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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의 축제
    축제의 나라, 프랑스프랑스는 ‘축제의 나라’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몇몇 친구가 함께 보내는 생일파티부터 한 가족이 모여 보내는 저녁시간, 프랑스인 모두의 축제인 새해와 성탄절, 각 지방 자치단체 별로 벌이는 문화축제, 수많은 영화와 음악축제 등 일 년 내 내 축제가 끊이지 않는다.프랑스인들에게 축제는 사회구성원들 사이의 유대관계를 긴밀하게 만드는 강력한 연결고리가 된다. 우리 사회에 비해 가족 구성원 사이의 관계가 긴밀하지 못하고, 학교 동창이나 반 또는 학과, 직장 등 기존의 사회 구조 속에서 구성원 간의 관계가 친밀하지 못한 독립적인 프랑스에서, 축제는 전혀 다른 사회적 구성원들이 함께 만나고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특히, 나이에 대한 차별이나 배타성이 없는 것이 프랑스인들 축제의 서역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파리의 축제는 축제 본래의 성격이 그러하듯이 개방적이다. 서로 다른 계층과의 만남의 장소이고, 낯선 문화를 맛볼 수 있는 기회이다. 그런 점에서 프랑스 사람들은 축제가 주는 모험을 즐긴다.프랑스 축제는 어떤 의미에서 미래지향적이라 할 수 있다. 종교축제처럼 단순히 과거의 인습을 반복하는 축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축제는 각 분야에서 새로움을 추구한다. 새로운 가치의 지향, 새로운 물질문명에 대한 개방, 새로운 미학에 대한 추구 등 프랑스인들에게 축제는 일상의 탈출이며, 미래에 대한 꿈이라고 할 수 있다. 전혀 다른 언어와 인종, 종교, 관습이 뒤섞인 사회에서 축제는 기쁨을 나누고 서로를 이해하며 하나가 될 수 있게 하는 기회이자, 필수적인 요소이다.따라서 프랑스에는 라틴문화와 게르만 문화가 융합되어 다양한 문화를 갖고 있는 특색 있는 축제들이 넘치고 있다. 프랑스 전역에서 1년에 열리는 축제가 500개 이상일 만큼 프랑스인들은 대체로 즐기는 것에 열정적이다. 예술과 문화가 발달한 나라답게 봄에는 파리 카니발, 한여름에 야외에서 즐기는 음악축제와 파리 에어쇼, 플라주 축제, 10월에 열리는 하얀밤 축제와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국경함께 할 수 있는 놀이 시설이 마련된다.오트쿠튀르 Haute Couture패션의 중심지인 파리에서는 매년 2월에 가을/겨울 컬렉션, 10월 초에는 봄/여름 컬렉션이 열린다. 카루셀 뒤 루브르(Carrosel du Louvre)를 비롯, 여러 곳에서 열리는 패션쇼장 입구에서 세계적인 셀레브리티와 패션피플들을 구경할 수 있다.1868년에 설립.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된 오트 쿠튀르(Houte couture)는 우리말로 고급맞춤복을 의미한다. 오트 쿠튀르는 독창성과 예술성을 중시하는 패션을 지향하고 있다. 상류층 또는 유명스타들이 디자이너의 패션쇼를 본 후 자신이 구입하고 싶은 옷을 정하고, 디자이너가 구매자의 신체사이즈를 측정하고 난 후, 구매자가 선택한 동일디자인으로 사이즈만 다르게 해서 만든 후 판매한다. 옷 전부를 핸드메이드 작업으로 완성시키며 창작 바느질과 전통적인 노하우를 바탕으로 하는, 말 그대로 예술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격은 어마어마하다고 한다. 오트 쿠튀르는 고급스러움과 우아함의 대명사가 되며 유행을 창조하고 패션 각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오트쿠튀르 컬렉션는 매년 1월과 7월에 열리는데, 이곳에서는 예술성 높은 옷이 소개된다. 실용성은 떨어지기 때문에 출품된 옷을 실제 고객들이 입는 것은 매우 드물다. 하지만 오트쿠튀르에 소개된 브랜드는 인지도가 높아져, 기성복을 비롯한 다른 제품들의 매출이 향상되는 효과를 얻는다.오트쿠튀르 컬렉션은 세계인의 주목을 받아 세계 언론의 뉴스거리가 되며 매 패션쇼 시즌마다 1천명 이상의 기자들이 파리를 찾게 한다. 파리 오트쿠튀르 컬렉션은 화려함의 극치로 누구나 보기를 원하지만 아무나 입장할 수 없으며 기자, 부자, 유명인들만 관람이 가능하다. 참가하는 디자이너의 수준과 그 숫자 또한 협회에서 엄격히 관리한다. 패션쇼에서 발표된 모델들은 법적으로 보호를 받게 되며, 오뜨 꾸뛰르가 자신의 모델의 패턴을 타사에 판매한 경우에만 Copy가 허용된다고 한다. 판매보다는 보여주기, 서비스, 명예, 부의 상징인 것이다.콘서트를 비롯해 거리의 크고 작은 카페에까지 프랑스 전역의 도시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으로 넘쳐난다. 전문적인 음악인이든 취미생활 삼아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든 관계없이 아무 곳에서나 연주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날은 프랑스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공연장이 된다. 