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을 비롯한 몇몇 나라들을 제외하면 지금의 세계는 하나의 패러다임- 개방과 경쟁으로 대표되는-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지금까지의 세계 역사가 정치, 궁극적으로는 전쟁으로 마감되는 구조로 진행되어 왔다면, 최근 몇 년 전부터는 정치보다는 경제 논리가 세계의 구동원리가 되고 있다. 이제 정치, 외교, 심지어 문화까지도 경제의 영역 안에서 논의되고 있는것이 세계적인 흐름인 것이다. 그런데 현 시대의 경제라는 개념은 이제까지의 경제라는 개념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그것은 개방과 경쟁, 자유거래, 더 나아가 효율성의 확산이라는 개념들을 동반하고 있다. 굳이 한단어로 표현하자면 ‘신 자유주의’ 또는 ‘신 보수주의’ 정도로 바꾸어 볼 수 있겠지만, 그것들은 이미 우리나라에서 정치적으로 많이 이용당해서 그 본연의 의미를 많이 상실해 버렸다. 중요한 것은 현 세계는 신 자유주의의 흐름을 타고 있다는 것이다. 냉전이 종식된 후에 러시아는 개방을 하고 시장경제 체제를 받아들이게 된다. 중국 역시 세계의 공장으로서 시장경제를 통해 초강대국으로 부활하려 하고 있다. 중동의 여러 나라들도 개방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이런 흐름의 도움으로 사상 최대의 수출액을 달성했다. 이처럼 세계가 개방과 경쟁의 시대 속에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또한 중요한 사실은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아니 어쩌면 영원히, 이러한 세계의 흐름이 필연적으로 지속된다는 것이다.세계화, 글로벌화,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독립에 가치를 두는 개념들이다. 그것들은 개인의 존엄을 인정하는 개인주의를 밑바탕으로 한다. 이것은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타인역시 한 개인이기 때문에 타인을 자신만큼 존중한다는 점에서 이기주의와는 구별된다. 이 사상은 서양문화권에서 만들어진 사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동양문화권에는 낯설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뚜렷하게 구분되지 못하고 있다. 개인주의의 이기주의화는 우리나라의 국가 위기와도 큰 연관이 있어서 철틀림없다. 최근 내수가 살아나고 있는 추세라고는 하지만 경기침체가 상당히 길었고 지금의 회복세는 최저점을 빠져나온 수준에 불과하다. 또한 실업률이라는 것은 경기에 뒤따라가는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청년실업은 꽤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또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만드는 큰 요인으로 꼽히는 북한이라는 존재와 급속한 노령화는 우리나라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최근에는 유가의 폭등과 중국의 추격으로 인해 그나마 버팀목이었던 수출마저 낙관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이와 같은 상황으로 볼 때 현재 우리나라가 위기라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공병호저 ‘10년 후 한국’에서 우리나라의 현 모습과 나아갈 길을 볼 수 있다. 공병호는 보수주의의 시각으로 한국 사회를 위기에서 극복시키려 한다. 나의 견해도 그와 비슷하기 때문에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다. 처음에 경영 경제 관련 서적이기 때문에 경제적인 측면에서 우리나라를 바라본 책으로 생각했었다. 물론 저자 본인도 실용주의적 인물이고 경제를 우선적 가치로 쓴 글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에 가치를 두고 싶은 것은 그가 한국 경제를 경제적 측면뿐 아니라 총체적인 관점에서 접근했다는 것이다.그는 우리나라가 보이는 것 이상으로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고 판단했다. 앞서 언급한내수의 심각한 부진과 높은 실업률, 고령화 사회 등과 같은 데이터화 된 현상적 요인들 말고도 정신적인 측면 즉, 젊은 세대들의 모험정신 부재와 철지난 이념대립, 포퓰리즘 등 사회적 문제들도 우리나라의 현실에 큰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보았다. 나름대로 경영학도로서 우리나라의 경제문제를 고민해 보았지만 경제문제를 정치적, 사회적으로 생각해 보지는 못했다. 많은 부분을 공감 할 수 있었고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내 생각을 정리하는데 큰 영향을 받았다.그는 우선 젊은이들이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 위해 경쟁하는 상황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개인들이 업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해외에서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는 주체는 전부 다 기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지만 일방적으로 젊은 세대들에게 기업가정신을 가지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책임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그들이 새로운 기업을 하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사업 실패의 후유증이 매우 크고 안전망이 없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제도적으로 확립되지 않는 이상 젊은이들에게 기업가 정신을 일방적으로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기업가 정신의 실종 말고도 우리나라의 문제는 교육에 있다. 