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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보사회의 역기능 및 대응방안
    정보사회의 역기능 및 대응방안1. 들어가는 말우리나라 인터넷망의 구축은 이미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 선도적 수준에 도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이동통신망의 급속한 발전과 더불어 한국이 정보화시대로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실례이다. 인터넷 이용에 대한 최근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인터넷 이용자수는 2,412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56%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들 가운데 약 60%가 매일 인터넷을 이용하고 있다(한국인터넷정보센터, 2001: 2). 더구나 초고속 인터넷의 보급률이 세계 최고 수준임은 각종 국제 조사기관에 의해 확인되고 있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인터넷의 급속한 보급과 그 이용의 급격한 증가는 국민들의 새로운 정보통신기술에 대한 적극적 관심과 참여, 경제계의 신속한 대응과 투자 및 정보의 다양한 정보화정책추진이라는 삼박자가 화합한 결과물일 것이다.이러한 정보통신기술의 확산과 정착은 현대인의 의식 및 생활 전반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바, 그에 따른 긍정적 현상과 동시에 부정적 사회현상도 언론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각종 고개토론실의 활성화, 인터넷에 기초한 대안매체의 등장, 공공기관 홈페이지를 통한 국민의 직접 참여의 증대, 전자상거래의 활성화, 이른바 ‘안티 사이트‘를 통한 소비자 운동의 확산 등을 긍정적 현상으로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욕설과 인신공격의 난무, 음란물 및 사행성 오락의 확산, 개인정보의 침해, 이른바 ‘인터넷 중독‘과 생활건강의 황폐화 등 인터넷으로 인한 부정적 사회 현상도 더 이상 특별한 뉴스소재가 아니게 되었다. 인류가 편리성과 인본성의 향상이라는 결과만을 자동적으로 가져다주는 것은 아님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이렇게 정보통신기술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다양한 분야에서 심각한 변화를 가져다주는 상황에서, 정보통신기술의 확산이 어떠한 역기능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본다.이유선외, 『정보사회의 빛과 그늘』, 일신사, 20032. 정보사회의 역기능 및 대응방안1) 범죄적 역기능(1) 전자상거래 피해 6명의 주소로 1000원씩을 보내면 몇 개월 안에 8억원을 벌게 해주겠다는 허무맹랑한 피라미드식 사기도 끊이지 않고 있다. 멀리 외국에 음란사이트를 개설해놓고 회원 신청 때 받은 신용카드번호를 악용하는 것도 전형적인 사이버 사기이다.③ 대응방안ㄱ. 우선 소비자의 대처방안에 관해서 살펴보면,첫째, 신뢰할 만한 상대와 거래해야 한다. 상대방이 어떤 회사인지, 어디에 위치하는지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가령 일본 '소니' 사의 인터넷 주소는 www.sony.com 인데 www.sonycorp.com 이란 주소로 '소니'처럼 행세하는 얌체도 있다. 한마디로 유령회사가 많으니 조심해야 할 것이다. 유령회사에 피해가 당할 경우가 있으니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는 그 회사를 꼼꼼히 조사한 다음에 거래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둘째, 상품정보를 충분히 파악하는 것이다. 합법적인 회사라면 상품정보를 제공하는데 인색하지 않다. 가격, 배달시간, 보증기간, 환불여부를 꼼꼼히 따져보고 주문하는 게 좋다. 환불이 되지 않는 제품이라면 불량품이 나와도 바꾸어지지 않으니 자신이 손해를 보는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셋째, 회사의 실적을 알아본다. 매출 실적이 얼마나 되는지, 이름난 회사인지 미리 확인해 둔다. 소비자보호기관에 고발된 사례가 없는지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 그 회사의 포트폴리오를 확인한다. 진짜 탄탄한 기업이라면 홈페이지에 매출실적과 포트폴리오를 눈에 탁 뛰는 곳에 해놓는 것이 특징이다.넷째. 충분한 시간을 가진다. 할인기간이 정해져 있거나 고압적인 판매방식을 취하고 있다면 사기의 가능성이 농후하다. 시간에 쫓기지 말고 여유를 갖고 거래 여부를 결정하라. 너무 급하게 일을 처리하다 보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좀더 살펴보고 어떤 의심 적인 곳은 없는지 본다.또한 멋진 웹 사이트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웹 사이트가 훌륭하다고 거래상대가 믿을 만한 것은 아니다. 웹 사이트를 만들거나 등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고 비용도 얼마 들지 않는다. 이 말은 홈페이지 제작 회사에는 기관에서 인력부족 등의 이유로 이러한 활동을 충분히 하지 못하고 있으며, 소비자들도 피해가 발생한 경우 어디에 신고해야 하고 어디서 필요한 정보를 얻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하고 있다.그러므로 전자상거래 사기에 대한 관련 정보를 종합적으로 수집, 공개하고 소비자 뿐 아니라 유관기관에서도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외국의 사례를 참조하여 웹 사이트를 이용한 종합적 감시시스템을 구축하는 문제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웹 사이트는 소비자 및 업자에 대한 홍보, 계몽 기능, 피해신고접수 기능을 가주고 정부 각 기관에 대해 관련 데이터를 보내거나 각 기관에서 이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시시스템은 민간차원에서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경찰, 검찰, 정보통신부 등 유관기관 뿐 아니라 소비자단체 등 관련 민간단체와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여야 할 것이다.국제적 협력체제의 구축 또한 필요하다. 전자상거래에서는 정보의 전송범위가 전 세계에 미치기 때문에 전자상거래에서 범죄가 행해질 경우 피해가 광범위하게 확산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국제거래에 적용될 법원칙이나 절차법이 확립되어 있지 않다. 또한 국제거래의 경우 분쟁발생시 그 해결이나 피해구제에 많은 비용과 시간을 요하게 된다. 양 사법권을 거치는 수사에서 소환절차는 말할 것도 없고 법적, 재정적 문제도 중대한 장애가 된다. 