해방 후 가장 먼저 활동을 벌였던 朝鮮建國準備委員會(이하‘建準’으로 칭함)의 성격을 정치?사회적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지금까지의 建準에 대한 연구의 내용은 建準의 조직과정 및 부서, 선언문, 강령 등 建準의 활동내용과 해체경위 등을 역사적 사실에 기초를 두고 연구한 것)과 建準의 성격을 주로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연구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따라서 기존의 연구결과와 자료들을 바탕으로 해방 전후의 상황에서 일반민중이 원하는 사회, 즉 그들이 원하는 새로운 질서와 관련하여 建準의 활동내용을 고찰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측면에 강조점을 두면서 建準의 정치?사회적 성격을 밝히고, 그 위치를 평가하고자 한다.Ⅱ. 해방 전후의 일반적 상황1. 해방 전후의 사회적 구조2차대전의 결과 일본이 패망하고 연합국측이 승리함에 따라 일본의 식민지로 있던 한국은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국이 해방된 것은 국제정세의 급속한 변동 결과일 뿐 한국민의 반식민지 투쟁의 결과는 아니었다. 따라서 한국의 해방이 2차대전의 부산물이자 미소의 이해관계의 절충과 대립의 소산이었다는 점)은 금후 한국의 국가형성과정을 결정짓는 중요한 외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즉 한국의 해방이 일제하의 민족투쟁에서 얻어진 구체적인 승리의 결과가 아니었기 때문에 해방이후에 있어서도 갖가지의 타율적 제약을 피할 도리가 없었고, 국가형성에 참여하려는 모든 사회세력은 어떠한 형태이든 미국 및 소련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 했던 것이다.또한 일본의 식민지체제는 한민족 내에 사회, 경제적으로 대립되는 두 계층을 형성시켰다. 한편으로 식민지체제로부터 이익을 얻는 지주, 관료, 산업자본가 계층을 형성시켰고, 다른 한편으로 체제로부터 수탈당하는 농민, 노동자, 이주민 계층을 형성시켰다.) 따라서 식민지 지배체제의 와해와 함께 전자는 일제의 지배구조 자체보다는 일인의 추방만을 원하며 오히려 일인이 차지하였던 지위까지 독점함으로써 지배계층의 지위를 보다 더 확고히 유지하려 하였던 반면 이와 같은 지배구조의 보수성과는 달리 일제하에서 수탈당하던 피지배계층의 경우는 전혀 다른 해방의 기대를 갖고 있었다.)2. 국내 정치세력의 준비상황광복과 함께 국내 정치세력의 해방에 대한 준비태세를 살펴보면 이 땅의 지도층은 해방을 맞을 준비를 거의 하고 있지 않았다. 물론 민중적 차원에서의 항일투쟁은 산발적으로 전국 도처에서 전개되어 왔다. 그러나 지도층은 냉혹한 총독경찰의 탄압에 검거, 투옥되거나 친일 전향하여 해방 당시에는 여운형의 ‘건국동맹’) 외에는 이렇다할 통일 조직이 없었다. 특히 우파라 지목된 인사들은 상당수가 부일, 협력하여 소극적으로나마 민족적 양심을 지키지 못하고 있었다.)Ⅲ. 朝鮮建國準備委員會의 조직과 활동1. 建準의 형성해방과 함께 총독부 당국자들이 무엇보다도 두려워한 것은 ‘조선인들이 폭도화하여 일본인들을 죽이고 방화하고 약탈하는 행동으로 나오지 않을까’하는 점이었다. 이에 1945년 8월 15일 아침 엔도 정무총감은 여운형을 만나 치안을 교섭하고, 여운형은 몇 가지 요구조항을 조건으로 이를 수락하였다.) 이에 여운형은 15일 저녁 서울 계동 임용상 소유의 양옥 건물에서 역사적인 「朝鮮建國準備委員會」를 조직하였다.여운형이 총독부 당국으로부터 교섭을 받기 이전에 여운형은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8월 12일과 13일에 걸쳐 송진우측에 건국준비를 위한 활동에 협력하기를 제의했으나 양측의 의견대립으로 결렬되었다. 송진우를 포함한 당시의 국내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2차 대전의 종전과 그에 따르는 민족해방이 예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강구치 못하였을 뿐 아니라 해방을 맞이하고도 속수무책으로 연합국의 진주와 임시정부 환국만을 기다리고 있었다.)2. 建準의 활동상황建準은 8월 15일 밤부터 조직에 착수하고 8월 16일 아침, 서울에 민심안정을 도모하는 전단을 살포하였다. 이어서 8월 22일 建準은 중앙기구를 12부 1국으로 개편하였고 25일는 선언과 강령을 발표하였다. 그 요지를 보면 建準은 완전한 독립국가의 수립을 위한 산파적 역할을 담당하는 과도적 조직체이며 과거 일제와 밀착되어 왔던 반민족 세력만을 제외한 각계각층의 정치? 사회적 지도자들을 모두 망라한 국내외 진보적 민주주의 세력의 통일전선임을 주장하였다.)또한 ‘건국치안대’를 조직해 서울의 치안확보를 위하여 밤낮으로 노력하였고, 1942년부터 여운형의 지시로 활동해온 식량조사위원회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어 식량조사와 대책수립을 담당하였다.