시대 흐름에 부합하지 못하면 곧바로 낙오되는 이 시대에, 우리나라의 교육은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지 못하는 정도를 벗어나 역행하고 있는 정도이다. 교육도 산업이라는 마인드를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모든 것이 개방되어 경쟁하지 않으면 낙오되는 현실에서 아직도 우리나라는 교육은 공공분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 문제의 원인인 것이다. 정부에서 교육을 공공재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시대에 맞는 질 높은 교육을 하지 못하고 모두가 같은 교육을 받게 되는 하향 평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교육계에 몸담고 있는 교수들의 자녀들이 조기유학을 많이 간다는 데에서 증명할 수 있다. 애써 벌어들인 외화를 유학비용으로 탕진해 버리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한 탓일까. 최근에 교육부장관 자리에 김진표 전 경제부총리가 내정되었다. 발표 직후 많은 곳에서 교육부장관에 경제인이 들어섰다는 사실에 우려를 나타냈지만 나는 김진표라는 인물에 대한 지지라기보다는 교육의 경쟁력 제고라는 측면에서 바람직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14년 동안 우리나라 정규 과정의 교육을 받아온 나는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피부로 느끼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교육에 있다고 생각한다. 다같이 똑같은 교육을 받는 것이 참 복지의 실현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외국어를 제대로 배울 환경도 되어있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 못지않게 저자는 우리나라 진보 진영에 대한 비판과 그것의 중심에 있는 노동조합의 권력화, 그리고 그것의 동력원인 포퓰리즘을 비판하는 데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그만큼 그가 이것들을 우리나라의 가장 심각한 문제로서 여기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진보세력에 대해 강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개혁이라는 이름 하에 집결된 대중들이 우리나라의 성장에 큰 마이너스 요인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선진 국가들에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있는 진보 세력들이 우리나라에서는 득세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진보 세력은 마르크스주의를 토대로 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공동으로 생산해서 공동으로 나누어 갖는 이상적인 사회를 지향하는 사상이다. 그렇지만 이제까지 인류 역사상 위와 같은 시도는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진보 세력의 사람들은 그것이 이론을 완전히 현실에 적응 시키지 못해서 실패 했을 뿐이라고 치부한다. 그렇지만 인간은 집단을 이루고 살아가지만 집단의 이익이 개인의 이익보다 우선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은 간과하고 있다. 지구 절반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있었고 어느 한 나라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더구나 북한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르크스주의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증명해 준다.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북한만 보더라도, 개인이 집단보다 우선하지 못하면 그 안에는 인권 같은 개념은 존재할 수도 없게 된다. 또한 지금 우리가 누리는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도 없게 된다. 우리가 사회주의적인 사회로 나아간다면 우리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이 세계에서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부유세를 과세해야 할 사람조차 없게 되지 않을까.진보 세력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 관념 중에 가장 위험한 것은 다수의 빈곤층이 소수의 부유층에게 약탈당했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가진 자들에 대한 반감은 서로에게 피해만 갈 뿐 아무것도 나아지는 것이 없다. 실제로 가진 자들에 대해 반감이 상당히 덜 한 미국을 보면 소수의 가진 자들이 사회적 부, 파이를 크게 키우고 나라를 부가 없는 것이다. 사회적 부를 모두가 똑같이 나누어야 하는 시스템이라면 어느 누가 뼈를 깎는 혁신을 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려 하겠는가? 정부가 아니라면 연구 개발비에 투자할 주체도 없고 인류 문명은 제자리걸음을 걸을 것이다. 당장 다음 달부터 우리나라의 부유층에 엄청난 부유세를 부과하는 법이 통과되었다고 가정해보자. 부유층이 고스란히 세금을 다 납부할 것인가?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본을 해외로 이전시킬 것이다. 진보정당과 많은 빈곤층에서 강한 반발을 일으키겠지만 세계화 시대에 자본의 이탈은 막을 수 없다. 만약 법으로 자본의 이탈을 막는다면 국제적 비난과 그에 다른 국가 손실은 빠져나가려던 자본보다 몇 배는 더 클 것이다. 