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asso피카도르 , 1889-1890 피카소의 가장 초기작으로 알려진 그림. 어릴 적 피카소는 아버지를 따라 곧잘 투우장에 갔는데, 그때 본 황소와 투우사의 피튀기는 격렬한 이미지는 평생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만년까지 투우 경기를 즐겼으며, 그림의 소재로 이용하였다. '피카도르'는 말을 타고 창으로 소를 찔러 소를 성나게 하는 중간 역할의 투우사이다.Childhood and Youth 1881-1901The Blue Period 1901-1904 (청색시대)자화상 , 1901 남청색 공간과 여윈 몸을 감싼 암청색 외투에 받쳐진, 광대뼈 불거진 창백하고 여윈 얼굴의 이 자화상은 결코 20세로는 보이지 않는 장년의 모습이다. 파리 무대에 갓 데뷔한 '청색시대'에 피카소의 궁핍을 잘 보여주는 자화상으로, 눈언저리의 푸른색 처리에서도 볼 수 있듯 슬픔과 절망을 깊이 체험한 자의 우수, 그러면서도 이를 힘들게 견뎌내는 의지를 그의 멍하게 풀린,사려깊은 눈빛을 통해 읽을 수 있다. 엷은 분홍색 입술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엔 삶에 대한 연민이 서려있다.이 작품은 1901-1904년 까지의 피카소의 [청색시대]의 가장 복잡하고 큰 작품이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그려진 작품 [La Vie(인생)]은 20세기의 영향력있는 시각예술가의 회화, 소묘, 판화, 조각 그리고 놀랄만한 작품들 중에서도 핵심이 되는 작품중의 하나로 남아있다.이 시기 젊고 감수성이 예민하였던 피카소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세기말의 암울한 분위기에 영향을 받는데, 이로서 그의 작품이 전체적으로 청색이 감도는 어둡고 침울하고 내성적인 분위기를 띠게 된다. 작품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피카소의 인간에 대한 관심은 일생동안 지속된다. 피카소는 이러한 경험으로 육체적 사랑의 허무함을 담은[인생]이라는 작품을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구도에서 인물들이 적어도 두 번 바뀐 이 작품을 위해 피카소는 4장의 스케치를 했다. 망또를 걸친 여인은 처음에는 턱수염이 난 남자였다. 남자의 경우, 원래는 피카소 에서 떠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192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그의 신고전주의 화풍에는 여성의 풍만함이 더욱 과장되어 확장된다. 머리 빗는 여인 , 1906 분홍색시대의 대표작으로 고솔에서 그렸다. 파리에서 공개된 이베리아 조각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피카소는 페르낭드와 함께 살며 청색시대 말기부터 그녀를 모델로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이 그림은 흰색을 섞은 연한 회청색 배경 속에 분홍색의 풍만한 페르낭드의 벗은 몸과 머리 빗는 교태가 에로스의 탄생을 보듯 사랑스럽다. 이는 피카소가 루브르의 고대 미술관을 자주 둘러보며 원시미술에 부쩍 관심을 갖기 시작한 흔적으로 보인다. 몸은 사실적인데, 머리 빗는 여인의 얼굴은 가면처럼 단순화시켜 다른 그림에서 오려 붙인 듯 하다. 배경 처리는 이제 사물의 형태를 뭉그러뜨려 보는 이의 시선을 팔에 받쳐진 여인의 얼굴에 집중하게 한다. 그림 속의 여인은 그리스 조각처럼 모성이 넘치는 모습이다.원숭이와 함께 있는 곡예사 가족 , 1905곡예사 가족의 가족 사랑을 그린, 애틋한 정감이 다가오는 그림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원숭이까지, 그들의 시선이 모두 르누아르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천사 같은 아기에게 집중되어 있다. 어머니와 아기의 구도는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들 성모자 상을 닮았다. 