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학기 근대경제사 (송병건 교수님)대공황 전후 세계경제를 읽고Ⅰ. 들어가면서오랜 세월에 걸쳐 검증된 경제학의 법칙 중 하나는 ‘경기는 순환적이다’라는 것이다. 세계 경제는 호황과 불황을 번갈아가며 겪고 있다. 또한 불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숙해진다.최근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꼽히는 미국에서 시작한 금융 위기가 전 세계를 덮쳤다.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 이동이 필연적이면서도 충분히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내로라하는 규모의 은행들의 파산은 세계 각국으로 도미노처럼 퍼져나갔다. 우리나라 또한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IMF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비교적 빠르게 위기를 극복해나가고 있다. 미국 경제도 더블딥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저점을 통과한 후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20세기 초는 세계 역사 상 가장 격변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의 세계 대전과 대공황을 겪으면서 그 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위기가 휘몰아쳤다. 각국은 조금이라도 빨리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시도하였다. 《대공황 전후 및 세계경제》는 요동치던 전간기 경제의 모습을 분석하여 대공황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또한 역사 속에서 몸소 체험한 교훈을 바탕으로 지금의, 그리고 앞으로 닥칠 위기를 현명하게 극복해 나가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Ⅱ. 대공황 전후 및 세계경제1. 1차 대전의 유산19세기 말은 영국의 중추적 역할 덕분에 금본위제가 안정적으로 작동하던 때이다. 또한 국가 간 노동과 자본의 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만연한 제국주의와 상충되는 각국의 이해관계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으로 귀결되었다. 전쟁이 일어나면서 무기생산 공장, 화학산업, 조선소 등의 군수품 생산 산업이 크게 확장되었고, 이에 수반되는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차입과 화폐 발행이 이루어졌다.단기적으로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은 4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이는 세계 경제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전쟁이 끝나자 각국은 없었으며, 동시에 패전국은 엄청난 액수의 배상금을 부담하게 되었다.주목할 점은 유럽의 국제적 영향력에 크게 감소했다는 것이다. 영국의 경제적 지위가 흔들리면서 금본위제 또한 위기에 부딪혔다. 세계 경제의 중심은 미국으로 이동하고 있었지만 미국은 그에 걸맞는 책임을 지려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각국의 중앙은행은 금본위제를 재건하기 위해 총력을 가했다.2. 1920년대의 경제◎ 인플레이션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물가가 크게 상승했다. 아직 전쟁의 후유증이 남아 있는데다 늘어나는 수요를 공급이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독일의 경우 전쟁 배상금을 갚고 국제수지의 적자를 회복하기 위해 지폐를 과잉 발행하였고, 이는 초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인플레이션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든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금본위제로의 복귀1920년 중반을 지나면서 생산, 고용, 소득이 거의 모든 나라에서 감소하기 시작했다. 각국은 통화를 안정시키기 위해 금본위제로 복귀하고자 하였다. 영국, 네덜란드 등은 디플레이션을 통해 전쟁 이전의 평가로 회복한 후 복귀하였고, 독일, 프랑스 등은 평가절하를 통해 자국 통화의 평가를 낮춰 회복하였다. 그러나 이는 국가 간의 조정 없이 독자적으로 결정된 것이었기 때문에 통화가 상대적으로 과소평가 혹은 과대평가 되는 문제를 낳았다. 영국이 제대로 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국제적 협력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금본위제는 과거만큼의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생산성 향상과 산업 구조의 변화경제적 상황이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에는 생산성이 급속히 향상되었다. 여기에는 전쟁을 통해 이룬 기술진보가 한 몫을 했다. 또한 동력, 조명, 통신 등 기술의 발전이 본격적으로 생산성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많은 나라들이 농업 중심에서 공업 중심으로 산업 기반을 전환하였고, 이에 따라 농업종사자가 급격히 줄었다. 특히 미국은 내구소비재, 자동차 등이 보급되면서 생산효율성이 크게 늘었다. 반면 영국은 석탄, 철강, 조선, 섬유 등 전통적 산업에등 농업 기술이 개발되면서 1인당 생산 가능한 작물의 양이 크게 늘었고, 이는 농업 종사자가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과잉생산을 부추겼다.노동생산성이 증가하면서 실질임금이 상승하고 노동 시간이 단축되었으나 그 이면에서는 비자발적 실업이 증가하고 있었다.3. 대공황 발발192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국제무역이 급속히 붕괴되었다. 이는 금본위제를 유지하기 위해 감내해야 했던 디플레이션이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긴축정책을 펼치면서 생산과 수출이 줄어들었고, 이는 원료 구매의 감소와 원료 생산국들의 수입 억제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1차 산품 생산국의 피해가 심했다. 