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정권수립과정에 대한 고찰Ⅰ.서론Ⅱ.시기에 따른 북한 정권수립과 변천과정ⅰ.해방으로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까지ⅱ.한국전쟁과 북한체제의 변모ⅲ.전후 김일성 유일체제 형성과정ⅳ.김정일 체제의 구축과정과 형성Ⅲ.결론Ⅰ. 서론1945년 8월 15일 우리민족은 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36년간의 일제식민지생활에 종지부를 찍는다. 그러나 일본패망은 연합국의 승리의 대가일 뿐 민족자주독립의 소산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민족은 ‘타율적’해방에 침묵해야했다. 곧 미국과 소련은 북위 38。선을 기준으로 우리민족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한반도분할통치를 실시한다. 이후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의 이념적 대립의 장으로 상호 적대적 정부가 세워지고, 한국전쟁을 통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으며, 지금 이 순간까지도 상호 경쟁적 쳇바퀴 속에서 반세기이상 분단의 아픔을 강요받고 있다.여기서는 소련군이 주둔했던 우리의 또 다른 반쪽, 북한정권의 수립과 전개과정을 시기별로 나눠 살펴보고자 한다. 북한정권은 해방 후 소련군의 한반도 북반부 주둔과 점령에 따른 친소적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창건, 한국전쟁과 그 시기 북한체제의 변모, 전후 김일성의 유일체제 형성과정 그리고 후계자 김정일 체제의 구축과정으로 크게 네시기로 구분해볼 수 있다. 또한 이는 더욱 세부적 사건들로 인해 확실한 구분을 형성한다.Ⅱ. 시기에 따른 북한 정권수립과 변천과정ⅰ. 해방으로부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창건까지㈀ 해방초의 정치질서1945년 8.15 해방 후 비록 쥐어진 자유였지만, 일제하 민족운동의 경험은 해방 후 민중의 정치 참여에 귀중한 밑거름이 되었다. 남한 지역과 마찬가지로 북한에서도 민중적 자치기관 설립의 움직임이 생겨났다. 이런 움직임의 중심에서는 일제하에 비타협적인 투쟁이나 혹은 소극적이나마 저항했던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였다.북한의 중심지인 평양에서 민족주의자 조만식을 필두로 1945년 8월16일 평남 건국 준비위원회가 결성되고, 소련군 진주와 함께 이 조직은 공산주의자와 합세하여 평 안남도로 밀려가게 되었다.1930년대 말 일본정부는 만주에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전개, 빨치산 운동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으며 사실상 이들을 분쇄하였다. 여기서 살아남은 소수의 빨치산들은 소련으로 넘어가게 되고, 이들을 위해 특별히 조직된 88여단에 배속된다. 이런 가운데 88여단에 복무한 한인들 중에서 제일 높은 지위와 신분을 가지고 있던 김일성이 장차 북한의 수도가 될 평양 위수 사령관의 보좌역으로 배치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김일성은 자신의 빨치산 대원들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 와서 기선 ‘푸가초프’편으로 원산에 도착하였다. 1945년 9월말에 김일성은 평양에 도착하였는데, 그의 도착은 매우 시기적절한 것이었다.마침 이때에 소련 군정당국은 조만식 및 현지 민족주의자들과 제휴하려는 노력이 실패하자 자신들의 대북한 정책 실현과정에서 의지 해야 할 새로운 인물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국내파 박헌영에 대한 소련군정의 고려도 있었으나 그에 대한 정보부족과 소련과의 연계부족, 스탈린과 그의 측근들의 마음에 들지 못했다.결국 이런 상황에서 10 14일 소련군을 환영하는 평양시 군중대회 석상에 미래의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지도자는 처음으로 군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신탁’정국과 통일전선의 협소화공산당과 조만식을 위시한 상당수의 민족주의자들의 결별을 가져온 계기는 1945년 12말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이었다. 미?소가 합의한 한국에 대한 5년간에 걸친 4개국 신탁통치실시‘는 국내에서 주로 신탁통치 실시가 부각되어 전해졌다 초기 공산당역시 반대했으나, 후에 ’신탁통치‘는 한국의 국가적 독립을 원조하기 위한 것이라는 소련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모스크바 결정지지로 선회하였다 반면 남쪽에서 김구,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우익세력들이 반탁=반공=반소 노선으로 반탁운동을 주도해갔고, 이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 지지를 들고 나온 좌익세력과 충돌을 불러왔다. 이를 통해 남한에서의 좌익세력을 잃고 북한에서는 우익 세력을 잃었다. 이러한 좌우 대립으로 한반도 민 공화국의 수립1946년 여름에 이르러 신탁통치를 거쳐 한반도에 단일 국가를 건설한다는 모스크바 3k상회의의 결정이 실현될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명백해지자 북한에서는 독자적인 국가 건설을 시작하였다.남한에서는5?10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북한에서도 북조선 인민회의 제5차회를 1848년 소집하여 북한의 총 선거일을 8월25일로 정의하였다. 선거가 진실로 ‘유례없이 활기띤’분위기 속에서 지러진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공실 발표에 의하면 등록된 유권자 99.6%가 투표에 참가했으며, 참가자의 97%가 위로부터 지명된 후보자들에 찬성하는 투표를 하였따. 선출된 3,459명의 대의원들 중에서 비공산당원이 50.1%, 북조선로동당원이 31.8%, 지도자가 바꿘채 유명무실해진 민주당 출신이 10.0%, 천도교 청우당이 나머지 8.1%를 차지하였다. 