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체육의 개념생활체육이란 용어는 1985년을 기점으로 발생한 국민복지 체육의 새로운 개념이다. 즉, 1985년을 전후로해서 행정 부처에서 복지사회 실현이라는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국민 체육진흥 정책 시행의 추진 내용을 개념화한 신용어이다.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생활체육이란 지방 자치 단체가 해당 지역 주민이 체육에 대한 욕구 및 수용에 대응하고 그 활동을 사회적인 차원에서 보장해 주기 위한 정책을 수립하여 그것을 시행하는 내용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으로 규정할 수 있다.생활체육의 필요성이제 2000년대를 앞두고 엘리트스포츠를 계속 발전시켜 나가는 가운데 온 국민이 생활속에서 즐길 수 있는 생활체육을 확충시켜 나가는 단계에 들어갔다. 그렇다면 엘리트스포츠에서 손을 땔 수 있는 입장은 아니고 오히려 국민의 성원으로 성공한 올림픽의 위업이나 각종 국제대회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더 많은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고, 따라서 체육대회는 엘리트스포츠의 전담 기구로 계속 유지?발전되어야 한다.반면에 생활체육은 단순한 체력 육성이나 건강 유지 수단일 수 만은 없다. 체육을 통해서 허약해지고 있는 시민 체력을 증진시켜야 하겠고, 또한 점차 약화되어가고 있는 지역 공동체 의식을 회복시킴으로서 증가 일로에 있는 사회악을 근본적으로 타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청소년의 건전한 육성과 사회 운동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생활체육의 활성화를 위해 그 추진기구의 내실성과 투자는 필연적인 것이다.시대의 조류에 따라 현재까지는 어쩔 수 없이 소수 정예주의에 입각한 선수 육성에 치중하여 이른바 경기력 향상 중심의 엘리트스포츠나 흥미 본위의 프로스포츠에 관심을 기울여 온 우리들에게 이제 스포츠는 어느 특정의 개인이나 집단을 위해서 존재하였던 스포츠에서 점차로 “ 모두를 위한 스포츠 ”즉, 대중 스포츠로 전이되고 있는 셈이다.생활체육의 방향과 과제일찍이 유럽을 중심으로 TRIM 운동(일상생활에서 간편하게 할 수 있는 건강 부족 해소 운동)이나 SPORT FOR ALL 운동이 전개되었한다국제올림픽위원회에서는 95년 4월 몬테카를로에서 있었던 올림픽 집행위원회의에서 댄스스포츠 경기종목의 스포츠적 요소와 운동과학적 요소를 인정하여 국제댄스스포츠연합회를 I.O.C가맹 국제기구로 잠정 승인하기 에 이르렀고, 동계올림픽의 아이스댄싱과 같이 하계올림픽 종목으로서 댄스스포츠를 채택하려고 하는 것은 댄스스포츠의 스포츠적 특성과 예술적 특성, 운동효과적 측면에서의 운동생리학적 특성, 그리고 레크리에이션적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스포츠적 특성댄스스포츠의 발달과정이나 개념의 변천과정에서 유우봉은 현대적 개념의 댄스스포츠 는 “남녀가 한 쌍을 이루고 음악의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는 가운데 신체적 움직임을 통해 움직임의 미적가치를 창조하는 스포츠”라고 정의하였고, 대한스포츠댄싱연맹에서는 댄스 스포츠를 “예술성이 풍부한 실내스포츠인 동시에 생활체육의 한 분야라고 정의하였다. 미학적으로 예술의 개념은 창조적 미적 가치의 정서적 표현으로서 사회적 기능을 지닌 하나 의 문화적 활동으로 규정되고, 무용에서부터 스포츠에 이르는 모든 형태의 체육은 근본적으로 문화적 산물이라고 규정한다. 이와같은 규정에 의하면 댄스 스포츠는 넓은의미에서 움직임 예술의 범주에 속하고, 오랜 역사를 지니고있는 문화적 산물로서 현대에 이르러 자연스럽게 부각된 스포츠의 한 종목이다.스포츠의 핵은 운동이다. 운동 중에서도 대근육을 사용하는 활발한 신체활동이다. 댄스스포츠는 대근육을 사용하는 활발한 신체활동이며, 다른 커플보다 잘 추기 위해서 서로 협동하는 가운데 경쟁해야 하는 스포츠의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가치를 고루 갖추고 있는 훌륭한 스포츠이다. 국제댄스스포츠연맹 회장인 하그만은 “댄스스포츠는 예술성 보다는 스포츠성이 강하고, 기계공학적인 요소 보다는 생체역학적 요소가 많으며, 흥행적 효과 보다는 교육적 효과가 큰 올림픽 스포츠로서의 특성을 갖추고 있다”고 강조 한다. 하그만의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 세계 각국이 체육을 통한 국민의 체력 향상과 스포츠를 통한 국제간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 최선의 것이 아니다. 이는 스스로 행하고 운동이나 율동의 쾌감을 느끼고 즐기는 것인 만큼 관람용이 되어서는 안 된다. 댄스 자체는 자유이며, 각 쌍이 자연스럽게 행하는 것이므로 각 자의 기량과 체력에 맞게 알맞은 무도를 하면 된다. 따라서 댄스를 통한 성취감과 표현력 확대는 교육적 의의로써 현장 교육에서는 얻기 어려운 귀중한 소득일 것이다.셋째, 댄스스포츠는 사교를 목적으로 한다.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친목을 겸해서 단독 또는 각종 집회에서 개최된다. 이러한 집회에서는 약간이라도 댄스를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의 중요하다. 특별히 잘 하지 못하더라도 소박하고 명랑한 마음으로 행하여져야 하며 춤을 추고 난 후 구성원간에는 한 집단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생기게 되므로 참가자들의 자연스러운 친목 도모에 일익을 담당 할 것이다.넷째, 댄스스포츠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즐길 수 있는 적당한 운동이다. 댄스는 친목을 꾀하고 사교적인 오락을 의미하며 동시에 여가 선용의 한 방법으로 사계절 전천후 운동이 되고 있다. 