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문가 요청 쿠폰 이벤트
*중*
Bronze개인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25
검색어 입력폼
  • 왕따없는 즐거운 학교
    왕따 없는 즐거운 학교목 차Ⅰ. 서론Ⅱ. 집단 따돌림의 원인과 지도방안1. 집단따돌림의 개념2. 집단따돌림의 유형3. 집단따돌림의 원인4. 지도방안5. 집단따돌림을 줄이기 위한 실제적인 방안Ⅲ. 결론Ⅰ. 서론최근 청소년간의 단순한 폭력은 줄어드는 반면에 약자를 괴롭히거나 특정 학생을 따돌리는 등 정신적. 심리적 폭력 도는 신체적 폭력과 정신적. 심리적 폭력이 결합된 형태로 나타나는 ?집단따돌림? 현상이 급증하고 있다. 따돌림은 오늘의 청소년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그런데 청소년 사이에서 또래를 따돌리는 현상이 늘고 있고, 그것도 집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Ⅱ. 집단 따돌림의 원인과 지도방안1. 집단따돌림의 개념집단따돌림이란 "집단 내의 다수가 같은 집단에 소속된 개인이나 소수에게 신체적, 정신적 위해를 가하는 행위"를 총칭하는 말이다. '왕따'라는 말은 학생들이 쓰는 은어로 이런 집단따돌림을 심하게 당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러한 왕따는 위협형, 강제형, 조롱형, 소외형 등 다양한 형태로서 나타나며 정신적?신체적?물질적 피해와 폭력으로까지 이어진다. 심하면 정신분열을 일으켜 정신병 환자가 될 수 도 있고, 자살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왕따가 여타 청소년 비행들과 구별되는 이유는 행위의 적발이나 단속이 쉽지 않다는데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집단 내에서 행해지는 행위로서 접촉 자체의 차단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실상이나 증거를 잡기가 힘들다. 또 나중의 보복이 두려워 이를 그냥 은폐하려는 피해자가 많아 그 사실을 알 수 없으며 문제 발생 원인을 피해자에게 떠맡기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피해자에게 "얘가 너무 잘난 척을 떨었고 오만했다."라는 등의 발언을 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2. 집단따돌림의 유형사람을 따돌리는 방법에는 참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 가장 기본적인 것이 말을 걸지 않는 것이다. 말이란 사람과 사람간의 친밀함을 나타내 줄 수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런 말을 걸지 않는 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그 사람과는 상관없이 살고 있다는 것이 된다. 또 공부를 못하게 한다든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그 사람을 만나길 꺼려하며 욕설을 퍼붓거나 사람들 사이에서 그 사람의 신뢰를 깨트리게 한다. 이밖에도 본드나 흡연 등의 나쁜 짓을 하게 하고 지속적으로 돈을 갈취하며 굴욕적인 행동을 하게 하기도 한다.어쩌면 이것보다 더한 행동을 하게 하고 무시함으로서 그 사람을 따돌릴 수 있다. 그 사례를 예로 들어보면 "무료 급식을 먹느니 굶고 말겠어요."라고 말한 아이가 있다. 학교에서 실직자 자녀들이나 생활이 풍족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무료 급식을 한다는데, 이것을 거부하는 학생이 많다는 것이다. '해골' '거지'라며 놀려대고 심지어 거지밥을 먹었으니 이것도 먹으라며 먹고 남은 국물을 밥에다 부었다고 한다.3. 집단따돌림의 원인집단따돌림(폭력)은 한가지 원인 의해 발생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고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원인이 복합적이고 매우 다양하며 예외적인 현상도 많다 여기서는 이러한 원인을 개인?심리적 요인, 가정적요인, 학교적요인, 사회적 요인, 사회적 요인 네 가지 중요한 영역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1) 개인?