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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커뮤니케이션/신문방송학] 훌륭한 커뮤니케이터로서의 힐러리 로댐 클린턴 평가A+최고예요
    훌륭한 커뮤니케이터로서의힐러리 로댐 클린턴- 힐러리 로댐 클린턴 을 읽고...*과목명 : 커뮤니케이션의 이해*담당교수명 : 이준웅 선생님1.들어가며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사회는 갈수록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그런만큼 소통 의 중요성은 나날이 부각되고 있다. 예전에 언론정보학과 설명회 시간에 박명진 선생님이 언급하신 것처럼, 우리사회의 다양한 소통에 대해 연구하는 커뮤니케이션 학이 머지 않아 학문의 중심이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 이다. 우리들의 삶 속에서 소통이라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하지만 오히려 사람들의 생활은 예전에 비해 소통의 수단과 장소를 잃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세계에 고립되어 나중에는 어떻게 다른사람과 관계를 맺어가고 사회와 소통해야 하는가를 아예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실에 직면하면서 사람들은 자연스레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라는 존재를 원하게 되었다. 자신들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대상에게서 뭔가를 배워보려는 욕구가 표출된 것이다. 커뮤니케이션학을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은 사람들의 그런 욕구에 부응하고자 다양한 대상을 전문가로 지정하고 연구했다. 나 역시도 이 글에서 예비 커뮤니케이션 학도로서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에 대한 나의 짧은 생각을 구체적 인물을 통해 나타내보고자 한다.2.커뮤니케이션 전문가란?(1)커뮤니케이션이란 무엇인가.우선, 어원을 통해 살펴보자. 어원은 라틴어의 나누다 를 의미하는 communicare 이다. 신이 자신의 덕을 인간에게 나누어준다거나 열이 어떤 물체로부터 다른 물체로 전해지는 따위와 같이, 넓은 의미에서는 분여(分與) 전도(傳導) 전위(轉位) 등을 뜻하는 말이다. 영어단어로는 communication 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공통된 공유된 이란 뜻을 가진 common 이라는 말과 '~이 되다'라는 의미를 지닌 ication 이 합쳐진 것으로, 이 말을 그대로 직역하면 공통화시킨다 또는 공유되는 것을 늘린다 로 풀이할 수 있다. 최근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치에 관심을 가졌고, 공화당 청년회에 들어가 적극적으로 활동했으며, 나중에는 골드워터 공화당 대통령 후보의 선거운동원이 되어 카우걸 옷을 다니기까지 했다. 하지만 고교 시절 대통령 후보들의 모의토론회를 벌이면서 공화당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1969년에 명문웰즐리여대를 졸업하였고, 이때 그전에는 없었던 학부생의 졸업식 연설을 처음으로 하면서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예일대 법대를 1973년 졸업하였고, 1971년 예일대 법대 재학 때 아칸소 주 출신의 빌 클린턴을 만나 그의 유머 감각과 낙천성에 반해 1975년 결혼을 한 후 30년 동안 인생의 동반자이며 정치 파트너로 지내고 있다.1991년 미국의 가장 힘있는 변호사 100명에 선정되었고, 1992년과 1996년 대선에서 실질적으로 선거운동을 지휘하여 남편 클린턴을 당선시키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이 당시 하나를 사면 하나는 공짜(Buy one, get one free)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힐러리는 단순한 대통령 후보의 부인이 아닌 하나의 독립된 퍼스트 레이디로서 부각되었다. 백악관에 입성한 후, 힐러리 로댐 클린턴은 의료개혁과 같은 정책에 깊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녀는 법률 입안에 주역을 맡은 유일한 퍼스트 레이디다. 버스투어 등을 통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의료개혁을 주창하고 경제와 교육의 기회를 확대하고 아동과 가족의 권익을 촉진했을 뿐만 아니라, 지구를 종횡으로 가로지르며 여성의 권리와 인권, 민주주의를 위해 애썼다. 힐러리는 퍼스트 레이디의 지위를 재규정했고,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한 위헌적 탄핵에서 대통령직을 구하는 데 기여했다. 백악관을 나온 후 2000년 뉴욕에서 연방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힐러리 로댐 클린턴은 미국에서 격렬한 사회적 정치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던 시기에 성년이 되었다. 그 세대의 여성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힐러리도 어머니나 할머니 세대는 알지도 못했던 선택과 기회를 누리며 자랐다. 힐러리는 변화하는 시대와 자신의 내적 나침반에 따라 전인미답의 영역을 지나는 독자적인 길을 개척의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힐러리. 그녀가 이제까지 걸어온 길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해야만 한다는 점일 것이다. 변호사일때는 의뢰인을 변론하기 위해서였다면, 퍼스트레이디나 상원의원으로서는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고, 정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말들을 해야 했다. 이런 역할들을 수행할 때, 그녀는 닥치면 하는 식으로가 아니라, 끊임없이 준비하여 좀더 효율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의 지금 모습은 그런 노력 속에서 얻어진 결과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화이트워터 사건{ 클린턴 부부는 아칸소 주지사 시절이던 1978년 오랜친구이자 정치적 후원자인 짐 맥두걸과 함께 아칸소주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 택지를 구입하고 나아가 79년 화이트워터 라는 부동산 개발회사를 맥두걸과 공동으로 차렸다. 그러나 클린턴은 투자금 2만 5천달러를 손해보고 손을 뗐다. 맥두걸은 이와 별도로 매디슨 신용금고를 가지고 있었으며 클린턴과는 계속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1985년 클린턴이 선거운동 당시 5만달러의 빚을 지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맥두걸은 클린턴을 위해 정치자금을 모금했다. 