이런 장점을 살려 음악을 사랑하지만 주머니 사정상 평소에 자주 음악회를 관람하지 못했던 일반인들이 오페라 바스티유 등의 고급스러운 장소를 찾아보는 날이기도 하다. 하루 종일 온갖 무료공연이 벌어지는 관계로 음악애호가들에게는 연중 가장 바쁜 날이다. 클래식공연을 듣다가는 장소를 바꾸어 재즈를 듣고 또 그런가하면 또 록음악을 들으러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게 된다. 공연장소를 옮겨다닐 때에도 길거리 혹은 지하철에서 연주하고 있는 수많은 음악가들을 만날 수 있으니 정말 이 날 하루만큼은 하루종일 라디오를 켤 필요없이 음악에 푹 잠길 수밖에 없다. 음악 축제의 준비는 몇 일전부터 무대 설치가 이뤄지기도 하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축제 당일 집에서 달랑 엠프와 기타 하나 챙겨 들고 나와서 길모퉁이에 자리를 잡는 것으로 축제 준비가 끝나기도 한다.파리의 음악 축제는 오전이 지나고 나서 점심 무렵부터 축제의 열기가 서서히 피어 오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열기가 전해지는 곳은 조용한 도서관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어디에서인가 들려오는 음악 소리가 도서관의 고요한 적막을 깨고 학생들의 관심을 집중시킨다. 다른 날이라면 불평과 불만이 쏟아지겠지만 이 날만큼은 다들 즐겁고 유쾌한 방해를 용인해주는 분위기다. 오후가 되고 날이 저물어 갈수록 음악 축제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지는데 밤이 되면 그 열기가 절정에 이른다.파리 음악 축제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도 감상 할 수 있지만, 이와 더불어 다양한 국적의 전통 음악도 만나 볼 수 있다. 프랑스의 오랜 이민 역사가 말해주듯, 특히 파리에서는 다양한 국적의 문화가 프랑스 문화와 함께 공존하고 있다. 그래서 음악 축제 때는 이런 문화적 다양성도 함께 느낄 수 있다. 공식 홈페이지에는 해 10월 첫째 주 토요일에 열리는 뉘 블랑쉬(Nuit Blanche, 직역하면 '하얀 밤') 행사는 저녁 7시에 시작하여 아침 7시까지 장장 12시간 동안 밤을 지새우며 행해지는 예술과 문화를 위한 축제이다.하얀 밤 축제는 2002년 파리 시장인 베르트랑 들라노에에 의해 시작된 축제로, 일반인들로 하여금 여러 다른 장소들을 방문할 수 있게 하고, 다양한 문화행사에 참석할 수 있게 한다. 처음에는 20만 명 정도가 참석했으나 지금은 150만 명 정도가 참여하고 있으니 파리 시민들의 축제에 대한 관심을 짐작할 수 있다. 2002년에 50만명이 참여하여 그 첫 번째 밤을 밝힌 이래 이 축제는 파리에서의 성공사례를 본받아 그 이후, 브루셀, 시카고, 마드리드, 몬트리올, 로마, 티라나, 텔 아비브, 상 파울로, 토론토, 리즈 그리고 상하이에서도 같은 이름의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하룻밤 사이에 파리를 돌아보며, 현대예술을 즐기고 감상하는 파리의 ‘하얀 밤 축제’는 몇 가지 특징을 갖는다.첫째는, 도시 공간 속에서 모두에게 개방된 행사이기 때문에 문화엘리트주의와는 거리가 먼, 대중 모두를 위한 문화행사인 것이다. 생활의 공간인 파리 도심에서 열리는 행사이고, 주말에 열리는 행사이기 때문에 직장이나 비용에 대한 걱정 없이 누구든지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일 것이다.둘째는, 도시 공간 속에 현대예술작품을 설치함으로써 도시 공간 자체가 예술의 공간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파리는 이러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퐁피두센터를 비롯한 많은 문화기관 주변 광장들이 그랬고, 라 데팡스(La Defense)라는 현대도시가 그랬다. 직장과 주거와 오락과 예술이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에 대한 꿈을, 오히려 고색창연한 얫 도시인 파리가 현대예술을 통해 실현하는 것이다.셋째는, 시민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또 다른 시간을 예술축제를 통해 만드는 것이다. 대부분의 축제들이 그런 것처럼 프랑스인들은 축제를 통해 낯선 이들과 기쁨을 나누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나간다.2002게 하며, 어린아이들은 강변 옹벽에 마련된 시설에서 암벽타기를 할 수 있으며, 이 기간에 곳곳에서는 팝, 락 샹송, 재즈 콘서트가 열리고 저녁이면 강가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서는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파리 플라주 기간에 차량 통행이 전면 통제된다. 