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와 해탈의 서사구조로 본 《홍루몽》-가보옥의 행적을 중심으로Ⅰ. 서론Ⅱ. 불교의 윤회사상 및 해탈1. 윤회사상2. 해탈Ⅲ. 윤회와 해탈의 서사구조1. 서사구조상의 특징2. 가보옥의 행적Ⅳ. 결론Ⅰ. 서론《홍루몽(紅樓夢)》을 불교와 연관시켜 연구한 많은 논문들에서는 그 대부분이 《홍루몽》의 주제가 불교의 교리와 관련된 ‘인생여몽(人生如夢)’이나 ‘만경귀(개)공(萬境歸(皆)空)’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거나 《홍루몽》의 내용에 불교와 관련된 요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단순히 언급하는 정도에서만 그치고 있다. 이러한 연구방식은 《홍루몽》을 텍스트에 천착하여 불교적 요소들을 하나하나 발견해 내는 것을 통한 세밀한 텍스트적 분석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청대(淸代) 초기였던 저작 당시 민간에 불교가 많이 퍼져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홍루몽》이 당대의 사회상과 작가인 조설근(曹雪芹)) 자신의 체험을 반영한 사실주의적 소설이라는 것을 밝히는 데 의의가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방식은 이미 공공연히 알려져 있는 사실인 《홍루몽》에 불교적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과 사실주의적 소설임을 단순히 밝히는 데에 그친다. 나아가 이러한 연구 방식은 소설의 내용과 관련된 큰 틀에서의 분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한 한계가 있다. 그리고 《홍루몽》의 불교적 색채를 통해 결국 불교의 교리인 ‘인생여몽’이나 ‘만경귀(개)공’이 홍루몽의 주된 주제임을 밝히는 방식의 연구 또한 이미 밝혀져 있는 주제를 다시 확인하는 단계에서 그친다는 점과 큰 서사구조를 가진 《홍루몽》을 전체적으로 조망하지는 못한다는 점을 고려해 보았을 때에는 그 연구의 깊이가 제한적일 수 있다고 판단된다.필자는 이러한 불교와 연관시켜 고찰한 기존 《홍루몽》 관련 논문들의 한계를 넘어서 불교와 관련한 연구를 하되, 《홍루몽》을 큰 틀에서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맥락을 찾고자 하였다. 이에 본고에서는 《홍루몽》에 단순히 불교적 색채가 존재함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홍루몽》을 일관된 서사구조를 가한 육체가 90년 또는 100년의 수명을 누리고 다음 세상으로 떠나는 것과 같이 한정된 삶의 기간이 끝나면 곧 몸의 종류를 달리(異類異熟)하여 삼계 내의 타계로 가서 태어난다는 윤회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불교에서는 중생의 윤회 기간을 생유(生有), 본유(本有), 사유(死有), 중유(中有)의 네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즉 생유는 인간이 태어나는 찰나를 말하고, 본유는 이 세상에 출생하여 살아 있는 동안을 뜻하며, 사유는 죽는 순간을 뜻하고, 중유는 죽어서 내생에 다시 태어나는 순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그런데 이러한 윤회사상을 바탕으로 한 윤회의 주체를 설정하는 문제에는 여러 가지 설이 부분하다. 따라서 가보옥을 윤회하여 해탈하는 인물로 설정하려면 곧 가보옥이 윤회의 주체가 되게 되는데, 이 부분을 명확히 하기 위해 윤회의 주체 설정 문제를 본고에서 간단히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붓다(부처)는 영혼이나 다른 세계의 존재 유무에 대해서는 침묵하였다. 따라서 무아(無我)의 의미를 유아(有我)의 반대 개념, 즉 “아(我)가 없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이상 불교에서는 윤회의 주체를 인정할 수 없다. 결국 무아 윤회가 유일한 대안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아 윤회의 입장에서는 생에서 생으로 옮겨 다니는 영혼, 혹은 개아(個我)의 이행과 같은 개념은 없다. 윤회는 단지 업의 상속(相續)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불교에서는 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론을 기본원리로 갖고 있는데, 이를 토대로 윤회의 주체를 설정하고자 할 때 그 주체는 영혼이나, 특정한 개체 등이 될 수 없으며 단지 업의 상속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본고에서는 《홍루몽》에서 윤회의 주체를 가보옥으로 설정하고자 한다. 앞서 논의한 ‘무아 윤회’를 바탕으로 생각해 본다면 가보옥 또한 영혼이나 개아의 개념이 아니라 단순한 업의 상속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불교의 교리를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 이 세계에는 ‘아(我)’라는 것은 결국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홍루몽》에 등장하는나 하나인 마음(一心)의 원천을 향한 돌이킴은 해탈로 내딛는 첫 걸음이라 할 수 있다. 이 ‘돌이킴’의 구체적인 방법으로써 원효는 다섯 가지의 실천 덕목을 강조한다.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지관(止觀)’의 육바라밀(六波羅密)의 실천이 그것이다. 이들의 실천을 통하여 하나인 마음의 원천에 돌아갈 수 있고 그럴 때 우리는 가장 우리다울 수 있고 마침내 나그네처럼 떠돌던 고달픈 윤회의 쇠사슬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유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이상의 내용을 통해 불교의 교리 중 하나인 해탈에 대해 알아보았다. 필자는 《홍루몽》에서 가보옥이 해탈의 경지에 다다른 것으로 보았는데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장에서 논의하고자 한다.Ⅲ. 윤회와 해탈의 서사구조1. 서사구조상의 특징소설 《홍루몽》은 100회 혹은 120회로 구성되어 있는 다른 명·청대 장회소설(章回小說)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120회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이렇듯《홍루몽》은 형식적으로는 여타의 장회소설과 동일하나 서사구조와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이전의 소설들과 다르다. 