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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정치]고이즈미 내각의 성격과 개혁정책
    고이즈미 내각의 성격과 개혁정책목차l. 서론ll. 본론1. 고이즈미는 어떤 사람인가?2. 고이즈미 내각의 성립3. 2001년 참의원 선거결과 및 그 영향1) 2001년 참의원 선거결과2) 자민당 대승의 요인3) 참의원 선거의 정치적 영향4. 고이즈미 체제 등장의 의미1) 고이즈미 혁명2) 하시모토파에 대한 복수3) 적의 적은 동지5. 고이즈미 체제의 정책기조1) 우정민영화2) 야스쿠니 신사 참배3) 헌법개정lll. 결론l. 서론야스쿠니 신사 참배, 역사 교과서 파동 등으로 뉴스의 중심 인물이 된 고이즈미 총리는 동아시아 주변국에서 평가는 형편없는 것에 반해 일본에서의 그의 인기와 리더쉽은 엄청나다. 총리가 되기 전 그는 동료 정치가들로부터는 ‘정계의 이단자’, ‘자민당의 돈키호테’,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 ‘이치겐고지(一言居土)’ 등의 별명으로 불리며 기껏해야 괴짜 취급을 받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민당 총재에 그리고 내각총리대신에 오르게 되고 2001년 참의원 선거에서도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고이즈미가 전대미문의 이 기이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던 이유와 고이즈미 내각의 성격과 개혁정책을 살펴보고자 한다.ll. 본론1.고이즈미는 어떤 사람인가?고이즈미 준이치로는 1942년 1월8일생이다. 고이즈미는 3대 정치가로서 귀족적 집안에서 성장한 자이다. 할아버지 고이즈미 마타지로는 도쿄 서남쪽 전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항구도시 요코스카의 부두노동자 출신이다. 그는 대단한 완력을 가진 사나이여서 나중에 항만노조의 리더로 성장해 정치에 뜻을 두게 된다. 수완이 대단했던지 1889년부터 몇 년간은 ‘도쿄-요코하마 매일신문’의 기자를 한 경력도 있다. 지금도 요코스카에는 항만의 전설적 주먹으로 고이즈미 마타지로파와 다쓰미(辰己)파 양대세력이 전해져 오는데, 전자가 바로 고이즈미 총리의 할아버지라는 것이다. 노동자 시절에 등에 새긴 커다란 문신을 훗날 의회에서 자랑했다가 ‘문신 장관’이라는 못한 별명도 얻었다. 아무튼 1908년 첫 의원 당선 이후 내리어 오히려 압승하여 참의원에서 과반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아울러 한시적인 수상이었던 그가 대중적 지지를 기반으로 재차 자민당 총재로 선출되어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집권이 가능하게 되기도 하였다.그의 수상 선출과정은 하나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극적이었고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정치의 장으로 끌어냈다. 일본은 내각책임제이기 때문에 우리와는 달리 국민이 직접 수상을 뽑는 것이 아니라 여당에서 뽑힌 자가 국회의 선출과정을 거쳐 취임하게 된다. 때문에 종래 자민당 독주체제하에서는 자민당내의 파벌간에 밀실야합을 통하여 국정을 책임지는 수상이 선출되는 것이 관례였다.이러한 관행 아래서 고이즈미가 수상후보로 뛰어든 것은 그것 자체가 파격이었다. 그는 자민당 내에서 중견이지만 소수에 머무르는, 하나의 ‘괴짜’정치인에 지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소수의 상황에 처하여 일종의 도박을 하였다. 자민당 내의 선거임에도 국민에게 직접 물어보는 대국민 여론몰이 정치를 하였고 그것이 자민당의 부정부패와 밀실야합적인 정치에 등을 돌리고 있던 지방당원의 지지를 압도적으로 이끌어내어, 다수파의 후보로 당선이 확실시되던 하시모토 전 수상을 명예 퇴진시키고 선출된 것이다. 이것은 전무후무한 사건이기도 하다.일명 ‘괴짜’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관행을 깨거나 무시하는 돌출행동을 일삼는 고이즈미가 “성역 없는 개혁”을 기치로 내걸어 기존의 자민당 정치에 식상하고 염증을 느끼는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충분했다.3. 2001년 참의원 선거결과 및 그 영향)1) 2001년도 참의원 선거결과2001년 7월 29일에 실시된 참의원 선거의 결과는 연립여당, 그 중에서도 자민당의 대승으로 요약할 수있다. 연립여당 3당은 자민당이 64석, 공명당이 13석, 그리고 보수당이 1석을 차지하여 총 78석을 획득함으로써 참의원 총의석수의 과반수를 훨씬 넘게 되었다. 반면에, 야당은 26개 의석을 차지한 제1야당의 민주당과 6개 의석을 차지한 자유당만이 선거전의 의석수를 상회하는 성적을 올렸하는 데 성공한 것과 큰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대조는 여당에의 참여 효과(집권당 프리미엄)나 일본 유권자의 보수적 성향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특히 후자의 경우를 야당 중에서 보수적 성향을 강하게 나타내는 자유당의 선전과 연결해서 생각해 볼 때, 이번 선거결과는 최근의 선거에서 유동성을 특징으로 등장한 무당파층의 기저에 보수성향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마지막으로는 ‘고이즈미 열풍’에도 불구하고 이번 선거의 투표율이 낮았다는 점이다. 이번 선거의 56.44%라는 투표율은 사상최악이었던 1995년의 44.52%를 크게 상회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98년의 58.84%보다는 낮은 것이었다. 