매년 300만명 가까이 이곳을 찾는다.7월 14일 프랑스 혁명 기념일 Quatorze Juillet, Fёte nationa이 축제는 프랑스어로는 7월 14일을 뜻하는 '카토즈 쥐예()'또는, '페트 나시오날(Fёte national)'이라고 불리며 13,14일 이틀에 걸쳐 성대하게 치러진다.프랑스혁명 기념일은 1789년 7월 13일 밤 성난 군중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부수고 정치범들을 석방시켰던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축제일이며, 이제는 세계인이 공유하는 보편적 이념이 된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을 기리는 경건한 날이다.그들이 이 날을 가장 중요한 국경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100여 년 전 인 1889년에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거대한 에펠탑을 세웠고, 1989년에 사회당 정부가 혁명 200주년을 기념하여 국립 바스티유 오페라관을 건립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혁명 기념일의 화려한 축제나 구경거리는 14일 당일이 아니라 13일 저녁에 집중되어 있다. 혁명 기념일 전야, 프랑스 전역의 모든 거리는 뜨거운 축제장으로 변한다. 거리에서 한판의 거대한 음악 축제가 벌어지는 것을 시작으로 밤 늦게까지 거리 곳곳에서 사람들은 춤추고 노래하고 술을 마신다. 물론 가장 뜨거운 축제의 열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은 혁명의 현장인 파리 바스티유 광장에서다. 토론하기 좋아하는 프랑스 사람들이지만 적어도 이날만큼은 좌파도 우파도 없다. 파리를 처음 찾는 외국인 관광객 중에서 아무나 보면 끌어안고 '비주(뺨을 서로 비비는 프랑스 특유의 인사법)'를 하려고 다가오는 프랑스 사람들을 피해 도망치는 촌극을 빚는 경우도 왕왕 있다. 그들이 파리 거리 거리를 누비고 다니면서 밤늦게까지도 귀가하지 않는 것은 밤 10시반쯤에 있는 화려한 었다.
    생활/환경| 2013.04.21| 11페이지| 1,000원| 조회(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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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잔틴제국의 ‘이콘’과 보드리야르의 ‘시뮬라르크’
    비잔틴제국의 ‘이콘’과보드리야르의 ‘시뮬라르크’과목명: 비잔티움문화와예술의이해Ⅰ. 8-9세기 비잔티움의 이콘논쟁에서 나타난 ‘이미지’ 문제이콘은 7세기에 들어와 그리스도의 성육신와 그리스도의 신인성이 확립됨으로써 이콘 역시 그리스도처럼 보이지 않는 초월자의 가시적 형상으로 간주되어 비잔티움 제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교회의 내부와 외부에서 자신들의 경건한 신앙심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전례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었다.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콘에 대한 왜곡과 몰이해, 그리고 이콘의 지나친 남용이 점차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레오 3세의 등장과 함께 이콘파괴론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726년, 소아시아에 남아있던 네스토리우스파와 단성론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레오 3세는 콘스탄티노플 황궁의 청동 대문에 있던 예수 그리스도의 이콘을 제거하고 이콘 공경을 공식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는 비잔티움 제국의 이와 같은 혼란이 비잔티움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성모, 성인들의 이콘 앞에서 모세의 율법을 어기고 기도를 드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즉 우상 숭배로 인한 신의 분노를 혼란의 원인으로 삼았다. 730년에는 모든 비잔티움 교회의 종교 미술을 제거하라는 칙령을 발표했다. 또한 이콘옹호론적 입장을 갖고 있던 게르마누스 총대주교를 파면하고 이콘파괴론자인 아나스타시우스를 총대주교로 선임하여 자신의 칙령에 서명함으로써 본격적인 이콘 파괴와 이콘옹호론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콘파괴의 정점은 레오 3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 때 절정에 이르게 된다. 