바른 자세 교정과 체력에 맞춰진 운동량은 기술 연마와 함께 싫증나지 않는 지속적인 운동이 되게 할 것이다.다섯째, 댄스스포츠는 음악과 함께 행하여지는 예술이다. 10장르의 다양한 음악은 때론 클래식으로도 혹은 팝 뮤직으로도 접목시킬 수 있는 폭넓은 음률인 것이다. 따라서 뛰어난 음감과 함께 박자, 리듬까지 익힐 수 있는 이점을 안고 있다. 또한 예술적 감성의 계발에도 효과적인 교육 수단이 될 것이다.이 밖에 이성과의 건전한 만남은 사춘기 청소년들에게 바람직한 교제 문화를 제시해 줄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예의를 갖춰서 이성을 대함으로써 이성 교재에 관한 에티켓 지도도 자연스럽게 이뤄질 것이다.-사회적 요인댄스스포츠 참여자들은 자발적으로 동호인 집단에 참여하게되며, 이에 따라집단의 일체감과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이러한 결과로 개인은 사회적적응에 기여하게 된다.-휴식적 요인댄스스포츠는 원기를 회복하고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을 준다. 따라서 생산활동스와는 구별되는 이론적이고 정통적인 표준화된 댄스라고 정의 내를 수 있다.댄스스포츠는 한 쌍의 남녀가 한 조를 이루어 댄스 하는 것이 특징적이고 음악에 맞추어 신체활동을 함으로써 얻는 정신적 즐거움과 그에 따른 육체적 건강, 사교활동을 통한 예의범절을 몸에 익힘으로써 개인의 행복과 생활만족의 향상을 통한 삶을 질을 높일 수 있는 건전한 여가활동 체계 중의 하나이다.댄스스포츠가 여러댄스들의 움직임의 다양한 장르들 중에서 방콕아시안 게임에 시범 종목으로 채택된 사실만 직시해 보아도 스포츠적 특성은 물론, 무용과 음악 그리고 연극적 요소가 함께 접목된 스포츠예술적 틀로 정형화된 시간예술, 공간예술, 시각예술, 지각예술이 연계된 종합예술임이 증명되고 있다.또한 음악적 리듬에 맞추어 신체활동을 통한 동작으로 자세와 미적인 표현을 극대화시킨 예술성이 풍부한 실내스포츠인 동시에 생활체육의 한 분야이며 전통에 의한 예의와 질서로 이루어진 가치관을 지닌 인격표현의 선진형 윤리문화이다.댄스스포츠의 스포츠적 가치댄스스포츠는 넓은 의미의 움직임 예술로 예술성보다는 스포츠성이 강하고 운동 기능적 요소가 많은 올림픽 스포츠이다. 댄스스포츠의 기술은 주로 전진과 후진, 회전으로 구성되며 가장 중요한 운동적 요소는 평행성이다. 남녀가 서로 자기의 중심을 잡고 균형을 유지하는 가운데 공간에서 커플의 중심 축을 이동하기 때문에 운동 기능적 측면에서 평행성을 길러주는 데 가장 적합한 운동이 된다. 또 전?후진의 워크를 반복하면서 다리 근육을 골고루 발전시켜주는 특성이 있다. 댄스스포츠는 근력뿐 아니라 심폐 기능의 향상에도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 독일 후라이버그 대학의 연구팀은 1986년 올림픽 800m 중거리 선수, 사이클 선수, 수영 선수와 댄스스포츠 선수간의 근력과 호흡률 차이를 비교?분석하였으나, 이들 간에 큰 차이가 없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사실 10종목에 출전한 선수들이 결승까지 60분(2분×10종목×3회)간 뛴 운동량은 강도 측면에서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한다.댄스스포츠의 종류볼도 연구가들에 의해 1948년경에 지금과 같은 체계를 잡게된 것이다. 룸바의 음악은 2/4 또는 4/4 박자이고 1분간에 25-30소절의 시간이 소요된다.-차차차차차차는 1943년 쿠바의 유명한 지휘자가 기존의 룸바 음악에 관악기의 강한 리듬을 가미해서 새로운 음악을 창작함으로써 빠르고 신나는 감각의 맘보를 고안해낸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차차차는 봉고 드럼이나 마카라스를 두드리는 소리 자체가 경쾌하고 신나서 라틴 아메리카 댄스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춤으로 인정받고 있다. 차차차 음악은 4/4 박자이고 1분간에 32-33소절의 시간이 소요된다.-자이브1927년 뉴욕의 흑인 거주지 하렘이라는 곳에서 재즈음악의 일종인 Swing 리듬에 맞추어 추어진 신나는 춤으로 1936년에 미국 전역에서 인기 절정에 달했으며 2차 대전 중 미 직업군인에 의해 유럽에 퍼지게 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인기가 계속되었다.자이브의 음악은 4/4박자이고, 1분간에 40-46 소절의 템포의 연주가 필요하다.-삼바삼바춤은 강렬하고 독특한 율동을 지닌 생동감 넘치는 춤으로 아프리카에서 유래되었으며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던 흑인 노예들에 의해서 브라질 북부 바히야 지방에 보급되어 마침내 브라질의 대표적인 춤이 된 것이다.처음으로 서양인들의 시선을 끈 것은 연례행사로 열리는 리오데자네이로의 축제에서 였는데, 지금도 브라질에서는 삼바 학교에서 체계적인 춤의 연구에 열중하고 있다.삼바의 음악은 2/4 또는 4/4 박자이고 1분간에 48-56소절의 시간이 소요된다.- 파소도블레파소도블레는 스페인에서 유래되었으며 기본 스텝은 행진곡으로 투우를 묘사한 춤으로서 남자는 투우사를 나타내고 여자는 투우와 망토를 상징한다.파소도블레는 유럽의 남쪽 프랑스, 스페인, 포루투갈 등지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리는 춤이다. 스페인어의 파소는 스텝을 의미하고 도블레는 더블을 뜻하는 것으로 두배의 걸음이라는 의미로 빠르고 강한 동작을 말한다.파소도블레의 2/4 또는 4/4 또는 6/8 박자이고 1분간에 60-62소절의 시간이
