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과 사회’(김동춘)에 관한 서평◎ 한국 전쟁을 통해 바라본 국가와 민족의 재구성필자는 그의 저서 ‘전쟁과 사회’를 통해 50년 전 이 땅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에 대한 기존의 사고의 한계와, 사고의 한계를 갖게 했던 필연적인 사건들에 대해 다각적으로 접근하였다. 한국전쟁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오늘의 한국정치, 한국경제, 한국사회, 한국의 법과 사회심리, 이데올로기 등 모든 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한국전쟁이 한국사회에 미친, 전쟁과 사회의 영향’에 대한 거시적인 연구가 이 책에 담겨 있다고 하겠다.1.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분1954년 맥아더는 한 세미나에서 “한국이 우리를 구해 주었다”고 말했으며, 커밍스는 뉴딜(New Deal)이 금세기 미국의 제1차 국가부흥의 계기였다면 한국전쟁은 제2차 국가부흥의 계기였다고 지적하였다. 한편 일본의 전 수상 요시다 시게루 역시 한국전쟁을 두고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하였다. 또한 위기의 이승만 정권을 반석위에 올려놓았고 아직 꼴을 갖추지 못했던 국가는 미군의 주둔과 미국의 경제지원으로 군사적 ? 경제적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고, 전쟁 이전에 이미 마련되었던 반동주의를 더욱 확고한 국가이념으로 정립할 수 있었다. 전쟁 이후에 북한의 김일성은 자신의 정적을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게 됨으로써 '김일성 유일체제‘의 기반을 닦았다. 남한과 북한의 정부, 미국과 소련, 일본 어느 하나 이 전쟁으로 인해 손해를 보지 않은 것이다. 국가가 내부적으로 위기를 겪을 때 전쟁을 통해 경제를 일으킨다는 이야기가 있지만,한국전쟁을 놓고 보았을 때 이러한 이론은 다소 충격적이다.미국과 소련의 팽팽한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우리 국토에서 벌어졌으며, 그 충돌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비명횡사한 사람들 모두가 우리나라의 힘없는 백성들이었다.우리는 역사교육을 통해 한국전쟁으로 일본이 경제적으로 많은 이득을 취한 것은 배웠지만,사상적으로, 경제적으로 자립이 덜 되었던 시기의 남 ? 북한 정부가 전쟁을 통해 이를 곤고히 할 기회를 얻었음을 생각해 본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미국이 우리를 위해 그들의 젊은이들의 피를 흘렸다고 하지만, “남한에서는 전쟁 과정에서 195만여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5만여 명의 미군병사가 목숨을 잃었고 중공군 역시 수많은 목숨을 잃었다고는 하나, 피해 자체로만 본다면 이 전쟁은 국제전이 아니라 내전이었음이 분명히 확인된다”(본문415쪽)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 스스로가 자신들의 패권을 위한 작전을 수행함에 있어서 불가피하게 따라오는 희생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우리는 미국에게 고마움을 느끼기 이전에 이땅에서 죽어간 우리의 민족들의 억울한 넋과 이들을 지키지 못했던 당시의 남한 정부, 그리고 그 이전의 정부까지도 일정한 흐름을 이해하며 냉정하게 비판해야 할 책임이 있다.과거 고려시대에 여진족의 공격을 윤관이 물리치고 동북9성을 획득한 뒤에도, 방비의 어려움등으로 다시 여진에게 땅을 돌려주고, 여진이 차츰 세력을 확장하여 거란을 멸망시키고, 고려에게 형의 나라로 조공을 바치게 하는 치욕을 안겨준 일을 우리는 기억할 것이다.우리는 거친 우리의 역사를 통해 다른 어느 나라보다, 역사는 되풀이 되며 강한 나라만이 평화로운 내일을 약속함을 몸소 체험해 왔다. 하지만 조선시대와 일제 강점, 그리고 광복과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체험은 적어도 정치와 외교에 있어서 새로운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이 모든 희생은 국민의 몫이었고 아이러니하게도 각국의 정부들은 한국전쟁의 특수를 경험했다.