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담론 - 페미니즘을 통해 바라본 포스트모더니즘페미니즘 미술운동의 궤적페미니즘 시각의 미술비평과 미술사는 지난 15년 사이에 부상한 최근의 현상이다. 그 짧은 역사 속에서 페미니즘 미술비평과 미술사의 제 1세대가 '여성이라는 존재 의 조건과 경험'을 강조했다면 1970년대 후반에 시작된 제 2세대는 타 학문분야에 서 이루어진 페미니즘 비평의 영향을 받아 미술생산 및 평가에 관한 연구, 미술가 의 역할에 관한 연구를 통해 미술과 문화에 대해 좀더 복합적인 비평을 제공했다.미술비평 제 2세대 중에 현대미술 비평가들은 후기구조주의, 기호학 그리고 심리 분석학적 비평에서의 새로운 포스트모던 방법론들을 활용하면서 페미니즘적 시각을 받아들인다.그 대표적인 글이 바로 크레이그 오웬스의 [타자의 담론]이다. 본인은 크레이그 오웬스로부터 포스트모던 상황에 놓인 여성미술가들을 살펴볼 것이다. 그럼 일단 본격적으로 이 글을 살피기 전에 페미니즘 미술의 대두와 전개, 논의 과정들을 먼저 둘러보도록 하자.1세대 페미니즘 미술 운동전통적인 미술 비평이 제 1세대 페미니즘 미술의 쟁점과 이미지들을 제대로 다루 지 못했을 것은 뻔한 일이다.제 1세대 미술가, 비평가 그리고 미술사가들은 미술계 안의 차별을 폭로하고, 개 혁을 지지하며, 현대와 과거의 여성미술가들을 보다 폭넓게 조명하는 데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1세대 여성작가들은 여성에 의한 미술 생산물의 본질, 그에 대한 평가, 위치에 관 련된 쟁점들을 다루었고 페미니즘 미술비평 발전의 선두를 달려왔다. 미술에서의 페미니즘 운동은 1960년대 말에 시작되었는데 이는 1960년대 중반에 일어난 보다 일반적인 페미니즘 운동과 정치적 행동주의로부터 자극을 받은 것이었 다. 미국에서의 페미니즘 운동의 특징은 서부해안 지역의 미술가들이 미학적인 쟁점 과 여성적 의식을 탐구하는데 보다 깊이 관여했던 반면, 뉴욕의 작가들은 제도적 성차별주의의 비판을 통해 전시에서의 경제적 평형과 동등한 표현의 기회를 모색했 다는 점이다. 페미니즘 미술의 처음 10년간은 분노뿐만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의식 그 리고 새로운 감수성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미술을 창안하려는 시도 그리고 페미니 즘 의식을 고양시키고 심지어 그것을 생성해 낼 수 있다는 미술의 가능성에 대한 낙관적 믿음에 의해 부상되었다. 초기의 페미니즘 미술 운동에서 일어난 활동이 도화선이 되어 작가와 비평가들은 새로운 쟁점에 관여하게 되었다. 1970년 전반기에 활동했던 페미니즘 미술가들은 비록 자신들이 던진 질문의 해답을 미처 찾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명백하게 드러나 고 있는 듯한 우리 문화 구조의 부조호와 분열들을 폭로했다. 낸시 스페로와 메이 스티븐스의 작품에서의 가부장적 억압에 관한 쟁점들, 실비아 슬레이, 조안 젬멜 그리고 한나 윌크의 작품에서의 보다 적극적인 신체 감각의 창 안, 미리엄 샤피로, 조이스 코즈몬드의 작품에 있어 '순수미술'에서 '공예'에 이르는 허구적인 위계를 부수려는 시도, 메리 베스 엘델슨의 작품에서 위대한 여신과 같은 여성의 원형에 대한 탐구, 주지 시키거나 여타 페미니즘 미술사가들의 작업에서의 여성의 역사회복 등이었다제 2세대 페미니즘 미술운동2세대 페미니즘은 여성이 겪고 있는 사회적 불평등 이상의 것을 의문시한다. 여성 을 남성과의 관계에서 불가피하게 불리한 위치에 놓는 심층의 이데올로기적 구조들 을 고찰한다. 가부장제가 그 하나의 예가 된다면 사회계약은 또 다른 예가 된다. 의식이나 자아가 주체의 중심이 아니라는 라깡주의적 정신분석의 통찰에 영감받 아 제 2세대 페미니즘은 언어, 법 그리고 철학에서의 성차별(gender bias)에 도전한 다. 여성은 단순히 남성과 동등해지는 것을 목표로 해서는 안되며 새로운, 고유하게 여성적인 언어, 법 그리고 신화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 2세대 페미니스트들은 특정하게 여성적인 것의 본질보다는 젠더 차이에서 비 롯되는 효과와 상호작용을 연구하기 위해 여성적 성과 여성적 감수성에 대한 이슈 는 접어두었다. 티크너가 실비아 슬레이에서 한나 윌크에 이르는, 많은 제 1세대 페미니즘 미술가 들의 작업에서 발견했던 '식민화'되고 소외된 여성의 육체를 재구성하는 대신에 바 바라 크루거와 메리 켈리같은 미술가들은 그것을 해체시키고 있다. 제 2세대 페미니스트들은 오히려 '의미화의 특정 체계들 내에서 생산된 고정되지 않은 여성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가부장제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비판과 재현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비판이 교차하는 지점을 주목하고 있다. 그의 논의를 따라가면서 제 2세대 페미니즘 미술가들의 활동들을 살펴보도록 하 자.타자의 담론 속으로라깡의 유명한 언설을 인용한 '타자의 담론'은 미술계 안의 차별을 폭로하고, 개 혁을 지지하며, 현대와 과거의 여성미술가제 1세대 미술비평당시 부상하고 있던 제 1세대 페미니즘 이후 등장한 2세대 페미니즘 미술비평을 포스트모더니즘 논의와 결 부시켜 풀어 낸 남성의 글이다.어처구니없는 간과그는 재현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을 이야기하며 여성은 오로지 재현되어질 뿐이고 여성은 언제나 이미 재현의 대상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 일반에 관한 논의의 맹점을 지적하며 논의하는 대상에 관 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발화 역시 성차의 문제를 표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했다. 그는 마사 로슬러 (Martha Rosler)를 예로 들며 페미니스트들은 모더니즘이 예 술작품에 부여한 특권적인 지위를 폭로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포스트모던 문화에서 가장 두드러진 양상으로 페미니즘을 꼽는다. 그런데 이러한 끈질긴 페미니즘 목소리의 현존을 포스트 모더니즘 이론은 억압하거나 혹은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차이와 비교불가능함을 고집하는 여성들의 주장이 포스트모던한 사고와 양립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런 사고의 한 실례라고 주장한다. 페미니즘을 다원주의에 대한 증거로 간주하며 페미니즘 자체를 단원론적인 것 으로, 그 내부의 다양한 내적 차이들을 억압하는 것에 대해 비판한다. 또한 성적, 인종적, 계급적 차별에 대립되는 모든 다른 형태의 특수성과 함께 함 으로써, 가부장제에 대한 페미니스트 비판의 특수성이 부정되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크레이그는 여성들이 도전하는 것은 이론이 그 자체와 그것의 분석대상과의 사 이에 유지하는 거리, 대상을 객관화시키고 그 위에 군림하는 그 거리에 도전한다 고 보는데 여성적 글쓰기의 대표적인 페미니스트인 뤼스 이리가라이, 헬렌느 식수 를 꼽고 있다. 여성적 글쓰기, 즉 비판적, 이론적 글쓰기를 전략적 개입을 위한 중요한 경합장으 로 여기며 모더니즘 예술가들이 글쓰기를 일차적 작업에 비추어 거의 언제나 보완 적인 것으로 간주하던 것과 비교하고 있다. 