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 교육의 비판영원 불변의 이데아를 추구했던 플라톤은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고 도덕적 선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라는 것을 불온전 한 것으로 보았고 국가를 보다 우위에 두었다는 문제점이 있다. 과연 이러한 사상이 인간중심의 교육에서 봤을때 어떠한 문제가 있을까?처음 플라톤의 교육체제를 봤을 때 과연 그 속에서 학습자의 진정한 흥미나, 관심정도가 얼마나 고려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마도 그의 교육 목적은 사회에 필요한 우수한 인재를 가려내는 것이지 교육을 이루는 3요소 -교사, 교육내용, 학생 - 중 학생이라는 존재를 그리 비중 있게 다루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지 자신의 교육제도에 따라 오는가 아닌가의 정도로나 인식 하지 않았을까? ... 이는 오늘날 우리의 현실과도 비슷해 보인다. 초. 중. 고등학교로 이어지는 정형화된 이 과정을 학생들은 싫으나 좋으나 반드시 거쳐야 하고 사회적으로도 정상적인 생활을 위해서는 마땅히 행해야할 임무이다. 또한 교육과정에 꽉 짜여진 교과의 내용들을 학생에게 단순히 전수만 할 뿐 그 속에서 학생들의 흥미나 동기 부여라든지 자발적인 참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런 연유로 학생들의 사고능력은 점점 축소되고 결국 주어진 것 밖에 할 줄 모르는 수동적인 인간으로 변모 된다.어쩌면 이러한 문제는 시험이라는 것에 파생된 문제인 지도 모른다. 솔직히 플라톤의 선발을 보면서 이것이 과연 믿을 만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물론 테스트라는 것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가를 판가름 할 수 있겠지만 결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다고 본다. 테스트만으로 인간의 모든 것을 다 평가 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을뿐더러 테스트라는 자체가 곧 한정된 범위에서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이런 테스트의 성격은 우리의 대학수능과 견주어 볼 수 있다. 수능의 기준은 문제를 몇 개 맞힐 수 있느냐지 사고능력과 다양성을 측정하지 않는다. 이는 곧 대학의 선발로도 이어지고 사회에서의 선발로도 이어진다. 그러나 대기만성 형이라고 역대 위대한 사람들을 우리는 무수히 보지 않았던가?. 물론 그 당시의 선발이 오늘 같은 식은 아니었겠지만 선발이라는 자체가 결코 완벽한 지표를 제공해 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구나 그 평가 대상이 인간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는 문제이다.나는 인간이라는 자체가 어떤 틀에 맞춰지고 정형화 될 수 없는 존재라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인간이 가진 특성과 자질들은 수도 없이 다양하며 거기에는 엄청난 잠재력과 자질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이나 우리는 이런 인간의 다양성을 망각한 채 기준에 의해 그것들을 잘라내고 솎아낸다. 결국 남은 것이라고는 똑같은 인간 일 수 밖에 없다. 이런 사람들이 아무리 엘리트라 하더라도 사회는 언제나 정체된 제자리일 뿐이다. 교육의 의무는 이러한 학생들의 다양성과 숨겨진 자질을 발견해 그것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게끔 보조해 줘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우리의 교육도 학생들의 자유의지를 억누르는 고정되고 편협한 방법에서 벗어나 인간에 대한 다양한 접근과 인식의 길이 필요하다고 본다. 단순한 획일적인 교육과정과 내용으로는 학생들의 발전은 기대하기가 어렵다.
