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상 예 찬 K T & G- KT&G의 조직 구조변화 사례분석과 미래의 설계-목 차Ⅰ. 서 론1Ⅱ. 본 론31. KT&G의 소개31) 일반현황32) 조직의 연혁33) 기업이념 및 비전44) 재무현황45) 환경변화 분석62. 담배인삼공사(공기업)시기의 조직분석(~1999)71) 일반현황72) 조직구조의 분석83) Mintzberg의 성장경로모형에 의한 분석94) 민영화의 필요성103 과도기(민영화진행과정)시기의 구조변화(1999~2002.12)111) 조직의 개편114. KT&G(민영화)시기의 조직분석(2003~)121) 지분구조 분석122) 조직구조의 분석123) Mintzberg의 성장경로모형에 의한 분석144) 이사회제도의 강화155) 현재의 환경분석166) 미래의 방향185. KT&G 미래의 조직 설계181) 소사장제도(내부-수직적 네트워크)182) 사업의 다각화와 글로벌 기업의 확립19Ⅲ. 결 론21별지 :※1 팀 활동일지23※2 참 고 문 헌24※3 인터뷰 요약본25- -Ⅰ.서 론90년대 초반 세계적으로 민영화의 열풍이 불었다.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함께 이행경제에서 국영기업의 사유화가 대대적으로 실시되었고, 서구에서도 경제의 글로벌화에 대응하는 수단으로서 국영기업의 민영화가 붐을 이루었다. 일반적인 경제논리는 이제 경쟁이 가능한 모든 재화와 서비스는 공공부문 보다 민간 부문이 더욱 효율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 는 명제로 수렴하게 되었다.공기업의 민영화는 우리나라 경제에서도 주요 현안으로 등장하고 있다. 경제개발 과정에서 정부 주도로 육성된 대규모 공기업이 이제는 민간에게 이양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공기업 부문은 경영의 비효율이 나타나기 쉽기 때문에 우리 경제의 효율성을 제고시킨다는 측면에서도 민영화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이제 공기업부문의 경영의 비효율이 나타나고 민간부문의 규모도 충분히 확대되어 그동안 정부가 담당하던 공기업부문을 수용할 수 있는 여건이 성숙된 것도 이유중의 하나다. 그렇기에 우리나라 상당수의 공기업의 KT&G는 고객, 주주, 구성원에 대한 최대의 보람과 가치를 창조할 뿐 아니라 더불어 사는 사회적 규범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공익에 기여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함.■ 비 젼□ 기업가치와 구성원가치의 극대화를 통해 글로벌 우량기업으로 도약 KT&G는 기업가치의 극대화 를 통한 글로벌 우량기업을 지향한다. 최고의 품질과 서비스, 재무건전성 및 브랜드 가치의 향상 등 고객만족을 위한 혁신을 지속적으로 추진 할 것이다. 구성원의 가치는 능력 발휘를 위한 구성원 개개인의 노력과 함께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관리시스템의 변혁을 요구한다. 이를 위해 KT&G는 세계화 시대에 부응하는 인재의 양성과 함께 인간 중심의 경영철학을 구현해 갈 것이다. KT&G는 자율과 책임을 바탕으로 구성원의 창의성을 극대화하고 혁신 지향적 기업경영이 정착할 수 있는 기업문화의 창달을 부단히 추구해 갈 것이고, 시장을 선도하기 위한 역동성을 토대로 세계적인 우량기업으로 성장할 것이다.3) 재무현황■ 매 출 액 위 그래프처럼 99년 이후에 KT&G의 매출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민영화를 완료한 2002년과 그 이듬해인 2003년의 매출은 기존의 성장보다 더욱더 큰 매출성과를 올리게 된 것이다. 이것은 민영화에 성공했다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경상이익 위 표를 보면 2000년도에는 경상이익이 감소하였고 그 이후부터는 계속 상승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2000년도가 1999년보다 경상이익이 줄게 된 이유는 민영화 과정 중 영업외비용 즉, 유가증권평가손실, 유형자산처분손실, 명예퇴직급여부분에서 많이 지출되었기에 상대적으로 경상이익이 줄게 된 것이다.■ 당기순이익 당기순이익 역시 2000년도에는 감소하고 그 이후부터는 꾸준히 증가하다 2003년에 급격히 증가한 것을 볼 수 있다. 2000년도 역시 경상이익에서 설명했듯이 영업외비용의 지출에 따른 하락으로 볼 수 있다.4) 환경변화 분석변화삼정과전매청담배인삼공사민영화과정KT&G차이심화환경조직구조 위의 표는 대 전자공시시스템에 보고한 사업보고서를 통해 발표한 담배인삼공사의 조직도이다. 위의 조직도에서 알 수 있듯이 담배인삼공사는 혼합형 조직의 모습을 보인다. 즉, 기획본부, 영업본부, 제조본부는 기능조직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으며, 해외사업본부, 서울영업본부가 제품조직(사업부제)형식을 나타내고 있다. 기획본부, 영업본부, 제조본부 등 기능부서의 효율성을 유지하면서, 지역적으로 해외사업본부와 서울영업본부를 두어 Self-Contained Organization을 통해 효율성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담배시장에서 독점구조이기 때문에 경쟁에 대한 필요성이 적었다. 따라서 경쟁에 따른 효율성 측면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하지 않아 조직의 비대성과 인력의 과다 인력을 품는 결과를 나타내었다.※ 전매청(1만3천명 87년) → 담배인삼공사 (7,573명 97년) → KT&G(4,564명 04년 현재) 조직의 의사결정은 과거 직급체계에 따라 이루어져, “실무자-과장-부장-국장-본부장-부사장-사장-이사회”로 8단계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러한 의사결정단계에서는 오늘날의 불확실성 속에서 신속성이 떨어진다고 하겠다. (별지 #3, 인터뷰 자료 참조)2) Mintzberg의 성장경로모형에 의한 분석□ 기계적 관료제 구조기술전문가지원스탭핵심작업층(생산 / 제조)전략층정부관여관여 Mintzberg의 성장경로모형에 비추어볼 때 담배인삼공사는 기계적 관료제 구조의 성격이 강하다. 즉 기업의 조직내의 과업을 설계하고 경영하는 기술전문가부문을 사실상 지배하는 것은 정부로서 기술전문가 부문의 파워가 가장 강한 면모를 가지기 때문에 기계적 관료제로 판단되어진다. 기계적 관료제 구조는 단순하고 안정적인 환경에 적합한 구조이다. 정부의 담배산업에 대한 보호와 독점적인 시장구조로 담배인삼공사는 안정적인 환경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안정적인 환경 속에서 이 구조는 유지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환경은 불확실한 환경이다. 