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희곡의 분석·감상< 햄 릿 >>* 특징작품명 : 햄릿(Hemlet)지은이 : 셰익스 피어(William Shakespeare)구 성 : 장막극 (5막 20장), 5단구성(발단, 전개, 위기, 절정, 대단원)배 경 : 12세기경의 덴마크의 의 : 리어왕, 맥베스, 오셀로와 함께 셰익스피어 4대비극 의 하나로 봉건왕조의 부패와 몰락의 징후를 묘사하고, 인간의 심리를 탐구한 성격비극의 대표작품.1. 등장인물(1) 햄릿: 부왕의 독살에 대한 복수의 일념으로 방황과 고통 속에서 살다 죽는 왕자.(2) 거투루드: 남편인 왕을 독살하고 왕이 된 남편의 동생과 결혼하는 부정한 여인.(3) 클로디어스: 햄릿의 숙부로 형의 아내와 간통하고 형을 독살한 뒤 왕이 된다.(4) 오필리아: 햄릿을 사랑하는 재상의 딸로 부친의 죽음으로 광란상태에서 익사함.(5) 레어티스 : 오필리아의 오빠. 아버지와 동생의 복수를 위해 햄릿과 겨루다 죽게된다.2. 작품의 주요내용덴마크의 왕자인 햄릿은 얼마 전 갑자기 죽은 햄릿 왕과 왕비 거투루드의 아들이다. 왕비는 남편이 죽고 얼마 후 왕위를 물려받은 시동생 클로디어스와 결혼하는데, 이는 아들 햄릿에게 있어 부친의 죽음만큼이나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마침내 부왕의 망령이 아들을 찾아와 숙부인 클로디어스가 자신을 독살한 것이라는 말과 함께 복수를 부탁한다. 감수성이 예민한 햄릿은 그 망령이 자신을 미치게 만들려는 악마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복수하기를 주저한다. 그는 숙부의 의심스런 눈길을 피하기 위해 거짓으로 미친 척하며 사랑하는 여인 오필리아에게도 냉랭하게 대한다. 마침 그곳에 유랑극단이 들어오자 햄릿은 숙부를 떠보기 위해 국왕살해의 연극대본을 써서 ‘쥐덫’이라는 작품을 상연케 한다. 그것을 본 클로디어스는 안색이 변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다. 그후 햄릿은 기도를 올리고 있는 무방비 상태의 숙부를 발견하게 되고, 그의 죄를 확신하게 되지만 죽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만다. 어머니를 힐책하던 햄릿은 커튼 뒤에서 엿듣고 있던 오필리아의 아.3.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이 작품은 중세이래 덴마크 사람들에게 구전되어 내려오던 슬픈 왕자의 전설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복수비극, 성격비극, 사랑의 비극, 문제비극, 정치 극이라 보며 여러 관점에서 접근이 시도되어 왔다.햄릿이라는 인물의 특징은 19세기이래 돈키호테의 행동형(투르게네프의 분류)과 대조되어 문학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이다. 햄릿이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도 머뭇거리면서 결행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오늘날까지도 논쟁의 표적이 되고 있다. 그 점에 대해 햄릿이 사색적일 뿐 성격의 담대성이 없었다는 성격적 무능설, 삶에 대한 비판의식이 너무나 예리해 행동이 미처 따르지 못했다는 비관론, 도탄에 빠진 덴마크를 우선 구해야 되겠다는 구국 사명설, 햄릿은 복수를 부도덕이라고 치부하여 고민에 빠졌다는 양심설, 심지어 숙부이지만 지금은 부왕이 된 왕에 대한 시기심으로 어명에 복종하고 싶지 않았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설 등 매우 다양하다. 일찍이 괴테와 콜리지가 지적한 대로 '순수하고 내성적이며 우울한 성격'이라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어왔으나, 금세기에 들어오면서 냉소적이고 공격적인 '강한 햄릿'의 해석이 유력해지고 있다.『햄릿』은 당시 르네상스 무대에서 많이 등장하고 인기를 누렸던 복수 비극의 틀을 취한다. 복수와 정의 문제는 당대 연극의 주요주제 가운데 하나 이나 르네상스 무대에서의 복수는 단순하지 않았고, 고민의 여지를 제공하고 있다. 