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그너법의 제정배경과 제정과정- 국가와 노동의 역할이기중목차1. 서론2. 국가 - 뉴딜부터 와그너법까지1)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뉴딜과 전국산업부흥법2) 로버트 F. 와그너와 와그너법3. 노동운동 - 미국노동총동맹의 지지, 전투적 노동운동의 고조1) 미국노동총동맹 - 생존, 혹은 기득권2) 전투적·급진적 노동운동의 고조4. 노동운동의 영향 - 1934 중간선거, ‘파업전염병’에 대한 공포.1) 1934 중간선거2) ‘파업전염병’에 대한 공포5. 결론 - 정치개혁과 대중투쟁의 결합1. 서론1929년 월가의 주식폭락으로 시작된 대공황은 미국사회 전반에 엄청난 변화를 불러왔다. 미국의 근본적인 가치관을 형성했던 개인주의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경제에 대한 국가개입의 필요성이 인정되었다. 1932년 대통령에 당선된 프랭클린 D.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의 첫 번째 과제도 공황극복이었으며, 그는 이를 위해 뉴딜(New Deal)이라 불리는 일련의 정책을 실시하였다.뉴딜의 이론적 기초는 과소소비론이었다. 과도한 경쟁이 이루어지는 시장에서 개개의 자본가는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가격을 낮추어야 한다. 가격경쟁을 위한 노력은 임금삭감 혹은 정리해고로 이어지고, 노동자들은 점점 가난해져 구매력을 상실하게 된다. 결국 소비가 생산을 따라잡지 못하게 되고, 이 때문에 공황이 발생한다는 것이 과소소비론의 내용이었다.) 따라서 뉴딜은 과소소비의 해결을 위해 과잉 경쟁의 완화와 공정 거래에 초점을 두었다.흔히 ‘뉴딜 노동법’으로 불리우는 전국산업부흥법(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 : NIRA)의 7(a)조와 이를 계승한 와그너법(Robert F. Wagner가 제정한 전국노동관계법 National Labor Relations Act : NLRA의 별칭) 역시 이러한 과소소비론의 기초 위에서 노동과 자본의 불평등 완화를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전국산업부흥법의 7(a)조는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을 인정하였으며, 와그너법은 이러한따른 사회 혼란의 압박이 없었다면 결코 통과될 수 없었던 법안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와그너법 이후 노동운동의 발전에 대하여도, 그것이 단순히 와그너법만의 결과는 아니며 미약하지만 이전부터 존재했던 미조직노동자들의 노력의 결실임을 인정한다.)와그너법에 관한 이상의 역사적 논의는 와그너법의 제정배경과 제정과정에 영향을 미친 두 주체, 즉 국가와 노동의 역할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요약된다. 신좌파들이 노동운동의 고조로 인한 사회혼란의 압박을 강조하는 반면, 국가론자들은 노동운동의 압박을 평가절하하며 정치인들의 ‘선택’을 강조한다. 듀밥스키와 플로트케의 입장은 궁극적으로는 정치인들의 역할을 강조하지만, 노동운동이 와그너법의 통과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그러나 국가와 노동이라는 주체를 단일한 주체로 바라보는 것은 당시의 상황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다. 국가에서도 와그너법을 주도한 민주당 진보적 자유주의자와 루즈벨트 정부의 역할이 각각 달랐고, 노동 내에서도 미국노동총동맹 지도부의 역할과 1934-35년의 파업을 주도했던 노동자들의 역할이 달랐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와 노동이라는 큰 범주 안에 존재하는 각각의 행위자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본 논문에서는 국가와 노동이라는 범주 안에 존재하는 각각의 행위자들이 와그너법의 제정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분석함으로써 와그너법의 제정배경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에 따라 2장에서는 국가의 역할, 즉 전국산업부흥법에서 와그너법의 제정에 이르기까지 와그너를 비롯한 민주당의 진보적 자유주의자들과 루즈벨트 정부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보고, 3장에서는 노동의 역할, 즉 미국노동총동맹과 급진적 노동운동의 역할을 살펴본 뒤 4장에서 노동운동이 정치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와그너법의 제정배경이 무엇이었는지 결론짓고자 한다.2. 국가 - 뉴딜부터 와그너법까지1)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뉴딜과 전국산업부흥법루즈벨트와 내각의 뉴딜주의자들에게 노동정책과 노동조합의 역할은 공황극복에 중요한 요소로 고려되지 않았다. 아닌, ‘노동조합’ 그 자체가 되었다.1935년 5월 27일, 연방대법원은 전국산업부흥법이 주내통상에 대한 연방법 부적용의 원칙을 위반하였으며, 대통령에게 지나치게 폭넓은 입법권을 위임하여 권력분립의 원칙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이를 위헌으로 판결했다. 이로 인해 전국산업부흥법은 효력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위헌판결이 내려지기 전부터 와그너를 비롯한 전국노동위원회의 동료들은 노동자와 사용자간의 공정한 교섭을 위한 도구로서 7조(a)가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와그너는 1934년 3월, 7(a)조의 실효성을 강화하기 위한 법안을 상원에 발의했다.2) 로버트 F. 와그너와 와그너법와그너는 민주당의 자유주의자들 중에서도 노동조합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한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공황을 극복하고 미국의 사회·경제를 포괄적으로 개혁하는데 노동조합이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노동조합은 임금인상을 통해 소득재분배의 역할을 하고, 이러한 소득재분배를 통해서 공황을 불러온 구매력 부족 현상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와그너의 생각이었다.) 또한 와그너는 산업 민주주의와 노사관계의 질서를 만들기 위해서도 노동조합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용자의 자의에 따른 노사관계가 무질서를 만들어내고, 노동운동을 위험한 것으로 만든다고 생각했다. 즉, 노동운동의 위험성을 중화시키기 위해서 노동조합에 대한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를 규제해야 하며, 이를 위한 국가기관의 권한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1933년 8월에 와그너가 전국노동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었을 때, 와그너는 이 기관이 노동문제에 관한 ‘대법원’의 역할을 하길 원했다. 그러나 전국노동위원회는 아무런 법적 권한이 없는 중재위원회에 불과하였으며, 사용자들은 점차 전국노동위원회의 중재를 무시하게 되었다. 