그러므로 사이버 공간에서 행해지는 기만적인 상행위에 대처하기 위하여 국제적 차원에서 운영되는 협력체제의 구축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소비자 피해구제제도를 정비한다. 먼저, 반품 및 환불정책의 정비가 필요하다. 전자상거래에서는 소비자의 의사와는 달리 오작동, 잘못된 전송, 시스템 에러 등의 사유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의사표시를 철회 또는 변경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소비자의 반품 및 계약 철회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이에 관해서는 통신판매에 간한 규정을 적용하는 방안이 있을 수 있다. '방문판매 등에 관한 법률'에서는 방문판매 및 다단계판매의 경우와는 사용하거나 옵션에서 보안관련 부분을 최대한 강력하게 인증하는 방법이다.둘째, 사이버 레벨의 해킹은 특정 웹사이트를 해킹하려고 할 때 웹서비스 자체의 취약점을 공격할 수도 있지만, 웹사이트에서 외부에 공개되는 다른 서비스들을 이용하여 웹사이트내의 접근권한을 얻을 수도 있다. 특별히 UNIX 웹사이트일 경우에는 더욱 더 심하다. CGI를 이용하는 웹페이지에는 메타문자를 인자로 넘겨서 쉘이 실행되게 하고, 또는 웹사이트로 모든 접속을 가로채어서 중요한 정보만을 골라서 악용하는 해킹도 있다.이에 대한 해결책은, 웹서비스의 웹 문서나 웹사이트에 IP주소나 호스트 이름을 이용해서 웹사이트에 접근을 제한하는 것이다. 사용자명과 해당 암호를 이용해서 접근을 제한할 수도 있으며, 서버/클라이언트 사이에 오가는 패킷들을 SSL이나 SHTTP 같은 프로토콜을 이용하여 암호화시켜서 전송할 수도 있다. 이런 해결책들도 Spoofing이나 악의적인 Java Applet들을 이용하여 충분히 해킹할 수 있으므로 해결책은 On-Line 쇼핑몰로 차단된다.셋째, 방화벽 시스템에서 허락되는 서비스와 액세스를 정의하는 것 같은 보다 큰 보안정책의 수행을 도우며, 네트워크 구성을 하나 그 이상의 호스트 시스템 관리와 라우터의 안정된 패스워드에서 진보된 인증 같은 정책의 수행이다. 내부 네트워크 보호를 위해 외부의 불법적인 트래픽 유입을 막고, 허가되고 인증된 트랙팩만을 허용하려는 적극적인 방어대책이 필요하다.한국전산원 http://www.nca.or.kr/main/nca_main.htmcyber118 http://www.cyber113.or.kr한국정보보호진흥원 http://www.certcc.or.kr사이버 테러 대응센터 http://211.196.153.7/user/ctrc/ctrc_main.htm2) 사회적 역기능(1) 프라이버시 침해(사생활침해)프라이버시에 대한 고전적인 접근은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프라이버시를 바라본 J.S.Mill에서 발견된다. Mill은 프라이버시와 관련된 사고와 행위라 개인의 동으로 모아진 정보가 각 기관 상호간에 교환되고, 혹은 1개소에 집합되는 경우에는 정보의 유용과 목적 외 사용의 가능성이 있다.- 집적된 기록은 전자기계의 원격조작에 의해 단말기에서 입수 가공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런 상태 하에서는 도난 내지 악용될 염려가 있으며 그 악용된 것의 발견이 어렵다는 점에서 완전성이 염려된다.http://jade1208.com/ji/deep/digital4htm.htm* 사생활 침해의 예 *정보사회의 역기능 중에서 사생활 침해의 대표적인 예를 몇 가지 들어보자. 얼마 전 인터넷에서 “개똥녀”라는 단어가 인기검색어에 있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보았을 것이다. 지하철에서 어떤 여대생이 자신의 애완용 강아지가 똥 싼 것을 치우지 않고 내렸다고 그렇게 불리는 것 이였다. 물론, 그 일명 “개똥녀”도 잘못은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개인정보가 다 공개되어서 인터넷 마녀사냥의 희생양이기도 했다.(2) 저작권 침해저작권 침해 또한 정보사회의 역기능 중 하나이다. 저작권 침해라는 뉴스에 가장 많이 등장했을 법한 곳은 바로 “소리바다”이다. 인터넷상에서 가요, 팝 등의 음악을 음악파일을 갖고 있는 사람 누구나 소리바다에 파일을 올리면, 우리나라의 어느 지역이든 그 음악파일을 찾는 누군가는 파일을 전달받을 있는 시스템이다. 이로 인해, 가수들, 작곡가들이 음반 판매의 많은 손해를 입는다며 소송을 냈고, 결국은 저작권협회가 승소해서 요즘 소리바다는 유료로 운영되고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쉽게 인터넷에서 무료로 음악파일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3) 익명성인터넷은 그야말로 자유롭다. 인터넷에서 이름이나 얼굴을 공개되지 않고, 다만 나의 아이디, 아바타 등으로 나를 표현하기 때문에 그만큼 나의 행동에 대한 책임감도 줄어든다.그 한 예를 알아보자. 2003년 어떤 여자 고등학교의 교장은 성 추행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서울시 교육청으로 조사를 받아야 했다. 이유는 그가 근무하는 학교의 홈페이지 교장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글이다.
    공학/기술| 2009.01.11| 11페이지| 2,000원| 조회(1,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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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의 교육
    - 독일의 교육 -1. 들어가며독일의 교육을 간단히 소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독일인들조차 독일의 복잡하고 다양 한 교육제도와 현황을 제대로 아는 이는 흔치 않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독일의 교육제도는 연방정부의 관장 하에 한가지로 통일된 제도와 운영방식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각 주(州)정부 관장 하에 이루어지는 지방자치 제도의 운영사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일 전역에 공통적으로 유사하게 운영되는 교육제도의 사항을 말해보고자 한다.2. 학교교육(1) 법적 토대기본법 7조에 따르면 독일에서의 교육전반의 본질적 분야들은 연방주들의 책임영역에 속한다. 유치원은 물론 일반학교와 직업학교, 성인교육과 계속교육, 대학교육이 주들의 책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16개 주들에는 상이한 교육체계와 학교 유형들이 있다. 그러나 1971년 10월 14일에 맺어진 주들간의 협정에 따라 의무교육, 편제, 수료의 인정 등 공통적인 기본구조는 존재한다. 상이한 교육체계에서의 필요한 동일성은 각 주 교육문화부장관들의 상임위원회를 통한 또다른 협정들에 의해 유지되는데, 예를 들면 김나지움 상급단계의 편성, 대학입학 자격기준, 다양한 학교 주료증서의 상호인정 등이 그것이다.(2) 의무교육6세~17세까지 12년간의 학교교육은 의무적이다. 그중에서 9년간(일부에서는 10년간)은 전일제 교육이 이루어지고 그 후에는 직업학교에서의 부분출석 수업이 이루어진다. 모든 주의 학교교육은 무료로 실시된다. 일부 학습자료들, 특히 교과서는 학생들에게 무료로 제공된다.