하지만 우리는 한국전쟁을 북한의 적화통일의 야욕으로 시작된 전쟁으로, 모든 원인과 책임을 그들의 탓으로 돌리는 데에 모든 사상적인 노력을 다해왔으며, 그러한 교육만을 해온 것이 사실이었고, 당시 정부의 정책 집행 과정에 대한 철저한 고찰은 논외 대상이었다.한국전쟁 이전과 이후의 각국 정부의 정책들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를 통해 과학적인 한국전쟁의 재구성이 절실한 시점이다.2. 한국전쟁 전후 이승만 정권의 정치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사회는 한국전쟁 이후 펼쳐진 근대 사회에서의 국가체제의 시작점으로서, 이 시기의 정치제도는 현대에 와서도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그러므로 당시의 정치이념을 살펴보고 그것이 현대 사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재생산되고 있는지를 밝혀 보는 것은 단순한 역사적인 탐구로서가 아닌, 현대 우리의 삶을 주체적으로 영위하는데 있어 무엇보다 필수적인 과제이다.1. ‘피난의 정치’는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한 남한 정부가 전쟁에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다가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무조건 도망가고 보는 권력집단의 행동을 지칭하는 것이다.2. ‘무책임의 정치’는 국가가 군사적 ? 경제적 하부구조를 갖추고 있지 않다는 현실적 판단위에서, 국가의 실질적인 버팀목인 강대국과 침략국인 ‘적’에게 전쟁의 모든 책임이 있으므로 전쟁 발발로 인한 국민의 희생은 이들 양자에게 책임이 있다는 사고의 집약이다.3. ‘희생양의 정치’는 책임자 또는 ‘좌익 처벌’ 과정에서 주로 나타나는데, 전쟁으로 인한 모든 책임이 ‘적’과 ‘강대국’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국가가 국민들에게 책임성을 갖기보다, 최고의 주권자와 권력자는 빠진 채, 국가기관의 말단 책임자와 국민 내부의 ‘적’에게 비판과 처벌의 굴레를 뒤집어씌우는 것을 말한다.4. ‘부역자 처벌의 정치’는 국민을 버리고 간 정부의 무책임성을 은폐하기 위해 모든 국민들에게 의심의 화살을 퍼부으면서 국민들의 일사불란한 복종을 유도할 수 있는 억압전략이다.5. ‘학살의 정치’는 적과 정치적 반대자 혹은 ‘잠재적인 정치 반대자’인 무고한 민간인들에게 무자비한 보복을 가함으로서 당사자는 물론 이것을 목격한 주변 사람들에게 권력에 대한 공포감을 갖도록 해줌과 동시에 피해자와 그의 가족들이 다시는 재기할 수 없도록 만드는 전략이다.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우리는 당시 우리의 정부의 ‘정치’에 대해서 실망과 무력감을 감출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역사 교육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것은 물론이고, 반공만을 강요해왔던 정부의 초라한 성적표가 아닐 수 없다.우리 민족은 지리학적으로 강대국들에 둘러쌓여 있어, 과거부터 필연적으로 강대국들과의 외교적 마찰을 겪어왔다. 그러한 오천년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이러한 환경을 극복할 만한 혜안을 정치적인 역량으로서 성장시키지 못했던 과오가 우리에게 있다.현재의 우리 모습 역시, 과거의 외교적 패인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한국전쟁을 거친 이후까지도, 우리에게 새로운 교훈과 역량을 주었다기 보다는 단순히 반공과 친미와 같은 단편적이고 타국에 의존적인 개념만으로 덮어왔음을 직시해야 한다.현재의 정치 ? 외교적 상황은 어떠한가. 미국과의 러시아, 일본, 중국, 북한을 둘러싼 힘겨루기는 계속되고 있다. 전쟁은 휴전중일 뿐이며, 북한은 핵게임을 통해 마지막 생존의 불씨를 키우고 있는 외줄타기 외교가 계속되고 있다. 이들 사이에서의 우리의 위치는 어떠한지 냉철한 분석이 필요하다. 일본과의 ‘독도분쟁’ 역시 역사적인 혜안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풀어나가지 않고서는 일본의 계략에 말려들 가능성이 매우 높은 현실이다.