심리적 요인우리의 사회가 지나치게 경쟁적이어서 힘있고 우월한 사람만이 인정받고 부족한 사람은 패배자로 낙인찍히게 되는 현실에서 어는 순간에 자신이 패배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가지게된다. 우리가 어린 시절 귀신을 무서워하지만 놀 때는 귀신놀이를 하면서 가장 두려운 존재인 귀신 흉내를 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스스로 패배자나 피해자가 두려운 사람은 오히려 자기가 두렵고 무서운 존재가 되면 더 이상 피해자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가해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정신의학적 용어로는 '공격자와의 동일시라고 한다. 즉 자신이 피해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누군가 약하고 저항하지 못하는 피해자를 만들고 그것도 혼자서가 아닌 가해자 집단 내에 존재하면서 자신이 힘있는 집단 속에 있다고 믿음으로써 불안을 해소하려는 것이다.반면에 피해자가 되는 경우는 이들의 말과 행동이 너무 잘난 척을 하거나 자기 중심적이며 자기주장이 강해 다른 사람에게 열등감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거나 내성적이고 소심하여 부끄러움을 잘 타고 자기주장을 못하거나 가정환경이 좋지 않다거나 신체적 결함이 있어 다른 사람들에게 우월감을 제공하는 경우이다.(2) 가정적 요인사람은 누구나 비행이나 일탈, 공격성에 대한 욕구가 잠재해있다. 다만 어떠한 부모 밑에서 자랐으며 어떠한 사회화 과정을 밟아 왔느냐에 따라 청소년의 폭력 요인이 크게 좌우된다. 가정은 기초집단으로 인간의 지능, 성격, 신체, 정서 형성의 근간이 된다. 따라서 가정이 본래의 참 기능을 잃게 될 때, 자녀들의 가치혼란과 주체성 상실은 크다. 건강한 가정이 있을 때 자녀들의 주체성이 잘 형성되고, 나아가 건전한 청소년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산업화 과정에서 우리고유의 전통적 대가족의'공동사회'가 핵가족제도의 '이익사회)'로 변화되었으며, 이로 인해 개인의 주체성은 약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가정은 점점 고유의 가정교육 기능을 상실하고 있어 부모가 모두 있는 소위'생고아'가 많고, 풍요 속에도 고독하고 불행하며, 정서적으로 불안한 가정으로 전락하고 있다.(3) 학교적 요인현대가 점점 고학력 시대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면서 교육은 시험체제 중심의 교육으로 바뀌어져가고 가고 있다. 학교교육은 점점 시험을 준비하는 한쪽 방향의 교육을 강요당하고 있기 때문에 중학교는 고등학교 진학을 목표로 하는 준비교육이고, 학생들은 소외당하고 있는 것이다. 진학 중심의 수업, 진학 중심의 진로지도에 불만과 열등감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진학, 입시체제에서 가출, 장기결석, 퇴학, 학교폭력(집단따돌림)이 나타난다.진학 중심의 종합적 교육관에 짜 맞춰진 교육과 교과서 중심의 교육은 학생의 인성 개발에 적지 않은 장애 요인이 되고 있다. 학생을 평가하는데도 지식중심의 평가로 이루어져 지식에 의하여만 훌륭한 학생, 문제학생으로 평가된다. 이렇게 학교에서 열등한 대우를 받는 학생은 반항하여 보상적인 행동으로 주위 친구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가출 또는 자살을 택한다. 학생과의 대화, 상담 지도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 교사나 친구에게 인정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은 그러한 불만을 폭력으로 해소할 가능성이 높다(4) 사회적 요인도시화는 최근 청소년 폭력의 양적 증가는 물론 질적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또 현대사회로 접어들면서 물질주의적 가치관의 만연으로 인간적 가치를 소홀히 하는 풍조가 생겨나고 있다. 특히 모방이 강한 청소년들에게 TV,비디오 잡지 등 지나친 상업적, 선정적, 폭력적, 향락적인 내용을 경쟁적으로 취재 방영, 보도함으로써 청소년들이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문제성이 제기되고 있다.4. 지도방안집단따돌림이 주로 발생하는 현장이 학교라는 점에서 학생의 생활을 맡고 있는 교사(특히 담임교사)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초등학교의 경우 아이들의 집단화가 비교적 덜한 편이고 행동수준도 중?