종교수업은 기본법에 따라 정규 교과목이지만 의무과목은 아니다. 14세부터 학생들은 희망에 따라 종교과목 수학 여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일반적으로 학급은 남녀 혼성으로 편성된다. 주들로부터 재정지원을 받는 많은 사립학교들은 교육의 내용을 폭넓게 하고 있다.(3)독일의 교육제도1) 유치원(Kindergarten)독일이 처음으로 실시한 제도이다. 18-19세기에 아동교육기관은 원래 기본적인 성경공부를 시키거나 초기 산업화의 역효과로 독일의 초등학교는 그룬트슐레(Grundschule)인데 우리말로 직역하자면 기초학교라는 말이 된다. 6월 30일을 기점으로 만 6세가 된 아이들은 대체로 8월이나 9월에 시작하는 4년제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독일의 교육제도는 주(州) 정부의 권한에 속하기 때문에 초등학교의 입학시기 등 학교 운영이 서로 다를 수 있다.한 학급의 학생수는 20명 정도로, 정규수업 과목은 종교, 독일어, 수학, 미술, 음악, 체육, 실사회생활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당 20시간에서 24시간 정도이다. 그밖에 합창, 악기 다루기, 체조나 배구 등과 같은 특별활동 시간(주당 2시간 정도)을 마련하여 희망하는 학생들이 참가하도록 함으로써 특기와 소질의 계발과 취미활동의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터키, 이탈리아 등 외국인 학생들의 수가 비교적 많은 독일학교에서는 이들을 위하여 모국어 강좌를 별도의 교육과정으로 운영하며, 독일어가 서투른 외국인 학생들을 위하여 개별지도를 통해 독일어 수업을 추가로 보충해 주기도 한다. 이에 따르는 수업료를 별도로 지불하지는 않는다.② 개인의 진로를 결정하는 시기초등학교를 마치고 나면 다음 단계로 진학해야 할 학교를 결정해야 한다. 물론 성적이 중요한 기준이 된다. 지역별로 다소 차이가 있긴 하지만 독일어와 수학에서 최소한 2.5점 정도까지를 받은 학생들은 김나지움(Gymnasium)이라 불리는 인문계 학교를 추천 받게 되고, 3.0점 정도까지를 받은 학생들은 레알슐레(Realschule)라 불리는 실업학교(중간학교) 진학을 권고 받게 되며 그 다음 학생들은 하우프트슐레(Hauptschule)라고 불리는 일반학교 진학을 권고 받는다. 진학할 학교에 대한 교사의 추천에 대해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교사들이 학생의 능력과 실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믿고 따르지만 추천에 이의를 갖는 학부모의 경우는 학생의 적성검사와 담임 교사와의 상담을 통해 재조정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독일에서도 초등학교에서 진학결정을 하는 데에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제기되는 대표적여는 교육청 당국과 학교가 공동으로 부모들에게 적극적인 홍보를 하여 아비투어(김나지움 졸업인정)로 가는 길이 다양함을 알려준다. 한편, 학생의 능력에 부담을 주는 진학 결정은 학생에게 정신적으로 커다란 장애를 줄 수 있음을 학부모들이 간과하지 않도록 교사와 학부모가 협의상담을 한다.셋째, 사회의 급격한 변화로 직업교육과 사회가 요구하는 교육수준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은행원으로 일하는 자리에 이전에는 일반학교나 실업학교(중간학교) 졸업의 학력이면 충분했었지만 이제는 아비투어(김나지움 졸업인정)를 요구하는 등 일자리를 제공하는 측에서 점차로 높은 학력의 소유자를 선호하는 추세로 바뀌고 있다.3) 중등학교① 김나지움(Gymnasium)독일에서는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자기의 자녀가 초등학교(Grundschule)를 마칠 때 교사로부터 학업에 능력과 소질이 있다고 인정을 받으면 중등학교인 김나지움에 진학을 시킨다. 김나지움은 5학년부터 13학년까지 9년간으로 이 기간에 대학수학에 필요한 능력을 배양하게 된다. 초등학교 과정과 합쳐서 13년간 대학에서 학문을 탐구할 준비과정을 갖게 되는 셈이다. 김나지움이 교육과정의 이수를 통해 지향하고자 하는 목표를 살펴 보면 책임성, 자발성, 논리적 사고력, 구조형성 능력, 의사소통 능력, 정보의 수집과 종합력, 문화 이해력, 창조력, 단결심, 공동 작업력, 그리고 성취의욕 등의 배양으로 요약될 수 있다.일반적으로 언어?자연과학계열(우리 나라의 인문계열과 자연계열)의 이수과목을 보면, 종교/윤리, 독일어, 지리, 역사, 사회, 제1외국어, 제2외국어, 수학, 자연현상, 물리, 화학, 생물, 체육, 음악, 미술 등의 과목을 공부하게 된다. 물론 학교의 특성과 여건에 따라 주력 과목이 있다. 인문계열의 경우 외국어과목에 중점을 두어 고전어인 라틴어까지 4∼5가지의 언어를 배울 수도 있고, 자연계열의 경우 물리, 화학, 생물과목을 더 추가해서 이수하게 된다. 김나지움이 대학 공부를 위한 준비 단계이므로 김나함시켜서 공부할 교과과정을 편성해야 한다. 이렇듯 각 분야의 과목을 고루 이수하여야 아비투어를 치를 수 있도록 구조화되어 있어서 독일 김나지움의 교육방향은 결국 소위 전인교육을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② 레알슐레(Realschule)현재의 실업학교(중간학교)는 주(州)에 따라 그 의미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에서는 이 실업학교 제도가 다른 주에 비해 잘 운영되고 있으며 중소기업이 활발한 지역의 특성에 따라 이 학교 졸업생들의 직업적 전망이 상당히 높다.실업학교는 6년의 학과 과정을 가지며, 마지막에 종합시험을 통해 실업학교 졸업증서(Mittlere Reife)를 딸 수 있다. 이 학교의 교육 목표는 대학 교육보다는 직업생활을 일찍 시작하려는 학생들에게 필요한 기본 소양을 닦아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실업학교는 앞으로의 전문직 활동을 위해 필요한 여러 재교육과 상급교육을 받을 기회를 모두 제공하고 있다. 학생들의 관심과 성적에 따라 김나지움(Gymnasium)으로 옮겨 갈 수도 있고, 실업학교 졸업 후에 직업전문 김나지움(Berufliches Gymnasium)으로 진학하여 대학에 입학 할 수도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직업컬리지(Berufskolleg) 등에서 구체적 직업 선택을 위한 보충교육을 받을 수가 있다. 그런 다음에는 직업연수 과정이 시작되는데 독일의 특징인 복합체계(dualles System)속에서 기업체나 개별 영업체에서 실습을, 학교에서는 이론과 교양을 배운다.*졸업 후의 진로*가. 직업으로1) 복합체계(im dualen System) - 직업학교에서 이론, 기업체에서 실습예) 은행원, 공산품 제조원2) 직업 전문학교(in der Berufsfachschule) - 이론과 실습을 동시에 한다예) 심리 치료사, 양노 조력인(Altenpfleger/in)3) 직업 컬리지(in Berufskollegs) - 공·상업의 여러 전문 직업 과정졸업 시험을 통해 전문대학 입학 자격증(Fachhochschulreife) 획득 가 실시하며,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지 않는 학교로 졸업 후 직업생활에 기초가 되는 내용을 교육하며, 직업교육을 받을 때 도움이 되도록 한 가지의 외국어(대개가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이론적 추상적 사고를 필요로 하지 않은 유형의 직업을 가질 학생들에게 인격적 기본 소양과 기술적 능력의 배양을 위한 기초를 제공한다. 8학년 때부터는 자신이 원하는 직업분야에서 1주일에 1일 동안 실제적 경험을 하게 된다. 