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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평]예언자들
    Ⅰ. 서론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읽고 난 후의 느낌은 오랜 만에 좋은 책 한 권을 접했다는 것이었다. 저자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의 해박하고 예리한 지적은 예언자들 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하는 데 소중한 지로의 역할을 해주었다.저자의 이력과 사상은 언뜻 보아서도 불의한 삶의 정황에 대해 고민하고 때로는 온 몸으로 항거하는 삶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수백만의 동족들이 악의 위대한 영광을 위해 타 죽어 간 불길 속에서 건짐 받은 타다 남은 나무다 라는 그의 독백에서는 차라리 비장함 마저 느끼게 된다. 그의 유대인으로서 그리고 히브리 사상가로서 예언자들을 바라보는 시각과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이러한 그의 사상에 잘 묻어 나있다.본 서는 가볍게 읽어낼 수 있는 그런 책만은 아니었다. 몇 번이고 다시 읽어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어렵지만 책을 읽어 나가면서 가닥을 잡은 새로운 인식은 크게 두 가지였다. 먼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였다. 그 분이 인간을 향해 가지는 관심, 즉 정념의 개념이 그것이다. 그리고 예언자들에 대한 신학적, 인간적 이해의 증진이 그것이다. 이제 이 두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교훈 받고, 깨달은 바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Ⅱ. 예언자들에 대한 새로운 이해예언자들은 악에 대하여 대단히 민감한 사람들이었다. 세상의 평범한 일들, 그리고 세상이 하찮게 생각하는 사소한 악들도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에게는 재앙이 된다. 복지를 해롭게 할 뿐인 작은 불의도 예언자들에게는 사람의 생명이 좌우되는 치명타로 받아들여진다. 예언자들에게는 사소한 불의들일지라도 우주적인 균형에 관계되는 아주 중요한 일이다.예언자는 철저하게 느끼는 사람이었다. 예언이란 하나님이 인간의 아픔을 표현하라고 빌려주신 말이며 착취당한 가난한 자들과 세상의 불경스런 부자들에게 내리신 말이다. 그것은 하나의 삶의 양식이며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만나는 접촉점이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의 말을 통하여 분노 하셨다.예언자들에게는 인간의 형편이야 말로 가장 관심해야 예언을 하고, 받은 것은 고독과 쓰라림뿐이었다. 업신여김을 당하고 망신을 당하고 박해를 수없이 받았다. 그러나 예언자는 그들이 듣든 듣지 않든 말해야 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예언자가 된다는 것은 즐거움이요 의기양양한 기쁨이었다. 오늘날 목회 현장은 극단적인 용어를 빌리자면 비참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예언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목회자에게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아름다운 긍지가 있어야 한다. 이것마저 꺾여 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대 세계에서는 인간의 잔혹함에 항의하는 소리가 드물었다. 권력은 자신을 추켜세울 뿐 그 어떤 초월적 심판에도 무릎을 꿇을 줄 모른다. 어디에서나 정치적 사회의 최후 수단은 물리적인 힘이다. 무기만이 평화를 지킬 수 있다. 인간이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이 말이 격언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칼은 안정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영광과 명예의 상징이요, 축복이며 노래다. 이런 때에 예언자들이 나타나 권력이 최고가 아니며 칼은 추악한 물건이고 폭력은 불쾌한 것이라고 종래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예언자들은 인간의 권력에 대한 애착을 비판하며 전쟁이란 부도덕한 것이며, 쓸데없고 어리석은 짓이라고 주장하였다. 길게 보면 칼은 언제나 정신에 패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깜짝 놀랄 만한 일은 힘의 무능이 저토록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 모든 무기, 동맹 그리고 승전이 최후로 거두어들이는 것은 파멸, 고통 그리고 죽음이다.전장은 언제나 격렬하고 혼란스러우며 싸우는 나라는 서로 상대방을 파멸시키려고 한다. 개인끼리 싸울 때도 속임수, 창피주기 따위가 주도면밀하게 활용되고 있으며 희생자 말고는 아무도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 그 속에서 은밀한 범죄가 자행되고 있는데도 벽 밖에서 볼 때는 아주 조용하다. 그러나 예언자의 귀에는 들린다. 나는 주장하고 싶다. 목회자의 귀에도 들려야 한다고.예언자들은 어느 한 나라가 힘에 의존하는 것을 악으로 본, 인류 역사상 최초의 인물이었다. 한 나라 뿐만 아니라 모든 개인에게 예언자들이 보기에 힘이란 하늘이 부여한 것이다. 제왕들은 하나님의 손에 잡힌 도구들에 불과하고 예언자의 말은 제왕들의 힘보다 더 강하다. 이집트와 아시리아는 파리나 벌레 따위와 비교될 수 있는 하찮은 벌레로 하나님의 눈에 보인다.일반적으로 역사를 이루는 본질과 주체가 되는 요소는 정치, 전쟁, 경제 활동 등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언자에게 있어서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중심 되는 주제이다. 그 밖의 모든 것들은 변두리에 있는 문제들이다. 사람들이 역사를 권력의 시점에서 파악하여 승리냐, 패배냐, 풍요냐 성공이냐의 여부로 역사의 흐름을 판정하는 데 반하여 예언자들은 정의의 시점에서 역사를 파악하여 정의냐 불의냐, 자애냐 폭력이냐의 여부로 판단한다. 우리의 눈에는 역사가 인간의 경험을 기록한 것이지만 예언자의 눈에는 하나님의 경험을 기록한 것이다. 인간의 힘이 역사를 만들어 내는 원재료는 아니다. 역사란 어느 순간에 펼쳐지는 무엇이 아니라 여호와의 심중에 숨겨져 있는 무엇이기 때문이다.사람들에게는 이 땅은 흔들리지 않으며 세계는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 그들은 문명이 계속되리라는 것만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언자들에게는 그런 확신이 없다. 비록 하나님이 아무 일도 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때에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역사 속에 그 분이 현재하심이 늘 표출되지는 않는다. 땅을 경작하는 사람의 일이 좀처럼 우리의 이목을 끌만큼 거창하게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이스라엘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인간이 영접하기 힘든 분이다. 