부유층의 재산들만 해외로 빠져나간다면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더 이상 이 땅에서 부가 창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애써 벌어봤자 돌아오는 보상이 작기 때문에 사람들은 새로운 부를 창출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이미 만들어진 부에서 나눠 먹는 일에 더 매달릴 것이다. 그런 상황이 지속되면 우리의 파이는 다른 나라에게 빼앗겨 더 작아질 것이 분명하다.인간은 자신에게 이익이 없으면 강제가 아닌 이상 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매우 기초적이고 단순한 인간의 본성이다. 이것을 간과한 사회주의는 결국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른 선진국에서는 이미 논의가 끝난 이념들이 왜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소모적 논쟁을 그치지 않고 있는 것일까.진보 세력의 근본적인 사상이 현실에 맞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철회되어야 국가의 발전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이념 논쟁을 떠나서 실제적으로 노동조합들로 대표되는 진보 진영의 행동은 더욱더 한국의 앞날을 어둡게 하고 있다.노동조합은 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약자인 노동자들이 부당한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노동조합은 단체의 설립 목적을 벗어나 있다. 노동조합은 회사의 경영을 하지 못할 정도로 간섭을 하고 있고 정
과 전국적으로 높은 흥행을 기록한 영화 살인의 추억 은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소재로 만든 작품이다. 그렇지만 영화 살인의 추억 은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직접 변용시킨 것은 아니다. 그 이전의 작품 날 보러 와요 라는 희곡을 각색한 것이다. 날 보러 와요 는 1996년 김광림의 작품으로서 화성 연쇄 살인 사건 용의자를 찾아내기 위한 형사들의 고뇌와 아픔을 그린 희곡이다. 이 희곡을 영화화한 살인이 추억이 많은 찬사와 동시에 흥행에 성공함으로써 원작 희곡이 다시금 주목을 받게 되었다. 영화 살인의 추억이 김광림의 희곡 날 보러 와요 를 각색한 작품이지만 두 작품은 소재와 스토리를 제외하면 많은 차이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다른 작품이다.희곡과 영화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장르이다. 희곡이라는 장르와 영화의 시나리오는 상당히 비슷한 장르이지만, 그것의 결과물인 연극과 영화를 비교해본다면 결과는 그렇지 않게 된다. 그것은 희곡이 공연 예술이고 영화가 영상 예술이기 때문일 것이다. 희곡은 공연예술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직접 실시간으로 관객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예를 들면 서울을 배경으로 한 씬이 진행되고 다음 씬은 미국을 배경으로 씬을 진행해야 때 연극은 암전을 거쳐 무대 배경을 바꾸어야 한다. 그렇지만 영화는 서울과 미국(또는 미국을 배경으로 만든 곳에서)을 배경으로 촬영을 한 후 편집으로 붙이면 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시간의 제약에서 벗어나서 모든 것을 만든 후에 편집을 거쳐 관객들에게 상영 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연극에 비해 영화가 갖는 장점인 시간, 공간의 자유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자유성을 탄생하게 해준 상영이라는 개념은 그동안 연극이 가지고 있던 관객과의 호흡이라는 장점을 놓치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그런데 두 작품, 영화와 연극을 비교하는 데에서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날 보러 와요 와 살인의 추억 은 앞서 언급된 장르적 상이성 때문에 그 두 작품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두 작품은 같은 소재, 비슷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지만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고 그 차이는 장르적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장르적 차이에서 기인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날 보러 와요 가 살인의 추억 으로 변용 될 때 영화만의 장점인 시간, 공간의 자유가 크게 반영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그러면 무엇이 두 작품을 다르게 느껴지게 했다는 것일까? 나는 두 작품이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찾아보려 한다. 먼저 날 보러 와요 의 작가는 범인이 누구일까? 라는 물음엔 큰 관심이 없는 듯 하다. 그가 그보다 더 중요하게 말하려 하는 것은 어려운 사건을 둘러싼 인물들 간의 갈등이다. 어려운 난관 속에서 구성원들끼리 부딪히는 갈등에서부터 로맨스까지 작가는 인간 공동체를 말하고 싶어 했던 것이 아닐까. 영화에서 남녀 간의 로맨스가 완전히 삭제된 것은 이 같은 사실을 잘 말해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또한 연쇄 살인 사건을 조사하는 형사들은 마치 사회 계층을 대변하는 듯한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 명문대 출신의 지적인 사람에서부터 구수한 시골정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까지, 그것은 틀에 박힌 시대에서 이제 막 벗어나 다원화 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축소판 같은 느낌을 들게 해 준다. 다양한 개성을 지니고 있지만 끊임없이 갈등이 생겨나고 그렇지만 끈끈한, 우리나라 사회의 알 수 없는 특징이자 매력을 드러내 보인다.이와는 반대로 영화 살인의 추억 은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과 마지막 용의자가 정말 범인일까라는 물음에 더 집중하고 있다. 형사들의 수사 과정을 더욱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고 작품 전체의 인과성과 개연성도 날 보러 와요 보다 더욱 긴밀하게 짜여져 있다. 원작이 작품의 짜임새면에서 조금은 떨어졌던 면을 영화에서는 극복한 것 같다.