유령은 클로디어스가 범한 ‘천하무도한 살인’의 진상을 밝혀준 장본인이기도 하지만, 진상의 폭로와 더불어 햄릿에게 두 가지의 비극적 부담을 부과하게 된다. 하나는 ‘그 간악하고 천하무도한 살인을 복수해다오’라고 하는 의무와 다른 하나는 ‘아무리 이러한 행위를 추구하더라도 네 마음을 더럽히지 말라’는 훈계이다. 전자는 윤리나 규범에 저촉되는 야만적인 행위를 충동하는 명령이며, 후자는 야만적인 행위를 경계하라는 당부이다. 이 극의 심각성은 바로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비극적 부담에 있다. 햄릿은 유령으로부극을 연출하게 된다. 에이블(Lionel Abel)은 햄릿이 복수를 천연하는 이유는 그가 극작가 의식을 가지고 형이상학적 명상을 통하여 유령이 제시하는 통속극을 지양하고자 하는데 있다고 지적하였다. 하지만 그는 햄릿이 유령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이유는 유령이 자신에게 부과한 의무에 대한 불만때문이라고 말하고, 햄릿이 유령에게 ‘이 친구’, ‘늙은 두더지’, ‘값진 개척자 양반’ 등의 경멸적인 호칭을 사용하는 것을 그 예로 들었다. 그는 복수의 지연을 원치않는 배역을 자신에게 맡긴 극작가에 대한 불만을 품고, 오히려 극작가를 자기가 연출하는 연극의 배우로 만들고자 한다는 당돌한 해석을 가하기도 한다.『이제 나의 약속에 대하여 적어 두어야지. ‘잘 있거라. 잘 있거라. 나를 기억해다오’이지. 나는 맹세를 했어.(1막 5장)』하지만 햄릿은 복수를 다짐하기도 하며, 사랑하는 아버지의 복수를 실행하지 못한 데 대해 자학까지 하고 있을 정도이다.『아니,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은 녀석인가! 살해당한 아버지의 아들로서 천상지하로부터 복수의 재축을 받고도 창녀처럼 화풀이 험담이나 늘어놓고 종마처럼 아니 남창처럼 저주스런 몰골이 되다니, 참으로 용감한 자로군. (2막3장)』복수의 의무와 정화정신 사이에서 번민은 결론 5막에서 벌어지는 ‘뜻밖의 재판’을 통해 해소된다. 클로어디스는 지난 살인극의 실패로 이중 삼중으로 살인 계획을 세워 햄릿을 살해하려 하지만 신이 등장하여 통속극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도록 인도한다. 거루투스에게 뜨거운 모정을 발동하게 하여 햄릿의 승운을 빌도록 연출하고, 햄릿 대신에 거루투스가 독배를 마시게 하여 클로디어스의 간계를 폭로 시키는 것이다.『아니야, 아니야, 저 잔, 저 잔, 오 사랑하는 햄릿. 저 잔, 저 잔, 나는 독배를 마셨다.(5막 2장)』그 것은 햄릿을 위험으로부터 구출하려는 왕비의 최후의 일언 이었지만, 클로디어스의 독살계획을 고발한 결과가 된다. ‘칼 끝에도 독약을 칠했다고? 그렇다면 독약을 받아라. 자업자득이다(5막2장)’라고 외치며 왕을 1만이 지혜이고 나머지 4분의 3은 비겁함에 지나지 않는다. 도저히 나도 모를 일. 이 일은 꼭 해야 한다고 하면서 입으로만 떠들어 대고 허송세월하고 있으니. 내 그 일을 실행할 만한 대의 명분도 의지도 힘도 수단도 모두 다 갖추고 있지 아니한가…. 참으로 위대한 것은 뚜렷한 명분도 없이 소동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명예가 걸린다 하면 한 오라기의 지푸라기를 위해서라도 목숨을 걸고 당당히 맞서 싸우는 이유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도대체 내 꼴은 뭔가? 부친은 살해당하고, 어머니는 더럽혀지고, 복수를 위해 이성도 정열도 폭발해야 할 지경인데, 결단을 못 내리고 이러고만 있다. (4막 4장)』작품에서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는 핵심적인 주제는 외양과 실제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햄릿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그 속의 상태가 일치하지 않음을 보고 환멸을 경험하는 도덕적 지식인으로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으로 믿어온 모습과 실제의 모습의 괴리감을 목격하고 괴로워하는 주인공으로 묘사할 수 있다. 