영화 '하이어 러닝'에 대한 생각이 영화는 존싱글톤이 95년도에 만든 그의 3번째 작품으로 보이즈 앤 후드 만큼이나 힘있는 연출을 보여주었다는 게 중론이다. 그가 항상 다루고 있는 인종차별과 폭력의 문제를 이 영화에서는 좀더 넓혀 미국사회에 만연해 있는 많은 문제점, 인종차별이나 흑인 간에 갈등, 백인사회의 문제점, 그 속에서의 폭력, 여성 문제까지 동시에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점이 큰 영화라고 생각한다.이 영화의 배경은 콜롬버스 대학이다. 영화의 제목처럼 이곳은 미국 고등교육의 산실이다. 또한 미국이라는 나라처럼 모든 인종이 모여있는 곳이기도 하다. 감독은 이곳을 하나의 작은 미국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콜롬버스 대학 이라는 설정이 정말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영화가 입학식으로 시작되면 네명의 등장인물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대학에서 성폭행을 당하거나 백인우월주의에 빠지거나 살해당한다. 그가 가장 무게있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마도 미국사회에서의 흑인들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백인사회의 직접적인 논의가 없다면 불가능 할 것이다. 흑인이 인종차별을 받는다면 그것은 백인으로부터이다. 그렇다면 그가 묘사하고 있는 백인들은 어떨까?이전 그의 영화에서는 경찰들을 모두 흑인으로 설정해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모두들 백인 뿐이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설정이다. "보이즈 앤 후드"에서의 흑인경찰은 흑인들의 반성을 자아내지만 "하이러 러닝"에서의 백인경찰의 등장은 차별대우의 부당함과 억울함을 말하고자 함이다. 영화속의 경찰들은 백인의 편에 선 수호신 같단 느낌을 받았다. 흑인의 말은 들으려하지않는 그들의편협한 태도는 흑인들이 그간 제도권에 당해온 한이 투영된다. 모든 사건의 원인을 제공하는 사람은 백인우월주의자들이다. 감독은 한 평범한 순수 아리안 혈통의 인물이 광적인 사상에 사로잡힘으로서 어떻게 변하고, 그 결과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그리고 있다. 물론 백인들이 모두 나쁘게 나오는 것은 아니다. 객관적인 관점을 유지하기위해 그는 백인여성을 평화적인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초반으로 돌아가서 여성운동가인 제니퍼 코넬리의 등장의 의미가 희석된다. 물론 미국사회의 문제를 짚어감에 있어 여성문제가 중요한 화두이지만 영화속에서는 여성문제는 웬지 삼천포로 빠진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결론도 없고 대안도 없이 초반이후에는 언급되지 않는다. 옥의 티라고나 할까.영화의 처음부분에 등록금이 미납된 학생들을 자신의 반에서 좇아내면서 등장한 교수를 보며, 나는 자본주의의 합리성의 불합리성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되었고, 이 고지식한 상류지식층의 백인에 의해 고통받을 피해사례등을 예상했지만, 오히려 교수는 냉정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으로 감정적인 주인공으로 하여금 올바른 선택을 이끌어 내는 중재자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그렇다면 대안점을 살펴보자. 크리스티는 평화축제를 개최하여 폭력과 인종차별에 찌든 학교에 평화를 위한 작은 움직임을 시도한다. 하지만 백인우월주의자들은 흑인을 암살할 계획을 짠다. 모두가 즐기고 있는 순간 총성과 함께 말릭의 여자친구가 쓰러진다. 그녀는 why?라고 고통스럽게 외치며 콜롬버스의 동상아래서 처절하게 죽어간다. 왜일까? 나는 그녀의 죽음을 보며 너무나도 억울하여 두주먹을 불끈 쥐었다. 정말 왜일까? 왜 죽여야만 했을까? 결론은 이유없음이다. 그녀를 죽인 남자는 이제 돌이킬수 없음을 후회하며 자신은 엔지니어가 되고 싶었다고 고백을 하고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자살을 한다. 따지고 보면 백인도 피해자이다.