와그너는 전국노동위원회와 전국산업부흥법의 한계를 절감하게 되고, 노동문제의 해결을 위한 새로운 대안이 필요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1934년 3월에 와그너가 제출한 법안은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를 불법으로 으리라 생각했다. 20세기에 들어서 1차대전기까지, 이러한 자발주의는 성공하는 듯 했다. 정부는 우호적 무관심을 유지했고, 몇몇 자본가들은 미국노동총동맹과 협상관계를 맺기도 했다.)그러나 1차대전 이후 미국노동총동맹은 위기를 맞게 된다. 자본가들은 반노동조합주의로 돌아섰으며 노동적대적인 법원의 파업금지명령도 증가했다. 1차대전기에 500만이었던 조합원 수는 1930년대 초반 300만으로 감소했고, 존속의 위협을 느낀 미국노동총동맹, 그리고 그린은 국가가 법적으로 노동조합의 조직을 보호하고, 사용자가 노동조합과 교섭할 것을 강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미국노동총동맹은 자발주의를 버리고 전국산업부흥법의 제정과정에 동참하였다.)그러나 전국산업부흥법 제정 이후에도 미국노동총동맹의 위기는 해소되지 않았다. 물론 미국노동총동맹의 조합원 수는 1933년의 200만에서 1935년의 280만으로 증가하였으나, 이는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이었고, 한편으로는 사용자가 주도하는 기업별 조합이, 다른 한편으로 미국노동총동맹에 가입하지 않은 독립 노동조합이 증가했다. 미국노동총동맹 산하의 노동조합도 보수적인 미국노동총동맹 지도부의 파업중지명령을 무시하고 격렬한 파업을 벌이곤 했다. 미국노동총동맹은 점차 분열되었고 통제력을 잃기 시작했으며, 지도부는 이전의 자발주의와는 정반대로, 정부가 노동관계에 대해 강력하게 개입하는 새로운 노동관계법이 제정되지 않는다면 조직이 붕괴될 것을 우려했다. 이러한 우려는 재계의 일부 인사들도 공유했는데, 제네럴모터스(General Motors)의 회장이었던 슬로안(Alfred P. Sloan)은 미국노동총동맹이 공산주의를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 단체를 지켜야 한다고까지 말할 정도였다.)따라서 미국노동총동맹은 두 가지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야 했다. 한 가지는 사용자들이 주도하는 기업별 노조의 위협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내외의 급진적 세력의 위협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와그너법 제정과정에서 세 가지를 요구하게 된다. 기업전히 의석을 유지하고 있던 민주당내 보수파와 내각의 반대가 약해진 이유 또한 1934년의 선거결과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1934년의 선거승리는 와그너법의 원인이라기보다 오히려 와그너법의 제정을 이끌어낸 사회적 배경, 즉 노동운동의 고조로 인한 결과라고 봐야한다.노동자들의 정치적 투쟁이 있었던 지역에서는 어디서나 민주당이 승리를 거두었다. 오토라이트 파업이 일어났던 오하이오와 방직 노동자들의 파업이 일어났던 대서양 연안의 많은 주에서 상원의석이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넘어갔다. 국제부두노동자연맹의 격렬한 파업이 있었던 대서양연안에서는 하원선거에서 민주당 승리가 두드러졌다. 패배한 공화당이나 승리한 민주당 모두, 이러한 결과가 미국 사회의 급진화의 결과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1934년의 파업의 물결에 영향력을 보여주었던 지역적 급진정당의 약진도 두드러졌다. 공산당은 4개 주에서 좌파의 대표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31개 주에서 의미있는 득표를 했다.) 이러한 사회전반의 급진화라는 분위기 속에서 정치인들은 와그너법의 부결이 불러올 영향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거 이후, 와그너는 대통령의 여전히 소극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의 법안이 통과될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2) ‘파업전염병’에 대한 공포1935년 전반기에는 1934년과 같은 도시 단위의 격렬한 파업은 벌어지지 않았으나, 여전히 정치인들은 더 큰 파업의 물결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 스카치폴은 루즈벨트 정부의 노동부장관 퍼킨스의 “요란하게 선전되고 있는 ‘파업전염병’이란 말은 전혀 현실성이 없다”는 말을 근거로 정치인들이 당시 노동운동의 분위기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퍼킨스는 와그너법의 통과로 강화된 노동위원회가 노동부 외부에 설치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파업전염병’의 심각성을 평가절하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루즈벨트 내각의 주요인사였음에도 와그너법의 통과에 대해서는 거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사실상 파업은 양적으로도 증가하고 있었다. 1934년의 첫 세했다.
『고삐풀린 자본주의, 1980년 이후』 서평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부터 시작한 금융위기로 전 세계가 긴 불황의 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2008년 한 해 25개의 은행이 파산했고, 최근에는 제너럴 모터스가 파산보호 신청을 하는 등 금융위기가 실물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실물경제의 위기는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로 파급되어 국제노동기구(ILO)에서는 2009년 전 세계 실업자가 최대 2억3000만명이 될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다. 바야흐로 제2의 세계경제대공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1930년대의 대공황 이후 유래 없던 대규모의 경제위기에 대해, 경제전문가들은 대체로 신자유주의를 그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오랫동안 규제완화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글로벌 금융위기의 도래를 경고해온 폴 크루그먼이 새삼 주목받으며 작년에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고, 대표적인 시장주의자인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미 하원 청문회에서 자신의 시장자율 우선 경제관에 허점을 발견했다고 말했으며,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분리한 뉴딜 정책에 비판적이었던 경제사학자 아이켄그린조차 규제완화가 금융위기를 불러왔다고 주장하는 등, 제한 없는 신자유주의적 금융자유화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앤드류 글린의 『고삐풀린 자본주의, 1980년 이후』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기 전인 2006년에 출간되었다. 