그 외양과 실제의 차이는 겉으로 정숙해 보이나 햄릿의 기대와는 달리 음탕함을 지닌 그의 어머니를 통해 자각된다.『아 너무도 더럽고 더러운 이 몸뚱아리, 녹아서 이슬이라도 되어 사라져 버렸으면. 이 땅에 자살을 죄라고 못박은 신의 율법만 없었다면... 못 견디겠군, 싫다. 만사가 모두 내게는 진저리 나고 고리타분하고 부질없구나 (중략) 오 얼마나 두터운 가죽을 얼굴에 눌러 썼기에... 그 추악한 잠자리 속으로 그처럼 재빨리 기어들어 갔을까! 있을 수 없는 일. 절대로 잘 될리 없지. 그러나 이 가슴 빠개진다 해도 입은 다물어야 할테지. (1막 2장 ) 』햄릿의 환멸은 그의 첫 독백에서 잘 표현된다. 어머니의 지나치게 서두른 결혼이 직접적인 원인이지만 햄릿의 영혼은 세상 모두에 만연해 있는 부패를 자각해 낸다. 형제 살인이라는 대죄를 저지른 악당이 한나라의 정치 지도자로써 백성의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현실은 더러운 세상이다.햄릿은 다음과 같은 독백을 통해 삶에 대한 그와 같은 성격을 지닌 인물이기에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햄릿의 주어진 상황도 비극으로 만드는 큰 요인이지만, 이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하고 행동하는 인물의 성격이 그 상황에 치명적으로 작용하여 비극을 초래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한다. 따라서 셰익스피어는 단순히 운명의 비극, 상황의 비극, 성격의 비극으로 만들지 않고 이 모든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작용하는 비극을 보여주고 있다.4. 개인적인 감상이 작품을 감상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햄릿' 이라는 주인공의 성격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돈키호테가 저돌적이고 행동을 앞세우는 형이라면, 햄릿은 우유 부단하고 고뇌가 많은 형으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전형적 성격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을 조사하기 전까지는 나 역시 단순히 그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작품을 조사하고 여러가지 평들을 읽어보면서 순수하고 내성적이라기 보다는 냉소적이며 공격적인 성격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다. 애초에 읽을 때 역시 우유부단한 성격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는 느낌이였으나, 조사를 마친 후 다시 읽어 볼 때는 여러 부분에서 강한 햄릿의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의 유령에게 ‘두더지’등 속된 호칭을 쓰는 것도 당시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자신의 계획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하려는 멜랑콜리한 모습으로 보였다. 또한 자신이 미친 사람 행세를 하며 주위를 혼란 시키는 등 성격적인 나약함으로 복수를 지연시킨다기 보다는 철두철미한 계획성을 갖고 있다고 보였다. 숙부의 뒤에서 살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서도 햄릿은 복수를 해야겠다는 감정보다는 때가 아니라는 이성적인 판단을 한 것이며, 오히려 죽어서 천국에 가게 되는 것조차도 막고싶은 철저한 증오심으로 느껴졌다. 당대의 시대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황이지만 지연된 복수로 인해 복수라는 야만적일 수 있는 행위를 윤리나 규범에 저촉되지 않고 이루어 낼 수 있었다.햄릿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진실을 생각하게 하고 다른 감상을 갖게 하는 작품인 듯 하다.년