거의 문맹에 가까웠던 아버지와는 달리, 그는 좀 더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했다. 히에레이아 궁에서 754년에 개최된 공의회에서 이콘파괴가 그리스도교의 정통으로 자리잡게 하기 위한 논의가 벌어졌다. 이콘은 ‘공식적’으로 파괴되었고, 이콘옹호론자들 역시 ‘공식적’으로 박해 받게 되었다. 이콘파괴론은 787년 이레네 황태후에 의해 소집된 제7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폐기 되지만, 이콘파괴론자들의 패배는 오래가지 않았고이 아니라, 지금까지 세계 문화사 속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하게 대두되었던 이미지전쟁 또는 이미지의 위기라고도 말할 수 있다.이콘논쟁의 가장 큰 원인은 이미지를 숭배의 맥락에서 사용해야하는가, 사용하지 말아야하는가의 문제였다. 과거 그리스도교는 종교 미술을 사용하는 데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의 모태가 되었던 유대교의 우상파괴 전통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전통을 바탕으로 이콘 파괴론자들은 이미지 자체의 물질적 성격을 인정하여 이콘공경은 곧 우상숭배이고 잘못된 것이라고 비난하였다.이콘파괴론자들이 이미지의 물질성을 인정하였다고 해서 반대로 이콘 옹호론자들이 이미지의 물질성 자체를 부인한 것은 아니다. 단지 이미지의 감각적 물질성이 물질성 자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즉 영혼 또는 정신과 관계될 수 있다는 관점을 취한다. 나아가 사람들이 이미지 그 자체를 신성한 것으로 숭배한 것이 아니고 그저 숭배의 가치를 지니는 성스러운 그 무엇을 대신 묘사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한 근거로 이미지를 경배하는 그리스도교도가 곧 우상숭배자라는 이콘파괴자들의 논리를 단호하게 부정하였다. 또한 그들은 이콘이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무관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콘을 통해 그리스도의 육화를 이미지로 그림으로써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즉, 이콘 옹호론자들에게 이콘 공경은 우상 숭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제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였다.Ⅱ. 장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에서 나타난 ‘이미지’ 문제장 보드리야르는 1981년 출판된 그의 저서에서 새로운 이미지의 시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시뮬라크르란 이미지의 조작으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은 인공물을 말하고, 시뮬라시옹이란 시뮬라크르 작용, 시뮬라크르화 된 상태를 의미하며, 현대를 시뮬라시옹이 지배하는 시대라고 규정하였다.전통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미지는 인간이 표현하고자 하는 이념이나 이상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즉 재현된 이미지와 지시대상은 .그런데 보드리야르는 전통적인 모방이나 재현과는 다른 개념으로서 시뮬라크르를 정의한다. 본질과 재현의 문제는 시뮬라크르에 와서는 부차적인 문제가 되었다. 시뮬라크르는 이미지와 지시대상의 등가 원칙을 거꾸로 하여 지시대상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을 전제로 한다. 시뮬라크르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은 일종의 가상물인 것이다. 이것은 원본이 없는 이미지로서 오히려 그 자체가 현실을 대신하고 현실은 시뮬라크르에 의해 지배받게 된다고 한다. 이 원본 없는 이미지가 그 자체로서 현실을 대체하고, 현실은 이미지에 의해서 지배받게 되므로 이미지는 오히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것, 실제보다 더 실제적인 것이 된다. 시뮬라크르는 아울러 어떤 기왕의 실제 존재하고 있는 것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독자적인 하나의 현실이라 할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지금까지 실제라고 생각하였던 것들이 바로 이 비현실이라고 하였던 시뮬라크르로부터 나오게 된다. 과거의 이미지란 실제 대상을 복사하는 것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상황이 완전히 전도되어 오히려 실제 대상이 가장된 이미지를 따라야 하는 것이다.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순환논리는 이미지의 존재론적 특징을 잘 설명해준다. 