루소 아동교육론의 현 우리 교육에의 적용여부...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 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도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이성적인 인간이 되기 위한 것이며 이는 인간의 최고의 지적능력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이성의 우월성은 인정하겠지만 우리는 결코 이성만이 인간다운 인간이라고 만들어 줄 수는 없다고 말 할 것이다. 루소 또한 그 당시 부패한 사회와 인간의 모습을 보면서 인위적인 교육에 대항하는 교육론은 펼쳤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아직 한글도 다 깨치지 못한 아이들에게 비싼 영어 학원을 보내며 심지어 조기유학 쯤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생각해 버리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이런 점을 들어볼 때 개인적으로는 그의 교육론은 긍정적인 면이 더 강하다는 생각해본다. 비정상적일 만큼 높을 교육열을 보면서 과연 지적 교육이 높은 사람이 참 다운 인간으로써의 삶을 살아 갈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루소의 교육론의 적응여부를 따져보겠다.첫째, 아직 판단이 성숙되지 않은 아동들에게 자유만을 보장한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어보인다. 물론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잠재된 감각이나 능력을 길러줄 수는 있겠지만 자칫하다가는 이것이 방종으로 흘러 아이가 자제력을 잃어버리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아이에게 어른의 요구를 강요하지 않고 그들의 흥미와 감각을 키워내야 한다는 것은 아동교육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겠지만 그것도 적정 수준의 조절과 타협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아이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아이가 얼마큼 어느 정도로 성장할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는데, 이런 점을 보아 역시 인간을 완성시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몫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동들에 주어지는 자유와 흥미는 그 당시에는 즐거움과 만족감을 안겨주겠지만 그들의 미래를 놓고 보았을 때, 결코 좋은 영향만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둘째, 아동이 잘못된 관념에 물들지 않게 사회로부터 격리된 자연적 환경에서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것인데 솔직히 인간이란 결코 사회를 등지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 생각한다. 사회 안에서 개인은 존재하며 행복해 질 수 있으며 그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만약 사회로부터 단절하게 되면 나중에 커서도 사회에서 쉽게 조화를 이룰 수 없을 것이며, 또한 남과 무수한 경쟁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이 현실에 그만 도태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로부터의 완전한 차단은 신중히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셋째, ‘올바른 보모는 어머니이며 올바른 교사는 아버지이다.’ 라는 그의 말을 보면 최선의 교육으로 가정교육을 들었다. 이것은 그의 교육사상의 단점이라는 생각도 하는데 지나치게 가정교육을 중시한 나머지 학교교육을 경시했다는 점이다. 학교교육은 가정교육과는 다른 것으로 일종의 사회를 준비할 수 있는 기관이자 축소판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인간관계를 터득하는 것을 배울 것이며, 또한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협동심도 배우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힘도 기를 것이며 가정에서보다 체계적인 교육과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게 될 거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사회 전반적으로 핵가족화, 맞벌이 부부의 증가 등의 문제로 가정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다.
제수잇 교단 교육의 현 우리교육에의 시사점우리가 현재 제수잇 교단을 살펴보는 것이 그들의 교육내용이나 형식면에 있어서 뛰어남 이 있기 보다는, 그들이 시행한 학교교육의 조직화, 체계화로 효과적으로 교육내용과 교사양성이 이루어 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본다. 물론 그들이 이룬 성과가 시대착오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과학적 내용을 다루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들의 체계적이며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교수법과 교사양성제는 오늘날에 있어도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라 여긴다.교육방법적 측변에서 눈여겨 볼 것이 바로 학생들의 경쟁의식 고취가 아닌가 싶다. 단, 우리처럼 과도한 경쟁으로 학생들에게 부담감만 안겨주는 그런 경쟁이라기보다 학습동기를 유발하면서 이루어지는 경쟁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볼 일이다. 