이후로 맥두걸은 미 연방으로부터 많은 금액을 대출받았는데 이것이 주지사로 있던 클린턴의 직권 남용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여론에 휘말렸다. 클린턴의 정치자금도 맥두걸이 모금한 것이 아니라 맥두걸이 직접 지원했을 것이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에 더해 89년 맥두걸의 매디슨 신용금고사가 파산 절차를 밟게 된다. 이때 클린턴은 맥두걸에게 특혜를 주었다는 것. 이것이 소위 화이트워터 사건의 대강이다.1992년 대선 당시 뉴욕타임스가 이 문제에 대해 보도했으나 이때는 파장이 크지 않았다. 그러다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고 5개월 후인 93년 6월 화이트워터 관련서류를 보관하던 힐러리의 동료 변호사 빈센트 포스터가 의문의 자살을 하고, 클린턴 부인 힐러리가 서류를 파기했다는 주장이 일면서 끝내는 클린턴 부부를 청문회에까지 끌고 나오는 큰 사안으로 번졌다. 이 데이비드 켄들에게 그 일을 맡겼다..다양하고 치밀한 준비만이 정쟁 속에서 그들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2000년 뉴욕 상원의원 선거에 대비할 때 역시 그녀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남편 빌 클린턴의 아내로 상원의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힐러리 로댐 클린턴이라는 독립된 개인으로 상원의원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녀는 자정 이전에 잠자리에 든 적이 거의 없었고, 오전 7시 경에는 항상 길거리에 나가 선거운동을 했을 정도로 최선을 다했다. 이런 그녀의 노력하는 자세는 그녀가 정치인으로서, 그리고 내가 바라보기에는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로서 기반을 굳히는데 기본이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2)진리의 자기증명1995년 봄에 빌 클린턴은 전략을 짜고 개발하기 위해 친구나 동지들과 끝없이 의논하고 의견을 모아서 좋은 것을 가려내었다. 힐러리는 이에 도움을 주고자 새로운 전략을 의논한 상대로 딕 모리스{ 힐러리는 딕 모리스를 독창적인 여론조사 전문가이자 뛰어난 선거 전략가로 평가했지만, 양다리를 걸치는데 대해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를 오라가락하는 부동층 유권자를 확인하는 것이 그의 전문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녀는 모리스를 조용히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그가 유익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정치와 인간에 대해 회의적인 모리스가 매사에 낙천적인 빌 클린턴의 평형추 구실을 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를 추천했다. 모리스가 공화당 의원들에게 조언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리스는 공화당 의원들의 생각을 꿰뚫고 있으니까 클린턴이 앞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또한 클린턴이 어떤 생각을 야당에 흘리고 싶을 때는 모리스를 야당과의 비공식 채널로 활용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딕 모리스의 등장은 중간 선거에 패배한 뒤, 클린턴의 참모들에게 공동의 적으로 인식되어 그들의 위기감을 고조시켰고, 태도와 야망에 좋은 자극제가 되었다. 또한 그들은 모리스의 존재로 인해 그동안의 자기 대중으로부터 괴리되기 쉬운 존재이다. 우리 나라 역시 정치인이라 하면 금뱃지 단 우리나라의 특권층으로로 왠지 거림감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미국에서도 자칫하면 유권자들은 정치인들을 자신들과 먼 곳에 있는 사람으로 느끼기 쉬울 것이다. 힐러리의 경우는 단순한 의원이 아니라 한때는 미국을 대표하는 퍼스트레이디로 활동했던 사람이니 그런 느낌이 더 강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들을 슬기롭게 처리했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녀를 다른 의원들보다 더 친근하게 여기는 경우도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서 일들을 처리하기보다는 대중들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다. 언론이나 주위 보좌관들을 거쳐 알기 보다는 직접 그들의 목소리를 듣기를 희망했다. 그런 그녀의 의지가 잘 드러난 것은 버스투어 였다. 클린턴 행정부는 만성적인 재정적자를 만회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중에 하나가 의료개혁이었다. 의료보험에 들지 않는 미국인의 수가 늘어나면서 급증하는 의료비는 국가 경제를 무너뜨리고, 미국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노동자의 임금을 갉아먹고, 개인 파산을 증가시키고, 국가의 예산적자를 팽창시키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이 악순화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라도 의료 분야의 개혁은 필수였다. 클린턴은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의료 개혁 특별위원회 라는 것을 설치했으며, 힐러리에게 그것의 위원장을 맡겼다. 힐러리 역시 필요성을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기에, 개혁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이것은 여러 이익단체들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킨 분야였다. 보험단체와 은퇴자 협회 같은 이익 단체들이 서로가 누리는 혜택들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많은 압력을 가했다. 특히 보험협회들은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하지만, 이 개혁은 클린턴 행정부가 공약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라도 꼭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버스투어 라는 것을 계획했다. 미국 전역을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많은 국민들의 이야기에 귀를기울이고, 그들에게 의료 개혁이 필요한 이유를 알리기 위해서였다. 국회의원들조차 의료개혁다.