그 분의 능력은 가끔 부재하고 그 분의 심판은 모호하며 그분의 영광은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눈에는 지금 닥치는 것과 장차 닥칠 것이 시대적으로 동떨어져 있는 듯이 보이겠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그 둘이 하나다. 그러므로 역사의 어두움은 빛을 숨기고 있다. 알 수 없는 신비 너머에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 의미는 반드시 밝혀지게끔 되어 있다.장차 형벌을 받을 것이라는 위협은 예언한다.인간들에게 주어진 자유는 하나님에 의해 일시 정지될 수도 있다. 자유는 저절로 생겨난 성향아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값진 선물이다. 그러나 후천적으로 사악해지거나 오만하거나 난폭해 진 사람들은 그 능력을 상실하고 만다. 마음의 단단해짐의 결과는 자유의 일시 정지이다. 죄의 근원은 마음의 굳어짐, 화석화됨에 있다. 한편 그 마음의 굳어짐이 위로부터의 작용으로 더욱 강해질 때 책임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그 분은 인간을 치시고 고쳐주시고 그렇게 함으로써 다시 감수성을 회복시켜 주신다. 마음의 굳어짐이 극에 달했을 때 그것은 절망으로 바뀌고 결국 자만심은 끝장이 난다. 그리고 절망 속에서, 그 무엇도 전적으로 믿을 수 없는 가운데서 기도는 터져 나온다. 굳어진 마음의 어두운 현실은, 밝은 이해의 능력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속에 어둠과 빛을 창조하신 하나께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예언자들의 예고는 그것이 마지막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심판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인간의 행동의 변화로 하나님의 심판에 변화가 온다. 그 어느 말도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당신의 구원하는 사랑을 끝내 덮어 버릴 수는 없다.사무엘이 희생제보다 순종이 낫다고 주장한 데 비하여 그의 뒤를 이은 아모스와 다른 예언자들은 희생제보다 도덕성이 더 근본이라고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예배의 가치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도덕적인 삶에 따라 오는 것이고 부도덕이 판을 칠 때에는 예배가 오히려 혐오스러운 짓이라고 주장했다. 제물과 노래를 바치며 예배드리는 것을 의심스럽게 생각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근본적인 길은 사랑, 정의를 실천하는 데 있다고 강조하였다. 어째서 하나님 예배를 본질로 하는 종교가 인간에게 그토록 정의를 강조하는가? 왜 정의라는 속세의 덕목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 그토록 중요한 것일까? 그 대답은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인생에 차지하는 하나님의 몫이요 인간의 역사에 내기를 건 하나님의 밑천이다. 아마도 그것은 인간의 정념(pathos)에 동정했기 때문이다. 정념은 하나님이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하나님의 기질이라고 헤셸은 정의한다.Ⅲ.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먼저 정념 에 대해 좀더 많은 고찰이 필요하다고 본다. 예언자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어떤 이론이나 관(觀) 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이해가 있었을 뿐이다.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의 상(像)을 구성하기 위하여 우리가 모으는 벽돌들은 대체로 선(善), 정의, 지혜, 하나됨 따위 개념들이다. 그런데 성경에 사용되고 있는 단어들의 빈도수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정념(情念)언 언급하는 말들이 위의 개념들보다 더 많이 나타난다.하나님이 이토록 인간사에 긴밀하게 반응한다는 생각, 그 분은 단순히 지성과 의지만 지니신 것이 아니라 정념도 지니신 분이라는 생각이 바로 예언자들이 가졌던 특유한 하나님에 관한 의식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과 슬픔의 울타리 밖에 서 계시지 않는다. 그 분은 인간의 행동과 운명에 인격적으로 관여하실 뿐만 아니라 그것들로 말미암아 동요되기도 하는 것이다.하나님의 정념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으로, 어떤 객관적인 것으로, 혹은 인간이 마주치게 되는 어떤 궁극적인 것으로 인식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의지의 한 표현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본체라기보다는 기능이다. 신성한 존재의 속성도, 변하지 않는 질도, 절대적인 내용도 아니다. 그것은 그분의 행위 속에서 나타나는 어떤 상황 혹은 인격적 연루다. 정념의 본질적 의미를 영혼의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식의 심리적 의미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의 영향을 받아 역사를 돌보는 존재로서 하나님이 그 역사 속에 참여하심을 가리키는 신학적 의미로 파악해야 한다.하나님의 정념은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의미와 신비, 형이상학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의 하나 됨이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창조주와 피조물의 상호 관계,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과 당신의 백성 사이의 대화에 진정한 바탕이 된다. 예언자의 예언자 됨은 미래를
    독후감/창작| 2006.01.31| 10페이지| 1,000원| 조회(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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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로교정치행정]정치행정 사례연구