무역이 감소하면서 실업률이 크게 높아졌고, 이에 따른 사회적 비용과 정치적 혼란이 커졌다.1930년대 초, 금본위제를 유지하던 여러 나라에서 은행 파산이 증가하고 금 보유량이 줄어들면서 대공황에 빠졌다. 그러나 금본위제는 통화적 제약을 포함하기 때문에 적극적인 조치보다는 소극적인 디플레이션 정책을 펼치는 것이 최선이었다. 영국의 경우, 국제수지 포지션이 취약한 상황에서 수출이 크게 감소하고 과대평가 된 파운드 때문에 가격이 폭락했다. 영국이 국제 사회에서 지속적인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해외 차입을 증가시켜 자본 유출을 상쇄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단기부채가 금, 외환준비금, 유동자산의 합을 능가하면서 더 이상 금본위제를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영국이 금본위제를 이탈하면서 대부분의 나라가 금본위제를 포기하거나 유지하더라도 실효를 발휘하지 못했다. 금본위제에서 자유로워지자 각국은 비로소 투자와 수요를 자극하는 경기 팽창 정책을 펼 수 있었다. 미국의 루스벨트는 물가와 경제활동을 진작시키는 것을 목표로 팽창주의적 정책을 펼쳤다. 독일에서는 배상금 문제가 해결되고, 히틀러가 수상으로 임명되면서 지속적인 경제 회복에 신호탄을 날렸다.2. 1930년대의 경제◎ 국제 경제의 분열대공황이 일어난 후 국제적 협조를 위한 노력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1932년 로잔느 회의에서는 배상금 문제를 종결지를 위한 조건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자국의 경제적, 정치적 이익을 방어하기 위해 국제 협조에 동참하기 보다는 세계 경제에서의 지위를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또한 금본위제가 종식되면서 각국은 경기 팽창 정책을 통해 무역수지를 개선하고 실업자를 줄였다. 경제가 어느 정도 안정되면서 영국이 이끄는 스털링 블록이 형성되었고, 프랑스가 이끄는 금블록, 독일이 이끄는 금블록, 미국이 이끄는 달러 블록 등 통화 블록이 잇달아 형성되었다. 대부분의 블록들이 금본위제에서 벗어난 반편 프랑스의 금블록은 금본위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지속적인 재정적자와 과대평가된 통화가치로 인한 물가 상승 때문에 회원국 간의 무역도 크게 줄었고, 금보유고 또한 고갈되었다. 다른 나라들이 금본위제를 벗어나 이자율을 낮추고 무역수지를 개선하여 수출, 소비를 자극하는 동안 이들은 금본위제 유지에만 급급했던 것이다.독일과 소련은 강력한 국가 권력을 이용하여 경제를 회복해 나갔다. 독일의 히틀러는 외환, 무역통제 등 경제 전반적으로 통제를 가하며 내부 지향적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테러가 자행되는 등 민주주의의 상실이라는 커다란 대가를 치렀다. 소련 또한 5개년 계획을 통해 공업화를 추진하였는데, 국가 주도적인 계획 경제는 해외 무역의 증가 등 가공할만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많은 농민이 희생되고, 민주주의가 짓밟혔다.◎ 산업성장과 회복정부의 경기 팽창 정책과 수요의 증가가 맞물려 경제는 서서히 회복되고 있었다. 공업 부문의 대량 실업과 농업 쪽의 가격 하락이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기술혁신이 이어져 생산성이 꾸준히 높아졌다. 반면 농업과 석탄, 직물, 조선 등의 구 산업은 크게 희생되었다. 전력, 내연기관, 석유화학, 통신 등의 신산업은 경제에 긍정적인 자극을 부여했다.또한 영국, 프랑스, 미국 간의 삼국 협약이 체결되면서 프랑스의 금본위제도 폐지되었다. 삼국협약은 쿼터와 외환통제 완화, 삼국 간의 협력 증진 등을 촉구하는 내용으로 이루어후의 상황과 달랐다. 1차 대전 이후와는 달리 빠른 속도로 경제가 회복되었고 실업 또한 낮았다. 이는 국제적 안정을 이루기 위해 상호 간의 조율과 협조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브레튼우즈 회의에서 고정환율제가 채택되고, 국제통화기금(IMF),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등 국제적 협력을 위한 기구와 제도들이 마련되었다. 미국은 마샬 플랜 등을 통해 유럽의 재건을 도왔다. 또한 유럽공동시장이 형성되면서 경제적 일체감이 형성되기도 했다.Ⅲ. 역사의 메시지우리는 세계 경제가 진화하는 동안 두 차례의 대전과 유례없는 대공황이라는 큰 비용을 치렀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경기 순환의 소용돌이 속에서 수많은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한다. 《대공황 전후 및 세계경제》는 대공황이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사건이 아니라 명백한 인재라고 주장한다. 금본위제에 얽매여 제대로 된 거시경제정책을 펼칠 수 없었고, 자국의 이익을 고수하기 위해 국제적 협력을 거부했다. 이는 기술 진보를 통해 생산성이 꾸준히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실업률과 경기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는 모순을 남겼다. 하지만 제2차 대전 이후에는 과거의 경험을 되살려 국제적 협력을 도모하며 새로운 환경에 빠르게 적응해나갔다. 우리는 여기에서 역사적 경험의 중요성을 간파할 수 있다.◎ 변화에 탄력적인 정책20세기 초반까지 지속된 금본위제는 당시 세계 경제에 있어서 고결한 걸림돌이었다. 1880년에 도입된 금본위제는 국제적으로 금의 이동을 최소화 하면서 자본의 이동을 원활하게 하여 국가 간 무역을 크게 늘리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이는 영국이 파운드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높게 유지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전쟁이 일어나면서 영국의 세계적 지위가 하락하자 금본위제 또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든 국가는 이를 대체할 통화 제도를 마련하기 보다는 예전의 금본위제로 돌아가기만 하면 전쟁 전의 경제적 안정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 믿은 것 같다. 영국 또한 세계 경제의 축으로써 역할하기문이다.