라쇼몽과 철학1. 전체적 느낌현대 철학사조 수업을 위해 시청한 라쇼몽 은 내가 처음으로 접한 일본영화였다. 간간히 일본영화의 프리뷰나 편집된 장면은 본 적이 있어도 정식으로 영화 한 편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렇다고 내가 일본 문화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음악에 관심이 많은 터라 일본 음악은 일찍이 접해 왔기 때문에 일본 문화에 대한 거부감은 크지 않다.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명성은 대중매체를 통해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대표작 7인의 사무라이 는 평소에도 보고 싶었던 작품이었다. 비록 7인의 사무라이 는 아니었지만 언젠가 보려고 마음먹고 있었던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작품이라는 점과 금세기 최고의 영화로 선정되었다는 교수님의 말씀은 나에게 아주 큰 기대를 심어 주었다.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이 있다. 50년대 작품이라 그런지 요즘의 영화같이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몰입감은 없었다. 그러나 영화가 약간은 지루하다고 느껴질 때 쯤 문득 든 생각은, 정신없는 화면의 움직임, 긴박하고 자극적인 것에 익숙해 져 있는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누군가 내게 자극적이고 긴박한 즐거움에 길들여지는게 왜 나쁜 것이냐고 물어본다면 그것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은 내게 없다. 그렇지만 내가 그렇게 되어가는 내 자신을 거부하려 했던 감정의 발생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영화를 보면서 잃어버린 차분함과 느림의 즐거움을 느껴보려 노력하였다. 그 덕분에 영화를 음미하면서 볼 수 있었고 또 이것이 앞으로 오래된 명작들을 보는데 기초작업이 되었다고 믿는다.나는 음악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영화를 볼 때면 음악에도 집중을 많이 한다. 이 영화에서의 아쉬움은 음악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동양적(일본적)인 음악을 사용했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것이다. 과거 동양적 배경에 피아노 소리는 잘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물론 음악이 극의 긴장감에 따라 잘 맞춰가고 있기는 하지만 이 영화를 더욱더 잘 표현해 줄 수 있는 것 받은 사람일 것임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너무 특정한 문화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면 다양성의 측면에서는 인정받을 수 있겠지만 인류 보편적인 관점에서는 부정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이 영화는 동양적 느낌을 잃지 않으면서도 인류전체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닌 영화이다. 50년 후의 사람인데다가 한국 사람인 나는 이런 보편성을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나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영화는 호흡이 느린 것만 제외한다면 지금의 시각에서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만큼 작가가 관객들에게 말하고자 한 바가 50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충분히 논의할 가치가 있는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예술은 동시대의 비슷한 역사적, 문화적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 명제는 또한 예술이 영원성을 가지고 소멸하지 않는 원인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50년 전 이 영화가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이 느꼈던 것들과 50년이 지난 후 지금 시대의 사람들이 느끼는 것들이 분명 다를 것이다. 그리고 지금부터 50년 후의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느끼는 것들은 또 다를 것이다. 이처럼 작품의 물리적 속성은 그대로 이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것을 바라보는 향유자들의 시각이 변하게 되고 그것은 작품을 계속 새롭게 변화시킨다. 영화를 보면서 내 머리 속에 이러한 생각들이 즉각적으로 떠오르지 않았었기 때문에 영화를 다 보고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서야 이 영화가 왜 명화인지를 알 수 있었다. 앞서서도 언급했듯이 라쇼몽 의 감상 경험은 앞으로 내가 고전 명화들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을 볼 때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2. 어느 사람의 증언이 진실이라고 가정하였을 때 나머지 사람들은 왜 거짓말을 한 것인가?한 가지 상황에 대한 진술이 네 사람 모두 다르기 때문에 어느 한 인물이 진실을 말하고 있을 경우에 필연적으로 나머지 사람들은 거짓말을 한 것이 된다. 