금융위기 이후의 경제학자들의 관심이 오늘날 우리가 맞이한 위기가 신자유주의의 필연적인 결과인가, 그렇다면 그 대안은 무엇인가에 초점이 맞춰진 반면, 『고삐풀린 자본주의, 1980년 이후』는 위기 이전의 대다수의 경제학 저술이 그렇듯 섣불리 위기를 예측하지 않는다. 글린은 “지금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을 이해하려는 노렵 없이 자본주의 역사의 다음 속편이 무엇일지를 추측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이 책은 바로 현재의 에피소드들에 먼저 초점을 맞출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책은 자본주의가 고삐에서 풀려난 이후에도 그다지 나아지지 않은 자본주의의 한계를 통계에 근거하여 쉽고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으나, 고삐풀린 자본주의의 대안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대답만을 줄 뿐이다.앤드류 글린은 1943년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교 코퍼스크리스티대학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공부하고 1964-1966년에는 윌슨 노동당 정부의 재무부에서 일하다가 1969년부터 코퍼스크리스티대학에서 강의했으며 2007년 12월 22일 뇌종양으로 사망했다. 그는 마르크스 경제학, 경제학사, OECD 회원국의 경제사정 등을 강의했으며, 1970년대의 마르크스 경제학 르네상스에서 영국을 대표하는 이론가 중 한 사람이었다.그의 마지막 저작인 『고삐풀린 자본주의, 1980년 이후』는 총 7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 「자본에 대한 도전들」부터 제7장 「복지와 소득불평등」까지, 글린은 1970년대 이후 자본주의가 고삐에서 풀려난 과정과 고삐풀린 자본주의가 각 부문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양상을 고찰하고 있다.제1장 「자본에 대한 도전들」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전례 없는 호황을 누렸던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이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에 걸쳐 맞이한 도전에 대해 개괄한다. 호황기의 높은 취업률은 노동자들의 협상력을 강화하여 임금상승 압력의 원인이 되었고, 1970년대 초에는 식량과 원자재의 가격이 크게 올라 인플레이션 압력이 가중되었으며, 1973년 말에는 오일쇼크가 전세계를 강타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1970년대 중반부터 생산성 증가율이 급격히 하락하여 성장이 둔화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도전들에 더해 소련과 동유럽 및 중국의 계획경제는 공공소유와 중앙집중적 계획이 작동할 수 있음을 증명하였으며, 이에 따라 독일의 공동결정제, 스웨덴의 임노동자기금, 영국 노동당과 프랑스 사회당 정부의 국유화 등 선진국들이 자유시장 자본주의로부터 멀어지는 추세가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이르러 파업은 무의미할 정도로 줄어들었고, 물가상승이 억제되었으며, 실질임금도 소폭 올랐을 뿐이다. 소련은 붕괴되었고, 사적 자본의 지배를 위협하는 급진적인 조치들은 폐기되었다. 적어도 2000년까지는 1970년대의 도전들이 결정적으로 격퇴된 것으로 보인다.제2장부터 이어지는 4개의 장은 자본주의가 도전들을 격퇴하고 고삐에서 풀려난 원인과 과정을 살펴본다. 제2장 「긴축, 민영화, 규제완화」는 선진국들이 도전에 대한 대응으로 긴축통화정책을 택하였으며, 이것이 일본, 유럽, 미국 등에서 큰 성공을 거둔 과정을 보여준다. 1970년대 중반 거의 모든 OECD 회원국에서 실업률이 상승하였고,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딜레마가 대두되었다. 미국과 프랑스 등 선진국은 인플레이션의 감축을 목표로 삼은 긴축정책을 실시했고, 재정적자를 확대하였으며, 국영기업을 민영화했다. 1980년대 실업의 증가에 대한 선진국들의 대응은 노동시장의 규제완화였으며, 그 결과 많은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불안정해졌다.제3장 「금융과 주주의 소유권」에서는 세계경제에서 금융부문의 위상이 높아진 과정과 그 결과를 고찰한다. 1990년대 프랑스와 독일을 제외한 선진국에서는 가계저축률이 하락하고 가계소비가 가파르게 증가했다. 이에 따라 은행 등으로부터 가계차입이 증가하여 가계지출을 부양했고, 이는 금융부문의 팽창을 낳았다. 경영진의 재량권 확대와 금융기관 주식 소유 비중의 확대는 주주가치를 좇는 경향을 낳았고, 이로 인한 주식거품은 결국 미국의 신경제가 끝날 무렵 일련의 기업 회계부정 스캔들로 마감되었다. 금융의 팽창은 일국을 넘어 국제적인 현상이 되었으며, 이로 인한 금융불안정은 종종 파괴적인 결과를 낳았다. 1998년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의 붕괴, 1997-98년의 아시아위기는 오늘날 금융시장이 가진 위험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제4장 「세계화와 국제경제관계」는 세계화가 국제경제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다. 1995년 이후 미국의 생산성 증가가 빨라지고 유럽과 일본의 생산성이 뒤쳐지자 미국의 금융자산 구매를 위한 자본유입이 크게 늘어났으며 달러가치가 상승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폭이 늘어나고 해외차입에 의해 소비를 유지하면서 달러의 위상은 위험해지고 있다. 한편 중국은 90년대 이후 빠르게 성장하여 세계 무역구조와 생산구조에 거대한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중국의 수출과 수입은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으며 선진국들에겐 국내 생산자들을 위협할 값싼 상품의 수입처이면서 동시에 중요한 수출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의 경우처럼 세계경제의 통합은 더욱 진전되고 있으며, 이 구체적인 양상인 무역과 해외직접투자의 증가는 선진국의 노동자들에게 복합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제5장 「노동자계급의 후퇴」는 1970년대에 자본주의가 직면한 강력한 도전이었던 노동자계급의 지위가 약화된 과정을 서술한다. 앞에서 논의된 긴축적인 거시경제정책으로의 전환, 민영화와 규제완화 및 주주가치 추구를 야기하는 시장제도와 국제경쟁의 격화는 노동자계급을 압박했다. 1970년대 이래 공업부문의 고용은 급속히 감소했고, 서비스 부문의 고용은 공업부문에서 감소한 일자리를 메울 만큼 증가하진 못했다. 실업자는 증가했고, 80년대와 90년대엔 특히 저숙련 노동자들의 취업률이 저하했다. 기술발전과 국제무역이 저숙련 노동자들의 취업에 불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저숙련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을 감수하거나, 실업자가 되는 수밖에 없었고, 임금격차는 상승했다. 1979년 이래로 많은 나라에서 노동조합의 조직률이 낮아졌다. 특히 영국의 보수당 정부의 반노조 정책은 노동조합의 약화에 기여했고, 이는 노동강도의 강화를 낳았다. 이러한 노동자계급의 후퇴는 전세계적 현상이지만, 특히 유럽보다 영미식의 자유주의적 시장경제에서 노동자계급은 더 약화됐다.