김학주는 《홍루몽》이 다른 중국의 장회소설에서 보는 것 같은 파란만장한 변화나 대단원이 없고, 한 회씩 얘기가 토막쳐져 있지 않고 등장하는 여러 사람들의 생활을 통하여 얘기가 전체적으로 종합되면서 비극적인 결말로 이끌어가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이러한 《홍루몽》의 구성과 성격은 중국의 다른 장회소설들에서는 볼 수 없는 발전된 장편소설의 형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함께 덧붙이고 있다.) 김학주의 이러한 평가를 통해 우리는 《홍루몽》이 단순한 인정소설(人情小說) 혹은 사실주의적 소설이라는 장르적 구분을 넘어 후대의 학자들에게 문학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원인이 색다른 구성과 서사구조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홍루몽》은 명대의 장회소설인 《서유기(西遊記)》)에서와 같이 파란만장한 주인공의 경험이 나타나거나 81난(難)에서처럼 회 마다 다른 이야기가 서술되지만을 소설 곳곳에 담아 낸 것이 아니라 가보옥의 행적을 통해 윤회사상과 해탈의 깨달음을 전체적인 서사구조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래에서는 가보옥의 행적을 중심으로 소설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윤회사상과 해탈의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2. 가보옥의 행적가보옥이 인간세상으로 내려오기 전 최초의 형태는 대황산 청경봉의 바위였다. 여와가 큰 돌 3651개를 만들어 3650개는 하늘을 받치게 하고 나머지 돌 한 개는 대황산 청경봉에 버려두었는데 그 버려진 한 개의 돌이 바로 가보옥의 전신(前身)이다. 이 때 《홍루몽》 제1회에서 버려진 돌을 옥으로 만들어 인간세상을 경험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고 또 제120회에서는 보옥을 출가시켜 다시 대황산 청경봉에 갖다놓은 사람이 바로 망망대사(茫茫大士)와 묘묘진인(渺渺眞人)이다. 고민희가 그의 논문)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이와 같이 소설의 첫 회와 마지막 회에서 가보옥을 인간세상으로 데리고 오고 또 다시 데리고 간 사람 중 한 명이 화상(和尙)인 망망대사라는 점은 《홍루몽》이 소설의 전체적인 서사구조에서 불교와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제1회의 내용에서 청경봉의 바위와 통령보옥과 관련한 불교적인 요소들을 소설 곳곳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그 뒤로 몇 세(世)가 지나고 또 몇 겁(劫)이 지났는지 모른다. 하루는 공공도인(空空道人)이 훌륭한 도사를 찾으려고 각지를 돌아다니던 끝에 우연히 대황산 무계애 청경봉을 지나다가 언뜻절벽 같은 큰 바위에 선명한 글자들이 씌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위의 내용은 청경봉의 바위가 인간세상을 다 경험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있는 것을 공공도인이 보게 되는 부분이다. 이 부분에서 인간세상을 경험하고 온 기간이 ‘몇 세’, ‘몇 겁’으로 되어있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겁’을 의미한다. 불교에서 겁은 헤아릴 수 없이 아득한 시간을 의미하는 데, 통상적으로 4억 3천 2백만년을 1겁이라고 한다. 이러한 시간적 거리를 고려해 보았을 때 바위가 만들어진 허무하다고 여기며, 이를 몽경(夢境)·환상(幻想)·수포(水泡)와 영자(影子) 즉 ‘몽환포영(夢幻泡影)’으로 비유한다.) 이러한 환몽사상이 반영되어있는 태허환경이라는 공간 명명은 《홍루몽》의 주제의식이 모든 것들이 허상에 불과한 것이거나 한낱 꿈에 불과하다는 ‘일장춘몽(一場春夢)’의 사상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가보옥은 이제 태허환경에서 망망대사와 묘묘진인의 도움으로 인간세상으로 내려가게 된다. 주로 가부(賈府) 및 대관원에서의 생활로 묘사되는 가보옥의 속세에서의 일생은 윤회 속에서 각종 번뇌와 괴로움, 인생의 흥망성쇠 등을 다 경험하면서 결국 깨달음을 얻어 해탈의 경지에 다다르게 되는 일련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가보옥이 작게는 불교의 원리를 크게는 해탈의 경지를 깨닫게 되는 모습은 소설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내가 없다면 너도 또한 없으리니남의 일이야 알 길이 무어랴?어디로건 내키는 대로 오고가라지무엇 때문에 한없이 슬퍼하고 기뻐하며무엇 하러 꼬치꼬치 혈연의 멀고 가까움 따지는 거냐?전에는 할 일 없이 아글타글 보냈거니생각하면 부질없고 어리석은 일이었더라!)위의 시는 가보옥이 불교의 교리와 관련된 가사를 듣고 나서 자신이 깨달은 바를 글로 적은 것이다. 이 시를 가지고 임대옥과 설보채는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면서 보옥의 깨달음의 깊이를 가지고 희롱한다. 시의 내용을 보았을 때 아직 보옥의 깨달음의 경지는 깊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생각하면 부질없고 어리석은 일이었더라!’라는 구절을 통해서는 모든 것이 다 허망하고 부질없는 것이라는 ‘만경개공’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가보옥은 어린 시절부터 불교의 교리들을 생활 속에서 접하면서 점차적으로 깨달음을 얻어가고 있는 것이다.41회부터 등장하는 농취암의 젊은 여승인 묘옥(妙玉)은 가보옥과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 보옥은 묘옥을 상당히 이상적인 여성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대옥과 보채 또한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이 두 여성은 전생에서 이미 인연을 맺은 상태로 태어난 것.
