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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사]英祖代 戊申亂의 성격 규명과 탕평책의 실시 문제
    英祖代 戊申亂의 성격 규명과 탕평책의 실시 문제- 朴弼顯의 亂을 중심으로 -【目次】1. 머리말2. 박필현의 난에 대한 고찰1). 관련인물2). 무신란 전반에 걸친 박필현의 위치3. 무신란의 성격4. 무신란 전후의 상황5. 맺음말1. 머리말영조 4년(1728년) 발발했던 무신란(戊申亂)은 중앙 관직을 가진 인물들이 일으킨 난이 라기 보다는 각 지방의 여러 세력들이 왕의 교체를 주장하며 일으켰던 난으로 인식되어져 있다. 또한 결과적으로는 난이 실패했기 때문에 무신란의 실체는 지금까지도 확실하게 구명된 것이 없는 상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완전히 연구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우선 무신란에 대한 기존의 연구경향을 살펴보면 4가지 접근 방식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中央權力과 地方土豪들간의 세력 다툼으로 보는 견해이다). 두 번째는 失勢한 南人과 일부 少論들이 정권회복을 위해서 난을 일으켰다는 견해이다). 또한 세 번째는 당시의 사회변동과 관련지어 조선후기 사회발전의 일면으로 민중의식의 성장이란 측면에서, 무신란이 民亂이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러한 연구경향은 1980년대 이후에 民衆史觀이 발달하면서 조선후기 역사가 민중의 힘을 기반으로 그 토대 위에서 형성되었다는 전제에서 이뤄졌다고 보았기 때문에 형성되었다. 마지막은 인조반정 후 경상우도지방 사림의 동향을 분석하여 우도사림의 분열과 노론의 진출로 인한 동계 후손들의 세거지에서의 영향력 감소 후 세력회복의 시도로 보는 견해이다).그런데 기존 연구의 경우 주로 이인좌나 정희량에게 초점이 맞추어져서 진행되어 오고 있음을 확인해 볼 수 있다. 무신란이 ‘이인좌의 난’으로 대체되어 언급되는 것도 이러한 연구 경향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인좌나 정희량이 무신란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그러나 이 글에서는 박필현(朴弼顯)의 난에 주목하려고 한다. 사실 기존 연구에서 박필현을 비롯한 박필몽은 크게 주목 받지 못했었다. 기존 무신란 연구에서 박필현은 호남 지역에서의 반란친하게 되어 김창집을 흉역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김창집의 처를 합장할 때도 나와 보지도 않아 이유로 ‘인륜을 손상하고 의리를 어기는 짓이 이보다 심할 수 없다’하여 귀양 보낼 것을 청한다. 여기서 박필현은 ‘전 도사(都事)’로 언급이 되고 있어 그가 전에 도사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그런데 그로부터 1년도 지나지 않아 박필현은 태인현감(泰仁縣監)으로 등장한다. 영조 4년 3월 16일에 대사간 송인명(宋寅明)이 곳곳에서 괘서가 나붙는 등의 이상 징후가 보이자 그에 대한 대처를 청하면서 태인현감 박필현을 무신(武臣)으로 개차할 것을 영조에게 건의했던 것이다.) 실록에는 박필현의 이름을 사판에서 삭제할 것을 명한 기록과 태인현감으로 등장하는 이 기록 사이에 박필현이 군수로 임명이 된 사실은 기록되어있지 않다. 다만 3월 25일의 기록에 박필현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록과 함께 그가 종형(從兄)인 박필몽이 무장(茂長)으로 귀양가게 되자 ‘함께 의논하고 군사를 일으키고자 태인현감에 차임되기를 도모했으며, 부임한 후에는 몰래 담양부사(潭陽府使) 심유현과 함께 모의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당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귀양을 겨우 면하였고 당시 영조의 신임이 두터웠던 송인명이 난의 발발 이전에 개차를 건의할 정도라고 할 때, 그가 과연 현감에 차임되기를 도모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박필몽은 박필현의 사촌형으로 숙종 때부터 여러 관직을 겸했었다. 박필몽은 검열(檢閱) 정언(正言), 사서(司書)를 거쳐 지평(持平)에 임명이 되는데 숙종 42년에 조태채를 이유 없이 탄핵했다는 이유로 숙종은 그를 외방에 보임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경종 1년에 그는 다시 지평으로 임명된다. 다시 지평으로 돌아온 박필몽은 임명된 그 다음날 또 다시 조태채와 김창집 등을 귀양 보내라고 탄핵을 하는 등 기존의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다. 이후 부교리(副校理), 헌납(獻納), 광주부윤(光州府尹), 대사성(大司成) 등의 관직에 있다가 경종 3년에는 승지(承旨)까지 오르게 되며 영조 즉위년에는 도승지(都承 가장자리에 진을 친 후, 다음날 다시 남루(南樓) 밑으로 진을 옮기면서 ‘국가에 환란이 있으니 마땅히 근왕(勤王)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중앙에서 새로 임명한 관리)가 온다는 소식을 듣자 김흡 등을 불러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신관은 조정에서 보낸 관원이 아니다. 청주 근처의 수령을 적도가 많이 살해했으니, 이것도 또한 청주의 일처럼 도적이 반드시 나를 죽이고 이 군대를 빼앗으려고 금부도사를 가칭하고 온 것이다. 오늘 급히 행군하여 전주로 가면 전주에서 반드시 괴이하게 여겨 물을 것이니, 너희들이 수기(手旗)를 흔들며 답하기를, ‘근왕하러 올라간다.’고 하면 반드시 의심치 않고 문을 열어 줄 것이다.”그러나 전주감사였던 정사효가 중앙의 빠른 대처와 확실하지 않은 정세에 변심했는지, 박필현의 말과는 달리 정사효는 응하지 않았고 김흠 등을 협박하여 난에 동참시키려고 하지만 그들은 모두 도망쳐버렸다.