    사회과학| 2004.06.22| 10페이지| 1,500원| 조회(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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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주의] 결혼과 가족-여성에게 어떤 의미인가? 평가B괜찮아요
    이미 ‘가정’이라는 것이 남성중심적인 사회의 이념을 반영하고 있다면, 그 안에서의 여성은 그 존재 자체를 정당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가에 의문이 생겼다. 이런 의문을 갖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점을 ‘뮤리엘의 웨딩’은 잘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뮤리엘의 어머니 베티는 가족이 전부인 전업주부이다. 시의원인 아버지를 내조하고 자식들 뒷바라지 하는 것이 전부인 단조로운 삶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존재에 가치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영화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무시당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남편에게는 그의 애인인 디드리보다 더 늙었고 더 못생기고 더 뚱뚱하기 때문에, 자식들에게는 남편에게 억눌려 별 힘없는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인문/어학| 2004.06.22| 4페이지| 1,000원| 조회(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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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정치학] 한-일FTA 평가C아쉬워요
    1.들어가며탈냉전 이후 국제관계는 안보 문제를 비롯한 상위의 정치적 이슈(high politics)인 부분에 대한 관심 뿐만 아니라 환경, 경제, 문화 등의 하위 정치적 이슈(low politics)가 지구적 차원의 의제로 급부상하고 있다. 냉전기 동안 안보의 그늘에 가려 광범위하게 심도있는 논의가 진행되지 못했던 부분들이다. 그중에서도 경제는 특히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세계경제는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초국적 영역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런 상태 속에서 국내자율성을 보호하면서 세계시장 점유율을 높이고 상호의존 비용을 최소화하려는 동기가 경제블록으로 현실화되고 있다. 1992년 EU의 발족과 1994년에 발효된 NAFTA는 그런 경제블록의 대표적인 예{ 이것 역시 자유무역협정의 일종이며, 유럽연합(EU)이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등과 같이 인접국가나 일정한 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진 것은 흔히 지역무역협정(RTA : regional trade agreement)라고 부르기도 한다.이며, 여기에서 배제된 국가들에겐 경제블록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해 주었다. 아시아를 제외한 세계 경제가 두개의 큰 블록으로 통합되는 상황은 배제된 국가들에게 정치적 경제적으로 대응수단이 필요함을 느끼게 했던 것이다.이런 세계경제 환경의 변화는 우리나라에도 즉각 영향을 미쳤다. 역내국의 관세가 철폐되면서 고관세를 납부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나라 상품의 가격경쟁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 대한 대응책으로, 우리나라는 회담이나 협정 등 외교적인 노력을 통해 수출의 활로를 찾고자 모색했다. 그리고 이런 노력의 구체적 결과물이 각국과의 FTA이다. 현재 칠레와의 FTA비준안이 국회에서 통과되기만을 기다리고 있고, 일본, 미국 등과의 FTA도 진행중에 있다.(1)FTA란 무엇인가?국가간 상품의 자유로운 이동을 위해 모든 무역 장벽을 제거시키는 협정으로, 영어로는 Free Trade Agreement(FTA)이다.{ 자유무역협정(Free Trade Agreement)을 체결하여 설적 인식 등으로 인해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세계적인 추세는 거스를 수 없는 것이다. 동북아에서도 경제적 공동체를 향한 다양한 노력들이 행해지고 있다. 나는 그 근거를 바로 한-일FTA에서 찾을 수 있었다. 아직 각국 국회에서 발효된 것은 아니지만{ FTA는 양측 협정 당사국의 국회에서 각각 비준을 받아야만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1998년 이후 끊임없는 논의가 이뤄지고 있으며 관계와 재계 모두에서 그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는 상태이다.두 번째는 왜 한-일FTA가 필요한가에 대한 이유를 나 자신이 이해하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과거사에 대한 이유 때문에서인지 난 유독 일본에 대해선 민감하다. 어찌보면 좋지 않은 자세일 수 있지만, 이미 굳어져버린 탓인지 고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일본과의 FTA에 대해 들었을 때, 우리나라가 손해보는 것은 아닌지 신경이 쓰였다. 그랬기에 한-일 FTA에 관해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는 것 같아서 이 주제를 선택하게 되었다.2.한-일FTA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입장(1)한국의 입장1998년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FTA를 추진하기로 했다. 