딩링(丁玲)과 츠언란(?染)의 女性象 및 性 觀念 비교-《소피아여사의일기(莎菲女士的日?)》와 《입 속의 햇빛(嘴唇的太?)》을 중심으로목 차1. 서론2. 본론3. 결론Ⅰ. 서론딩링(丁玲)과 천란(?染)은 중국을 대표하는 여성작가이다. 딩링은 중국이 신해혁명, 5.4 운동 등이 일어나기 직전 격변의 시기인 1904년에 태어났다. 그녀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대립하던 시기인 1927년부터 활동을 시작해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5년간 투옥되기도 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겪으며 긴 시간동안 작품 활동을 활발히 했다.) 천란은 상대적으로 딩링이 출생했던 시기보다는 사회가 안정돼있던 1962년에 태어났다. 그녀는 문화대혁명 시기가 막을 내린 뒤인 1983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해 이후 계속적으로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딩링과 천란은 이와 같이 태어난 시기와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기에서 반세기 이상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차이는 그들의 창작 활동에 반영되어 소설속에서 각기 다른 양상을 나타낸다. 두 작가는 그들의 소설 속에 많은 여성을 등장시킨다.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에는 그들의 성 관념과 그들이 생각하는 여성에 대한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고 판단된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딩링과 천란의 관념 차이를 그들의 작품인《소피아여사의일기(莎菲女士的日?)》와 《입 속의 햇빛(嘴唇的太?)》를 비교·고찰하는 과정을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Ⅱ. 본론딩링은 1930년 좌익으로 전향하기 이전까지는 혁명문학이 아닌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소설을 주로 창작했다. 그러한 딩링 초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소피아여사의일기》를 들 수 있다. 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로 여자 주인공인 소피아가 등장해 일기형식을 통해 그녀의 심리가 자세하게 묘사된다. 딩링은 그녀 스스로 여성주의자라고 공언한 적은 없지만 그녀의 소설을 통해 보았을 때 상당히 여성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많은 학자들은 분석하고 있다.)이러한 딩링의 여성주의적 관점은 소피아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소피아는 소설에서 줄곧 주도적이고 당당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그녀는 사랑의 감정과 성(性)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시각을 나타내는데 이는 딩링의 관점이 반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성에 대한 개방적인 시각은 1월 12일 일기의 내용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이런 금욕주의자들! 어째서 그리도 사랑하는 사람의 알몸을 포옹하는 게 불필요하다는 거지? 어 째서 이런 사랑의 표현을 억제해야 하는가? 왜 두 사람이 아직 한 이부자리에서 잠을 자기도 전 에 걱정할 만한 일도 아닌 것을 생각하는 것일까?소피아는 윈린이 위팡과의 동거를 피하고자 이사를 간 행동을 보고 그들을 비판한다. 그녀는 스무살이라는 나이와 대학생이라는 신분을 떠나 결혼을 한 상태가 아니어도 스스로의 욕망을 자유롭게 표현해야 하며 그러한 감정을 억제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소피아여사의일기》가 발표되었던 1927년 당시 중국에는 봉건적인 잔재가 아직 많이 남아있었고 가부장제중심사회였기 때문에, 이러한 딩링의 시각은 상당히 개방적이고 파격적인 관념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소피아는 링지스와의 연애에서도 직접 말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녀의 독백을 통해 주도적인 모습을 보인다. 링지스와 처음 키스할 때, 그녀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링지스를 바라본 채로 ‘내가 승리했다!’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일반적인 여성들처럼 남자의 키스를 눈을 감은 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천란은 《입 속의 햇빛》에서 주인공 따이얼을 등장시킨다. 따이얼은 소피아와 달리 소설 전반에서 전형적인 수동적 여성상을 나타낸다. 따이얼은 콩썬과의 관계 속에서 치료 해주는 입장이 아니라 치료를 받는 입장이다. 또한 자신이 가진 트라우마를 주도적으로 이겨내지 못하고 콩썬의 도움을 통해 극복하게 되는 모습을 통해서 수동적인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콩썬과 우연히 만나 극장에서 데이트를 하게 되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여성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그의 팔을 나의 몸 뒤에 놓여져 뒷사람들이 나에게 부딪치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중략) 문 입 구에 이르러서, 그는 나의 외투를 받아들고 뒤에서 내가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이 장면에서는 전형적인 남녀 간의 데이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연출된다. 콩썬은 자신의 팔로 따이얼을 감싸 주고, 그녀의 외투를 받아들어 옷 입는 것을 도와준다. 매너 있는 남자와, 그것을 호의적이고 수동적인 자세로 받아들이는 여자의 모습, 바로 전형적인 남녀 관계의 모습이다. 따이얼과 콩썬이 처음으로 성관계를 가지는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관계를 가지는 내내 남성의 시각에서 소설은 서술되어 있다. ‘그가 그녀를 끌고 들어갔’으며 ‘그가 여자의 단추를 끌렀’고 ‘그가 한 여인의 몸을 눈빛으로 여행하’였다. 이러한 부분들을 통해 천란은 전형적인 수동적 여성 관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권력과 지식(인)의 관계에 대한 고찰-청 초(淸 初)의 옹정제(雍正帝)와 건륭제(乾隆帝)를 중심으로목 차1. 서론2. 지식을 권력에 종속시키려 했던 청 초기의 황제들2.1. 옹정제2.2. 건륭제2.3. 소결 - 지식의 상·동·하위의 권력3. 결론1. 서론다른 어느 나라보다 중국만큼 지식을 중요시 했던 나라도 없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에서 이상적인 인간상(人間象)으로 여겨져 왔던 ‘군자’나 ‘성인’의 필요 덕목 중에는 지식이 항상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예부터 중국에서는 무(武)보다는 문(文)을 더 우월하고 바람직한 것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존재해 왔다. 