전주로 일부 병력을 보내 수기를 흔든다던지 ‘근왕하러 올라간다’라는 말을 하는 것은 일종의 사전 약속이 있었던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정사효가 그에 응하지 않지만 여기서 난 이전에 잠시 등장하는 전주감사 정사효를 잠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사효는 이광좌(李光左)의 추천을 받아 영조 1년에 승지까지 올랐던 인물인데 영조 3년 12월에는 전주감사로 임명되어 있었다. 당시 전주감사였던 정사효는 그곳에서 나돌던 흉서를 왕에게 올렸다. 영조는 흉서를 보고나서 범인을 잡게 하는 것은 오히려 흉책에 말려드는 일이라 하여 그 흉서를 불태우게 한다. 그러면서 영조는 의미심장한 지적을 하고 있다.)“이는 저번에 연은문(延恩門)에 걸었던 방서(榜書)와 비슷하다.”하고, 드디어 승지를 시켜 그 글을 불사르게 하였다. 인하여 하교하기를,“익명서(匿名書)를 물이나 불속에 던지는 것은 법문(法文)에 실려 있으며, 비록 부자간(父子間)이라도 서로 볼 수 없는 것인즉, 이와 같이 흉패(凶悖)한 글을 어떻게 상달까지 할 수 있단 말인가? 감사(監司)는 우선 종중 추고(從重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장에 언급하기로 하겠다.3. 무신란의 성격사실 박필현이 모든 모역을 주도했다고 보기에는 애매한 부분들이 많다. 우선 이유익은 공초에서 ‘그 가운데서 이사성이 조금 나았기 때문에 모주를 삼고자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박필현도 사로잡혀 참수를 당하기 전에 이사성을 맹주(盟主)로 언급하고 있다.박필현이 이미 붙잡히게 되자 한속은 병위(兵威)를 크게 베풀고 박필현을 잡아들이니, 박필현이 눈을 부릅뜨고 크게 꾸짖기를,“내가 과연 의거(義擧)하였다. 너처럼 용렬한 자가 어찌 하늘의 뜻과 사람의 일을 알겠느냐? 근래에 서북풍(西北風)이 연달아 부니, 하늘의 뜻을 볼 수가 있다. 우리의 맹주(盟主) 이사성(李思晟)이, 생각건대, 이미 거병하여 서울을 함락하였을 것인데, 일개 영장의 군사가 어떻게 온 나라의 군사를 당하겠는가?”하였다. 이때 함창 현감(咸昌縣監) 이현도(李顯道)가 자리에 있다가 서로 돌아보고는 실색(失色)하며 군졸로 하여금 결박하게 하여 장차 참하려고 하니, 박필현이 상변(上變)할 일이 있다며 지필(紙筆)을 요구했다. 한 속이 아전에게 주라고 명하니, 박필현이 칼[枷]위에다 썼는데, 처음 줄에는 ‘상변서(上變書)’란 세 자를 쓰고, 가운데 행에다 쓰기를,“금일의 사대부(士大夫)는 문관(文官)·남행(南行)무관(武官)·남인(南人)·소북(小北)·소론(少論)을 막론하고 동시에 거의하여 평안 병사 이사성을 추대하여 맹주로 삼아 난적(亂賊)을 토멸하여 종사(宗社)를 안정시키려 했다.”하고, 끝 행에는 ‘박필현(朴弼顯)’이란 세 자를 쓰고, 크게 외치기를,“내가 이미 상변하였으니, 너희 무리가 어찌 감히 나를 마음대로 죽이겠는가? 급히 서울로 올려 보내라.”하였다. 한속이 재촉하여 형을 집행하여 그의 부자 수급(首級)을 깃대에 매달고, 변서(變書)를 감사에게 보고하여 조정에 알린 것이다.이 기록을 보면 곳곳에서 주모자로 지목되었던 박필현조차 이사성을 맹주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으며 자신이 최악의 상황에 몰려 있으면서도 그의난 관직 제수를 살펴본 결과 대부분의 인물이 소론에 속하는 인물들이었다. 즉 무신란 주모자들에게는 소론이 다수 등용되어 권력을 잡는 것과는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특히 주목해야할 점은 ‘검수관망’해야 화를 면할 것이라고 했던 시점에서 불과 4개월이 지나지 않아서 괘서가 나붙는 등의 거사를 위한 사전 계획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이후 3개월이 채 되지 않아 이인좌의 청주 공략이 시작되었다. 앞서 언급되었던 자체적인 준비가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무신란 가담 세력 내부에서 미묘한 분열이 일어났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거병 자체가 계획에 맞게 맞물려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이나) 당시 지방 관리였던 인물들이자 난 발발 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도 있었던 이사성이나 정사효의 반응이 매우 느리거나 아예 없었다는 점도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한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할 때 기존 무신란 연구의 기본 구도라고 할 수 있었던 노론 대 소론 및 남인의 구도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기엔 무신란의 성격이 훨씬 더 복잡하고 다면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4. 무신란 전후의 상황필자는 이미 앞선 chapter에서 무신란의 성격 자체를 파악하면서 노론과 소론의 대결 구도 라고 말하기에는 불편한 점이 있음을 피력하였다. 무신란 그중에서도 박필현의 거병이 失勢한 상황에서 다시 세력 회복을 위한 것이었는지를 살펴보고 영조의 탕평책 시행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무신란 전후에 노 ? 소론의 등용 상황을 정리해 보려 한다.영조는 辛丑換局 후 김일경을 필두로 하여 소론이 집권해 있는 상황에서 즉위하여 이광좌를 영의정으로 승진시켜 좌의정에 유봉휘를, 우의정에 조태억을 제수하여 소론정권을 유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귀양가있던 민진원을 특별 석방하여 이조판서에 제수함으로 노론에게 힘을 실어 주는 듯 한 모습도 보여주었다). 이러한 영조의 의도는 乙巳換局의 모습에서 찾아 볼 수 있다.전교하기를,“붕당(朋黨)의 폐단이 요즈음보다.