일본과의 자유무역협정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주장되기도 했으나 부정적인 여론이 많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실제로 기업의 입장에서도 한-일FTA에 대한 시각은, 전경련 등 단체차원에서는 찬성하는 듯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반대가 많은 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일FTA를 일본의 강력한 요구에 대한 대응으로서 수동적인 입장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편이다. 그렇기에 장기적인 안목을 중시하는 정부 측이 이를 주도하면서 국민을 설득하고 있는 형편이다.{ 외교통상부의 한-일FTA 추진 기본 방향가.포괄적인 FTA를 추진 나.깊이 있는 자유화를 추진다.WTO규범에 부합하고 대외적으로 개방된 FTA 추진 라.양국 경제에 모두 도움이 되는 FTA를 추진(2)일본의 입장일본은 2002년 10월, 외무성 발표에서 일본의 FTA전략에서 한국을 아세안과 함께 FTA혹은 경제동반자협정(EPA) 체결의 최우선 순위로 조로 미국의 통상압력에 공동 피해자라는 의식이 강하다. 미국이 과거와 달리 자국 이익 중심의 사고와 정책결정을 하면서 통상마찰의 심화 등으로 한국과 일본에 동일하게 압력을 가하고 있다. 한 일 양국은 철강, 자동차, 전자 등에서 미국의 통상압력이나 보호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3.한-일 FTA 과정추적(process-tracing).1998. 10 :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본 순방.한일 공동선언-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한일 파트너쉽- 경제분야에서의 협력관계 강화 : 양국간 경제분야에서의 협력관계 강화, 한 일 투자교류,한 일 이중과세방지협약, 무역확대 및 산업기술분야에서의 협력, 산업교류 추진 등1998년 연말까지, 수차례의 각료급 회의와 내각차원의 회담 및 한-일 관민합동투자촉진위원회가 개회되어 보다 긴밀한 한-일 경제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방안이 모색되었다..1998. 11 : 한-일 정상회담의 성과가 실행에 옮겨짐.- 양국 통상장관 회담시 양국간 FTA 추진에 관해 민간 차원의 공동연구를 시행키로 합의: 21세기 한일경제관계연구회 를 구성하여 한국은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일본은 아시아경제연구소(IDE,JETRO)를 중심으로 공동연구를 추진함.- 일본 가고시마에서 열린 한일 각료간담회 : 양국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한일투자협정(BIT) 실무협의 조속히 추진하기로 결정함..1999. 3 : 오부치 겐조 당시 일본 수상은 기존의 경제협력의 범위를 넘어서, 지난 정상회담에서 채택되었던「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쉽 행동 계획」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한-일 경제협력 의제21」을 채택하였음 - 한 일간에는 쌍무적 투자협정(BIT), 표준 인증에 있어서의 상호인정협정(MRA)와 함께 한 일 경제협력 의제 21(Agenda 21)이 추진되고 있어 양국간 무역 투자 등의 분야에서 경제협력을 강화해 나가고 있다..1999. 11 : 「한-일 경제협력 의제21」에 의해 조세조약이 발효되었음..1998. 12 ~2000. 4 : 한국측의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일 FTA 비즈니스 포럼 설치에 합의.- 공동연구의 다음 단계로 FTA의 직접 이해당사자인 양국 경제인들의 의견 수렴에 그 목적을 두고 있음..2000. 10. 26~27 :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와 일본 경제단체연합회(경단련)의 제 17차 한일재계회의- 정보통신분야 인력 및 기술교환과 무역불균형 해소, 한일 자유무역협정 추진 등에 대해 논의함.- 전경련은 한-일 자유무역협정 추진에 앞서 양국간 무역수지 불균형 해소를 위해 만성적 대일적자를 나타내고 있는 부품소재산업에 대한 일본쪽의 대한투자 확대 요청- 경단련은 양국 경제계가 공동으로 자유무역협정 추진과 관련된 문제점을 검토하기 위해 민간차원에서 전문가 기구를 만들 것을 제안함..2000. 11. 6 : 한일 외무회담 - 한-일 자유무역협정(FTA) 추진 문제를 논의할 비지니스 포럼 을 빠른 시일내에 설치하기 위해 긴밀히 협의하고 양국간 투자협정의 조속한 체결을 위해 실무 당국간 협의를 가속화 하기로 했음..2001. 9. 7~8 : 제 1차 양국 비즈니스 포럼{ 2000년 9월에 한일 정상회담에서 자유무역지대 창설에 따른 기대효과와 문제점 등을 민간차원에서 검토키 위해 설립에 합의한 후, 2001년 초 재계대표로 구성된 포럼이 양국에 설립돼 5차례의 간담회를 가졌다.합동회의 개최(서울)- 그간 진행한 포럼 내용을 바탕으로 한일FTA의 기대효과와 문제점, 업종별 대응전략 등에 대해 의견 교환이 있었다.. 2001. 11. 26 : 제 18차 한일 재계회의- 전경련과 경단련은 이번 회의를 통해 한일FTA에 관한 양국 경제계의 입장과 의견을 교환함.- 전경련은 한국, 일본, 중국, 대만 등이 참여하는 동북아 경제협력체의 시발점이 될 한일FTA체결의 필요성을 밝힘.- 경단련은 한국과의 FTA 체결을 적극 추진하여 한일 경제협력체를 구성한다는 방침에 따라 업종별 협력 내용과 원산지 규정 등 FTA협정문 내용을 거론함..2001. 12. 22 : 한-일 투자협정 타결{ 1998년 11월 양국 통상장관회담에서 투자협정FTA비지니스 포럼 공동선언 요지 : FTA조기 체결을 양국 정부에 건의 / 관세인하 등 포괄적 경제제휴 협정 추진 / 개별산업간 이해조정은 국민 경제 관점에서 판단 / 장기적으로 중국 및 ASEAN 과 경제통합발표.2002. 3. 22 : 양국 정상회담- 투자보장협정(BIT)에 서명- 경제계, 학계, 정부기관이 참여하는 FTA산관학 공동연구회 설립하기로 합의 : 민간차원에서만 논의되던 수준을 벗어나 정부당국자가 참여하는 가운데, 양국간 공식적 논의의 신호탄을 올렸다는 데 의미 있음.- 보다 폭넓고 긴밀한 양국간 경제파트너십 형성..2002. 7. 9~10 : 한-일 FTA산관학 공동연구회 제 1차회의 개최(서울).2002. 10. 