이러한 문을 숭상하는 관점은 역사적으로 중국인들이 단순히 무력이 뛰어나 나라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 보다는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학문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겼던 공자(孔子), 맹자(孟子),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주희(朱熹) 등의 인물들을 더 추앙해왔던 사실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이러한 문을 숭상하는 중국의 전통, 즉 지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통은 중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중요한 한 부분이다. 이러한 전통뿐만 아니라 지식과 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들은 중국의 역대 왕조들이 권력을 유지하는데 반드시 수반되어야만 했던 것이었기에, 여기에서 지식은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따라서 중국을 보다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통, 그리고 그것을 반드시 차지해야만 권력을 제대로 유지할 수 있었던 왕조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고찰해야만 한다.본고에서는 중국 역대 왕조 중 청대(淸代)의 옹정제(雍正帝)와 건륭제(乾隆帝)를 중심으로 권력이 지식(인)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어떠한 방식으로 상호작용하고 있었는지에 관해 논의해 보고자 한다.2. 지식을 권력에 종속시키려 했던 청 초기의 황제들고대 중국부터 명대(明代)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는 주지했던 것처럼 전통적으로 ‘무’보다는 ‘문’을 중시해왔다. 통치자들은 ‘무’를 이용해 작게는 제후국을, 더 크게는 천하(중원)를 통일할 수 있었지만 이후 그 권력을 유지하고 넓은 중원의 땅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문’(지식)을 갖추어야만 했다. 이러한 지식과 권력의 융합은 그 전통이 오래된 것이나 청대에 와서는 기존의 지식과 권력의 단순한 관계를 넘어선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 이유는 청대가 중화(中華)의 중심 민족이자 중원의 주인으로 여겨져 왔던 ‘한족(漢族)’왕조가 아닌 ‘만주족(滿洲族)’이 세운 왕조이기 때문이었다.청 왕조가 무너뜨린 바로 직전의 왕조는 명(明) 왕조였다. 명 왕조는 중원의 전통을 계승한 한족 왕조였으며 따라서 나라의 통치를 돕고 학문의 발전시켰던 지식인과 관료 계층 또한 한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중화사상을 오랜 기간 동안 체득해왔던 이러한 한족 지식인들이 중원의 적통을 이어받은 명 왕조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청 왕조를 세웠던 만주족 왕조를 그대로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그들의 시각에서 청 왕조는 그저 이민족 왕조이자 오랑캐였으며 금수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발에 대해 청 초기의 황제들은 한족 지식인들을 탄압하는 방법보다는 회유하고 자신의 권력의 테두리 안으로 포섭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청 초기의 황제들은 한족 지식인과 만주족이 서로 융합되어 있는 ‘화이일가(華夷一家)의 다민족 왕조’)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해 나아갔다.이러한 ‘화이일가’의 노력을 구체적으로 전개했던 청 초기의 대표적인 황제로는 제5대 황제인 옹정제와 제6대 황제인 건륭제를 꼽을 수 있다. 아래에서는 옹정제와 건륭제가 어떠한 방식을 통해 ‘화이일가’의 다민족 왕조를 건설하기 위해 한족 지식인들을 포섭하고 지식을 권력에 종속시켰는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2.1. 옹정제청의 제5대 황제인 옹정제는 한족 지식인들을 자신의 영역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그들 사이에서 만연해 있던 ‘반만사상(反滿思想)’을 통제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한족 지식인들을 무조건 억압하는 방식을 택하지는 않았다. 옹정제는 그의 주도하에 발간하였던《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속에서 역모를 꾀했던 증정(曾靜)을 단순히 비판하는 내용만을 담지 않았다. 그는 증정과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증정이 스스로 청조를 인정하게 되는 과정의 내용을 담아 왕조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또한 치밀한 논리로 논지를 전개하여 지식인들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으로서 설득하고자 하였다.《대의각미록》에 나타나는 이러한 옹정제의 시도는 원활한 통치와 권력 장악을 위한 그의 장기적인 안목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도는 단순한 탄압만으로는 지조가 굳은 한족 지식인들의 뜻을 굽히도록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반발심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지식인들을 자신의 영역 안으로 포섭하고 더 강력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력이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통해 다가가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그동안 오랑캐로 생각해 오던 이민족 왕조를 인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더 치밀하고 더 고급의 지식으로서 그들을 설득해야만 했다. 옹정제는 비록 그 자신이 지식인들보다 높은 황제의 지위에 있지만 그들을 설득시킬 때만큼은 그들과 동등한 지위에서 논리적인 지식을 통해 지식인들을 자신의 체제 안으로 포섭하고자 한 것이다.옹정제는 한족 지식인들을 포섭하기 위한 또 하나의 방법으로써 스스로 관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을 취했다. 이러한 옹정제의 모습은 주접제도를 통해서 살펴 볼 수 있다. 