2009 1학기 한국경제사경제가 발전한다는 것은 통계학적 결과물로써 증명되는 이야기이지만, 그 배경과 원인은 어느 나라에서나 다양한 사회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우리나라는 6.25 전란 이후 반세기만에 놀라운 양적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경제 성장의 원동력을 찾는 작업 역시 현대 사회에 한정시키는 경향을 만들었다. 누구나 한국 경제 성장의 계기를 떠올리면 ‘경제개발 5개년계획’등과 같은 현대적 사건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한 걸음 물러나 거시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면 이전 사회에서도 경제 발전의 계기가 되는 사건들이 분명히 존재한다.1. 2세기(BC100~200) 무렵 시작된 젓가락의 사용.한국에서 젓가락을 사용하게 된 것은 약 1800년 전 쯤으로 추측된다. 젓가락의 사용이 경제 성장의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은 젓가락의 사용이 놀라운 집중력과 섬세함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손재주는 특정 장인의 기술이 아니라 모든 평범한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경쟁력이다. 가장 쉬운 예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폐를 세는 모습만 보아도 그 집중력과 속도감에 모든 세계인들이 놀란다. 이 같은 능력을 바탕으로 한국은 보다 정밀한 반도체 산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켜 경제 성장의 한 축을 이루었다.2. 두레와 품앗이의 발전.경제 성장의 가장 원초적인 주춧돌이 되는 것이 노동력의 효과적인 관리이다. 재화와 같은 다른 매개체를 지불 수단으로 삼지 않고, 노동력 자체를 교환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면에서 두레와 품앗이는 매우 혁신적인 제도였다. 두 제도는 필요한 노동력을 매우 원활하고 빠르게 수급함으로써 생산성을 극대화하였다. 또한 한국 경제 발전의 한 축이 되는 ‘부지런한 노동자’ 역시 두레를 통해 ‘남의 일을 내 일처럼’ 여기는 문화가 정착했기 때문이다.3. 전황(錢荒)의 경험.황당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전황(錢荒)역시 한국 경제 성장의 특수성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족한 동전 유통으로 인해 동전은 교환의 수단으로써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동전이 널리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것이었기 때문에 평범한 가정에서는 동전을 보자기에 싸서 장롱 깊숙한 곳에 넣어 두게 되었다. 이로 인해 ‘화폐=저축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화폐 사용의 초기에 서양인들이 주로 필요한 물건을 사는 데 이용했다면, 한국인들은 재산을 모으고 불리는 것에 이용했다(비교적 일찍). 이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한국인들은 6-70년대에 30%에 육박하는 높은 저축률을 자랑했다. 경제 발전이 낮은 시점에서 저축은 각종 설비자산의 투자를 증가시켜 고속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4. 1982년 수학능력시험(학력고사) 시작.한국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점 중 하나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교육열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수학능력시험이 있다. 한국에서 자본주의가 신분제를 대체하여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돈 잘 벌려면 공부해라!”는 공식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학력’이라는 든든한 후원자를 얻으려면 수학능력시험이라는 관문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초등학교부터 미래의 수능을 잘 치기 위해 10년이 넘게 수능공부에만 몰두하는 진풍경이 만들어진다. 이것이 비록 한국을 문화·예술 후진국으로 만들기는 하였으나, 반세기만의 높은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된 것은 틀림없다.5. 1613년 허준의 동의보감.인간의 평균 수명은 곧 노동력을 의미한다. 오래 산다는 것은 당연히 그만큼 가용할 수 있는 노동력이 증가한다는 측면에서 경제 성장의 중요한 원인이 된다. 수명뿐만 아니라 건강도 중요하다. 아프지 않고 건강해야 생산성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허준의 동의보감은 큰 의미를 가진다. 복잡하고 어려운 다른 의서와 달리 동의보감은 쉽고 실용적이다. 우리 땅에서 나는 약재를 중심으로 민간에서 쉽게 쓸 수 있는 요법을 기록함으로써 모든 대중의 건강에 기여했다.6. 1919년 3.1운동(기미독립운동).한국의 빠른 경제 성장은 20세기 국가 주도의 경제성장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의 정책적 주도하에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나 새마을운동과 같은 국책사업이 이루어질 수 있었고, 이 같은 정부의 계획이 충실하게 이행될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정책에 강력하게 지지하고 참여하는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국민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민족주의가 매우 뛰어난 나라이다. 우리는 그 이유를 단일민족으로 꼽는다. 하지만 조선시대까지는 민족주의 국가주의가 크게 발달하지 못했다. 우리가 단일 민족이고 모두 하나라는 정신을 고양시킨 것은 일제강점기 하의 독립운동부터이다.