몽 촌 토 성1. 몽촌토성의 사적지정 및 발굴조사 배경◎ 문화재명 : 몽촌토성 (夢村土城) (제 297호)◎ 분 류 : 성지(성곽)◎ 수 량 : 441,765㎡◎ 높이 : 13~17m)◎ 길이 : 2285m◎ 지 정 일 : 1982. 7. 22◎ 소 재 지 : 서울시 송파구 방이동 88-4 (올림픽 공원 내)◎ 시 대 : 백제시대 초기(4∼5세기)◎ 소 유 자 : 국유 및 사유◎ 관 리 자 : 송파구백제가 고대 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한 한성 백제시대(~기원 후475)의 중요한 거성의 하나로 추정되어 오던 사적이다. 1926년 일제의 고적조사 때 학계에 보고 된 이후 이렇다 할 학술 조사 없이 방치되어 오다가 1980년대에 들어와서 88올림픽 체육시설부지로 확정되자, 그 동안 몽촌토성의 학술적인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던 서울시와 문화재관리국에서 이 토성을 사적공원으로 정화, 복원키로 함에 따라 서울대학교 박물관을 중심으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이성산성이 기대했던 백제의 흔적을 대신 신라 유물을 대거 쏟아내면서 하남위례성의 후보군에서 탈락해버리자 몽촌토성이 백제왕성(하남위례성) 제 1후보로 부상하면서 주목을 받게되었다.조사는 1983년부터 1989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6차례에 걸쳐서 실시되었는데, 1983 ∼ 1984년도의 1, 2차 조사에서는 토성의 기초적인 성격 및 성벽 축조 방법 등에 대한 조사가 실시되었고, 1985년도의 3차 조사에서는 토성지 내부이 대체적인 성격을 알게 되었으나 구체적이고 확실한 성격파악을 위해 1987~1989년의 3년간에 걸쳐 각 지구별 정밀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2. 발굴조사에 의해 밝혀진 몽촌토성1) 토성의 위치와 지형적인 면삼성동 토성과 0.75km, 이성산성과 4.8km씩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중앙적인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또한 비교적 낮은 구릉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약간 높은 곳을 포함하고 있어 한강 일대를 모두 내려다 볼 수 있는 입지조건을 갖는다. 즉 토성으로부터 북으로 암사동을 지나 강변의 토막리와 서쪽으로 잠실을 지나자를 설치하였던 점으로 보아 북쪽으로부터의 침략을 대비한 기지구실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성을 중심으로 한강 북쪽에 아차산성과 풍납동토성, 서쪽에 삼성동토성, 남쪽에 이성산성 등이 있으며 서쪽에는 백제시대 고분군이 있는 가락동과 암사동이 있다. 백제 중기의 웅진성(공주 공산성)이나 후기의 사비성(부여 부소산성)도 북방의 침략군을 경계하여 강 남쪽에 토성을 구축한 것과 같은 지형이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되는 토성이다.2) 성의 형태① 성벽축조방법에 있어서는 표고44.8m의 잔구상 자연구릉을 이용하여 만든 것이어서 구지형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첫째, 흙으로 성벽을 조성하여 만든 토성으로 석성에 비해 성벽이 가파르지 못하여 방위상 다소 불안할뿐더러 튼튼하지도 못하여 자주 보수해야하는 약점이 있다. 하지만 적은 인력으로 단시간에 완성할 수 있으며, 전문적인 기술자를 많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경제성이 뛰어난 건축물이다.둘째, 구지형이 다른 지점보다 낮은 부분은 판축기법과 유사하게 성질이 다른 토양을 교대로 쌓는 성토방법을 이용하여 성벽을 만들었으며, 자연구릉이 연결되지 않은 지점에도 판축기법으로 성벽을 쌓아 양쪽 구릉 말단부가 서로 이어지도록 하였다.