이것을 통해 장래 직업의 구체적 현실을 미리 점검해 볼 수 있다. 이 학교에서는 노동(Arbeit), 경제(Wirtschaft), 기술(Technik)의 3부분의 이해를 돕기 위한 수업들을 제공하고 있다. 졸업 시험은 없으며, 이후 직업 전문 학교에의 입학이 가능하다. 근래에 이 주요학교는 점차 인기가 떨어져 쇠락의 상태에 있다. 더욱이 주요학교는 학업 성적이 아주 낮은 학생이나 이민 온 아동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현재 개혁이냐 폐쇄냐 하는 논쟁에 휘말려 있다.4) 종합학교(Gesamtschule)① 종합학교(게잠트슐레) 소개기회의 균등을 이룩하고 교육적 제공을 개선하기 위해 1970년부터 독일은 실험적으로 종합학교(5학년부터 10학년을 위한 과정)를 설립하여, Hauptschule(하우프트슐레), Realschule(레알슐레), Gymnasium(김나지움)으로 나뉘는 전통적 분류 및 학년을 나누는 학제를 과감히 포기하였다.종합학교 제도는 이제껏 분리되어 온 세 가지의 학교 종류(하우프트슐레, 레알슐레, 김나지움)를 통합한 것으로, 졸업형태도 세 가지(하우프트슐레 졸업, 레알슐레 졸업, 아비투어)로 나뉜다. 종합학교는 4학년을 마친 후에도 진로선택이 뚜렷하지 못한 학생들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학교 형태로써, 9학년이 시작할 때까지 진로선택에 대한 결정을 미룰 수 있다.종합학교의 교육적 이상은 부모의 사회적 지위에 따른 학교선택을 지양하고, 다양한 사회계층의 아동들이 함께 학습과 체험을 공유함으로써 사회적 경험을 쌓는 전체성(Ganzheitlichkeit)
    인문/어학| 2009.01.11| 5페이지| 1,000원| 조회(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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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전쟁과 북한사회 평가A좋아요
    한국전쟁과 북한 사회(『북한 50년사』 발췌문)1.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한국전쟁에 대한 두 가지 견해정통이론: "한국전쟁은 그 주모자인 북한이 소련과 중공의 사주를 받아 행한 대리전이며, 그 목적은 소련의 팽창야욕과 김일성의 적화야욕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수정주의: " 제국주의 미국과 반동적인 이승만 정부가 공모해 북한의 전면 공격을 유도했다", "한국전쟁은 민족정통성을 가진 북한이 미국의 식민지 상태에 있던 남한을 해방하기 위해 일으킨 민족해방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의 단초는 해방된 한국의 반제반봉건 투쟁에서부터 주어졌으며, 해방 후 한국 사회는 반제 반봉건 문제를 둘러싼 투쟁에서 좌우익 정치 세력간의 이념대립으로 발전하였다. 그 과정에서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라는 세계사적인 체제대립의 최일선이 되었다. 당시 세계사는 제국주의 식민 세력과 민족해방투쟁 세력간의 대립구도가 제2차 세계대전 후 자유주의 대 전체주의, 혹은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라는 진영간 대립구도로 재편되는 과정이었고, 이 시기 한반도는 민족자주와 민족적 독립 열망이 강렬하였고, 그 대립구도가 첨예한 접점으로 떠오른 것이다.최장집의 논문"한국전쟁이, 세계적화야욕에 불타는 공산종주국의 수괴 스탈린의 지휘하에 치밀하게 예비되고 스탈린의 교사와 중국공산당의 마오쩌둥의 지원 하에 김일성이 도발한 전쟁"이며, 그래서 "1950년 6월 25일 새벽 전 전선에 걸쳐 전면 남침을 감행한 북한에 한국전쟁 발발의 모든 책임이 있다."(최장집, 한국전쟁의 한 해석, 한국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 나남, 1996)-> 소련측 문서들을 근거로 '북한의 남침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확인되었다'는 점만을 인용, 강조함으로써 한국전쟁과 관련된 다른 중요한 문제들은 덮어버리려 함. 한국 전쟁은 북한의 전면공격으로 시작되었지만, 한국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많은 원인들은 해방과 함께 시작된 미. 소의 분할 점령에서부터 쌓여왔다. 하지만, 이는 이데올로기적 접근과 편향을쩌둥의 지원 약속과 동의를 얻어냈다.-> 전쟁은 김일성, 박헌영 등 북한 지도부가 주체적으로 나섰고,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그를 지원한 것이다. 물론, 소련과 중국은 자본주의 진영과의 체제대립에서 사회주의의 승리라는 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와 한반도의 통일 시 자국의 안전보장라는 이익이 있었다. 이는 이미 사회주의 대 자본주의라는 진영간의 국제적 성격을 안고 출발 한 것이다.한국전쟁의 간접적인 기원 - 미.소의 분할 점령과 좌우익 대립1948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두개의 분단정부가 들어서는 과정에서 한국사회는 남북한과 좌우익의 대립과 투쟁, 친일파와 항일세력 사이의 대립과 투쟁이 복작하게 얽히면서 발전하게 된다. 그 바탕에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간의 체제대립, 즉 국제적 냉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 때문에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조적이었다.대한민국은 이승만과 한민당이 권력을 장악하였고, 친일파가 부활하였다. 토지개혁과 사회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부분을 과거의 기득권 세력이차지하였다. 남쪽에 있던 좌파 세력은 미군정과 우익들의 탄압을 피해 북쪽으로 넘어가 고위직을 차지했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친일파의 숙청과 반봉건적 사회, 경제제도의 해제로 지주나 예속자본가가 기득권을 박탈당하였다. 북한의 혁명과정에서 기득권을 박탈당한 사람들은 남한 땅으로 넘어왔고, 이들은 대부분 대한민국에서 지배 세력에 편입했다. 이들 월남 세력들은 군대, 경찰, 관료가 되어 반공을 외치고 폭력적 우익 청년단체를 조직하여 남한 내에서 대중들의 사소한 개혁 요구나 생존권 요구마저도 폭력과 테러로 대응하였다.->남과 북의 지배층 사이에는 식민지시대부터 형성된 적대감이 이념대립과 정부수립 과정을 통해 더욱 심화됨. 그로부터 남한에서의 여순반란사건과 좌익세력의 게릴라 투쟁이 진행되었고, 39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 양측 군대 간에 끊임없는 무력충돌이 벌어짐.한국전쟁의 결정적 사건 - 사회주의VS자본주의장제스의 국민당이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순~11월 중순)8월 초까지 남한 지역의 90% 이상을 장악한 인민군은 8월 15일까지 부산을 ‘해방’시킴으로써 전쟁을 조기에 종결하려 했다. 