많은 페미니스트의 실천을 특징짓고 있는 여러 방면에서의 동시다발적인 활약은 포스트모던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모더니즘의 예술적인 실천과 이론 사이의 엄격한 대립구도를 지닌 반면 포스트모던한 페미니스트 실천은 이러한 이론에 의문을 제기 한다. 크레이그는 이러한 페미니스트 작가로서 메리 켈리의 예를 들고 있다. 메리 켈리는 [산후 기록](1973~79)이라는 작품을 통하여 이러한 이론과 실천 의 엄격한 분리를 흐트러 놓고 있다. 이 작품 전체는 6부 165작품으로 구성된 작업 으로 다양한 양식의 재현매체 -문학적, 과학적, 정신분석학적, 고고학적 등등의 재현매체를 총동원한- 를 사용하여 그녀의 아들이 6살에 이르기까지의 연대기를 기 록한 것이다. 부분적으로는 사료보관소이자 부분적으로는 전시회이고 부분적으로는 사례연구 인 이 산후 기록은 라깡 이론에 대한 기여이자 동시에 비판인 셈이다. 그녀의 [산후기록] 은 라깡식 서사 안에 잠재된 어처구니없이 간과한 것을 궁극 적으로 노출시켜 이론의 절대성을 부정하려 하였다.잃어버린 서사를 찾아서크레이그 오웬스는 탈근대성의 출현을 서사의 정당화 기능과 합의를 도출해내는 서사 능력에 대한 위기신호로 본다. 최근 들어 지배력 상실의 증후는 오늘날 문화활동 전반에서 드러나고 있고 이런 현상이 시각예술에서보다 더 잘 드러난다고 지적한다. 기능과 용도라는 합리적 원칙을 충실히 반영, 환경을 변화시키시 위해 권력과 과 학기술을 결합시키려는 모더니즘의 기획은 오래전에 포기되었다고 말하며 때때로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작품은 의도적인 지배력의 거부를 표명해 왔다고 이야기 한다. 그 예로 마사 로슬러의 두가지 부적절한 묘사체계로 본 바워리 거리(1974~7 5) 들고 있다. 이 작품은 표제/텍스트의 관습적인 기능, 즉 이미지가 결여하고 있는 것 을 메꾸는 것으로서의 기능을 거부한다. 그 대신 시각적, 언어적인 두가지 재현체계 를 병치시킴으로써 각각의 진리치를 강조하기 보다 잠식하려는 계산을 깔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녀는 이 작품에서 오늘날 정치적으로 동기화된 예술적 실천의 핵심적 문제, 즉 '타인을 대신해 발언하는 것의 무례함'을 부정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는 위태로운 재현전략의 빈곤을 드러내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근대성과 페미니즘리타 펠스키 지음출판사 : 거름헤마 쓰다근대성의 성별(gender of modernity)은 무엇인가?'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근대성의 성별이라고? 응, 그건 물론 남성이지. 많은 이들은 생각할 것도 없이 대답할 것이다. 우리의 일반적 관념 속에서도 근대성은 논리와 인간의 이성, 과학, 자연의 정복 등의 남성성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이며, 근대성을 비판하는 포스트모던의 시각이나 페미니즘의 시각에서도 근대성은 남성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책의 서두를 보자마자 나는 책의 전체적인 내용을 미리 예감했던 것 같다. 그래, 이것은 근대의 남성성을 비판하는 책일 거야. 그러나, 나의 예감은 몇 장을 채 넘기기도 전에 틀린 것이었음이 판명되고 말았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계속, 그동안 내가 근대성에 대한 나의 태도에 별 반성 없이 얼마나 앵무새같은 말들을 반복해 왔는지를 의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책은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는 사람 뿐만 아니라 근대성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까지도 근대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는, `참신한' 책이다.근대 시기에 대한 설명이 대부분 합리화, 생산성, 억압 등 남성적인 특성의 지배를 강조하긴 하지만, 근대적 주체성의 수동적이고 쾌락적이며 탈중심화된 성격에서 입증되는 서구 사회의 여성화-그것을 찬성하건 비난하건 간에-를 지적하는 텍스트 또한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p26-27)리타 펠스키는 페미니즘 이론의 렌즈를 통해 근대를 다시 읽고자 하는 욕망에서 이 책을 썼다고 밝힌다. 그의 이러한 욕망은 위의 인용 글에 나타나듯이 지금까지의 근대성 논의가 근대가 남성이냐 여성이냐의 이분법 속에 갇혀 있었으며 이러한 이분법이 근대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일편 가로막고 왜곡시켰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오히려 근대를 이 두 가지가 뒤엉킨 모순적인 과정으로 본다. 그는 근대의 복잡성과 모호성에 천착하여 근대의 구체적인 문화적 텍스트들을 분석한다. 굳이 근대가 탈근대를 이미 포함하고 있다는 말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그가 보는 근대성은 분명 이것이다라고 일반화시켜 버리기에는 놓지는 것이 너무 많을 단어인 것이다.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변증법』(1947)이라는 책에서 이미 근대의 이러한 성격을 파악하고 있었다.우리는 사회 속에서의 자유가 계몽적 사유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데 대해서는 어떤 의심도 갖고 있지 않으며 이것은 우리의-아직 검증되지는 않았지만-전제를 이룬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뒤엉켜들어간 구체적인 역사적 형태나 사회제도 뿐만 아니라 이 계몽 개념 자체가 오늘날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저 퇴보의 싹을 함유하고 있다는 것을 또한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고 믿는다.(계몽의 변증법 p49)여기서 계몽을 근대의 간명한 표현으로 읽어낸다면, 우리는 근대성의 양가적 성격을 유추해 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근대적 여성성에 관한 우리의 의식/무의식 또한 되돌아 볼 수 있다. 여성성은 보수의 시각에서건 진보의 시각에서건 근대의 바깥에 위치하는 개념으로 자리매겨져 왔고, 특히 진보의 시각에서 근대라는 억압적인 역사적 과정을 넘어설수 있는 해방적 메타포로서 표상되어 왔다. 그러나, 리타 펠스키는 이러한 시각 역시 근대적 이분법의 환영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남성들과 동일한 방식대로는 아니었지만 여성들 역시 사회 안에서 근대를 구체적으로 경험해왔기 때문이다. 근대라는 시대에 남성성과 여성성의 경계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경계는 각 정체성들이 서로를 넘나드는 모순적이고 흔들리는 것이다.내가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은 제 3장 상상적 쾌락이다. 