    인문/어학| 2006.07.20| 15페이지| 1,500원| 조회(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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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시열에 관해
    目 次························································································p.2·················································································· p.2Ⅰ.머리말1) 시작하는 글 ········································································ p.3Ⅱ.본론1. 생애 ··················································································· p.32. 사상 ····················································································p.83. 제자 ···················································································· p.17Ⅲ 맺음말 ··················································································· p. 18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이상 등장하면서, 양극단의 평가를 받는다. 또한 우암 자신 조차도 양극단에 서있던 사람이라 생각한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는 이미 조선 사회에서는 순기능을 다한 주자학의 대표로 보수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또한 한 왕조의 신하로 왕을 보필하는 모습 보다는 항상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모습을 보여준다.이는 예송논쟁이나 여러 일화등을 통해 알 수 있다.그러나 사회경제사상에서는 송시열은 개혁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는 율곡 이이가 주장한 노비종모종량법을 법제화 시키고, 또한 효종에 의해 중용된 우암은 대내적으로는 예치를 강조하여 무너진 사회질서를 회복하고 사회정의를 구현하려 하 추진하다 기묘사화로 사형당한 사림파의 영수인 조광조를 꼭 배우도록 하였다. 송시열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사림에 대한 이념 교육을 받으며 자란 셈이다.3) 청년기(1) 출사 이전그의 나이 17세가 되던 해 서인 세력이 왕의 조카인 능양군)을 앞세워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결과 왕이었던 광해군은 쫓겨나 제주도로 유배되고, 집권세력이던 동인계열의 대북파는 몰락한다. 이를 이유로 1617년 인목대비에게 문안드린 것을 이유로 관직을 박탈당했던 송시열의 부친 송갑조는 새 왕이 들어서면서 지난날 그가 인목대비에게 문안드린 기상을높이 평가 하여 참봉의 자리가 주어졌다. 송시열이 서인의 대수로 성장하는 배경이 여기 있다 하겠다.21세가 되던 해의 3,4월에 송시열은 잇달아 커다란 슬픔을 맛본다. 하나는 뜻밖에 닥친 큰형의 죽음이고, 또 하나는 부친의 죽음이다. 큰형은 누이를 만나러 가던 길, 후금군의 손에 죽었고, 그의 부친은 성격이 꼿꼿하고 정의감이 강했기에 후금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던 전쟁의 결과)에 상심하여, 그 괴로움을 이겨 내지 못하고 죽고 만다. 송시열이 훗날 북벌을 계획하면서 청나라를 치고자 하는 과업에 앞장서게 된 것은 가족들에 얽힌 개인적인 사정도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인조 8년 1630년에 아버지의 삼년상을 벗은 송시열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심경(心經)》, 《근사(近思)록》, 《가례(家禮)》등을 배웠다. 김장생은 당시 83세의 나이로 학계의 거목(巨木)이었다. 율곡 이이로부터 학문을 전수 받아 성리학에 관한 지식이 깊은 데다 특히 예절에 관한 학문 분야에서는 당대 제1의 인물로 평가되고 있었다. 송시열은 이로써 확실히 율곡의 학통을 그대로 물려받게 되었고, 학문을 닦을수록 더욱더 율곡과 주자에 대한 존경심이 짙어가게 되었다.그러나 생각보다 사계에게서 학문을 배운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송시열이 본격적으로 사계와 사제관계를 맺은 지 1년여 만에 사계가 별세했기 때문이다.그 후 그는 사계의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불벌계획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으며, 특히 북벌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면, 효종은 다른 신하를 멀리하고 종래의 격식을 깨뜨리고, 송시열가 마주앉아 논의하곤 했다고 전해진다.4) 장년기효종의 특별한 신의를 받던 송시열은 효종이 갑자기 급서하자 절망한다. 그때 효종에 대하여 인조의 후비인 자의왕후 조(趙)씨가 복제(服制)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논의 되었는데, 송시열은 이미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의 상(喪)에 장자복(長子服)으로 3년 복제를 입었으니 이번에는 효종이 비록 정통인 왕위에 오른 임금이라 할지라도, 인조의 둘째왕자이니 예설(禮設)에 따르고, 1년 기한의 기년복(朞年服)으로 정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그러나 효종이 승하하고 송시열이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정권을 장악하려는 남인들은 효종이 비록 둘째왕자이긴 하나 조종(祖宗)의 대통을 이은 군주이니 마땅히 장자복인 3년제로 정할 것이라 주장하였다. 또한 송시열의 왕에 대한 충성심을 걸고 넘어들어 단순 복제문제에서 성리학 이념의 대립으로 비하된다. 