    목사후보생이 된 장로의 신분문제 제기본인은 장로인데 신학을 공부하고자 총신에 입학하기 위하여 목사후보생이 되었더니, 본교회 당회에서 장로가 목사 후보생이 되었은즉 이중직이라고 하면서 장로면직을 하였다. 과연 합법적 결의인가?현장 분석 및 비평정치 제3장 4조 2항에 목사후보생은 목사직을 희망하는 자로 노회에서 자격심사를 받고 그 지도대로 신학에 관한 학과로서 수양을 받은 자이다 라고 하였고, 동 3항에 목사후보생은 개인으로는 그 당회 관리 아래 있고 직무상으로는 노회 관리 아래 있다 고 하였다.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목사 후보생은 목사를 희망하는 자이다. 둘째, 노회의 자격심사에 합격하여야 한다. 셋째, 신학수업을 하는 자, 즉 신학생이다. 넷째, 따라서 수업과 수양, 즉 목사로 양육하는 일은 노회의 관할이나 아직도 학생 신분이기 때문에 소속 지교회의 교인이며 지교회의 교인으로서의 신분을 유지한다는 것이 본조의 뜻이다.따라서 목사후보생은 지교회 교인으로서의 권리, 의무가 있으며 권징도 그 교회가 행한다. 목사후보생은 교회직원이 아니다. 즉 목사후보생이라는 호칭은 교회의 직분이 아니고 단지 목사를 희망하여 신학을 공부하는 중에 있는 사람임을 나타내는 수양적 신분을 뜻할 뿐이다. 그러므로 목사후보생은 교회직분(원)이 아니기 때문에 장로가 목사후보생이 되었으니 이중직이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그러면 안수집사가 목사 또는 장로가 되었거나 장로가 목사가 되었다면 어떻게 되는가? 이 때는 본인의 희망에 의거, 새로운 직분을 받았기 때문에 자연히 구직분의 사면을 전제로 한 것일 뿐 아니라 후사건 우선의 원칙에 의하여 새로운 직분의 장립과 동시에 구직분은 자동적으로 해제된다. 여기서 자동해제 된다 함은 구태여 구직분의 사면청원이 요치 않을 뿐 아니라 면직과는 전혀 다른 개념임을 유념해야 한다.면직이란 범죄사건으로 고소되어 재판절차를 밟아 시벌되는 권징인 것이다(권제 5장 35조). 즉 범죄사건으로 고소자(기소인)가 있을 때 재판회 또는 재판국에서 정당한 재판절차를 거쳐 판결로서만 행할 수 있는 권징이다. 목사후보생을 교회직원으로 오해하고 이중직 운운하여 장로직을 면직하였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목사 후보생은 목사가 되기 위하여 노회의 지도를 받으며 신학을 공부하고 수양을 쌓고 있을 뿐이므로 이러한 면에서는 노회의 지도와 관리를 받으나(마치 학생이 학교에서 선생님의 지도와 감독을 받듯) 개인적 신분은 아직도 지교회 교인이므로 당회 관리 하에 있다. 따라서 목사후보생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 직명이 아니다. 즉 교회의 직분명칭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를 구태여 이름을 붙이자면 교회 직원(항존직 또는 임시직)이 아니기 때문에 준 자를 붙여 준직원이라 하였다(정제 3장 4조).그러므로 장로가 신학교에 입학하였다고(목사후보생) 면직함은 불법, 무효이다. 특히 면직이란, 범죄사실이 있을 때 재판을 통하여서만 책벌할 수 있는 중형인데 장로가 신학생이 되었다고 면직처분하였다면 신학교에 입학한 것이 그렇게도 큰 범죄란 말인가?나의 대안장로로 혹은 집사로 안수를 받은 이후에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신학교에 재학 중인 전도사님들이 계시다. 그리고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장로님(대한교회(김삼봉목사 시무) 장로님)께서 얼마 전에 목사 안수를 받은 일이 있었다.
    사회과학| 2006.01.31| 3페이지| 1,000원| 조회(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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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지서]선지서 설교
    들으라 이스라엘이여!(아모스 4:1-13)1 사마리아 산에 거하는 바산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며 궁핍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2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임할찌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 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을 그리하리라 3 너희가 성 무너진데로 말미암아 각기 앞으로 바로 나가서 하르몬에 던지우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4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5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광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6 또 내가 너희 모든 성읍에서 너희 이를 한가하게 하며 너희 각처에서 양식이 떨어지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 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7 또 추수하기 석달 전에 내가 너희에게 비를 멈추어 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였더니 땅 한 부분은 비를 얻고 한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으매 9 내가 풍재와 깜부기 재앙으로 너희를 쳤으며 팟종이로 너희의 많은 동산과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를 다 먹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0 내가 너희 중에 염병이 임하게 하기를 애굽에서 한것처럼 하였으며 칼로 너희 청년들을 죽였으며 너희 말들을 노략하게 하며 너희 진의 악취로 코를 찌르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 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1 내가 너희 중의 성읍 무너뜨리기를 하나님 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 같이 하였으므로 너희가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 같이 되었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 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2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음을 경고하는 것들이지마는, 그러나 하나님을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는 간곡한 권면을 그는 반복하여 외쳤다.그러나 돌이키지 않는 그들에게 선지자는 언명하기를 마침내 하나님께서 한 나라를 일으켜 너희를 치리니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시내까지 너희를 학대하리라(6:14)했다. 그렇지만 선지자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고 반복했는데 여기에서 아모스의 메시지의 특색으로 하나님을 찾는 그 구체적인 행동은 곧 악을 미워하며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우며 (5:15),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리 는 것(5:24)임을 분명히 한데 있다.이스라엘의 큰 죄악 중에서 아모스가 지적한 것은 특별히 그들의 안일과 사치와 계급적인 빈부의 격차와 학대와 천대와 도덕적인 부패 등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타락의 근원이 되는 그들의 종교적, 신앙적 타락을 그는 탄식하며 슬퍼했다.