부제는 `소비의 성애학과 미학'인데 백화점에 관한 분석을 하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백화점에 가는 여성에 대한 분석을 하고 있다. 백화점은 어렸을 때의 나에게는 행복과 동경의 대상이 되어주었던 곳이고, 지금은 경멸의 대상임과 동시에 은밀한 욕구의 장이기도 하다. 이 장이 마음에 든 이유는 아마도 나의 이 모순되고 일면 반동적인 생각의 구조를 밝혀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생산이 아닌 소비의 관점에서 근대를 조명해 보려는 시도 역시 매우 의미 있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19세기 말부터 소비자는 여성으로 묘사되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이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구매를 담당하게된 계층이 실제로 여성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소비자가 여성으로 묘사되는 과정을 탐구하는 것은 단순한 실제 상황 이상을 이해하는 데 단초가 된다. 여성화된 소비자로서의 근대적 주체는 더 이상 이성으로서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던 예전의 그 근대적 주체가 아니었다. 주체는 자제력을 잃고 상업주의의 이익불리기 농간에 놀아나는 희생양으로 이해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상황은 여성이 자신의 욕구 중 적어도 상품에 대한 욕망은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게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여성의 다른 쾌락에 대한 욕망들도 눈을 뜨게 만들어 사회를 전복시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리타 펠스키는 에밀 졸라의 소설 『여인 천국』(1883)을 텍스트로 삼아 이러한 여성 소비자들에 대한 모순적인 가정들이 당대의 사람들의 의식 속에 모호하게 자리잡고 있었음을 보임으로써,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관계가 기존의 페미니스트들이 규정하던 것보다 훨씬 더 다층적이고 복잡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를테면 소설에서 겉으로는 손님의 욕망을 모두 이해하는 척 하면서, 속은 경멸로 가득찬 백화점 주인과 그에 혹해 상품을 마구 사들이는 여자 손님의 관계에 대해 리타 펠스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상업이 여성의 모든 변덕을 충족시키기 위해 주도면밀하고 철저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여성의 이해는 공적 영역에서 전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근대의 여성성 숭배를 지탱하는 착취적인 경제관계를 은폐한다.(p120)아내의 충동적 낭비벽을 알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대해 무력한 남편에 대한 에밀 졸라의 묘사는 그가 쾌락주의의 조장은 개별 남성 자본가에게는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주겠지만, 사회전체적인 시각으로 볼 때 남성과 여성의 관계, 가부장제에 미칠 영향은 전복적인 것으로 이해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리타 펠스키는 얘기한다. 이러한 데 대한 공포는 졸라의 또 다른 작품인 『나나』에서도 드러나고 있으며 이러한 태도는 위에서의 백화점 주인과 손님의 관계에 대한 이해와는 매우 모순적으로 보인다.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소비주의에 있어서 여성의 해방적 차원을 강조하기도 했다. 소비주의가 여성의 욕망이 명명되고 자유롭게 표현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기존에 소비자로서의 여성을 거짓 쾌락에 속아 이것저것 막 사는 수동적 존재로서만 바라보았던 것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될 수는 있으나, 그것이 소비의 주체가 될 수 없는 돈 없는 여성들에 대한 분석은 피해가고 있다는 점에서 적절한 분석은 아닌 듯 하다.리타 펠스키는 위와 같은 해방적 지점들을 인정하지만 그것들은 상품화된 여성성의 억압적 규범, 그리고 소비에 대한 집착들과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발현되어 왔음을 주장한다.근대성의 문화는 욕망하는 여성성을 억압했던 몇몇 전통적인 구속을 붕괴시키기도 했지만, 동시에 비록 그보다 뚜렷하게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새로운 사회통제의 그물망을 만들어내기도 했던 것이다. (p147)그렇다면 여성화된 남성의 이미지, 남성화된 여성의 이미지는 어떠한가? 19세기 말 오스카 와일드를 위시한 소위 유미주의자들의 삶과 텍스트에 드러나는 여성적 취향, 나르시시즘, 인공성, 무절제 등은 당시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서 제기되고 행해지던 생활 양식이었다. 이들은 부르주아 남성 이데올로기에 명백히 대립되는 가치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리타 펠스키는 그들이 이를 표면적으로만 부정했을 뿐 되려 성별 위계질서를 더욱 공고히 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저속함'에 대한 깊은 혐오를 가지고 있었던 엘리트주의자들이었다. 저속한 층은 대중이고, 대중의 가운데에 여성이 있다. 그들이 여성성을 자신의 육체에 각인시켰던 부분은 다름아닌 소비의 영역에서였고 다른 부분은 여성들과 끊임없이 경계를 그어가며 자신들의 우월성을 입증하려 했다. 심지어 작품 속에서 여성의 통제할 수 없는 힘에 의해 남성이 지배당하는 때에 여성은 단지 무의식적이고 훈련되지 않은 주체성의 통제되지 않은 무절제를 상징화하는 육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리타 펠스키는 말한다.나는 그동안 문화를 다루는 페미니즘적 시각이 `여성적인 것은 해방적이다'라는 암묵적 명제를 견지해 온 것은 정치적이고 전술적인 의미였다고 생각한다. 어떤 문학 작품이나 영화, 미술 등에서 드러나는 여성성을 그 이전의 해석들처럼 허약하고 변덕스럽고 사소한 것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공적인 사회적 관계망 틈새에 존재하는, 사회균열의 힘을 지니고 있는 메타포로 바라보는 것은 단지 그러하다의 설명적 의미 뿐만 아니라 그러하게 해야 한다라는 당위성까지도 포함하고 있다.리타 펠스키의 글은 매우 흥미롭지만, 위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이전의 일관된 페미니즘의 근대성 분석에 대하여 가지는 보다 나은 실천적 함의는 무엇일까에 대해서는 좀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근대에 나타나는 여성과 남성들의 정체성에 끊임없이 균열을 가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을까?그는 7장 성도착의 예술에서 `라쉴드'라는 프랑스 여성작가의 책을 비평한다. 나도 처음 들어보는 작가라 그의 비평에 의존하여 라쉴드의 텍스트를 추리해 볼 수밖에 없었지만 여성의 성욕을 거침없이 묘사했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던져주었다. 그는 인식하고 욕망하는 도착적 여성 주체의 비전을 창출하는 가운데 현대 페미니즘 이론과 뚜렷하게 관련된 주제들을 탐구하고 있다.(p285) 『사드 후작부인』(1887)이라는 책에서는 여성과 남성의 성역할이 뒤바뀐다. 여성은 더 이상 남성 새디즘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지만 기존의 사도-마조히즘 텍스트의 거울상으로 이를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기존의 남성 사디스트가 자신의 권력에 의거해 도착적 행위를 행해 왔다면, 책에서의 여성 사디스트는 유혹의 방법을 통하여 남성을 지배하고 파괴하는 힘을 얻었다.