그는 관료들에게 의무적으로 상소를 올리게 한 이후에 그 상주문에 대해 일일이 자필로 자세한 평을 달았다. 이러한 그의 시도는 근본적으로 관료들을 장악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그들 가까이로 다가가 그들과 관계를 맺기 위함이었다. 황제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관료들과 동떨어진 먼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스스로 구체적인 평을 달아 관료들과 소통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관료들과 친밀하고 가까운 관계를 형성하는 것만이 권력을 유지하는 데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다. 근본적으로는 그들을 장악할 수 있어야만 그들 위에서 군림할 수 있고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고 옹정제는 바로 이 방법을 효과적으로 사용했던 황제였다.2.2. 건륭제건륭제는 청대의 황제들 중 가장 학문을 좋아했던 호학(好學)의 황제였다. 건륭제는 이전의 어떤 청조황제들보다도 중국의 역사와 경전에 대해 훨씬 깊이 있는 지식을 가지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이러한 스스로의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권력과 지식, 권력과 지식인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 지에 대한 뛰어난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그는 지식과 지식인들을 권력의 테두리 안으로 들여오기 위해 《사고전서(四庫全書)》편찬이라는 대대적인 작업을 시행했다. 그는 《사고전서》를 편찬하기 위해 전 중원에 산재해 있는 서적들을 수집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철저한 검열 작업을 거쳤다. 지식을 검열하고 금서 목록을 만듦으로서 지식인들이 자신이 추구하고 원하는 방향의 지식만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과거 진 시황(秦 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역사적으로 오래된 방법 중 하나이다. 그러나 건륭제는 이러한 단순한 지식의 검열과 제한의 방법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그가 《사고전서》발간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루어 내려고 했던 것은 청 왕조가 이민족 왕조라는 것을 탈피하는 동시에 자신 스스로 지식의 정점에 서있고자 한 것이었다. 한족 지식인들을 자신의 권력에 종속시키기 위해서는 지식을 중시하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지적으로 더 우위에 있다고 느끼도록 만들어야 했다. 건륭제는 스스로 이미 많은 지식을 가지고 황제에 등극 했지만 더 나아가 《사고전서》를 발간함으로써 자신이 전 중원의 모든 지식을 집적한 지식의 정점이자 총아인 인물로 각인되기를 원했다. 이러한 그의 지적인 우위를 점하고자 했던 방법은 한족 지식인들에게 효과적으로 영향을 끼쳤고 재위기간 동안 안정적으로 권력을 유지함과 동시에 중원을 쉽게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2.3. 소결 - 지식의 상·동·하위의 권력옹정제와 건륭제의 예를 통한 권력과 지식(인)의 구도를 살펴보면 크게 세 가지로 정리 될 수 있다. 첫 번째는 권력을 지식의 하위에 두는 것이다. 권력과 지식 중에 어느 것이 우선되어야 하느냐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지식이라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높은 권력을 구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식을 소유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했다. 건륭제가 《사고전서》를 편찬한 것이 그러한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다. 권력을 앞세우기 이전에 지식인들로부터 스스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황제 자신 또한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지식을 소유하여야만 했다. 이러한 지식 소유에 대한 의무와 당위성은 권력보다 지식이 더 중요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지식이 권력의 상위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마그리트의 철학적 사유에 대하여#1몇 달 전 한 친구와 다음과 같은 통화를 한 적이 있었다.친구 : 뭐하고 있어?나 : 그냥 아무생각도 안하고 있어.(실제로 나는 대화의 포커스를 놓치고 잠시 멍하니 있었다.)친구 : 사람이 아무 생각도 안하고 있는 게 말이 돼? 아무생각도 안하고 있는 건 불가 능한 거야.나 : 아 그런가?친구와 그 당시 통화를 할 때 까지만 해도 필자는 아무생각 없이 멍하니 있는 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니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본적은 없지만 막연하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왔던 것 같다. 하지만 친구의 말을 듣고는 단 1분도 채 걸리지 않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아무생각 없이 멍하니 있을 때’조차도 필자는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고 그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는 과정에서 ‘멍해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 알게 된 새로운 사실에 필자는 굉장히 신기해했었고 이 문제를 한 선배에게 이야기 했을 때 그 또한 필자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었다. 가령 누군가를 가리켜 ‘생각 없는 사람’ 이라고 말할 경우, 그 사람은 결코 생각 없이 살 수는 없는 것이며 따라서 그 말은 모순이 된다. 이렇듯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뇌의 치명적인 손상을 입지 않는 한- 매순간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의 생각이라는 것은 변화를 가져오며 그러한 생각들이 없다면 변화도 발전도 없다는 사실에 이 ‘생각한다’라는 행위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2필자가 군대에 있을 때였다. 