그러나 유엔군이 완강하게 방어선을 고수했기 때문에 전선은 낙동강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인민군은 점점 전력이 약화되는 반면 유엔군은 8월 들어 병력이 대대적으로 증강돼 유엔군의 전력은 한국군을 포함해 14만여 명이나 되었다.이런 가운데 9월 초순에 유엔군의 대대적인 반격작전이 개시되었다. 9월 6일 목포와 군산에 무차별적인 공격을 감행했고, 9월 13일부터는 인천을 향했다. 9월 15일 다시 한 번 집중적인 화력을 퍼부은 다음 오전 6시 30분, 미 해병대가 월미도에 상륙했다.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된 것이다.병력에서 우세한 유엔군은 손쉽게 인천을 점령한 후 부평, 김포를 장악하고 서울로 진격했다. 9월 28일, 서울은 다시 유엔군 수중에 들어왔고, 9월 30일까지 이남이 주요 지역은 대부분 회복했다. 이와 동시에 낙동강 전선에서도 유엔군의 전면적인 총반격이 시작되었다. 유엔군의 반격에 인민군은 밀려나기 시작했고, 전후방의 연락·지휘 체계도 무너졌다.10월 1일 맥아더는 김일성에게 항복을 요구했으며, 한국군은 38선을 처음으로 돌파했다. 그러자 중국 수상 저우언라인(周恩來)는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하면 중국이 참전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렇지만 맥아더는 북진을 명령했고, 10월 7일에는 38선을 넘었다.10월 10일 원산, 17일 함흥과 흥남이 각각 유엔군의 손에 떨어졌고 10월 19일 드디어 평양이 함락되었다. 한국군은 청천강을 넘어 압록강으로 진격을 계속하여 10월 26일 한국군 제6사단은 압록강변의 운산에 도착했다. 결국 10월 말까지 청천강 이북의 산악지역과 함경도 북단을 제외한 북한 지역 대부분이 유엔군에게 장악되었다.북한 지역이 수중에 들어오자 이승만은 즉각 북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북한에 대한 시정 방침’을 공포했다. 동시에 점령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경찰과 우익 청년단원을 북한에 들여보내는 한편특히 맥아더는 누구보다도 강경하게 반대했다.맥아더는 3월 24일 ‘전쟁을 중국으로까지 확대할 것이며 휴전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확전 의지를 강력하게 피력했다. 맥아더의 요구를 받아들여 합동참모본부는 4월5일 맥아더에게 만주와 산둥반도를 공격할 권한을 부여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자신의 의지를 펴보지도 못하고 4월 11일 해임되었다. 맥아더가 하원의원 마틴에게 보낸 “대만군 사용과 아시아에서의 확전”을 주장하는 서신이 공개된 것이다.5월 1일 합동참모본부는 새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에게 서신을 보내 “캔자스·와이오밍 선(캔자스 선은 서울 북방 20마일 지점인 임진강 하구에서 화천저수지를 거쳐 동해 대포리에 이르는 선이고, 와이오밍 선은 임진강 하구에서 철원·금화를 거쳐 화천저수지에 이르는선)까지 진격을 허용하되 사전 승인 없이 통제선을 너머 대규모로 북진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이와 함께 미국은 5월 17일 군사와 정치를 병행하는 제한 전쟁정책인 휴전정책을 최종 결정했으며, 이렇게 해서 휴전이 모색되었다. 미국은 휴전협상을 위해 전 소련대사 케난에게 직접적인 대소교섭을 부탁했다. 그러자 케난은 유엔 주재 소련대표 말리크를 만나 휴전을 제의했고, 5월과 6월에 걸쳐 비밀회담이 진행되었다.6월 23일 말리크는 방송연설을 통해 교전국들이 38선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휴전협상에 임할 것을 제안했다. 이를 받아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가 6월 30일 공산군축에 정전회담을 제의했고, 7월 1일 김일성과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 펑더화이가 베이징 방송을 통해 이를 공동명의로 수락했다. 이로써 전쟁을 종결하기 위한 휴전협상이 시작되었다.제 5단계 : 휴전협상과 소모전, 그리고 휴전(1951년 6월~53년 7월 27일)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휴전협상이 처음 시작되었다. 회의자 시작되자 양측은 의제문제에서부터 이견을 노출했다. 논란 끝에 7월 26일 다섯 가지의 의제가 결정되었다. 그것은 ‘①의제 및 의사일정 채택 ②군사분계선 설정 ③휴전감시 방법 및 기구구련해 남한은 유엔 감시하에 남한 헌법에 의한 북한만의 선거를, 유엔측은 유엔 감시 하에 인구비례에 의한 남북한의 전국적 선거를 주장했다. 반면 공산측은 유엔이 전쟁 당사자이기 때문에 중립국 감시위원단의 감시 하에 전 조선위원회가 관리하는 전국적 선거를 주장했다. 외국군 철수문제와 관련해서는 공산측은 선거 이전에 모든 외국군이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남한과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쌍방은 공방을 거듭했으나,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논의조차 진행시키지 못한 채, 6월 15일 양측 성명을 끝으로 회담이 무산되었다. 결국 통일방안도, 외국군의 철수도, 그리고 평화체제 구축도 무위로 돌아갔다. 이로써 한반도의 분단은 완전히 고착되었다.3. 한국전쟁과 북한사회한국전쟁이 남긴 것한국 전쟁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으며, 한반도와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한국 전쟁으로 당시 남북한 인구 3천만 명의 6분의 1에 달하는 5백만 명이 죽거나 다쳤다.(중국군과 유엔군을 합치면 6백만 명에 이른다). 북한이 3백만, 남한이 2백만 명이었다. 그런데 인명 피해 가운데 민간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너무나 높다. 이런 사실은 한국전쟁의 비인도적인 속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특히 북한에서 이렇게 엄청난 민간이 피해가 발생한 것은 미군기의 융단폭격 때문이었다.이와 함께 한국전쟁 기간 동안 대규모의 인구인동이 일어났다. 정치적인 이유와 미군 폭격을 피해 북한에서 남한으로 이동한 인구는 대략 40~65만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들을 포함해 5백만 명의 전재민과 1천만 명의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전쟁으로 인한 물질적 피해도 엄청났다. 총 피해액 가운데 민간가옥이 39.1%, 민간산업 부문이 20.2%, 교육부문이 20.0%를 차지했다.국민총생산은 1949년 9.7%, 1950년 - 15.1%, 1951년 - 6.1%, 1952년 8.0%, 1953년 25.7%로 나타났다. 전쟁피해는 초기에 집중되었고, 종전이 가까워지면서 미국의 원조에 힘입어 급속한 성장률을 기록했다. 그렇지만 국민총생산이 전쟁 이었다.