1~2 : 한-일 FTA산관학 공동연구회 제 2차회의 개최(동경).2002. 11. 26~27 : 제 19회 한일 재계회의- 양국간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위한 협력 방안 등에 대해 논의함.- 일본측은 한일 FTA 체결을 위해 민간기업들이 적극 노력하자고 제안하면서 한국의 강경한 노조문화에 대해 우려했음.- 한국측은 한일 FTA 체결을 위해서는 일본이 비(非)관세 장벽, 특히 배타적 상관행과 유통구조 해결에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제기했다..2002. 12. 4~5 : 한-일 FTA산관학 공동연구회 제 3차회의 개최(부산)- 양국간 FTA체결이 제조업에 미칠 영향과 민감한 분야의 양허방향, 기술적 무역장벽(TBT), 검역 위생조치(SPS) 등 비관세장벽의 구체적 사례를 검토하고 인적 교류 확대를 위한 비자절차 개선 및 비자면제협정 체결방안 등을 중점적으로 논의..2003. 2. 6~7 : 한-일 FTA산관학 공동연구회 제 4차회의 개최(동경)- 물품무역(관세, 비관세조치), 서비스 무역, 자유화 원활화(정부조달, 투자), 협력(과학기술, 환경)에 관해 논의..2003. 4. 14~15 : 한-일 FTA산관학 공동연구회 제 5차회의 개최(서울)- 논의사항가. 무역구제조치: FTA에서의 반덤핑, 세이프가드 규정 형태나. 비관세조치도입
    사회과학| 2004.06.11| 7페이지| 1,000원| 조회(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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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정치학]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 사이트 & 위안부 문제
    1.나의 best web-site에 대한 개괄적 소개www.k-comfortwomen.com - 나의 best web-site 이다. 이 사이트는 한국정신대문제협의회(The Korean Council For The Women Drafted For 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 이상 정대협)의 홈페이지이다. 정대협은 1990년 11월 16일, 일본군 종군위안부(정신대)애 대한 진실규명과 어렵게 사는 일본군 종군위안부 생존자들을 지원하려는 37개 여성 시민 종교 학생단체들이 모여 만든 연합단체이다. 주요활동은 일본군 종군위안부의 진상을 규명할 것, 전쟁범죄를 인정할 것, 공식 사죄할 것, 전범자를 처벌할 것, 추모비와 사료관을 건립할 것, 피해자들에게 배상할 것, 역사교과서에 기록할 것 의 7대 요구 사항을 관철하기 위해 로비, 압력활동, 증언집회, 시위 등을 전개하는 것이다. 특히 매주 수요일 12시에 정기적으로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인다-이것이 바로 수요시위이다.-아울러 한국정부에 대해서도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하고, 유엔 등 국제기관 및 단체들과 다른 아시아 피해국과 연대활동을 벌이고 있다. 또한 생존자복지위원회를 두어 아직 생존해 있는 피해자의 생활보호를 위해 힘쓰고 있다.또한, 이 사이트에서는 종군위안부에 대한 문제 제기와 해결책 모색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쟁과 여성인권에 대해서도 자료를 제시하여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는 여성들에 대한 관심도 유도하고 있다.이 사이트의 맵은 크게 아래와 같다.메인 : 관련단체 링크/ 토론실/ 방명록/ 정대협 소식/ 피해자 동정/ 전자도서관 소식/전쟁과 여성인권센터 소식/ 수요시위 소식정대협 : 정대협 소개/ 사업소개/ 국제활동/ 조직도/ 연혁/ 후원방법/ 약도수요시위 : 수요시위 소개 및 연혁/ 동영상 보기/ 사진 보기전쟁과 여성인권센터 : 전쟁과 여성인권센터 소개/ 교육프로그램2.나의 best web-site 선택 이유첫 번째로, 내가 평상시 있었다. 그전까지는 종군위안부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던 상태였던 것 같다.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알아갈수록 문제 해결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다는 의욕도 생겼다. (그래서 한때 내꿈은 여성의 인권신장을 위해 애쓰는 시민운동가가 되는 것이었다.) 이런 나의 마음이 web-site 선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두 번째 이유는 최근 이라크 전쟁에 대한 뉴스들을 접하면서 하게 된 생각 때문이다. TV와 신문 등 매체를 통해 여러 전쟁 관련 기사들을 읽으면서, 그곳에서 살고 있는 나와 같은 여성들의 고통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전쟁이 벌어지면 가장 많이 희생당하는 존재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전쟁터에 나가있는 군인들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우리의 생각보다 전쟁터에 있는 군인들은 안전하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지킬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들을 지킬 힘이 군인들에 비해 부족한 어린아이들과 여성들, 그리고 노인들이다. 특히 여성의 경우 단순한 폭력 뿐 아니라 성적인 폭력의 위험에도 노출되어 있기에 더욱 위험하다고 생각한다.나는 우리 나라에도 이런 일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고, 종군위안부 라는 존재에 생각이 미쳤다.