나는 맨 처음 시신을 발견한 노인의 진술이 사실이라고 가정을 하여 생각해보니 그 세 사람은 서로 자신이 살인자라고 말하고 있지 않았던가. 물론 여자는 정신을 잃었다면서 책임을 회피하려 하였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남편을 죽였다고 진술하지는 않는다. 분명 이기심 때문이라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남자를 죽였다고 거짓 증언을 해야 하는 데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그렇다면 왜 그들은 거짓말을 했을까? 무엇을 위해서?경제학에서는 인간을 인센티브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라고 정의한다. 그 명제를 참이라고 생각해 온 나로서는 그들이 거짓말을 할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기심으로 다시 돌아가 생각해 보기로 하였다. 이기심이 무엇인가.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자신에게 이익이 되게 하는 마음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살인범이 되지 않는 일보다 자신에게 더 가치 있는 무언가를 위해 거짓말을 했다는 논리가 나오게 된다. 과연 살인범이 되지 않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나는 그것을 명예욕 에서 찾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우선 도둑의 관점에서 볼 때 그는 그 지역에 악명 높은 도둑이었다. 누구나 그의 이름만 들으면 두려워 할 정도로 자신만의 사회적 위치가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거침없었던 도둑이 생사의 갈림길, 즉 남자와 결투가 벌어졌을 때에는 마치 아이들이 싸우는 듯한 우스꽝스러운 결투를 보여 줄 뿐만 아니라, 한없이 약한 나약한 존재로 변해 있었다.지금 노인의 진술을 사실로 받아들인 가정에서도 역시 실제 살인범이 도둑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렇지만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게 하지 않기 위하여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 실제로 그가 관아에서 증언을 할 때의 오버 액션은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에 줄 수 있을 것이다.한편 남자의 입장을 살펴본다면, 남자는 무당의 입을 빌어서 자신이 자결을 했음을 알리고 있다.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남자와 여자는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했을 때, 남자는 도둑과고 있지 않았다. 때문에 여자는 자신을 쉽게 떠날 수 있었고 결국 잃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가 자신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킬 수 있는 길은 자결이외에는 없어 보인다.또한 여자의 입장에서의 명예의 실추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회 문화적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염두 해 둘 때, 당시의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여자의 거짓말과 무관하지 않다. 과거의 여성은 정숙하고 순종적인 삶을 살아야만 했다. 어떤 여자의 실제 모습이 정숙하지도 않고 순종적이지도 않다면 그녀는 사회에서 배척당할 것이다.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여성들은 진정한 자유의지를 가지지 못하였다.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노인의 진술 하에서 여자는 위기의 상황을 통해 자신이 진정한 자유의지를 실행했다. 위기의 순간은 남편을 사랑하지도 않고 남자들은 나약한 존재라는 등의 그동안 사회적 제약에 억압당해온 모습들-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게 해준 것이다. 사회적 억압에서 벗어난 여자는 두 남자의 우스운 결투-당사자들은 죽느냐 사느냐의 중대한 문제였지만-를 이끌어냈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그렇지만 관아로 불려왔을 때 그녀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대로를 증언한다면 그녀는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될 것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에게 명예의 실추이다. 그녀는 그 시대의 여성상을 등지게 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정신을 잃고 일어나 보니 남편이 죽어있었다라고 진술을 하게 된다.결국 세 사람이 거짓말을 함으로 인해 진실은 묻혀지게 되었다. 이 같은 하나의 작은 사건에서도 진실이 쉽게 은폐되는데 하물며 거대한 인간사는 온전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과 회의가 내게 다가 왔다.3. 작품에서 논의 될 수 있는 철학적 문제. 이기심인간의 이기심은 이 작품 속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철학적 주제이다. 영화를 이끌어나가는 이기심의 구체적인 속성에 대해서는 수용자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겠지만 전체적인, 큰 틀에서의 이기심이라는 측면에서는 보편성이 있을 말했다. 또한 아기를 버리는 부모와 그 아기가 덮고 있는 이불을 훔쳐가는 상황은 모두 이 같은 인간의 속성을 잘 보여준다 할 수있다. 이러한 이기심은 일종의 반사회성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배척함으로서 자신의 이익을 얻어가려는 마음으로 정리가 된다. 영화 속에서는 이런 인간의 이기심이 부정적으로 비추어졌고 또 마지막의 아기를 데려가는 장면으로 희망을 남겨놓고 있다.