느낀점바우하우스나 베르크분트는 1910년대에서 1940년대에 발생했던 것이다..이렇게 다른나라에서는 이 두가지 말고도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어왔는데..그때 우리나라는 전쟁으로 힘들었고 여전히 한복과 기와집이 즐비했었고 전쟁으로 인해 더욱 황폐해졌을 때였다..100년도 안되서 많은 문화가 들어왔으니..그래도 지금 디자인을 배운다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바우하우스를 조사하고 읽고 쓰고 또 스켄을 위해 작품을 보면서 이런 곳에서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바우하우스는 나치정권 때문에 30년간 지켜오다가 44년에 결국 폐교되었지만 그 후에 생겼다면 지금도 남아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 뒤에 생긴 디자인연구소처럼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사상과 목적과 신념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자신을 발전시켰다는 것에 대해 정말 존경스럽다. 다른사람이 추구하는 것을 그대로 배워서 따라가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것들이 도움이 되어서 앨버스같은 사람처럼 새로운 장르의 선두자가 생기게 된 것을 보면 영향을 받아서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것에 대해 신중히 생각해 보았다.베르크 분트..독일공작연맹은 책을 구하기 힘들어서 동네 도서관에 가서 책을 찾아보았다. 독일공작연맹은 유겐트스틸과 비슷한 것이라고 되어있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최고의 지혜로 최고의 것을 창조한다는 것에 대해 감동을 받았다. 바우하우스와 똑같이 나치정권 때문에 해체되었지만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결국 우수한 것은 계속 남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바우하우스와 베르크분트에서 계속 나오는 그로피우스가 웬지 엄청난 인물로 느껴져서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대단한 사람인 것은 확실한 것 같다.베르크분트의 역사독일공작연맹은 1907년 10월5일부터 6일까지 뮌헨에서 창립총회를 열고서 설립되었다. 이 공작연맹은 공업, 상업, 예술분야에서 최고의 지혜를 모아서 공업적으로 대량생산된 제품과 건축의 품질을 개선시키는 것을 주요목적으로 하여 창설되었다. 따라서, 이 단체는 건축실무에 종사하고 있는 건축가는 물론이고 공업용, 상업용, 주택용 제품을 디자인하거나 생산하고 있는 디자이너, 공예가, 기업가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이 조직을 추진한 중심적인 인물로는 자유정치가이자 사회이론가로서 독일의 문화적, 경제적 패권주의를 주창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인 프리드리히 나우만, 벨기에 출신의 아르 누보의 건축가로서 1890년대에 독일로 이주한 앙리 반 데 벨데, 독일의 건축가 헤르만 무테지우스 등이었다.무테지우스와 반 데 벨데는 19세기 영국의 미술공예운동의 지도자인 윌리엄 모리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무테지우스는 모리스의 사상을 확대시켜서 기계를 이용함으로써 질이 높은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또한 형태가 기능에 의해서만 결정되어야 하며 장식은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공작연맹은 창설된 이후에 두가지 파벌로 양분되고 말았다. 그중하나는 무테지우스가 대표하고 있으며 기계적인 대량생산과 디자인의 표준화를 가능한 한 최대한 이용하자고 주장하고 있었다. 반면, 반 데 벨데가 대표하고 있는 다른 파는 개개인의 예술적 표현의 가치를 주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두 파의 대립이 가장 첨예하게 나타난 것은 1914년 쾰른에서 개최된 공작연맹 연례대회에서 였다. 결국 이 대회에서 무테지우스의 입장을 채택하게 되었다. 독일 공작연맹의 영향은 곳곳에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켜 오스트리아의 오스트리아 공작연맹, 스위스, 스웨덴, 영국 등 비슷한 조직이 생겨났다. 공작연맹의 영향력은 쾰른에서 열린 산업미술 및 건축전시회를 계기로 더욱 확산되었다. 전시된 건물들 중에는 강철, 콘크리트, 유리를 사용한 근대 건축의 가장 유명한 본보기가 되는 반 데 벨데의 극장, 발터 그로피우스의 관청건물, 도이츠 기계공장 파빌리언 및 차고가 포함되어 있었다.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연맹의 활동은 잠시 중단되었지만 종전 후 슈투트가르트에서 의미있는 전시회를 열어 자신의 존재를 재확인했다. 독일 건축가 루트비히 미스 판 데어 로헤가 주관한 이 전시회는 그당시 유럽의 일반 주택 건축의 발전을 요약하고 있었다. 무테지우스의 사상을 받아들인 미스, 그로피우스, 르 코르뷔지에와 같은 전시참가 건축가들은 고도로 표준화된 재료와 디자인으로 대규모 주택을 값싸게 지을 수 있게 해 주었다. 1930년 그로피우스가 파리에서 열린 산업예술과 건축전시회에서 라슬로 모호이 노디, 마르셀 브로이어, 헤르베르트 바이어와 함께 주관했던 공작연맹작가 전시품은 그 가치가 드높게 인정되고 재강조되는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독일 나치정권이 등장한 1933년 연맹은 해체되었으나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되살아 났다.베르크분트의 목적독일 공작연맹의 본래 목적은 예술계, 공예계, 산업계, 무역계등의 대표를 선출하고 산업예술의 최고의 품질을 확보하기 위하여 최대한 노력을 기울이고 이를 위한 중심체를 만들려는 데 있었다.미술이나 공예나 실업등의 각종영역에서 최고의 지혜를 모아서 실제 생활에서 사용하는 독일제품의 질을 고급화시키는 것을 주요목표로 내세운 것이다. 이러한 목표 때문에 이 단체의 창립회원으로 산업가, 건축가, 예술가, 장인, 정치가 등 각계각증의 전문가들이 다양하게 포함되어 있었다.