영화 '헤어'와 관련해 60-70년대 반문화 운동에 대한 생각'헤어'라는 조금은 낯선 영상을 담고 있는 영화를 보았다.치렁치렁한 머리를 기르고 전혀 사회적인 활동을 하지 않을것 같은 겉모습으로 마리화나를 사이좋게 나눠 피우는 그들.영화는 또한 기승전결 형식의 드라마가 아닌 뮤지컬 형식의 영화이어서 더욱 눈과 귀를 잡아끈다.원시적이라해도 좋을만큼의 펑키한 음악에 맞춰 재주를 넘고 춤을 추는 그들.80년생의 내가 잘은 모를지라도 언뜻 듣고 지나쳤던 무리, 그들이 히피였다.사실 정확히 아는것은 없다.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내 머리속은 예전에 보아서 내용이 잘 기억도 나지않는 영화의 한장면이 스치듯 지나간다.포레스트 검프에서 미국의 어느 광장.평화와 반전을 외치려 모인 수많은 인파들.그들의 겉모습도 '헤어'의 그들과 비슷하지 않았던가.먼저 히피에 대한 정의를 찾아보았다.인간성 회복과 자연귀의를 주장하며 탈사회적(脫社會的) 활동을 한 사람들에 대한 명칭으로 1966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발원하였고, 점차 미국 대도시로 확산되면서 파리·런던 등의 청년층에도 파급되어 20세기 대표적인 청년문화 양식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960년대 이후 미국에서는 흑인의 인종차별반대 운동 및 베트남전쟁 개입 반대 시위 등이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히피 활동은 점차 반전·비폭력·사랑을 추구하는 <운동>의 양상을 띠어갔다. 이들의 영향은 문화적으로는 록뮤지컬·록음악 등을 대표로 하는 <히피컬처>를 낳았고, 정치적으로도 뉴레프트(신좌익)운동과 결부하였다. 그러나 히피는 허무주의·초월주의를 주된 가치로 삼았기 때문에 스스로 부정하였던 기존 사회 질서에 실제적인 부정은 하지 않고 공허한 자기 탐닉에만 머무르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개인적으로도 공허한 자기 탐닉에만 머무르고 있다는 생각에 어느정도 공감한다.그들은 땀흘리며 일하는 수고 대신 그들이 몸담기를 거부한 체제를 비판하는 것밖에 하지 못했으니 말이다하지만 히피들의 운동이 절정을 맞으며 사회적인 이슈가 되는데에는 베트남 전쟁이 중요한 기폭제가 되지 않았나 싶다.베트남 전쟁의 시작과 끝에 대한 견해가 몇가지 있지만 J.F. 케네디정권의 '특수전쟁'때인 1961년부터(미국의 군사행동이 전쟁이라고 할만한 형태를 취한 것) 미국이 군대를 남베트남에서 모두 철수시키고, R.M. 닉슨대통령이 전쟁 종결선언을 발표한 1973년까지, 무려 12년 이상을 타국의 전쟁에 자신들의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었다.이러한 사회적 불안정성은 가치관의 확립의 시기인 청년들을 패닉 상태로 내몰으며, 사회 전체 마저 부정하게 하는 히피들을 양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반문화 운동과 관련해 로버트 L. 존슨의 '반문화운동과 종교'라는 책을 참고해 보았는데, 반문화에 대한 나름대로 정확한 견해를 들을 수 있었다.반문화 비판자들은 오늘의 미국의 반문화는 이미 16세기 이후에 있었던 여러 반문화론자들의 후예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통해, 이미 역사적으로 있었던 사건을 입증하며 반문화운동의 혁명적 성격을 외면하려는 의도를 내포한다. 중요한 점은 오늘날 미국의 반문화운동은 기성문화에 대결하는 비판적 문화라는 의미에서 반문화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미국의 기성문화란 단순히 미국만의 문화가 아니라, 미국문화로 대표되는 15세기 이후의 소위 현대세계의 문화를 의미하며, 따라서 반문화란 바로 이 현대문화의 위기로서의 반문화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오늘 미국의 반문화현상은 일부 낙관론자들의 비판처럼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이러한 반문화는 중세기적 세계관을 부정하는 르네상스와 중세기적 종교를 부정하는 종교개혁과 인문주의, 자연과학과 계몽주의를 탄생시킨 합리주의, 그리고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민주주의에 의해서 그 본질이 특징지어져 온, 특히 오늘날의 고도의 기술공업문화까지를 포함하는 현대문화에 대한 총체적이고 전면적인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연극정보제목 : 리어왕원작 : W. Shakespeare장소 :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연출 : 이윤택출연 : 전성환 외● 작품의 줄거리■ 1막 : 부와 세상의 고통까지도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딸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리어왕. 첫째와 둘째달인 고네릴과 리이건의 아첨과 달리 말로 표현하지 못한 셋째딸 코델리아에게 실망한다.