따라서 환경변화에 적응력이 떨어지는 기계적 관료제는 유지되설합리화 / 현대화 제조공장 : 9개(97년) → 7개(00년) (현대화 1) 원료공장 : 6개(97년) → 4개(00년) (현대화 1) 생산성 향상구 분단위97년00년비 고노 동 생 산 성분/인?시12,97122,29671%증가※ 기획조정실 발표자료□ 인력 / 조직 구조조정 인력은 정년의 단축(59~61세 → 58세)과 명예퇴직 추진으로 41% 감축: 97년 7680명 → 00년 4500명 (3180명 감축) 조직은 사업구조조정, 노후시설 정리 등으로 25.3% 감축: 97년 471부서 → 00년 352부서 (119부서 통폐합)□ 조직역량강화를 위한 시스템 혁신 전부서장 경영계약제 연봉제 도입 불합리한 노사 관형의 정비 : 퇴직금 누진제, 휴가일수축소, 학자금 지원 등 내부 경영평가시스템 개선: 부서장 경영계약과 연계되며, 부서 단위 경영실적 평가를 통해 부서 / 개인별 인센티브 상여금 차등을 둠3. KT&G(민영화)시기의 조직구조분석(2003~)0) 지분구조 분석?정부 및 은행출자지분 매각→ 민영화KT&G 홈페이지 공시자료외국인 38.1%자사주 22.4%기업은행 10.9%국내기관 8.9%대한투자신탁 7.4%기타 5.5% 이 회사는 1999년 9월, 사실상 100%였던 정부지분 가운데 18%를 처음으로 공모하면서 본격적인 민영화의 길을 걸었다. 2002년 12월 정부의 마지막 지분이 매각되면서 민영화가 최종 마무리됐다1) 조직구조의 분석□ 조직도Funtional OrganizationSelf-Contained Organization혼합형조직마케팅본부경영관리본부제조본부원료본부중앙연구원비서실CEO마케팅국브랜드국영업국해외사업본부사업개발본부부동산사업부기획조정실홍보실기술개발실감사실 위의 조직도는 금융감독원에 보고한 전자공시시스템의 사업보고서 중 조직 구조도와 민영화로 바뀐 특징적인 조직을 표시한 것이다. 조직의 수직적, 수평적 분화가 더욱더 세밀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수평적 분화 : 기획본부 → 기획조정실기술개발실, 경영정보실 신설수직적 분화 : 데 가장 높다. 대주주와 경영진으로부터 철저하게 독립성을 확보하고, 이를 기초로 경영진에 대한 견제를 충실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KT&G가 사외이사 중심의 이사회를 구성한 것은 지난 2002년 말 이후. 이사회는 투명경영과 효과적인 성과관리를 위해 감사위원회, 성과 ? 리스크 관리위원회, 공익?투명경영위원회, 운영위원회 등 해당 분야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를 구성?운영하고 있다. 특히 감사위원회와 성과?리스크 관리위원회에는 사내 이사들이 철저하게 배제되어 경영진에 대한 견제와 경영성과에 대한 모니터링 기능을 상시적?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이사회기능 활성화 및 운영방식의 효율성 사외이사의 전문성 한계 극복을 위한 외부전문인력 지원 내부규정과 내부경영정보 접근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정보제공 의무 내부규정의 명문화 최대주주 및 특수관계인 이외의 사람이 추천한 사외이사가 이사회에 참여함으로써 독립적 사외이사의 경영감시 역할 수행 이사회 내 보상위원회,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 등 7개의 위원회 설치 및 운영 보상위원회와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를 전원 사외이사로 구성하고, 위원장을 사외이사가 역임하는 등 위원회 운영의 독립성 강화에 노력 23회에 걸친 이사회와 , 5회의 사외이사 회의를 통해 기업경영 견제에 긍정적 영향 주주들과의 이해관계를 일치시키는 이사의 회사주식 보유 권장 제도를 통해 주주 권리 보호에 긍정적 작용 성과급으로 주식을 부여하고 이 주식의 처분은 퇴직 시까지 금지시킴으로써 경영성과 향상에 기여케 함 사외이사가 안건에 대하여 반대 또는 수정의견을 제시하여 채택됨으로써 적극적으로 경영진을 견제하는 역할 수행□ 경영투명성 제고 국내외 투자자를 위한 활발한 IR활동(8회) 전개 홈페이지에 이사회 정보와 다양한 경영정보 공시, 사업보고서 상의 사외이사 활동내용평가를 통해 국내외 투자자의 불확실성과 위험 감소 도모□ 감사기구의 효율적 운영 감사위원회를 전원 사외이사로 구성하고 위원추천에 관한 규정을 마련함으로써 위원회 운영의 독립성 강이다.
공익광고의 변천사목 차Ⅰ. TV 켜기1. 조사 동기2. 조사 목적Ⅱ. 채널 변경1. 공익광고란?2. 공익 광고의 변천사Ⅲ. 채널 고정1. 현재의 공익광고와 변화배경Ⅳ. 외부 입력1. 공익광고의 한계점Ⅴ. TV 끄기1. 개선책2. 결론Ⅵ. 부록제 Ⅰ 부 TV 켜기1. 조사 동기‘광고는 시대를 읽는 것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다. 우리는 눈만 뜨면 광고를 접하면서 살아가고 . 광고는 이제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었고 그 중요성과 영향력은 날로 커지고 있다. 특히 공익광고는 그 시대의 사회상을 투영하고, 반영하는 보편적인 가치척도의 기준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시대상황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우리나라는 1970년대 이후, 고도의 경제성장과 대기업 위주의 경제발전 과정 속에서 생긴 빈부격차, 노사문제, 도시? 농촌간의 격차, 지역차 등 갈등요소가 산재해 있고 가치관의 혼란으로 물질만능주의, 투기심리, 개인주의 심리가 팽배해져 왔다. 이러한 사회적 제반 문제들에 더하여 1980년대 들어 본격화된 소비자 보호운동, ‘86아시안 게임, ’88서울 올림픽 등 국제적인 대형 행사를 기폭제로 하여 국제 사회로의 한국 이미지 개선, 국민의식의 국제화, 사회질서의 정립, 전통문화의 가치 인식과 문화적 자주성 확립이 필요하다는 여러 변수들의 상승작용 속에서 한국의 공익광고는 1981년 비로소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공익광고(public service advertising)이란 사회 내에서 일어나는 부정적 요인을 제거하고 건강한 사회, 공익이 우선되는 사회를 지향하기 위해 공중의 부정적 태도와 행동을 변화시켜 사회적 통합을 통한 공공의 이익(public welfare)를 추구하는 커뮤니케이션 활동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공익광고의 주제는 캠페인 시점에서 그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점이나 강조하고자 하는 주장을 반영하게 된다. 