자유리포트자문자답 형식으로 고찰한 자위에 관하여추 한, 섹시한, 어두침침한, 흥분되는, 우울한, 창피한, 죄책감이 드는, 행복한, 설레이는, 흐뭇한, 소외되는, 어찌할 수 없는, 자극적인, 고독한, 분출하 는, 답답한, 말해서는 안되는, 섬세한, 부드러운, 구석진, 별 관심없는, 이기 적인, 무표정한, 쓸데없는, 고통스러운, 죽고싶은, 따뜻한, 자기애적인, 해소 되는, 소름끼치는, 억압적인, 화가 나는, 날아갈 것 같은, 진실된, 자유로운, 등등.일 반적으로 '자위'하면 우리는 쉽게 남자들의 자위를 떠올리게 되지요. 그 만큼 남자들의 자위는 여자들의 자위에 비해서는 훨씬 우리에게 익숙한 이 야기에요. 설령 구체적으로 어떤 다양한 행동을 통해 자위를 하는지 알 수 는 없어도 우리는 남자들이 자신의 성기를 만짐으로써 발기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고, 사정하고 나서 어떤 기분인지는 잘 몰라도 예상되는 남자들의 표정이 있지요. 또 일상 속에서 빈번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가끔 남자들의 자위에 대해서 듣게 되구요. 남자들의 농담이나 욕지거리 속에 성은 참으 로 자주 등장하는 메뉴니까요.어 쨌든 최근 성의학에 대한 지식의 증가 때문인지, 이제 남자들의 자위는 어느정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되고 있어요. 물론 아직도 소년 기의 남자 아이들은 많은 죄책감으로 괴로워하고 있겠죠. 밖으로 이야기하 지 못하는 성행위는 더욱더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들테고, 더욱 어둡고 음 침한 이미지로 나타날 것이고, 결국 성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갖게 하겠죠. 자위에만 몰두하는 자신이 과연 이후에 여자에게 멋진 남자로서 역할할 수 있을지 두려워하게 될 것이구요.여 자들의 자위는 어떠한가요? 여러분들은 남자들의 자위와 동떨어져서 여 자들의 자위에 대해서만 한번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대체로 여자들이 성 에 대해서 생각하는 이미지들은 남자들의 생각에 참 많이 지배되지요. 왜 냐하면 세상 어디에도 남자들이 아닌 '여자들에 의해서' 성에 대해 이야기 되지는 않으니까요. 누군가 여자들에 의한 여자들의 게 될 때, 그 내용들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것이 급진적이든 보수적이든 간에 남자 들에 의해 그려진 성이 대부분이에요. 우리가 동일시하거나 아니면 동일시 를 거부하거나, 혹은 과감하게 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숨기거나 간에 그 기준은 모두 남자들의 성이지요.음 음, 서두가 너무 길다구요? 그럼 우리 지금부터 여성들의 자위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해 보죠.Q: 도대체 자위가 무엇이죠?A: 자위는 성행위의 일종이에요. 의사나 성상담자들은 자위와 성관계의 구 분을 조금씩 다르게 하고 있어요. 예컨대 어떤 사람들은 파트너와의 삽입 이 아닌 모든 행위를 자위라고 말하지요. 이렇게 본다면 애무라든지 성관 계 이전의 모든 행동들은 전부 자위가 되겠지요. 하지만 내가 여기서 쓰는 '자위'는 파트너없이 혼자 하는 성행위를 말해요. 그것은 삽입 여부에 따라 성관계와 구분되는 것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기구' 삽입을 통해 자위할 수 도 있으니까요. 결론적으로 성관계가 '관계'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다 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한 성행위라면 자위는 '혼자서' 하는 성행위라고 할 수 있죠.Q: 자위는 왜 해야 하는 거죠?A: 질문이 좀 이상한 것 같네요. 나는 지금 반드시 자위를 해야 한다고 말 하고 있지 않아요. 마치 반드시 타인과 성관계를 가질 필요가 없듯이, 반드 시 자위를 할 필요는 없죠. 심지어 모든 종류의 성행위를 거부할 수도 있 어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연한 계기에 청소년 이전 시기에 자위 를 알게 되죠. 그리고 상당수의 사람들은 파트너가 있다 하더라도 자위에 더 매력을 느끼고 있어요. 왜냐구요? 글세, 어떤 보수적인 사람들은 아이를 낳기 위해서 이루어지는 남녀 사이의 성관계만을 유일하게 정당한 성행위 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달라요. 누구나 성욕이 있는 사람이라 면 나름대로 최선의 방법을 생각하고 실행할 권리가 있어요.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에요. 그리고 최선의 방법이 자위라면 구태어 남녀 사이의 성관계라는 도식에 얽매일 필 때문에 자위에 대해서 더 쉽게 알게 돼 요. 비슷한 시기에 이러한 경험을 공통적으로 갖게 되고 아무래도 사회적 으로 남자들의 성은 보다 거리낌이 없기 때문에 소년들은 대개 친구들과 자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를 통해 더욱더 보편적인 경험으로 나누게 되죠. 누가 먼저 사정하는가를 놓고 내기를 하는 것은 전 세계 많은 민족 들에서 보여지는 공통적인 소년들의 놀이에요.하지만 여자들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죠. 여자들은 사춘기가 되더라도 무의 식적으로 발기하거나 하지는 않으니까요. 보통은 외부와의 우연적인 접촉, 예컨대 샤워를 하다가 자극을 받거나 아니면 우연한 계기에 자신의 성기에 자극을 받게 되는 경험, 이런 것들이 자위의 시작이죠. 한 번 흥분을 경험 하게 되면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들을 실험해 볼 수도 있구요. 아무래도 질은 내부로 움푹 들어가 있기 때문에 질을 통한 자위는 매우 늦게 알게 되지요. 보통은 클리토리스 자극이 먼저 이루어져요. 손가락으로 클리토리 스를 애무하거나 다른 도구를 사용할 수도 있고, 그러다가 질 안으로 손가 락을 하나 혹은 두 개씩 집어 넣어보게 되죠. 성관계 장면을 본 사람이라 면 페니스가 움직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손가락을 움직여볼 수도 있겠 죠.Q: 질 안에 손가락을 넣게 된다면 처녀막이 찢어지지 않나요?A: 처녀막은 일종의 근육이에요. 