송시열의 복제문제에 불만을 품은 경상도 유생들이 상복고증(喪服考證)이라는 16조를 상소하여 송시열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현종은 기년복으로 결정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 과거를 볼 자격까지 박탈하였다. 이로서 긴 예송논쟁은 송시열의 승리로 끝난 것처럼 보였다.54세인 현종 1년 우찬성에 올랐을 때, 앞서 효종의 장지를 잘못 옮겼다는 규탄을 받고 결국은 낙향해 버렸다. 그 후 이조 판서에 두 번이나 임명되었고 판의금, 우참찬, 우찬성, 세자 이사 등의 중요한 직책을 맡기려는 왕이 부름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병 등을 핑계로 삼아 사퇴하고 나가지 않았으며, 가끔 왕의 간곡한 권유에 못 이겨 하는 수 없이 나설 때에도 불과 며칠이나 몇 달쯤으로 그 자리를 물러나는 것이 보통이었다.5) 말년기현종 9년 우의정이 되었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 불화로 사직했다. 현종 10년 태조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릉인 정릉을 복구하기를 청하였고, 보오법, 기가 하나의 존재 양태로 있음을 통찰하였다.송시열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일면 의리적 실천에 앞장섰고, 일면 예학의 발전에 노력하였다. 성리학을 體로 하여 用으로서의 예학과 의리학을 번전시켰다고 볼 수 있다. 송시열의 의리에 대한 관심은 일찍이 그의 부친이나 종형 송시영, 큰형 송시희 등 가학적 연원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또 그가 살았던 17세기의 역사적 배경, 즉 청의 침략 앞에 수모를 겪은 민족적·문화적 자존심의 상처와 그로 인한 윤리강상의 파괴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도 있다. 근원적으로는 스승인 김장생으로부터 전수 받은 ‘直’의 가르침이 평생 그의 사상과 생활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이해된다.송시열의 의리 사상에서의 직은 인간의 본심이요 본질이며, 천리에 근본한다. 천리가 인간에게 주어진 바가 직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직은 송시열에 의하면 도로 통용되고 또 도의로도 통용된다.이런 송시열의 의리적 실천에 대해 알아보면, 그는 효종의 간곡한 부름을 받고 「기축봉사」를 통해 13개조의 時務를 개진하였는데, 마지막 제 13조에서 “정사를 닦아 오랑캐를 물리치라”고 말한다. 송시열에 따르면 청에 대한 복수설치(復讐雪恥)의 뜻은 천성의 자연한 발로이지 일신의 사사로운 감정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라 한다.) 따라서 송시열의 북벌 의리는 근본적으로 『춘추』의 대일통(大一統)사상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춘추의 정신은 대일통의 의리에 있는데, 이것이 밝혀 지지 않으면 인륜이 무너지고, 인륜이 무너지면 나라도 망한다고 한다. 송시열은 『논어』의 “원망은 직으로 갚고 덕은 덕으로써 갚으라” 는 말에 근거하여 청에 대한 부끄러움을 ‘직’으로 갚고자 한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지공무사(至公無私)로 이해된다. 그에게서 직으로 원망을 갚는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감정적 차원의 보복이 아니라, 사회 정의의 실현이라는 의미 또는 불의에 대한 미움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또한 그의 의리 정신은 83년의 생애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는 고려 충절을 지킨 정몽주의 신도비문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예송논쟁에서 잘 볼 수 있다.3) 사회경제 사상(1) 내수사 및 궁가의 특권 혁파송시열이 평생 강력하게 주장했던 것 가운데 하나가 내수사 및 궁가의 특권 혁파였다.그는 이이의 주장을 계승해 기축봉사에서, 내수사를 “私와 利를 가르치고 원망을 불러 모으는 곳”으로 비판하고 재물을 호조로 돌리고 사람은 병적으로 돌려보내고 가짜로 속해 있는 자는 본래 주인에게 환원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면 왕은 私를 없애고 利源을 막고 뭇사람의 원망을 푸는 세 가지 좋은 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1657년(효종 8년) 올린 정유봉사에서도 내수사 폐해를 지적하였으며 이후에도 여러 번 내수사의 혁파를 주장하였다.동시에 송시열은 궁가의 특권을 혁파할 것을 주장하였다. 정유봉사에서 공주 저택의 사치스러움을 비판했던 그는 8년 만에 재출사한 뒤 열린 경연에서도 공주들이 농토를 많이 차지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3백결로 한정하고 있는 법전의 규정대로 제한을 둘 것을 강조하였다. 1668년 현종에게 올린 글에서는 궁가의 불법과 특권을 제한하고 위반한 자는 가차 없이 법으로 다스릴 것을 주장하였다.‘전하께서는 오늘 당장이라도 지체하지 말고 德音을 반포하소서. 내수사는 혁파하여 이조에 소속시키고 궁가들의 저택 가운데 제한을 넘은 것은 헐어버리소서. 선조 초에 정한 노비 8명 제도에 의거해 이를 초과한 수는 모두 제거하고 職田制를 상고하여 거짓 빙자한 立案은 없애고 民田을 불법으로 빼앗은 것이나 기타 柴場, 鹽盆, 魚箭, 願堂, 船稅 등 공익을 해치고 백성을 수탈하는 것은 종류별로 통렬하게 혁파하소서. 그리하여 中外 大小로 하여금 임금의 뜻이 있는 곳을 환히 알게 한 다음 조정의 신하들을 격려해 忘私奉公 하도록 하신다면 장차 우뢰가 울리고 번개가 치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듯 그 뜻에 크게 부응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따르지 않는 자가 있을 경우 有司의 법으로 다스린다면 아무리 귀양 보내고 극형에 처하더라도 누가 감히 원한의 마음을 품겠습니까.)이후에도 계속되는좌의정