안정된 주거 없이 '유랑하는 신세인 곡예사의 자식으로 태어난 불쌍한 내 새끼' 하듯, 아기를 보는 아빠와 엄마의 표정이 애잔한데, 이를 보는 원숭이의 덤덤한 옆모습과 능청스런 앉음새가 대조된다. 배경은 곡마단의 천막 천으로 단순화했고,피카소는 사내아이의 고추를 놓치지 않고 그려 넣었다.살당방크의 가족 , 1905 1905년 봄부터 피카소는 대작으로 곡예사 가족을 그리기 위한 준비에 착수 있다. 많은 밑그림을 그리고 구도가 그럴듯해 보이는 이를 수채화로 만들었다. 부분적으로만 그려놓은 습작이 많이 남아 있지만, 큰 수채화로만 끝난 또 다른 곡예사 가족 은 지금 미국 볼티모어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살당방크의 가족 은 그때까지 피카소가 그린 르트뤼드 스타인은 모든 걸작들이 이 세상에 선보일 때는 이와 같이 추한 모습을 하고 있기 마련이다. 이 추한 모습은 화가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자 투쟁한 흔적이다. 라고 이 그림을 옹호했다. 피카소는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지 않고 알고 있는 것을 그린다. 고 말했다. 세잔의 기하학적인 패턴에 영향을 받아 피카소는 사물의 진실된 외형을 다시 점으로 분해해서 앞, 뒤, 전방, 후방에서 동시에 분석하고 있다.다니엘 앙리 칸바일러의 초상 , 1910모자이크로 처리된 이 초상화에서는 인물의 이목구비를 열심히 찾아야 한다. 맞지 않는 두 눈, 귀의 음영, 코의 각, 넥타이 조각, 머리카락의 윤곽, 마주 잡은 손……….. 너와집의 지붕을 만들 듯 나무판을 화면에 붙이고 여기서 평탄한 색으로 면의 음영을 입힌 이 그림을 보고 우리는 도무지 칸바일러 얼굴을 떠올릴 수 없다. 오늘의 추상미술이 분석적 입체주의에서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이 '인물의 해체'는 피카소와 브라크가 함께 시작했고, 둘의 우열을 따진다는 것은 스포츠에서나 볼 수 있는 승부사들의 농간이다.Analytical Cubism두 인물이 있는 풍경 , 1908원시의 밀림, 풍성한 자연을 묘사했으면서도 고갱과는 또 다른, 입체주의적인 표현방식을 보인다. 두 인물이 있는 풍경 에는 두 나체 인물이, 한 명은 나무 줄기처럼 서 있고 다른 한명은 뿌리 곁에 누워 있다. 자연 속에 완전히 융화되어 숨은 그림 찾기가 되어버렸다. 경치와 인물 모두 단순화된 기하학적 양감으로 처리했다. 1908년까지 피카소와 브라크는 철저히 사진의 영향 아래 있었다. 요컨대 '세잔식 입체주의'로서 입체주의의 초기에 머물러 있었던 셈이다.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초상 , 1910 이전의 초상화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입체주의의 엄격성을 견지했음에도 모델의 얼굴 특징을 족집게로 집어낸 듯 부각시켰다. 볼라르의 말에 의하면 자기 친구들은 이 그림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했지만 네 살배기 친구 아들은 이 초상화를 보자마자, “볼라르 아저씨 울림통을 표시했다. 그 옆에는 바이올린의 'f자 구멍'을 그려 넣었다. 종이 붙이기를 한 '인조나무'는 바이올린이 나무로 만들어진 것임을 시사한다. 바이올린의 형태는 신문지 바탕 위에 목탄으로 그렸고, 악기의 현은 흰색 종이 띠 위에 표시했으며, 바이올린의 받침대는 화폭의 제일 위쪽에 그렸다.신고전주의의 다른 작품들.The Twenties and Thirties 1918-1936해변을 달리는 여인들 , 1922 격정적인 동작으로 달려가는 두 여인은 거인이다. 두 여인은 푸른 바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사암의언덕으로 내닫는다. 내딛는 큰 발은 지축을 쿵쿵 흔들 듯 하다. 화차 머리 기관실처럼 돌진하는 여인의 모습이 가히 폭발적이다. 이 여인들은 고대 로마 시대의 복식을 하고 있지만, 그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마라토너처럼 계속 달려오고 있는 듯하다. 여성이 받는 사회적, 제도적 온갖 속박을 떨치고 평등과 자유를 향해 질주하는, 여성해방의 선구적인 기념상을 방불케 한다. 