고등학교에 비해 그리 난폭하고 집요한 편도 아니고, 학생과 같이 생활하고 있어 아동의 행동에 미치는 교사의 영향이 크기 때문에 교사가 세심한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지도한다면 집단따돌림 문제를 예방하거나 해결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초등학교의 집단따돌림의 문제를 조기에 해결하거나 예방해야 할 이유는 초등학교 시절 경험한 집단따돌림이 중?고등학교로 계속 이어질 염려가 있으며, 자아 정체나 인격 형성이 덜 된 상태에서 집단따돌림을 당하게 되면 대인관계에 공포심을 갖거나 적대적으로 대하게 되는 등 심각한 심리적, 정신적 후유증을 앓기 때문이다.첫째, 교사의 집단따돌림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요구된다. 학생들이 쓰는 왕따의 은어 중에서 ?업따)?가 있다. 집단따돌림은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고, 아이들이 성장하는 시기에 또래 집단에서 흔히 일어나는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반에는 집단따돌림이 없다?라고 낙관하거나 맹목적으로 무시하는 태도는 올바르지 못하다. 왜냐하면 집단따돌림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가운데서도 조직적이고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그로 인한 피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에 와 있기 때문이다.둘째, 집단따돌림이 발생해도 ?그것은 따돌림당하는 아이의 행동 특성 때문에 일어나므로 그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여 문제 해결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것도 위험하다. 왜냐하면 집단따돌림을 발생시키는 것이 학생들 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사의 언동, 학교 내의 지나친 경쟁 및 관리 시스템 등 일방적인 가치관을 강요하는 성인들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학생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어 문제해결을 어렵게 할뿐만 아니라 학생들로 하여금 집단따돌림을 당연시하는 풍토를 심어주기 때문이다.셋째, 교사는 집단따돌림을 시키는 학생을 무조건 나쁜 아이로 인식되도록 행동해서도 않된다. 어찌 보면 집단따돌림을 당하는 아이도, 집단따돌림을 시키는 아이도 모두 피해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집단따돌림을 당하는 아이를 구제하되, 집단따돌림을 가하는 아이에게 나쁜 딱지를 붙여서도 않된다. 집단따돌림은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교사는 집단따돌림을 둘러싼 가해자, 피해자, 동조자 혹은 방관자의 입장을 골고루 고려할 줄 아는 균형 잡힌 안목이 요구된다넷째, 집단따돌림은 인간의 존엄을 상하게 하는 중대한 인권침해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학생들이 이 점을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학생 상호간에 서로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온정적이고 정의로운 학급 공동체(caring and just class community)를 만들기 위해 교사와 학생들은 민주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교육학| 2008.08.17| 5페이지| 1,500원| 조회(355)
    미리보기
  • 안동지역의 동성마을