1930년대 세계대공황과 오늘날의 금융위기- 원인, 현상, 대책의 비교0. 들어가며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에서 시작한 금융위기가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수십 년 만에 처음 경험하는 대규모의 금융위기는 선진국과 신흥국을 가릴 것 없이 세계 경제 전체에 커다란 시련으로 다가오고 있다. 금융위기로 인한 신용경색은 실물부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이러한 위기가 얼마나 더 깊어질지, 회복에 얼마나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할지 그 누구도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현재의 글로벌 금융위기는 1930년대의 세계 대공황과 흔히 비교되곤 한다. 위기의 원인과 전망, 대책을 연구하는 이들은 세계 대공황의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찾고자 한다. 그만큼 현재의 위기는 과거의 위기와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이 보고서에서는 1930년대의 세계 대공황과 현재의 글로벌 경제위기를 그 원인, 현상, 대책 면에서 비교하고자 한다.1. 위기의 발발 - 버블의 붕괴 혹은 긴축정책의 오류서브프라임 사태로 인한 대규모 투자은행들의 몰락은 1929년 미국의 주식시장 붕괴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1920년대와 2000년대의 미국은 물론 전자가 최대의 채권국이었고 후자는 채무국이었다는 점에서 다르지만, 유동성 과잉과 양극화의 심화가 버블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유사점을 보인다.1920년대의 미국은 인플레이션 없는 성장을 계속했고, 불균등한 소득분배는 소비재 수요를 감소시켰다. 그 결과 남아도는 상위계층의 소득은 생산에 투자되기 보다는 투기자본으로서 주식시장에 집중되었다. 1920년대 말, 미국은 주식시장 과열을 억제하기 위해 금리인상 등 긴축정책을 취했다.2000년대 초반의 FRB는 IT버블 붕괴 이후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실질금리를 마이너스로 유지하였고, 이로 인해 투기수요가 부동산시장에 몰려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게 되었다. 이러한 주택 가격의 상승은 저소득층의 비우량 담보대출(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증가로 이어졌고 부실대출이 늘었다. FRB가 자산 가격 급등에 따른 부작용에 대비하기 위해 20아졌다.1920년대의 미국과 2000년대의 미국, 양자 모두 유동성 과잉, 그로 인한 자본시장의 과열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긴축정책이라는 특징을 지닌다는 점에서 유사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버블의 갑작스런 붕괴, 혹은 긴축정책의 실패, 그 어느 쪽이든, 자산가치의 하락과 금융위기로 이어졌다.1929년의 주식시장 붕괴를 대공황의 원인으로 보는 견해에 관해서는 많은 반론이 있지만, 그러한 반론도 미국의 긴축정책을 공황의 원인으로 보고 있다. 즉, 주식시장 붕괴는 긴축정책이라는, 대공황을 촉발시키고 심화시킨 잘못된 정책에 의한, 대공황의 전초적인 현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에 의하면 미국의 긴축정책은 미국으로부터 자본을 유입하던 국가들에 충격을 주었고, 이들 국가가 침체에 빠지자 미국의 수출시장이 위축되었으며, 여기에 대규모 금융긴축의 충격과 주식시장 붕괴의 심리적 효과가 겹쳐 공황이 발발했다고 한다. 요약하자면 대공황의 발발도, 그 심화도 모두 긴축정책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견해이다.)그러나 현재의 위기에서 2000년대 후반 FRB의 기준금리 인상을 비판하는 견해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대부분의 논자들은 금융시장에서의 투기적 행동이나 과도한 신용팽창, 그리고 이에 대한 감독과 규제를 미비를 말하고 있다. 2008년 11월에 열린 G20회담에서도 각국 정상들은 금융상품에 대한 관리 부실과 감독 부재를 금융위기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이와 달리 미국 정부 정책의 실패를 비판하는 이조차도 2000년대 초반의 저금리 정책으로 인한 과잉 유동성이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비슷한 원인에 의해 촉발된 두 위기에 관하여 과거의 위기는 그것을 촉발시킨 긴축정책이 문제였고, 현재의 위기는 긴축정책 이전의 경기부양정책이 문제였다는 설명은 논리적이지 않아 보인다.이러한 논쟁은 공황의 좀 더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문제로 이어진다. 공황은 자본주의에 내재한 필연적인 재난인가? 아니면 인간이 만들어낸, 정책의 실패에 의한, 피할 수 있는 재난인가? 후한 것이라는 주장이 다수의 지지를 얻고 있는 듯하다.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위기를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2. 위기의 확산 - 미국으로부터 전 세계로1920년대 미국의 긴축정책은 유럽의 자본 차입국에 영향을 미쳤다. 가장 직접적인 타격을 입은 것은 독일, 헝가리, 폴란드 등 중동부 유럽의 최대 자본 차입국들이었다. 서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 수탈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위기에 대응하였으며, 이에 따라 대공황의 여파는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파급의 속도는 느렸지만 그 효과는 길었다.오늘날의 금융위기는 불과 수개월 만에 전 세계로 파급되었다. 지난 9월 리먼 브라더스 파산의 충격은 2개월 만에 오일 달러가 풍부한 중동 바레인의 아랍뱅킹에까지 손실을 입혔다. 각국은 수개월 만에 외자 이탈(환율 급등), 경기 침체에 따른 수출 타격을 받았다. 세계 주요 국가들의 주식시장은 폭락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저소득층과 중산층도 경기불황의 여파가 아닌, 직접적인 금융시장의 충격에 의해 피해를 받았다. 미국의 저소득층은 주택가격의 상승할 것을 예상하고 서브프라임 모기지에 뛰어들었다. 금융이 자유화된 각국의 개개인들은 외국 금융기관의 각종 파생금융상품에 직접 투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금융기관의 손실은 개개인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고 있다.현재 신흥국들이 맞고 있는 금융위기는 1920년대와 30년대에 주요 자본 차입국들이 겪었던 위기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해외 자본이 이탈되면서 시장 불안이 가중되고, 외환 보유액 부족, 경상수지 적자 확대, 외채비율 급증 등으로 인해 경제가 불안해지며 국가 신용이 하락하고, 이는 다시 금융시장의 붕괴에 이은 실물 경제의 위기로 이어진다. 