그에 따르면 과거의 전통논리에서의 시간이란 무한으로 향해있으며, 한번 지나간 것은 다시 되돌아오지 못하는 직선의 길 위에 있지만, 시뮬라시옹의 시간은 원적 혹은 타원적인 유한의 영역 내에서 끝없이 순환 반복한다. 첫 번째는 두 번째가 있기 때문에 첫 번째가 되고, 이러한 논리에 따른다면 순서나 질서의 의미는 완전한 허구임이 드러난다. 소위 절대적 근원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이 원리에 따르자면 시뮬라시옹에서 이미지는 실제와 가상은 서로의 순환되는 원리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존속시킨다. 가상은 실재를 존속하게 하는 두 번째이며, 두 번째가 존재하고 있지 않는 첫 번째는 무의미하다는 이론인 것이다. 가상이 존재하기 때문에 실재가 존재하고, 실재가 존재하기 때문에 가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다른 이미지만이 존재하게 된다.보드리야르는 이러한 이미지가 만들어 지는 과정을 네 단계로 설명한다. 첫 번째 단계에서 이미지는 사실성을 깊이 반영한다. 이미지는 실재의 반영으로서 선량한 외관이자 신성한 계열인 것이다. 이것은 기호가 어떤 실재를 반영하는 단계이다. 이것은 과학적 언어나 지시적인 언어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단계에서 이미지는 사실성을 감추고 변질시킨다. 즉 실재를 은폐하고 왜곡시키기 때문에 나쁜 외관이며 저주의 계열이 된다. 이 단계는 기호에 의해 이데올로기나 이론이 소비자인 대중으로 하여금 소외와 착취의 실상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소위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단계에서 이미지는 사실성의 부재를 감춘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위장하는 것이다. 이 단계는 외관을 연출하는 마법의 계열이다. 여기서 기호는 어떤 기본적인 실재의 부재를 은폐하려고 시도한다. 이에 대해 보드리야르는 신성파괴자들이 신의 부재를 신의 성상이 증명한다고 믿었기에 성상을 두려워 하고 경멸했던 것을 예로 든다. 마지막 네 번째 단계에서 이미지는 사실성과 무관하다. 사실에 대한 어떠한 지시 관계도 없는 시뮬라크르가 되는 것이다. 기호는 실재의 지시대상과 전혀 무관한 진짜 가짜가 된다. 이렇게 되면 기호와 실재 사이의 거리가 없어지게 되고, 기호는 실재를 지시하지 않는다. 즉 기호는 실재와의 거리를 유지하지 않으며 또한 거리를 유지할 수도 없기 때문에 기호는 하나의 실재가 된다. 그런데 여기서 기호는 실재의 역할을 하는 모조품이므로, 진짜와 가짜의 구별이 없어지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구별은 사실상 공허한 구호가 되는 것이다. 즉 지시대상이 사라지고 시호체계 안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시뮬라크르는 더욱 강화되어, 결국 이미지는 자기 자신의 순수한 시뮬라크르가 된다. 원본이 있는 재현과 다른 개념의 시뮬라크르는 어떤 현실세계와도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독자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은 이전에도 행해져 왔지만, 막 단계에 이르러 조작 가능성, 완벽한 통제와 관리가 가능한 시뮬라시옹이 재현된다고 보았다.Ⅲ. 이콘 논쟁과 시뮬라시옹의 ‘이미지론’ 비교분석우리는 이미지의 실체와 허상에 대한 이해를 보다 높이기 위해 비잔틴 세계의 이콘논쟁과 보트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이론을 접목시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콘 논쟁과 시뮬라시옹에서의 이미지론의 유사점과 차이점은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에 정말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이콘은 초기 그리스도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난 다양한 형태의 그리스도 이미지를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용어이다. 좁은 의미로는 나무판자위에 형상화된 성스런 이미지를 의미하며 사제의 축성을 받은 성물로 인정된 대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신의 형상이나 성스러운 것을 그려놓은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비잔틴 사람들에게 이러한 이콘은 신와 자신을 연결시켜주는 매개체였다. 공경의 대상이었고 신을 대신하는 존재였다. 