한 학급에서 많게는 학급끼리도 경쟁시켰다 하는데, 아마 이 경쟁에서의 성패는 학습에 얼마나 준비를 철저하게 하느냐에 따라 좌우될 것이다. 학생들은 개인적인 지위나 팀의 위치를 위해서라도 더욱더 분발을 하게 될 것이고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서 자신의 실력을 스스로 평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고도의 경쟁이라든지 엄격한 반복학습이 어떻게 보면 혹독해 보이기도 하지만 공부에 재미를 느끼게끔 경쟁을 유도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둘 필요가 있겠다. 또한전체적인 맥을 알 수 있도록 총괄적으로 복습과 논쟁을 시켰다는 점을 들어 어쩌면 제수잇에서는 극도로 게으르거나 지능이 모자라지 않는 한 그의 교육이 실패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만큼 제수잇 교단은 공부를 하지 않으면 못 배길 정도로 모든 것을 완벽하고 철저하게 했다는 점에서 우리 교육처럼 비효율적으로 몇몇 학생들만 수업내용을 이해한다는 점에서 그 체계나 방법이 굉장히 효율적이었구나 생각을 해본다.다음으로 생각해 볼 것은 제수잇 교단의 교원양성 제도이다. 이들은 주도면밀하고 구체적인 단계를 세워 개인의 능력을 확인하는 시험을 치르는 등 지속적은 훈련을 시켜 지도자를 배출하였다. 이것은 그전 시대와 비교하여 학교교육의 질적인 향상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된다. 만약 교사가 사전에 이러한 훈련이 없었더라면 학생들에게 보다 좋은 양질의 교육을 효과적으로 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도 체계적으로 교원을 양성하는 제도와 학교가 많다지만 2년 동안 생활해오면서 느낀 바로는 학문에 대한 열의를 느끼고, 진정한 교사로써의 자세를 배우기보다는 단순히 교사라는 직업을 얻기 위해 이루어 지는 형식적인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비사범대 학생이 늘어나고 있는 지금 과연 그들이 교직과목 몇 개 이수한다고 해서 교사가 될 자세를 갖출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진보주의 관점에서 현 우리교육 비판.얼마 전 수업시간에 “교육은 예술이다” 하면서 독일의 슈타이너 학교를 본 기억이 난다. 마치 꿈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그곳의 학교는 우리가 생각하는 학교의 이미지와는 너무 달랐다. 무엇보다도 그 학교는 학생들이 가고 싶은 곳이자 즐겁게 공부할 수 있는 곳 이였다. 우리처럼 감옥에 갇힌 것처럼 하루 종일 책상에서 보내야 하는 그런 지겹고 답답한 학교의 모습이 결코 아니였다. 이렇게 이질감마저 느껴지는 슈타이너 학교의 모습을 보면서 진보주의 교육이 21세기에 어떠한 영향을 주며 진정한 교육이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무엇보다 슈타이너 학교의 교사는 우리가 그리는 권위적인 교사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침 등교하는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가며 맞이하는 그 모습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엄격한 생활지도 교사의 호통부터 들으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또한 수업에 있어서도 학생들이 무엇을 이해하고 못 하는지도 모른 채 그냥 혼자서 열심히 떠든다. 그러고선 시험점수가 형편없음을 야단친다. 물론 한명의 교사가 그 많은 학생들을 감당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되도록이면 학생 수를 줄여서 교사의 수업이 효율적으로 이루워질 수 있도록, 특히 학생들이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겠다. 어디까지나 교사의 몫은 학생들과 교육내용을 연결시켜 주는 매개자일 뿐이지 그 이상의 것을 해줄 수도 할 수 도 없는 일이다.다음으로는 우리의 교육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무엇보다도 슈타이너 학교에서 특이했던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지정된 교과서가 없다는 것 이였다. 교사가 준비한 수업을 듣고 보고 느낀 것들을 직접 노트에 작성 하는 그것이 곧 그들에게 교과서가 되는 것이였다. 이러한 점이 우리나라 교육처럼 이론적인 지식의 나열보다는 훨씬 더 실용적이고, 체험적인 교육 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아무리 훌륭한 교육체계와 교육내용이 있다 한들 뭐하겠는가. 정작 그것을 자기화 하지는 못하는데... 영어 수업같은 것을 떠올려 보면 근방 알 수 있다. 원어민조차도 알지 못하는 문법과 단어들을 달달 꿰고 있다지만 정작 간단한 회화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비추어볼 때 우리나라의 교육은 효율성이나 유용성에 보다 힘써야 할 것이다.우리나라의 교육은 지나치게 암기위주의 수동적인 교육에 치우쳐있다는 것이다. 이는 매번 느끼는 문제점이지만 고쳐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학생들의 흥미나 이해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인 주입만을 시키고 있다. 받아들이는 것에만 너무 익숙한 나머지 학생들은 도통 생각이라는 것을 모르고 지낸다. 한창 다양한 사고와 창의적 활동을 개발시켜줘야 할 나이에 오히려 그것을 억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수업 과정에 맞게 일정이 타이트하게 짜여져 몇 시간을 두고 한가지의 주제에 대해 심층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수업이 전혀 되지 않다는 점이 문제다.