최근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국가들의 위기 파급 경로는 이와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아이슬란드는 금융자유화를 추진하며 외자 의존도가 높게 유지되었고, 헝가리는 해외 투자자 이탈이 급증했다. 파키스탄은 만기 도래 외채 규모가 증가하면서 외환 보유액이 급감했고, 우크라이나는 금융기관의 자유화된 세계 자본시장의 흐름이 위기의 확산을 더욱 빠르고 깊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실물경제보다 금융산업에 치중하고 외환의존도가 높았던 국가일수록 더욱 큰 위기를 겪고 있다. 그러나 1930년대에 각국이 금본위제에서 이탈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했던 것과 달리, 현재의 국가에게 세계 경제체제에서 이탈할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가장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는 국가일수록 국제공조가 절실한 것이다.3. 위기의 해법 - 국제 공조와 국가의 역할 증대1930년대의 대공황에서 얻은 교훈은 오늘날의 위기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국제공조의 필요성, 국가개입의 확대 등이 그것이다.1930년대 각국의 경제회복은 금본위제 이탈, 평가절하, 팽창정책의 수순으로 진행되었다. 국제적 협조가 위기극복을 위해 필요했으나 수월하지 않았다. 1932년 로잔느 회의의 부가적 조항에 의해 세계경제회의가 시작되었으나 주요 강대국은 각기 자국의 경제적, 정치적 이익을 방어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통화안정에 관한 승인이 루스벨트에게 거절당함으로써 세계경제회의는 실패했다. 루스벨트의 선언 이후에도 유럽에는 금본위제를 유지하는 금블록이 존재했으나 이들은 디플레이션의 제약에 묶어 회복에 더욱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결국 완전한 회복은 제2차세계대전을 겪고 나서야 가능했다. 혹은, 국제적 협조의 붕괴가 각국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2차대전을 낳았다고도 할 수 있다.미국의 금융위기가 국제적인 경제위기로 확산되자, 미국 주도의 자유로운 세계경제체제의 수정을 요구하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유럽과 아시아 신흥국들 사이에서 이러한 논의가 적극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2차대전 종전 직전에 만들어진 브레튼우즈체제를 대체할 ‘신브레튼우즈체제’의 구축으로 표명되고 있다. 그러나 세계경제위기를 논의하기 위해 열린 G20 정상회의에서 기존의 IMF를 대체 혹은 강화하는 새로운 국제금융감독기구의 창설은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다만 이 회의에서 발표된 것은 투명성과 책임성 강화, 금융감독 및 규제 개선미국의 역할, 달러의 위상 등에 대한 거대한 변화를 요구하는 것으로 합의나 이행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G20의 탄생으로 국제공조가 강화될 것인지, 별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유명무실화될지에 대해서는 전망이 엇갈린다. 그러나 1930년대에 국제적 경제위기에 각국이 개별적으로 대응해야 했고, 이로 인해 세계대전까지 촉발된 상황에 비추어 보면 현재에는 국제적 협력의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열려 있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팽창정책과 국가개입의 확대는 루스벨트의 뉴딜에서 오바마의 그린뉴딜로 이어진다. 뉴딜정책은 논리적 일관성이 없었고 오히려 회복을 늦췄다는 평가가 주류 경제학에서 제기되었지만, 최근의 경제위기와 맞물려 ‘뉴딜’에 대한 재평가가 부각되고 있다.현재의 경제위기가 금융으로부터 시작한 것인만큼 금융개혁 문제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하다. 뉴딜정책의 일환이었던 ‘글래스-스티걸법’은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업무를 분리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에 대해서 포트폴리오 분산, 투자자 불이익 가설의 실증적 기각 등을 근거로 비판하는 견해가 있었고, 결국 1999년 ‘그램-리치-브릴리법’으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겸업이 허용됐다.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분리를 비판하는 논리에 따르면, 이번 금융위기에서도 겸업이 금지됐더라면 상업은행들이 신용위기에 몰려 있던 투자은행을 흡수 합병하지 못해 위기의 여파가 더욱 극심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1999년의 규제완화가 이번 금융위기를 불러왔다는 시각이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아이켄그린은 글래스-스티걸 법을 폐지한 것은 근본적으로 사리에 맞는 선택이었지만, 복합기업화에는 시간이 걸리고, 단기적으로 투자은행이 감독기관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오바마 행정부의 구체적인 금융개혁안은 발표되지 않았으나, 세계 각국의 경제학자와 정책 입안자의 기구인 ‘G30’의 보고서를 통해서 그 대략 윤곽을 살펴볼 수 있다. 이 보고서의 작성자가 오바마의 경제자문역이기 때문이다. 이 개혁안에는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분리와 같.)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II : 교환의 세계』서평I. 들어가며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자본주의’라는 말을 ‘생산수단의 대부분이 사적으로 소유되며 주로 시장의 작동에 의해 생산이 이루어지고 소득이 분배되는, 봉건제도의 붕괴 이래 서양에서의 지배적인 경제체제’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에서 눈여겨볼 것은 특히 ‘봉건제도의 붕괴’라는 말인데, 즉 자본주의를 근대에 등장한, 혹은 근대를 규정하는 체제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흔히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의 이중혁명을 근대의 태동으로 설명하며, 전자의 결과인 민주주의와 후자의 결과인 자본주의를 근대의 특징으로 이해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전근대, 즉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 이전의 사회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체제인가?이러한 질문은 단순히 예/아니오로 대답할 수 없는, 여러 복잡한 질문들을 포함한다. 우선 자본주의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의 문제부터, 자본주의의 요소들은 무엇인가, 여러 요소들 중 자본주의를 규정하는, 즉 어떤 체제가 자본주의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요소는 무엇인가하는 문제들이다.