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뿌리박힌 우리 시대의 사고 (‘무진기행’을 읽고)1960년대의 산업화로 인한 배금주의나 출세주의, 도시지향성, 나아가 시대적 허무주의 경향까지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모든 것이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 안개가 자욱한 ‘무진’ 이라는 곳을 배경으로 글은 시작된다. 주인공인 ‘윤희중’은 무진 출신으로서 서울에서 장인이 경영 하고 있는 제약회사의 간부로 일하고 있다. 휴가 차 무진에 내려왔으나 숨기고 싶은 자신의 과거만 떠오르고, 또한 과거의 자신이 그랬듯이 서울 행을 목표로 무진 탈출을 꿈꾸는 ‘인숙’이라는 여인을 만남으로써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즉 그녀는 그에게 있어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어떤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마지막에 그녀를 버리면서 “마지막으로 한번만이다. 꼭 한번만” 이런 말을 하면서 스스로 위안을 하고, 과거를 잊기보다는 그 과거를 내던져버리고, 다시 현실이라는 곳으로 돌아간다.주인공인 ‘윤희중’은 이렇게 이상과 현실이라는 두 공간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게 되는데 아내의 전보로 인해 그는 잠시나마 꿈꿨던 이상에서 벗어나 다시 현실을 택하게 된다. 현실을 택함으로써 그는 또 다시 산업화가 만들어놓은 이중적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그는 서울에서의 자신의 삶이 위선적이며 속물적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위선적이며 속물적인 삶을 사는 동시 그런 삶을 살아야하는 자신을 원망하고, 공허감을 느낀 채 자신의 후배인 ‘박’처럼 순수한 삶을 살기를 동경해야 하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런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현실을 차 내버리지 못하는 산업이라는 거대한 굴레 에 설 곳조차 잃어버린 인간의 나약한 모습을 보여준다.그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직 사회생활을 제대로 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이것 때문이다’ 하고 강하게 정의내릴 무언가가 없다. 하지만 나의 짧은 생각으로 우리 사회에 뿌리박힌 사회적 명예나 지위 의식, 그리고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이 모든 것들이 그를 그렇게 내 몰은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도 우리 사회에 보면 명예나 지위 부만 높게 사고, 제대로 된 사회적 정의나 명분은 헌신짝 쳐다보듯 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히려 정의나 명분을 중요시 하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거절당하고, 외면 받고 있다.어디서부터가 그 시작인지 알 수 없는 이런 일들이 되풀이 되어 왔고, 지금도 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 의지가 약하며 산업화 앞에 한층 더 무기력 해지고, 고독해진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렇기 때문에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쉽게 삶을 포기하고 자살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The Passion Of The Christ 2004’를 보고담당교수 : 정민 교수님학과 : 영어영문학과학번 : 20040097이름 : 이하나제출일 : 2004.05.24‘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 한 문장을 확대 시켜 놓은 영화 한 편에 세계의 시선이 집중되었다.어떤 사람들은 칭찬을 늘어놓았고, 어떤 사람들은 너무 사실적인 내용에 끔찍하다며 비난을 해댔고, 유대인들과 종교인들은 반유대적인 영화의 내용에 유대인의 명예를 훼손시켰다 하며 수없는 비난을 늘어놓았다. 그런 이유로 영화사의 사장들과 배급사들로부터 1년 넘게 외면을 받아 온 이 영화가 세기의 영화라 불렸던 ‘반지의 제왕’ 보다도 더 많은 극장 점유율을 차지한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 여러 가지 이유 중 제일 큰 이유가 예수님의 ‘사랑’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 그 사랑이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물론,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영화관으로 불러 모은 것이 아닌가 싶다.이 영화는 상영하는 125분 내내 예수님 생의 마지막 12시간을 생생하게 그려놓은 영화이다. 러닝 타임 내내 예수님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고 노력하는데, 이유는 아마도 그 고통을 우리가 함께 느끼기 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싶다.예수님이 마지막 만찬 후에 기도하기 위해 갔던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영화가 시작되는데, 그곳에서 예수님이 사탄을 물리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 그 시간,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이 계신 위치를 알려주는 대신 은 30을 그들에게서 받는다. 