그것은 질 입구를 둥글게 막고 있는데, 그 렇다고 무슨 코르크 마개처럼 꽉 막고 있는 것은 아니지요. 우리가 다달이 하는 월경이 바로 질 입구가 꽉 막혀 있지 않다는 증거예요. 처녀막은 사 람에 따라서 모양이라든지 질긴 정도가 매우 달라요. 드물지만 어떤 사람 의 경우에는 처녀막이 너무나 촘촘하고 단단하게 입구를 막고 있어서 외과 수술을 통해 처녀막을 제거해 줘야만 월경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있죠. 대 부분 많은 사람들이 삽입 행위로 인해 처녀막이 찢어진다고 알고 있는데, 그것은 정말 잘못된 생각이에요. 물론 삽입 행위를 통해서 찢어질 수도 있 지만, 뛰어놀다가 일찌감치 처녀막이 없어졌을 수도 그만큼 페니스가 여자의 몸이 부드러워지기 전에 폭력적으로 들어왔다는 얘기와 다르지 않아요. 따라서 질 안에 손가락을 무리하지 않게 넣는다면 당연히 그로 인해 처녀막이 없어져 버리거나 하지는 않겠죠.Q: 자위가 사춘기때 시작되는 이유는 왜인가요?A: 일반적으로 사춘기때 첫 번째의 자위를 경험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 든 사람들이 사춘기에 자위를 처음으로 시작하게 되는 것은 아니에요. 의 식적으로 자신의 성기를 만지고 그를 통해 쾌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생후 6개월부터 가능하다고 해요. 단지 사춘기 때는 남성이나 여성 모두 성적 호르몬이 증가하게 되기 때문에 성욕이 증가하게 되고, 그만큼 성적인 출 판물이나 영화, 비디오 등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지요. 또 사회에서 성 적인 면에 대해서 억압하기 시작하기 때문에 호기심도 더 많아지구요. 그 래서 사춘기때 대체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위를 배우게 되고, 의식적으 로 즐기게 되죠.Q: 자위는 정말 몸에 해롭지 않나요?A: 이른바 자위를 하면 피가 피가 더러워진다거나 피부가 나빠진다거나 혹 은 결혼 후 성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식의 이야기라면 분명히 그렇지 않아 요. 하지만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하거나, 너무 마찰을 심하게 해서 상처가 난다면 그것은 위험한 일이겠지요. 질 안에 무언가를 삽입하고 싶을 때에 는 그 물건이 과연 내 몸에 적절한 크기이고 모양을 갖추었는가를 먼저 고 려해야 해요. 진정한 성행위는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나온다 는 것을 잊지 마세요. 자위를 할 때에는 무엇보다 감염에 조심해야 하는데, 예컨대 더러운 손으로 클리토리스를 만지면 방광염에 걸릴 수 있어요. 물 론 방광염이 자위를 통해서만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질이나 항문과 달리 요도는 외부 물질에 대해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잘못 클리토리스를 애무하 다가는 방광염에 걸릴 수 있어요. 한번 방광염에 걸리면 평생 재발의 위험 이 있으니까 자위를 할 땐 청결함에 주의해야겠죠.Q: 저는 자위를 너무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어느 정도까지가 괜찮않으면 그만두는 것이 옳고, 서로가 원한다면야 하루에 100번을 한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겠죠. 자위 역시 마찬가지에요. 자위를 하고싶어 하는 나 와 자위의 대상이 되는 나를 동시에 고려할 줄 알면 되지요. 몸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인데도, 게다가 내가 즐길 수 있는 다른 즐거움도 많은데 오 로지 자위에만 집착하는 것은 결코 나 자신을 진정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볼 수는 없어요. 어떤 성적 욕망이 생길 때에는 그것이 과연 꼭 성적 행위 를 통해 풀어져야 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세요. 예컨대 산책을 하거나 글 을 써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춤을 춰보는 것도 좋겠지요. 아니면 맛있는 커 피를 마시든지요. 성행위의 기쁨 외에도 스스로 자신의 삶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여러 가지를 꼭 생각하고 만들어 보세요. 단지 파트너가 없기 때문에 대리만족하고 집착하는 자위는 별로 추천해주고 싶지 않은데요?Q: 인공으로 만든 페니스가 판매된다고 하던대요?A: 맞아요. 인공 페니스의 발명은 고대로부터 시작되었답니다. 고귀한 이집 트 여자들의 무덤에서는 진흙으로 만든 페니스가 발견되었으니까요. 인공 페니스를 뜻하는 말로 '딜도'라는 용어가 있어요. 딜도는 세계 여러 지역에 서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 졌어요. 예컨대 중세 유럽에서는 모양이 쉽게 나 오는 부드러운 왁스가 사용되었고, 이후 프랑스에서는 생고무 안에 따뜻한 액체를 넣어 체온과 비슷한 온도를 낼 수 있도록 만들기도 했지요. 일본에 서는 상아가 쓰였구요. 현재는 미국과 일본을 주축으로 플라스틱으로 만든 각종 딜도들이 판매되고 있어요. 심지어 전기를 사용해서 페니스의 움직임 을 표현할 수 있는 기구도 나와있지요. 만약에 이러한 물건이 필요하다면 인터넷으로 주문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여자들의 자위란 결 코 남자들과 성관계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은 아니라 는 점이에요. 대개 딜도는 남자들의 페니스 모양을 그대로 본뜨고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여자들의 자위는 마치 주변에 삽입해 줄 '진짜' 페니스가 없 .
[비디오 아트] 새로운 페미니즘 미학 / 정치학의 실천¤ 제목 : 페미니즘. 비디오. 미술¤ 저자 : 김홍희¤ 출판사 : 재원¤ 발행일 : 1998년1. 비디오-아트!자자 서두르지 말구 천천히 제목의 문을 두드려봅니다본격적인 글을 소개하기에 앞서 간단히 아이스브레이킹을 해봅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비디오 아트'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백남준' '여러 대의 수상기와 정신없이 바뀌는 화면들' 정도?아 너무 무시하지 말라고요? 그래도 이와 대중의 접촉이 '백남준=위대한 한국인 예술가'하는 범주 밖에서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별로 없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아트 혹은 아방가르드, 포스트모더니즘 등등 용어들로 이루어진 이에 대한 담론들은 거리가 멀게 느껴지기 마련이죠.