선거전의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유권자들의 높은 관심(산케이신문의 조사에 따르면, 참의원 선거에 강한 관심을 보인 것이 37.5%, 얼마간 관심을 나타낸 것이 49%였고, 투표에 필히 참여하겠다는 것이 이미 부재자투표를 실행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65.7%)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세 번째로 낮은 결과가 나온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이러한 낮은 투표율과 연관하여 중요한 것은 이번의 결과가 ‘고이즈미 열풍’만이 아닌 조직표등의 복합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결국 장기적인 안목에서는 유동성이 여전히 존재하며, 다음 선거에서는 단독과반수가 가능할 것이라는 자민당 내의 희망이 성급한 것임을 보여준다고 하겠다.2) 자민당 대승의 요인제19회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대승을 거둔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고이즈미 수상의 개인적 인기가 자리잡고 있다고 하겠다. 이는 내각 지지율로 나타나는데, 고이즈미 내각은 발족 당시 실시된 조사에 의하면 80.9%의 지지율을 확보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수치는 그 이전의 모리 내각(37.6%), 오부치 내각(26.5%), 하시모토 내각(52%, 이는 NHK의 조사에 의한 것으로 앞의 수치는 아사히신문의 조사결과임; NHK의 조사에서는 모리 내각이39%이고 오부치 내각이 37%)이 발족했을 때와 비교할 수 로 고이즈미 내각의 고지지율은 무당파층(지지정당을 가지지 않은 층0의 지원을 얻어내는데 성공함으로써 자민당의 승리에 일조 했다고 하겠다. 앞서 소개한 요미우리신문의 조사에 따르면 무당파층은 약 19%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들 중 29%가 자민당, 그리고 21%가 민주당에 투표한 것으로 나타났다.3) 참의원 선거의 정치적 영향상기한 바와 같이, 제19회 참의원 선거는 고이즈미 수상의 개인적 인기가 기초가 되어 자민당의 대승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고이즈미 수상은 선거전부터 제시한 3단계 ‘개혁공정표’작성에 박차를 가했다. 첫 번째 단계는 가을 임시국회가 개최되기 전인 8월 말까지의 일정이다. 8월 말까지 방만하게 운영돼 온157개 특수 인가법인의 사업 재검토안을 만들어 공표하고, 이에 따라 공익법인에 대한 정부보조금 삭감안을 제시하여 개혁 프로그램을 감안한 2002년 예산 요구기준을 확정한다는 것이다.두 번째 단계는 가을 임시국회가 열리는 9월부터 11월까지의 기간이다. 우선은 9월의 임시국회에 제출할 개혁법안의 처리목록을 준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임시국회 내에서 증권시장을 활성 시키기 위한 증권세제 개정안이나 ‘안정망(구조개혁에 따른 실업을 흡수하기 위한 보완조치)’ 관련 법안 등을 중점적으로 추진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연말까지의 기간으로 ,2002년 예산안 편성 때 반영할 개혁시책들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이에는 국채발행액을 연간 30조엔 이하로 줄이고, 3년 간 5만 명의 보조교직원을 채용하며, 정치권과 건설업계 간 유착의 온상으로 지적된 도로특정재원의 개편안 등이 포함될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러한 계획에서도 보듯이, 고이즈미 정권은 참의원 선거의 결과를 ‘고통을 동반하는 구조개혁’에 대한 국민의 지지 및 추인으로 받아들이고 상기한 개혁일정을 추진했다.4. 고이즈미 체제 등장의 의미1) 고이즈미 혁명1955년 자민당의 창당이래, 일본정치는 사실상 자민당의 지배체제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물론, 1993년 자민당의 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재정적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구조개혁 노선을 택하기 보다 금융기관에 대한 공적자금 투입이나 경기부양을 위한 공공사업에 중점을 두어 왔다. 일부 사업자나 한정된 이익단체로의 이익 공여 성격을 강하게 띤 경기부약책은 미래지향적이라기보다는 과거 회귀 성격이 더욱 강했다. 이에 국민들은 보다 근본적 개혁을 통한 경기회복을 이끌어 갈 정책과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셋째는 국가진로의 우경화(右傾化)현상이다. 그동안 일본사회는 전반적으로 우경화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사회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 ‘개헌’등에 반대하기 어려운 분위기로 젖어 들었으며 당시 왜곡 역사교과서를 둘러싸고 나타났던 사회적 현상이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고이즈미 정권은 출발하면서부터 이러한 사회적 우경화를 정책으로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2) 하시모토파에 대한 복수고이즈미 정권의 탄생은 혁명적인 측면도 있지만, 그동안 당내정치과정에서 찬반을 먹은 데 대한 복수의 측면도 강하다. 이는 파벌의 역사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역대 자민당 정치에서 가장 치열하게 대립해온 정치인은 다나카 카쿠에이와 후쿠다 다케오 두전직 총리였다. 이들은 55년 자민당이 창당한 이래 수십년간을 정권 쟁취를 위한 한치 양보없는 치열한 싸움을 벌여왔다. 이들의 싸움은 정치평론가들이 ‘카쿠후쿠전쟁’으로 이름지어 부를 정도로 길고 유명했다.현실정치에서는 다나카가 후쿠다를 거의 매번 눌렀지만, 이들의 경쟁과 대립은 항상 긴장감 있게 진행됐고 이들의 대립과 경쟁구도는 이후 그들을 계승하는 파벌로 그대로 계승됐다.고이즈미가 바로 후쿠다의 비서로 정치에 입문한 후쿠다의 애제자였고, 하시모토가 자민당에서 다나카인맥의 정통 후계세력인 하시모토파의 회장이라는 점을 보면, 지난 총재선거는 또다른 ‘카쿠후쿠전쟁’이라고 할 수 있느 것이다.고이즈미는 95년과 98년에도 하시모토와 오부치 게이조에 도전장을 내는 등 제 2, 3의 ‘가쿠후쿠전쟁’에서 복수를 노렸지만 턱없이 패하고 물러난 전력이 있다. .