ㅇ 목 차 ㅇ제 1장. 서론제 2장. 현재의 한국 영화 시장제 3장. 2038년의 한국 영화 시장1. 영화 관람 방식의 변화1) 극장의 몰락2) ‘음약=음반, 영화=극장’ 공식의 탈피3) 새로운 관람문화 형성4) 관람 문화의 이원화2. 영화 제작 방식의 변화1) 홈 무비를 겨냥한 영화제작방식2) 3D를 중심으로 한 극장용 영화제작3. 영화 창구의 변화제 4장. 결론 및 논의점참고문헌제 1장. 서론2000년 9월 포항의 조그만 단관짜리 극장에서 “공동경비구역 JSA”라는 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손으로 직접 그린 포스터가 극장 입구에 걸려 있고, 극장 안에는 삐걱거리는 의자들과 오래되어 낡고 너덜해진 스크린이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에게 있어 영화관의 이미지는 그러했다. 향수가 묻어나는 낡고 고풍스러운 이미지에, 앞사람의 의자를 한두 번쯤 차도 웃어줄 만큼 포근한 곳이었다. 영화관이 오늘과 같은 모습으로 변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그러던 2003년 봄, 포항에 신기한 건물이 하나 생겨났다(메가박스). 7-8층은 되어 보이는 커다란 건물이 모두 영화관이었다. 물론 서울에는 이미 98년 강변 CGV를 시작으로 복합상영관이 들어서기 시작했지만 지방에 살고 있던 나에게 있어 메가박스라는 복합상영관은 커다란 문화적 충격을 안겨 주었다. ‘과연 저렇게 커다란 극장을 운영할 만큼 사람들이 영화를 많이 보는가?’하는 의문을 가진 채 나는 그해 겨울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서울에 와서 가장 먼저 가 본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그런 나의 궁금증이 순식간에 풀렸다. 영화를 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데도 누구하나 특별히 짜증내지 않고 그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 당시 이미 서울 시민들에게 영화관은 가장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문화콘텐츠로써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서울보다는 조금 늦었지만 지방의 도시들 역시 차츰 복합상영관 문화가 일반화되고, 2008년에 이르기까지 극장이라는 창구는 큰 변화가 없이 지속으로 형성될 것이다. 보고서에서는 2038년 한국의 영화시장이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 것인가를 예측해보고자 한다.제 2장. 현재의 한국 영화 시장2007년까지의 통계 자료에 의하면 현재 한국의 영화 시장은 ‘극장의 정체’와 ‘부가 시장의 몰락’으로 간추려서 표현할 수 있다. 체질상 영화 시장 전체의 90%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극장 산업은 3-4년째 정체기를 맞고 있으며, 비디오/DVD와 같은 홈비디오 시장은 소멸 위기에 빠져 있다. 말 그대로 고전적 방식의 창구들이 점차 쇠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을 보면 전국 극장 관객수는 2000년부터 급격하게 생겨난 복합상영관들로 인해 수직적 상승을 이뤄왔다. 하지만 2005년부터 그 상승을 멈추고 2007년까지 정체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2008년에는 경제적 악재들까지 겹쳐 오히려 극장 관객수가 전년보다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1990년1991년1992년1993년1994년1995년1996년1997년1998년1999년1,3911,5841,6351,7901,8831,9252,0282,3842,5842,8622000년2001년2002년2003년2004년2005년2006년2007년2008년N/A8,93610,51211,94713,51614,55215,34115,879? 전국 극장 관람객 추이 출처:직접작성, 자료:영화진흥위원회 출처:경향신문) 기존의 부가 시장은 더욱 심한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와 같이 기존의 대표 부가 창구였던 홈비디오 시장은 2000년 이후 절반 이상 규모가 감소되고 있으며, 앞으로 감소세가 이어져 고사될 위기에 처해 있다. 지상파 TV역시 전체 편성에서 영화 콘텐츠의 편성을 대폭 줄이고 있다. 반면 약진을 보이고 있는 부가 창구는 무료 케이블TV, IPTV, 인터넷 VOD 시장이다. 하지만 그 성장폭은 극장의 정체와 홈비디오 시장의 하락폭에 비해 매우 작다고 할 수 있다.그렇다면 왜 이 같은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을까? 영화진흥위원회는 그 원인을 인터넷 환경을 기층부에 어떠한 니즈들이 자리 잡고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다면 향후 급변할 영화시장에서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몰락하게 된다. 불법 다운로드의 이면에 있는 소비자의 심리는 향후 영화 시장의 변화를 주도해 나갈 것이다.제 3장. 2038년의 한국 영화 시장1. 영화 관람 방식의 변화1) 극장의 몰락사람들이 극장에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영화를 관람하기 위함일까? 영화 콘텐츠를 접할 수 있는 손쉬운 창구들이 점점 늘어남에 따라 소비자에게 영화를 제공한다는 본질적 기능을 충족시키는데 극장이 가지는 비중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 소비자의 욕구는 점차 극장이 아닌 다른 창구에서 채워지고 있다. 극장은 영화를 보고 싶은 개인적 욕구보다는, 타인과 함께 문화생활을 즐기고 싶은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장소가 되고 있다. 쉽게 말해서 친구나 연인과 함께 여가를 즐기는 한 가지 수단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상황은 영화 시장에서 극장이 가지고 있는 잠재적인 위기로도 해석될 수 있다. 영화 자체에 대한 욕구는 다른 창구에서 충족시키고, 타인과 여가를 즐기는 또 다른 수단이 나타난다면 극장은 그 존재 가치를 잃게 되는 것이다. 2038년까지 타인과 여가를 즐기는 수단은 끊임없이 변화할 것이다. 간단한 예로 미팅의 장소가 빵집-> 커피숍->술집으로 변화했듯이, 극장의 주 수입원인 연인들의 데이트 문화 역시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변화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영화 관람 방식으로써 극장이 가지는 비중은 점차 감소하여 2038년에는 현재의 50% 이하로 크게 줄어들 것이다.2) ‘음약=음반, 영화=극장’ 공식의 탈피앞에서 말한 것처럼 소비자의 영화에 대한 욕구가 더 이상 극장과 직결되지 않는다면, 영화 관람의 욕구는 어디에서 해소되는가? 