    인문/어학| 2006.12.26| 12페이지| 1,000원| 조회(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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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양인을 위한 일본사
    『교양인을 위한 일본사』 요약제1장 창세기* 대폭발에서 인간의 탄생까지(150억년 ~ 1만 년 전)100억~200역 년 전 빅뱅이라는 대폭발이 있었고, 시간과 공간이 생기면서 우주는 급격히 팽창하기 시작하였다. 대폭발이 일어난 지 수초 후, 에너지는 양성자, 전자, 중성자로 모습을 바꾸었다. 그 후 우주에는 어디나 풍부한 수소가 균일하게 분포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가스가 식고 중력이 작용하면서 태양계가 탄생하였다.지구의 탄생은 46억 년 전 원시별의 죽음에서 시작했다. 초신성의 폭발로 원시별은 생명에 필요한 원소를 만들고, 수명이 다하면 죽었다. 한편 대폭발로 원시 태양계 성운이 생겼다. 원시 행성운의 가스는 점차 식고, 가스를 구성하고 있던 원소가 광물 입자로 굳어졌다. 그리고 광물 입자가 충돌하고 합쳐지면서 미행성이 되었고, 점차 성장해 행성이 되었다.원시 지구가 생기고 얼마 지난 후 원시 바다가 생겼다. 여기에는 질소·수소·이산화탄소가 녹아 있었는데 열과 방사선이 작용하여 당·염기·인산을 생성했다. 35억~38억 년 전 이것은 다시 단백질·핵산으로 변해서 원시 바다의 거품으로 둘러싸인 지구 최초의 생명이 되었다.25억 년 전 지구는 시아노박테리아에 의해 산소가 풍부한 환경으로 바뀌었다. 이 환경에서 호기성 세균이 번성하게 되었고 혐기성 세균은 약자가 되었다. 혐기성 세균은 핵막을 만들거나 호기성 세균과 공생을 하는 방식으로 잔존하였는데 이리하여 진핵세포가 탄생하는 것이다. 15억 년 전 진핵세포는 다세포로 변화해 갔고, 식물·동물로 진화하게 된다.다세포 생물들은 먹이를 구하여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약육강식의 시대가 되었다. 이로써 생물들은 각자 자신의 상황에 맞게 진화하게 되었고 다양한 형태를 한 생물이 폭발적으로 탄생하였다. 이시기를 캄브리아기(5억 5천만 년 전)라고 하며, 진화의 빅뱅이라고 한다. 약자인 생물 중에서는 강으로 진출하여 척추동물의 조상이 되었고, 어떤 생물은 육지로 올라와 포유류가 되었다.인간의 조상인 원시 영장류는 북아메리카에 신경을 쓰고 있었던 이와이는 신라 출병 명령에 격노하였으며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조정의 원정군을 괴롭혔다. 이것은 야마토 정권에게 최대의 위기였으나 위기를 극복한 조정은 전국 지배의 기초를 한결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538년 백제 성왕 때 불상과 경전이 일본에 전해졌는데, 불교의 수용을 둘러싸고 조정의 의견은 둘로 나누어졌다. 불교 수입에 찬성한 이는 오오미(大臣)인 소나노 이나메였고, 반발하고 나선 이가 오무라지(大連)인 모노노베노 오코시였다. 곤란해진 긴메이(欽明)천황은 우선 소가노 이나메에게 불상을 맡겨 신봉하게 하였으나, 때마침 역병이 유행했다. 모노노베노 오코시는 이를 계기로 소가씨의 절을 불태우고 불상도 강에 던져버렸다. 그러나 불교와 함께 여러 가지 뛰어난 문화가 전래됨에 따라 서서히 호족들 사이에 불교가 수용되어 갔다.불교를 둘러싼 소가씨와 모노노베씨의 싸움은 소가노 우마코와 모노노베노 모리야의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모노노베씨의 군대가 강성하여 소가씨는 고전을 면치 못하였으나, 요메이 천황이 아들 쇼토쿠태자와 한편이 되어 모노노베씨를 멸망시켰다.실권을 장악한 우마코는 꼭두각시로 스슌(崇峻) 천황에 이어 최초의 여성 천황 스이코 천황을 즉위시켰다. 쇼토쿠 태자는 섭정이 되어 우마코와 함께 스이코(推古) 천황을 보좌하게 되었다.쇼토쿠 태자는 견수사(遣隋使)를 파견하여 수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이려 하였고, 천황 중심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많은 정책을 폈다. 그의 정치는 미완이었으나 그 정신은 계속 이어져 그가 보낸 견수사의 유학생들이 뒤에 율령국가의 건설에 활약하게 된다.소가노 우마코가 죽은 후에도 소가씨의 권세는 강성해져 갔다. 소가노 에미시와 이루카 부자는 에미시의 누이동생의 아들인 후루히토노 오에 황자를 황위에 등극시키려고 했는데, 그러기에는 나카노 오에 황자와 야마시로노 오에 왕 두 사람이 방해자였다. 야마시로노 오에 왕이 죽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나카노 오에 황자는 소가씨 타도를 획책하게 된다. 이때 소가씨 타도를 꿈꾸던 나카토미노 가마타리 쇼토쿠천황이 되었다. 쇼토쿠 천황 때 절대적 권력을 장악한 이가 도쿄다. 그러나 쇼토쿠 천황이 사망하자 즉각 실각되었고 다시 후지와라씨가 대두하였다.후지와라노 나가테와 후지와라노 모모카와 등은 쇼토쿠 천황의 유언을 날조하여 고닌(光仁)천황을 세웠고 그 뒤를 계승한 이가 그의 아들 간무 천황이다. 즉위한 간무 천황은 쓸모없는 관청·관료를 폐하고 관료들의 부정 행위를 단속하는 등 율령제를 재건하며 농민의 생활 안정을 도모하였다. 또한 헤이안교(平安京)로 천도하여 헤이안 시대를 열게 된다.간무천황의 뒤를 이어 사가천황이 양위하였고, 사가 상황이 죽자 후지와라씨는 황태자와 그를 따르는 중신들에게 모반죄를 뒤집어씌워 실각시켰다. 이 사건으로 후지와라노 요시후사가 세력을 확대하였고, 이때 도모노 요시오라는 이가 조정에서 출세하게 된다.866년 헤이안쿄의 오텐몬이 화재에 휩싸이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 사건은 정적인 미나모토노 마코토에게 방화죄를 뒤집어씌우려던 요시오의 음모였다는 것이 밝혀진다.(오텐몬의 정변)사가 상황이 죽자 요시후사는 셋쇼(攝政)가 되었으며, 이것은 셋칸 정치의 초석이 되었다. 여기서 셋쇼는 나이가 어린 천황을 대신하여 정치를 하는 직책이며, 성인이 된 천황을 보좌하여 정치를 행하는 직책을 간파쿠(關白)라고 한다.여기서 지방의 상황을 살펴보자. 10세기 무렵 조정은 지방 행정을 고쿠시(局司)에게 일임하여 고쿠시는 정해진 양의 세금만 중앙에 보내면 나머지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것을 이용하여 토지·재력·무력을 갖추는 자가 나타났다.한편 농민 중에서도 간전을 개발하여 토지와 부를 축적하는 자(개발 영주)가 나타났다. 그들은 자신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게 되었고 마침내 ‘무사’가 탄생하게 된다. 이 무렵 무사는 귀족이 부리는 존재로서 문자 그대로 시(侍), 즉 귀족을 모시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후 무사단은 각지에서 힘을 축적해 점차 귀족을 대신하는 존재로 커갔다.제3장 중세* 원정(院政)에서 세키가하라(關ケ원전) 전투까지(11세과 승려를 명에 파견하여 일본과 명 사이에 무역이 시작되었으며, 정식으로 명의 책봉 체제에 편입되었다. 명에 신종(臣從)하는 것에 대해서 반발도 있었지만,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조일 무역(朝日 貿易)을 통해서도 다양한 교류가 생겼으며, 무역을 통해 조선에서 수입한 최대의 품목은 불교 경전이었다. 1419년에는 조선의 군사들이 왜국의 약탈에 반격하여 쓰시마를 공격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이 시기에는 긴카쿠사(銀閣寺)가 지어졌고, 히가시야마 문화가 발달하였다. 또한 수묵화의 발전이 무로마치 시대를 대표한다.무로마치 바쿠후의 제8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경무에 관심이 없었고 아내인 히노 도미코와의 사이에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요시마사는 동생 요시미에게 양위를 하기로 결정했으나, 때마침 아들(요시히사)이 태어났고 자신의 아들에게 양위하기로 재결정을 하고 말았다. 결국 후계자 문제로 분쟁이 시작되고 말았는데, 이것이 오닌(應仁)의 난이다. 오닌의 난으로 교토는 황폐해졌고 바쿠후의 통솔력이 약화되자, 각지에는 센고쿠다이묘(戰國大名)가 출현하게 되었다.센고쿠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기는 각지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시기다. 