신하인 켄트가 권고하나 오히려 벌을 받고, 코델리아에게 청혼한 프랑스 공을 지참금 문제로 거절한다. 고네릴과 리이건에게 권력과 영토를 나눠주지만 고네릴은 악한 본성을 나타낸다. 한편 사생아로 태어난 켄트의 아들 에드먼트는 반란을 꿈꾸고 추방당한 켄트는 탈을 쓰고 다시 왕에게 찾아온다■ 2막 : 에드먼트의 자작극으로 형 에드거는 쫓기는 몸이 되어 아버지 글로스터의 미움을 사게되고, 리어왕은 둘째딸에게도 버림받고 거친 황야를 헤멘다■ 3막 : 자신의 고집만 부리던 리어왕은 황야를 헤메며 아버지로서, 국왕으로서의 권위를 잃고 정신도 이상해진다. 국왕의 신하였던 글로스터는 두딸과 사위로부터 국왕을 구해내려 하지만 오히려 두눈을 뽑히고 만다. 에드먼트는 고네릴과 리이건에게 밀고하여 백작의 작위를 받게 된다.■ 4막 : 톰으로 가장한 글로스터의 큰아들 애드거는 맹인이 된 아버지를 이끌어주고 아버지의 소식을 들은 코델리아는 프랑스군을 이끌고 와 왕과 만나고 리어왕은 참회의 용서를 구한다. 두 딸은 글로스터 백작을 사이에 놓고 서로 차지하려는 싸움을 벌이고 글로스터는 형 애드거에게 심판을 받으며, 리어왕과 코델리아의 처단소식을 전해준다. 코델리아만 목숨을 잃게되고 리어왕은 슬픔에 잠겨 참회한다●연극적 요소관찰수업시간에 배웠던 내용을 바탕으로 리어왕을 보면서 연극적 요소들을 짚어보았습니다■ 오브제 : 프랑스 공을 인형으로 표현 - 인형을 오브제로서 사용. 등장인물을 한명 더 사용하지 아니하고 인형으로 표현함. 우스꽝스러운 분위기. 극중 지참금 문제로 코델리아를 거절하는 통속적 인간으로 묘사하므로 인형으로 풍자함■연극적인 약속 : 1. 톰으로 가장한 글로스터 : 맹인이 된 아버지를 이끌어 줌. 목소리등으로 미뤄보아 짐작할수도 있을텐데 전혀 알지 못하는 아버지2. 쫓겨난 왕을 따르면 끝까지 보위하는 켄트 - 어설픈 분장을 하긴 했지만 리어왕이 전혀 누치채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 카타르시스 : 1. 리어왕은 딸들의 사랑을 마음보다 좋은 말로서만 판단하여 코델리아를 미워하지만 자신이 믿었던 고네릴과 리이건에게 배신을 당하고 결국 코델리아의 도움으로 살게되고 코델리아는 죽음을 맞이한다. 리어왕은 뒤늦은 후회와 참회를 하는데, 이는 카타르시스 중 종교적으로 죄를 씻어내는데서 오는 카타르시스의 한 종류라 할 수 있겠다.2. 양자인 에드먼트는 권력에 대한 갈망을 이기지못하고 자작극을 통해 형을 죄인으로 몰아내고 아첨과 술책등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된다. 이는 카타르시스 중 심리학적으로 억눌렸던 것을 표출하는 행위라 할 수 있겠다.●개인적인 느낌우선 뮤지컬 오페라등을 통해 극을 접했던 나로서 본격적인 연극, 그것도 세익스피어 원작의, 그리고 연극 시작전에 다른 연기자들이 몇백번째 공연을 축하한다고 존경을 표하는 전성환씨 주연의 연극을 보게되서 영광이지 행운이라고 생각한다우선 처음 연극을 본 느낌은 재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극이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라고는 하지만 시종일관 흥미롭고 재미있었다는 것이다.이것은 연극이라는 장르적인 특징이 아닐까 싶다 (물론 기승전결의 전형적인 얘기를 다루는 극에서) 영화와 같이 다양한 구도의 화면을 보여주지 못하는 연극으로서는 그만큼 관객을 몰입 시킬 수 있는 요소가 필요할것이고 그것이 희극적이건, 비극적이건 간에 관객의 재미를 충족시킬 수 있는 요소일것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이다
'맥도날드화'와 '어플루엔자'에 관한 글을 읽고George Ritzer의 맥도날드와 맥도날드화(McDonaldization)에 대한 글을 처음 접했을 때는 그저 규격화된 인스턴트 식 레스토랑의 특징 및 관리시스템 정도를 사회 시스템에 비유하는 정도가 아닐까 생각했다. 물론 위의 생각이 틀린 건 아니었지만, 유태인의 대학살마저 고도의 합리화, 즉 맥도날드 화와 같은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저자의 설명을 듣고 놀라움에 고개를 끄덕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John de Graaf, David Wann, Thomas Naylor저의 어플루엔자에 관한 글 또한 읽어내려 갈수록 이미 어플루엔자에 감염되어있던 나의 모습을 발견하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도대체 맥도날드 화와 어플루엔자가 무엇이고 어떤 관계가 있으며 우리 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쳐왔는지 알아볼 필요성이 있다.