베르크분트의 초기활동동작연맹은 1907년 무테지우스의 제창으로 설립된 이후 1908년부터 뮌헨을 시작으로 해서 연 1회 정기적으로 각지에서 집회를 개최하고 공예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와 제안에 대하여 활발하게 토론하였다.공작연맹이 창립된 1970년에서부터 쾰른 공업미술박람회가 개최된 1914년까지는 초창기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에 공작연맹은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몇 가지의 새로운 발전을 보이고 있다. 베렌스, 페루치히, 그로피우스 등이 설계한 공장, 무테지우스가 설계한 전원주택, 드레스덴 근교에 건설된 전원도시 헤레라우 ,헤레라우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독일수공예공방이 제작한 가구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1912년부터 매년 발간되기 시작한 공작연맹연감에 게재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디자인 이론의 문제에서 볼 때 공작연맹이 갖는 의미는 디자인을 양질의 생산이라는 각도에서 파악하였다는 점과 이것을 통합적인 방법으로 발전시키려고 하였다는 점 등 두가지라고 할 수 있다. 1910년 공작연맹의 강령은 양질의생산이란 단순히 재료나 기술, 재료 면에서의 질, 또는 단순히 미적, 형식적인 면에서의 질뿐만아니라 이러낳 모든 질의 통합이라고 밝히고 있다.이러한 목적을 수행하는 방법이나 수단에 있어서 공작연맹은 그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모리스나 미술공예운동이 취한 입장과는 전혀 다른 방향을 채택하고 있다. 모리스가 기계를 부정하고 수공에 의한 작업을 통해서만 제품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반면에, 공작연맹은 수공에 의한 작업과 기계에 의한 작업을 모두 포용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공작연맹은 처음부터 기계와 타협하였으며 질이 좋은 제품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으로서 기계를 받아들였다.베르크분트의 대표 작가들헤르만 무테지우스그로스뉴하우젠 출생. 베를린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1896~1903년 런던의 독일대사관 직원으로 있었다. 당시 유럽 제일의 수준이었던 영국 건축에 관하여 “영국 주택”이라는 책을 써서 독일 건축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즉물성과 합리성을 앞으로 올 디자인계의 핵심이라고 예측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디자인의 질의 향상이 국가적 이익을 가져온다는 확신에서 1907년 건축가, 디자이너, 기술자, 경영자들을 규합한 “독일 공작연맹”을 제안하여 이를 실현시켰다. 1914년의 쾰른 총회에서의 논쟁에서 개성을 존중하는 반 드 벨데와 날카롭게 대립하여 디자인의 “통일과 규격화”를 주장하였다. 이것은 근대 건축국제회의이념으로 계승되려고 하였으나 그 직전에 죽었다.앙리 반 데 벨데벨기에 출신의 화가,건축가,디자이너,저술가,이론가로 윌리암 모리스의 사상에 심취하고 피터 베렌스에영향을 주었으며 후에 그가 세운학교가 바우하우스의 시초가 되었다.꽃의 작업장 을 의미하는 브루멘베르프의 이 주택은 반 데 벨데의 디자인 이론을 입증하는 모델로 창호,가구,카펫,커튼에서부터 식기류에 이르기 까지 모든것을 전통적인 형태의 모방에서 탈피하여 합목적성이 있는 종합적인 디자인으로 완성하고 있다. 규격화를 주장했고 보다 획일적인 접근방법을 내세우는 무테지우스와 대립하였다.리하르트 리메르슈미트독일 건축가. 뮌헨에서 화가로서의 수업을 마친 후, 윌리암 모리스와 미술공예의 영향을 받아 가구와 섬유, 유리, 융단 등을 디자인하였고, 1900년 무렵에는 건축도 디자인하였다. 1897년 '뮌헨 미술과 수공예공방협회'의 창단 멤버의 한 명이었으며, 1920-26년부터는 퀼른 직업학교의 교장직을 맡았다. 그의 건축은 고전적 스타일을 수용하였으며, 디자인 작품은 미술공예 가구에서부터 아르누보 양식의 도자기공예품과 바우하우스의 전형인 단순성을 지닌 기계로 제작된 공예품에 이루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나 있다. 비록 회화를 공부하였으나 건축가가 되어 많은 건물과 실내디자인, 전원도시계획안등을 남기고 있다. 그는 고전주의에 의해서 고무된 양식을 지향하고 있었다.피터 베렌스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화가를 지망하여 고향에서 미술학교를 다녔고, 1897년 뮌헨으로 이주하였다.1899년에 헤센공 루트비히의 부름으로 다름슈타트의 예술가촌에 참가하여, 자기 집을 설계하였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건축의 길을 택하였다. 이어 뒤셀도르프의 공예학교장이 되었고, 이어서 베를린으로 가서 전기회사 AEG의 디자인 책임자가 되어, 유명한 터빈 공장을 비롯한 공장건축과 사원주택, 제품 디자인 등에서 고전적 형태의 명쾌함과 근대 합리주의와의 융합을 이룩함으로써 다가올 기계공업 사회에서의 디자인과 디자이너의 가능성을 실증하였다. 이 시기 그의 사무소에는, 후일 근대건축의 세 거장이 된 그로피우스, 미스 반 데어 로에, 르 코르뷔지에가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1922년부터 빈 아카데미의 건축과 주임교수가 되었으며, 당시 유행하던 표현파의 영향을 받아 헥스트 염료회사와 같은 작품도 만들었으나, 고전적인 뼈대는 여전히 버리지 않았다. 1936년,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의 건축과 주임이 되었다.