이러한 전투는 적의 쌀·가재 도구를 약탈해 옴으로써 경제적으로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또한 전쟁을 준비하면서 다이묘들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호소하는 선전을 통해서 지배를 확립해 갔다.센고쿠다이묘의 휘하에 있는 많은 가신들이 다이묘 정권을 형성하였다. 다이묘의 영국(領國)은 다이묘의 개인 영지인 직할령과 가신의 영지로 구분된다. 그리고 다이묘는 가신들로부터 각종 조세를 징수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센고쿠다이묘가 실력으로 구축한 영국을 분코쿠(分國)라고 한다. 센고쿠다이묘는 분코쿠를 통제하는 분코쿠법으로 영국을 지배하였다.1543년 규슈 남해상에 중국 선박 한 척이 표류해 왔다. 이 배에 실려 있던 총포류는 일본의 역사를 크게 바꾸어 놓았는데, 각지에서 총포류가 생산되었으며 센고쿠다이묘 사이에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확산되. 이런 결과 1694년 무렵에 바쿠후는 적자를 보고 있었으므로 1695년 화폐 개주(改鑄)정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에도에 일어난 대규모 화재·지진·후지 산 분화 등 재해 처리로 세출은 여전히 줄지 않아 근본적인 재정축적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쓰나요시의 뒤를 이어 조카 도쿠가와 이에노부가 쇼군의 자리에 올랐다. 쓰나요시 시대부터 화폐 개주를 시행해 왔던 오기와라 시게히데는 다섯 차례에 걸쳐 화폐 개주를 단행하였다. 당시 물가 상승의 원인이 이러한 화폐 개주에 있다고 생각한 하쿠세키는 시게히데의 정책과 정반대의 정책인 화폐의 가치를 게이초 시대로 되돌리는 쇼투쿠의 화폐 개주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이 정책은 심각한 디플레이션을 초래하였다.하쿠세키는 시게히데 때 폐지한 간조긴미야쿠(勘定吟味役)라고 하는 회계 감사직을 부활시켜 다이칸(代官)의 부정을 조사하게 하였으며, 바쿠후의 관리를 바쿠후 직할령에 파견하여 감찰하도록 하였다. 또한 1715년에는 쇼토쿠 신령(征德新令)을 발표하여 무역액을 제한하였다. 또한 조선 국왕과 쇼군이 대등한 관계임을 나타내기 위해 ‘일본국 대군’에서 ‘일본 국왕’으로 고침으로써 조선 통신사의 접대 의례를 간소화하여 바쿠후의 세출을 줄였다.이 무렵 바쿠후는 막신(幕臣)에게 지불할 급료를 제때 주지 못할 정도로 재정난을 겪고 있었다. 재정정책에도 불구하고 개선되지 않는 이유는 기후 변화에 크게 좌우되는 연공을 들 수 있다. 또한 화폐·상품 경제 체제는 물가 상승을 촉발하여 재정난의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난관에 봉착한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는 개혁의 중심을 넓은 의미의 ‘검약’에 바탕을 둔 긴축 재정에 두어 교호개혁을 시작하였다.요시무네는 자신부터 검약을 생활에 실행에 옮겼으며 체면보다는 실질을 중시하는 정책을 전개하였다. 1721년에 메야스바코(目安箱)를 설치하여 서민들의 정치에 대한 의견을 모았다. 또한 서민을 주요 대상으로 한 법전을 편찬하여 재판이나 그에 따른 형벌의 기준을 마련하였다.요시무네는 바쿠후 재정의 기반인 ‘쌀났다.
    인문/어학| 2006.12.26| 12페이지| 1,000원| 조회(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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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유사의 문헌사료적 고찰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문헌사료적 고찰목 차Ⅰ. 들어가는 말Ⅱ.『三國遺事』의 편찬배경Ⅲ. 史書로서의 『三國遺事』Ⅳ.『三國遺事』의 현대적 의의Ⅴ. 나오는 말Ⅰ. 들어가는 말『삼국유사(三國遺事)』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더불어 한국의 고대를 알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물론 『사기(史記)』의 조선열전과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에서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처럼 한국의 고대를 다룬 중국의 자료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찍이 김부식도 『삼국사기』를 쓰며 한탄했듯이 중국의 사료는 어디까지나 중국이 중심이며, 우리는 이민족 중 하나인 동이의 역사였을 뿐으로 자세하지도 상세하지도 않았다. 중국의 자료 외에 당시 사람들이 직접 쓴 글인 금석문과 고고학적 성과물인 유물과 유적이 남아있다. 이들은 1차 사료라는 점에서는 매우 귀중한 사료임에 틀림없으나, 고대사 전체를 구성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다. 이렇게 볼 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한국 고대사를 구성하고 정리함에 있어 절대적인 자료들이다.특별히 본고에서 다룰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는 다른 점이 있다. 삼국사기는 관찬사서이며 기전체(紀傳體)를 그 체제로 택하고 있다. 또한 삼국의 왕(王)을 시간 순으로 배열함으로서, 삼국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을 한층 수월하게 해 주었다. 또한 집필한 이들이 김부식(金富軾)을 비롯한 유학자들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유교사관에 입각하여 쓰여 졌다.이에 비해 『삼국유사』는 사찬서(私撰書)이며, 구성체제도 일정하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특징 때문에 관찬사서의 딱딱함을 피할 수 있었다. 또 집필자인 일연(一然)은 스님이었기 때문에 유교적 합리사관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 결과 『삼국사기』에서 비합리적이란 이유로 빠진 많은 신화, 향가, 설화 등이 『삼국유사』에 실리게 되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특징을 전제로 『삼국유사』가 가지는 사료적 성격과 가치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한다.Ⅱ.『三國遺事』의 편찬배경1. 일연(一然)의 생애일연은 경주 장산군(현재 경산군)에서 고려 희종 2년, 법랍 71세로 입적했다.2. 일연이 살았던 시대의 역사적 상황일연이 생존했던 13세기는 대내외적인 격동기였다. 일연이 출생하기 전인 1010년부터 10년간 3차에 걸친 거란과의 전쟁 끝에 송(宋)에 대한 국교를 끊고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또한 금(金)나라를 세운 여진족이 거란을 치고 송을 양자강 밖으로 쫓은 뒤 고려에게 군신관계를 요구해 왔다. 당시 고려는 국제정세와 고려영토의 지리적 위치를 고려하여 야만인이라고 멸시하던 여진족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그 후 1231년에 몽고가 고려를 침입하였다. 몽고원수 살례탑(撒禮塔)은 평양과 개경을 점령하더니 경기·충청지방을 휩쓸며 전 국토를 초토화하였다. 그 이듬해 고려는 강화 천도를 단행하고 몽고와 끝까지 싸울 것을 결심, 1259년까지 30년 동안 항전을 지속했다. 그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과 피해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특히 일연이 48세 되던 1253년 『고려사(高麗史)』 기록을 보면 한 해 동안 몽고에 포로로 잡혀간 백성의 숫자가 무려 20만 6,800명이나 되고 살해된 숫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참상 끝에 1270년에 단행된 개경 환도로 고려는 완전히 몽고에 굴복하고 말았다.내부적으로도 문신 귀족정치는 모순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관직의 독점에 혈안이 되었고 농장 확대에 광분하였다.