따라서 당시 사회적 배경에 따라 공익광고의 주제는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코틀러와 로베르토(kotler & Robertto, 1989)는 공익광고를 사회 정보를 제공하고 설득하는 내용의 공익광고는 정부기관, 공공단체, 자선 단체 등에 의해 제작된다. 이들 광고는 이익 추구를 목표로 삼지 않고 주로 공동체 생활을 영위함에 있어서 지켜져야 할 윤리적 기준에 입각하여 사회질서 유지, 공중도덕 함양, 교통문제, 환경보전, 교육문제, 국민건강 증진 등 국민들의 생활 수준 향상에 기여할 수 있는 사항들을 주제로 선택하고 있으며, 최근 더욱 직접적이고 다양한 공익광고가 제작되면서 시청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끌고있다.공익광고를 정의해보면 다음과 같다.① 인간존중의 정신을 바탕으로 사회 및 공동체의 발전을 위한 의식개혁을 목표로 하며,② 광고라는 설득 커뮤니케이션을 통하여 제반 사회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국민들의 태도를공공의 이익을 지향하는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③ 휴머니즘, 공익성, 범국민성, 비영리성, 비정치성을 기본이념으로 한다.위와 같이 공익광고는 어느 국가든지 비정치적인 조직에 의해 운영되고 실질적이든 잠재적이든 공공의 이익을 추구해야 하며, 특정 대상의 이익을 배제하고 전국민을 대상으로 광고를 실시하는 것이다. 즉, 일반 광고가 개인이나 기업의 이익을 위해 행해지는 커뮤니케이션인 반면, 공익광고는 사회 전체의 이익을 보호하고 그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광고가 가지고 있는 뛰어난 설득 커뮤니케이션의 힘을 활용하여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해결 방안을 제시함으로써 보다 건강한 사회를 이룩하고자 펼치는 의식 개혁 캠페인인 것이다. 급변하고 다원화되는 현대사회에서 점점 그 의미가 상실되어가는 공공 의식을 살리고, 건전한 정신문화를 북돋우며 국민들의 의식수준을 향상시키는데 있어 매우 효율적인 수단으로서 상업광고와 대비되는 또 하나의 장르인 셈이다. 현재 공익광고는 차원을 높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각종 사회문제, 부조리 해결이라는 문제에 대해 광고라는 가장 현대적이고 설득력이 뛰어난 수단을 통해 해결하고자 시도로 자리매김 하였다. 여기에 공익광고의 가장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2. 공익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있어 매우 효율적으로 기능하는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표1 > 공익광고로 기대되는 사회적 변화인지 변화특정한 정보를 알리는 기능의 캠페인(예: PATA 총회가 어디서 열리고, 그 총회의 내용은 무엇인가 등을 알리는 캠페인)행동 변화구체적은 행동을 유발시키는 암 검사나 헌혈 캠페인선거철의 부정 선거 방지 캠페인도 행동유발이 주목적형태 변화즉각적인 행동변화가 어렵고 이미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의캠페인이 이에 해당되며, 성공률이 낮다.(예: 금연, 금주, 마약남용금지 등)가치 변화사회문화적인 환경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안일 경우 오랜 기간지속성을 띠어야 한다.(예: 낙태금지 등)5. 공익광고의 주제공익광고는 그때그때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당시의 현안 문제를 중심으로 제작하여 왔기 때문에 따라서 공익광고의 기본적인 주제를 통해 우리사회의 시대적 문제와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1) 총 7개의 대주제를 중심으로 제작:경제, 민족정신함양, 청소년교육, 환경보전, 공동체의식, 밝은 사회건설과 국가발전 및 미 래상, 기타(금연, 마약, 선거, 에너지절약, 질병 등)(2) 장기캠페인과, 일회성광고, 집중적 제작 광고:각 주제별 방송형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형태로 분류할 수 있다.- 장기캠페인 :공동체 의식 함양 등을 목적으로 지속적으로 제작, 집행.- 일회성광고 : 산불 보호와 같은 광고.- 집중적 제작 : 경제 살리기와 같은 광고.2. 공익광고의 변천사◆ 1981년에 설립된 한국방송광고공사(KOBACO)가 같은 해 12월 KBS 2TV에 저축장려 캠페인을 집행하면서 한국에서 본격적인 공익광고 활동이 시작되었다. 공익광고의 초창기인 1980년대 전반에는 애국심의 고양, 국민의식의 확립, 사회건설, 국민화합, 안보의식, 저축장려 등 국가정책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 민족의 자긍심과 의식을 확립하려는 목적의식이 엿보이는 캠페인 주제가 많았다. 이후 경제발전과 민주화 과정을 거치며 환경문제가 중요한 이슈로 부각, 집중적으로 다루 있다. 그 중에는 한국전쟁에서 싸운 미군병사를 기용한 광고도 있다. 35년만에 서울을 찾은 참전용사가 아름다워진 한강을 보고 「한강의 기적」에 경탄한다는 내용이다.(4) 1980년대 후반부터 불거진 ‘과소비’과소비를 경계하는 내용의 공익광고는 1989년 처음 등장했다. 이후 소재를 바꿔가며 과소비 추방은 꾸준히 공익광고의 주제가 됐다.1989년 ‘풍선’, 1990년 ‘종이배’, 1991년 ‘달력’ 등 예전에 비해 다소 넉넉해진 경제상황에서 소득에 비해 크게 늘어나는 소비행태에 일침을 놓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1989년의 광고카피가 ‘국민소득은 4천불 소비수준은 2만불’이었는데, 바로 다음해 ‘국민소득 5천불 소비수준 2만불’로 바뀌었다는 것.빠른 경제 성장을 보여주는 국민소득 수치의 변화와 수치와 그에 따른 사회의 부푼 소비풍조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5) 1986년~87년 볼 수 있는 정치권 ‘북풍(北風)’의 흔적?공익광고 시작 이후 볼 수 없었던 ‘간첩신고’가 1986년 공중파를 탔다. 1987년에는 ‘자유와 평화’라는 같은 제목과 주제로 각각 다른 내용의 공익광고가 연이어 만들어졌다. 1986년은 우리나라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린 해로 나머지 대부분의 광고가 국제행사를 안전하게 치르고 관광객들에게 친절할 것을 독려하는 분위기에서 불쑥 튀어나온 미운오리새끼였다.1987년은 6월 ‘민주항쟁’과 13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해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안보를 염려하는 자세는 분명 옳은 곳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의 연이은 ‘113-간첩신고’ 공익광고는 왠지 미심쩍어 보인다. 