바우하우스의 설립건축가 그로피우스는 1919년 4월에 독일 바이마르에 “바우하우스”라는 이름의 미술학교를 설립하였다.그 당시 바이마르에는 벨기에인 건축가 반 데 벨데가 1902년부터 1914년까지 운영하였던 미술공예학교가 18세기 중반부터 운영되어 오던 그랜드 듀칼 미술 아카데미가 있었는데, 이 두 개의 미술교육기관을 합쳐서 그로피우스는 전통적인 모든 관습과 타성과 맞설 수 있는 “건축의 집”이라는 의미를 가진 바우하우스를 세웠다. 그로피우스는 전통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던 예술가, 건축가, 공예가 등의 역할과 장르 구별을 파기하고 서로 연계시키고 결합시켜 건축 안에서 예술의 종합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그로피우스의 선언문은 이미 19세기 말에 예술공예운동을 일으킨 윌리엄 모리스 와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바우하우스의 교육과 정신예술의 종합을 위해 설립된 바우하우스는 현대미술의 무궁무진한 발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현대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한다. 그로피우스의 신념에 의하면 예술은 종합을 이루어 건축이 되게 하는 것이다. 건축가에 의해 설립되어 수공예와 미술가 사이의 벽을 허물고 회화와 건축을 통일시키고자하는 목적에도 불구하고 바우하우스 설립초기에는 건축교육이 제외되었다. 학교가 바이마르에서 1927년 데사우로 옮기면서 비로소 건축교과목이 만들어졌다. 그 이유는 바우하우스가 건축을 기존의 전통적인 건축학교의 교육처럼 건축 자체의 교육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방면의 교과과정을 통하여 먼 앞날의 목표이자 최후의 마무리로서 건축을 배우고 임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로피우스는 모든 조형활동의 최종목적은 건축이지만 학생들이 직접 건축공부를 하는 것보다는 우선적으로 창조적 재능을 구속하는 모든 관습에서 벗어나는 훈련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바우하우스의 교과과정은 기초과정의 기초조형반 교육과 공방교육으로 나누어진다. 학생들은 학교에 입학하게 되면 기초조형반에서 6개월 정도 형태와 색채 등의 조 알려주기 위해 목재, 금속, 석재, 유리뿐 아니라 색채 등을 전문적으로 다룰 교과과정을 설정하였다.공예기술자들이 다시 예술가로 인정받고 반대로 예술가들은 장인들 작업의 미덕을 발견하도록 하는 것이 그로피우스가 원하는 것이었다. 그로피우스의 희망은 철저하게 사회적 기능과 요구에 부합되고 사회를 이끌 수 있는 새로운 형태들의 창조자를 만드는 것이다. 바우하우스에서는 모든 낭만적인 감상과 장식성을 배제해야하고 자동차와 기계와 함께 살아가는 현대생활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현대적인 가치관과 미적 관점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바우하우스가 추구한 것은 인간을 대량생산품과 기계의 노예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의거한 예술창조 형태로서의 현대건축을 실현하는 것이었다.바우하우스의 뜻“바우하우스”라는 명칭은 중세시대에 성당을 짓기 위해 모집한 건축기사와 석공들을 숙박시킨 시설의 이름이었다. 그로피우스는 중세 때 대성당의 건축에 참여했던 회화, 조각, 기타 여러분야의 장인들이 장르 구별없이 공동작업을 통해 대성당 건설이라는 하나의 위대한 종합을 실현한 것과 같은 직업공동체를 세우고자 하였다. 그로피우스느 영웅적이고 이상주의적인 과업을 실현하기 위해 공동작업을 하는 중세시대의 장인들이 보여준 이상향을 재생시키기 위해 바우하우스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에서 통합과 화합의 개념을 실현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자 하였으며 아무것도 배척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바우하우스의 기본이념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상이 서로 연결되어 관계를 맺고 있듯이 바우하우스 역시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고 오랫동안의 준비기간이 드러나지 않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로피우스의 선언문에는 두가지의 기본이념이 표명되어 있다. 그 하나는 건축을 중심으로 모든 미술활동을 종합하여 회와, 조각, 건축이 일체가 되는 종합예술을 창조한다는 생각이다.그리고 다른하나는 미술의 기초는 손 재주에 있기 때문에 미술가는 모두 수공예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두가지 이념을 사상사적으로다. 다시말해, 건축은 회화적, 조각적 요소를..회화는 건축적, 회화적 요소를 각각 추방해 버린다는 식이다. 이렇게 해서 예술은 서로 분리되고 전문화되어서 결국에는 각기의 자율성과 순수성을 수립했다.그러나 이와 같은 현상은 예술이 생성하는 토양인 현실로부터 유리되어 그 결과 실제생활의 토대를 잃고 고립화, 비소화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바로 여기에 예술가들 사이에 모든 예술을 하나로 통합해서 하나의 대예술을 다시 창조하려는 욕구가 간혈적으로 나타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미술활동은 건축을 중심으로 통일되어 왔다. 말하자면 건축은 각 시대마다 중심문화의 꽃들을 피워 온 것이다. 그리고 19세기의 미술이 겪었언 커다란 변혁의 원인은 생산기술의 진보에 있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산업혁명을 고비로 생산기술은 수공기술에서 기계기술로 크게 발전됐다. 미술은 본래 미적형상을 생산하는 기술인데, 그 중에서도 건축이나 공예같은 실용미술은 그 본질을 생산기술에 두고 있다. 