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냈고, 가나안을 주었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주었고, 계속 선지자와 나시르인을 그들 중에 있게 했고, 그들을 깨우치려고 징계도 해보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와 사랑에 대해서 계속 아무런 보답이 없었고 오히려 더욱 악에 치우쳐 하나님을 반역했다.이스라엘의 이러한 타락은 다시 소생할 소망이 없는 멸망으로 끝날 것을 그는 분명히 말했다. 그 멸망은 마치 썩어져가는 여름 실과가 광주리 안에서 썩어져 가는 것 같이, 또는 무르익은 열매가 광주리에 담기워 시장으로 옮겨가는 것 같이, 그들은 가나안에서 옮겨져 먼 곳으로 팔려가는 것 같이 될 것을 그는 그가 본 환상으로 경고했다(8:1-3).본서의 결론 부분(9;11-15)에서는 앞으로 나타날 이스라엘의 큰 소망을 보여주었다. 그 남은 자들이 다시 고토로 돌아오게 될 것과 황무해진 성읍을 다시 재건할 것을 약속함으로써 아모스의 메시지는 호세아와 그 입장을 같이 한다.그러나 이러한 소망은 육신의 이스라엘의 귀환을 가리켜 맹세하시되,때가 반드시 너희에게 임할 것이다.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가며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을 그리할 것이다.(3) 너희가 성 무너진 곳을 통과하여각기 앞으로 바로 나갈 것이며하르몬에 던지울 것이다. 이는 야웨의 말씀이니라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는 아모스의 날카로운 언사는 이제 이스라엘 사회의 어두운 한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이스라엘 성읍의 불의와 부정, 그로부터 얻어진 사치와 향락을 만천하에 폭로하기 위하여 매우 냉소적인 언어로 사마리아의 여인들 ( 바산의 암소들 )을 지목한다. 이것은 예기치 못한 매우 충격적인 폭로였다. 고대 사회에서 여성의 제한적인 역할을 감안한다면, 본문에서 묘사하고 있는 부녀들은 우리에게 매우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본문은 세 가지 분사구문을 통하여 바산의 암소들로 불리는 사마리아의 귀부인들의 행동을 특징짓고 있다. 첫째로, 그녀들은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는 자들이요, 둘째로 그들은 불쌍한 자들을 짓누르는 자들이요, 셋째는 그녀들의 남편들에게 술을 가져오라고 말하는 자들이다.{) 1절에 사용되고 있는 세 개의 분사 구문 중에, 첫 번째와 두 번째 분사구문은 서로 평행법을 구성하고 있으며, 세 번째 분사구문은 앞의 두 개의 분사가 보여주는 행위에 의해 발생하게 된 결과를 보여준다.그녀들은 남편의 권력과 사회적 지위를 남용하여 사회의 약한 자들, 예를 들어 과부나 고아, 혹은 이국인들을 압제하거나 협박하여 부당한 재물을 축적해 나간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이 축적한 부는 힘이 없고 약한 자들의 고통과 눈물위에 세워진 것들이었다(참조, 사 3:16-4:1). 탐욕스럽고 향락적인 삶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탐닉하기 위하여 그녀들은 안방에서 남편들을 조정하여 사회적 부패를 가속화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희생되는 부류는 말할 것도 없이 무력한 가난한 자들이었다. 부패한 사법기관의 뒷무대에는 이러한 바산의 암소들이 있었고, 폭리를 취하는 부정한 상거래의 큰손들은 사마리아의 복부인들의 것이었다.이러한 사회에 대os, 68.입으로 씹어대는 듯한 비아냥거림이 아모스의 종교제의 비난 가운데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아모스의 냉소는 불경건한 신성 모독처럼까지 들린다: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현대적으로 개작해서 읽어보면 훨씬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당신들은 교회당에 가서 죄를 저지르며, 기도원에 가서 반복적으로 반역하시오. 새벽기도회 때마다 각종 헌금을 드리고, 매 삼일마다 십일조를 드리시구려. 총회에서 제정한 형식에 따라 예배들 드리고, 당신들이 드리는 감사 헌금에 대해 널리 광고하시오. 당신들이 드리는 자원 헌금에 대해서는 자랑하고 다니시오. 여보시오, 교인들이여, 당신들이 바친 헌금들에 대해 떠벌려 자랑하고 다니시란 말이오. 그렇게 하는 것을 당신들은 너무나도 좋아하지 않습니까!아모스의 냉소는 특별히 그의 언어사용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렇게도 열심히 있다면, 아침마다 제사를 드려보시지 그래! 삼일마다 십일조를 드리지 그래! 얼마나 훌륭한 신자들인가! 하나님께서 너희들의 창고에 쌓을 곳이 없도록 터지게 복을 주실 것이야! 안 그런가? 벧엘이나 길갈의 성소에 도착하자마자 그 다음날 일찍 제사를 지낼 정도라면 얼마나 열심있고 경건한 신자이겠는가? 그러나 아모스는 그들의 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그들의 신앙행위는 철저하게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자신의 영적 만족감, 종교적 규율에 대한 성취감, 조작된 종교를 운영하는 즐거움,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픈 과시욕, 아니면 무지에서 나온 광적 열심 등이 그들로 하여금 폐쇄된 세계 안에서 종교행위를 즐기게 한 것이다.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이러한 자아 중심적 열심을 냉소적으로 표현 한다: 그들이 드리는 제사와 십일조를 가리켜, 너희의 희생제사 , 너희의 십일조 라고 부른다. 즉 자신의 이익과 만족을 위하여 조작된 종교행위를 너희가 드리고 있는 것이지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하나님께서 풍자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다! 누군가가 함축적으로 잘 표현하였듯이, 제의는 인간 중심적인에 있었다는 것을 다시금 선지자는 독자들에게 상기시킨다. 누군가 잘 표현했듯이,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를 단순히 역사적 사실이라는 측면에서 되뇌는 일반적 역사가가 아니라, 오히려 과거 역사를 신의 주권과 이스라엘의 응답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는 역사 신학자인 것이다.2) 돌이키기 위한 매질이스라엘을 향해 내리셨던 교육적인 일곱 가지 재앙들을 살펴보면, 먼저 하나님은 자신을 떠나버린 이스라엘에게 진정한 삶의 의미와 존재 의의를 일깨워 주기 이하여 그들이 의지하고 있었던 가장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것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셨다.먹는 일 , 마시는 일 은 인간의 생존을 위하여 가장 필수적인 문제이다. 양식과 음료로 대변될 수 있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은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할 것들이다. 농경 문화권에 살고 있었던 이스라엘은 적어도 누가 비를 내리고, 누가 바람 불게 하고, 누가 태양을 주어 곡식을 자라게 하고, 누가 일용할 양식을 주는가에 관해 잘 알고 있어야만 했다. 