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암 유희춘은 전라도 해남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어머니는 ‘표해록’의 저자이자 홍문관 교리를 지낸 최부의 딸로, 유희춘은 2남 3녀 가운데 둘째 아들이다. 미암의 호는 해남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금강산 기슭에 있는 바위 이름을 따서 선생 스스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선생은 어려서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고, 16세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신재 최산두, 모재 김안국에게 사사했다. 김안국의 문하생으로 같이 공부하던 김인후 선생과는 각별한 인연이 있다. 하서가 성균관에서 과거공부를 하고 있을 때 전염병에 걸려 생명이 위독했으나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이때 성균관 관원으로 있던 미암 선생이 극진히 치료해 낫게 했고, 그 고마움을 잊지 않았던 하서 선생은 후에 미암 선생이 유배당할 때 의지할 곳 없던 선생의 아들 경림을 사위(셋째 딸과 혼인)로 거뒀다.선생은 26세에 과거 급제한 뒤 홍문관 수찬, 무장 현감을 지냈다. 1546년, 인종 사후 어수선한 정국 속에서 세력을 얻게 된 윤원형 일파가 인종의 외숙 윤임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이로 인해 미암 선생은 파직을 당하고 전북 익산에 칩거하게 된다. 윤원형 일파는 이듬해인 1547년 을사사화 때 제거하지 못한 정적들을 마저 없애기 위해 ‘양재벽 벽서사건’을 일으켜 사림 20여명을 유배시키게 된다. 유희춘(당시 나이 35세)도 이 사건에 연루돼 제주도에 유배됐다가 고향인 해남과 가깝다는 이유로 다시 조선 최북단 함경도 종성으로 이배된다.종성에서 미암 선생은 19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이 시기동안 선생은 독서와 저술활동(속몽구, 육서부록)을 하는 한편, 변경지역의 미욱한 주민들 교육에도 힘썼다. 1565년 충청도 은진에 이배됐다가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정 5품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어 나이어린 선조 임금에게 글을 가르치게 된다. 당시 선조는 15세에 불과하여 선왕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 수렴청정을 하고 있었다. 이후 미암 선생은 홍문관 부제학, 전라감사, 사헌부 대사헌 등을 역임하다 1575년 10월 벼슬을 그만두고 담양 인근 창평으로 내려와 세상을 뜰 때까지 지내게 된다.16세기에는 남자가 여자 집으로 가서 결혼식을 올리고 그대로 눌러 사는 처가살이가 보편적이었다. 미암이 담양에서 산 것은 송덕봉의 본가였기 때문이다. 미암 선생의 부인 송덕봉은 시문에 능해 신사임당, 허난설헌과 더불어 오늘날 여성문인으로 주목받고 있다. 당시 조선사회는 여필종부로 상징되는 남성 위주의 사회가 아니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조선시대는 성리학이 보다 체계적이고 견고하게 구축된 17세기 이후 가부장적 의식이 보급된 이후의 사회모습이다. 16세기엔 유교 이외에 도교 , 불교의 전통이 남아있었다. 또한 아들과 딸, 본손과 외손의 구별이 없었고 조상의 제사도 자녀들이 번갈아 돌아가며 지내는 윤회봉사가 관행이었다. 여성의 바깥출입이 비교적 자유로웠고 일반적인 친정살이로 인해 모계, 처계의 영향이 더 많았던 시기였다. 가정 내에서 부부는 서로 동등한 관계였고 심지어 부인이 이혼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이러한 16세기 조선의 양반사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은 미암 선생이 남긴 11년의 기록, 미암일기 덕분이다. 미암 선생은 다시 벼슬에 나선 1567년(선조 즉위년) 10월부터 1577년 (선조 10년) 5월 13일, 세상을 하직하기 며칠 전까지 11년 동안 한문으로 친필 일기를 남겼다. ‘미암일기’는 조선시대 개인의 일기 중 가장 양이 많은 것으로 사료적 가치가 크다. 임진왜란으로 선조 25년 이전의 승정원일기가 모두 불에 타고 없어지자 후에 선조실록을 편찬할 때 율곡 이이의 경연일기와 더불어 선조실록 첫 10년의 사료가 됐을 정도다.미암일기는 조정의 공적 뿐 아니라 집안의 대소사, 특히 부인인 송덕봉에 대한 내용과 집안의 경제, 자손들의 결혼과 제사, 첩과 서녀, 노비문제 등은 물론이요, 꿈 이야기와 자신의 해몽까지 곁들여져 있어 16세기 조선 생활사에 있어서도 귀중한 사료다.또 당대의 문인들을 만날 수 있고, 동의보감의 저자인 허준의 30대 행적도 볼 수 있다. 미암일기로 본 16세기 사회는 남성이 근친, 수학, 관직, 유배 등으로 자주 집을 비우고 떠돌아 다녔으므로 여성이 실질적인 집안일을 주관했다. 외부 사람들을 접대하고, 재산증식, 농장경영, 많게는 수백 명에 이르는 노비관리도 여성의 몫이었다. 게다가 특히 송덕봉은 남편 미암에게 정신적인 지주였다.미암선생은 관직생활과 저술에 있어서도 늘 아내에게 도움을 구했고, 부인을 존중하고 능력을 높이 샀다. 시작에 있어서는 덕봉의 가르침을 받기까지 했다. 1571년 덕봉 나이 51세에 덕봉의 시 38수를 모아 ‘덕봉집’이란 시집을 엮어줬다. 