셋째, 자연지형이 그대로 성벽으로 이용된 지점이 경우 성의 외벽면은 삭토하여 급경사면과단을 이루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급경사면과 단은 당초의 자연지형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성벽 정상부에서 기저부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2∼3회 정도 반복되고 있으며, 성의 아랫부분에 가까운 단에는 목책을 설치하였다.넷째, 외성 역시 자연지형을 거의 그대로 이용한 것인데, 그 북사면은 본성의 외벽과 마찬가지로 인공을 가했다.② 해자서북벽과 동남벽 아래에서 각각 뻘층이 나와 해자(垓字)가 있었음이 드러났다. 이들 지점은 성벽 정상부로부터는 약 30m떨어져 있는 위치에 있으며 인공 축조라기보다는 성 주위를 감싸 흐르고 있는 한강지천인 성내천의 유로를 이용하여 일부 고쳐 판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흔적으로 , 치성에는 성벽 정상부에 설치되어 있었다. 생토 암반층에 직경40~50cm, 길이 30~90cm의 구멍을 파고 큰 나무를 박아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사이에는 보조기둥을 세웠고, 목책의 높이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2m이상으로 추정된다. 목책은 토축 위에 세워진 것으로 확인되었지만, 판축토 속에서 중국의 육조 청자병을 비롯한 백제토기편이 발견되어 4세기 이후 구릉지 목책에서 토축성으로 개축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④ 망대지몽촌토성의 마름모꼴 평면을 그 동서남북 꼭지점을 기준으로 사분할 때 각 변 마다 1개소씩 배치되어 있다. 서북 성벽상의 망대지는 몽촌토성에서는 가장 높은 곳에 해당되는 표고 44.8m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곳에서는 석촌동, 잠실, 풍납동등 성의 서쪽과 북쪽을 한 눈에 굽어 볼 수 있다. 동북 망대지로 추정되는 것은 북문지와 동문지 사이를 잇는 성벽상에서 가장 높은 지점인 표고 33.4m 봉우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곳은 치성과 연결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서남 망대지는 남문지 서쪽 성벽 정상부 표고33.7m봉우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방이동, 가락동, 석촌동등 성의 서남부 지역을 잘 조망할 수 있다. 동남 망대지는 동남쪽 성벽 가운데 지점 표고37.5m봉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원지형보다 약5m가량 높게 판축토성하여 만든 것으로 확인되었으나, 특별한 시설물은 드러나지 않았다.3) 성의 크기남북 최장 730m, 동서 최장 570m으로 전체적으로 마름모꼴의 형태를 띄고 있다. 성벽의 길이는 정상부를 기준으로 서북벽 617m, 동북벽 650m, 서남벽 418m, 동남벽 600m로 총 2285m에 달한다. 총면적은 정상부를 기준으로 약 6만 7천 평)이나 성의 외벽 하단을 기준으로 하 면 약 9만 3천 평에 달하여 토성 내의 지형적인 요인을 고려해도 대략 8천~1만 명 정도의 인구 수용능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4) 성의 내부중앙의 작은 구릉을 제외하면 비교적 경사가 심하지 않은 상태이며 곳곳에는 높은 대지가 형성되어 있어 많형태로 파서 만든 것이고, 이것이 숫적으로 가장 많다. 두번째는 수혈의 평면형태가 장방형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며, 당시의 지면으로부터는 1m 정도 파서 만든 것(수혈주거지)인데, 이런 형태의 움집 내에서는 주로 말뼈나 철제 무기류가 출토되어, 일반 살림집이 아니라 군사와 관련된 특수한 용도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세번째 형태의 움집은 평면 육각형의 건물지로, 육각형의 짧은 변이 만나는 지점(동남쪽)에 출입시설을 만들고 있다. 