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일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서 과연 다른 나라 여성의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으로 인해 신음하고 있을 여성들을 위해서는 종군위안부 문제가 올바른 방향으로 해결되어 좋은 선례를 남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종군위안부 문제의 해결은 일부 관련된 단체들의 노력만으로는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여러 단체들과 관련 부처, 그리고 우리 국민들의 의식 변화가 있을 때만이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의식변화를 위해서는 우선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고, 그런 점에서 이 사이트는 다양한 정보 제공과 더불어 수요 시위와 같은 직접적인 참여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이해를 도울 수 있다고 판단된다.세 번째 이유는, 를 소개하는 부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사이트에서 다양한 정보들을 습득할 수 있다. 여기서는 그 내용들 중에서 유독 내 주의를 끌었던 부분에 대해 자세히 다루겠다. 아무래도 세계정치에 대한 공부를 하고난 후이기 때문인지, 다른 부분보다 정대협의 국제적 활동에 관심이 갔다. 종군위안부 문제는 국제적인 이슈이고, 우리나라 뿐 아니라 아시아 여러 나라의 여성들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당시 일본은 우리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자국의 여성들과 중국,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의 여성들을 종군위안부로 전쟁터에 끌고 나갔다), 국제 기구 내에서 많이 논의되고 있었다. 이 사이트에서는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제기구들의 대응과 정대협이 유엔과 ILO(국제노동기구) 등에서 활동한 내역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국제법률가위원회, 일본변호사 연합회, 유엔인권위원회, ILO(국제노동기구) 등은 이미 종군위안부 문제를 비인도적이며 전쟁범죄 중 하나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보상과 법적인 처벌이 행해져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으며, 미법무성은 위안부 정책관계자들에 대해 입국금지를 결정했다. 우리나라 국회 역시 일본전범들의 출입금지를 위한 출입국관리법 개정안을 1997년 11월 18일자로 의결하고 시행령을 마련 중인 상태이다.정대협은 세계정치 행위자들의 이런 결정에 대해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역시도 문제 해결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유엔인권위원회에 1992년(우리나라가 유엔에 가입한 해)부터 참가함으로써 그곳에서의 발언기회를 늘이고 종군위안부 문제가 국제적인 이슈가 되도록 많은 노력을 했다. 그 결과, 종군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전시 노예제를 주제로 하는 연구가 행해지게 되었고, 여성에 대한 폭력특별보고관제도가 설치되었다. 또한, 종군위안부 문제는 성적 노예제로 인권에 반하는 죄라 규정되어 일본정부에게 법적 책임이 있음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고, 배상과 법적 책임 등 6가지 항복에 대해 일본정부에 권고하게 된다.ILO(국제노동기구)에서의 종군위안부 문제는 1995년에 일 일이었고, 예전에 그 재판을 녹화둔 것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법정은 단순히 우리나라와 일본만 관계된 일이 아니라, 아시아 피해국들-한국, 북한, 대만, 중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일본-의 시민단체가 공동으로 주최하고 세계의 여성 인권 단체들의 지원 아래 열렸다. 기억을 더듬어 내가 봤던 내용을 요약해보면, 재판은 영어로 진행되었고 종군위안부로 고통을 받았던 각 나라의 증인들이 나와서 당시의 상황과 그로 인해 받은 피해에 대해 증언하였다. 이를 들으며 현장에 있던 참관자들이 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나 또한 당시 비인격적 대우를 받았었고, 그로 인해 평생동안 힘겨웠을 할머니들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또한 이 법정에서는 종군위안부들의 증언 뿐 아니라 현재 무력갈등으로 인한 성폭력 사례가 일어나고 있는 나라들-동티모르, 인도네시아, 미얀마, 아프가니스탄, 알제리아, 르완다, 이스라엘, 주한 미군기지,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도 심포지엄을 통해 전세계적인 각성을 촉구했다. 종군위안부 문제가 과거 청산의 성격 뿐만 아니라, 미래 여성인권의 신장을 위한 발판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라 하겠다.4.나의 best web-site가 국제정치학적으로 갖는 의미1한국과 일본의 관계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이 사이트의 궁극적인 목적은 종군위안부 문제의 총체적인 해결이다. 종군위안부 문제는 아직도 한 일 간의 앙금으로 남아있다. 일부 사람들은 이미 지난 일을 왜 들추느냐면서 그냥 지나가도 될 일인양 치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바람직한 태도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일제 시대 문제에 대한 명확한 해결 없이는 관계의 발전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의 이야기를 통해 왜 관계의 발전을 위해 문제의 해결이 선행되어야 하는지 알아보자.A와 B는 서로 한동네에 살고 있는 이웃관계이다. A와 B는 겉으로 보기에는 꽤 친하게 보인다. 종종 만남도 갖고, 먹을 것도 서로 주고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서로를 진심으로 대하지는 기 때문에 드러내놓고 먼저 말을 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B는 그 일에 대해 사과를 하기 보다는 덮어두고 싶어 한다.