덕봉은 집안일을 주도해 나가면서도 한달에 한 두 번씩 부녀모임을 갖고 어가행렬 갖은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는 나들이를 다녔다. 미암일기는 강산이 변한다는 시간보다 긴 11년간의 방대한 기록이다. 날씨와 꿈, 바깥활동, 방문객의 내왕 외에 들고나는 생필품 등 다양한 내용이 순차적으로 정리됐다. 미암일기 중 비교적 잘 알려진 부분을 조금 살펴보자.미암 선생과 덕봉이 주고받은 편지의 내용이다. 1570년 미암 선생은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되어 서울로 올라와 홀로 지내게 된다. 선생은 덕봉에게 ‘34개월 동안 독숙하면서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니 고마운 줄 알라’고 자랑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덕봉은 답신에서 ‘ 그것은 자랑할 일이 못되며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은 60 가까운 나이에 이른 당신 건강에 오히려 좋은 일이다’며 선생이 없는 동안 집안의 대소사를 치러 낸 공을 잊지 말라고 오히려 나무라니 선생은 “과연 부인의 말과 뜻이 다 좋아 탄복을 금할 수가 없다” 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정한다.
사실 고등학교까지의 국사교육이란 것이 해방이후에 대한 서술이 극히 단순하면서도 은근히 ‘한국사 바보’로 만드는 구석이 있다. 다시 말해서 비판적 시야를 도무지 기를 수 없게 만들 뿐 만 아니라 민족지도자 하면 김구 선생 정도 딸딸 외우고 다닐 정도이며, 심지어는 명칭 앞에 붙는 ‘민족지도자’라는 말은 아무런 근거 없이 고유명사화 시켜버리는 것이다. 여운형에 대해서도 이름은 많이 들어 봤지만 그에 대해 아는 바는 거의 없었다. 두루뭉수리하게 민족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던 당대 지식인, 정치가가 아닐까 짐작해 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다 언젠가 TV에서 언뜻 보았던 여운형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모습은 그간 내가 어렴풋이 상상해 보았던(조금은 촌스럽고 완고해 보이지 않을까 하는) 것과는 너무 다른 모습으로 오히려 너무도 세련된 신사 풍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뇌리에 남아있던 와중 마침 관심이 가는 역사 속 인물에 대한 레포트를 제출하라는 교수님 말씀에 그가 제격이라고 생각이 들어 망설임 없이 조사 대상으로 선택하게 되었다.♤ 여운형은 누구인가?여운형은 1886년 고종23년 정현(鼎鉉)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경주이씨(慶州李氏)이다. 그는 아버지가 30세가 넘은 나이에 늦게 장남으로 태어나서 묘곡에서 자랐으며, 15세에 배재학당, 사립흥화학교(私立興化學校)로 옮겼다가 1903년 다시 관립우체학교(官立郵遞學校)로 옮겼다. 그러나 졸업 한달을 앞두고 그 학교마저 그만 두었다. 그 뒤 1907년부터 시작한 성경공부를 하여 기독교를 믿게 되었고, 1908년경에는 미국인 선교사 곽안련(郭安連, Clark,C. A.)목사와 친분을 맺었으며, 그의 도움을 받아 1909년 사립기독광동학교(私立基督光東學校)를 세웠다. 1913년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 진링(金陵)대를 졸업했다. 1918년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을 결성해 당수가 됐고, 1919년 임시정부의 1차내각에 참여했다. 1921년 모스크바에서 서훈에서 제외돼 있다.♤ 여운형의 풍채와 성격여운형은 풍채하나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을 현혹하였다. 어떤 잡지기자는 여운형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연단에 올라선 여운형씨는 첫째 그 풍채가 온 청중의 신임을 모았다. 육척장구의 서양인에서 보는 것 같은 완강한 체구, 게다가 카이젤 수염, 커다란 눈, 좌우로 활활 뻗어나간 귀, 그 위에 시원스럽게 벗어 오른 면적 넓은 이마. 초 인상에 그야말로 대장부라는 든든한 감명을 던져준다.” 이처럼 그는 풍채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을 따르게 한 데다, 워낙 사람들을 좋아하고 쾌활하여 청년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신문기자로서 많은 지사들을 대했고 그들에 대한 인물평을 남긴 유광열은 “지금의 조선인 식자간에는 쾌활한 사람보다 우울한 사람이 더 많다. 그러나 여운형씨는 언제 만나도 쾌활하다.”고 했거니와 해방 후에 평양에서조선 노동당 조직부장직을 맡고 있으면서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했던 박영빈은 “여운형의 호방한 성격과 준수한 용모로 대중적 인기가 많았다. 그는 사람을 사로잡는 마력을 지닌 듯 했다. 그의 호탕한 성격이 마음에 들어 금새 친해질 수 있었다”라고 하였다. 그는 준수한 용모와 풍채 그리고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을 가진 대중적인 지성인이었다.