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졌고 농민에 대한 수탈이 자행되었으며 정치기강이 문란해지고 국가의 재정난이 날로 심해졌다. 이러한 모순으로부터 지배층인 귀족과 기층 민중간의 괴리가 발생하였다.고려의 귀족정치의 모순이 극도에 도달했을 때 일어난 것이 정중부(鄭仲夫) 등 무신들의 쿠데타였다. 1170년에 일어난 무신 쿠데타는 최충헌(崔忠獻)·최우(崔瑀) 등에 의해 1259년까지 80년 간 지속되었다. 무인정권 시대는 사회경제적인 면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즉 문신의 학대를 받던 무신이 문신을 호령하게 되었으며 학대에 신음하던 노예·농민 등 하부층의 신분해방 운동이 빈번히 일어났다. 한성, 그 유원한 자주성을 역설하고 있음은 이민족인 원의 압제를 뿌리칠 수 없게 되어 있던 당시의 현실에서는 저항적 민족의식의 표현이었다고 해석된다.즉 일연은 우리 민족이 몽골족에게 굴욕을 당하는 시기에 민족자주의식을 깨우쳐 주기 위하여 그리고 후대인에게 민족혼을 강렬히 심어주기 위하여 『삼국유사』를 편찬했다고 할 수 있다.또 하나의 저항적 민족의식의 표현은 『삼국유사』 전편에 짙게 스며든 불국토(佛國土)사상)이다. 곧 이 땅이 부처와 인연이 깊은 나라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침략해온 야만 몽고족에 비해 우리나라가 문화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삼국유사』에서는 불교를 외래종교라기보다는 민족 종교적 성격이 짙음을 강조하였다. 그것은 사대·모화사상에서 탈피하여 민족주체성을 견지하려는 정신으로 이것만이 당시의 혼란한 민심을 돌이켜 자긍심을 가진 국민정신으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던 것이다.불국토사상의 강조를 통한 몽고민족에 대한 저항의식은 호국불교 사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부처와 깊은 인연이 있는 땅이기에 이 땅은 부처의 힘에 의해 지켜져야 하고 진신(眞身) 즉 불(佛)이 머무는 이 불국토는 마땅히 침략자로부터 보호되어야 했기 때문이다.정리해 보자면, 당시 상황에서 일연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 종교적 소명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 결과 『삼국유사』를 편찬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Ⅲ. 史書로서의 『三國遺事』1. 『삼국유사』의 성격 및 특성1) 사찬서(私撰書)『삼국사기』가 왕명을 받들고 김부식 이하 10여명의 편찬위원들이 편찬한 정사였던데 비해, 『삼국유사』는 일연이라는 개인이 편찬한 사찬서이다. 이 점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체재를 성격이 매우 다른 것으로 만들었다. 즉,『삼국사기』는 중국에 있어서 정사를 편찬하는 표준적 체재인 기전체를 취하게 하였으나, 『삼국유사』는 저자의 관심의 각도에 따라서 자유로이 주제를 선택할 여지가 더 많이 허락되는 체재를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삼국유사』는 저자 하는 형식을 취하였다고 할 수 있다.3) 고대 문화 연구에 풍부한 자료 제공『삼국유사』 에는 수많은 사료가 포함되어 고대문화의 폭과 깊이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이 점이 『삼국유사』의 가장 중요한 특성중의 하나 인 것이다. 『삼국사기』가 유교적 합리성이라는 원칙으로 채록치 않은 불교사상, 신화, 설화, 무속신앙, 고어, 지리 등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대문화의 대상과 그 전승은 설화와 무속신앙 등의 기층문화를 통하여 내려온 것인데, 이를 스스로 부정하게 되면 고대문화의 위축과 왜곡만이 남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향가가 수록된 것은 바로 그 실례이다. 노래들의 많은 부분이 저자의 신앙과 관련된 불교관계가 많다는 인연에서 ‘사설이 비속’함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수록했던 것이 오늘에 와서는 우리나라 문학사상에 빛난 자리를 차지하는 귀중한 자료를 남겨주고 있다.또한 『삼국유사』는 아득한 원시시대를 포함한 우리 선조들의 고대 사회?경제?문화?사상?생활의 단면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소박한 신화와 전설들이며, 오늘날까지도 직접 우리들의 생활문화 속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유서 깊은 민속적 자료들이 풍부하게 실려 있다. 이와 같은 기록들은 우선 오늘 우리나라 고대 사회경제사 연구를 비롯한 원시고고학?원시사상사?민속학 등 연구 사업에 있어서 가장 귀중한 문헌적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이밖에도, 『삼국유사』에는 수많은 우리나라 지명의 고호?속명들과 함께 그의 연기(緣起)를 밝히고 있으며, 향가에 사용된 고어 외에도 왕력에 나오는 인명들의 속칭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고어연구에 참고로 될 수 있는 자료들을 풍부히 제공함으로써 우리나라 언어사 또는 고대지리학 연구에 있어서도 얻기 어려운 문헌적 자료로 되어 있다.마지막으로, 『삼국유사』에는 저자가 불교승려이던 만큼 종래 신라관계 불교사적의 그릇되게 전한 부분을 시정한다는 목적에서 절반이나 되는 부분을 여기에 돌리고 있다. 그러나 저자의 의도와는 달리 이 부분 기사들도 다행히 불교의 교리를 해설하는 불경주석 따위가 아니라 주로는 『삼국유사』를 불교의 원류를 전하려고 찬술한 책으로 평가하고 이단(異端)의 허탄한 설이라 격하시켰지만, 『삼국유사』보다 몇 해 뒤떨어져 저작된 이승휴의 『제왕운기』는 별문제로 하더라도 조선조 초기의 저명한 유학자 권근(權近)의 저작으로 된 『동국사략』도 ‘황탄’과 ‘비리’를 불구하고 대체로 『삼국유사』의 편찬체계를 답습하게 되었다.1484년에 편찬된 서거정(徐居正)의 『동국통감』도 비록 구차스럽게 『외기』라는 편목을 따로 붙여서 이 부분 기사를 별도로 취급하는 형식을 취하기는 하였으나 거기는 역시 삼국 이전의 역사전통을 『삼국유사』의 편찬에 준하여 기술하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기사들을 『삼국유사』로부터 인용하고 있다. 기실 불교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조선시대 사가들도 『삼국유사』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하면서도, 삼국과 신라의 불교관계 기사를 『삼국유사』에 의존해서 상당 부분 보충했다.근대사학에서 『삼국유사』는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 크게 인용되고, 최남선에 의하여 그 진가가 인정을 받았으며, 손진태에 의하여 인류학, 민속학적인 접근방법으로 『삼국유사』가 크게 중시되어 왔다.3. 『삼국유사』의 결함『삼국유사』는 많은 측면에서 귀중한 사료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렇다고 이 책에 결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역대 유학자?역사가들이 논평한 바와 같이 허탄한 기사가 많은 것도 사실이고, 그것이 우점의 조건으로도 될 수 있는 반면에 결함으로 되고 있음도 사실이다.따라서 이 책이 가지는 하나하나의 특징은 그 평가에서 상반되는 두 개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 희귀하게도 저자가 불교승려라는 특징은 유교주의 역사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장점으로 되는 동시에 타방으로는 이 책의 절반부분을 불교관계 ‘유사’로 채운 결함을 가져왔으며, 때로는 저자의 신앙심으로부터 나온 강한 주관에서 우리나라의 고유한 전래설화를 불교색채로 운색함으로써 그 원형을 왜곡한 폐단도 없지 않다.그리고 이 책은 역사전문가가 아닌 한낱 선승(禪僧)의 손으로 다.
    인문/어학| 2006.12.26| 9페이지| 1,500원| 조회(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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