이후 안보의식 관련 공익광고는 6·25전쟁 50주년이 되는 해였던 2000년에서야 다시 발견된다. 이 광고는 현대의 혼잡한 거리에서 누추한 옷을 입은 아이가 울고 있는 장면이 당시 전쟁의 피란길로 교차되면서 ‘50년전 6월, 우리의 아이입니다. 평화를 지킬 힘이 있다면 비극은 찾아오지 않습니다’라는 나래이션으로 끝난다.한편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가 있을 때마다 공명선거를 주 제작비를 늘려 질적인 발전을 나타내고 있는데, 최근 한편당제작비는 평균 1역6000만원 안팎정도이다.■변화하는 공익광고 : 변화하는 국민감성에 맞추어 기술적 발전, 표현방법의 다양화 등의 노력으로 소구정도를 높이고 있다.(2) 2000~2004년도 별 공익광고-① 2000년도 대표적 공익광고-방송광고-a. 국민화합편- 의도새해를 맞아 국민들에게 밝고 희망찬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사회구성원 서로간의 이해와 양보 정신이 필요함을 알리는 한편 이런 이해와 양보정신을 바탕으로 사회 발전과 화합을 이루는 계기를 이루어내고자 함.- 구성강물위의 배는 그 위에 탄 사람들이 합심하여 힘차게 노를 저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듯이 우리사회도 구성원 각자가 한 마음으로 서로 힘을 합할 때 밝고 희망찬 사회로 나갈 수 있음을 표현.b. 제대로 찍으셔야죠- 소재적극적 시민의식- 기획의도~ 현시대상황에 맞는 선거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새천년 새로운 시민의식을 제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국민에게 있음을 공유하고 적극적 시민의식 함양을 통한 능동적 시민상 정립필요.- 구성및 표현세상을 바꾸는 힘이 국민들의 올바른 선택에 있다는 것을 광고의 기본 컨셉으로 최근 유행하는 DDR을 소재로 당신의 올바른 선택이 신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c. 이웃사랑=헌혈- 기획의도헌혈에 대한 우리사회의 생소적 분위기와 그에 따른 결과를 담담하게 보여줌으로써 우리국민들의 무관심과 이기심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헌혈은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고의 전환을 일으킴으로써 헌혈 참여라는 구체적 실천적 반응을 유도함.d. 안보의식- 기획의도2000년도 6.25전쟁 50주년을 맞이하면서 국민들에게 안보의식고취.- 2000년도 주요 사회사건-. IMF졸업. 국회의원선거. 6.25전쟁 50주년. 6.15공동선언- 공익광고에 반영된 시대상황 -새천년을 맞이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기위한 공익광고들이 제작되었으며, IMF를 벗어나면서 경제가 어느정도 안정되어 공동체적 사회
1. 서 론19세기 말 독일의 지리학자 프레디난트 파울 리히트호펜은 중앙아시아를 관통하는 교역로를 통해 오고 간 수많은 물자 가운데 특히 비단의 이름을 따서 이 길의 이름을 붙였다. 그는 독일어로 비단길인 ‘자이덴 슈트라센’(Seidenstrassen)이라는 조어를 만들었고, 이는 곧 세계에 널리 전파됐다. 실크로드는 이 독일어 표현에서 비롯된 영어식 표현이다.이처럼 서양인에게 실크, 비단은 가장 중요한 교역품이자 최고의 명품이었다. 역사적으로도 비단은 기록에 남은 동서양 사이의 최초의 교역상품이기도 하다. 비단의 인기는 기원전 1세기 로마에서 폭발하기 시작했다. 비단은 처음 서쪽으로 향하며 그리 비싼 편은 아니었다. 흉노 등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과 거래하며 중국인은 유목민의 좋은 말 한필에 비단 40필로 계산했다. 여기에 먼 거리를 수송하며 위험 경비와 관세가 계속 덧붙고 중간상인들의 폭리까지 겹쳐 가격이 폭등했다. 특히 로마에서의 폭발적인 비단 열풍 때문에 값은 더 뛰었다. 로마인들은 비단 수입에 따른 재정 적자를 우려하는 여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치 풍조를 멈추지 않았다. 한편 실크로드의 서쪽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파르티아인들은 비단에 대한 중계무역의 권리를 독점하기 위해 비단에 관한 정보를 계속 비밀에 붙이고 그 대신 비단과 중국에 대해 신비화하는 설화 등을 만들어 서양에 유포하곤 했다. 바로 이런 흐름이 중국과 동양에 대한 서양의 신비주의적 인식을 형성하는 데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이렇듯 비단이 동서양의 교역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컸고, 또한 실크로드를 통해 그들의 문화가 교류하였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서쪽의 장안에서부터 로마에 이르기까지 중국에 걸쳐 있는 이 실크로드를 이해하고 알아보는 것은 중국의 과거 문화 교류에 대한 이해를 돕는데 효과적일 것이다. 따라서 실크로드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하고 실크로드에서 중요한 거점이었던 장안(西安)과 돈황(敦煌)에 대해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실크로드가 지나는 황하(黃河)의 자연환경에 대해 살펴보도장이나 상로를 독점하려는 군사적 진출이 있었기 때문에 아시아의 형세를 좌우할 만큼 되어 있었다. 이 길의 동방과의 연결은 BC 2세기 후반의 한무제(漢武帝) 때라고 하지만, 그보다 2세기 앞서서 이미 동서의 교섭이 있었던 증거가 지적되고 있다.이와 같은 동서무역은, 한무제(漢武帝) 때에 이르러 크게 조정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장건(張騫)이 서역으로 특파(BC 139∼BC 126)된 것을 계기로 하여 처음으로 서방의 사정이 공적 기록에 오르게 되었다. 그 후 역대의 왕조는 동서의 무역에 열의를 나타내어 실크로드를 통과하는 여러 오아시스 나라들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였다. 이런 정세에서 서방의 물건이 활발히 중국으로 도래하였으며 서방의 문물, 특히 이란의 조로아스터교·마니교 및 로마에서 이단시(異端視)되었던 그리스도교의 한 파인 네스토리우스파도 중국으로 전래되었다. 