    사회과학| 2006.01.18| 13페이지| 2,000원| 조회(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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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문화]<홍백가합전>를 보고
    * 일본 대중음악계와 영상매체의 결부의 성공 - 한 해 광고 지출액 규모가 약 1조 6천억 엔인 일본 텔레비전 방송산업은 철저히 민영방송 중심으로 짜여있다. 96년 일본 방송 협회의 조사에 따르면 국영방송 NHK와 그 계열사들을 제외하면 각 지역별로 민영방송사들이 난립하고 있으며 이들 방송사들이 연합해 전국 단위의 방송 네트워크를 확립하여, 오락과 교양, 보도등의 전문채널의 보유하는 특성을 보였다.90년에 NHK가 최초로 위성방송 시대를 연 뒤, 98년을 기점으로 출발한 디지털 위성방송은 평균 80개에서 1백여 개의 채널을 보유하게 되고 위성방송은 각 채널을 영화와 스포츠, 애니메이션, 대중음악 등으로 전문화함으로써 영상산업의 새로운 전화점을 마련하였다. 특히 일본의 대중음악계가 영상매체에서 활력을 얻은 것은 산업적인 측면뿐 아니라 음악장르도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60년대 록음악과 댄스음악은 텔레비전 매체에 힙입어 인기 장르가 될 수있었 던것이다. 80년대 이후 X재팬 등이 시도한 비주얼 록은 뮤직비디오의 시각적 홍보효과를 노린 상업적 경향이었다. 일본 대중음악은 라디오와 텔레비전 등의 대중매체에 의지해 점차 장르 스펙트럼을 확장하고 음악소비자들의 취향을 다원화 시켰던 것이다.이러한 일본 대중음악계와 영상매체와의 결부의 성공의 예가 바로 이다.한 해의 마지막날, 12월 31일. 일본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할까? 바로 NHK의 을 시청한다. 어떤 사람은 1주일 전부터 이 프로그램을 기다리고 어떤 사람들은 1년 전부터 기다린다고 말하는 은 그 한 해의 인기있던 일본 대중 음악를 판가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은 일본 텔레비전 방송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하는 프로그램이다. 1951년부터 NHK 라디오로 방송되다가 텔레비전으로 자리를 옮긴 프로그램은 쇼 프로로선 최초로 국민적인 성원을 입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에 인기가수들이 모여 노래 대결을 갖는 형식의 은 일본인들의 정신적 단합에 일조하는 행사가 되었다.실제 통계를 따르면 60년대 일본인들은 메이지 신궁을 참배하는 것보다 집에서 텔레비전으로 을 보는 시청자의 숫자가 더 많았을 정도였다. 현재까지도 은 일본대중음악의 흐름을 요약해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한해 동안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가수들이 총 집결하는 이 프로그램은 시대에 따른 대중음악의 변천과 공중파 방송의 성격 변화를 보여주는 지표이다.의 전형적인 구성은 이렇다. 쇼에 참가한 여성 가수들은 홍팀, 남성 가수들은 백팀으로 나위어 노래 대항전을 갖는다. 모두 한 해 동안 최고의 인기를 모은 가수들이 참여하는데, 일반인들과 NHK 위원회가 가수들을 선정한다. 이 무대에서 불려지는 노래는 한 마디로 모든 노래이다. 엔카 뿐 아니라 동요, 샹송, 드라마 주제가 등 거의 모든 장르의 노래가 선을 보인다. 유치원생과 초등학생은 물론 70~80대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연령과 계층을 초월해 즐길 수 있도록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노래 대항전이 끝나면 최종적으로 어느 팀이 승리했는지 여부를 객석에 앉은 일반인들과 심사위원들이 판가름하고 승리한 팀에겐 트로피를 증정한다. 모든 참가자들은 한해를 마감하는 아쉬움을 담아 ‘올드 랭 사인’을 부르며 쇼를 마친다. 쇼는 한 해 마지막 날 자정에 끝나며 시청자들은 새해를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새로운 한 해를 맏이한다.60년대에 은 획기적이라고 할 만큼 웅대한 규모였다. 당시 시청자들은 기라성 같은 인기가수들과 함께 다사다난한 한 해를 정리한다는 기분으로 텔레비전 앞에 앉았고 시청률은 90%에 이르렀다. 국민 모두가 시청하는 쇼 프로그램이었던 것이다. 그 뒤 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참가 가수들의 음악장르는 재즈와 엔카, 록 등 세분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65년부터 일본에 컬러 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은 보다 덩치가 큰 쇼가 되었으며 스타급 가수들만 특권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무대가 되었다. 한 마디로 최고의 가수만이 설 수 있는 무대가 되었으며 이 무대에 출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평생 영예롭게 생각할 정도인것이다. 쇼 프로그램의 대형화 시대가 막을 연 것으로 그 선두가 이 었던 것이다.오랜 역사를 가진 이 기록적인 시청률을 유지할 수 잇었던 것은 제작진의 의도대로 ‘프로그램의 품격이 철저하게 유지된 탓’이었다. 공여방송 NHK는 사생활에 문제가 있거나 스캔들에 연루된 가수들을 세밀하게 가려내 출연 섭외를 하지 않았다. 예컨대 73년에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의 남동생이 야쿠자들의 폭력사건에 연루되는 스캔들이 발생했다. 그러자 NHK는 같은 해 의 출연자 명단에서 미소라를 제외함으로써 물의를 빚기도 했다. 프로그램의 제작진들이 철저히 ‘국민적’ 프로그램의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87년 NHK는 일본 가수 말고도 해외가수들을 프로그램에 초청해 의 위상을 강화했으며 한국의 조용필 같은 가수가 당시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참가했다. 90년대 이후 은 젊은이들의 취향에 영합하는 방향으로 다시 변화했다. 