간벽의 길이는 6m 가량되고 짧은 벽은 4m 가량된다. 긴 벽에는 기둥구명이 10개씩 배치되어 있는데 각 기둥구멍의 간격은 50cm 내외이다. 또, 짧은 벽에도 4∼5개의 기둥구멍이 배치되어 있으며, 기둥구멍의 크기는 20∼30cm 가량이 일반적이나 모서리의 경우에는 무게를 많이 받기 때문에 더 커지는 경향이 있다.발굴 조사된 4개의 움집터 중에서, 1호는 평면이 장방형인 두번째의 형식이나, 이것이 폐기된 후 2호 주거지가 축조됨으로 인해서 많은 부분이 깎여 나간 상태이다. 3,4호 주거지는 전형적인 육각형 모양의 주거지로 역시 3호 주거지가 폐기된 후 동쪽으로 약간 이동하여 4호 주거지를 축조하였다.)한편 1989년 6차 조사에서는 온돌시설의 건물지, 판축대지, 장방형건물, 적심건물지등의 지상건물지가 발견되어 중요한 유구로 평가되고 있으며 인위적으로 조성된 연못도 2개소 발견되었다.) 적심석을 갖춘 지상건물지는 서남지구 표고 35~40m사이 고지대에서 드러난 것으로, 당시 민가는 모두 수혈주거지로 되어있는 점을 감안하여 볼 때 이 건물의 높은 위상을 짐작할수 있으며, 이는 몽촌토성이 당시 왕성이였을 가능성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판축성토 대지는 위의 적심 건물지로부터 동쪽으로 약25m 가량 떨어진 지점에서 드러난 10×10m의 방형 유구이다. 네변의 방향이 앞의 적심석을 갖춘 건물지 각 변과 평행하게 되어 있어 서로 마주 보도록 배치된 것임을 알 수 있어 일종의 정원과 같은 곳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지당지는 성내서남지구에서 으나 전술한 적심 건물지, 판축대지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그리고 몽촌토성 내에서 사대(비류왕 17년조)뿐 아니라 남당(고이왕28년 조)과 같은 정청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 밖에 종묘나 사묘가 몽촌토성 내에 설치되었으리라는 견해가 있다.)5) 출토유물굽다리잔류, 깊은바리류, 목단지류, 시루류, 발달린 항아리류, 그릇받침류 및 각종항아리와 단지류, 2기의 합구식 옹관 등의 백제 토기류를 비롯하여 무기, 낚시바늘, 돌절구, 그물추, 가락바퀴 등 각종 유물이 출토되었다. 백제 토기류 중 문살무늬와 승문을 새긴 두드림무늬 토기는 백제 건국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원통형 토기는 일본으로 전파된 기대토용의 원형으로 보여 고고학적 의의가 크다.연한 토기와 원통형 토기를 비롯한 백제계는 물론 네귀달린 목단지를 비롯한 고구려 토기로 볼 수 있는 것도 20% 가량이 섞여 있어 고구려 남하 직전까지 백제의 주요거성의 하나였음을 알게 되었으며, 한성 백제 멸망 이후 한동안 고구려에 의해 점령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유물 중 특히 주목을 끈 것은 중국 서진(AD265-316)제로 판단되는 흑갈색 전문 도자(흑갈색 유약을 바르고 동전무늬를 새긴 도자기)인데 이는 몽촌토성이 만들어진 시대를 3세기 중 후반 때쯤으로 끌어 올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기와와 벼루는 일반 가옥이 아닌 궁궐이나 관청, 사원등 공공건물이 있었다는 증거이며 연꽃무늬를 새긴 막새기와와 동물뼈 비늘 갑옷,금동제품, 중국제 도자기와 벼루등도 출토됐다. 또한 당시의 최고사치품이었을 중국제 도자기가 심심찮게 출토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 성이 지배집단의 거처로 백제 초기의 중요 거성의 하나였음은 보여줌은 물론이고, 그러한 문물로 매개되던 당시의 실재 및 그것을 담당하는 정치 엘리트계층의 존재를 말해 준다. 또한 출토된 금동과대금구는 안악3호분 벽화에서 동일한 형태의 과대가 보이고, 무덤의 주인공이 패용하고 있는 것과 매우 흡사한 것으로 보아 고위 관직자에게만 배속되는 고급무관이였을 것으로 본다. 적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