    인문/어학| 2005.04.23| 18페이지| 1,500원| 조회(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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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운의 천재 시인 허난설헌
    비운의 천재 시인 허난설헌Ⅰ. 서론 (선정 동기)허균의 누나로 잘 알려진 허난설헌은 여성의 자유로운 창작활동이 허용되지 않았던 시대에 탁월한 시상을 형상화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27세로 요절하였지만, 사후에 나온 213수의 난설헌 시집으로 한·중·일 삼국에서 가장 뛰어난 여성시인으로 평가받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많이 잊혀진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여성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평가를 얻지 못한 인물이기도 하다. 지금부터 허난설헌의 생애와 업적을 통해 그녀의 삶에 대해 재 조명해보고 내 스스로 재평가를 내려보려 한다.Ⅱ. 본론1. 생애1 탄생기허난설헌은 강릉(옛 지명은 임영(臨瀛)) 초당리에서 아버지 허엽(許曄)과 어머니 김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허엽(1517 - 1580)은 호가 초당(草堂)으로 후에 경상감사를 역임하였고 동서분당 때 동인의 영수가 된 인물이다. 허난설헌의 가문은 대대로 이름 있던 허씨의 일문으로, 부친은 서경덕의 문인으로 부제학까지 오른 학자였으며, 그녀의 형제 또한 유명하다. 그중 허균은 홍길동의 저자이자 조선의 이름난 선각자였다. 이로 보아 허난설헌의 어렸을 때의 환경은 그 누구보다도 좋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녀는 천재의 재질과 유달리 아름다운 용모를 타고났다고 한다.2 유년기허난설헌의 난설헌은 호이고 그녀의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이었다. 조선시대 당시 여성에게는 학문 배움의 기회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주위 형제들의 어깨 너머로 한자를 배웠으며, 여러 책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어려운 한문을 읽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주위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그녀에게 정식으로 공부를 가르치는 것이 좋겠다고 권하게 되었으며 그녀의 형제들이 그녀에게 기초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후 그녀는 겨우 7세 때 광한전(廣寒展){) 선녀가 살고 있다는 상상 속의 궁전, 백옥루(白玉樓){) 천제가 사는 상상 속의 궁전의 상량문(上樑文){)새로 짓거나의 내력 또는 고치게 된 까닭, 공역(工役)한 날짜·시간 등을 적어둔 글을 썼다고 전해지며, 신동으로 여겨지게 된다.여성에게는 언문이외의 글을 가르치지 않던 시대였지만 여동생의 문재(文才)를 아깝게 여긴 허봉의 주선으로 난설헌은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울 수 있었다. 이달은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는데 서얼로 태어났기에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상 벼슬길에 나갈 수 없었고 떠돌이 생활을 했으며 틀에 박히지 않은 당시 풍의 글을 썼다. 난설헌은 이달에게서 자유분방한 성격을 지닌 당나라 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그녀는 많은 시를 지었고, 그의 동생이자 홍길동의 저자인 허균도 누이의 시에 대해서는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3 성년기이 같은 재능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남존여비의 사회에서 태어났기에 나이가 차자 어쩔 수 없이 한 남성에게 시집을 가야 했고, 남편을 받들며 시집살이를 해야했다. 그녀 나이 15세(혹은 17세)에 문벌 집안인 안동 김씨의 김성립에게 시집을 갔다. 그의 집안은 5대나 계속 문과에 급제한 문벌이었다. 겉으로만 보기에는 대단한 집안의 만남 축복 받는 결혼 이였다. 그러나 김성립은 생각보다 뛰어난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과거공부를 하긴 했지만 별로 진전도 없었을 뿐 아니라 자신과 허난설헌의 재능을 비교하며 열등감을 지니고 있었던 인물 이였던 것 같다. 허균의 기록에 의하면 허난설헌의 부부간의 사이는 좋지 않았고, 고부간 갈등도 심했던 것 같다. 부부간의 갈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얘기들이 전해온다.남편 김성립이 접(接: 글방 학생이나 과거에 응시하는 유생들이 모여 이룬 동아리)에 독서하러 갔다. 난설헌은 남편에게'옛날의 접(接)은 재주(才)가 있었는데 오늘의 접(接)은 재주(才)가 없다'(古之接有才, 今之接無才)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즉 파자를 사용해서 지금의 접은 接에서 才자가 빠진 妾(여자)만 남아있다고 하며 방탕하게 노는 것을 꾸짖었던 것이다.다른 얘기에는 김성립과 친구들이 집을 얻어서 과거 공부를 하고 있었을 때 김성립의 친으로 '김성립이 기생집서 놀고 있다'고 했다. 난설헌이 이를 전해 듣고는 안주와 술을 보내면서 시를 한 구절 써서 보냈다."낭군께선 이렇듯 다른 마음 없으신 데,같이 공부하는 이는 어찌된 사람이길래 이간질을 시키는가?"(郎君自是無心者, 同接何人縱半間)이를 보고 사람들은 난설헌이 시에도 능하고 기백도 호방함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김성립은 공부를 한다고 하면서 난설헌을 멀리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고 또 역설적으로 평소 기생집에서 놀았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다.결국 허난설헌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으며, 자신의 재능을 펼친 기회도 없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녀는 달을 보고 한탄했으며 혼자 시를 읊음으로 한을 노래했다고 전해진다. 