페르낭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는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산업혁명 이전의 세계를 경제사적 관점에서 서술한 저작이다. 그는 이 시대의 경제사를 가장 하위의 ‘물질문명’, 중간 층위의 ‘자본주의’, 최상위의 ‘세계=경제’의 차원으로 나누어 서술한다.II권인 『교환의 세계』는 그 중에서도 자본주의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특히 눈여겨 볼 부분은 「제3장 생산 : 자기 영역을 벗어난 자본주의」인데, 브로델은 여기에서부터 ‘자본주의’라는 말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며, 자본, 자본가, 자본주의라는 말의 연혁으로부터 시작하여 생산영역에서의 자본주의의 침투를 살펴본다. 생산의 영역을 서술하면서부터 ‘자본주의’라는 말이 비로소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은, 아마도 ‘자본주의’라는 말을 가장 논쟁적으로 사용한 역사가이자 경제학자인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핵심을 생산영역에서의 착취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브로델은 마르크스와는 다르게 생산보의 생산영역에서의 자본주의가 관심을 끄는 이유이다.II. 생산 : 자기 영역을 벗어난 자본주의1. 자본, 자본가, 자본주의자본주의(capitalisme)라는 용어는 논쟁적이며 정치적이다. 브로델도 3장의 서두에서 이 “전투적인 용어”가 많은 논쟁을 불러왔으며, 특히 전산업화 시기에 대하여 이 말을 쓰는 것이 수많은 비판에 직면할 것을 주지하고 있으나 이 용어를 쓰는 것이 불가피함을 이야기하고 있다.사실 자본(capital), 자본가(capitaliste), 자본주의라는 말은 역사적으로 변해온 것이다. 예를 들어 ‘자본’이라는 말은 이미 12세기에 등장하였으나 화폐가치라는 개념을 넘어서 생산수단이라는 뜻을 가진 것은 마르크스에 이르러서 가능해진 일이었다. ‘자본가’라는 말은 돈을 가진 사람, 세력가, 재산가 등과 비슷한 표현으로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가졌고, 18세기까지는 자본과 마찬가지로 돈이나 부 그 자체에 결부된 의미를 지녔다.‘자본주의’는 가장 최근에 나온 말로서, 1850년 루이 블랑에 의해 ‘어느 한 편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고 자본을 독점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프루동은 이 말을 오늘날과 거의 같은 뜻으로 썼지만, 이 말이 완전히 힘을 얻고 뛰쳐나온 것은 20세기 초의 정치논쟁의 와중에 사회주의의 반대어로써 등장한 것이었다. 이 말은 여전히 너무 많은 뜻과 정의가 섞인 난해한 말로 남아있다. 용어에 대한 논쟁이 격렬해지기 전에 역사가들은 고대의 여러 국가와 중세 유럽에 대하여 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썼으나 마르크스주의의 가혹한 비판-18세기말 이전에, 즉 산업 생산 양식 이전에는 자본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그러나 브로델이 굳이 전산업시대의 경제사에 대하여 자본주의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그것이 그 시대의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는, 당대의 비자본주의와 비교되는 상이한 세계를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말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가 아닌 어떠한 독립된 영역에 자리잡은 자본주의-이것이 브로델이 3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말에 대한 논의를 좀 더 발전시킨다. 산업시대의 자본은 곧 자본재이며, 그것은 “이전의 노동의 결과물”이며 “축적된 노동”으로, 생산을 통해 끊임없이 재창출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18세기의 선박은 자본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17세기부터 18세기말까지 귀족가문이 소유한, 계속해서 목탄을 공급하는 삼림은 자본인가? 말하자면, ‘자본재’라는 것은 전산업사회에도 분명 존재했다는 것이다.그렇다면 아담스미스와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의 구분을 살펴보자. 토지, 도로, 댐과 같은 것들은 전산업사회의 고정자본으로 설명할 수 있다. 다만 이것들이 산업혁명 이후의 그것과 다른 것은 침식의 속도와 자본생산율이다. 말하자면 산업혁명은 곧 고정자본의 변화이며, 이를 통해 고정자본은 아주 비싼 것이 되었지만 훨씬 지속적이고, 완성도가 높은 것이며, 그 결과 생산성을 급속도로 증가시킨 것이다.브로델의 설명에 따르자면 자본주의는 전산업사회의 특정영역에 존재하는 것으로, 그것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체제와 연속성을 가진다. 그렇다면 그것이 존재한 특정영역은 무엇이었는가? 브로델은 우선 자본주의가 간접적이고 제한적인 방식으로 손을 뻗친 농업, 산업, 수송의 영역을 살펴봄으로써 ‘자기 영역을 벗어난 자본주의’의 침투와 후퇴를 보여준다.2. 토지와 돈이 절에서는 농업 분야에서의 자본주의를 살펴본다. 16세기의 동유럽에는 “재판농노제” 현상이 일어난다. 15세기까지 자유롭던 농민들은 이 시기에 자유를 상실하고 토지에 긴박되었으며 부역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재판농노제는 자본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인가? 위톨드 쿨라는 그렇게 설명하지만, 브로델의 설명은 약간 다르다. 대지주 자신은 자본가가 아니었으나 그는 서유럽의 자본주의적 수요에 맞추어 생산을 조직하고 상인으로부터 대부를 받는 등 자본주의 체제의 일부가 되었다. 영주가 모든 생산수단과 교환수단을 독점하였으므로 재판농노제 체제 자체가 자본주의라고 할 수는 없으나, 이것이 봉사한 국제체제는 의심할 바 없이 탄탄한 자본주의 체제 그러나 본국에 유리한 교환체제에 사로잡혀 농장주의 이익은 크지 않았다.유럽의 중심부에서 일어난 현상들은 어떠한가? 영국의 몇몇 지역에서 나타난 ‘농업혁명’은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농업기술의 혁신, 인클로저의 발달로 인한 농지의 대규모화, 영주제의 약화, 임금노동자의 고용, 수직적인 분업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영국의 모델과 비슷한 예는 유럽대륙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7세기의 브리에서는 지주에게 토지를 임대하여 경영하는 차지농이 이미 서서히 자본을 누적해가는 기업가적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베네치아의 도시 귀족인 트론가는 안길라라 마을의 농지를 경영했는데, 이곳은 일종의 농업 공장으로 자본주의적인 경영방식이 이루어졌다. 