아니 그들은 옛적 광야 시절 이 사실을 잘 배우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제 와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바알 문화권 안에 살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사막의 신, 광야의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이다. 누가 그들의 삶을 지탱시켜 주고 유지시켜 주는 신인가? 누가 우리에게 풍성한 추수를 가져다주는가? 비와 바람과 구름의 신으로 알려진 바알인가, 아니면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 야웨 하나님이신가? 그들은 오직 야웨만이 비(7, 8절)와 곡물(6, 9절)과 번영과 평화(10-11절)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했던 것이다.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아는 일에 실패하였다. 아니 하나님은 사람의 삶/생명 유지장치 를 끊어 놓음으로써, 생명의 진정한 유지장치가 창조주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알려주시려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자면, 생수의 근우너 되신 야웨를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무덤]를 판 것이다 (렘 2:13).이제, 아버지의 깨어진 가슴은 깊은 탄식과 좌절로 무너져:9).
    인문/어학| 2006.01.31| 24페이지| 2,000원| 조회(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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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혁주의 영성]사도행전에 나타난 영성
    사도행전에 나타난 영성서 론오늘날 영성 이라는 용어는 키워드가 되어 아즈텍의 영성에서 조로아스터교의 영성 까지 모든 종교 · 문화 분석에 사용되며, 아시아의 대표적인 종교들인 불교, 유교, 도교, 힌두교의 영성 에 대한 논의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종교 밖의 범주로서 공산주의, 과학주의, 세속주의, 자연주의, 실존주의 와 함께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다. 기독교 안에서도 가톨릭의 영성, 동방정교회의 영성, 성공회의 영성, 켈틱의 영성, 해방(민중)신학의 영성, 여성신학의 영성, 남성신학의 영성 등이 논의되고 있다.{) 신학지남 2005년 가을호 p. 9.정리하자면, 오늘날 영성 이라는 용어는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용되고 있으며, 종교 다원주의, 혼합주의, 이원론, 신비주의 , 반지성주의 , 은사주의 , 금욕주의 및 신령주의 등의 다양한 구도 속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일부 복음주의적 서클 안에서는 영성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조차 기피할 정도로 용어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것도 부인 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들은 영성 이라는 단어가 가톨릭의 신비주의 전통을 개신교적으로 변용한 것 으로 보거나, 뉴에이지 운동 에서 감염된 것이거나, 이방종교 혹은 동양종교적 냄새 를 피우는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성 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어휘의미학적 관점에서 볼 때, 모든 단어의 의미는 중립적이며, 그 최종적 의미는 문맥과 문장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영성 이라는 용어도 어떻게 사용되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지 사용자체를 포기하거나 거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둘째로, 기독교 신학이란 새로운 용어 속에 기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새로운 개념과 실천을 창출해내는 작업을 늘 요청하고 있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현실 때문에 긍정적 의미를 배제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오히려 우리는 성경적 관점에서 영성 이라는 용어에 세례를 주고 긍정적인 용~10.2. 저자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또 역사적 문서로 분류되는 다른 문헌에도 이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만약 초대교회의 여러 기록들을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 기록들로 인정할 수 있다면 저자문제는 그렇게 어려운 연구거리는 아니다. 왜냐하면 1세기로부터 이 책의 저자는 누가라고 전해져 내려오기 때문이다.이레네우스는 약 180년경에 남긴 글에서 두 책의 저자를 누가로 소개하며, 이 누가를 바울의 동행이요, 골 4:14에 기록되어 있는 사랑을 받는 의사 , 딤후 4:11에 기록되어 있는 바울의 임종시까지 함께 있었던 누가 와 동일시 했다(몬 24 참조). 이레네우스는 사도행전의 우리 -부분(16,10-17; 20,5-21, 18; 27,1-28,16)도 그 증거로 지적했다. 동시대이거나 아니면 몇 년 정도 늦게 아마도 로마에서 작성된 무라토리 법전도 의사요, 바울의 안내자인 누가를 이 복음서의 저자로 소개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도 이에 동의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누가가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히브리서)를 번역했다고 했다. 오리겐도 비슷하게 누가는 바울 사도에게 인정받은 복음서를 이방인들을 위해 기록했다고 썼다. 유세비우스는 약 350년 경에 누가는 안디옥 출신이었다고 소개하며 바울이 나의 복음 (롬 2,16; 16,25; 딤후 2,8)으로 지시한 것이 바로 이 누가복음이라고 주장했다. 반마르키온 서론으로 알려진 4세기경에 작성된 한 문서에 의하면 바울이 순교할 때까지 그를 따랐고, 하나님께 헌신적이며, 아내도 자식도 없이 혼자 살면서 84살에 성령에 충만하여 베오치에에서 죽은 안디옥 출신의 의사 누가를 저자로 소개한다.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의 곳곳에 당시의 의술에 익숙한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의학술어가 사용되어 있어서 저자가 의사일 것임을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이상의 전통이 저울대에 오르고 그 신실성에 의문이 제기된 것사건이 진행되었던 팔레스틴은 크게 세 부분으로 분할되었다. 중심부인 유대와 사마리아는 처음에는 아켈라오가 분봉왕으로 다스렸으나, 서기 6년경부터 로마의 총독이 관할하는 황제소유 속주가 되었다.