비록 선거 전날 김일성의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의 조속한 실현을 촉구하는 연설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이 선거는 분열적인 북한 국가를 더욱 합법화 시켜주는 의미를 띠게 되었다.1947년 2월17일 평양에서 고유의 입법권(스탈린식 사회와 국가론이 규정하는바 실질적인 권력이 당기구에 있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을 상징하는 인민위원회 제 1차대회가 개최되었다. 대회의 이름으로 새로운 북한 정부가 구성되었고, 나름의 의회인 북조선 인민회의가 선출되었으며 위원장으로 김일성이 선출되었다. 지역 권력기구는 1947년 초 법적으로 승인된 시, 군 및 도 인민위원회였다.국가와 당기구의 창건 및 경제개혁과 동시에 북한은 자체적인 군대 및 치안기관을 창설하기 시작하였다. 최초의 북한군부대는1946년에 이미 소련군인들 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창설되었다. 북한 자체의 군사력을 공식적으로 건설하는 경우 미군정과의 관계가 복잡해질 우려가 있어 초기에는 경찰대로 위장하였다. 1946년에는 소련군정의 적극적인 관여 하에 간부장교 양성준비가 진행되었고 이 학교는 북한이 자체 군사력 창설에 관해 공식발표를 한 몇 개월 후 군관학교라는 이름으로 그러나 미국의 극동방위전선에서 제외시킨다고 하였던 애치슨라인 선언과는 달리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미국의 조치에 봉착하였다.즉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여 상임이사국 중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북한의 남침을‘평화를 파괴하는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38도선 이북으로 북한군의 즉각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김일서은 거절하고, 북한은 미국을 포함한 16개 UN회원국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을 대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초반 인민군의 우세는 1950년 9월15일 맥아더 사령관의 지휘 하에 실시된 인천 상률작전의 방어에 실패함으로써 이후 9월28일 서울을 다시 내놓을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계속적인 패전과 후퇴로 11월8일엔 전선이 압록강으로 이동할 정도였다. 하지만 전세는 1950년11월7일 중공군의 참전으로 다시 한 번 역전되어 전선이 북위 37도선에서 형성되다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개막되고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이 서명되었다. 결국 한국전쟁은 휴전선으로 대치되며 끝났다.한국전쟁은 미국을 축으로 한 유엔군의 반격에 의해 김일성이 의도한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통해 김일성은 현시 적이거나 잠재적인 그의 정적들을 제거 할 수 있는 기회를 확보하였다.㈂전쟁의 실패와 책임중국 인민 지원군의 개입으로 사각에서 간신히 벗어난 북한 지도부는 전열을 재 정비해야만했다. 1950년 12울 강계에서 열린 당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는 전선과 후방을 강화하기 위한 절박한 과업들을 내놓았다. 이 회의에서 전쟁과정에서 과오를 범한 당 간부와 군 지위관들에 대한 엄격한 비판이 가해지고 이미 김일(소위성 문화부상),무정(제2군단장),임춘추(북강원도 도당위원장), 김한중(사단장), 최관(사단장)등이 철칙 내지 출당 처분을 받았다.또한 전쟁의 실패는 북한 정치 지형의 재편을 불러 일으켰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박헌영과 남로당 계열이 정치무대에서 제거된 것을 들 수 있다. 해방 후 한때 김일성보다 높은 지위를 지녔던 까닭에 비록 북한표시했다. 그러나 스탈린사망과 흐루시초프의 스탈 린격하 운동은 중소분열의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김일성은 1955년 주체노선을 주창 게된다. 또한 이때김일성 반대파들의 도전이 시작되었는데 그들의 김일성의 권력독 점, 개인숭배 등을 문제 삼으며 전면적인 반 김일성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 에 김일성 반대파의 핵심인물들을 해임하고, 그 자리에 친 김일성파로 구성했다. 이 런 내각구성으로 로동당3차 대회에서 행정권을 장악한 김일성파가 당의 완전한 지 배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② 8월종파사건김일성의 반대파에 대한 당과 내각으로부터의 배제는 1956년 8월에 일어났던 소위 ‘8월종파사건’으로 표출된다. 이는 김일성이 소련 및 동구사회주의권국가를 방문한 직후 8월30일 평양예술극장에서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개최되고, 김일성의 해외 여행보고가 있었다. 그 와중 연안파인 상업상 윤공흠이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비판하 며 소련식 집단지도체제를 주장하였다. 이 같은 윤공흠의 주장에 대해서 반 김일성 파는 동조하였으나, 당과 정권기관, 군 등의 권력 핵심을 쥐고있는 김일성에게는 어 림 없었다. 결국 이들은 휴회중 중국으로 달아나고 김일서은 이들을 제명과 출당시 키지만 후에 소련과 중국의 압력 속에 다시 이들을 복권시킨다.이 사건을 통해 김일성은 독자노선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1956년 전원회의 에서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당중앙위원회는 소련과 중국의 개입을 차단하였고 이 른바 반 종파투쟁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③ 김일성 승리의 로동당 제4차대회1961년 9월11일부터 18일까지 열린 로동당 제4차 대회는 모든 파벌주의가 제거된 김일성파의 승리 집회였다. 이 대회는 당의 역사상 최대 규모로 치러졌고 국가와 공 산당을 대표하는 많은 외교사절단이 참석했다. 이를 통해 김일성집단은 새로운 시대 를 열고 ‘4대군사노선’ 전인민의 무장화, 전지역의 요새화, 전군의 간부화, 장비의 현대화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 4기 5차 전원회의에서 채택하여 병영국가로의 탈바꿈시키는 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