이런 맥락에서 살펴보면, 이콘의 이미지는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시뮬라크르와 일정부분 관련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콘 속 신의 이미지가 시뮬라크르라고 쉽게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이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그렇다면 가장 먼저 비잔틴의 이콘이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시뮬라크르와 어떤 유사점이 있으며, 어떤 점에서 시뮬라크르적 성격을 띨 수 있는지 신의 존재 유무에 따라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다.무신론자의 입장에서,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신이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라면 이콘은 필연적으로 시뮬라크르가 될 수밖에 없다. 시뮬라크르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은 인공물인데, 이콘 역시도 존재하지 않는 신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것에 불과하게 된다.신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시뮬라시옹에서 말하는 ‘존재’의 의미를 이 땅, 현실세계에의 물질적 존재로 국한한다면, 이콘은 시뮬라크르의 성격을 띨 수 있다. 이콘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다른 차.
    인문/어학| 2013.04.21| 7페이지| 2,000원| 조회(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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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학 관련 책 독후감
    저서명 : 저자명 : 석혜원출판사 : 미래의창출판연도 : 2008년 11월 15일Ⅰ. 들어가는 말경제학 수업 첫 번째 개인과제로 각종 문헌을 통해 시대적 변천에 따른 경제학의 흐름을 돌아보는 과제가 주어졌다.관련 문헌들을 찾기 위해 집 근처 도서관으로 향했다. 경제사상사나 경제사 등 경제학을 다룬 관련 문헌이 정말 다양하게 비치되어 있었는데 [이야기로 읽는 대한민국 경제사]라는 책이 특히 내 눈에 띄었다.나는 처음부터 과제에서 주어진 여러 가지 주제들 중에서 한국 경제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역사과목에, 특히 현대사 부분에 취약했던지라 한번쯤 현대사를 차근히 되짚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싶었다.경제학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현대사 흐름에 따라 대한민국의 경제사를 살펴보는 것은 그동안 미뤄왔던 대한민국의 현대사공부와 이 과제의 목적인 경제사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되었고, 마침 이 책을 발견하여 선뜻 선택하게 되었다.Ⅱ. 책 내용1장. 혼란과 빈곤의 시대(1954년 제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고 조선은 패전국인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나 남북 이념의 대립, 그로 인한 1950년 한국전쟁으로 정치적으로는 물론 경제적으로도 혼란과 빈곤이 지속되는 시대였다.)?일본인들의 예금인출사태 : 한국이 해방되면서 조선을 떠나야 했던 일본인들이 한꺼번에 금융기관의 예금을 찾아서 일본으로 송금하거나 예금을 조선은행권으로 찾은 후 일본은행권으로 바꾸어 버려 금융기관과 조선은행은 돈이 모자랐다. 부족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통화량을 늘렸는데 경제 혼란으로 생산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물가는 올라갔다. 미군정이 이를 막기 위해 지불유예명령을 내렸을 때는 이미 늦은 때였다.?늘어나는 통화량, 멈추어버린 공장, 치솟는 물가 : 해방과 함께 일본으로부터 공급받았던 자본과 기술, 원료 등이 일시에 사라지고, 지하자원과 중공업 시설이 집중되었던 북한지역과의 경제적 보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남한의 공업은 생산기반이 무너져 500원 넘는 금액은 강제로 저축시켜 화폐개혁을 경제개발 자금을 조달하는 방안으로 이용하였다. 하지만 음성자금의 액수는 예상에 훨씬 미치지 못했고, 사회적인 혼란만 일으켜 결국 통화개혁은 돈의 명칭과 단위만 바꾸는데 그쳤다.?