이런 상황이라면 과연 A는 B를 진심으로 대할 수 있을까? B역시도 A에게 아무 거리낌 없는 진실된 태도를 보일 수 있을까? 그리고 만약 우리가 A의 입장에 처했다면 어떠할까? 우리들 중 누구도 자신의 부모가 당한 고통에 대해 너그러이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본과 우리와의 관계도 이와 같을 것이다. - 위 이야기 속의 A가 바로 우리나라이고, B가 일본이며, 한동네라는 것의 범위는 아시아이다. 내가 짧은 생각으로 구성한 것이기 때문에 현재 한 일 관계를 완전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종군위안부 문제에 관해서는 설명이 되리라 본다.일제의 만행 중에서도 종군위안부 문제는 뜨거운 감자와 같은 존재이다. 어떤 문제보다도 비인권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에 일본이 전세계적으로 규탄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이 더더욱 그 문제를 축소하려 하고, 그 문제에 대해 발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본의 그런 태도는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키는 것 같다. 일본이 진실로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빠른 시일 내에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 및 보상을 하는 편이 훨씬 현명한 방법이다. 그 이유는 독일의 예에서 찾을 수 있다.독일의 경우, 일본과 같은 제 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임에도 불구하고 일본과는 다른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이유는 독일의 전후(戰後) 행동에 있다. 독일은 전후 나치의 유태인 학살 등 각종 만행에 대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죄를 해왔다. 심지어 독일 총리가 위령비 앞에서 무릎을 꿇기까지 했다. 독일 사람들은 아직도 나치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부끄러워 하고, 다시는 그러한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으려 한다. 이런 독일의 노력 덕택일까. 전후 독일은 경제적 발전을 거듭하게 되고, 세계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된다. 또한, EU가 설립된 이후, 2차 대전 중 나치로 인한 피해가 막대했던 프랑스
    사회과학| 2004.06.06| 5페이지| 1,000원| 조회(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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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한홍구의 대한민국사
    역사의 진실찾아가기-한홍구의 대한민국사-*학과 : 언론정보학과*성명 : 박 현 진*제출일 : 2004. 4. 7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아니 어쩌면 그 이전의 어린 나이부터 우리들은 역사를 공부해왔다. 학교에서 배우는 기간으로만 따져봐도 10년이 넘는, 참으로 긴 시간이다. 나 역시도 그런 교육과정을 거쳐서 여기까지 왔다. 그 시간들 속에서 항상 같은 시각에서 바라본, 같은 내용만을 공부해 왔다. 그러나 한홍구의 를 읽은 지금, 그동안 아무말 없이 살았으면서 이제야 용기를 내서 내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 과연 내가, 그리고 우리가 정규 교육과정 속에서 배웠던 역사가 진실인지에 대해. 그리고 나는 이 질문에 대해 자신있게 아니다 라고 답할 수 있다.우리가 학교에서 주로 배웠던 역사는 대부분이 승자의 입장에서 쓰여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기는 편은 좋은 사람들이고, 지는 편은 나쁜 사람들인 것처럼 그려진다. 어떤 사건에 대해서는 해석이 여러갈래로 있기 마련인데, 우리는 힘있는 자의 입장만을 사실인 것처럼 배웠던 것이다. 승자의 논리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기에 우리는 과거사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아니, 승자의 힘 때문에 과거사에 대해 비판을 하기가 힘들다는 편이 더 적절한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소극적인 태도는 우리 사회의 발전을 이끌어내기 힘들 뿐 아니라 오히려 후퇴를 불러올 수도 있다. 과거사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과 반성 없이 역사가 진행될 경우 그것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다를 바 없다. 우리나라의 근 현대사를 돌이켜보면 이러한 점은 명백해진다.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는 친일파 문제를 생각해보자. 