따라서 기술혁신의 영향을 곧바로 받은 것이 건축과 공예였음은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최초의 선언문에 보이는 바우하우스의 이념은 아주 새로운 내용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모리스의 운동은 결국 좌절되고 말았고 또한 기계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독일 산업계의 발전상황을 감안해 본다면 바우하우스의 이념이 주장되었다는 것이 오히려 기이하다는 느낌마저 갖게 된다. 수공예로 다시 돌아가 대건축을 창시하기 위한 중세적인 길드를 조직한다는 어느 정도 복고적인 이 이념은 후에 크게 수정받게 된다.바우하우스의 목적바우하우스는 모든 창조적 노력을 하나의 전체로 통합하고 조각, 회화, 수공예, 공예 등 모든 실용미술의 교육을 새 건축에 꼭 필요한 요소로서 다시 결합하고자 힘쓴다. 바우하우스의 궁극적인 목적은 비록 요원하긴 하지만 기념적인 미술과 장식적인 미술의 구별이 없는 통일된 미숙작업, 즉 대건축에 있다.바우하우스는 모든 수준의 건축가, 화가, 조각가들을 그들의 능력에서 차지하는 바우하우스의 큰 발자취는 그곳이 결코 단순한 미술학교로서 정의될 수 없게 한다. 겨우 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을 뿐인 이 미술학교는 마치 20세기 현대미술사를 이끈 거대한 미술운동의 산실처럼 조명되고 있다. 바우하우스는 혁신적인 교육을 추구한 진보적인 미술학교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아방가르드 운동의 선봉에 선 미술운동을 지칭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20세기 현대미술의 최첨단에 서 있었던 작가들의 작업실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바우하우스의 정체성을 거론하는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을 끄집어 낼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바우하우스가 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바우하우스 교수들의 업적 때문일 것이다. 그로피우스는 화가들의 이론과 회화가 다른 예술들을 이끌 수 있으며 새로운 건축의 원칙을 제공하는 새로운 미학을 창조할 수 있다고 믿었다.바우하우스의 교수진과 역사바우하우스는 건축을 지향하는 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주요교수들의 대부분이 전위적인 회화작업을 탐구한 화가들이었다. 그로피우스는 학생들에게 창조의 무한한 자유와 정신적인 가치관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공예가 혹은 건축가보다도 순수미술가들이 적합하다고 생각하였다. 설립초기에는 이텐, 파이닝거, 막스가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텐은 1923년에 사직을 하고 모홀리나기가 그 뒤를 이었다. 1919년부터 1933년까지 파이닝거, 이텐, 칸딘스키, 클레, 모홀리나기, 슐레머 등이 가르쳤다. 바우하우스 출신 중에 나중에 미술사적으로 공헌을 하는 화가가 된 사람은 앨버스이다. 그러나 바우하우스는 회화학교가 아니다. 회화, 조각 등 순수미술을 가르치거나 작업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순수회화를 가르치는 것이 제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우하우스는 20세기 최고의 전위적 추상회화를 이끌었다. 바우하우스는 다다, 미래주의, 네덜란드의 드 스틸, 러시아 아방가르드 등과 같은 다양한 미술경향이 발전된 곳이다. 20세기 미술을 혁신적인 방향으로 이끌었던 칸딘스키, 클레, 모홀리나기, 파이닝거 등이 바우하다는 교수와 학생 간의 자유토론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깊은 지적 성찰과 미적경험을 통해 결론 지은 회화의 특수성, 문학적인 언어와 관계되는 모든 사유작용을 학생들에게 펼쳐보이며 실험하게 하고, 무엇보다도 학생 스스로 사고하며 종합하여 결론을 끌어내게 하는 독창적이고 자율적인 능력을 길러 주고자 하였다. 기초조형반에서 이루어졌던 수업이 오늘날까지 현대미술의 기초이론으로서 제시되고 있다느 점은 주목할 만하다. 현대미술을 이끈 대부분의 교수들은 바우하우스에서의 수업을 자신들의 현태와 색채 등의 미술이론의 전반을 응용하고 실험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 유명한 칸딘스키와 클레 등의 미술이론이 완성된 곳이 바로 바우하우스였다는 것은 주주할 만하다. 기초조형반 수업은 학생들에게 관습적으로 획득한 모든 지식을 깨끗이 없애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되었으며, 학생들은 자연을 포괄적으로 분석하고 종합하는 훈련을 이 수업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1928년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를 떠나게 되고 공산주의자 마이어가 교장으로 취임한다. 그리고 1932년에 바우하우스가 베를린으로 옮겨간 뒤에는 반 데어 로에가 교장이 된다.모홀리나기는 1923년 이텐이 사임한 후 부임하여 현대사회 안에서 모든 예술장르와 현대기술의 종합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였다. 1925년 바우하우스가 데사우로 옮겨갈 당시 바우하우스는 모홀리나기의 열정에 힘입어 구성주의자들의 이론을 보급하는 중요한 창작 산실이 되어있었다.모홀리나기는 그로피우스가 확립하려고 한 교과과정의 가능성을 재빨리 인지하고 무엇보다도 바우하우스의 종합이라는 이상에 공감하고 있었다. 모홀리나기는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동시에 바우하우스 이념의 방향을 확고하게 잡아나갔다. 그는 구성주의를 통해 혁명적 실험을 갈망하고 자신의 작업에서도 구성주의의 원칙에 입각한 순수 기하학적 추상회화를 보여주었으며, 특히 테크놀러지를 응용한 “빛-공간모터” 라는 작업을 통해 과학기술과 미술의 결합에 대한 최고도의 가능성을 실험하여다.