그렇지만 이기심이 온전히 우리가 배척해야할 대상은 아니다. 조금 다른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인간의 이기심은 긍정적으로 평가 될 수도 있다.자연은 인간 사이의 갈등을 이용하여 인간의 모든 소질을 계발하도록 한다. 사회의 질서는 이 갈등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갈등은 인간의 반사회적 사회성 때문에 초래된다. 반사회적 사회성이란 한편으로는 사회를 분열시키려고 끊임없이 위협하고 반항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를 이루어 살려는 인간의 성향을 말한다. 이러한 성향은 분명 인간의 본성 가운데에 있다.인간은 사회 속에서만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을 사회화하고자 한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만 자신의 자연적 소질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을 개별화하거나 고립시키려는 강한 성향도 있다. 이는 자신의 의도에 따라서만 행위하려는 반사회적인 특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저항하려는 성향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 자신도 곳곳에서 저항에 부딪히게 되리라 예상한다.이러한 저항을 통하여 인간은 모든 능력을 일깨우고, 나태해지려는 성향을 극복하며, 명예욕이나 지배욕, 소유욕 등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그리하여 동시대인들 가운데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인간은 야만의 상태에서 벗어나 문화를 이룩하기 위한 진정한 진보의 첫걸음을 내딛게 된다. 이때부터 모든 능력이 점차 계발되고 아름다움을 판정하는 능력도 형성된다. 나아가 자연적 소질에 의해 도덕성을 어렴풋하게 느끼기만 하던 상태에서 벗어나, 지속적인 계몽을 통하여 구체적인 실천 원리를 된다.
‘생활의 발견’ 감상문(문예출판사, 1999년 , 안동민 옮김)사회과학계열2004311557이동재지금은 아니지만 중 고등학교 떄 까지만 해도 나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길 희망했었다. 내가 기독교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당시엔 동양 철학, 특히 노자에 관심이 있었고 도덕경도 내 나름대로 재미있게 읽고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내가 대학에 가서 철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인생을 헛되이 살게 될 거라는 일종의 숙명과도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재수를 하는 일년 동안 또다시 내 가치관과 인생관이 바뀌게 되었고 현재는 내가 원하는 직업- 철학이 아닌- 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인생의 청사진이 바뀌게 된 이유는 단순히 인문학이 배고픈 학문이기 떄문만은 아니다. 철학이란 학문을 알면 알수록 그것이 점점 궤변에 빠지고 있고 또 철학이 그것을 즐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즉 다시 말하면 학문을 위한 학문을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래서 나는 내 진로를 바꾸게 되었고 내 가치관도 실용적 가치를 무시하지 않는 방향으로 바뀌었다.수능을 마치고 대학에 들어와서 지적인 욕구를 채우고 싶은 부푼 맘을 안고 여러 강의를 듣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철학-특히 서양철학- 에 대한 감정은 대학에 들어와서 더욱 악화 되었다. 강의를 듣고 있으면 막스 베버, 마르크스 , 소쉬르 등과 같은 쟁쟁한 학자들의 이야기들에 빠져들게 된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놀라운 통찰력이다! 나도 저들 사이에 이름을 올리고 싶다! 등등 과 같은....그러나 강의를 마치고 강의실을 빠져나오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다 돌고 도는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학문을 위한 학문이라는 표현이 가장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이러한 회의가 한창 내 머리를 지배하고 있을 때 동양사상 입문 과제로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이 책은 나에게 거창한 새로운 지식을 전해주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동안 내가 막연하게 두서없이 무질서 하게 가지고 있었던 생각들을 조리 있게 정리 시켜준 아주 고마운 책이 되었다. 사사로운 감정을 배제하고 말해서 이런 좋은 책을 소개시켜주신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느낀다.이 책에서 지은이는 철학이란, 배고플 때의 밥보다 낮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과감하게 말한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가 아니라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 배부른 돼지가 낫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철학의 목적은 진리탐구에 있다. 그런데 그 진리를 찾는 이유는 우리가 더욱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의 철학은 그에게서 많이 벗어나 있다. 복잡한 개념을 남발하고 또 그래야만 무언가 인정을 받은 느낌이 드는 기형적인 세계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서 멀어지는 철학이 과연 가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얼마 전에 ‘닥터 지바고’를 읽었다. 