이렇게 됨으로써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뜻대로 예수님의 우리들을 위한 희생이 시작된 것이다.예수님이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 그 순간 그의 제자인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했다. 어쩌면 예수님은 유다가 예수님 자신을 배신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이때 소름끼치도록 무섭게 생긴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구별이 안가는 사탄이 나타나 예수님을 괴롭힌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로지 기도만 하셨고, 예수님께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셨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맨 처음 시작하는 그 중요한 부분을 예수님의 뒷모습으로 나타내지 않았나 싶다.아무튼 유다의 배신으로 인해 예수님은 대제사장들에게 끌려가 온갖 모욕을 당한다. 또한 그 곁에 섰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예수님과 같은 당파라며 따지고 들자 베드로는 맹세코 저 자를 모른다고 말했고 곧 닭이 울었다. 이 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했던 말씀 중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셨던 것이 생각나 통곡을 한다. 이 장면을 보며 나는 조금 무섭고 소름끼쳤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그렇게 행동할 것이라는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셨던 것이다.어떻게 그 사실을 아셨는지는 아무도 모른다.(영화 볼 때 나도 그런 능력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지금 하늘에서 내가 저질렀고 앞으로 저지를 죄를 다 알고 계시는지도 모르는 일인데, 아니 다 알고 계실 것 인데 정말 무서울 따름이다. 아마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을 때 무서움과 수치스러움 그리고 예수님께 죄송한 마음을 느꼈을 것이며 죽을 때 까지 자신의 행동에 후회하며 발버둥 쳐야 했을 것이다.이런 장면을 보고 괴로워하던 유다는 은 30을 다시 그들에게 되돌려 주지만 그들은 상관없다 하며 그를 내버려 둔 채 자신들 일을 본다. 유다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있던 중 아이들이 사탄의 얼굴을 한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그 사탄의 얼굴을 한 아이들의 모습이 얼마나 소름끼치던지 정말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 아이들을 피해 산언덕으로 올라간 유다는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이렇게 유다가 자신의 죄를 견디지 못해 죽음을 선택했지만 그 죄의 값은 다 치러지지 않은 듯하다.예수님은 곧바로 총독 빌라도에게 끌려갔고, 자신이 정치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아내의 충고까지 들은 빌라도는 헤롯 왕에게 그 판결을 맡겼다. 그러나 즐거운 때를 보내고 있던 그 또한 다시 빌라도에게 보냈다. 이리하여 빌라도는 사람들에게 유명한 죄수 바라바와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님 둘 중 누구를 풀어 주겠느냐? 하고 물었더니 사람들이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에 빌라도는 바라바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 하고 풀어주라 말하고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나는 다른 어떤 장면보다 예수님께서 채찍질 당하는 장면이 가장 머릿속에 남는다. 다른 사람들은 그 장면이 가장 처절하고 징그럽기 때문에 그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들 하지만 나는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다.예수님께서는 채찍질을 당하실 때 다시 일어서지만 않았다면, 아마 그렇게 심하게까지 채찍질 당하시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 몸이 쇠로 된 채찍에 의해 살이 찢어져 피가 나고, 그 붉은 피가 관정 바닥에 다 튀었는데 불구하고, 다시 그 몸을 일으키셔서 채찍질을 당하셨다. 다시 일어나면 더 크고 더 날카로운 갈고리가 있는 끔찍한 채찍에 의해 채찍질을 당하는데도 또 다시, 또 다시 일어나 빌라도의 부하가 와서 말릴 때까지 계속 채찍질을 당하셨다.아마 나 같으면 몇 번 채찍질 당하다가 ‘나 죽겠다 도저히 못 맞겠다’ 하고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시지 않으셨다. 더군다나 채찍질 당하시는 그 와중에도 자신을 채찍질 하는 로마 병사들을 위해 하늘에 계신 주님을 향해 저들은 아무 것도 모르며 아무 잘못이 없다고 기도를 하셨다. 이때 옆에 있던 우리 엄마는 주여! 주여! 하시며 아주 목 놓아 울으셨다.아마도 예수님이 또 다시 일어나 채찍질을 당하셨던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저지르는 죄들을 지켜볼 수만 없어 대신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해서 그러신 것 같다. 우리가 저지른 수도 없는 죄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채찍질 당하신 것이다. 