다다이즘이란다다이즘은 줄여서 다다라고도 한다. 20 C 유럽 문학이나 미술운동의 하나 '다다'란 아무런 뜻이없다는 말로 ,'다다'의 주장은 문학,미술에 있어 전통 어법등 일체 제약을 벗어나 개인을 도그마 형식,속박으로 부터 해방시키자는 것으로 기존의 모든 질서를 파괴하는 무방향의 운동으로 나타났다. 또한 전통에 반대하고, 합리적인 것에 반대하며, 제도에 반대하고, 모든 것에 반대한다. 그 기본적 원칙은 부정이다. 조형예술뿐만 아니라 넓게 문학, 음악의 영역까지 포함한다. 다다란 본래 프랑스어로 어린이들이 타고 노는 목마를 가리키는 말이나, 이것은 다다이즘의 본질에 뿌리를 둔 ‘무의미함의 의미?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다다라는 말이 사전을 펼치는 도중에 우연히 발견 되었다고 한다. 루마니아어로 예,예-그래,그래의 뜻이 있다. 그리고 독어의 유모차와 생식의 기쁨간의 관념의 연상에서 나온 말이라고도 한다. 당시 신문에서는 아프리카의 크루족이 제물론 바쳐진 암소꼬리를 다다라 부른다고 보도했다. 이탈리아의 어느지방에서는 주사워나 어머니가 다다로 불리워진다.다다이즘의 역사다다이즘은 처음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시작되었다. 1916년 2월 작가 겸 연출가인 발이 카바레 볼테르를 개점하고, 시인인 차라, 휠젠베크 등과 함께 과거의 모든 예술형식과 가치를 부정하고 비합리성, 반도덕, 비심미적인 것을 찬미하였다. 차라는 ?새로운 예술가는 항의한다. 새로운 예술가는 이미 설명적, 상징적인 복제를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는 돌이나 나무나 쇠로 직접 창조한다. 특급기관차와 같은 새로운 예술가의 유기체는 순간적인 감동을 싣고 모든 방향으로 향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여기에 오늘날 말하는 자유분방한 오브제가 등장하는데 그것들은 문자 그대로 중립을 선언하면서 스위스에 모인 망명자들의, 밖에서의 참혹한 살육을 의식한 발언이며, 그들은 종래의 예술작품이 외적폭력에 대해 얼마나 무력했는가를 전쟁 체험을 통하여 느끼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잡지 "다다"가 발간되고 우연을 이었으며 제1차세계대전 중 또는 대전 전부터 전위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것은 필시 1913년에 개최된 사진과 회화의 모던 아트전 아모리 쇼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이 전람회에 출품된 뒤샹의 "계단을 내려가는 나체"는 사진가 스티그리츠뿐만 아니라 움직이는 요소로서의 광채라고까지 절찬한 브르통을 포함해서 미국 전람회 역사상 보기 드문 스캔들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 작품은 순전히 메커니즘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데도, 마치 고속사진의 한 장면과 같이 역동적이며, 미래파 작품에 호응하여 사진과 예술의 새로운 결합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 후 뒤샹은 기성품을 곁들인 레디 메이드를 발표하여, 다다이즘이라고 하면 레이의 "선물"이냐 뒤샹의 "샘"이냐라고 할 정도로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또한 피카비아, 알프, 실험영화로 유명한 리히터도 빼놓을 수는 없다. 다다이즘은 제2차세계대전 후에 ?네오 다다?라는 명칭으로 부활되었다. 부활의 배경은 전후 고조되고 있던 기계문명?인간소외 등의 이유에서였다. 다다이즘의 대표 작가로는 리히텐슈타인, 팅게리, 올덴버그, 로젠버그 등을 들 수 있다.다다이즘의 정신다다이즘은 미래주의에서 나타났던 과학과 과학기술에 대한 긍정적 태도와는 정반대의 부정적 입장을 위했으며, 이성과 합리에 대한 외의, 부정, 파괴, 즉 '반예술'의 태도로 우연에 의거한 제작 태도를 견지하였다. 특유의 유머가 있고 오브제를 사용하여 기성관념을 부정함으로써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제 1차 세계 대전 중, 스위스에 망명 온 작가들이 일으킨 반 문명, 반 합리주의 예술 운동으로, 전쟁의 살육과 파괴에 대한 증오와 냉소를 기본 정신으로 하여, 모든 문화적 가치, 전통적 가치, 이성에 대한 신뢰를 부정하며 예술 형식의 파괴와 부정을 주장했다. 1차대전을 치른 서구 유럽 사회는 가공스러운 살육과 파괴를 자행한 전쟁의 근본토대를 과학기술의 남용과 자본주의 사회체제로 보았다. 이제 유럽인들은 그 전까지 찬양해 마지않았던 과학과 경제의 발전이 결국 자신들의 세계를 파괴하는 작가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시인과 음악가, 화가들이 모여 시 낭송 모임, 연주회, 전람회, 평론발표 등을 통해 서구 문화 전통을 신랄히 비판했다. 전쟁으로 인해 상처를 입은 이들은 매우 염세적이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쮜리히 다다의 세 가지 특징적 요소 소음과 동시성, 그리고 우연성이었다. 음악에서의 소음, 문학에서의 동시성, 그리고 미술에서의 우연성은 각각 그분야의 성질에 맞게 각색된 새로운 시도였다. 전쟁이 종반에 들어서면서 쮜리히 다다는 종말을 고하게 되고 마르셀 뒤샹과 피카비아가 뉴욕으로 이주하면서 뉴욕 다다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다.뉴욕 다다는 쮜리히 다다와 거의 같은 시기에 출연한 운동이지만 뒤샹의 활약으로 독특한 특성을 갖게 된다. 'ready made'나 반 미학사상이 그의 중요 특성이 되고 이런 활동은 뉴욕다다에 이어 나타난 미국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독일 다다는 베를린을 중심으로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좌익의성향을 노골적으로 표방하는 정치선진의 활동과 결부하게 된다. 