지루한 군생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집에서 가져와 읽었던 책들 중의 하나가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1’ 이었다. 예전에 예술 관련 수업을 듣다가 서평 때문에 샀던 책이었는데 과제 기한에 맞춰 읽느라 제대로 읽지 못했기에 다시 가져와서 읽었던 것이었다. 잘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끝까지 읽어보자는 오기로 2권, 3권까지 구입해 읽게 되었다. 미학 오디세이에서는 수많은 미술작품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 중 가장 관심이 갔던 것이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들이었다. 회화의 전체적인 느낌과 색채에서 왠지 모를 고급스러움이 느껴졌고 또한 의미심장해 보였다. 글을 읽어가면서 마그리트는 작품을 통해 자신의 철학과 사유를 표현했음을 알 수 있었고 그의 미술작품을 감상하면서는 단순한 미적 즐거움을 얻는 것만이 아닌 생각의 확장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 매료되었다. 그의 작품 하나하나에 부여되어있는 마그리트 자신의 사유는 곧 필자의 생각과 연결되어 필자로 하여금 작품의 부여된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하게 만들었고 그러한 궁금증에서 얻은 생각들은 작게는 언어를, 크게는 세상을 보는 관점을 다르게 만들었기에 굉장히 즐겁고 유의미한 경험이었다.#3르네 마그리트의 많은 작품들이 마음에 들지만 그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1928~1929년에 제작된「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작품을 뽑고 싶다. 작품을 보면 단순한 파이프모양의 그림 하나와 ‘Ceci n'est pas une pip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한 문장이 존재할 뿐이다. 어찌 보면 그림 하나-문장 하나의 단순한 구조로 되어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것은 상당히 고차원적이고 철학적인 함의를 담고 있다.르네 마그리트,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1928~1929이 작품을 가지고 무궁무진한 논의들이 오갔고 또한 앞으로도 유의미한 논의를 생산해 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필자는 철학적인 지식이 부족한 관계로 그 논의된 내용들을 모두 이해할 수도 없었거니와 다 다루는 것조차 힘들기에 본 작품의 의미를 두 가지 측면으로 해석해 보고자 한다. 하나는 ‘이미지-언어의 연결’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대상-메타언어’적 측면이다.이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우리는 파이프의 그림을 가리켜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표현한 것에서 모순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품 안에서의 파이프는 실제로 존재하는 파이프가 될 수 없다. 그것은 단순한 이미지이며 화학원료를 사용해 그린 그림일 뿐이다. 따라서 ‘작품 안의 파이프는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명제는 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그림을 처음 접했을 때 느껴지는 모순은 어떤 이유에서 일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정확히 파이프라고 생각하게 하는 파이프의 그려진 이미지가 언어의 중대한 오용을 통해 ‘이것은 파이프이다’라고 말하게끔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담뱃재를 넣어서 담배를 피울 수 있게 하는 도구를 ‘파이프’라고 말한다고(혹은 말해야 한다고) 교육받았기 때문에 또한 사회전반에서 그것을 ‘파이프’라고 일컫기 때문에 그것이 파이프라는 것에 아무런 의심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림 파이프에는 실제 파이프를 구성하는 성분의 단 0.1%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언어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점에서 ‘파이프’라는 말은 상당히 인위적인 것이고 과연 그것이 파이프의 본질을 제대로 표현했는지는 알 수 없다. 즉, 이미지(혹은 사물)-언어의 연결은 인간이 의도적으로, 그리고 우연한 과정에서 생겨난 조합이라는 것이다. 만약 파이프가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에 그것을 만든 이들이 파이프를 ‘파이프’라는 단어가 아닌 ‘스피커’라는 단어로 부르자고 결정했다면 우리는 지금 그것을 ‘스피커’라고 부르고 있을 것이다.) 또한 단어의 사전적 의미라는 측면에서도 살펴보자. ‘파이프’라는 단어를 누군가가 설명해 달라고 했다고 가정했을 때, 우리는 ‘담배를 피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럼 이제 ‘담배’라는 것이 뭔지 궁금하다고 한다면 ‘주로 스트레스 해소의 용도로 피우게 되는 중독성 있는 물질(?)’정도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스트레스라는 것은 무어냐고 물어볼 수 있겠다. 이렇게 파이프=담배=스트레스…로 계속 단어의 의미는 돌고 돌아 사전 밖으로 빠져 나올 수 없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사전 안에서만 돌고 도는 것이 어떻게 사전 바깥의 ‘사물’을 가리킬 수 있느냐는 의문을 가질 수가 있을 것이다.) 단어의 사전적 의미라는 것은 결국 사물을 제대로 가리킬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인위적·허구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미지가 사람의 연상과 연결된다는 점만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파이프의 이미지를 통해 파이프 실체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이것은 파이프이다.’라는 말이 100% 거짓은 아닐 수 있다. 이렇듯 하나의 작품이-혹은 작품안의 한 문장이- 참과 거짓의 속성을 둘 다 가지고 있다는 점과 이미지와 언어의 연결은 허구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필자에게 있어 상당히 흥미롭게 와 닿는 부분이었다.