바로 합법적, 불법적 다운로드에 의한 관람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다운로드를 통해서 영화를 보게 되는 것일까? 단지 관람료에 대한 지불의사가 극장 관람료인 7천원보다 작아서일까? 물론 경제적인 요인도 있년 동안 안정기에 접어든다. 90년대 후반 mp3플레이어라는 획기적인 플렛폼이 등장할 때에도 CD나 테이프를 넣는다는 관성에 젖어 컴퓨터로 음악을 넣고 빼는 것이 매우 불편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2000년 이후 인터넷을 기반으로한 PC환경이 사람들에게 익숙하고 편안한 것으로 다가가자 mp3 플레이어 시장은 급성장했고, 음반 시장은 급격히 몰락했다. 영화 관람업도 마찬가지이다. IPTV의 등장과 인터넷 VOD 시장이 현재는 매우 불편하고 번거로운 것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향후 2038년에는 유비쿼터스 문화를 기반으로 매우 보편적이고 편리하며 익숙한 것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즉 대규모 상영은 크게 감소하고 개인이 직접 집에서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는 형태의 영화의 콘텐츠화가 가속될 것이다.3) 새로운 관람문화 형성위에서 이야기한 변화의 흐름은 ‘홈 무비’라는 새로운 관람 문화를 대중화시킬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와 TV 스크린이 비약적으로 커지면서 ‘홈씨어터’의 붐이 이는 듯 했지만 높은 가격으로 인해 대중화되지 못했다. 하지만 2038년에는 누구나 접할 수 있는 가격으로 대형 TV가 보급화되고 집에서 영화를 즐길 수 있는 기술적인 기반이 형성될 것이다. 이에 따라 IPTV, 인터넷VOD, 영화상영업의 수평적인 융합이 이루어지게 된다. CGV나 메가박스와 같은 거대 상영업자들은 점차 멀티플렉스의 비중을 줄이고, IPTV 시장에 뛰어드는 모습으로 변화할 것이다. 기존의 인터넷 VOD나 IPTV의 기술이 좀 더 발전하여 TV나 모니터, 모바일을 통해서 원하는 방식으로 자유롭게 영화를 접할 수 있는 탈 창구화가 일어날 것이다.창구의 변화는 차후에 논의하도록 하고, 관람 방식의 변화에 집중하자면 2038년에는 영화관이 아닌 집에서 내가 원하는 때에 편안하게 영화를 관람할 수 있게 된다. 영화를 관람하는 장소로써 ‘집’이 가장 중요한 접촉점이 될 것이다. 굳이 영화관에 가서 시간에 맞춰 영화를 보는 노력을 들일 필요는 점점 사라진다. 이는 단순한 ‘예상’이 아니극장은 3D를 기반으로 한 최첨단 디지털 기술을 이용하여 스펙터클한 영상 제공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즉 영화의 제작 단계에서부터 ‘홈 무비’를 겨냥한 영화와 ‘극장 상영’을 겨냥한 영화로 나누어 질 것이다. 결과적으로 관람 문화 역시 ‘집에서 영화를 보는 것’과 ‘영화관에서 보는 것’이 본질적으로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는 관람 문화의 이원화가 일어나게 된다.2. 영화 제작 방식의 변화영화 제작 방식의 변화는 영화 관람 방식이 이원화됨에 따라 그에 대한 맞춤 형식의 제작으로써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1) 홈 무비를 겨냥한 영화제작방식2038년에 제작될 영화의 70% 가량은 홈 무비를 겨냥하여 제작될 것이다. 홈 무비는 영화 배급과 마케팅에 드는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임으로써 영화 제작 산업의 순이익을 극대화시켜 줄 것이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제작 방식의 변화는 세 가지 측면으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현재보다 더욱 빠른 극진행이 이루어 질 것이다. 이는 드라마 산업의 변화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과거의 드라마가 24부 이상의 긴 호흡이 주를 이루었다면 현재는 16-20부 위주의 미니시리즈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집’이라는 편안한 장소에서 집중력을 잃지 않고 영화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보다 빠른 진행과, 컷 사이의 간격이 현재보다 더욱 빠르게 이루어 질 것이다. 두 번째로 음향과 영상의 스케일보다는 연출의 디테일함이 주류를 이룰 것이다. 기존 극장 상영이 스케일과 디테일함의 두 가지 요소를 모두 만족시키려고 전전긍긍했다면, 앞으로의 영화시장은 극장과 홈무비 시장이 완벽하게 이분화되면서 스케일보다는 세세한 연출의 디테일함이 중요하게 생각될 것이다. 이는 홈 엔터테인먼트 사업에서 경쟁자인 드라마 산업과 차별화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세 번째로 인터렉티브 방식의 영화 제작이 실험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예를 들면 2-3개의 결말로 제작된 영화가 상영시간동안 관객의 선택에 따라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이다.2) 3D를 중심으로 한 극장다.
ㅇ 목 차 ㅇ제 1장. 서론1. 정책 선정 배경제 2장. 정책의 주요 내용1. 정책의 시행배경2. 정책의 주요내용 및 목표사업제 3장. 정책 성과 분석1. 영상투자조합 출자의 부실과 불공정성2. 안정된 자본 공급3. 집행단체의 진로이상(異常)과 낮은 예산 집행률제 4장. 정책 평가 및 향후 방향1. 영화발전기금 재원의 다양화2. 공공기금으로써의 목표 재정립제 5장. 결론 및 논의점참고문헌제 1장. 서 론1. 정책 선정 배경 매번 7천∼8천원의 관람료를 내고 영화를 보는 관람객 중에 영화의 관람료가 어디에 쓰이는지를 생각해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영화 관람료의 대부분은 당연히 소비자가 재화를 지불하고 얻게 되는 영화컨텐츠의 제작 및 상영에 이바지한 사람들에게 분배된다. 하지만 2007년 7월 1일부터 영화 티켓의 하단부에 새로운 문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영화발전기금”이다. 영화발전기금은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제 24조에 따라 구성된 기금으로써, 정부의 지원금과 2007년 7월 1일부터 2014년 12월 31일까지 7년 6개월간 영화 관람료에 포함된 부과금으로 구성된다. 