따라서 일반인들은 建準에 지지를 보내고 있었고, 建準은 노동자와 농민층을 주요 세력기반으로 하는 한반도 전체 중앙통치체제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앞으로야 어찌되든 간에 9월 7일까지의 여운형이 시도하고 이끄는 이러한 건국 작업은 그 빛을 더해갔고 많은 민중의 지지와 박수를 받은 것이 사실이었다.Ⅳ. 建準의 정치사회적 성격지금까지 建準의 조직형성과 활동상황을 살펴보았다. 여기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하여 몇 가지 측면에서 建準의 정치사회적 성격을 살피고자 한다.첫째, 建準은 그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음 단계의 정부수립을 기초하는 준비 기관이었다. 해방 전후의 일반적 상황과 국내의 준비태세를 보면 여운형의 ‘건국동맹’외에는 해방이 된 후의 건국준비를 하고 있던 통일조직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建準은 국내의 건국동맹을 발전적으로 확장해서 결성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도 어느 정도 정통성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된다.)둘째, 建準은 새롭고 완전한 정부수립을 위하여 산파적 역할을 하는 과도적 기관이었기 때문에 각계각층의 지도층을 망라하려고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해방 즈음 국내정치의 이데올로기적 상황을 보면 그 이전의 국내 항일 노선의 분열이 이데올로기상의 대립으로 발전하여 좌우파의 심한 갈등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建準은 좌우대립의 상황적 조건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기는 했으나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극복하고 중간노선 중심으로 각 정치세력을 망라하여, 민의를 수렴한 통일정부 수립의 준비 기관으로서의 성격이 강하였다.셋째, 建準은 해방 후의 新 국가건설을 바라는 민중의 기대와 요구에 어느 정도 부응한 조직체였다. 물론 建準이 정치적 조직으로서의 요건을 제대로 갖추었느냐에 대해서는 좀 더 많은 연구와 신중한 평가가 필요하겠지만 해방한국이 당면한 과제를 실천하는데 있어 그 노력은 정당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해방과 함께 시급히 요구된 것이 우선 치안질서의 확립과 민중에 대한 진로 제시 그리고 고조된 애국열을 새로운 국가 건설의 준비 작업으로 집결시키는 일이었다고 볼 때 建準은 이러한 정치?사회적 요구의 필요성에 부응하여 출현하고 또 중요한 임무를 담당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Ⅴ. 결론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建準은 민족구성원 전체의 요구에 부응한 조직체로 활동하였으며, 항일투쟁기에 있어서의 국내 저항세력의 집결체로서 ‘완전독립국가’ 건설에 목표를 둔 정부수립의 준비 기관이었다. 建準이 조직된 과정과 그 활동내용 그리고 당시 사회적 구조를 분석해 볼 때, 建準은 자파의 이익만을 도모한 이익집단이 아니라 항일투쟁기로부터 형성되어온 좌?우파의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연합세력이었으며, 해체 이후에도 계속 통일전선을 주도한 세력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그러나 그 전개과정에서 각 세력간의 서로 다른 정치적 구상을 수렴시키지 못함으로서 좌우세력연합을 성취하지 못했고, 강대국의 한반도 분할정책과 상반된 정책노선을 지향함으로 인해 정권수립 과정에서 탈락되고 말았다. 이러한 실패로 인해 통일전선 노력은 좌절되었고 이는 분단 상황으로 종결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따라서 建準은 일본에서 미국으로 그 지배세력이 대체되었을 뿐인 해방 후 정치상황에서 민족의 자주적 역량을 발휘한 유일한 조직체였으며, 분단 상황의 극복을 모색하는 출발점이 된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중요하고도 의미 있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본다.◎ 참 고 문 헌 ◎♠ 단행본? 강만길, 『고쳐 쓴 한국현대사』, 창작과비평사, 1994.? 강만길 外, 『해방 전후사의 인식 Ⅱ』, 한길사, 1985.? 송건호 外, 『해방 전후사의 인식 Ⅰ』, 한길사, 1980.? 송남헌, 『한국 현대정치사 Ⅰ』, 성문각, 1980.? 안병직 外, 『변혁시대의 한국사』, 동평사, 1980.? 이대근 外, 『한국자본주의론』, 까치, 1984.? B. Cumings, 『분단전후의 현대사』, 일월서각, 1983.? B. Cumings,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