하지만, 이미 '아트'가 고급 예술이라는 한정된 범주를 넘어 광범위한 문화현상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으며 미학적, 형식적 요소와 더불어 그 정치성이 부각되고 있는 가운데 비디오 아트가 우리의 문화, 예술 지형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상당한 것입니다. "독립 '영화'"로 불리는 제작 비디오들이 6,70년대 서구, 이후의 제 3세계 정치적 아방가르드의 대표적인 실천으로서의 다큐멘타리와 연결되어 있으며 강력한 탄압과 통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거침없이 드러내면서 80년대 한국 사회, 문화, 예술계의 대표적인 사조로 지칭되던 소위 '사회적 리얼리즘'의 전위에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요.또한, 기존의 영화와 TV, 이외 사진, 사운드, 기타 전자 기술의 혼성체로서 이미 매체 자체가 포스트모던적이므로 비디오를 이용한 문화, 예술적 실천은 현재 포스트모던 문화 담론의 지형과 지향점을 가장 적극적이고 첨예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비디오 아트는 소위 제도권의 고급 예술에서 시작되어, 60년대 정치, 미학적 아방가르드와 포스트모더니즘 사조에 의해 고급, 저급의 위계가 해체되면서 새로이 정립된 예술 문화적 실천의 첨병이 되었고, 나아가 오늘날에는 기존의 예술 제도와 일상의 간극, 생산채로운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는 비디오 아트에 대해 고찰해 보는 것은 지금의 예술, 문화적 실천의 현주소와 지향점을 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페미니즘 비디오 아트에 대한 논의는 이제까지 활발하게 논의되어 온 '페미니즘 문학이론' '씨네 페미니즘' 이후의 새로운 페미니즘 미학과 실천의 방향을 제시한다는 차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2. 『페미니즘. 비디오. 미술』이제까지 비디오 아트에서 있어온 페미니즘적 실천들을 해석, 정리하는 동시에 매체 발달에 의해 변화하는 사회, 문화 지형 안의 새로운 페미니스트적 지향점을 짚어보는 방대한 사적 작업을 토대로 한 책『페미니즘. 비디오. 미술』이 98년도에 발행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큐레이터이자, 광주비엔날레 조직위원을 맡고 있는 김홍희씨의 홍대 미술사 박사 논문에 비디오와 페미니즘 이론의 개괄적인 소개 부분이 첨가되어 있습니다.우선, 저자는 비디오 아트가 포스트모던적 매체 속성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초기에 모더니즘의 세례 속에서 발전했다면 이를 포스트모던 비디오로 전환시킨 중요 계기 중의 하나가 페미니즘이라는 가설을 바탕으로 비디오 아트의 역사를 정리해갑니다. 이것은 남성 작가, 남성 예술 미학을 중심으로 기술되어 가는 예술사 작업에 대항하여 여성 작가, 여성 미학의 존재와 가치를 발굴하고 이에 따라 예술사를 재기술하는, 기존의 문학, 미술, 영화 등에서활발하게 이루어져 온 페미니스트 예술사 작업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비디오와 페미니즘을 개괄적으로 다루는 1부와 페미니즘 비디오의 주요 작가, 경향을 1,2세대별로 나눈 2부에서 비디오 아트가 현재의 남과 여의 본질주의적 차이, 미학과 정치학의 분리를 해체하는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미학으로 진행되어 가는 과정을 풍부한 작품 사례들과 함께 제시하고 있습니다.그러나, 김홍희씨의 작업은 기존의 페미니즘 미학과 이론을 근본적으로 변화, 수정하는 계기를 이루는 새로운 개념들 그리고 새로운 예술적 실천의 사례를 폭넓게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다르다고 는 3부에서는 특히, 90년대 신체 담론과 함께 새로이 부상하는 페미니즘 미학의 주요 경향인 그로테스크를 사이보그 개념과 접목시켜 새로운 성/정체성의 구성 가능성까지 타진해 보고 있습니다.3. 그로테스크-사이보그 : 서구 신체 미술 담론의 현주소그로테스크라는 용어는 비교적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뭔가 기이하고 과장된 듯이 보이는 것들에 붙이는 명칭이지요. 고야, 프랜시스 베이컨, 마그리트의 그림들 혹은 소위 컬트영화로 불리는 중의 하나라도 아신다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습니다. 아니면 이니 심지어 여러 SF물들(에서 최근의 까지)의 역겹고 더럽고 가끔 소름끼치기도 한 분위기를 기억하셔도 됩니다.그럼 이러한 분위기, 표현들이 어떤 담론을 가능하게 하는지 알아보지요. 저자가 차용하는 그로테스크 담론은 바흐친의 "카니발 그로테스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로테스크는 시대에 따라 그 양식과 의미가 변화를 하는데, 처음에는 서구에서 '고전 양식'의 변방에 있던 고대 로마의 식물, 동물과 인간 신체의 부분들을 얽어 만든 장식적 패턴을 지칭하는 용어였으며 16세기 프랑스의 '라블레'라는 작가에 의해 신체 부위를 묘사하는데 쓰이면서 최초로 '그로테스크 신체' 개념이 작품에 도입되었다고 합니다. (문학 작품『가르강튀아 팡다그뤼엘』이 대표작입니다.) 후에는 이것이 잊혀졌다가 20세기에 미하일 바흐친이란 이론가에 의해 다시 소급되어온 것이지요. 그는 17세기 이후 신고전주의, 낭만주의등 각기 시대의 주류 사조에 의해 변경되어 모더니즘에 이르러 형식주의적이었던 이것의 내용적, 정치적 함의를 부각시켰다고 합니다. 그가 강조한 것 중의 하나가 파편적인 신체, 혹은 신체의 물질성을 강조한 것인데, 이것은 90년대 이후의 신체 미술, 신체 담론의 이론적 근거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이렇게 최근 서구의 문화, 예술 담론은 "성 정치학/ 정체성의 정치학"에서 이제 바흐친의 그로테스크론과 함께 "신체의 정치학"으로 자리 이동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신체와 정치의 관계? 그건 '정상, , 신체(카니발에서 그로테스크 바디가 되지요)는 과도하게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속에서 세상과 교류하며 세상은 '삼킴'으로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이 때, 음식은 신체의 한계를 초월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인간은 세상과의 만남을 입으로 물질적으로 신체적으로 수행하게 된다고 합니다.카니발의 연희, 절제를 모르는 음식들의 향연 등등 모두 우리의 신체와 관련이 있습니다. 먹는 입, 감촉, 그리고 살들, 연희를 벌이는 신체의 욕망... 신체는 카니발 그로테스크의 중심이 됩니다. 이때 더욱 부각되는 이미지는 '신체의 구멍들, 오목한 곳, 돌출된 곳들 즉 외부를 향해 열려있거나 외부와 가장 근접한 부위들, 가장 유기적이고 액체적이고 접촉적인 부분'입니다. 이에는 신체와 분리되어 나가게 되는 침, 땀, 이외 분비물, 배설물 등등이 포함되지요. 그리고 이에 교미, 임신, 분만, 낙태, 태아 등 탄생의 이미지도 포함이 된다고 합니다. 즉, 우리의 몸과 그 외부의 경계에 놓인 모든 것들을 뜻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늙음과 탄생, 죽음과 분만 등의 양극이 오고가는 곳이란 점에서 양면성을 갖습니다. 책에 있는 바흐친의 말을 인용해 볼까요.오목하고 구멍 꿇린 이러한 기관들은 한가지 공통점을 갖는데, 그것은 신체와 신체, 신체와 세상의 경계가 그 안에서 허물어진다는 것이다. 