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건축가(the architect), 근대건축의 영향과 문제에 대해서영화를 본다는 것. 사람마다 영화를 보면서 하는 생각들은 전부 다르다. 어떤 사람은 배우의 미모를 감상하는데 주력할 수 도 있고, 이야기가 얼마나 흥미진진한지에 대해 집중하는 사람도 있다. 혹은 극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압도적인 영상을 좋아해 극장에서 보는 영화는 헐리웃 블록버스터만을 고집하는 사람도 있다. 뭐 영화를 좀 본다고 하는 사람들은 구도가 어쩌네 미장센이 어쩌네 그러겠지만. 하지만 내가 영화를 볼 때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은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이(영화를 만든 사람이란 비단 감독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나 촬영 편집에도 그 영화를 구성하는데 큰 역할들을 하고 있으니.)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 영화를 만들었는가, 그리고 그 주제를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가 이다. 아무리 좋은 주제의 영화라도 관객들이 외면한다면 그게 무슨소용인가? 관객과 소통하지 못한 채 자의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영화를 보면 본전 생각이 나서 내가다 억울하다. 요즘 영화계도 어렵다던데. 이건 영화학 관련 레포트가 아니니 서론은 이쯤에서 접어두자.그렇다면 ‘건축가’란 영화는 이런 내 기준에 부합하는 영화였을까? 대답은 아니오다. 이런 대답을 한 것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것은 안타깝지만 언어이다. 아마도 내 짧은 영어 실력 탓에 영화가 하고자하는 이야기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국내에 워낙 알려지지 않은 영화라 자막은 물론 감상평이나 리뷰조차 없었다. 만약 교수님께서 더욱 훌륭한 퀄리티의 레포트를 원하신다면 자체적으로 자막을 만들어 공급해주셔야 하지 않을까..라는 건방진 생각도 해보았다. 홍익대 건축학과를 다니는 아이들은 영어를 듣는 즉시 이해가 되는 훌륭한 학생이 대부분이겠지만, 나처럼 우리나라 교육계의 영어 커리큘럼에 충실했고 대한민국의 교육과정에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아 외국조차 다녀온적이 없는 학생도 존재하니 말이다. 이런 얘기를 주절주절 하는 이유는 레포트 분량 3장을 채워야 한다는 압박감에 어떻게 하면 분량을 좀 때울 수 있을까 하는 점도 있지만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영화에 레포트를 써야한단 이유로 평을 한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기도 하다. 게다가 교수님이 이 글을 읽으시면서 ‘이런 영화가 아니였는데 얘는 완전 잘못 이해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드실까봐 미리 선수 치는 것이기도 하다.이 영화에 대한 초점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건축가가 건축을 하는 데에 있어 어떠한 관점이나 태도를 가져야 할 것 인가와 무너지고 있는 미국 중산층의 위기를 다루고 있다. 미국 중산층의 위기를 다룬 영화들은 많이 있었다. 이런 종류의 영화가 나오는 이유는 실제로도 미국의 가정들이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겠지. 많은 방송과 영화에서 패러디되는 장미욕조 상상씬 (10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의 한 장면인데 얼마 전 성황리에 끝마쳤던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도 패러디되었던) 과 케빈스페이시의 열연 이 돋보였던 아카데미가 사랑한 영화 아메리칸 뷰티, 많은 여학생들이 즐겨본다는 위기의 주부들까지. 그래서 이 영화도 그 문제를 다루고 싶었나 보다. 물론 따분한 건축가의 일 따위만 다룬다면 관객이 외면할 것은 뻔 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어울리지도 않는 두 소재를 억지로 엮어려내고 한 것이 오히려 영화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가 됐다.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건축가와 현실 사이에 대한 괴리감이라면 아들이 흑인 남자와 관계를 맺으며 오묘한 표정을 짓는 장연은 대체 왜 필요하단 말인가. (물론 이 영화를 본 아이들에게 영화에 대해 물으면 이 장면만 얘기하니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에는 성공했다고 하겠지만.) 