거기에서 주인공 라라의 대화에 이런 말이 떠오른다. ‘철학은 양념 같은 것’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내가 그 장면을 읽으면서 정말 멋진 문장이라고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철학은 양념 같은 것으로 철학 자체가 주가 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이 행복해 지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은 철학은 철학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나의 개인적인 일로 인해 철학 무용론(?)이 주 무대로 등장했는데 사실 ‘생활의 발견’의 중심내용은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행복한 삶이 어떠한 삶인가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말하는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가? 진부한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순리대로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생긴 대로 사는 것이 행복이다. 배고플 때 먹고, 졸릴 때 자고, 책보고 싶을 때 책보는 것이 행복이다. 이것은 쾌락주의와는 조금 다르다. 쾌락만을 추구하다보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공허해 진다. 그 이유는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긴 대로 사는 행복은 다르다. 왜냐하면 want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need를 충족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넘치지 않게 적당히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만족하는 것이 행복인 것이다.학자들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다른 생물과 견주어서 너무나도 우월한 존재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종종 인간이 동물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라고 생각한다. 더 쉽게 말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정신 활동을 너무도 높이 사는 바람에 생물학적인 인간은 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달을 굶으면 죽는 것이 인간이고 배고프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의 본질적인 속성을 무시하는 사람은 행복을 논할 수가 없는 것이다.
공산주의 선언 감상문사회과학계열2004311557이동재공산주의 선언은 교양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읽어야 할 책이다. 그렇다고 해서내가 이 책을 읽고 공산주의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자 라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오해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책을 읽어봐야 하는 이유는 이 책을 통해 현재의 이데올로기, 즉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의식 없이 누군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간다면 그것은 본인은 물론이고 사회 전체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우리는 현재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체제 속에서 살고 있다. 거의 모든 세계가 이 단일한 체제 하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많은 문제가 있다. 하나의 체제라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체제 자체에 많은 불합리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현재의 자본주의는 초창기 자본주의의 모습으로 점점 되돌아가고 있다. 미국의 주도아래 신자유주의라는 흐름이 그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무한경쟁, 자유경쟁, 보호무역철폐, 규제완화 등의 말로써 표현될 수 있는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현 자본주의(신자유주의) 체제의 문제점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따로 언급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문제는 작지 않다. 그러나 체제에 길들여진 현 시대 사람들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잘 느끼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분명히 자본주의 체제는 인간이 계속 지니고 유지해야 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공산주의 선언을 통해서 현 사회를 바라보는 비판적 안목을 길러야 할 의무가 있지 않을까.특히나 공산주의 이념으로부터 아직까지도 영향을 받고 있는 우리는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도 공산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선입관을 갖고 있다. 그것이 비록 실패한 이념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자체를 부정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100여 년 전에 이것이 공산주의 선언이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자본주의 비판’ 정도의 제목으로 받아들이면 더 좋을 인류의 위대한 저작이라고 말하고 싶다.