♤ 시대에 따른 여운형의 행동과 사상◎ 독립운동가로서의 여운형?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 파견독립운동가로서의 몽양의 경력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던 1918년 6월에 시작하여 그가 상해에서 체포된 1929년 7월까지의 11년간에 불과 하지만 그의 활동은 너무나 드라마틱했다. 첫째로 그는 윌슨 대통령의 사절로 상해를 방문했던 찰스 크레인의 연설을 들은 후 몽고에 망명하고 있던 김규식을 불러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여 한국 사람들의 독립에 대한 염원을 만방에 알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국내에 들어가 천주교 지도자 이승훈등을 만나서 해외 소식을 전하고 또 동지들을 국내 각처에 파견하여 해외소식을 전하는 등 국내에서 3.1운동을 일으키는데 공헌하였다. 그리고 그는 시베리아와 만주 각지에 흩어져 있던 게 했던 것이다. 그날의 연설을 통해 조선 사람들이 독립을 요구하는 이유를 세계 방방곡곡에 알리기도 하였고 일본의 정국을 흔들어 놓기도 하였다.?모스크바 극동 근로자 대회여운형이 세상의 이목을 끌었던 또 하나의 이벤트는 1921년말부터 다음해 봄까지의 모스크바 방문이었다. 극동근로자대회의 참가는 여운형 자신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지만 그를 조선 청년들의 존경의 대상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레닌을 만나 그의 민족주의 운동지지 노선에 대한 견해를 직접 들을 수 있었는데 이 만남은 이후에 여운형의 사상에 있어 주춧돌 역할을 했다. 그는 1928년에 있었던 치체린 소비에트 러시아 외무위원장의 중국관계 성명, 그리고 1919년의 카라한 부위원장의 성명에 감명한 후 볼셰비키당에 공감하고 있었고 임시정부와 볼셰비키당과의 제휴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하였는데 레닌과의 만남으로 공산당에 더욱 근접하게 된 것이다. 치체린과 카라한의 성명이란 볼셰비키 혁명정권은 과거 제정 러시아가 중국으로부터 탈취했던 각종 이권을 포기한다는 성명으로 여기에는 만주를 횡단하는 동지나철도가 포함되어있어서 볼셰비키들이 참으로 자유와 평등을 추구한다는 이미지를 심어 주었다.◎ 중국혁명의 일선에 나선 여운형1917년경부터 중국국민당의 영수 손문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지냈는데 1925년에 있었던 이른바 5.30사건(영국 조계 경찰이 불평등조약에 반대하는 데모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중국 학생들에게 발포하여 20여명을 살해한 것을 계기로 폭발한 반제국주의 운동으로 전국적으로 영국 상품 불매운동이 시작되어 다음해 10월까지 이어진 사건으로 중국의 민족주의 성장에 큰 역할을 한 사건)) 후로 중국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손문이 죽은 후 부인으로부터 보로딘부인을 소개받았다. 레닌이 파견한 보로딘 부부는 1923년 9월부터 국민당의 고문을 맡고 있었다. 보로딘 부인은 몽양에게 중국혁명을 위해 노력해 달라는 부탁을 하면서 북경에 있던 카라한 대사를 만나라고 했다. 손문은 1923년부터 코민테른과공산당의 취지와 강령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 당에 참가했던 것은 레닌 정권이 2백만원이라는 거금을 조선 민족주의운동을 위해 지원해 주었기 때문이었는데 여운형의 정치활동에서의 판단기준은 조선의 해방이었다. 그가 중국혁명에 참가했던 것도 중국의 혁명이 완성될 경우 조선 해방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정권차원에서 조선의 독립운동에 원조를 해준 나라는 소련을 빼고 하나도 없었다.◎고국에서의 여운형1929년 7월에 상해에서 일본경찰에게 나포되어 대전형무소에서 3년간의 옥고 생활을 치르고 의 사장으로 추대되어 민중의 총애를 받았는데 그의 경력과 인품은 독립을 원하고 신사상을 갈망하던 조선 민중들에게는 흠모의 대상이 아닐 수가 없었다. 사장시절 그는 잡지에 모스크바 기행문을 연재했는데 트로이카, 즉 세 마리의 말이 끄는 눈썰매를 탄 얘기,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러시아를 횡단했다는 얘기, 그리고 모스크바 대회에 관한 회고 등은 많은 독자를 감동시켰다.◎ 해방후의 정국과 여운형해방 후의 그의 정치적 행적을 더듬어 보면 그는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등장하여 인민공화국의 간판인물로 활약하다가 조선인민당의 당수, 좌우합작위원회의 좌측 대표, 근로 인민당 위원장 등의 직책을 맡았다. 특히 그는 좌익 정당들의 통합에 주력하였고 또 공산당을 포함한 좌익과 온건 우파와의 합작, 즉 좌우합작에 심신을 기울였는데 결국 그의 노력은 성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건준위를 조직한 직후부터 우익 인사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진데다가 9월에 상륙한 미군당국은 그를 오랫동안 배척했다. 여운형은 오랫동안의 중국에서의 경험을 통해서 손문 휘하의 국민당과 당시 코민테른의 지휘 하에 있던 중국 공산당의 합작을 이상적인 형태로 보고 있었는데 그가 한국에서 원했던 것도 그러한 형태의 좌우합작이었다. 