현재 상업 극장의 평균 영화 관람료는 7000원 수준이고 이에 따라 부과되는 영화발전기금은 204원이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204원은 가시적으로 매우 작은 돈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시행 첫 달인 2007년 7월에 영화발전기금으로 거둬들인 돈은 약 30억원이었다. 이는 1년에 약 400억원의 영화발전기금이 많은 사람들이 알지도 못한 채 거둬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이다.이에 정부는 영화발전기금은 소비자인 국민에게 징수하는 것이 아니라 상영관측에 부과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상영관은 관람료 인상의 압박을 받게 될 것이고, 결국은 소비자에게 그 부담이 전가되는 것이다.영화발전기금이 한국 영화산업의 진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현재의 징수방식, 나아가 사용내역은 투명하고 합리적이지 못하다. 따라서 향후 한국영화산업의 발화발전기금”을 신설하기로 결정했다.영화발전기금은 2007년과 2008년 각각 정부 예산 1천억원씩 총 2천억원의 정부출연금과 2007년 7월 1일부터 2014년 말까지 영화상영관 관람료에 부가되는 부과금, 그리고 현재 운영중인 영화진흥금고의 잔액인 1천억여원을 합하여 총 5천여억의 규모로 운영될 계획이다.2. 정책의 주요내용 및 목표사업가. 영화예술의 질적 향상과 한국영화 및 영화?비디오물산업의 진흥?발전을 위하여 영화발전기금을 설치함(안 제23조).나. 영화발전기금의 재원은 정부의 출연금, 개인 또는 법인으로부터의 기부금품, 영화상영관 입장권에 대한 부과금 등으로 조성하도록 함(안 제24조).다. 영화발전기금의 용도에 현재 영화진흥금고의 사업 외에 영상 전문투자조합 출자, 한국예술영화의 발전과 관련한 사업 지원, 영상문화의 다양성?공공성 증진과 관련한 사업 지원, 장애인 등 소외계층의 영화향수권 신장을 위한 사업 지원 등을 추가함(제25조).라. 영화상영관 입장권 가액의 100분의 5 이하의 범위에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부과금을 징수하도록 하되, 그 유효기간을 2014년 12월 31일까지로 함(안 제25조의2 및 부칙 제2조)마. 문화관광부장관은 영화발전기금 사용의 성과를 측정?평가하고 그 결과를 영화진흥위원회에 통보하여야 하며, 성과 평가결과 시정을 요하는 사항이 있는 때에는 영화진흥위원회에 시정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함(제25조의3).영화발전기금의 신설은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에 의거한 것으로써 영화발전기금에 해당하는 세부적 법률안은 다음과 같으며 영화발전기금의 주 수익원인 영화 상영관의 부과금에 대한 징수방안은 와 같다.영화발전기금은 영화산업의 발전을 위해 여러 가지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다. 가장 먼저 영상전문투자조합, 저예산영화 제작 전문투자조합의 결성 등을 통한 투자조합에 대한 공적자금의 출자확대에 힘쓰고 있다. 두 번째로 한국 영화시장의 다양성 확보를 위해 비주류 예술영화, 독립영화, 다큐멘터리에 대한 제작지원과, 현재 10여개관에 화진흥위원회는 불법 다운로드에 금지에 대한 홍보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강력한 법적 대응, 그리고 불법 다운로드와 직간접적인 연관이 있는 VOD 시장의 매출규모를 파악하는 부가시장 유통관리 시스템을 구축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VOD 판권 시장 진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컨텐츠 사업자들을 위해 판권을 담보로 한 융자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제 3장. 정책 성과 분석1. 영상투자조합 출자의 부실과 불공정성영화발전기금이 2007년∼2008년에 가장 중점적으로 시행한 사업이 바로 영상투자조합 출자 사업이다. 처음 계획될 때에는 제작 자본 안정화와 메이저 중심의 독과점 현상의 해소를 위해 사업을 진행하려했지만, 실질적인 성적은 처참하다. 예술·독립영화의 진흥을 한 가지 중요한 목표로 설정된 출자사업은 오히려 영세 제작업자들이 아닌 대형 제작사를 위한 민간 출자의 개념으로 사용되는 경향이 더욱 많았다. 영화 제작에 어려움을 겪는 영세 영화제작자들의 반응 역시 “우리와는 관계없는 돈인 것 같다”가 주를 이루었다. 현재의 예산 집행은 영상투자조합의 펀딩 당시 영세한 제작자들을 도와준다는 기존의 목표를 간과하고 민간 투자조합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물론 투자조합 기금의 운용의 문제도 무시할 수는 없다. 시장경제하에서 적정한 수준의 수익률을 거둬야 기금의 효율적인 운용과 존속이 가능하다는 영진위 위 원들의 이야기도 설득력이 있다. 영상투자조합은 지원대상을 다양화하면서도 수익성의 문제도 극복해야만 한다. 하지만 에서2008년까지의 투자성적을 보면 영상전문투자조합이 투자한 영화들은 대부분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투자조합 초기에 내실을 우선적으로 다지기위해 ‘영세 제작자 지원’과 ‘수익성’중 어쩔 수 없이 수익성에 더 중점을 두었다는 것이 단순한 변명거리에 불과한 것이다. 영화발전기금의 출자로 설립된 28개의 영상전문투자조합 중 19곳은 극심한 손실상태에 빠져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합이 47억 7천만원을 투자한 영화 는 서울 2만774명 등 전국에서 5만명의 할 수 있다.2. 안정된 자본 공급반면 영화발전기금의 투자금 수급률은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기본 정부 출자금에 영화관으로부터의 부과금으로 이루어지는 수급 구조에서 극장 부과금의 모금 현황은 현재 90%를 훨씬 웃도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7년 7월 첫 시행된 직후 7월분 납부결과 전국 극장 중 90% 정도가 동참한 것으로 나타났다. 납부 현황을 보면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가입극장(242개)의 경우 191개 극장이 납부해 91.1%의 납부율을 보였으며 메이저 복합상영관(멀티플렉스) 3사의 경우 95%가 넘는 납부율을 나타냈다. 하지만, 통합전산망 미 가입 극장(85개)의 경우 58개 극장이 미납한 것으로 조사됐다. 