영화기 가진 메시지를 좀 더 확연하게 표현하고 싶었다면 오히려 슬럼화된 거주 지역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담는 것이 좀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든다. 슬럼화된 지역에 사는 여자의 철거운동과 현실은 외면한 채 자기의 디자인만 내세우는 건축가의 대립에서 진정한 건축은 무엇인가? 라는 자기의 의문을 관객들에게 던지려고는 하지만, 건축가의 가정사를 보니 한편의 막장 드라마더라 하는 설정은 관객들로 하여금 이 영화의 본질을 잊게 하고 영화관을 나서며 ‘관계 나눌때 아들 표정 봤어? 으윽 혐오스러워’ 이런 생각만 남게 할 것이다.그럼 영화에 대한 비판은 이정도로 하기로 하고,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하는 건축에 대한 생각은 어떤 것일까?이 영화는 근대건축의 실패에 대한 이야기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주장하는 엘리트와 대중에 관한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좋게 말해서 적나라하게 말한다고 하는 거지 그냥 포스트모더니즘에서 하는 이야기를 어떠한 은유도 없이 그대로 하고 있다. 아무래도 이 영화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이 이 글에 그대로 묻어나 너무 감정에 치우친 비판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지만 어쩔 수 없다. 재미없는 영화는 죄악이다.근대건축의 등장은 그 시대의 요구였고 근대화에 따른 필수적인 흐름이었다. 새로운 기술과 재료의 등장은 다른 분야의 근대화와 마찬가지로 건축의 근대화를 이끌었다. 그 시대의 건축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변화된 시대에 따른 변화된 건축을 찾는 것이 그들의 의무였다. 그렇게 근대건축은 새로운 건축을 제시하고 발전해 갔다. 급격한 도시화에 인구팽창은 누구도 해결 할 수 없는 그 당시 사회의 큰 문제였다. 건축가들은 이 엄청난 인구를 모두 수용 할 수 있는 해답을 제시해야했고, 그것이 기술, 재료의 발전과 맞물려 표준화되고 효율적인 건축이 발전하게 된 것이다.하지만 이런 근대건축에도 한계가 있었으니 그 한계를 지적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근대건축의 한계에 대한 예로 르 꼬르뷔지에가 설계한 프랑스의 페사크 주택을 들 수 있다. 1923년 프랑스의 한 기업가가 자신의 육체노동자와 그 가족들을 위한 집을 지어달라고 했다. 이 주택단지는 근대건축의 모범이 되었다. 장식이 없는 상자모양으로 지었으며, 거기에 긴 직사각형의 창, 평평한 지붕, 아무 장식이 없는 벽이 달려 있었다. 르 꼬르뷔지에는 이 주택단지를 통해 근대화에 비타협적 저항을 비난했으며 노동자들을 위해 설계한 효율적인 주택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정작 그 곳에 입주한 노동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노동자들은 똑같은 파란 작업복을 입고 콘크리트 격납고 같은 곳에서 하루 종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 집이란 하루의 고단함을 풀어 줄 수 있는 휴식공간이어야 했지만, 이 주택단지는 그들에게 현대산업에 대한 활력을 다시 일깨우는 역할밖에 수행 할 수 없었다. 결국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노동자들은 거의 똑같은 르 꼬르뷔지에의 입방체들을 그 들의 노동생활이 뺏어간 것을 회복할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으로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물매지붕을 씌우고 덧문과 창문을 달고 꽃무늬 벽지를 바르고 울타리를 세웠다. 그들은 위대한 건축가의 사상과 철학을 망치는 결과를 낳았지만, 그들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집에 살고 있는 그들에겐 건축가의 취향이란 자신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었다. 입주자들의 취향이 건축가의 취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지만 이런 취향을 표현하는 논리는 똑같았다. 유명한 근대건축가 르 꼬르뷔지에와 마찬가지로 노동자들 역시 자신의 생활에서 불충분한 것들을 충족시키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사랑했고 그대로 표현한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