맥도날드는 1937년 맥 맥도날드와 딕 맥도날드 형제가 1937년 캘리포니아 주 패서디나에 처음 문을 열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공장조립라인과 닮은 생산과정을 고안해내, 굽기 담당, 튀김 담당 등으로 공정을 특화시킨 전문화를 시도했다. 이로서 숙련된 요리사 없이도 일정한 수준의 요리를 빨리 만들어낼 수 있었고, 소비자에게는 빠른 속도, 많은 양, 저렴한 가격의 원리를 적용해 그 수혜를 입게끔 했다.즉 헨리 포드의 자동차조립라인을 레스토랑의 주방으로 들여오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현대의 우리들은 말 그대로 패스트푸드를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이후 레이 크록은 맥도날드 형제의 특정 제품과 기술에 따른 프랜차이즈의 원리, 관료제, 과학적 관리, 조립 라인이라는 생산방식 등을 결합시켜 맥도날드를 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켰다.이는 20세기 전반에 걸쳐 진행된 일련의 합리화 과정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저자에 따르면 맥도날드의 메뉴얼은 모든 제품의 조리시간 과 장비의 온도, 음식품목의 표준크기 제시, 품질 통제를 한다. 이는 빠른 시간에 제품을 생산하여 소비자에게 주려는 계산가능성의 측면과, 전 세계 어느 곳의 맥도날드매장에서나 같은 제품, 같은 맛,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기위한 예측가능성 실현을 위함이다. 물론 맥도날드의 4가지 특징 중 나머지 두개인 효율성과 자동화를 통한 통제 부분도 포함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우리는 맥도날드에 가서 어림잡아 약 20여 가지의 메뉴 중에 하나내지는 몇 개를 선택한다. 늘 주문하던 걸 선택할 수 도 있고, 새로 나온 메뉴를 선택하기도 한다.늘 먹던 음식을 먹으며 자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음에 만족할 뿐 그 이면을 생각하진 못한다. 그러고 보니 어떤 아이스크림체인점은 31가지의 맛을 다양하게 즐기라고 광고한다.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고도의 합리화된 방법으로 제조된 그 식품들은, 음식 맛은 손맛이라는 우리네의 정겨움은 기대하기 힘든 채, 조립라인의 기계처럼 조립되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이 과정속의 합리성의 불합리성은 또 어떠한가?이 음식이 나오기까지 우리의 어린 청소년아르바이트생들은 인격적인 배움은 없이 값싼 노동력으로 자신이 맡은 공정을 기계적으로 해 나가야한다.맥도날드의 합리화과정에서 이들의 인격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또한 기준에 맞춘 음식재료를 수입해오거나, 화학비료를 이용한 대량생산으로 환경이 오염되기도 하고1회용 포장지, 봉투 등은 엄청난 자원낭비를 하게 된다.내가 무심코 먹던 햄버거 하나가 고도의 합리화된 시스템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니 오싹하지 않을 수 없다조립식 자재와 조립라인식의 노동력으로 건설한 레비타운의 예에서 알수있듯이 단순히 패스트푸드에 국한된 얘기가 아닌 우리의 의식주에 걸쳐 이미 합리성의 쇠감옥이 차차 드리워지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나는 레비타운을 분당으로 한국화 하여 이야기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물론 분당은 조립식건축물이 아닌 대부분이 아파트이지만, 빠른 시간에 건축하여 주택을 제공한 효율성, 대부분이 아파트로서 비슷한 주변 환경(주차장, 공원, 상가 등)과 실내 환경을 소비자들에게 제공함으로서 예측가능성, 서울의 집값보다 싸면서 넓은 평수를 제공하는 계산가능성을 제공한다.자가용으로의 출퇴근, 가까운 상가나 셔틀버스를 운행하는 대형 할인마트를 이용하는 등의 라이프스타일을 영위하게 되는 것은 조금 억지스러울지 몰라도, 똑같은 생활방식으로 살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자동화를 통한 통제의 특성마저 가지고 있다.베버가 말했던 합리성의 쇠 감옥에 우린 이미 가두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들기도 한다.