한일국교정상화 : 일본은 1951년에 연합국과 일본 간에 체결되었던 대일평화조약에 따라 참전국에 입힌 피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었는데, 한국은 비록 참전국으로 인정받지 못해 배상청구권은 없었지만 국제적인 관례상 독립 축하금이라는 명목으로 배상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제3공화국은 한일국교 정상화를 통해 대일청구권을 행사하고 이 돈을 경제개발자금으로 활용하려했다. 많은 국민들이 반대하였지만 1965년 6월 22일 결국 한일국교정상화는 이루어졌고 이 자금은 포항종합제철(현 포스코)을 준공하는 등 한국의 경제성장에 큰 몫을 담당했다. 하지만 서둘러 기본조약에 조인함으로써 군대위안부와 강제징용자, 원폭피해자에 대한 보상과 재일 동포의 법적 지위 및 대우에 대한 문제를 다룰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부정적 평가를 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베트남파병 : 1964년 미국은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베트남 독립전쟁의 진압에 나섰는데, 우리나라는 미국정부로부터 정권에 대한 확실한 지지를 얻고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필요한 자금 확보를 위해 미국의 파병요청을 받아들였다. 이 전쟁에 참여하여 목숨을 경고 벌어들인 돈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한국 경제 성장에 커다란 몫을 담당했다. 또한 국내 기업들의 동남아시아 진출과 민간경제협력 추진의 계기가 되었으나 이 전쟁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부상을 당했으며 베트남에는 한국인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사는 수많은 라이따이한 들이 있다.?독일에서 흘린 땀과 눈물 : 군사혁명정부는 경제개발을 추진할 자금을 만들기 위해 미국에 경제 원조를 요청했으나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미국은 이를 거절했고,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기라 일본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그년 8월 모든 기업의 사채는 3년이 지난 후부터 5년에 걸쳐 일정금액을 갚도록 하는 사채동결조치가 취해졌다. 이로 인해 기업의 이자부담이 크게 줄어들자 물가상승의 요인도 줄어들었으나 기업의 잘못으로 발생한 문제를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 줌으로써 기업들이 구조조정을 게을리 하고 과잉투자를 지속하게 하는 도덕적 해이 현상이 나타나는 부작용이 생겼다.⑮수출 100억 달러 달성 : 1964년5월3일 환율현실화 및 단일변동환율제가 채택되어 달러화에 대한 원화의 환율이 올라가자 수출에 유리한 환경이 만들어졌고 정부는 수출주도형 개발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여 1977년에는 드디어 대방의 100억 달러 수출을 이루게 되었다. 1960년대 우리나라 주력 수출품목 중 1위는 가발이었고 중화학공업의 수출경쟁력이 갖추어지기 이전인 1970년대까지 가장 주요한 수출 품목은 섬유와 합판이었다.?주베일산업항 공사로 시작된 중동건설 붐 : 수많은 일화를 남기면서 현대건설은 20세기의 대역사라 불린 주베일산업항 공사를 공사 시작 2년 반 만이었던 1979년 2월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다. 이 공사의 성공으로 중동에서 각종 대형공사를 잇따라 수주하여 1975년 중동 진출 후 1979년까지 현대건설은 약51억 6400만 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였다. 이때 벌어들인 외화는 한국의 경제성장 도약기에 큰 도움을 주었다.?달라진 생활 모습 : 한국수자원공사가 설립되어 가정에 수돗물이 공급되고 경제개발의 성과로 공장들이 세워지면서 새로운 상품들이 계속 선을 보였다. 합성섬유가 등장하여 패션이 다양해지고 흑백TV가 개발이 되고 서구 문물이 들어와 음식과 의류생활이 바뀌었으며 아파트도 지어졌다. 버스가 주요 교통수단이 되고 지하철이 개통되어 이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도 달라졌다. 그리고 1979년10월26일 박정희대통령이 암살당하면서 박정희정권의 18년간의 독재정치는 막을 내렸다.3장. 정부주도에서 시장경제로(1960년대까지는 불경기에 물가가 하락하고 호경기에 물가가 상승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는데 1973년 가 다시 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⑩1987년 노동자 대투쟁 : 경제개발이 최우선 과제였던 근대화시기가 끝나고 새로운 민주화 시기가 열리자 노동자들의 의식도 바뀌기 시작했고 현대엔진에서 최초로 노동조합이 만들어짐으로써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시작되었다. 