프로그램을 아예 두 개 부분으로 나누어 젊은층이 좋아하는 가수들과 중장년층이 좋아하는 가수들이 골고루 프로그램에 출연해 노래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코자이 카오리 등의 엔카 가수들에서 아무로 나미에와 X 재팬 등의 아이돌 가수, 록 음악인에 이르기까지 일본 대중음악의 모든 스타들이 에 나란히 출연하게 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대중음악의 시대의 변화에 따라 구성과 출연진의 연령대를 유연하게 교체하는 방식으로 모든 세대의 시청자들이 즐길 수 있는 쇼 프로그램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일본 텔레비전 방송 역사에서 최고로 장수한 프로그램 중 하나인 은 일본 대중음악계의 발전과 영상매체의 결부의 성공으로서 지금까지도 평균 50%의 시청률을 올리면서 한해의 마지막을 흥겨운 분위기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사회과학| 2006.01.18| 2페이지| 1,000원| 조회(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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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문화]일본의 공영방송 NHK
    일본의 공영방송 NHK국제경제학과 200245006 이재은1. 들어가며요즘 한일문화 개방이 되면서 일본에는 한류라는 바람이 불고 욘사마라는 열풍까지 불었다. 또한 한국에서도 케이블 방송에서 일본 드라마를 볼 수 있게 되었고 인터넷을 통해 일본 방송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관심이 있었던 것은 일본에 한류바람을 처음 일으킨 겨울연가를 방영한 NHK, 일본 공영방송에 대한 것이었다.앞으로 발제에서 다룰 내용은 일본방송의 현황과 문제점, 그리고 일본의 공영방송인 NHK의 대한 내용과 NHK의 비리 등을 다루어 볼 것이다. 그리고 일본 공영방송인 NHK의 사례를 통해 한국 방송에게 주는 시사점을 다룰 것이다.2. 일본방송의 현황과 문제점가. 일본방송의 현황일본의 방송은 지금까지 수신요금을 재원으로 방송법에 근거하여 설립된 특수법인인 NHK와 광고수입 또는 유료방송 수입을 재원으로 하는 일반 방송사업자(민영방송)라는 조직형태와 재원 등이 다른 주체가 병존하는 말하자면 2원 체제 하에서 실시되어 왔다. 이러한 2원 체제의 의도는 방송의 기회를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이 확보할 수 있도록 각각이 독립된 방송사업자로서 방송하는 민영 방송과 재원 조직 방침을 국민 전체를 기반으로 국민에게 존재하는 다양성이나 다양한 욕구가 조직 구성이나 활동에 반영되도록 제도화하고 비영리 방송사업체인 NHK의 병존을 통해, 다음과 같은 점을 확보하여 방송 효용이 국민에게 최대한 전달되도록 하는 것이다.① 방송 언론표현의 다양성 다원성 확보, 건전한 민주주의 발전 등에 기여② 다음 사항을 실현할 것? 국민의 밀접한 정보 입수수단인 방송의 채산성이 부족한 지역을 포함, 전국 방방곡곡까지 보급? 방송이 가진 사회적 문화적 영향력을 감안, 모든 방송 프로그램에서 요구되는 질적 수준 확보 향상? 공공복지를 위한 장르의 방송 프로그램 제공③ 서로 연구하여 방송 전체의 활성화 촉진이러한 일본의 방송 2원 체제는 지금까지 유효하게 기능해 왔으며 NHK, 민영방송이 각각 특성을 발휘, 일본의 방송 전개에와 드라마라는 순수 방송프로그램은 무기로 자격 질주하고 있다. 주요주주는 마쯔이계로써 신문사의 영향력은 희박하다. 네트워크에 총격을 결정 자격보도체제를 구축, NHK의 대항할 수 있는 독자의 보도력을 갖춘 민방국으로서 위치하고 있다. TBC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힘은 JNN네트워크에 있다. 사원관리에 있어 하나의 특색이라면 신규 채용 시 TV, 라디오 구별을 두지 않고, 채용한 뒤 입사 후의 적성에 따라 부서 배치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② 니혼TV 방송망(NTV)주요주주인 요미우리계가 대부분의 주식을 차지하고 있으며 연계가 강한 방송국이다. 뉴스 보도에는 일본 최고의 발행 부수를 자랑하는 요미우리신문의 기동력 취재력을 NNN에 활용함으로써 「기동력 있는 취재로 현장감 있는 뉴스를 보도한다.」라는 TV적인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스포츠에 대한 특히 프로야구 중계의 압도적인 지지율을 들 수 있다.③ 후지TV(CX)현재 젊은 층에게 가장 인기 있는 방송국으로 알려져 있다. 시청률경쟁에서 TBS와 함께 재경 방송국의 수위자리를 고수해 오고 있으며 소위 3관왕 (19시~ 21시까지 의 모든 타임, 19시 23시까지의 프라임타임 방송개시부터 종료까지의 전일의 시청률)을 차지하는 일이 많다. 스타트광고 매상이 뛰어난 민방으로 알려져 있다. 1969년에 VHF국이 대량으로 인가되자 그 대부분을 계열국화 하는데 성공, 민방 최대의 네트워크인 FNN을 완성한 바 있다. 편성전략은 「타국을 흉내 내지 않는다. 새로운 테마에 적극적으로 도전한다.」 라는 것으로 항상 활기에 넘쳐 있으며 타국과는 차별화된 해로운 기획이 많이 탄생된 점이 하나의 특징이라 하겠다. 또 하나의 비결은 편성권의 확대 및 젊은 층을 타켓으로만 오리지널의 구현에 있다.④ 전국 아사히 방송 (TV아사히)1957년 11월 창립시는 교육전문국으로 인가, 명칭도 일본교육TV이었다. 이후 일반국으로 바뀌면서 NET로 불려졌으나 1977년 4월부터 현재의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주주는 아사히 신문, 동영 왕문사의 3자 주축지털방송의 착실한 발전에 대한 중점적인 대처 등이 기대된다. NHK는 비영리 방송사업체에 맞는 전국 보급, 풍부하고 양질의 프로그램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NHK가 보유한 콘텐츠는 수신료에 의해 제작된 국민의 귀중한 재산이며 잠재적인 이용 욕구가 높으므로 디지털 네트워크에 의한 유효하고 공평한 이용과 유통을 도모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NHK는 수신료를 직접 걷는 방식을 고집하고 있다. 