로마 주변의 농촌에서는 대토지를 장악한 대차지농들이 좋은 땅을 스스로 경작하고 나머지는 하청 방식으로 임대해주었으며, 농업의 분업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자본주의적인 미래를 미리 제시해주는 선진지역은 소수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주변부 지역은 후진성에 갇혀 있었다.프랑스에서는 18세기에 농업자본주의가 시작되었다. 농업소득의 증가 이후 영주들의 반동이 일어났고 농민들의 불만과 불안은 극심했다. 영주들의 반동은 영주제적 반동이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자본주의적 반동이었다. 영주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노력과 동시에 대토지를 재구성하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강구된 것이다. 어쩌면 프랑스 혁명이 없었다면, 프랑스는 농업자본주의가 일반적으로 형성되는 영국식의 변화를 밟았을지도 모를 일이다.3. 자본주의와 전산업전산업은 18세기 이전에 아직 농업과의 분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주로 자급자족의 목적이나 가까운 시장에 내다 팔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수공업 방식의 전산업을 이끈 것은 결국 가난과 관련된 것이었는데, 농촌과 어촌에서의 반실업자들은 상인 영업주들의 노동력이 되었던 것이다.토지와의 관련성이 적을수록 수공업은 도시적인 것이 되고 그만큼 덜 고착적이었다. 장인들은 언제나 떠돌아 다녔고, 반대로 산업들은 멀리 떨어진 도8세기의 경제성장과 함께 산업활동이 일반화되었다.여기에서 자본주의는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자본주의는 무엇보다도 도시 상인의 자본주의이다. 그러나 상인, 대상인, 경영인들도 처음에는 길드적인 질서속에 편입되어 있었다. 하지만 경제생활과 시장이 발달하고 분업이 진척됨으로써 새로운 영역이 창출되거나 기존 영역이 분할되자 영역싸움이 일어났고, 길드의 수가 증가함과 동시에 도시권력의 쟁취를 위한 내전이 일어났다. 이 내전의 끝에 상인이 장인에게 승리를 거두게 되었고, 길드는 양극화되었다. 부유한 길드에서는 자본이 축적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선대제를 통해 장인은 상인에 종속되어 차츰 임금노동자로 전락했다.중유럽의 광산에서는 자본주의를 향한 발전이 일어났다. 광업의 역사는 12세기부터 찾아볼 수 있는 것이지만, 지표면에서 점차 깊은 곳으로 파들어갈수록 많은 돈을 필요로 했고 15세기 말에 상인들이 광산에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자본투자는 생산의 진보를 가져왔고, 노동력은 집중되었으며, 노동이 계층화되는 등의 특징이 나타났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 유럽의 광업은 쇠퇴했고, 상업자본주의는 이 사업에서 빠져나와버렸다.다음으로 브로델은 수공업과 선대제라는 기초조직보다 자본주의에 가까운 대규모 조직인 매뉴팩처와 공장을 살펴본다. 대다수의 매뉴팩처는 수공업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으나 일부 산업에는 대규모의 매뉴팩처가 존재하기도 했다. 도시의 매뉴팩처는 가내 수공업 생산의 최종지점으로 시작하였지만, 이 공정들이 점차 한곳에 집중하여 수공업 단계를 넘어섰고 많은 자본이 여기에 투입되었다. 이러한 매뉴팩처 형태의 산업은 극소수였지만, 이것이 기술 진보의 모델이며 도구였던 것은 사실이고, 이것이 전체 생산에서 적은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전산업이 발전하면서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악순환을 깨기 위해 중상주의적인 국가가 개입하였고, 정부의 협조를 통해 기업이 유지될 수 있었지만 많은 사업은 파산했고 매뉴팩처는 점차 기업가들로부터 귀족 지대수취인들의 수중으로
I. 서론조선은 유교입국의 기치를 들고 개국하였으며 왕과 관료들은 유교의 이상사회를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조선왕조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한 것은 단순한 선택의 차원이 아니라, 정치·경제·사회적 제 관계의 변화에 따른 역사의 산물이었다. 조선왕조 개국의 주역이었던 신흥 사대부는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고려말의 부패상을 개혁하고자 하였고, 이를 통해 백성의 지지를 얻었던 것이다. 이러한 유교적 이념은 정치와 법제도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유교윤리라는 국가통치 이념과 성문법제도에 의한 법치주의는 성리학의 주요한 내용이었지만, 양자는 ‘예치’와 ‘법치’간의 일정한 갈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이러한 갈등이 드러나는 사례가 예를 실현하기 위한 사적폭력의 경우일 것이다. 예컨대 효를 중시하는 유교적 윤리관에서 부모를 살해한 자에 대한 복수는 당연한 것이나, 법치주의 사회에서 사사로운 복수는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예를 위해 법을 어긴 경우, 법적으로 죄를 감경해주는 제도를 두고, 법이 허용하지 않는 경우에도 일정한 정상참작을 통해 형을 감해주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이처럼 조선시대는 법치주의를 표방하였음에도 예를 실현하기 위한 가구내의 사형(私刑)과 사적폭력에 대하여 관대한 모습을 보였다.이하에서는 조선시대 형사제도의 이념과 원칙에 관하여 간략히 살펴보고, 이에 따라 사적폭력에 대한 법적 관용과 법 적용상에서 관용이 베풀어진 사례들에 대해 알아보겠다.II. 조선시대 형사제도의 이념과 원칙1. 유교의 가족주의적 사회윤리관유교이념의 사회제도는 종법제이다. 종법제는 가족적 혈연의 친소원근에 따른 친분관계를 상호 행위의 양식으로 사회제도화한 것이다. 이러한 상호관계 설정은 사회전반적으로 파급확대되어 사회의 근본원리로 작동한다. 즉, 부자·형제·장유·군신의 점진적인 발전 관계에는 효자·우애·신의·충의의 원리가 확대 적용되는 것이다.이에 따라 국가와 백성의 관계도 부모 자식 간의 관계 또는 형제 관계로 치환되어 고려된다. 동양 사회에 유달리 발달된 신분법적 는 반드시 율령의 조문을 구체적으로 인용하여야 하고, 만약 율문을 비조하여 조문이 수개조이면, 소범에 적절한 조문만을 인용하는 것을 허용한다. 또한 왕의 특지로써 죄인을 처단하였을 때, 그 특지가 임시로 조치한 것이고 일정한 형률로 정한 것이 아니면, 그 특지에 의한 처단례를 인비하여 유추처단하지 못한다.’)고 하여 재판을 원칙적으로 법조정문의 적용에 의하여 행하도록 하였다. 이는 오늘날 형사법의 일반원칙 중 하나인 죄형법정주의를 규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그러나 대명률직해에는 또한 인률비부를 허용하였는데, ‘율령에 기재된 것이 사리를 다 규제할 수 없으므로, 만약 죄를 결정하는데 율조가 없는 것은, 율문내에 가장 가까운 것에 의거하여 가할 것은 가하고 감할 것은 감하여 죄명을 결정하고 형조에 보고하면, 형조에서 왕에게 주문하여 처벌하게 한다.’) 즉 왕의 윤허를 받으면 법의 유추해석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이러한 인률비부의 도입 원인으로는 조선 초기 법률의 정비가 부족했던 시점에서 유추해석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과 조선시대의 법전은 구체적인 범죄행위와 그에 따르는 형벌을 정하는 완전한 정형주의를 택하여 관리들의 자의적인 법해석을 막고자 하였기 때문에 모든 범죄행위를 법전에 수록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필연적으로 공백이 존재하였다는 주장)이 있다.