즉, 민족주의 진영을 우선에 놓는 좌우 합작이었다. 그러나 해방 후에 그는 우익측 인사들과는 거리를 두는 한편, 공산당 출신의 동지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는 그를 실패한 정치인으해서 알고 있던 볼셰비키들, 그리고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가 그 후에, 특히 1930년대에 급격히 변해갔는데 외부에서는 변화의 성격이나 심도를 파악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레닌이 죽은 후 스탈린이 정권을 장악하여 볼셰비키의 수뇌부가 물갈이 되었고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포위되어있는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수호’란 신념하에서 거의 완벽하게 봉쇄되어 있던 소련에 대한 지식은 희박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의 공산당의 변화를 살펴보면 첫째, 세계혁명을 지향한 이상주의적 단체였던 볼셰비키당이 1928년경부터 ‘한 나라에서의 사회주의’라는 이념을 따라 전체주의 국가를 지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경제면에서는 비교적 자유스러웠던 시장경제체제를 폐기하고 농업을 집단화하고 모든 산업을 당이 관리하는 계획경제체제로 변환했다. 정치적으로는 스탈린의 피의 숙청이 계속되어 자유주의적인 지식인이나 운동가 혹은 단체는 허용되지 않았다. 둘째로 대외전략에도 큰 변동이 있었는데 1939년에 이르러 스탈린은 히틀러와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후 폴란드 동부, 우크라이나, 백러시아(벨로루시), 그리고 발틱의 세 나라(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를 소련으로 흡수해버렸다. 전세계의 무산계급의 혁명을 꿈꾸었던 볼셰비키들은 소련이라는 국가의 영토와 이익을 수호하고 팽창하는 데에 주력하는 제국주의 국가의 통치자들로 변해있었다. 1945년에 2차 얄타회담에서는 루즈벨트에게 요구한 사항이 치체린과 카라한이 포기한다고 했었던 만주에서의 이권이었다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과 전쟁을치렀는데 모스크바 근교까지 임박했던 독일군을 가까스로 물리치기는 하였으나 전 국토와 시설의 절반 이상을 파괴당했던 전후 소련의 생활고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것이었다.◎ 해방후의 미.소 관계스탈린은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한 직후부터 미국을 가상의 적국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는 원자탄 투하를 소련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으로 간주하여 격분했고, 또 미국은 원자탄 독점을 이용하여 소련에게
Ten years ago, the Internet was practically unheard of by most people. However, today, it is one of the most powerful tools throughout the world. The Internet is a useful collection of various services and resources. People get a lot of information or contact with their friends through it. Even it can be used for finding suitable brides and bridegrooms for marriages. Like this the Internet gives many benefits to people. However, it has serious disadvantages as well. First of all, major disadvantage of the Internet is privacy. Electronic message sent over the Internet can be easily snooped and tracked, revealing who is talking to whom and what they are talking about. As people surf the Internet, they are constantly giving information to web sites. People should become aware that the collection, selling, or sharing of the information they provide online increases the chances that their information will fall into the wrong hands.