7세기 중엽 당나라가 타림 분지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를 설치한 무렵은 실크로드의 최성기(最盛期)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고(755), 티베트군의 진출로 당나라와 서역과의 직접적인 교섭이 단절되자, 서역 동부는 위구르인(人)이 점거하고 고대부터의 문화를 계승하였으나 서부에는 이슬람 세력이 진전하고 있어서 실크로드는 중간의 파미르 근처에서 중단되었다.이와 같은 경향이 결국 정치적으로 투르키스탄이 동서 2분으로 연계되어 오늘에 이른다. 또한 중국의 비단을 서방으로 운반한 점을 중시한다면, 실크로드가 점하는 범위는 더욱 넓어진다. 이란이나 지중해 연안까지 연장되기도 하고, 북아시아의 유목민을 매개로 하는 스텝지대를 관통하는 교역로(스텝 루트)나 남방의 남해제국(南海諸國)을 매개로 하는 해상교역로(시 루트)를 포함해야 한다.2) 비단의 고장(故障) 장안(長安)(1) 장안(長安)과거 동양과 서양의 문화 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실크로드의 기점중국 섬서성(陝西省)의 성도로 중국의 대표적인 관광 도시 중 하나이다. 면적 9,983㎢, 인구는 약 650만~ 700만 등장했다. 당시 장안(長安)은 동서 10Km, 남북 8Km에 이르는 영토를 가진데다가, 인구는 150만이 넘는 계획적인 대성곽 도시를 이루어 멀리 서방에도 그 이름이 알려졌다. 이 중 외국 사신들의 수는 약 4천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우리 역사와 연결지어 보면, 660년 백제 멸망 때 의자왕과 유민들이 이곳서안으로 끌려와 치욕스런 삶을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나라의 쇠퇴와 그에 따른 병란으로 장안(長安)도 파괴되어 쇠퇴하였다.현재의 시역(市域)은 명(明)나라 때 구축한 주위 13km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구시가와 교외로 되어 있으며, 명·청대에 서안부(西安府)를 설치한 바 있으나 중화민국 때에 그것을 폐지하고 산시성에 직속시켰다. 구시가는 당나라의 장안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으로, 고도(古都)의 면모를 간직하는 한편 관공서와 상점 등이 밀집해 있다.역사적 도시로 사적이 풍부하다. 남쪽 교외에 있는 쯔언사(慈恩寺)의 다옌탑(大雁塔)은 현장(玄)이 창건한 45m의 7층 전탑(塼塔)으로 그 위에서 조망하는 관중분지의 풍경이 뛰어나다. 그밖에 북서쪽에 있는 첸푸사(遷福寺)의 샤오옌탑(小雁塔)·양귀비(楊貴妃)가 목욕을 했다고 전해지는 화칭못(華淸池)·우러우사(無漏寺) 등이 유명하다. 또 성내에 있는 역사박물관(옛 孔子廟)에는 부근에서 출토된 유물이 진열되어 있고, 북쪽의 비림(碑林)에는 당·송(宋)나라의 고비(古碑)가 많이 보존되어 있다.(2) 비단의 고장(故障)실크로드는 장안(長安)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뻗는데 서쪽에는 페르시아, 남쪽으로 는 인도, 동쪽으로는 한국으로 이어지며 2000년 전 동서 문화 교류를 하였다.실크로드의 거점인 장안(長安)을 따라가며 보면 많은 문화 유적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장안(長安)에서 서쪽으로 60km를 따라 가다보면 2000년 전 한시대의 무덤들(관리, 장군, 왕족 등)이 있고 황무제의 묘가 있다. 장안(長安)의 서쪽 90km에는 세계 최대의 묘가 있는데 1300년 전 그의 장례식에는 61개국의 대표가 장례식에 참석할 정도로수량 32.9mm이다.타림분지 동쪽 변두리를 북류하는 당허강 하류 사막지대에 발달한 오아시스 도시로서,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실크로드의 관문으로, 고대의 동서교역·문화교류 및 중국의 서역 경영의 거점이 되었던 곳이다.BC 1세기 초에 한(漢)나라의 무제(武帝)는 이곳을 서역 진출의 전진기지로 삼아 돈황군(敦煌郡)을 두고 부근에 위먼관(玉門關)·양관(陽關)의 두 관문을 설치하는 한편, 둔전병(屯田兵)과 한인(漢人)의 식민을 투입함으로써 둔황은 그 발전의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 뒤 타림분지의 한 오아시스는 중국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한 변경도시로 변모하고, 서방과의 접촉지를 차지하여 한인·페르시아인·투르크인·인도인 등 여러 종족이 어울려 사는 국제성을 띤 무역도시로 번영하였다.5호 16국시대의 한족의 국가 서량(西凉:400∼421)이 둔황을 국도(國都)로 삼았던 사실은 그 발전상을 말해준다. 그보다 앞서 4세기 중엽에는 이미 이 지방의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고, 불교도 융성하여 첸포동(千佛洞)으로 불리는 유명한 석굴사원의 조영(造營)이 시작되었다. 366년 전진(前秦)의 승려 낙준(樂)에 의하여 시작된 석굴사원의 조영사업은, 그 뒤 북위(北魏)·서위(西魏)·북주(北周)·수(隋)·당(唐)·5대(五代)·송(宋)·원(元)에 이르는 13세기 무렵까지 지속되었다. 서량이 멸망한 뒤, 돈황(敦煌)은 북량(北凉)·북위의 지배를 거쳐 수·당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 무렵부터 실크로드의 두 갈래 통상로, 즉 톈산남로(天山南路)와 톈산북로(天山北路)가 차지하는 교통상의 중요성이 바뀌어, 남로에 대신하여 북로가 중요성을 더해가자, 돈황(敦煌)은 그 번영을 북동쪽의 상락현(常樂縣:지금의 安西縣 부근)에 빼앗기고, 명칭도 과주(瓜州)로 바뀌었다. 그러나 대(對)서역 방어의 거점으로서의 지위에는 변함이 없었고, 당대(唐代)에는 다시 사주(沙州)로 고쳐 병력을 주둔시킴으로써 방어 및 동서무역의 요지로 삼았다.8세기 말에는 토번(吐蕃)에 의하여 점령당하고, 9세기 중엽 이후는 당나화의 교류이자 비단길을 오가는 사신과 상인들의 오아시스였다. 돈황(敦煌)의 유명한 명소로 중국의 3대 석굴(운강석굴, 용문석굴, 돈황막고굴)중 하나인 돈황막고굴이 있는데, 대동의 운강석굴은 사방 10m가 넘고 높이 15m로 규모가 크지만 돈황의 석굴은 거의 모든 굴이 아담한 편이다. 하지만 돈황(敦煌)석굴의 벽화는 그 아름다움으로 유명하며 특히 당나라 때 벽화가 가장 아름답다. 한나라때 생긴 실크로드의 중요한 관문인 옥문관 등 도시 곳곳에서 옛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고비 사막을 지나고 포륭길을 지나면 돈황(敦煌)이다. 막고굴의 북대불전의 발견으로 돈황(敦煌)의 연구는 시작되었다.막고굴이 있는 명사산에는 수많은 석굴과 불상이 3000개가 된다. 그 안에 있는 벽화를 옆으로 늘어놓으면 54km가 될 정도로 벽화 또한 많이 있다. 