그중 유명한 것이 규원(閨怨)가 이다. 이 시를 통해 그녀는 눈물로 지새우는 나날, 버려져 있는 자신의 처지를 시로 풀었다.그런 나날 속에서도 딸과 아들을 두었는데, 그녀는 남편에 대한 애정을 자식들에게 쏟아 부었고, 어린 남매가 자라는 모습을 보고 인생의 재미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행복하지 못했다. 그녀의 두 자식들이 해를 연이어 죽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런 슬픔을 시로 표현했다. 그녀의 한은 꼬리에 꼬리를 이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으며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두 자식을 잃었다. 거기에 더해 친정에도 풍파가 몰아쳤다.그녀의 아버지는 상주에서 객사하였고, 그의 오빠 허봉은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허봉도 결국 객사하고 말았다.난설헌은 몰락해 가는 집안에 대한 안타까움과 자식을 잃은 아픔, 부부간의 우애가 좋지 못함과 고부간의 갈등, 그리고 사회의 여성에 대한 억압 등등을 창작으로 승화시켰음에 틀림없다. 그녀는 항상 화관(花冠)을 쓰고 향안{) 香案:향로나 향합 따위를 올려놓는 상과 마주앉아 시사(詩詞)를 지었다고 한다. 그녀의 시제는 거의 세 가지 한탄 이였다. 그 첫째가 조선에서 태어난 것이요, 둘째가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고, 셋째가 남편과 금슬이 좋지 못한 것이라 한다. 첫째는 그녀가 시 뽐낼 수 없는 좁은 풍토를 안타까워한 것이고, 둘째는 남성으로 태어나 마음껏 삶을 노래하지 못한 것을 뜻한 듯 싶다.허씨 가문의 몰락과 남편 김성립의 방탕, 자식의 죽음으로 허난설헌은 생에 대한 의욕을 상실하고 우울한 심정에서 도피하기 위하여 별초당에서 만권서를 벗삼아 신선과 교령하고, 때로는 무당을 불러 무당굿도 하면서 소일했다고 한다. 이런 것들이 그녀로 하여금 도교에 빠져 들 수 있게끔 하였던 것 같다.4 생의 마지막친정 아버지인 허엽이 역적으로 몰리자 하루아침에 그녀도 역적의 딸로 몰리고 말았다. 어떤 이유로도 이혼이 허락되지 않았던 조선 사회에서 유일하게 이혼의 사유가 되었던 것은 역적의 자식이었다. 그녀는 시집을 갔지만 역적의 딸이라는 이유로 남편 김성립에게 이혼을 당했다. 그 후 그녀는 27살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일화에 따르면, 허난설헌의 죽음은 신비롭다. 허균의 《학산초담》과 구수훈(具樹勳)의《이순록(二旬錄)》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난설헌이 일찍이 꿈에 월궁(月宮)에 이르렀더니, 월황(月皇)이 운(韻)을부르며 시를 지으라 하므로'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碧海浸瑤海 靑鸞倚彩鸞 芙蓉三九朶 紅墮月霜寒)라고 하였고, 꿈에서 깨어난 뒤 그 경치가 낱낱이 상상되므로"몽유기(夢遊記)"를 지었다. 그 뒤에 그녀의 나이 27세에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 사람들에게 '금년이 바로 3·9수에 해당되니,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 하고는 유연히 눈을 감았다. 3·9는 27이라, 난설헌이 세상에 살다 간 세월과 같다. 난설헌은 그렇게 1589년 3월 19일, 향년 27세로 요절했다. 집안에 가득 찼던 그녀의 작품들은 다비{) 茶毗: 불교용어로 불태우는 것. 화장.에 부치라는 그녀의 유언에 따라 모두 불태워졌다. 그녀가 자신의 작품을 불태우라고 한 이유는 확실치는 않으나, 마음의 계속 써온 원고를 남기는 것은 적나라한 자신의 심정 모두를 세상에 드러내 놓는 것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2. 허난설헌의 작품세계허난설헌은 여성에게 주어진 질곡의 사회적 제한을 극복하지 못하고 규원(閨怨)의 세 가지 한(고부간의 갈등, 남편과의 불화, 두 자녀의 죽음)을 품고 살면서도 신선적 초월의 세계관을 그린 시에 자신의 한을 선명하게 표백했다. 남존여비(男尊女卑)가 엄연히 존재하던 사회에서 여성의 자유로운 창작활동이 허용되지 않았던 시대에 탁월한 시상을 형상화한 점도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참으로 하늘 선녀의 글재주를 지녔다" 든가 "시와 문장은 하늘이 내어서 이룬 것들"이라는 허균의 평가를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그의 시에 응축된 시적 상상력과 영롱한 신선적 세계관은 시대를 초월했던 것이다.3. 허난설헌의 업적허난설헌의 작품을 둘러싸고 많은 표절 시비가 있어왔다. 동시대의 이수광{) 조선 중기 문신·실학자.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峰). 본관은 전주(全州). 경기도 장단(長湍) 출신. 태종의 7세손으로 병조판서 희검(希儉)의 아들이다. 1582년(선조 15) 진 사가 되고 85년 별시문과에 급제, 92년 임진왜란 때 경상우도방어사 조경(趙儆)의 종사관 으로 출전했다가 패전하여 의주(義州)로 왕을 호종하고 부교리가 되었다.을 필두로 해서 최근까지도 표절에 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허난설헌(1563-1589)은 생전에 아주 많은 양의 작품을 저술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은 아쉽게도 그녀가 죽을 때의 유언에 따라 화장에 부쳐졌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알려진 그녀의 작품은 대부분이 그녀의 동생 허균(1569-1618)이 남아있는 글들을 모아 1590년에 처음으로 "난설헌고(藁)"를 만들었고 후에 "난설헌집"으로 출간한 것이다. 난설헌집"(1608년)의 허균의 발문(跋文)에 이렇게 적혀있다."...전략... (난설헌이) 자녀가 없다보니 평생을 저술로 살아 저작이 아주많았다. 유언에 따라서 다비(茶毗)에 붙였다. 전하는 작품이은데