수신료는 세금과 달라 공과금에 끼워서 부과할 성격의 것이 아니며 프로그램 내용에 만족하는 시청자가 자발적으로 내야 할 성격의 돈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신료 징수 실태를 보면 NHK 운영이 얼마나 주먹구구식인지 알 수 있다. NHK 설립의 법적 근거는 별개의 특별법이 아니라 1950년 6월 제정된 방송법 2장 ‘일본방송협회’ 규정에 있다. 여기에 공공복지를 위해 일본 전국에 수신 가능하도록 방송을 행할 것, 수지 예산·자금 계획 등에 있어 정부 허가를 얻을 것을 규정했다. 또 TV 보유세대와 시청수신계약을 맺어야 하며 계약 후 수신료를 면제해주면 안 된다고 되어 있다. 또한 수신료를 한국에서처럼 세금 걷듯 공과금에 끼워 넣어 한꺼번에 징수하는 식이 아니라 각 지역 ‘NHK 영업센터’에 소속된 이들이 수금한다. 일부 시청자는 예금계좌로 입금하고 있지만 다수는 직접 돈을 건넨다. 수금원은 NHK 직원이 아니며 개인사업자로 월 고정급은 대략 15만 엔으로 알려졌다. NHK는 수금 부정을 막기 위해 수금업자에게 영수증 발행 단말기를 휴대토록 하고 있다. 영수증 발행시간이 바로 기록되기 때문에 도중에 ‘꿀꺽’할 수 없게 한 것이다. 그럼에도 수금구조가 복잡해 수신료 징수관련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3. 역사로 살펴본 NHK일본의 방송은 라디오 방송으로 1925년 시작되었다. 당시 일본 방송국은 ‘사단법인 도쿄방송국’이었다. 이 도쿄 방송국이 이듬해 설립된 ‘사단법인 일본방송협회’를 거치면서 오늘날의 NHK가 탄생하였다.NHK는 ‘일본방송협회“의 일본어 표기(Nipon Hoso K면서 위성 방송 체제를 확립해 나갔다. 그 해 방송 위성 BS-2a를 이용한 시험방송이 개시된 데 이어 1986년에는 방송위성 ‘BS-2b'가 발사되었다.1987년에는 24시간 위성 실험 방송을 실시했고, 1989년에는 위성 방송 본방송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위성 방송 시대의 막을 열었다. 이후 방송 위성 BS-3a와 BS-3b를 1990년과 1991년 잇따라 발사하는 등 위성방송은 발전을 거듭했다.이런 가운데 NHK는 1991년 고화질, 고음질의 하이비전 시험방송을 개시하면서 한 차원 다른 방송의 시대를 시작하게 된다.1999년 위성 방송 실시 10주년을 맞은 NHK는 이듬해인 2000년, 뉴 밀레니엄을 맞아 디지털과 하이비전이 결합한 디지털 하이비전의 문을 열었다.2000년 12월 1일, 24시간 방송을 시작한 ‘BS 디지털 하이비전’은 고화질, 고음질, 다기능을 특징으로 하는 디지털 방송으로 일본 방송의 총아로 인식되고 있다.4. 인물로 살펴본 NHK가. 에비사와 가쓰지(海老澤勝二)‘에비정일.’ 일본의 언론계 인사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인조차 이 말을 들으면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뜻으로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이 말은 NHK의 에비사와 가쓰지(海老澤勝二·70) 회장을 북한의 철권 통치자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에 빗댄 것이다. 부러움과 비판, 시샘과 야유의 감정이 뒤섞인 조어(造語)다. 에비사와 회장이 단지 사내에서만 절대 권력자로 군림한다면 이런 말이 등장했겠는가. 일본사회에서 어느 언론매체보다 광범하고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방송매체, NHK 그룹의 총수로서 그만큼 사회 전반에 강력한 힘을 쥔 인물인 탓이다.“나는 회장이 될 것이다.”일본의 명문사학 와세다대 정경학부를 나와 NHK에 기자로 입사한 1957년 당시부터 그는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권력지향적 성향이 잘 드러난다. 그는 도쿄 동북부 이바라키(茨城)현 출신으로 결코 명문가에서 태어났다고는 할 수 없다. 대대로 명문호족 집안도 아니고, 부친이 정·재계 거물도 아니었다. 굳이 따진다면 인맥을 총동원해 미국 지국의 기자들로부터 수집한 정보를 활용, 회장 체제를 타도한 정변으로 해석했다. 그래서였을까. 신임 회장은 에비사와를 ‘차기 NHK 회장’에 한 발짝 근접하는 전무이사 자리에 앉혔다. 회장의 의지라기보다 다나카파 인맥을 중심으로 한 자민당의 에비사와 엄호세력의 뜻이었다는 해석이 그럴 듯하게 들린다. 이런 설과 해석이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본인밖에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가 임기 3년의 회장을 이례적으로 3기째 연임하며 8년째에 이르고 있는 점을 보면 적어도 그의 탁월한 생존력 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역대 NHK 회장 가운데 3기 연임, 9년 재임 기록을 가진 사람은 1945년 이후 14명의 회장 중 마에다 요시노리(前田義德) 한 사람뿐이다. ‘아사히신문’ 국제부장 출신인 그는 NHK 보도국장, 편성국장을 거쳐 1964년부터 73년까지 회장을 역임했다.최근 NHK에서 불상사가 잇따르자 이를 ‘에비정일’ 체제가 장기화하면서 필연적으로 등장한 사원들의 기율 해이, 도덕성 저하와 관련해 분석하는 시각이 많다. NHK 일각에서는 회장 중도 퇴임을 요구하는 소리도 나오고 있다. 결국 2004년에 수신료에 관한 비리사건으로 2005년 1월 25일 NHK의 회장 '에비사와 가츠지'는 직원들의 공금 유용의 책임을 지고 사임을 하였다.나. 하시모토 겐이치(橋本元一)새로 취임한 하시모토 겐이치(橋本元一). 이 같은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NHK의 신뢰도는 급격히 떨어져, 전국각지에서 수신료 납입을 거부하는 사례가 급격히 증가했는데, 하시모토 NHK신임회장은 취임 기자회견에서, 1월말에는 수신료 미납가구수가 39만 7천 건에 달했음을 밝혔다. 실제로, 수신료를 징수하러 온 직원을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는 등 수신료를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자, 이에 대해 아소(麻生) 일본총무상이 문제해결 방안으로서 (수신료 미납가구에 대한) 벌칙의 도입, CM도입, TV시청이 가능한 핸드폰(주* 일본은 핸드폰으로 TV시청이 가능하다)이나 컴퓨터 구입 시 가격에 했다.