서기 366년 ‘락준’이란 중이 막고굴에서 도를 닦기 시작했다. 5세기에 열린 275굴에는 본존 교각 미륵 보살(다리를 겹쳐 앉음)이 있는데 이때(5세기경)의 문화를 보면 중국 양식과 서역 양식이 혼합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북위(386~534)는 유목민이었지만 중국인의 문화 양식을 따르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불교를 신봉하여 중국에 흡수되었다.285굴은 남위시대 승려의 좌선을 위한 굴이었다. 428굴은 6세기 중국 양식의 천정을 갖고 있으며 중앙에 있는 기둥은 인도 양식을 따르고 있다. 서역과 중국의 양식이 혼합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돈황(敦煌)의 초기 특징이라 볼 수 있다.돈황(敦煌)에서 100km가면 한무제때의 최전방 보루인 ‘옥문관’이 나오는 데, 이곳은 기원전 2세기부터 실크로드의 요충지가 되었다.427굴에 있는 삼존불들은 수(581-618)나라 시대의 것들로 보여진다. 그곳에 잇는 미륵대불은 무려 26m나 되는 어마 어마한 규모를 하고 있다. 아미타래영도는 극락정토의 세계를 보여준다.벽화를 잠시 살펴보면 428굴에 있으며 6세기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초기의 비천 벽화는 무겁고 어색한 느낌을 하고 있으나 3 산다.
1. 서 론얼마 전 인터넷 뉴스에서 만리장성이 붕괴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것은 새로운 소식이 아니다. 이미 1/3은 형체도 없고, 1/3은 사라지기 직전이고, 나머지 1/3이 만리장성이라는 이름에 걸 맞는 상태로 남아있는 지경이다. 중국은 남은 장성의 보호를 위해 보수에 들어갔고, 얼마 전에는 만리장성의 한 부분인 명나라 장성의 일부를 복원했다. 만리장성의 현 상황과 만리장성을 살리기 위한 중국의 보호책은 만리장성이 갖고 있는 그 의의를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그것은 만리장성이 동서양을 아우르는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할 정도로 놀라운 건축물이기 때문이다.처음에 진시황제가 흉노족(북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을 막기 위해서 그 엄청난 일을 시작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증축, 연장되었다.이 만리장성은 달에서도 그 장성이 보인다는 말이 들릴 정도로 세계에서 유일무이하게 거대한 규모의 성이고, 유네스코에서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할 만큼 가치 있는 건축물인 것이다. 또한 매년 그 많은 관광객들을 중국으로 불러 모아 중국의 관광 산업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 역시 바로 이 만리장성인 것이다.이런 이유 때문에 만리장성은 그만큼 중국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중국을 말하기에 앞서 그들이 갖고 있는 이 위대한 문화유산에 대해 이야기 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만리장성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통해 중국에 대해 좀 더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2. 본 론1) 만리장성 (萬里長城, Great Wall of China)1987년 유내스코 세계 유산 지정동쪽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서쪽 자위관(嘉關)에 이르며, 지도상의 총연장은 약 2,700km이나 실제는 5,000km에 이를 것이다. 장성의 기원은 춘추시대의 제(齊)에서 비롯되어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연(燕) ·조(趙) ·위(魏) ·초(楚) 등 여러 나라가 장성을 구축하였다. BC 221년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천하를 통일하자, BC 214년에 그때까지 연 ·조 등이 북변에 구축했던 성을 증축 ·개축하여, 서쪽의 간쑤성(甘肅省) 남부 민현(岷縣)에서 황허강(黃河) 서쪽을 북상하여 인산(陰山) 산맥을 따라 동쪽으로 뻗어 랴오둥(遼東)의 랴오양(遼陽)에 이르는 장성을 구축함으로써 흉노(匈奴)에 대한 방어선을 이룩하였다. 다시한대(漢代)에 이르러 무제(武帝)는 BC 2세기 말에 영토의 서쪽 끝인 돈황(敦煌) 바깥쪽의 위먼관(玉門關)까지 장성을 연장하였다.진 ·한 시대의 장성은 현재의 장성보다 훨씬 북쪽에 뻗어 있었는데, 그것이 현재의 위치로 남하한 것은 거란(契丹) ·돌궐(突厥) 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즉, 북위(北魏)는 5세기 초에 장성을 보강하고, 중엽에는 수도평성(平城) 부근에 또 다른 성벽을 구축하였다. 또, 북제(北齊)는 6세기 중엽에 오늘날의 다퉁(大同) 북서쪽에서 쥐융관(居庸關) ·산하이관에 이르는 장성을 축조하고 다시 뒤이어 현재의 네이창청(內長城)에 해당하는 곳에 중성(重城)을 구축하였다. 한편, 오늘날의 허난성(河南省) ·산시성(山西省) 경계 북부를 타이항 산맥(太行山脈)을 따라 남하하는 장성도 북주(北周) 방어대책으로 그 무렵에 축조된 것인 듯하다. 그 후 수(隋)나라는 오르도스(鄂爾多斯) 남변에 장성을 구축했고, 당대(唐代)에 들어와서는 장성의 훨씬 북쪽까지 그 판도를 넓혔기 때문에 방어선으로서의 장성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또 오대(五代) 이후에는 장성지대가 북방민족의 점령 하에 있었기 때문에 거의 방치되었다.장성이 산하이관에서 자위관에 이르는 현재의 규모를 갖춘 것은 명대(明代)에 들어와서였다. 영락연간(永樂年間:1403∼1424)부터 보강이 시작되어, 정통연간(正統年間:1436∼1449)에 내장성이, 성화연간(成化年間:1465∼1487)에 오르도스 남변의 장성이 수축(修築)되고, 다시 가정연간(嘉靖年間:1522∼1566)에는 동쪽 일대의 장성이, 15세기 중엽∼16세기 초엽에는 오르도스 서쪽 끝에서 란저우(蘭州)를 거쳐 자위관에 이르는 장성이 완성되었다. 명(明)나라는 이 장성지대를 9개의 군관구(軍管區)로 나누어 구변진(九邊鎭)을 두고, 장성을 통과하는 교통요지, 즉 옌먼관(雁門關) ·쥐융관 ·구베이커우(古北口) ·장자커우(張家口) 등지에는 견고한 관성(關城)을 설치하였다.청대(淸代) 이후에는 군사적 의의를 상실하고, 단지 중국 본토와 둥베이(東北:만주) ·몽골 지역을 나누는 정치 ·행정적인 경계선에 불과하게 되었다. 한편, 축성의 재료는 햇볕에 말린 벽돌과 전(塼) ·돌 등이며, 성벽은 높이 6∼9m, 폭은 상부 4.5m, 기부(基部) 9m이다. 