상호 교환과 상 호 경사가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그러한 까닭에 그로테스크한 신체 생 활의 주요사건 신체적 드라마의 행위들이 모두 이 공간에서 일어나는 것이다.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그 밖에 땀 흘리고 코 풀고 킁킁거리는 등의 분비 활동 은 물론 성교, 임신 다른 신체에 의해 삼켜지고 잘려지는 모든 행위가 신체와 외부의 경계 늙은 신체와 새로 태어나는 신체의 경계 사이에서 수행된다. 이 모든 사건에서 인생의 시작과 종말이 밀접하게 연결 서로 맞물려 돌아간다.그로테스크 바디는 형이상학적이고 폐쇄적이고 대칭적이고 자족적인 고전의 신체와는 다르게 외부에 대해 열려있고 또한 다른 기관, 대상, 세계와의 결합이 가능하며 물질'여성적 표상'으로 규정하여 그로테스크를 여성성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비천함은 오이디푸스기(아동이 어머니와의 '외상적' 분리를 통해 상징계로 진입하게 되는 시기를 칭합니다.-라깡) 이전의 주체와 객체가 구분되지 않는 여성, 모성의 공간을 은유한다고 합니다. 이 비천함의 대표적인 예로는 출산인데, '이는 내부와 외부가 치환되고 내가 타자로 도치되는 전환의 순간'이라고 하지요. 즉, 비천함과 모성이 만나는 지점이 됩니다. 크리스테바의 언급을 빌자면 "학살과 생명의 정점, 주저함의 숨막히는 순간, 아름다움, 성용과 성적인 것의 명백한 거부"라고 합니다. 바흐친이 그로테스크바디의 전형으로 든 것도 "웃고 있는 임신한 추한 노파"였던 것을 봐도 임신과 출산 그리고 노쇠한 여성의 몸 등이 그로테스크의 대표적인 형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여성의 그로테스크바디는 "구멍없고 세련되고 깨끗한 부르주아적 신체"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고전주의 신체에 대한 대항 담론으로서 신체 노출(주로 숨겨져 온 국부, 비만에 주름진 노파의 몸 등), 성욕 표출, 전도된 복장(남장 여성), 동성애 등을 앞세웁니다.이러한 여성 그로테스크는, 메리 루소라는 이론가에 의하면 단일 범주로서의 여성 정체성을 강조하여 본질주의에 빠지거나, 이를 해체하면서 기본적인 범주를 상실하면서 딜레마에 빠진 페미니즘에 "이란성 쌍둥이 자매" 라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한다고 합니다. 그로테스크라는 범주 안에서 남녀가 모두 비천함의 공간으로서의 신체와 관계되면서 기존의 성적 다름으로 상정되어 온 남/여의 구분이 와해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로테스크는 단일하지 않고 배타적이지 않은 여성성, 복합적이고 모호한 여성 정체성을 유추시킨다고 봅니다. 가부장적 구조 안에서 형성된 단일한 여성성이 아니라 이렇게 이질적인 것의 섞임, 성별의 붕괴를 담지하는 것 자체가 부계 질서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이지요.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 저자는 논리를 좀 더 구체화하지 못하고 개괄적인 몇가지)
『페미니즘과 계급정치학』 -미셸 바렛 외이 책의 주 저자는 '가족은 반사회적인가'라는 이제 페미니즘에서는 고전이 된 책을 쓴 영국의 좌파 페미니스트, 미셸 바렛이다. 특이한 것은 책이 바렛의 논문 '오늘날의 여성억압'에 이어, 몇몇 영국 좌파진영의 페미니스트들이 그것을 비판한 글, 바렛이 거기에 대해 다시 답변한 글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책의 이러한 구조는 내게 낯설고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들의 논쟁은 책을 읽는 내내 나로 하여금 '우리나라의 여성운동 내에는 과연 논쟁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회의적 물음을 갖도록 했다. 어떤 종류의 페미니즘 이론은 항상 소개되는 방식으로만 우리가 접할 수 있을 뿐이었고, 한 이론과 다른 이론이 충돌할 경우에도 그것들은 우열관계 없이 단순히 나열될 뿐이었다. 우리의 운동이 너무도 저열한 적들을 만나 그 동안 숨돌릴 틈 없이 싸워야 했다는 점, 또한 학계에서 여성학이 연구된 역사도 지극히 짧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러한 현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혹시라도 우리의 태도가 안일한 것이 아니었던가를 반성해 볼 필요도 있을 것 같다. 단지 우리가 소수이기 때문에 입장의 차이를 넘어 뭉쳐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입장의 차이 자체를 무화시키는 오류를 범했던 것은 아닌가? 나는 이 물음을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화두로 삼았으면 한다.바렛은 성별관계의 작동방식을 규명하고 역사유물론에 의해 이해되는 생산/재생산 과 정과 젠더관계는 어디에서 구별되고 연관되는 지를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하고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그는 이를 위해 먼저 '맑스주의 페미니스트 분석의 몇 가지 개념적 문제'라는 글에서 지금까지의 이론들에서 가부장제와 재생산,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개 념들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분석하면서 몇 가지 문제지점을 짚어 나간다. 그는 가부장 제를 '생물학적 관계'로 바라보는 밀레트나 파이어스톤과 같은 급진주의자들의 관점은 생물학적 결정론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비판하는 동시에, 크리스틴 델피처럼 거기에 대해 좀더 유물론적인 접근을 시도했던 이들의 경우도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생산양 식'의 관계를 명확히 해명하지는 못했다고 비판한다. 특히, 그녀는 '가부장제'를 초역 사적으로 존재하는 광범위한 남성지배의 일반으로 보거나, 아예 현대 자본주의를 '가 부장제'로 묘사하려는 시도들을 견제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할 때 '가부장제'가 아버 지의 지배로서의 가부장제인지 남성의 여성지배로서의 가부장제인지에 대한 논의가 혼 란을 겪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어떠한 역사적 맥락에서 이데올로기로서의 '가부 장제'라는 개념을 한정적으로 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하나의 명사화된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을 피하려고 한다.그는 또한 맑스주의에서 이데올로기 개념이 페미니즘 진영과 피할 수 없는 관련을 맺 고 있음을 지적하고-왜냐하면 여성억압이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거대하게 작동하고 있으므로- 그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하려 한다. 