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은 서기 39년까지 헤롯 안티파스가 분봉왕으로 다스리는 자치주였다. 빌립은 이두레아와 요단강 건너편을 상속받아 분봉왕으로서 큰 어려움 없이 다스리고 있었다.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서기 33년 4월쯤에 예수님의 십자가형이 집행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 다음 해(서기 34년)에 분봉왕 빌립이 사망하자, 그의 영토는 당분간 원로원 소유인 시리아주에 편입했다. 비텔리우스가 서기 35년에 시리아주의 총독으로 취임하는데 당시의 황제 티베리우스는 빌라도를 불신임하여 빌라도가 맡아 있던 유대, 사마리아 지역의 전 권을 그에게 맡긴다.서기 36년에 유대 지역에서 빌라도 반대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 직접적인 원인은 사마리아에서 출현한 한 예언자와 그의 추종자들을 빌라도가 반란군으로 오인하여 그들이 그리심산에 모여있을 때, 군대를 풀어 강제로 해산시키고 그 주모자를 처형한 것이었다. 사마리아인들이 이것을 부당한 처사라고 강력하게 항의하자 비텔리우스는 빌라도를 파면하고 로마로 가도록 명령했다. 이후 빌라도는 로마에서 처형당했거나 자살했다는 두 가지 전설이 남아 있다.수리아 총독 비텔리우스는 유대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자신의 부하 마르셀루스를 대리이으로 가이사랴에 파견하지만 그에게 전권을 위임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유대, 사마리아 지역은 무정부 상태가 되고 그 와중에 대제사장이 유대사회의 실권자로 등장했다. 더욱 비텔리우스가 요나단을 대제사장에 임명한 후에 유대는 완전한 복고분위기에 휩싸인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서기 36년 첫 박해와 스데반의 순교 사건이 발생한다. 이 박해는 유대인들에 의한 것이었는데, 당시에는 유대인들이 사형집행권까지 행사 할 수 있는 상황으로 변해 있었다.서기 37년에 반헬라적 경향의 티베리우스 황제가 죽고 친 헬라적인 칼리굴라 황제가 즉위하여 대제사장서기 52년 안토니우스 펠릭스가 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어머니 안토니아의 해방노예로 당시 로마의 재무장관이었던 팔레스의 동생으로 로마에서도 막강한 실력자였다. 그는 아그립바 1세의 딸 드루실라와 결혼했는데 이것은 그의 두 번째 결혼이었다. 54년에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죽고 그의 계자인 네로가 황제직을 계승하게 되는데, 이것은 팔라스와 펠릭스에게는 치명적인 위기였지만 황제의 어머니로 인해 명맥은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펠릭스는 독자적으로는 거의 아무 것도 처리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바울 사도를 거의 2년 동안 억류할 수밖에 없었다. 59년에 네로 황제는 어머니를 살해하고 팔라스와 펠릭스 형제를 파면했다.59년에 포르시우스 페스투스가 총독으로 취임하지만 62년에 급사한다. 후임 총독이 취임하기까지의 공백기간 동안 대제사장 아나니아 2세를 중심으로 유대인들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비애국적인 사람들을 박해했다. 그 와중에 주의 형제 야고보가 처형당한다.62년 알비누스가 총독으로 취임하고, 65년에 다시 플로루스가 총독으로 취임하는데 이들은 주로 치부에 주력했다. 특히 플로루스는 성전고에 손대는데 이것이 곧바로 열심당원들이 주동이 된 폭동으로 연결된다. 폭동은 66년에 일어나는데, 처음에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과 같은 엄청난 효과가 있었다. 네로 황제는 67년 베스파시아누스를 대장으로 하여 군대를 파견하지만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68년 네로가 자살하지 로마황실을 둘러싸고 권력투쟁이 일어나는데 베스파시아누스는 전쟁을 일시 중단하고 로마로 회군한다. 처음에 갈바 장군이 황제가 되지만(68년 6월 8일), 69년 1월 15일에 살해되고 오토가 황제직을 계승한다. 그러나 오토는 동년 4월 16일 자살하고 비텔리우스가 황좌에 오른다. 이 비텔리우스와 유대전쟁을 중지하고 회군했던 베스파시아누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는데 결국 베스파시아누스가 승리자가 되고, 69년 12월 21일 비텔리우스를 처형한다.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는 그의 아의 역사적 배경을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하면서도(눅 2,1-2; 3,1-2 참조) 막상 세계사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따른 예수님의 사역과 생애의 필연성이 강조된다. 이 필연성은 누가복음에서는 주로 마지막 고난과 죽음에 집중하여 나타나고 사도행전에는 부활, 승천에 이어지는 성령과 교회의 사역으로 확대된다. 즉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 전에 일어난 일과 비교되고 후에 일어나는 일들로 연장되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과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계속 일하시는 구원역사의 기록이다.3) 사도행전의 내용과 제목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아마도 제목은 복음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본문이 기록된 후 어느 정도의 세월이 지난 다음에 붙여졌을 것이다. 사도행전이라는 제목이 부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사도행전은 전 사도의 전체 활동을 보여주는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로 등장하는 사도는 베드로뿐이다. 후반부로 가면 바울 사도의 활동이 중심이 되지만 사도행전에는 사도란 단어가 그에게 사용되지 않았다. 베드로와 바울의 행적도 전체가 아니라 극히 일부분만 수록되어 있다.저자인 누가는 복음이 어디로 전파되느냐에 따라서 시야를 옮기는 방식으로 복음에 접촉하는 새로운 지역과 이 지역의 전도에 가담한 사람을-사도가 아니더라도-자세하게 취급한다. 초점은 복음의 전파경로에 맞추어져 있다. 복음행전이나 아니면, 이 복음 전파의 주체가 성령이란 의미에서 성령행전이 그 특징에 더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4) 기독교 신앙이 구약신앙의 연장임이 강조된다. 눅 24,25-27과 44-47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구약을 인용하시면서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야만 한다고 설명하셨다.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은 그들이 과거에 주님께 배웠던 이 복음을 전하면서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언급하고 이것을 그들의 시대로 연장하여 적용하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말씀, 그리고 그 결과는 구약의 열매인 것이다풍긴다.