    경영/경제| 2006.01.18| 11페이지| 1,500원| 조회(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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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경제]미국 자동차 산업과 노동운동
    1. 자동차산업의 생성미국은 철도건설에 주력하여 1850년에 이미 철도총길이가 1만4,520km에서 20세기초에는 40만 km를 넘어서는 철도대국이 되어 있었다. 미국대륙은 더욱 광활해졌고 개인주의적 국민성과 풍부한 석유자원에 힘입어 자동차산업이 급격히 발전하게 되는 기반이 조성되어 1899년 올즈모빌사가「세계자동차의 메카」로 불리우는 디트로이트에 세워져 훗날 제너럴 모터스(GM)의 탄생기반이 되었다. 20세기에 들어 1903년 포드 자동차사를 창설한 포드 1세가 포드A형을 생산하기 시작할 즈음 당시 미국의 총생산은 1만 1천대로 유럽에 비해 약간 늦은 출발을 하고 있었다.포드사는 1909년 1500만대 생산기록을 갖는 세계 자동차사상 초유의 단일모델인「포드 T-Model」을 개발하였다. 「포드혁명」 또는「포드생산방식」으로 불리우는 포드시스템은 컨베이어에 의한 대량 생산방식으로 자동차생산의 혁명을 이루었으며, 저렴한 가격으로 대량보급하게 되어 미국은 세계최초로「자동차대중화시대」를 열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 총생산 362만대 가운데 포드가 167만대를 기록한 1923년 이듬해부터 생산과잉과 대체수요 발생으로 단순한 디자인의「포드 T-Model」에 싫증을 느낀 수요자가 외면하기 시작하였고, 포드사는 다양한 수요의 욕구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GM의 추격에 밀려 결국 오늘날까지 GM에 이어 세계 2위의 자리에 머무르게 되었다. 한편 1908년 GM을 창업한 위리엄 듀란은 2년후「Buick」,「Olds」,「Cadillac」등 25개사를 흡수합병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였고, 오늘날 세계최대의 기업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다졌다.미국의 BIG3(GM, FORD, CHRYSLER)는 1920년대부터 유럽을 중심으로 세계에 진출하여 유럽시장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유럽에 진출한 미국의 현지조립공장은 유럽의 고관세장벽 때문에 현지에서 일괄생산할 수 있도록 전략을 바꾸었으며, 미국의 제조기술과 유럽메이커의 최고기술을 향한 노력이 더해져 유럽시장은 적정생산규모를 확산업은 타산업으로부터 중간재를 구매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후방연쇄효과(Background Linkage Effects)가 매우 높은 반면 타 산업에 중간재를 판매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전방 연쇄효과는 비교적 낮은 최종수요적 제조업형 특성을 갖고 있다. 자동차산업의 생산액이 1억원 증가할 때 원동기부문에서 1천3백만원 철강부문에서 1천1백만원등 전체적으로 볼 때 8천5백만원의 생산이 유발되는 파금효과가 매우 큰 특징을 가지고 있다.이와 같은 특성은 완성차메이커의 외주조달비율에서 나타나는데 일본이 70% 수준으로 비교적 높고 미국이 50%, 독일,프랑스,이태리가 40%수준에 있으며 우리나라는 미국과 일본의 중간수준에 있다.3) 규모의 경제효과가 큰 산업자동차의 생산에는 막대한 설비투자와 개발비가 소요되며 적정수준의 생산규모를 유지하고 생산코스트를 절감시켜야 가격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이와같이 생산수량의 증가에 따라 나타나는 생산비용의 감소효과를 규모의 경제(Economies of Scale)효과 또는 "Scale Merit"라고 하며 자동차산업에서도 이효과가 매우 뚜렷이 나타난다.1960 년대초 미국의 연구결과에서 나타난 자동차 한 모델당 연간 최소 생산량은 10만대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으나 최근에는 30~60만대로 한 개의 자동차회사 100만대~200만대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으며, 이는 생산설비의 자동화에 따른 시설투자와 신제품개발에 따르는 R&D 비용, 제품수명 단축에 따른 금형 및 치공구비용의 증가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브라질등 신흥 자동차공업국가도 대개 30만대 생산수준을 넘어서면서 국제경쟁력을 갖게 되고 수출산업화가 이루어졌다.4) 국민경제적 산업자동차산업은 생산액, 고용, 수출등 국민경제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그 나라의 경제발전이나 경기순환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한 나라의 산업에 기간역활을 하고 있다.따라서 국가는 공업발전과 경제성장 및 고용확대를 위하여 자동차산업을 국가적 전략산업, 기간산업, 선도산업으로 중점 육성하으로 하는 상품주기이론(Product Life Cycle Theory)상 초기단계에는 상품개발국이 무역의 비교우위를 가지나 상품이 표준화되고 기술혁신이 정체되면 점차 개발도상국 또는 후진국으로 비교우위가 이전되며 자동차의 국제협력과 무역도 이 이론에 따라 유럽에서 최초로 발명되었으나 미국이 대량생산을 통해 세계시장을 지배하였으나 점차 유럽의 비교우위 강화로 1950년대와 60년대 유럽의 세계시장지배 시대가 70년대 이후 일본으로 변화하였고 80년대 후반부터 한국등의 신흥공업국가가 소형승용차 분야에서의 비교우위로 미국수출이 가능하게 되었다3. 디트로이트의 종말특히 자동차 산업은 광범위한 관련 산업을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종합산업으로 가장 중요한 제조산업으로 꼽을 수 있다. 또한 한 나라의 경제력과 기술수준을 가늠하는 척도가 될 뿐만 아니라 경제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주도적인 산업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자동차 산업의 흥망이 일국의 경제 성장의 흥망과도 직결된다 할 수 있다.거대하고, 가장 수익성 높고, 가장 영화로웠을 뿐만 아니라 1990년대까지 미국의 경제부흥을 이끌어왔던 주체였던 디트로이트의 자동차산업, 그들은 소비자에 대한 철저한 분석 없이 시장 지배자로서의 자만에 빠져 몰락하고 만다.미국 경제의 심장으로 그동안 미국 경제의 가장 큰 성장동력이었고, 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을 전쟁에서 구한 일등공신 중 하나였던 미국의 자동차산업은 이제 더 이상 미국 내 산업의 리더도 등대도 아니다. 오히려 혼다, 도요타, BMW, 폴크스바겐, 현대 같은 외국 회사들이 미국 시장에서 환영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4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미국에서 팔리는 차 10대 중 9대가 디트로이트에서 만들어진 차였다. 그러나 현재 미국에서 팔린 차 10대 중 4대는 외국 회사에서 만든 차다).1990년대 중반까지 SUV 시장은 디트로이트가 외국 자동차 회사들로부터 공격당하지 않을 확실한 분야로 여겨졌다. 이때 GM, 포드, 크라이슬러는 미국 내 SUV 판매의 90%를 장악했지만, 수입량생산방식을 가장 먼저 체계화 하였고 그로 인해 높은 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다. 미국 자동차산업의 노사관계 역시 이러한 포드주의의 확립과 함께 형성되었다. 1913년 이전에는 대부분의 자동차 노동자들은 남성 숙련공들이였다. 그러나 1920년대에 들어와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법’을 도입하고 일관조립대기술을 개발하면서 대량생산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1912년에는 자동차 한대를 생산하는데 4,666시간이 소요되었던 반면에, 1923년에는 813시간만이 소요될 정도로 생산성의 비약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당시 노동조건은 매우 가혹하였다. 생산량을 증대시키기 위해 일선관리자들은 작업속도를 자의적으로 증대시켜 노동자들의 심신을 병들게 하였다. 