‘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의 진실성을 가지고 또 다른 측면에서 논의해 볼 수 있다. 위의 문장을 문장 그대로만 생각하면 참·거짓을 판명하기가 힘들지만 그것을 대상언어와 메타언어로 구분해서 생각할 때에는 가능하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대상언어는 현실의 대상을 가리키는 것이고 메타언어는 이 대상언어를 가리키는 말 자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대상언어로 보았을 때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이것’이라 함은 현실에서의 파이프를 의미하기 때문에 문장은 거짓이 되고, 메타언어에서의 ‘이것’은 “‘이것’이라는 단어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므로 문장은 참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장의 진실성 여부가 판명가능하기 위해서는 낱말이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세상에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라는 말에서도 보았을 때 이 법칙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예외가 없는 법칙이 있다는 것이고 따라서 이 법칙은 거짓임이 증명된다.) 이 또한 문장이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될 수 있기에(자기 자신을 가리키기에)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문장에 모순이 없이 진실을 판명할 수 있기 위해서는 대상-메타언어를 구분하여 사용하여야 하며 또한 문장 스스로가 자신을 가리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언어라는 것이 굉장히 체계적이고 분명하다고 생각해 왔고 또한 언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의심을 해본 적이 없었다. 언어는 생활전반에서 늘 사용되는 것이고 인간생활에 필수불가결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모순에 대해 의심을 해본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마그리트는 스스로 예술작품을 통해 언어라는 개념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고 감상하는 사람들 스스로도 의심을 해볼 수 있도록 도왔다는 점을 필자는 굉장히 높이 평가하고 싶다.
한국의 민족주의에 대한 고찰목 차1. 서론2. 본론2.1. 민족주의의 기원2.2. 한국의 민족주의의 형성과정2.3. 현재 한국의 민족주의의 부정적 측면2.4. 한국의 민족주의의 올바른 方向定立과 세계화3.결론1. 서론民族主義는 ‘민족에 기반을 둔 국가의 형성을 지상목표로 하고, 이것을 創建?維持?擴大하려고 하는 민족의 정신상태나 정책원리 또는 그 활동’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비단 단일민족으로 구성된 한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여러 국가들도 각각 가지고 있는, 민족의식을 基盤으로 하여 생겨난 개념이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분명 긍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개념이다. 또한 최근까지 한국의 學界나 社會 一般에서 민족주의는 좋은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요즘 한국의 민족주의는 많은 부분에 있어서 부정적인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어, 이를 객관적인 時角에서 살펴볼 수 있는 외국인들이나, 혹은 귀화한 외국인, 그리고 한국의 일부 지식인들로부터도 비판의 목소리가 많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 세계화의 趨勢를 보면 국가와 민족과 인종의 개념을 무너뜨리고 자유롭게 思考하고 교류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데, 한국의 민족주의에는 이러한 세계화의 추세에 역행하는 부분이 많이 존재하고 있어 이러한 점도 또한 지적되고 있다. 筆者는 이러한 시점에서 한국의 민족주의가 그것이 가진 모순점들을 극복하고 바람직한 세계화의 방향으로 나아갈 방법을 摸索해 보고자 큰 의미에서의 민족주의의 개념을 알아보고, 한국의 민족주의의 성립과정과 현재 한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구체적인 민족주의의 부정적 측면들을 살펴보았다.2. 본론2.1. 민족주의의 기원민족주의의 기원을 알기 이전에 ‘민족’의 개념부터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민족의 개념을 언급하기 위해서는 ‘nation’의 개념이 필요하다. nation은 native와 nature와 같은 語原을 가진 단어로서, ‘어떤 지방에 태어난 사람들’로부터 시작해 ‘종족’ 혹은 ‘민족’, 더 나아가 ‘국민’, ‘국가’로까지 범위가 확장되어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국민’이나 ‘국가’로 해석될 경우에도, 지배기구로서의 국가나 前近代的 단계의 지배층과는 전혀 다른, 국가의 주권자로서의 그 성원들 내지는 국민을 그 實體로 삼는 국가를 의미한다. 또한 민족주의를 설명하는 데 있어 이 ‘민족’이라는 의미를 사용하게 되는데 이 경우에서의 ‘민족’은 근대적 민족주의가 설정하는 개념이며 血緣 중심의 전근대적 민족 내지 종족과는 구별되어야 한다.이러한 ‘민족’의 개념을 기반으로 하여 민족주의는 생겨나게 되는데 이 민족주의의 기원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학설이 紛紛하다. 한스 콘(Hans Kohn)은 인간에게는 자기의 출생지나 어린 시절 자라던 곳, 그 주변지역과 기후 등을 사랑하는 傾向을 타고 나는데, 이러한 원시적인 감정들을 이용하여 민족주의는 성장해왔다고 말하며, 근대에 와서는 프랑스혁명에서 처음으로 크게 表明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앤더슨은 민족주의를 형성한 역사적 동력으로 資本主義의 발달(특히 인쇄술의 발달)을 들고 있고, 민족주의의 기원은 언어집단을 중심으로 한 대중 민족주의(popular nationalism)에서 찾아 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2.2. 