또한 무지한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께 가시로 된 면류관을 씌여 머리에서도 피가 흐르게 했다.이런 영화의 폭력적인 장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혹평을 받았다고 하는데, 나는 이 폭력적인 장면을 지지하는 편이다. 이런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인간의 잔인함과 폭력성을 깨닫게 하는 동시에, 인간의 죄가 얼마나 깊은지 보여주고 깨닫게 해주는 것이 아닌가?사실 이렇게까지 영화를 잔인하게 연출하지 않아도 되었을 런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영화를 본 사람들이 기독교 신자라면 굳이 그렇게 잔인하게 하지 않았어도 하나같이 눈물을 터뜨리며 우리 엄마와 같이 주여! 를 외쳐댔을 것이다. 하지만 감독인 ‘멜 깁슨’의 욕심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주님의 뜻과 예수님의 고통을 알게 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렇게 잔인하게 영화를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만약 이 영화가 정말로 감독의 욕심에 의해 잔인하게 꾸며진 것이라면 감독의 목표는 물론 대성공을 이룬 것이다.아마 예수님께서 채찍질 당하는 장면에서는 나 같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든 안 다니는 사람이든 예수님이 당하신 끔찍한 고통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으며 또한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리치는 병사를 위해 기도하던 장면에 모두들 주목했기 때문이다.난 이 장면에서 또 하나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이다.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그 몸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채찍질을 당하는데 어떻게 쳐다만 보고 있을 수 있는지 정말 대단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물론 예수님께 관심이 없다거나 정이 없다거나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예수님의 사명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쳐다만 봐야 했을 것이다. 어쩌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그 누구보다 강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책임져 주시리라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담대하게 행동 했을지도 모른다. 특히 피천지가 된 관정의 바닥을 닦던 그 모습은 심지어 독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 같았으면 일찍이 쓰러졌을 것이다. 그러나 쓰러지기는커녕 말없이 피를 닦던 모습에 그 순간 그저 대단해보였고, 무척 놀라웠다.하지만 이렇게 처참하게 채찍질을 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란 빌라도의 말에 군중은 오히려 소리를 지르며 십자가에 못 박어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 때 정치적으로 불안했고, 군중의 외침에 딜레마에 빠진 빌라도는 결국 그들에게 예수를 넘겨주고 만다.난 이 장면이 제일 안타까웠다. 만약 빌라도가 예수님을 그 무지한 사람들에게 넘기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예수님은 돌아가시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곧 이것조차 하나님의 뜻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예수님은 피가 질질 흐르는 채로 십자가를 붙들고 골고다 언덕까지 가셔야 했다. 이미 지칠 때로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제대로 지고 가시지 못하셨고 그럴 때마다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께 또 채찍질을 해댔다. 이 때 병사들이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 그를 억지로 끌어다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도록 했다. 그는 처음에는 매우 심하게 거절했으나 나중엔 예수님을 채찍질 하는 병사들에게 그를 채찍질 하지 말라고 항의까지 했다. 예수님께서 쓰러지실 때마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자들이 너무나 얄미웠다. 할 수 만 있다면 정말 나도 같이 십자가를 지고 싶은 심정이었다.골고다 언덕까지 간신히 올라간 예수님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셨다. 길이가 어른 손 한 뼘 보다도 더 길어 보이는 못이 예수님의 손을 통과해 지나갈 때 정말 너무 끔찍해서 제대로 그 장면을 지켜 볼 수가 없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이 세상 사람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예수님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이 얼마나 원망스러우셨을까? 아니 나 같았으면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냐고 원망하며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는 것을 거부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