해고도 자의적이었고 채용도 자의적이었다.이처럼 1920년대에 대량생산방식의 확산과 함께, 대규모 공장이 크게 증가하고 노동이 기계에 종속됨에 따라 인간소외가 심화되었고, 그 결과 노사간의 갈등과 분쟁이 빈발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1935년에 제정된 전국노동관계법(National Labor Relations Act: NLRA) 또는 일명 와그너 법은 이러한 노사갈등 제도내에서 해결하고 산업평화를 유지함을 목적으로 하였다.전미자동차노조(United Automobile, Aerospace and Agricultural Workers of America: UAW)도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1935년에 설립되었다. UAW가 조직적인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1937년에 발생한 GM에서의 연좌농성파업이었다. UAW는 당시 위원장이었던 월터 로이터의 주도 아래 미국 최대의 자동차 기업인 GM을 공략하기 위해 GM 노동자에 대하여 배타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단체교섭권한을 UAW에게 부여할 것 등을 요구하였지만, GM은 복수노조와의 복수단체교섭과 경영권에 대한 조합의 불간섭원칙을 고집하며 UAW의 요구안을 거부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UAW는 여러 GM 공장에서 연좌농성파업을 벌인 결과 1937년 2월 11일 GM이 UAW의로 이끌어 전후 임금교섭의 전형을 이루는 연차적 인상요인과 생활비 연동요인으로 구성되는 임금인상공식을 정립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임금인상공식의 도입은 자동차산업에 있어서의 평준화된 임금수준을 보장할 수 있는 산업내 패턴교섭의 형태로 정착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다양한 기업내 복지제도를 단체교섭을 통해 확보할 수 있었다.1970년대 들어와 UAW는 GM의 “남부전략”을 좌절시키기도 하였다. GM의 남부전략이란 중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공장들을 노조의 유니언 숍을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남부의 주들로 이전하려는 계획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GM이 파업도 불사하겠다는 UAW의 거센 반항에 굴복함으로써 GM의 모든 사업장에서 UAW의 조직을 인정한다는 방침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 결과 1982년까지는 남부전략에 의거해 세워진 모든 공장에 노조를 조직할 수 있게 되었다.UAW는 미국 자동차산업의 전후 계속하여 호황을 누려왔다는 유리한 경제 여건을 배경으로 하여 비교적 안정적인 단체교섭의 관행을 정착시켜 올 수 있었다. 그러나 UAW는 1970년대 중반 이래 일본자동차들의 미국시장 진출이 확대되면서 자동차 3사가 경영상의 위기에 처하게 됨에 따라 1980년대에 들어와 양보교섭을 감행하게 되었다. 우선, 1970년대 말에 도산위기에 놓이게 되었던 크라이슬러의 자구책을 지원하기 위해 UAW는 파격적으로 패턴교섭을 유보하고 당시 UAW의 위원장이 크라이슬러의 경영자회의에 참석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COLA 등의 임금인상을 자제하는 단체협약을 체결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UAW는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1982년에는 마찬가지로 경영상의 어려움에 처하였던 GM과 포드를 돕기 위해 단체협약 시효만기(1982년 9월) 이전인 그해 3월에 인금인상과 작업장 관리규칙에 있어서 대폭 양보하는 단체협약을 체결하는 대신에, 계속되는 공장폐쇄 상황에서 UAW눈 부분적이나마 고용보장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확보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UAW의 계속되는 양보교섭에 불만을 품다.
    경영/경제| 2006.01.18| 8페이지| 1,500원| 조회(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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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우리 국토 전체가 박물관이며 문화유물의 보물고임을 깨우쳐 준 한 책이 있다. 초중고생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에 항상 포함이 되어있으며 교과서에도 실리고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에 머물며 많은 사랑을 받았던 책, 바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이다.과연 이 책이 우리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이유가 무엇일까?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시리즈물로써 그 중 나는 첫 번째 시리즈, 남도답사 일번지편에 대해 이야기를 하겠다.강진과 해남땅, 그곳은 우리 역사 속에서 단 한번도 무대의 전면에 부상하여 화려한 스토프라이트를 받아본 일이 없어, 그 옛날의 대단한 유적과 유물이 나아 있을리 만무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저자인 유홍준은 뜻있게 거기에는 뜻있게 살다간 사람들의 살을 베어내는 듯한 아픔과 그 아픔속에서 키워낸 진주 같은 무형의 문화유산이 있고, 저항과 항쟁과 유배의 땅에 서려 있는 역사의 체취가 살아 있으며, 이름없는 도공 이름없는 농투성이들이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는 꿋꿋함과 애잔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향토의 흙내음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조국강산의 아름다움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산과 바다와 들판이 있고 이곳의 월출산, 도갑사, 월남사지, 무위사, 다산초당, 백련사, 칠량면의 옹기마을, 사당리의 고려청자 가마터, 해남 대흥사의 일지암, 고산 윤선도 고택인 녹우당, 그리고 달마산 마황사와 땅 끝에 이르는 답사길을 ‘일번지’라는 제목을 내걸고 책의 서두로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남도답사 일번지는 국어 교과서에 일부가 실려있다.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 실릴 정도라면 분명 그의 책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그 장점들은 무엇일까?첫 번째는 쉽게 읽힌다는 점이다.수필같고 기행문 같으면서 한국 미술사를 설명하는 설명문같고 한국의 유물을 소개하는 소개문같기도 한 이 책이 가진 커다란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어렵기만한 우리의 역사를 쉽게 설명하며 자신의 전공인 미술사를 접목시켜 우리나라의 유물의 미적 아름다움을 전할 뿐만 아니라 여행하면서 그곳의 정취와 풍경을 그림을 설명하듯 글을 써놓은 그의 글은 쉽게 머리로 마음으로 들어온다. 중간중간 자신의 경험과 자신의 지기들과의 이야기, 신화나 전설을 인용하는 일등은 더 쉽게 독자가 글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기도 한다. 작가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쓴 계기를 이렇게 말했다.‘문화유산을 답사하면서 나는 감히 국토박물관의 길눈이 되어 나의 동시대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국토의 역사와 미학을 일상 속에 끌어안으며 살아가는 행복을 나누어 갖고 싶었다. 그것이 이 글을 쓰게 된 계기였다.’ 국토의 역사와 미학을 일상 속에 끌어 안으며 살아가는 행복을 나누어 갖고 싶었다는 작가의 마음처럼 그는 어느 누구보다 일상 속에 편히 스며들 수 있게 재미있고 이해하기 쉬운 글을 써내려 갔을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두 번째는 책이 가지고 있는 해박하고 방대한 지식이다.