물론 그 쇠감옥의 가장 중죄인은 아마도 합리성이란 이름의 가면을 쓰고 유태인 대학살을 감행한 나찌일 것이다.합리성의 불합리성의 너무도 명백한 사례인 유태인 대학살은 합리성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현대의 우리가 이런 크나큰 과오를 또 저지르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한다.나는 문득 이제는 '합리성을 위한 합리성'을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과거 합리주의 및 관료주의에서처럼 하나의 시스템을 완성하는 합리성을 탈피해 인간의 창의성을 개발해 줄 만큼, 그리고 사회적으로 낙오되는 자들을 돌볼 만큼의 여유가 있는 규격화 되지 않은 시스템을 만들어야 할 때 가 아닌가 생각해본다.그리하여 맥도날드의 조립식빵보다 좀더 인간적인 음식을 먹길 원하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저자는 상상력을 동원해 어플루엔자의 사전적 뜻풀이를 다음과 같이 했다. '고통스럽고 전염성이 있으며 사회적으로 전파되는 병으로,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태도에서 비롯하는 과중한 업무, 빛, 근심, 낭비 등의 증상을 수반 한다'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인간은 수요보다 더 많은 공급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잉여생산물에 대한 효율적인 관리는 그리 훌륭하지 못했다. 앨 고어가 상원의원이던 1992년 그는 '위기의 지구'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은)석탄, 석유, 신선한 공기와 물, 나무 , 표토등 우리가 지각에서 떼어 내어 우리에게 필요한 생활재와 주거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은 더 많은 것들로 변환하는 수많은 물질을 해가 갈수록 더 많이 소비하는 버릇이 어느 때보다 더 강력히 매달리고 있다. 물질적 재화의 축적은 유사 이래 최고 수준에 달했지만, 삶의 공허감을 느끼는 사람의 수도 마찬가지다' 어플루엔자는 아메리칸 드림의 핵심원리가 된 경제적 팽창에 대한 강박적인, 거의 맹신에 가까운 욕구에서 비롯된다. 국가적 진보의 척도가 오직 GDP (국내총생산)에 집중되어 있는 현실은 우리의 팽창욕구의 현실을 보여준다. 우리는 아직도 대부분의 원자재를 자연에서 얻는다. 그것이 석유와 같이 유한한 자원일수도 있고, 나무나 물과 같이 잘만 관리하면 무한한 자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물질 소비행태는 유한자원은 물론이고 무한자원도 미래보다 현재만을 생각하는 근시안적인 대책으로 지구를 병들게 하고 있다.어플루엔자는 이러한 물질적 맹신에서부터 출발했지만, 공동체적인 삶까지도 파괴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하버드 대학의 정치학자 로버트 푸트넘의 연구에 따르면 '한때는 참여하는 국민이던 우리는 이제 겉도는 국민이 되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전국 유권자의 약 절반만이 투표한다. 13퍼센트만이 시나 학교의 문제를 다루는 모임에 참여하며, 학부모 교사 협회(PTA)참여자는 1964년에 1200만이었으나 1995년에는 7백만이었다. 지역사회 봉사 단체 엘크스나 라이온스 등도 멸종 위기에 있다'고 밝혔다.대부분의 도시는 토착소기업들을 밀어낸 외지출신의 대형 프랜차이즈점이 점거하여, 어느 도시를 가도 비슷한 소비환경을 만들어낸다. 강변의 낯익은 공터를 불도저가 밀고 있는 장면을 본다면, 그곳은 십중팔구 월마트나 맥도널드, 스타벅스가 들어설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맥도날드화가 전 도시적으로, 전국가적으로 일어나고 있는데 반해 우리의 의식은 이미 그것에 종속 되 있음에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끝없이 들어서는 쇼핑센터는 우리에게 더 많이 소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우리나라의 코엑스를 예로 들어보자.코엑스에 새로운 것은 없다.우리가 좋아하는 패밀리레스토랑, 각종 프랜차이즈 햄버거, 커피전문점, 백화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의류브랜드들로 꽉 메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