또한 역사 철학으로서의 공산주의 선언도 훌륭한 저작임에 분명하다. 그것이 인간을 일정한 법칙 하에서 설명하려 했고 인간의 변덕스러운 감정적인 면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점은 비판받을 수 있겠으나, (유물사관이 바탕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현상이겠지만) 역사의 흐름을 다른 어느 학자들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파악하였다는 점에서는 매우 긍정적이다.공산주의 선언의 맨 첫 문장, ‘이제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는 명제는 이것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정하기 힘든 명제일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제까지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서로 충돌하며 역사가 진행되어 왔음을 인지했다. 마치 자동차에서 휘발유의 폭발력으로 바퀴가 굴러가는 것처럼 역사에서도 계급투쟁이 역사를 진보시키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전제는 역사를 되짚어 대입시켜보면 잘 맞아 떨어진다. 그리스시대의 시민과 노예, 로마시대의 귀족과 농민, 중세 시대의 귀족과 농노, 근대의 부르주아와 프롤레탈리아.역사 철학으로서의 마르크스 이론도 가치 있는 것이지만 그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실제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고찰이 우리에겐 더욱 절실하다. 개인적으로 철학-특히 서양철학- 은 애초의 모습과는 달라져서 학문을 위한 학문이 되어 가고 있다고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감상도 역사철학 보다는 실제적인 이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냉정히 말해서 공산주의는 -비록 마르크스가 말한 대로의 진정한 공산주의는 아니었지만- 실패한 이념이다. 순결한 의지와 강한 추진력으로 현재의 러시아 땅에서 소비에트연합 (소련) 이 탄생하였지만 얼마가지 못해 스스로 붕괴해 버렸다. 실패의 원인으로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주요한 몇 가지 원인으로서는,1.성숙한 자본주의 단계에서 공산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봉건체제에서 곧바로 공산화가 되어서 분배할 빵의 크기가 작았다.2. 너무나 ‘이성적인’ 이념이어서 인간의 감정적인 면을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3. 적당한 경쟁의 필요성을 간과했다.이러한 이유 등으로 인해 실패로 끝났지만 그들이 추구하였던 가치는 인류사에 길이길이 남을 것이다. 새로운 이념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주도적으로 실천해 본적 없는 우리 민족이 이럴 때는 많이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러시아는 혁명이 실패로 끝나고 그 여파로 인해 현재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지만 나는 러시아를 존경한다. 결과는 부정적이었지만 그들은 정말로 참다운 세상을 만들어 보고자 했고, 또 옳다고 믿은 가치를 여러 불리한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추진하였다. 러시아는 지금도 자본주의의 모순을 알고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다. 맹목적으로 그저 물질만 좇아 체제에 대한 아무런 반성 없이 사는 우리들과는 다르다.다시 돌아와서, 그렇다면 공산주의 선언에 나와 있는 그 길이 남을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사는 사회를 만들려고 했던 의지이다. 이제까지의 역사를 보았을 때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살기위한 혁명은 없었다. 동양은 말할 것도 없고, 고대 그리스부터 시민혁명에 이르기 까지 어느 한 계급의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싸움이 곧 혁명이었다. 그렇지만 공산 혁명은 조금 다르다. 물론 당장이야 프롤레탈리아 계급이 부르주아 계급을 몰아내자는 것이지만, 그들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사회는 계급이 사라진 완전 평등의 사회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완전 평등이 실현 될 수 있는 것인가?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 부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그들은 그 고가의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음으로써 일하지 않으면서도 일하는 사람보다 더 많은 부를 얻는다. 직접적인 예로써 빌딩 소유주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고가의 빌딩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그곳에서 임대료를 받음으로써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있다. 정작 생산을 담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생활하기 빠듯한 월급만을 받고 그 소유주의 배를 채워주고 있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의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 이외에는 의지할 것이 없기 때문에 여러 가지 사회 환경- 부르주아 계급. 경제 변동 등- 에 좌우되는 어려운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