미술의정치도구화가 여기서 발견된다. 독일 다다의 기법적특징으로 콜라주 사진기법이 있는데, 이것은 명확한사실성을 가진 요소들로 인하여 메시지를 선명하게 전달하려는 데 의도가있었다. 이것은 입체파의 파피에 꼴레에서 영향받은 것으로 photo -montage라고 불리우게 된다.다다운동의 마지막 정착지는 파리였는데, 파리 다다의 특징은 문학적인 데가 있다. 잡지를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된 이들의 운동은 선언문, 정기 간행물,사건등으로 수입된 다다양식이 아닌 프랑스 문학을 토대로 일구어 낸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문학성이 강했던 이들의 운동은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1924년경 '초현실주의'라는 이름 아래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다다는 1915년부터 1922년까지 계속된 국제적 규모의 문학 그리고 미술운동으로 예술운동이다. 다다는 시대적 위기상황의 근거인 이성을 존중하고 그 이성을 합리화 시켰던 모든 과거의 예술형식을 타파하고 본질적으로, 결국 1925년에 프로타주를 고안하여 새로운 환상회화의 영역을 개척하였다. 주제는 주로 황폐한 도시 혹은 산호초같은 이상한 풍경 등이었으며, 내용과 표현력의 일치가 뛰어나 17세기 네덜란드의 이색 화가 제헤르스나 마니에리스트의 기법을 훌륭하게 자기의 것으로 소화하였다. 1941년 미국으로 건너가 한때 원시미술에 공명하기도 하고 미국 체재 중 현대미술 수집가인 페기 구겐하임과 결혼하였으며 1951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대상을 받아 대가로 인정받았으나, 이 수상으로 상업주의에 굴복하였다는 이유로 정통파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제명당하였다. 작품으로 "신부의 의상" "조가비의 꽃" 등이 있다.올덴버그1950년 말부터 1960년대 초에 오브제가 관객과 일상적 환경 속에서 전개하는 일련의 충격적인 작품을 시도하였다. 그의 조각 작품들은 석고로 형체를 본떠서 극채색의 에나멜을 칠한 햄버거나 핫도그 등으로, 그는 식품 오브제를 모의 식품점에 전시하기도 하였다. 일상의 오브제를 거대하게 확대하여 관객의 심리에 충격을 준다든지, 전기청소기나 선풍기 등의 경질기계제품을 부드러운 천이나 비닐로 모조한 해학적 작품을 전시하는 등의 발상은 그의 일관된 방법론이다. 1960년대 말경부터는 오브제를 거대한 모뉴먼트로서 도시 공간에 설치하는 데생과 구상을 발표하였다.뒤샹1887년 7월 28 프랑스 블랭빌에서 출생하였다. 입체파 조각가 비용, 화가 비용의 아우이다. 파리의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공부하면서 세잔의 영향을 받았고, 뒤이어 1911년에 입체파의 일파인 섹시옹 도르에 참가했다. 1911년 파리에서, 1912년 뉴욕의 아모리쇼에서 동시성을 표시한 회화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를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13년부터 다다이즘의 선구로 보이는 반예술적 작품발표를 시작, 1915년 도미하자 이듬해 뉴욕에 독립미술협회를 결성하여 반예술운동을 일으켰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파리에 돌아와 초현실주의(쉬르리얼리즘)에 협력, 1941년 브르통과 함께 뉴욕에서 초현실주의전을 열었다.데스틸이란요한 일이었다. 그렇게 할 때 그들의 작품 내용이 우주적 조화, 즉 전 우주를 꿰뚫는 질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1917년에 창간된 네델란드에 있어서의 신예술운동의 기관지 양식을 의미한다. 데스틸은 간결한 공간 분할, 단순성, 기본 형태, 원색, 비대칭적 타이포그래피 등이 구사되었다. 보다 형이상학적인 컨셉트로서, 인쇄물의 면구성을 혁신시켰다.데스틸의 선언문데 스틸 “제 1선언문“에서 거의 14년간 지속된 네델란드의 데 스틸운동은 세 사람의 작품에 집중되어 있다. 그들은 화가인 피에트 몬드리안, 화가이자 건축가인 데오 반 되스버그, 그리고 가구제조업자이자 건축가인 게리트 리트벨트이다. 선언문에서 보듯 데 스틸의 최초의 선언문은 개인과 우주 사이의 새로운 균형을 요구하고 있으며, 개성의 숭배와 전통의 제약으로 부터의 해방을 요구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네델란드의 캘빈주의적 배경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적 사고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는데, 이들은 불변의 법칙을 강조함으로서 개인의 비극을 초월하는 문화를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보편적이고 이상향적인 열망은 다음의 한 마디로 요약할 수도 있다. 즉 "자연의 목적은 인간이고,인간의 목적은 양식이다." 단속적인 수직선 및 수평선으로 주로 구성된 몬드리안의 후기 입체파구성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1914년 7월 그가 프랑스 파리에서 네델란드로 귀국한 것과 일치하며 또한 그와 반 데 레크가 라덴에서 거의 매일 쇼엔마에커즈와 접촉하면서 생활한 시기와 일치하고 있다. 신조형주의라는 어휘는 쇼엔마에커즈의 '새로운 조형'이라는 신조어로 부터 유래하였으며 또한 파렛트를 3원색으로 한정하는 것도 그에 기인하는 것이다. 때문에 데스틸을 따른 몬드리안의 경우(무한한 좌표의 연속) 다음 세가지 색을 사용해 모든 것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3가지 기본적 색채는 본질적으로 노랑, 파랑, 빨강이다. 그것들은 실재하는 유일한 색들이다... 노랑(수직적인)은 광선의 운동이다. 파랑은 노랑과 대조를 이루는 색(수평적인 창공)이다... 빨강은 노랑과 파랑을 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