고대 로마시대의 육상선수, 전사, 여신 들의 조각상을 보고 느낀 장엄함과 고귀함의 피카소 식 재해석이다. 이 수채화는 시인 장 콕토와 작곡가 디리우스 미요의 발레극 푸른 열차 의 무대막으로 사용되었다. '푸른 열차'는 휴가 열차를 뜻하고, 휴가란 도시인들의 피곤한 일상생활을 재충전할 수 있는 기대 부푼 환희의 시간대이다. 그래서 바캉스를 맞은 휴가객들이 고대하던 휴양지에 도착한 환희를 동적으로 표현했다는 해석이 그럴듯하다.세 사람의 악사 , 1921 단순한 직선을 꺾고 연결해서 여러 면을 평면적으로 배치했으나 그 위치가 제자리에 있음으로써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배열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옛 조각보를 보듯 색채의 현란한 조화가 피카소의 기량이 절정에 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콧수염 단 피에로는 클라리넷을 불고, 아를르캥은 바이올린을 손에 쥐고 있고, 승모에 승복을 입은 수사는 악보를 펼쳐 들고 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점은 아를르캥의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조그만 손이세력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런데 말을 탄 사람은 한 눈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지만 다른 한 눈은 옆을 보고 있다. 처음에 세계는 공습을 주도한 히틀러 정권만을 비난했다. 피카소는 이중적인 인물화를 통해 게르니카 공습이 실제로는 스페인 군부의 사주에 의한 것임을 웅변했던 것이다. 이처럼 피카소는 사물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줄 때 숨겨진 진실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피카소는 여러 각도에서 본 사물을 모두 모아 그림으로 표현했다. 피카소의 입체화는 당시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부합되는 것이기도 하다. 여러 각도에서 바라본 3차원의 공간을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모음으로써 4차원을 구현했기 때문이다. 피카소는 이러한 종합적인 입체화의 방법을 정립한 뒤 드디어 우리는 완전한 형태를 그렸다 고 말했다고 한다.한국에서의 학살 , 1951 중세의 십자군 기사처럼 철제 갑옷으로 중무장한 일단의 병사들이 나체의 여성들과 어린이들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다. 그들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듯 투구 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다. 대지를 딛고 있는 그들의 큰 발은 여성들 발의 두 배 넘게 크다. 곧 총탄 세계를 받게 될 여성 중 두 명은 임산부다. 전혀 대항능력이 없는, 식물같이 연약한 그들이 왜 잔혹한 전쟁의 희생물이 되어야 하는지를 이 그림은 관람자에게 묻고 있다. 그러나 그 물음의 대답은 누구나 알고 있다. 피카소는 한국은커녕 동양 땅을 밟아보지 못했다. 오직 매스컴의 기사와 사진을 통해 한국전쟁의 참상을 들었을 뿐이다. 그림 속의 여성과 아이들이 동양인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고 병사들도 현대의 군인들, 특히 미군이라고는 단정 지을 아무런 근거가 없다. 군인들의 복식은 오히려 중세 병사 갑옷을 차용하고 있다. 피카소는 이 그림을 그릴 때 자신이 파리에서 겪은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떠올리며 게르니카 를 그렸을 때처럼, 평화를 짓밟는 전쟁 옹호론자를 증오하고 거기에 희생되는 민중의 비극을 고발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다.The Late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