16대 국회에서 친일파 청산을 위한 특별법안이 제정되었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굳이 어두운 과거를 들춰내야 할 필요가 있냐고 묻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이런 의문을 갖고 있다면 우리의 뒤틀린 현대사를 생각해 보면 그 답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친일파가 청산되지 않아 뒤틀렸는지 아니면 현대사의 전개과정이 뒤틀렸기에 제대로 친일파 청산이 이뤄지지 않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으나 이것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와 같은 것이라 생각하여 잠시 접어두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뒤틀린 역사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꼭 친일파 청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친일파가 청산되지 못한 이유는 한반도가 공산주의진영과 자유주의진영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각축장이 되면서 민족주의보다는 반공의 질서가 더 우선시 되는 장소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반공이 우선시되면서 미군정은 일제 시대의 사람들을 필요로 했고 친일파들은 자신의 살 길을 찾아 미군정을 도우면서 권력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친일파가 결코 잘못한 일이 없어서 청산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당시 상황 속에서 친일파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과거 친일파였던 사람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그 잘못을 반성하지 않은 채 버젓이 살아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위치에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이용하여 일제 시대에 저질렀던 잘못과 그것을 덮기 위해 저질렀던 만행들을 숨기기 위해 계속해서 더 큰 잘못들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친일 행적에 대한 최소한의 반성과 국민들에 대한 사죄가 있어야 할 마당에 오히려 그들의 권력을 믿고 큰소리 치며 한국사회를 활개하고 다니는 것이다. 그들의 이러한 행동들이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친일파 청산 이 우리에게 커다란 숙제로 남아있는 이유이다.우리에게 숙제로 남아있는 것은 비단 친일파 청산 문제만이 아니다. 소위 미선이, 효순이 사건 으로 큰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미국과의 관계 역시도 과거 정권들의 불평등적인 외교 정책으로 인해 최근까지도 그 관계가 수평적이 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조약이 불평등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가 바로 치외법권 이다. 난 그동안 이러한 조항이 1900년대 초반의 제국주의 시대에만 있었던 것으로만 알았다. 설령 있다하더라도 우리나라가 그러한 조약을 맺었다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미선이, 효순이 사건 으로 인해 SOFA(Status of Forces Agreement, 대한민국과 아메리카 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 제4조에 의한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에서의 합중국 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라는 것을 알게 되고 우리나라와 미국의 관계가 얼마나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전에도 미국에 대해 그리 좋은 감정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미국 역시도 우리를 전략적인 우방으로 대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심한 불평등한 관계가 오랜 기간동안 별다른 반발 없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 대해 놀라울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관계의 시작과 유지에 과거 정권들이 기여했던 바는 절대적이다.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살펴보게 되면, 미국의 입김이 대단했다. 일제가 물러난 이후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군은 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되기 전까지 우리나라의 모든 것을 장악했고, 정부 수립 이후에도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했다. 이런 미국의 존재 앞에서 이승만은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남한 내에서만이라도 자신의 권력을 세우기 위해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역시 정통성이 결여되어 있는 단점을 미국의 인정으로 막아보려 했다. 그 이후의 대통령들 또한 국내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서는 미국의 지지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그랬기에 미국과의 관계는 항상 우리가 낮아질 수 밖에 없는 관계였다. 김수희씨의 노래 애모 의 가사 중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라는 구절이 절로 떠오를 수 밖에 없던 것이 바로 한국과 미국인 것이다. 최근에 한-미 관계에 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개정의 움직임이 보이고 있고, 실무적인 변화도 조금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가야할 길은 멀다고 본다. 너무도 잘못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바로 과거 한-미 관계에 대한 고찰 및 반성이다. 이것이 선행되어야만 무엇이 잘못된 것이고, 어떠한 점을 어떻게 고쳐나가야 할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인문/어학| 2004.06.05| 4페이지| 1,000원| 조회(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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