한국의 민족주의의 형성과정앞부분 에서는 큰 흐름에서의 민족주의의 기원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한국의 민족주의의 형성과정 또한 앞에서 밝힌 내용과 무관하지는 않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적인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그 형성과정은 분명히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고, 이 점을 확실하게 밝혀야만 현재 한국의 민족주의에서 발생하는 부정적인 측면들이 근본적으로 왜 일어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분명 필요한 論議일 것이다.민족주의가 도입된 시기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민족과 민족주의의 기원, 대외 抵抗史 등에 중점을 두는데, 대체로 구한말에 근대적 이념으로서의 민족주의가 형성된 것으로 본다.)이러한 민족주의는 우선 구한말 개항기에 外勢의 侵奪에 맞서 민족의 독립을 유지하며 전근대적 왕조를 근대적 민족 국가로 탈바꿈시키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 이후 나라를 잃고 일제치하에 놓인 시기에는 민족 독립을 되찾으려고 노력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분단과 외세 정복, 그리고 민족 분열을 극복하고 통일 민족 국가를 이루는 것이 우리 민족의 목표였으며, 분단이 固着化된 남북한 체제경쟁의 시기에는 緊張을 완화하고 화해 협력을 통해 통일을 이루는 것이 바로 목표였다. 구체적인 사건에서 드러났던 민족주의를 살펴보자. 우선 4?19혁명은 민족통일과 민족주의에 대한 논의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5?16과 제 3공화국의 등장은 민족통일에 대한 논의를 다시 위축시켰다. 이후 박정희 정권은 外資 의존적이고 분배보다 성장 우선적인 경제개발 정책을 폄으로써 반민족적?반민중적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문화재보호법의 제정 등을 통해 문화적 전통과 遺産을 保護?育成하는 민족주의자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려 노력하였다. 그리고 세계화의 바람이 거세게 부는 지금, 한국 민족주의가 當面한 과제는 민족 정체성과 국가 주권을 확립하면서 세계화의 바람을 이용하여 민족과 국가의 이익을 추구하는 일이다.2.3. 현재 한국의 민족주의의 부정적 측면한국의 민족주의의 부정적 측면들은 국내외를 莫論하고 到處에서 나타나고 있다. 필자는, 한국의 민족주의를 비판한 사람들이 그들의 저서에서 저술한 많은 민족주의의 부정적인 모습들을 몇 가지 범주로 나누어 분류해 보았다.1) ‘우리’가 아닌 이들은 모두 ‘타자’사례a)‘서해 교전’의 경위를 상기하면서 느끼는 것은……(중략)……국내의 언론이 대부 분 이 사대의 전략적 결과들이니, 안보의식의 고취니, 남북 군사력의 비교니, 대북 협상?사업의 전망이니 하며 국내외의 정치나 ‘돈’에 관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지 불과 연기 속에서 사라진 동족 30여 명의 비참한 최후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략)일부 언론은 남쪽의 ‘승리’를 자랑으로 여기고, 일찌감 치 컴퓨터화한 국군의 ‘적군’에 대한 우월성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박노자, 2002:138)사례 b)고려의 태조 왕건은 942년에 거란족의 사신이 와서 낙타 50필을 선물로 바치자 사신을 유배시키고 낙타를 개성에 있는 만부교 밑에 매달아 굶어죽게 하였다.(중 략)그러나 고등학교 교과서의 평가는 과연 어떤가? (중략) “이는 태조의 자주 북방 정책 의지의 표현 이었다”라는 말이 전부다.(중략)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 적대자 의생명은 물론 무고한 동물의 생명까지 희생시켜도 도덕적인 책망의 대상이 되지 않는 일이다. (박노자, 2002:204-5)2)배타적 민족주의사례a)사실 우리는 외제 차에 주유를 거부하거나 차 문을 못으로 그어놓고 싶어하면서도, 해외에 나갔을 때 외국의 거리를 달리는 국산 차를 보면 반가움에 눈물부터 앞설 만 큼 감정적이고 민족주의적이다. (김성곤, 2002:125)3)한민족이 아닌 사람에게 민족의식을 강요사례a) “그럼, 할아버지께라도 무슨 말을 들은 적은 없습니까?”(중략)“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기자들의 질문 의도는 분명했다. 현재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카리스마 넘치는 가수에게서 조국과 민족에 대한 넘치는 애정을 끌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이토 준코, 2002:125)4)인종 차별로 이어지는 민족주의사례a)도의회 의원을 역임한 바 있는 경기도의 한 유지급 인사가 ……사창가에 러시아와 필리핀 등지에서 온, 천 명이 넘는 윤락녀들의 취직을 알선했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중략)그는 자신의 행위를 ‘애국심의 발로’로 변명했다. 즉, ‘우방의 병사’인 미군들에 게 다양한 성적 욕망을 해소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한국인 포주들에게 더 나은 외화 벌이 기회를 주기 위해서, ……‘민간외교를 통한 애국의 길’이라는 논리였다.(박노자, 2002:228)사례b)그러나 ‘몸이 부서질 만큼’힘든 그 일보다 더 힘든 것은 직장의 엄격한 ‘인종 질서’ 와 ‘국적 질서’였다. 이 피라미드 맨 바닥에 놓여 있는 존재들은 체력도 약하고 생김 새도 다른 동남아시아 노동자들이었다.(박노자, 2002:252-3)이상의 사례들을 통해 한국의 민족주의의 부정적인 모습들이 여러 부분에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인들은 그들을 徹底하게 ‘우리’화했고 나머지 다른 나라의 민족 내지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타자’화 하였으며-심지어는 같은 민족인 북한 사람들에게 에게까지도-, 그들을 배타적인 감정으로 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逆說的이게도 그러한 논리대로라면 ‘타자’화 해야 할 미국에 대해서는 友邦이라는 이유로 윤락 알선을 서슴지 않는 등의 행동을 애국심으로 정당화 하고 있고, 이는 더 나아가 우방에 의지하여 대외 자주성도 상실하고 있었다. 반면 한국에 와서 일하고 있는 후진국 노동자들에게는 부당한 대우를 서슴없이 가하는 인종 차별적인 민족주의의 모습도 보였다. 또한 한국사회는 이미 다른 나라의 국적을 가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한민족의 피가 섞여있다면 ‘우리’안으로 끌어들이기를 좋아하여 민족의식을 강요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