    인문/어학| 2004.04.28| 6페이지| 1,000원| 조회(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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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통사상] 한국의 전통 윤리 사상과 현대에 우리가 배워야 할 점 평가A좋아요
    한국의 전통 윤리 사상과 현대에 우리가 배워야 할 점.Ⅰ. 서론현대 한국의 문제점을 들어보면 몇 가지로 요약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가치 전도(顚倒)현상을 들 수 있는데 이는 경제적 물질적 가치의 중시로 인간 보편적, 정신적, 윤리 도덕적 가치 상실로 인하여 발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다양한 병리(病理) 현상도 나타나고 있는데, 이로 인해 인명과 생명경시, 자연파괴와 생태계 위기, 인간성 상실, 황금만능의 물신(物神)주의, 공해와 환경 문제 등이 팽배하고 있다. 이는 우리의 전통적 사상에서 좋은 것들을 이어 나가는 과정에서 해결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리포트에서는 우리의 전통 사상 등을 살펴보고,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을 알아보겠다.Ⅱ. 본론1. 우리 나라의 전통 사상.1 단군 신앙 사상단군 신앙 사상은 그 사상만으로도 한민족의 윤리관, 가치관, 세계관, 건국 이념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사상은 우리 민족의 원초적 관념과 생활 양식이 깃들여 있고, 역사 적으로 국가 위기 시 민족의 주체성 회복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왔다.그 내용을 살펴보면, 내용은 환인과 그 아들 환웅, 그리고 환웅의 아들인 단군에 이르기까지의 삼대에 걸친 가계도와, 환웅이 아버지 환인의 도움과 허락을 얻어서 하늘에서 태백산으로 내려오는 것, 신단수(神壇樹) 아래 신시(神市)를 베풀고는 스스로 환웅천왕이라 칭하면서 인간세상을 다스리게 된 일, 곰이 호랑이와 함께 사람되기를 원하였다가 곰만 사람 여자로 화신한 것, 그리고 이 여인, 곧 웅녀(熊女)가 사람의 몸으로 현신한 환웅과 혼인한 것, 그 부부가 낳은 아기를 이름지어 단군왕검이라 하고 평양에 도읍을 정한 뒤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한 것, 그가 1908세의 수(壽)를 누린 끝에 아사달 산에 숨어 산신이 된 것 등 7개의 이야기토막으로 엮어져 있다. 이러한 단군 이야기의 윤리적 의의를 살펴보면 우선 인간 중심적 인본주의적 성격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천신 환웅이 인간 세상에 살기를 원하였고{) '탐구인세(貪求益人間)의 정신이다. 이는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인간 중심주의 사고로 이타주의, 인간 존중 사상, 복지, 정의, 평화, 도덕적 가치의 실현 등을 추구한다. 홍익인간을 위한 조건으로 '8조법금'의 공공질서 의식과 민족 의식 등을 들었다. 마지막으로 평화 지향적 성격을 들 수 있는데, 단군 이야기 자체가 평화적 내용으로 일관된 것으로 보아 이것이 우리 민족의 평화 애호적 민족성의 근원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2 풍류 사상신라의 최치원이 유·불·도 3교사상을 포함한 현묘한 도라 하여 우리 나라의 고유한 사상을 뜻하기도 한다. 이러한 풍류 사상을 기본으로 한 것이 신라의 화랑도이다. 화랑은 신라시대의 청소년 수양단체로써, 국선도(國仙徒)· 풍월도(風月徒)· 풍류도(風流徒)라고도 한다. 원화(源花)제도가 그 전신이며, 진흥왕 때 화랑도로 정식 제도화하였다. 화랑집단은 화랑 1명, 승려 1명, 다수의 낭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신라시대를 통틀어 화랑은 200여 명에 달하였다. 보통 3년 여 동안의 수련기간 동안 국토를 순례하고 도의를 연마하였다. 도의란 진평왕 때 원광법사가 제정한 세속오계로 충(忠)· 효(孝)· 신(信)· 용(勇)· 인(仁)을 그 내용으로 하였다. 삼국통일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신라의 멸망과 함께 제도도 사라졌다. 화랑도의 기본 정신은 화랑도의 정신은 원광법사의 세속 5계로 나타낼 수 있다. 세속오계는 事君以忠(사군이충){) 충으로써 임금을 섬기라.(충), 事親以孝(사친이효){)효도로써 부모를 섬기라. (효), 交友以信(교우이신){)믿음으로써 벗을 사귀라.(신의), 臨戰無退(임전무퇴){)싸움에 임해서는 물러남이 없도록 하라.(용맹), 殺生有擇(살생유택){)생명을 죽임에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자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유교의 충효사상, 불교의 계율사상, 도교의 심신도야가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겠다.또한 풍류사상은 최치원의 사상에서도 알아 볼 수 있다. 풍류사상은 유·불·도 사상 전래 이전에 이미 유·불·도 사상 내용이 포함되어 민족불교로 바꾸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 원효의 사상을 살펴보면, 우선 일심(一心) 사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하나의 마음으로 돌아가[還歸一心] 모든 생명에게 이로움을 주는 삶을 강조한 것이고, 교. 선(敎.禪)의 대립을 높은 차원에서 통합{)≪대승기신론소≫을 주창한다. 두 번째가 가장 중심이 되는 '화쟁(和諍) 사상'이다. 이는 각 종파들의 다른 이론을 인정하면서도 이들을 좀더 높은 차원에서 통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 번째는 원융 회통(圓融會通) 사상 으로 원만하고 막힘이 없이 하나로 만남으로써, 대립과 갈등을 보다 높은 차원에서 조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원효의 사상은 왕실, 귀족, 이념적 불교를 일반 서민의 삶 속에 확산(생활 속의 신앙)을 주장했고, 여러 사상들의 조화를 꾀했다고 평가된다.4 불교 사상불교사상이 가장 융성했을 때는 고려라 할 수 있겠다. 고려의 불교의 성격은 호국 불교(護國 佛敎)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팔만 대장경 판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팔만 대장경은 몽고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기 위해 만든 것이다. 