페스탈로치 교육사상의 현 우리교육에의 시사점.페스탈로치는 현대까지도 교육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는 교육실천가이다. 이는 루소와는 다른 면모로써 단순히 이론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자애로써 하류층의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바쳤다. 그는 이 사랑 있었기에 실패 속에도 계속 정진할 수 있었고 더 강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위로부터의 교육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교육을 실행한 자로써 사랑의 교육 실천자로써 그의 교육이 현대인에게 주는 가르침은 무궁무진 하리라 본다.흔히 우리는 지덕체 조화가 이루어지는 전인교육이라 하는데 그의 교육에 이 삼육론(3H)라는 것이 있다. 즉 머리, 가슴, 몸을 고루 도야해야 만이 하나의 인격으로 키워질 수 있으며 그것이 곧 교육이자 본질이라 생각했다. 특히나 덕이라는 것이 기초가 되어야 하는 덕육 위의 삼육론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 교육 현실에서 보면 이것이 거꾸로 되있는 것 같다. 교육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을 지식교육으로 치며 그 나머지는 인간으로써 마땅히 지녀야할 것으로 여기기보다는 있으면 더 좋은 것으로 쉽게 치부해 버리는 것 같다. 오로지 공부만이 살길이라며 주위에서는 끊임없이 강요를 해댄다. 이런 왜곡된 요인들로 인해 학생들은 괴로움과 불안감을 안고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변질된 교육에만 매진을 하게 된다. 차디찬 머리는 있지만 가슴이 뜨겁지는 않다. 약삭빠르게 머리로만 재고 판단할 줄 알았지 도통 만족이라는 모른 채 커져나가는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 진정으로 자신의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도 알지 모르고 지금 자신이 쫓고 있는 허영이 전부인냥 그렇게 따라다닌고 있다. 인간의 능력은 참으로 다재다능하다. 어느 한 방향만 억지로 키운 다고해서 보다 나은 사람이 되고, 보다 나은 삶이 될 수는 없음을 인식해야 겠다. 이런 점을 보아 지육만 지나칠 정도로 강조되고 있는 절름발이 교육에서 건강한 신체, 건강한 정신의 진정한 가치를 알고 그것이 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힘써야 될 일이다.다음은 그의 사상에서 눈여겨 본 것이 바로 가정교육이다. 핵가족화 맞벌이부부의 증가 등 여러 사회적 요인으로 오늘날의 가정은 가정으로써의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부모들의 자식에 대한 욕심은 갈수록 커져만 간다. 자신의 아이가 무엇에 흥미를 느끼고 원하는지도 모른 채 그들의 욕구로만 가득 채울려고 한다. 이런 부모들은 자녀를 위해 최선을 다 한다고 생각은 하겠지만 산에서 길을 잃고 제 길도 모르채 무조건 사람 많은 쪽을 따라가는 것 같다. 정작 자신들의 꿈은 없으면서 자식들에겐 보다 큰 꿈을 가져라고 야단이며 항상 최고가 되기를 바란다. 젊었을 때 고생을 사서하는 것이라 말하지만 자기 자식만은 예외가 되기를 바란다. 이처럼 오늘날 가정교육이 제대로 서기 위해서는 부모들이 자식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겠고, 진정으로 그들이 만족을 느끼며 행복한 삶게끔 도와주어야 겠다. 또한 부모들의 가지는 모순을 버리며 노동의 참 의미를 가르쳐 주며 덕성과 습관이 올바르게 형성될 수 있도록 해야 겠다. 물론 이 일이 선행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부모의 참된 선행이 있어야 겠다. 부모야 말로 자식의 진정한 길잡이이자 거울이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