열 마리의 사자 떼와 열 마리의 양떼가 있다고 하자. 이 두 집단이 싸울 경우 사자 떼가 이길 것 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나 리더에 따라 상황은 바뀔 수 있다. 가령, 양 9마리가 한 마리의 사자를 리더로 삼고, 사자 9마리가 양 한 마리를 리더로 삼을 경우, 양떼가 싸움에서 이기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조직의 리더에 따라 싸움의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리더는 그 능력에 따라 상황을 바꿀 수도 나아가서는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 바로 여기에 리더십의 중요성이 있다.과거 우리나라 지도자들을 되돌아보면 역대 대통령, 총리, 정치 지도자 중 비난을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각종 약속과 구호는 넘쳐 났지만 이내 혼란이 초래되고 단지 바뀐 것이 있다면 비난의 대상이 바뀌었다는 것뿐이었다. 이렇게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그 원인은 지도자들이 올바른 리더십을 갖지 못한 데에 있다. 지금껏 우리나라 지도자들이 보여준 리더십은 수직적, 독재적 리더십이다. 즉, 조직원 위에 군림하며 권력을 바탕으로 조직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리더십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런 리더십은 조직원의 반발을 사게 되며, 잘못된 리더 하나로 사회가 큰 혼란을 겪을 수도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박정희, 전두환 등 전 대통령들을 통해 이를 직접 경험하기까지 했다.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사회에 요구되는 리더십은 무엇일까? 수업 중 감상한 DVD속의 미국 대통령의 모습에서 이 질문의 해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세계를 지배하는 초강대국의 지도자로서 엄청난 권력을 지녔지만, 그에게서 위압적이고 독재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는 함께 일하는 참모들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 동료처럼 함께 일하고 때론 칭찬도 꾸중도 하며 조직원을 관리한다. 이렇게 조직원 위에 군림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며 그들의 성공을 지원하는데 초점을 맞춘 리더십을 ‘서비스형 리더십’ 이라 할 수 있다.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유재석을 예로 들어보자. 요즘 예능 프로 역사상 최고 시청률을 갱신하며 무수한 화제를 낳고 있는 무한도전. 그 프로의 중심에 유재석이 있고, 그는 여기서 서비스형 리더십을 적절하게 발휘한다. 우선 유재석식 리더십의 핵심은 겸손이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겸손한 마음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다. 겸손한 마음은 친절과 배려를 통해 나타나는데 그는 자신을 철저히 낮추고 다양한 개성을 가진 동료들이 끼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늘 배려한다. 일명 ‘유반장’이라는 별명으로 프로의 리더를 맡고 있지만 절대로 이를 내세우고 과시하지 않는다. 또한 그는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출연자들이 자유분방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지원하되, 지나치게 오버하는 경우에만 적절한 수단을 통해 제어할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가 몸을 사리는 것은 아니다. 필요한 타이밍에 맞춰 스스로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주며 전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리더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모습은 전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리더로 받아들여지고 이는 참여자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다.유재석식 리더십의 또 다른 핵심은 격려와 조언이다. 그는 자신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출연자들이 긴장하거나 당황하고 있을 때, 깊은 관심을 바탕으로 한 '격려‘와 ’조언‘을 통해 용기를 심어준다. 오랜 무명시절을 경험한 그는 누구보다 신인들, 아직 인기가 모자란 후배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관심과 아낌없는 격려와 조언으로 그들이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들이 좀 더 많은 조명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 또한 그의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편안하며, 재미있고,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한다. 이렇게 그는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그들의 성공을 지원하는데 초점을 맞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