    인문/어학| 2006.01.31| 13페이지| 1,000원| 조회(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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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울서신]로마서
    로마서 Ⅰ개 관1. 저작자와 저작 연대1) 저작자로마서는 처음부터 저자를 바울 로 명기할 뿐만 아니라(1:1), 교회사적으로 로마서의 저작자 문제와 관련하여 다른 심각한 도전들이 제기된 적이 없다.2) 저작 연대사도행전의 보도와 비교할 때 로마서는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마칠 무렵, 다시 말해서 자신이 세운 교회 대표자들을 동반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려던 무렵에 쓰여진 것이 분명하다(행 20:3~6). 누가는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기 전에 그리스에서 3달을 체류했다고 보고하기 때문에, 이곳에 머무는 동안 자신의 편지를 저술했을 것으로 보인다.2. 로마교회의 기원과 성격로마교회의 기원은 모호하고 그 구성원들의 성격 역시 불분명한 상태에 있다. 로마 교회가 베드로에 의해 세워졌다는 전승은 확인할 길이 없다. 지금까지 제시된 견해들 가운데 가장 개연성이 있는 것은 오순절 날에 예루살렘에서 회심했던 로마의 유대인들이(행 20:10 참조) 로마에 돌아온 후에 그들의 회당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그들의 신앙을 전했다고 보는 것이다. 로마 교회는 이런 방식으로 처음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3. 저술 목적1) 선교적 목적바울은 로마의 기독교인들을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 (1:6)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 (1:7)로 부른 바 있다. 그가 이방인의 사도로서 로마의 기독교인들을 방문하여 자신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의 사도직 사명의 본질적 범주에 속한 것이며, 더욱이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로마가 아니라 스페인에 가려는 것이었다. 지중해 극서쪽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복음 안에서 로마의 기독교인들과 교제하고 그들의 후원을 얻으려는 것이 로마서의 저술 목적의 한 부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2) 변증적 목적자신의 주된 사역이 끝나려는 중요한 시기에 바울이 로마 교회를 방문하는 기회를 활용하여 그들에게 자신의 복음과 신앙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설명하고 변증할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바울이 자기변호만을곡시킬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로마서를 보다 포괄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2) 보편적 언약 신학의 전망언약신학에서 신분과 삶은 구분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백성이면(신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하는(삶) 것처럼,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행위에 기초해서 참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적 정체성과 삶의 정체성을 균형 있게 묘사하려고 시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로마서는 옛 언약에서 약속된 언약의 축복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통해서 어떻게 성취되고 있는가를 추적하고 있다.5. 로마서의 장르 구조1) 로마서의 장르로마서는 누구나 잘 알듯이 교의신학 저술이 아니라 로마의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 요 서신 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종류의 서신인가에 있다. 바울 서신들이 그렇듯이 로마서도 역시 상황적인 서신으로 논문 형식의 편지 라고 할 수 있다.2) 로마서의 구조로마서의 중심 부분은 신학적인 논문 형식을 띠고 있어서 그것의 구조가 소위 말하는 교의신학의 체계와 닮은 경향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로마서와 교의신학이 서로 다른 점은, 전자는 상황적 성격을 띤 서신이고, 후자는 특정한 상황과 관계없이 엄격한 논리의 체계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적 서신을 존중하면서 그 안에 나타난 바울 복음의 내적 논리 를 찾아 전체 메시지를 그것에 적응시킬 필요가 있다.Ⅰ. 서론(1:1~17)1. 서론적 진술(1:1~7)서론은 헬라 시대의 서신 형식의 틀을 반영하는 실재의 서신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바울은 본 섹션에서 상세한 설명을 곁들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된 자신을 소개하고 전형적인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인사를 한다.2. 바울의 기도(1:8~15)바울은 본 섹션에서 그의 독자들의 믿음 생활에 대해서 감사하고 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3. 중심 주제의 제시(1:16~17)이방인을 위한 자신의 사도직과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위임받은 것이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는 로마 교회에 복음을 구원의 원리는 서로 모순되지 않으며 그 적용 대상은 모두 보편성의 특징을 지닌다. 심판이 행위에 따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 예외 없이 공평하게 적용된다.2) 율법의 소유가 안전책이 되지 못한다(2:12~16)유대인들은 율법을 자신들의 특권적 신분을 지탱하는 토대로 삼으려고 했지만 율법은 그것을 범한 자들에게 사망과 정죄라는 공평한 운명을 선고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단지 율법을 소유한 언약 백성이라는 이유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3) 유대인의 특권적 신분도 안전책이 되지 못한다(2:17~24)유대인들은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의 지극히 선한 뜻을 분별하고, 빛과 훈도와 선행이라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기에 함의된 사명을 망각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의지하고 자랑하던 율법을 범하고 말았다. 