유네스코의 세계유산목록에 수록되어 있다.2) 오늘날의 장성오늘날 말하는 장성은 명나라에 지어진 것으로, 서쪽 가욕관에서 시작하여 요녕성 압록강변에 이르는 635만m 길이의 성벽이다.명나라가 이 장성을 쌓은 까닭은 명에 의해 멸망한 원의 잔존세력인 몽골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한 뒤 명이 줄곧 겪어야 했던 고난은 경제의 중심권인 중부 황하유역과 남부 양자강 유역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과 북경 가까이까지 습격해 들어오는 몽골족과의 잦은 마찰이었다. 그래서 명조는 동쪽 발해만의 산해관(山海關)으로부터 영토의 서쪽 끝이었던 가욕관에 이르는 장성을 증·개축하고 장성지대를 9개 관구로 나누어 백만명에 가까운 병력을 배치했다.현재의 장성은 기원전 221년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던 진시황이 흉노족을 막기 위해 130만명의 군병과 농민을 동원해 춘추시대 제나라로부터 전국시대의 연·조·위·초 나라가 각각 쌓았던 성벽을 잇고 증·개축했던 장성보다 남쪽으로 내려와 있다. 그러나 현재의 장성은 20여 왕조가 2천여 년에 걸쳐 축성하면서 얻어낸 기술과 방어술을 바탕으로 증·개축했기 때문에 더 견고하고 정연하며 그 길이 또한 길다.초기의 축성재료는 야산에서 얻은 바위와 흙으로 빚어 햇볕에 말린 벽돌이었으나, 명대에 와서는 견고한 화강암과 전(塼) 곧 흙을 구워 만든 벽돌로 대체된다. 성벽의 높이는 6~9미터에 외벽과 내벽의 너비는 5미터 안팎. 말 5필이 나란히 지나거나 병사 10명이 일렬횡대로 걸을 수 있는 폭이다. 외벽과 내벽 사이에는 너비가 한 뼘쯤 되는 배수로를 놓고, 내벽 쪽을 좀 낮게 기울게 해서 비가 오거나 눈이 녹을 때 흘러내리게 돼 있다.축성술은 이처럼 비교적 단순하다. 그러나 장성이 지나는 지역이 전략상의 요충지로서 대부분 해발 1000미터가 넘는 산악지역인데다 운반수단이라곤 들것 밖에 없었던 당시 이 같은 대역사를 어떻게 인력으로 해낼 수 있었을까 하는 점에서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만리장성은 외침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중국 절대군주들의 강한 자존심과 그를 떠받든 백성들의 끈질긴 인내심이 결합되어 촉조된 땀과 눈물의 결정인 셈이다. 그러나 만리장성은 만주족이 세운 청대에 와서는 군사적인 의의를 잃고 만다. 만주족에 의해 북방민족이 모두 토벌됐기 때문이다. 그 후 장성은 중국 본토와 만주 그리고 몽골지역을 나누는 행정적인 경계선이 되고 있다.
1. 서 론중국의 고대사를 들여다보면 반드시 부딪히게 되는 숙제와도 같은 명제가 있었는데 이는 바로 중국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황하(黃河)의 위치이다.현재 중국의 가장 대표적인 강은 그 길이에서나 중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으로 보면 황하이다. 그래서 고대 문명의 발생지인 황하는 지금도 중국인들은 황하무친(黃河母親) 이라고 하여 황하를 자신들의 정신적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다.중국에서 발견된 나름의 문명흔적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바로 1921년 스웨덴 지질학자에 의하여 발견된 양사오(仰韶)문화의 유적이다. 이는 황하유역을 중심으로 기원전 5천년 전쯤에 산시성(陝西省) 일대에서 후베이성(湖北省) 북부에 널리 걸쳐 있던 석기문화의 씨족사회 유적이다. 그 뒤 2차 세계 대전 직전에 발견된 기원전 2,500 여년쯤의 룽산(龍山)문화 역시 황하의 하류인 허난성(河南省)과 산동성(山東成)을 중심으로 더욱 발전된 신석기 문화의 유적이다. 물론 이는 대부분 황허강 유역의 석기문명을 기반으로 한 씨족사회의 모습이었다. 중국인들의 전설에 따르면 중국역사상 가장 먼저 왕의 자리에 오른 '황제(黃帝)'이후 요(堯)와 순(舜)임금의 시대를 거치며 이른바 요순시대라 하여 지금도 중국에선 태평성대를 일컫는 대명사로 통할 정도의 번영기를 통해 국가의 기틀을 마련해간다. 순임금 이후에 들어선 우(禹)임금이 바로 황허의 물길을 관리하는 사람이었다는데서 중국역사의 시작은 황허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요순의 태평성대에도 황하의 범람은 여전하여 백성들의 가장 큰 우환거리였는데 우 임금이 그 물길을 잡은 후 범람이 잦아듦에 따라 문명이 더욱 번성하였다. 따라서 중국 문명의 발전은 황허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또한 은주시대와 춘추전국시대를 거친 뒤 진시황이 중국대륙을 통일했을 때도 황허를 중심으로 그 상류로부터 하류에 펼쳐져있던 제후국을 통일했고 진(秦)나라 이후 한, 수, 당, 송 등 통일제국의 수도는 줄곧 황허 유역의 장안(長安, 지금의 西安), 낙양(洛陽), 개봉(川)으로서 제방을 쌓아도 쉽게 무너지기 쉬어 강수량이 조금만 늘어도 수많은 생명을 바쳐야만 했다는 것이다. 그럼 왜 중국인들은 이처럼 사나운 황허의 물줄기에 그들의 터전을 마련했던 것일까? 그것은 거의 밀가루처럼 부드러운 흙이 수천만 년에 걸쳐 퇴적되었기에 토양이 부드럽고 영양분이 많아 원시적인 목제 농기구를 이용해서도 쉽게 농작을 할 수 있는 비옥한 농토였기 때문이다.이처럼 황하는 단순한 역사의 주인공이 아닌 현재 중국 사회의 발전을 비추는 또 다른 스펙트럼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기에 중국과 함께 흐르고 있는 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황하를 알아보는 것은 중국 문화를 이해하는데 전반적인 도움이 되리라 생각되어 황하강의 근원, 강을 따라 발생한 문명을 알아보고자 한다.2. 본 론1) 황하강(黃河江)의 근원(根源)黃河之水 天上來 -이태백황허강 중·하류는 중국문명의 요람지(搖籃地)로서 이름 높다. 유역에는 산시성 란톈현(藍田縣)에서 발견된 란톈원인(藍田原人)의 유적을 비롯한 채도(彩陶) ·흑도기(黑陶期)와 은(殷)나라의 유물이 수없이 발견되었고 그 밖에 역대 왕조의 사적도 무수히 남아 있다.길이는 5,464km, 유역면적 75만 2443㎢이다. 신성한 암네마친 산맥의 서쪽 500km에서 시작하여 정예성과 티베트를 지나 발해까지 중국 대륙을 가로 지르고 있다. 황하의 역사는 중국 문명의 역사와 함께 하고 있는데 황하강 중류 유역에서 발생한 양사오(仰韶)문화와 갑골문자의 번성으로 이를 증명할 수 있다. 강의 근원이 잘 알려지지 않아 한무제, 당태종, 쿠빌라이, 명태조, 강희제, 건륭제는 군사를 파견하여 강의 근원을 알아오도록 시켰다. 그것은 ‘황하를 지배하는 자’가 ‘천하를 지배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강의 근원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다 보면 티베트어로 ‘황하 상류’라는 이름을 가진 마토우족이 살고 있다. 