하지만 미 가입 극장역시 대부분 지방의 영세극장이어서 처음 시행되는 제도에 익숙치 않아서 납부가 지연된 것이었으며 현재는 거의 100%에 가까운 극장이 영화발전기금에 동참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하지만 이같이 영화발전기금의 수익원이 극장과 극장관객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인지에 대해서는 제 5장에서 논의해보아야 할 것이다.3. 집행단체의 진로이상(異常)과 낮은 예산 집행률영화발전기금의 집행하는 기관은 “영화진흥위원회”이다. 하지만 2008년 이후 영화진흥위원회의 노선과 예산집행률이 전년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2008년 5월 취임한 강한섭(50) 영화진흥위원위원회 위원장의 영향이 크다. 현재 ‘될 영화만 밀어주겠다’는 강한섭 영진위원장의 철학이 영화계의 저변을 흔들고 있다. 강한섭 위원장 아래의 영진위 4기의 핵심층은 대부분 영화산업 현장의 현실 상황을 잘 모르는 교수, 영화제작자 출신이다. 심상민 영진위 부위원장 역시 경영학 박사,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 출신의 문화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이다. 이와 같은 구성으로 인해 영화진흥위원에는 다분히 시장 경제적 논리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다. 영화인 복지사업으로 추진되는 영화인 처우개선 사업들은 지나치게 미시적인 사업으로 간주되어 예산이 삭감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 정책 평가 및 향후 방향1. 영화발전기금 재원의 다양화2003년 헌법재판소에 의해 위헌 판정을 받아 폐지된 문예진흥기금과 마찬가지로 영화발전기금 역시 위헌 논란에 휩싸였다. 원칙적으로 정부기관의 설립에 있어서 정부의 예산안과 별도로 부담금 제도를 신설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다. 공항에서 거두는 관광진흥기금, 골프장 입장료에 부과된 체육진흥기금 등이 이와 같은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현재까지 부과금 논의의 핵심은 형평성의 문제이다. 부과금 징수가 정당화되려면 기금을 부담하는 집단과 기금 혜택을 받는 집단이 동일해야만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영화발전기금이 관람자들의 집단적인 이익을 위해 사용되는가?’라는 논의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영화발전기금이 정당한 목적으로 사용되기만 한다면 극장이나 관람자 모두를 위한 일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영화발전기금이 제대로 조성되어 올바르게 사용된다면 한국영화계의 저변은 확대될 것이며, 관람자들은 양질의 한국영화 컨텐츠를 향유할 수 있게 된다. 스크린쿼터의 축소로 인해 헐리우드의 영화에 점점 한국영화시장은 잠식되고 있다. 그나마 시장에서 생존하는 한국 영화들 역시 그 다양성이 줄어들고 있다. 현실적으로 막대한 자본적 차이에 의해 시장의 기능으로만 한국 영화를 진흥시킬수는 없다.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한국영화시장에서 영화발전기금과 같은 정책적 지원은 반드시 필요하다.영화발전기금이 형평성의 논란을 벗기 위해서는 부과금 징수원의 다양화가 필요하다. 굳이 형평성 논란을 벗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연히 영화발전기금은 영화산업을 통해 이익을 취하는 모든 집단이 부담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현재 우리나라의 영화발전기금이 오로지 영화관에서만 징수되는 것은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영화산업은 극장에서 출발했지만 다양한 매체들의 발달로 인해 수많은 창구들이 파생되고 있다. 그리고 뉴미디어들의 출현으로 인해 앞으로도 더욱 많은 창구들이 생겨날 것이다. 영화를 통해.
2008 2학기 경제사경제사에 있어 우연적 요소와 필연적 요소를 논하라는 레포트 주제를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대학에 입학한 후 처음 읽게 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이었다. 책의 4장에는 역사적 사실들의 인과관계를 다루면서 필연적 요소, 그리고 우연적 요소들에 대한 다양한 학자들의 논의가 실려 있었다. 하지만 1900년대 초반 유럽의 역사가들 사이에서 역사에서 우연이 차지하는 중요성이 잠시 강조되기는 했지만, 그 전후의 많은 실증주의적 역사가들에 의해 우연이 가지는 의미는 폄하되어 온 경향이 있다. 마르크스는 역사에서 우연이 가지는 의미를 매우 낮게 평가했다. 그는 역사에서 우연의 측면을 세 방면에서 주장하였다. ‘첫째, 우연은 사건의 경로를 근본적으로 변경시킬 수는 없다, 둘째, 하나의 우연은 다른 우연에 의해서 상쇄되며 결국에는 우연이 저절로 소멸된다, 셋째, 우연은 특히 개인의 성격으로 설명된다’는 것이다.책 속의 예를 빌려 존스라는 사람이 과음을 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컴컴한 길모퉁이에서 브레이크에 문제가 있는 차로 로빈슨을 치어 죽였다고 가정해 보자. 로빈슨은 길모퉁이의 가게에 담배를 사러 가는 중이었다. 이때 존스가 사람을 죽인 원인은 음주운전, 자동차 정비 부실, 열악한 도로상황이라는 필연적 요소와 그가 흡연자이고 담배를 사러 가는 길이었다는 우연적 요소가 결합되어 있다.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은 ‘그가 흡연자가 아니었고 담배를 사러 가는 길이 아니었다면 과연 교통사고를 내지 않게 되었을까?’에 주목한다. 하지만 사실상 역사라는 것이 수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닌 이상 이 같은 결과론적 논의는 무의미하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은 ‘우연적 요소들이 필연적 요소와 어떻게 결합되어 하나의 사건을 만들어냈는가’하는 그 과정의 문제이다.오늘날의 세계 경제사는 다분히 유럽 중심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무게중심이 처음부터 유럽에 쏠려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분명 경제사에서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가 세계 경제사의 무게중심을 잡고 있었던 때가 존재했고, 어떤 시점을 기준으로 점점 유럽중심의 경제체제로 개편된 것이다. 