그러나 실제로 인률비부는 법조문이 미비한 경우 외에도, 조선시대의 유교적 윤리관에 참작사유가 있을 때 형을 감하여 주는 방식으로 광범위하게 적용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가부장제를 근간으로 하는 가족간의 윤리와, 여성의 정절을 중시하던 성윤리에 관한 사적폭력에 대한 관용이다.III. 부자간의 윤리에 관한 사적폭력1. 부조피구(父祖被毆)1) 법 규정조부모나 부모가 남에게 구타를 당하는 것을 자손이 즉시 구호하고 도리어 가해자를 구타한 경우에 그 구타로 인한 상해가 절상(折傷)) 이상의 상해가 아니면 불문에 부치고, 절상의 이상의 중상해에 이른 경우에는 일반 구타죄로 처단하되 3등을 감경하며, 치사하게 한 자는아닌 유형에 처하고 있는데,) 이는 부에 대한 효심의 발로로 보아 감형된 경우이다.또한 대명률에서는 구타에 대한 보복은 구타만이 허용되고, 절상 이상의 상해에는 3등을 감경하지만 살해의 경우에는 형의 감경이 규정되어 있지 않아, 원칙적으로는 교(목매달아 죽임), 또는 참(머리를 베어 죽임)의 형벌을 내려야 하지만, 조선후기에는 형량이 가벼워졌다. 즉, 숙종 37년에 부모를 구타한 자를 살해한 자손에게 사형이 아닌 유형을 명하는 수교를 내린바 있고) 속대전에는 부모를 구타하여 중상을 입힌자를 구타하여 살해한 자손은 사형이 아닌 유형에 처한다는 규정이 삽입되어 정식 법이 되었다. 이는 감형의 참작사유가 그대로 공식 법이 된 경우로, 조선의 법전에는 이러한 판례법적 성격을 지니는 입법례가 적지 않았다.대명률의 규정에 따르면 복수의 권리는 자와 손에게만 있으나, 남편을 죽인 자에게 아내가 복수하는 경우나 자를 살해한 자에게 모가 복수한 경우 장 60에 처한 사례가 있는데,) 이는 모두 부조피구를 유추적용한 사례이다. 이를 계기로 속대전 살옥조에는 남편의 복수와 자녀의 복수를 장60에 처한다는 규정이 명문화되었다. 또한 시집간 딸이 친정아버지의 복수를 한 경우에도 부조피구의 예가 적용되었는데, 이는 다음의 사례를 통해 알아보도록 한다.3) 부조피구가 유추적용된 사례황해도 수안군의 상여계 계원인 이노미와 정완석이 다투다가 정완석이 사망하자, 정완석의 시집간 딸이 친정으로 돌아와 이노미를 몽둥이로 때려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수안군수는 이 사건에 대하여 대전통편(大典通編)의 살옥(殺獄) 조항을 따라 정씨 부인을 유형에 처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황해도 관찰사는 정씨 부인의 복수가 천리에 따른 것이므로 그 죄를 묻지 않도록 하였다. 여자의 몸으로 원수를 때려죽인 것은 효녀나 장부만이 할 수 있는 일로, 오히려 상을 받을만한 일로 생각했던 것이다.황해도 봉산에서 의붓아들인 박봉손이 의붓아버지를 폭행하다가 그 의붓아버지의 친아들인 배종남에게 구타당하여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이에지적했다. 정조는 이에 대해 ‘살았을 때 얻어맞든 죽은 뒤에 욕을 먹든 분통하게 여겨 보복하겠다는 아들의 마음이야 어찌 다르겠는가’라고 하여 정대원에게 사형이 아닌 유형을 내렸다.) 죽은 부모를 모욕하는 상대에 대한 복수사건에 부조피구의 규정을 유추적용한 것이다.2. 부자 상호간의 폭력1) 법 규정자손이 조부모, 부모를 구타매리(毆打罵?))한 것과 조부모, 부모의 명령을 위범한 자를 그 조부모, 부모가 법대로 처벌하다가 우연히 치사케 한 것과 과실치사한 때에는 각각 그 죄를 묻지 않았다.) 반면 자손이 그의 조부모나 부모를 구타하면 참형에 처했고, 살해하면 능지처사(陵遲處死))의 형에 처하였다. 더불어 조부모나 부모를 과실로 치사케 하면 장 100에 처한 후 유 3000리의 형에 처하였고, 과실로 치상케 하면 장 100에 처한 후 도 3년의 형에 처하였다.) 유교의 효 관념에 비추어 패륜행위를 무겁게 벌했음을 알 수 있다.2) 존속살인의 사례부모를 살해하는 것은 십악에 해당하는 큰 죄악으로서 이미 법정형이 능지처사였으므로 형벌에 있어서 가중처벌은 불가능했지만, 본래 사형죄인을 세 번 심리하는 사수삼복(死囚三覆)제도를 배제함으로써 가중처벌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중종 35년에 교동의 정로위 호세장이 아버지를 때려죽였는데, 영사 홍언필이 이러한 대악인에게 삼복은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고, 중종도 이에 동의하여 초복에서 결단하는 사례가 있었다. 또한 원주의 사노비 유석이 맹인 아버지를 몽둥이로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에서도 초복에서 형 집행을 명령하였다. 또한 죄인을 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처자를 노비로 삼고 읍호를 강등시키는 등 강력한 처벌을 내렸다.IV. 부부간의 윤리에 관한 사적폭력1. 살사간부(殺死奸夫)1) 법 규정처나 첩이 외인과 간통하는 것을 그 현장에서 간부(奸夫)·부(婦)를 본부(本夫)가 몸소 포착하여 현장에서 살해한 때에는 불문에 부친다.) 본부와 그 외의 자가 협력하여 간부를 타살한 경우에는 본부의 죄는 논하지 아니하고 그 외의 자는 정상첩이 남편의 조부모, 부모를 구타매리한 자와 부의 조부모, 부모의 명령을 위범한 자를 그 부의 조부모, 부모가 법대로 처벌하다가 우연히 치사케 한 것과 과실치사한 때에는 각각 그 죄를 묻지 않았다.) 처첩과 부의 부모·조부모 간의 관계를 자손과 부모의 관계와 동일하게 규정한 것이다.남편이 아내를 구타한 경우는 그 죄를 묻지 않았으며, 다만 이로 인해 아내가 절상 이상의 중상해를 입은 경우 일반인을 구타한 경우에서 2등을 감하여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반면 아내가 남편을 구타하는 경우 장 100의 형에 처하고, 남편이 이혼하기를 원하면 청허하도록 하였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구타하여 절상 이상의 상해를 가한 경우 일반인을 구타한 경우보다 3등을 가중하도록 하였다.)3. 사형(私刑)이 아닌 경우의 살처(殺妻)에 대한 감형과실치사로 부인을 죽인 고성 마태명 사건의 판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살인자를 반살하는 것은 천하만세에 통하는 법인데 그 본질은 첫째, 인명을 중히 여기고, 둘째, 사자의 억울하게 죽은 원한을 풀어주는데에 있다. 그런데 살의가 없이 과실치사한 살처사건에 대하여 대개 참작하는 것은 사자인 처가 그 부의 죽음을 바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형법의 목적 중 하나가 국가가 가해자를 응징하여 피해자의 원통함을 풀어주는 것인데 처가 하늘처럼 섬기는 부의 죽음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유교적 윤리관에 따라 대명률에 규정된 사형(私刑)이 아닌 사유로 아내를 죽인 남편의 경우에도 모두 일반 살인죄에 비하여 감형이 되었다.V. 정절의 모함에 관한 사적폭력김은애는 강진현 탑동리의 양갓집 딸이었다. 창기였던 안소사는 김은애의 어머니로부터 곡식을 자주 빌렸는데 가끔 꾸어 주지 않자 앙갚음을 하기 위해 계략을 꾸몄다. 남편 누이의 손자인 최정련에게 김은애와 결혼하면 어떻겠냐고 묻고 그가 좋다고 하자 김은애와 이미 사사로이 간통했다고 소문을 낸 것이다. 그러나 김양준이 이런 소문에도 불구하고 김은애와 결혼했는데, 결혼 후에도 안소사가 그러한 헛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