고려의 불교는 의천과 지눌로 대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의천의 사상을 살펴보면, 교종과 선종의 조화 강조를 강조했다. 그는'내외겸전(內外兼全)'을 통해, 내적 공부[선종]과 외적 공부[교종]를 골고루 갖추어 조화를 이루어야하고, 교관겸수(敎觀兼修)로써 교선 합일을 주장한 새로운 천태종(天台宗)의 창건을 했다. 지눌(知訥, 1158-1210)의 사상은 "선은 부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의 말씀이다."(禪是佛心,敎是佛語)이라는 말로 교선이 본시 하나임을 뜻한다. 그는 원융회통의 전통을 계승한 인물이고, 화엄교리를 겸해 녹여 조계선(曹溪禪)을 주장했다. 이 불교의 사상을 통해서 풍류의 사상과 마찬가지로, 조화의 정신을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5 유교 사상고려에서 불교 사상이 유행했다면 조선시대에 주로 유행했던 사상은 유교다. 숭유 억불(崇儒抑佛) 정책과 백성들의 윤리 생활 교육으로 인해 많은 발전을 이, 조선의 성리학은 사단 칠정론{)조선시대에 이황(李滉)이 주장한 인생관의 논리적 학설. 사단은 맹자(孟子)가 실천도덕의 근간으로 삼았던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 지심(是非之心)을 말하는 것이고, 칠정은 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欲) 등 사람이 가진 7가지 감정을 말한다. 여기서 이황은 사단을 이(理)에서 나오는 마음, 칠정을 기(氣)에서 나오는 마음이라 하여, 인간의 마음에 대해 이기이원론 (理氣二元論)을 주장하였다. 사단칠정분이기왕복서, (四端七情分理氣往復書) 조선시대 성 리학의 핵심 개념인 사단· 칠정· 이기에 관한 글을 엮은 책. 2권 2책. 목판본. 이황(李 滉)과 기대승(奇大升)이,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天命圖說)》에 대한 서로 다른 견 해에 관하여 논쟁을 벌인 편지를 집록하였다. 이 책은 성리학 연구의 기본 자료이며, 이 사단칠정설에 관한 이론적 차이에 의하여 영남학파· 기호학파, 주리파(主理派)· 주기파 (主氣派) 등의 학파로 나뉘었다과 같은 인성론의 탐구가 특징이다. 우리 나라에서 중시한 성리학의 인성론을 살펴 보면 인간의 본연성{)인간의 본연성 - 인간은 모두 선한 존재, 존엄한 존재, 평등한 존재밝히고, 그 본연성에 근거하여 어떻게 삶을 영위할 것인가를 탐구했다. 또한 현실의 인간 행위는 인간의 본연성과는 많은 괴리(乖離)를 보이고 있음을 의심하고 탐구하기도 했다. 이황(退溪)과 기대승(高峯)간의 四七논변으로 조선 성리학의 인성론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6 조광조의 사상조광조는 본관 한양이고, 자 효직(孝直), 호 정암(靜庵). 시호 문정(文正)이다.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이며,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어천찰방(魚川察訪)이던 아버지의 임지에서 무오사화로 유배 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였다. 1510년(중종 5) 진사시를 장원으로 통과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성균관에서 학문과 수양이 뛰어난 자를 천거하게 되자 유한 확신이 기초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학문과 경륜이 완숙되기 전에 정치에 뛰어들어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하게 개혁을 추진하려다가 실패했다는 점은 후대 사림들에게 경계해야 할 점으로 평가되었다. 훈구파의 반격으로 자기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고 개혁은 한때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의 이념과 정책은 후대 선비들의 학문과 정치에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조선 후기까지의 모든 사족(士族)은 그가 정몽주 ·길재(吉再)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김굉필로 이어져 내려온 사림파 도통(道統)의 정맥(正脈)을 후대에 이어준 인물이라는 점에 정파를 초월하여 합의하고 추앙하였다. 그것은 학문의 전수 관계로 인한 것만이 아니고 목숨을 걸고 이상을 현실정치에 실행하려 한 노력에 대한 경의였다. 문집에 《정암집》이 있다.7 실학 사상실학은 16세기 중엽, 성리학자들의 비현실적 논쟁과 당쟁, 사화(士禍)로 사회 기강 문란해지고,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국민 생활 궁핍해 지자, 시대적 상황 극복 노력, 근대 지향적, 개혁적인 사상의 등장했다. 이는 율곡 이이의 경제적 안정을 통한 사회 개혁(현실주의)에 영향받아 태동했고, 정약용 시기에 집대성되었다. 실학의 과제는 민생안정과 사회발전 등, 현실 사회 문제 해결이어서 그 사상은 경세치용(經世致用), 이용후생(利用厚生), 실사구시(實事求是)등으로 전개되었다. 우선 경세 치용(經世致用)은 농업의 혁신을 통한 현실 문제 해결 모색하려던 것으로 균전제, 한전제(限田制), 정전제(丁田制)등의 토지 제도를 이용, 빈농층을 대변, 토지개혁을 통한 농촌 경제 현실 개선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두 번째는 이용 후생(利用厚生)인데, 이용(利用)은 경제 성장, 후생(厚生)등의 사회 복지를 뜻하는 것으로 청의 발달 문물을 배워 상공업의 진흥을 통한 경제 성장과 사회 복지를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용(利用)에 의해 축적된 부를 후생(厚生)의 사회복지로 전환하여 안정된 사회 이룩하자는 뜻이 담겨져 있다. 세 번째가 실사 구시(實事求是)이다..
    인문/어학| 2004.04.25| 7페이지| 1,000원| 조회(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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