이렇듯 세계 경제사의 무게중심이 중국 중심에서 유럽 중심으로 이동하는 것 또한 하나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임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의 주변에는 다양한 필연적 요소들과 우연적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다. 서론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경제사의 무게중심의 이동이 어떤 필연적 요소들과 우연적 요소들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졌는가를 알아보는 과정은 실증을 떠나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경제사가 중국 중심에서 유럽 중심으로 이동하게 되는 변화의 역점은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이후인 18세기 후반이다. 그 이전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지만 15세기~18세기에는 인구나 총생산과 같은 객관적 지표에 있어서도 세계의 무계중심이 아시아에 있었다는 것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그렇다면 이 시기에 유럽을 세계 경제의 중심에 올려놓은 필연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산업혁명 자체가 그 필연적 요소가 될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광의적 측면에서 활발한 해상진출을 들 수 있다. 산업혁명 자체가 유럽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활발한 해상진출을 통해 많은 식민지를 형성하고, 그로부터 얻게 되는 막대한 자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15세기 이후 유럽은 활기찬 해상 팽창을 시도하여 전 지구적 해상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해상활동을 통해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세계를 수직적 구조로 재편하기 시작한 것이다. 반면 이 시기의 중국을 보면 이때까지 활발한 해상활동을 펼치다가 점점 팽창의 시기에서 수렴의 시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원을 무너트리고 대륙을 장악한 명나라 초기는 각 방면에 있어서 팽창의 시기였다. 북방의 잔여 몽골 세력을 진압한 뒤 명 중심으로 세계의 질서를 확립하고자 했던 영락제는 환관 정화를 남해방면으로 파견한 이른바 남해대원정을 시행했다. 하지만 이러한 해상팽창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선덕제가 사망한 뒤 명은 농민 반란, 몽골 고원의 발흥, 제위의 불안한 승계 등으로 사회적 혼란에 빠졌다. 결국 명은 중화주의에 기초한 세계화를 추진할 여력을 잃고 내부 수렴위주로 급변하게 된다. 북방 유목민의 압력을 견디기 위해 만리장성을 건설한 시기도 이 시기이다. 일본의 역사가 미야자키 마사카쓰의 말처럼 명은 팽창의 시대에서 수렴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결국 중국의 대륙중심의 수급과 유럽의 활발한 해상무역을 통한 전 대륙적인 광범위한 수급으로 인해 중국과 유럽은 점점 더 큰 격차가 생길 수밖에 없는 필연적 상황에 놓이고 만다. 아메리카 대륙의 석탄을 통해 공업이라는 것이 유럽에서 태동하게 되고, 현재까지 유럽의 경제가 중국을 압도하는 역사가 이어지게 된 것이다.그렇다면 경제사의 무게중심이 변화하게 된 우연적 요소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유럽인들의 폭력성, 혹은 아시아의 유교적 사고라고 생각한다. 국민적 성향의 특징이 직접적으로 변화의 역점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국민적 성향이 다른 미세한 우연적 요소들과 결합되어 ‘해상 무역의 발달’이라는 필연적 요소를 만들어내는데 일정 부분의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유럽과 아시아(중국)에서 모두 제국주의적 문화가 드러났지만 그 성향은 유럽과 중국이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유럽이 “확장”중심이었다면,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권은 “통일”, “안정” 중심이다. 단순한 명분론일수도 있겠지만 유럽이 확장과 번영을 위해 제국주의 문화를 발전시켰다면, 중국은 안정을 위해서 전쟁을 불사했다. 이러한 점은 유럽과 중국 국민의 호전성, 혹은 공격성의 차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다. 아시아권 민족들이 대게 큰 발전보다는 평화로운 일상을 추구한다면, 게르만 족을 비롯한 유럽의 민족들은 호전적이고, 공격적 수단을 이용해서라도 더 넓고, 많은 것,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개인적인 이는 의견이고, 그에 대한 근거들을 나열은 분량상 생략한다. 중국 역시 역사적으로 대량 학살이나 전쟁에서 무분별하게 살인을 저지르는 등 공격적 성향이 유럽과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겠지만, 전 시대를 거쳐 유교권 문화는 인간의 공격적 성향을 경계하고 마음을 평온하게 다스리는 것을 가장 중요시했다. 오히려 유럽인들이 일으킨 세계 1차대전에서는 천만명, 2차대전에서는 5천만명의 희생자가 발생했고, 히틀러는 6백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하고, 스탈린은 4백만명의 정치범을 학살했다는 사실에 주목해보자. 결과적으로 유럽 민족이 가지는 공격성은 유럽이 활발한 해상진출과 약탈적 식민지 건설을 주저하지 않게 만들었다. 더불어 자연적인 경쟁을 통해 경제적 생존과 지배, 종속이 이루어지는 경제적 자유주의 체계를 완성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반면에 중국의 유교중심적 사고는 해상 진출을 통한 침략주의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고, 이후에도 경쟁보다는 형평 위주의 정책으로 유럽과 점점 경제적 격차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