작가 유홍준은 미술사에 빠져 들기 시작한 것은 1972년. 군 복무 중이던 유홍준은 재미 삼아 미술사 서적을 뒤적이다가 아예 푹 빠져들어, 휴가만 나오면 박물관을 찾아가 살았다고 한다. 유홍준은 박물관에서 평생의 반려자를 둘이나 만났다. 하나는 평생 그의 직업이요 낙이 된 미술사 연구였고, 다른 하나는 그의 아내였다. 유홍준은 서울대 미학과 3학년 때 3선 개헌 반대시위에 적극 가담했다가 무기정학을 당한 적이 있었다. 어렵사리 복학했지만 민청학련 사건에 또다시 연루돼 7년형을 선고 받았다. 결국 형집행정지로 풀려나기까지, 그의 아내는 결혼도 하기 전에 꼬박 1년 동안 옥바라지를 해야 했다. 덕분에 1984년 홍익대 대학원 졸업 직후 건국대 미술사학과 전임강사로 발령받았다가 24시간 만에 취소당했다. 최종 승인과정에서 복권이 안됐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그 해 곧바로 복권이 됐지만 그는 이 일로 몇 년을 더 시간강사로 떠돌아야 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쓰기 전까지 그는 ’겨레미술공부방‘을 운영하는 의식 있는 미술평론가요, 문화유산답사회를 만들어 전국을 버스 타고 누비던 극성스런 소장학자였다. 이렇게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그의 지식과 경험들은 책에 고스란히 들어난다. 우리가 소소하게 지나갔던 문화유산을 저자는 진주를 캐내듯 전국에서 숨겨진 역사의 자취와 숨결을 발굴하여,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이야기 솜씨로 풀어 놓은 것이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잘못 오해하고 있는 것과 잘못 알고 있는 상식등을 책에서 바로잡고 제대로 알려준다. 예로 사람들이 오해하기 쉬운 경주의 유물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한다. 경주는 교과서에 씌어있는 대로‘찬란한’문화유산의 보고이다. 기대를 안고 처음 경주에 가보는 사람들에게 감동은 고사하고 실망만을 안겨주는 대표적인 유물을 첨성대이다. 동양 최고의 천문대라고 들어왔는데 실제로 보면 그 규모는 겨우 10m도 안 되는 초라한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는 첨성대의 구조와 상징성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한 채 규모만을 가지고 왈가왈부한 것이다. 첨성대의 기본형태는 신라토기 중 기대를 닮은 단정한 모습이다.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받침이라는 뜻에서 대라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옛날 사람들은 천원지방,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첨성대의 기단은 정사각형이고 몸체는 원으로 되었다. 게다가 몸체의 단의 개수, 몸체 남쪽 중앙의 네모난 창의 위, 아래로 단의 개수, 사용된 돌의 개수 등엔 모두 과학적인 의미가 있다. 또 첨성대는 태양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기준이 되는 기능도 했다. 이처럼 절묘한 구조와 기막힌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남도답사 일번지 - 강진. 해남(2)중에서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편에서는‘다산의 유배지를 답사하는 사람들은 곧잘 다산초당으로 직행하는데 사실 그분의 강진 유배처는 네 번 옮겨졌다.나는 가경 신유년(1801) 겨울에 강진에 도착하여 동문 밖 주막집에 우거하였다. 을축년(1805) 겨울에는 보은산방에서 기식하였고, 병인년(1805) 가을에는 학래의 집에 이사가 있다가, 무진년(1808) 봄에야 다산에서 살았으니 통계하여 유배지에 있었던 것이 18년인데, 읍내에서 살았던 게 8년이고 다산에서 살았던 것이 11년째였다. 처음 왔을 때에는 백성들이 모두 겁을 먹고 문을 부수고 담을 무너뜨리고 달아나며 편안히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라는 글이 나온다. 다산이 직접 쓴 글을 인용하면서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상식을 바로 잡아주는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글솜씨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세 번째는 우리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인식시켰다는 것이다.책을 읽으면 우리 나라 곳곳에는 아직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문화재가 얼마나 많은지. 또 남의 논 한가운데서, 다른 집 뒷마당에서 홀대받고 천대받으면서 점점 사라져 가는 문화재는 또 얼마나 많은지를 알 수 있다. 저자가 쓴 책에 서문에도 얼마나 사람들이 우리 문화재에 무관심하고 무지한지 쓰여있다. 저자는 서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국토박물관의 참 모습과 참된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외국을 관광하고 돌아오는 사람중에는 "대영박물관에 가보았더니 한국미술품이 너무 초라하더라"는 식의 말을 아주 쉽게 해 버리는 경우를 자주 만난다. 그러나 이 말을 정확한 표현으로 고친다면 "대영박물관의 한국미술품 컬렉션은 별볼일 없더라"라고 해야 옳다. 사람들은 생리적으로 흔한 것은 귀하게 여기지 않는 습성이 있다. 가식의 화려함에는 곧잘 현혹되면서도 평범하고 소박한 가운데 진실과 아름다움이 있음은 쉽게 놓쳐 버린다. 게다가 세상의 관심이 아직도 남의 문화에 대한 대책없는 선망과 모방에 쏠리다 보니 저 국토박물관의 유물이 말해주는 진실과 아름다움을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라고 적고있다. 이러한 보통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우리 문화재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를 단 한 권의 책으로(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은 120만부가 넘게 팔렸다.) 날려버리게 해 준 것이 바로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인 것이다.네 번째는 의미 있는 여행의 길잡이를 제시한다는 것이다.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답사'라는 여행문화를 새롭게 정착시킨 것이다. 그의 글을 읽은 많은 독자들은 그가 걸었던 길, 그가 보았던 문화유산, 그가 보았던 그곳의 전경, 체취등을 느끼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가 답사하면서 다니던 코스를 따라 여행의 길을 잡는 것이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는 이미 가본 여행지에 대한 정보도 있었고, 가보지 못한 여행지에 대한 정보도 있었고, 가본 여행지이지만 무심코 지나간 곳에 대한 정보와, 그에 얽힌 전설이나, 그것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의 글까지 실려있기에 좋은 ‘답사‘라는 여행의 길잡이가 되는 것이다. 또한 책에는 남도답사 일번지(강진, 해남, 월출산), 예산 수덕사와 가야산 주변, 경주, 양양 낙산사, 관동지방의 폐사지, 문경 봉암사, 담양의 정자와 원림, 고창 선운사이며 답사 일정표와 안내지도, 작자가 직접 찍은 사진까지도 같이 있기 때문에 더욱 여행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이 책이 출판되면서 중고등학생들의 수학여행 코스가 바뀌었다니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 인가?
    인문/어학| 2006.01.18| 4페이지| 1,000원| 조회(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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