일년에 4번 정도 거주지를 이동하는 특징을 갖고 있으며 보리를 주식으로 생활하고 있다. 조금더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이라쳐져서 한 달 뒤에 중국을 휘돌아 흐르는 거대한 강 ‘황하’를 형성한다.습지를 지나 쓰촨성(四川省)을 지나 폭 10m의 좁은 협곡으로 침식한다. 북쪽 칭하이성(靑海省)남동부를 동류하여 경계에 이르고 지스산맥(積石山脈) 동단을 굽어 간쑤성(甘肅省)을 지나 동고리 사막을 지난다. 시닝(西寧) 남쪽을 동류, 류자샤(劉家峽)의 협곡을 지나 간쑤성 란저우(蘭州)에 이르러 북동으로 유로를 바꾸고, 닝샤후이족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의 인촨(銀川) 동쪽을 지나 내몽고(內蒙古)자치구 오르도스 지방으로 들어간다. 다시 바오터우(巴頭) 부근을 동류한 다음 산시성(山西省) 허취현(河曲縣) 부근에서 남하하여 퉁관(潼關) 부근에서 또다시 동으로 진로를 바꾸어 싼먼샤(三門峽)를 거쳐 산시와 허난성(河南省) 경계를 흘러 황토고원(黃土高原)을 관통하여 화베이평야(華北平野)로 들어가 산둥성(山東省) 컨리현(墾利縣)에서 보하이만(渤海灣)으로 들어간다.황허강은 흘러내리는 토사에 의해서 화베이평야의 대부분을 형성한 만큼, ‘물 1말에 진흙 6되’라고 할 정도로 유수(流水) 중에 포함된 진흙의 양이 많아서 1년에 13억 8000만 t의 진흙이 하류로 운반되고 있어 토사 함유량으로는 세계 제일이다. 진흙이 많기 때문에 하구의 해안선이 3년 동안 10km나 전진하고 있으며, 하상(河床)의 상승 또한 빨라 천정천(天井川)이 되어 난류(亂流)하였다. 이따금 제방을 파괴하여 북쪽으로 하이허강(海河)에서 남쪽으로 화이허강(淮河)까지의 넓은 평야 위를 흐르면서 때때로 다른 하천의 유로를 빼앗아 유로를 바꾸며 흘렀다. 따라서 과거 3,000년 동안 범람과 제방의 파괴는 1,500회 이상, 하도(河道)의 변천은 26회에 이르고 특히 큰 하도 변화도 9회나 되며 그 피해도 막대하였다.2) 민족(民族)과 문명(文明)의 요람황하 문명은 중국 황하강 중류, 하류 지역에서 발생한 문명이다. 황허 문명의 연대 범위는 농경이 시작된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가 나타난 은나라, 철기가 거의 완전히 보급된 전한시대(前漢時代)까지라고 할 사람들은 주로 조를 재배하였으며 조, 수수 등의 곡물 외에 채소도 재배했으며, 개, 돼지 등 가축사육과 병행하연 수렵, 어로도 행해졌다. 대표적인 곳이 허난성의 양사오이므로 이 문화를 양사오 문화라 한다. 유적은 허난성 서부, 산시성[山西省] 남부, 산시성[陝西省] 중부에 널리 분포하는데, 그것들은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의 반포[半坡]유적을 표준으로 하는 반포 유형의 문화와 허난성 산셴[陝縣]의 먀오디거우[廟底溝]유적을 표준으로 하는 먀오디거우 유형의 문화가 있다. 전자(前者)는 채도가 적고 토기의 무늬는 단순한 동물무늬 등이 특색이며, 후자(後者)는 채도가 비교적 많고 토기의 무늬는 기하학무늬를 주로 하여 변화가 많다. 이때는 완전한 정주생활을 하고 있었고, 취락은 규모가 컸으며 환호를 둘러 그 안쪽에서 살았고 바깥쪽에 요업장, 공공묘지가 있었다. 양사오 문화 초기에는 집단 합장과 동성(同性) 합장이 성행했고 몇 백 명이 함께 매장되었으며, 머리는 서쪽을 향하게 해서 질서 있게 안치했다. 각 묘지의 규모와 수장품은 차이가 별로 없었으나, 여자의 수장품이 남자보다 약간 많았다. 이는 당시가 모계사회였음을 설명해준다. 토기는 모래가 섞인 회도가 많이 만들어졌고 물고기무늬 등을 그린 채도는 양사오문화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유적의 분포범위는 매우 넓어 산시성 남부, 허난성 서부일대의 황토고원을 중심으로 동쪽은 허난성 동부와 허베이성 남부, 남쪽은 한수이강 중류역, 서쪽은 웨이수이강 상류 및 황하강 중류의 타오장강 유역, 북쪽은 오르드스 부근까지 이른다. 신석기 시대가 끝날 무렵 청동을 사용하게 되자 우수한 쪽이 다른 쪽을 제압하여 왕조를 건설하고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다.(2) 갑골문자 (甲骨文字)중국 은(殷)나라 때 점치는 데 사용했던 귀갑(龜甲) ·우골(牛骨)에 새긴 문자를 말한다. 귀갑문자 ·귀갑수골문자(龜甲獸骨文字)라고도 한다. 이것이 발견된 것은 청(淸)나라 말기 1899년 국자감 제주였던 왕의영(王懿榮)이 말라리아를 오래 앓았는데 이를 치료하기 ‘은허복사(殷墟卜辭)’ 또는 간단히 ‘복사’라고도 한다. 귀갑이나 짐승의 뼈를 사용한 복점은 신석기시대부터 행해졌지만, 여기에 문자를 새긴 것은 오직 은나라시대만의 특색이다. 그 후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반경(盤庚) 때부터 은말(殷末)까지 약 2백 수십 년에 걸친 것으로, 보통 이것을 5기(期)로 나누어 연구하고 있다. 내용은 제사(祭祀) ·군사(軍事) ·천상(天象) ·전렵(田獵) ·농경(農耕), 임금의 행행(行幸)과 안부(安否)에 관한 것이 많고, 이것으로 은대의 정치 ·사회 ·경제 등이 밝혀져서 전설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던 은왕조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왕조임이 실증되었다.(3) 각 시대별 문화유물시대유물내용신석기시대(Neolithic Period)- 유물명: 조개무늬 호로병- 연대: 신석기시대- 출토지: 서안 반포- 유물명: 도첨저병, 뾰족한 병- 연대: 신석기시대- 출토지: 서안 반포상대시대(Shang Dynasty)- 유물명: 청동 봉주단- 연대: 상대- 출토지: 섬서성- 유물명: 청동 가면- 연대: 상대- 출토지: 섬서성서주시대(Western Chou)- 유물명: 호진문 청동작- 연대: 서주- 출토지: 섬서성 경양현 고가보- 유물명: 청동편종- 연대: 서주- 출토지: 섬서성- 유물명: 청동 외숙정- 연대: 서주- B.C.1100~771- 출토지: 섬서성- 유물명: 청동 양기로- 연대: 서주- B.C.1100~771- 출토지: 섬서성 경량현(4) 각 시대별 특징① 신석기 시대중국 신석기 시대의 문화는 황하중류의 양사오(仰韶)문화이다. 양사오(仰韶)문화의 대표적 유적지인 서안 반파촌에서는 저장된 좁쌀과 가축으로 사육된 돼지뼈가 발굴됨으로써 이들이 농경생활과 가축사육을 하며 곡물을 토기에 저장했음을 알 수 있다. 양사오(仰韶)문화기에는 비교적 고운 점토로 물고기나 사슴, 기하학적무늬나 사람 얼굴을 한 물고기 모양 등을 새긴 아름다운 토기인 채도를 제작하였다.양사오(仰韶)문화의 토기는 매우 실용적이며 미관이 뛰어나고 도안 및 조형이 다채롭다. 잔이나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