울산지역 현대 계열사 노조들은 현대그룹노조협의회를 만들었고 이에 대한 현대의 휴업조치는 이들의 격렬한 시위를 이끌어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한국에서 근대적인 임금노동자가 형성된 이후 발생한 최대 규모의 집단적인 저항운동이었다.⑪3저 현상과 눈부신 경제 도약 : 저유가, 저금리, 저달러라는 3저 현상과, 시장중심의 경제체제로 바뀐 경제정책의 효과로 1986년부터 1988년까지 3년 동안 한국 경제는 경제성장, 물가안정, 국제수지 개선을 모두 달성하여 경이적인 경제실적을 기록했다.⑫주식시장의 발달 : 1956년 증권거래소가 문을 연 이래 일반인들의 주식투자에 대한 관심은 매우 낮았는데, 1985년 가을부터는 주식시장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기 시작하여 주식시장이 발달하게 되었다.⑬사회보장제도의 시작 : 1963년에는 질병의 불안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국민생활을 향상시키며, 사회복지와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복지사회를 건설한다는 목적아래 의료보험법이 만들어졌다. 경제개발계획으로 산업화, 도시화, 핵가족화, 노령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노동시장이 커지고 출생률이 낮아져서 국민연금제도 필요성이 높아졌고, 국민의 국민연금제도 실시를 위한 국민 부담 능력이 크게 좋아져 1973년 한국에도 국민복지연금법이 만들어져 공포되었다. 그리고 1987년 9월에는 국민연금공단이 설립되었다.⑭88올림픽 개최 : 1988년에 개최된 서울올림픽을 통해 고용창출효과, 방송수입, 관광수입 등 실질적인 경제적 효과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올림픽은 세계적으로 한국을 알릴 수 있었던 첫 국제행사였고 올림픽을 치른 경기장 시설과 운영 능력 등은 세계화를 위한 준비의 발판이 되었다.⑮해외여행 자유의 안정성장과 선진 화합경제 추진대책을 통하여 미루어 두었던 금융 실명제를 1991년 1월부터 전면 실시하겠다고 예고했으나 1989년 하반기 이후 경제상황이 나빠져 미루었다가 1993년 8월 12일 오후 8시를 기하여 대통령이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명령을 선포함으로써 모든 금융거래를 실명으로 하는 금융실명제가 전격적으로 실시되었다.⑥세계최초의 256MD램 개발 : 1987년 일본 기업들이 반도체 불황을 맞아 설비투자를 줄일 때 삼성전자는 신규라인을 건설하고 과감하게 투자했다. 그 결과 1992년 세계 D램 시장에서 16MD램을 대량으로 공급할 수 있는 유일한 기업이 되었고 1992년 9월에는 세계최초로 64MD램 개발이라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삼성전자 개발팀은 1994년 세계에서 최초로 256MD램 개발에 성공하였다. 1990년대 중반부터 PC산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하였고 그 필수품인 메모리 반도체는 한국을 대표하는 수출품목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메모리 부분에서 세계 1위의 기술력과 시장점유율을 자랑하게 되었다.⑦국민소득 1만 달러와 수출 1000억 달러 달성 : 1995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처음으로 1만 달러를 넘어서고 1962년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 의해 산업화가 시작된 이후 33년만의 쾌거였다. 그리고 1970년대에 추진되었던 중화학공업화정책으로 철강, 자동차, 조선, 석유화학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여 1980년대부터 산업구조와 수출구조가 바뀌어 수출이 비약적으로 증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한국의 수출은 1995년 10월 처음으로 1000억 달러를 넘었다.⑧세계화의 파도 : 1990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우루과이라운드 협상회의를 시작으로 1995년 1월1일 세계무역기구 WTO가 설립되어 다자주의와 최혜국대우원칙을 토대로 모든 산업의 시장 개방화가 이루어지면서 세계화 시대가 문을 열었다. 세계화는 전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만드는 것으로 국가 간의 상품과 노동, 서비스 등의 이동과 교류가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독후감/창작| 2011.06.07| 15페이지| 1,500원| 조회(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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