더욱이 그들이 율법 백성답게 살지도 못하면서 율법을 자신들만의 배타적 특권으로 삼고 하나님을 그들만의 배타적 하나님으로 만든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만드는 행위이다.4) 할례도 안전책이 되지 못한다(2:25~29)본 섹션은 할례 의식도 유대인들에게 안전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피력한다. 할례는 유대인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 된 사실을 표현해 주는 중요한 외적 의식이었다. 그것을 행하는 사람은 언약 백성 된 신분을 얻게 되고 또한 언약 백성으로 율법을 지킬 의무를 짊어지게 된다. 유대인들의 오류는 율법을 준수하지 못하는 때에도 할례가 그들의 특권을 유지시켜 주고 심판 때에 그들의 우월한 지위를 보장해 준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율법이 순종되지 않는 곳에서의 할례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강하게 주장한다. 왜냐하면 할례는 내면의 실재를 외적으로 표시해 주는 의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5) 하나님은 여전히 성실하신가?(3:1~8)바울은 대화체 문장을 여전히 사용하지만 점차로 스스로 던진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을 취한다. 1~4절은 하나님의 성실성 문제를 다루고 5~8절은 유대인 논적자들이 제기한 반론을 다룬다.율법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범죄한(3:21~4:25)1. 믿음으로 경험하는 하나님의 의(3:21~26)바울은 자신의 복음이 죄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인류의 절망적인 상황에 선포되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바울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인간의(아담의) 불의로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신자들 속에서 새로운 구원 행위를 하고 계신다는 기쁜 소식을 담고 있다.2. 논쟁적인 주제의 제기(3:27~31)바울은 이신칭의 복음이 인간에게 자랑의 여지를 남겨 놓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믿음만이 새로운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유일한 요소가 되었다. 이신칭의 복음만이 온 인류의 하나님이라는 보편적 유일신론을 정당하게 드러낼 수 있다.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온 인류의 창조자요 심판자로 생각했지만 그들의 편협한 민족주의적 신관은 유일신론의 보편적인 성격을 해치고 말았다. 새 언약 시대를 지배하는 것이 믿음 과 성령 이라면(5:1~4; 8:1~4)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하여 그에게 헌신하며 그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이 율법에 계시된 거룩하고 의로운 신의지의 내용을 성취하고 굳게 세운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3. 아브라함의 칭의 경험의 원형(4:1~25)본 섹션은 창세기 15:6에 대한 바울의 해석을 담고 있다. 바울이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는 핵심적인 과정에서 아브라함 전승을 부각시킨 것은 아마도 바울 자신과 유대인들 사이에 그에 관한 해석에 있어서 결정적인 이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4장에 실린 바울의 논의는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첫째, 바울은 유대인들의 이러한 배타적 사고방식에 직면하여 창세기에 나타난 아브라함 전승을 전격적으로 새롭게 해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 믿음은 순종의 행위로 논증되는 어떤 것이기 때문에 믿음과 행위를 분리시키는 것은 바울 당대의 유대인들에게 불가해했을 것이 분명하다. 셋째, 바울의 아브라함 해석 중에 중요한 한 특징은 그가 구속사적 독특성을 지닌 대표적 인물이란 사실이다.Ⅳ. 은혜 아래 있는 신자의 새로운 신분(5:1~8:39후로 인류의 죄악된 상황이 아무리 크고 깊다고 하여도 그것을 극복하지 못할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은총의 승리가 확보된 것이다.3. 죽음에서 벗어나 부활의 생명을 경험한 신자(6:1~23)1)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산 신자(6:1~11)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우상 숭배와 온갖 죄악들을 범한 인류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진노의 심판 아래 처하게 되었다. 타락한 인류의 운명을 짓누르는 죄와 사망의 폭군적 통치는 그들의 조상 아담의 불순종의 한 행위에 기인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이러한 절망적 상황을 방치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아담의 후손들을 건져 내는 결정적인 구원 행동을 하셨다. 그것은 자신의 피조물에 대한 성실성의 표현을 나타낸 것으로써 이제 둘째 아담 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서 구체화되었다.2) 새로운 순종의 책임 아래 있는 신자(6:12~23)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은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윤리적 삶을 동반한다. 구속의 은총으로 주어진 새 생명은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는 삶 (11절; 갈 2:19)으로, 죄와 싸우는 영적인 전쟁에서 자신의 지체를 마음으로 순종하는 삶 (17절)으로,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는 삶 (19, 22절)으로 나타나는 것이 당연하다. 순종의 삶, 성화의 삶은 자신 속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참 부활의 생명을 가진 경험에서 귀결되는 생명의 징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순종의 삶, 성화의 삶이 미래에 주어질 영생의 축복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4. 율법, 죄, 사망의 지배 아래 있는 인류(7:1~25)1) 율법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와 연합함(7:1~6)바울은 본 섹션에서 사망만이 율법에 매여 있는 상태를 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결혼 생활에서 끌어온 유추를 통해 설명한다. 남편이 죽어야 그 배우자가 남편에게 매인 데서 자유할 수 있는 것처럼 신자도 율법에 대해서 죽어야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한다.
    독후감/창작| 2006.01.31| 7페이지| 1,000원| 조회(1,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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