그는 남성들이 그들의 여성에 대한 지 배를 존속시키기 위하여 퍼뜨린 허위의식으로 이데올로기를 바라보는 입장을 거부한다 . 반대로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는 오히려 이데올로기가 경 제적인 부분과 어느 정도의 상호 연관성을 지니는지에 관심을 갖는다. 즉, 알튀쎄가 얘기했던 이데올로기의 상대적 자율성에서 그 상대적인 성격을 좀더 정교하게 밝히는 것이 분석의 열쇠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맑스주의 페미니즘에서 이데올로기 문제와 연관된 것으로서 가부장제에 대한 기능주 의적 설명에 관한 문제가 있다. 기능주의적 설명은 가부장제를 자본의 영속화에 기능 하는 체계로 보는 관점이다. 이러한 설명방식은 역사적으로 꾸준히 있어왔던 모순과 갈등, 정치 투쟁 등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으며, 자본에 대한 투쟁과 결부되지 않은 어떠한 여성주의 운동도 무용한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시키기 때문에 지금까지 많은 페 미니스트들에 의해 비판받아 왔다. 바렛은 여기에 대해서도 위에서 취했던 입장과 유 사하게, 젠더 분업이 자본에 상대적으로 기능한다는 다소 모호하지만 중립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는 기존의 맑스주의적 설명이나 급진주의적 설명이 가지고 있던 환원주의 의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모호함을 감수하고라도 차라리 둘 사이의 위험한 곡예를 선택한 듯 하다.눈치 빠른 이들은 짐작했겠지만 바렛은 결국 맑스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급진주 의적 페미니즘에서 축적된 유용한 설명들을 효과적으로 통합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따 라서 그는 페미니스트 분석의 핵심 범주인 '가족'에 대한 논의에서도, 자연적이며 본 질적인 단위로서의 가족을 부정하고, 역사적 현실과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변 화 지점으로서의 가족을 상정한다. 즉, 그는 맑스주의적 시각에서 가족을 자본에 기능 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결과로서 인식하는 관점이나,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가 족을 가부장제의 원인으로 인식하는 관점 모두를 극복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그는 이를 위해서, 가족의 물적인 측면과 이데올로기적 측면으로서의 '가구-가정이데 올로기체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사실상 이는 너무 이론적인 개념으로 보인 다. 그도 밝히고 있듯이 물질적 조건과 이데올로기는 간단히 분리될 수 없는 것들이며 , 그는 여성억압의 고리를 풀수 있는 열쇠가 바로 가구와 가정이데올로기의 괴리를 이 해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결코 그 둘의 괴리를 딱히 보여주고 있는 것 같지 않다.하지만, 그는 현자본주의의 가구-가정 체계가 남성이나 여성, 부르주아나 노동자계급 중 누구에게 이익을 주고 있는가는 분명한 답이 없으며, 그러한 이익 자체가 매우 분 열적인 것임을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밝혀 나간다. 그가 결론을 확실히 밝히지는 않았 지만 누군가 그에게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가부장제가 아닌 체계 속에서도 최고의 효 율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는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에 이런 말을 잊지 않는다."여성해방의 가능성이 결정적으로 자녀양육의 재분담에 놓여져 있다는 결론은 절대적 으로 옳다. 이것은 임노동 영역의 성별분리에 대한 완화가 여성억압을 종식시키지 않 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하의 생산조직은 자녀양육이 이런 식으로 분리될 수 없다는 가정을 중심으로 구조화되었다고 여전히 언급된다. 따라서 이러한 자녀양 육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어떠한 자발적인 시도도 성공할 것 같지 않다. 그것은 자 녀양육의 일부분을 구성하는 성별 노동분업이 현재 자본주의 생산관계 안에 뿌리깊게 침투되어 있기 때문이다."영국의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바렛의 논의에서 몇몇 지점을 지적하고 있다. 브레너 와 라마스는 '여성억압의 재고찰'이라는 논문에서, 자본주의 하에서의 성별분업을 바 라보는 바렛의 관점이 단순하기 짝이 없다고 비판한다. 즉, 그들은 바렛이 '성별분업 이 자본주의 생산관계 안에 뿌리깊게 침투해 있다'고 했을 때, 과연 '무엇'이 성별분 업을 '어떻게' 자본주의 생산관계 안에 뿌리깊도록 했는지를 모호한 채로 남겨두고 있 다고 비판한다. 이들의 비판은 타당해 보인다. 왜냐하면, 바렛의 설명처럼 가부장제가 자본주의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분명히 현재 가부장제가 자본주의에 깊 이 각인되어 있는 이상, 그 원인과 작동구조를 밝혀야만이 오늘날 여성억압을 효과적 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기에 대해 그 원인은 바로 '생물학적 재생산'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동안 이 생물학적 재생산의 주체인 여성을 노동자 로 고용할 경우 자본의 이윤을 감소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성별분업이 일어났다 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성별 분업은 자본주의 사회에 각인되어 있는 것이 아 니라, 자본주의의 특정한 역사적 시정의 복잡한 세력균형에 의해 생산된 것이라고 결 론짓는다. 그러나 나는 브레너와 라마스의 비판이 그 지점은 상당히 정확했으나 생물 학적 재생산의 문제를 '자본주의적 체계' 안으로만 고정시키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나타날 수 있는 효과들-이를 테면 공적 노동의 성별분업 이외에 가족 내의 성별 분업 과 같은-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시 허점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바렛 역시 이러한 점을 근거로 브레너와 라마스의 관점은 분명히 경제적 범주 내에서 만 진정한 설명력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들의 비판에 맞선다. 또한 바렛은 생물학 적 재생산을 정치적, 사회적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생물학적 재생산이 일관되게 자본주의 경제 구성에 어떠한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을 찬성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