    안동지역의 동성마을오미리(五美里)는 풍산김씨들이 오백년 동안 세거해온 동성부락이다. 학가산의 한 갈래가 구불구불 수십 리를 남으로 뻗어내려 죽자봉(竹子峰)을 만들었다. 동쪽으로는 아미산(峨嵋山)이 굽어 돌아 마을을 감싸고, 서쪽으로는 멀찍이 도인산(道仁山)이, 남쪽으로는 곱게 솟은 검무산(劍舞山)을 바라보는 아늑한 동네다.풍산김씨(豊山金氏)는 신라 마지막 경순왕의 넷째 아들 은설(銀說)의 후예다. 고려 고종 때 좌리공신, 풍산백에 봉해진 김문유(金文유)를 시조로 한다. 그 증손 김동성(金동成)이 충열왕때 문과에 올라, 찬성사를 지내고, 안동 풍산 석릉촌에 옮겨 살면서 별장을 오릉동(五陵洞)에 두었다.후손들이 대대로 고려에 벼슬하면서 송도(松都)에 옮겨 살았다. 조선이 개국되고 송도(개경)의 사족(士族)들을 정책적으로 한양에 이주시키기 시작했다. 이때 직장(直長)을 지낸 김자순(金子純)이 한양 지금의 청운동인 장의동(壯義洞)으로 옮겨 살았다.김자순의 형 김자량(金子良)이 병조판서를 지내다가 왕자의 난에 연루되어 죽게되자 자순은 화를 피하여 안동으로 내려와 오릉동에 숨어살면서 후손들의 교육에 힘썼다. 손자 김휘손(金徽孫)은 진산군수를 지냈고, 증손 김양진(金楊震)은 참판을 지냈다. 양진의 아들 김의정(金義貞)이 인종이 세자 때 시강원(侍講院)서연관(書筵官)으로 두터운 지우(知遇)를 입었다. 인종이 즉위하고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이 되었다가, 인종이 왕위에 올라 곧 승하하자, 세상에 뜻이 없어, 병을 청탁하고 낙향하여, 오릉동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호를 잠암(潛庵)리라 하였다. 그 아들 이름을 농(農)이라 지어, 전야(田野)에 숨을 뜻을 굳혔다.김의정의 손자인 김대현(金大賢)은 현감을 지냈다. 김대현의 아들 8형제는 모두 진사시에 합격했고, 그중 5형제가 문과에 급제했다. 이를 들은 인조임금은 오형제가 문과급제를 했다는 뜻으로 오릉동을 오미동으로 고치게 했다. 그리고 경상감사를 시켜 마을 어귀에 봉황려(鳳凰閭)라는 문을 세우게 했다.팔련오계(八蓮五桂) 즉 8진사5급제(八進士五及第)를 낸 풍산김씨는 근세에 이르러서도 많은 문한(文翰)과 벼슬을 냈다. 일제 때 일본천황이 있는 궁성에 폭탄을 던졌던 김지섭(金祉燮)의사도 이곳 출신이다. 이밖에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일본 총영사 등 10여명을 사살하고 자결한 김만수(金萬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오적의 매국행위를 규탄하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전국 사림에 배포하고 음독자살한 김순흠(金舜欽)이 여기 오미동에서 났다.안동의 동성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감상문을 쓰려고 하니 뭘 써야 될지도 모르겠해서 일단은 과거 내가 다녀왔던 오미동에 대해서 이야기를 조금 해보고 시작해보려 한다.난 안동에 동성마을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게 많을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하회마을이나 생각했지, 그 이외에 동성마을은 있다해도 소규모에다가 별로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내가 오미동에 처음 간 것은 친구 삼촌이 하시는 일에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서였다. 친구와 함께 거의 막노동인 문화재 보수일을 한 것이다. 풍산에서 일을 한다고 하기에 아침일찍부터 풍산에 도착한 나는 11번의 종점에서 내려 친구 삼촌의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 도착하신 삼촌의 차를 타고 그곳에서도 한 10여분 들어가서 도착한 곳이 오미동이었다. 처음 그곳으로 가면서 느낀 것은 안동에도 이런 오지가 있었구나였다. 예천쪽으로 한참을 들어가서 도착하게 된 오미동은 마을 주변으로 능선 및 산세가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다.오미동에 도착해서 내가 한일은 그곳에 있는 삼벽당)이라는 곳의 담을 쌓는 일이었다. 난 사실 오미동에 가서야 안동에 풍산 김씨가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지 그전에는 풍산 김씨라는 성씨가 있는지도 몰랐다. 그곳에 가보니 풍산 김씨 종가도 있는가하면 내가 일한 삼벽당, 그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참봉댁) 등의 풍산 김씨와 관련된 곳이 다수 있었다. 그제야 나는 이곳이 풍산 김씨의 동성 부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동지방에서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유명했었다는 오미동을 왜 나는 그동안 알지 못했을까?나는 일을 하면서 틈틈히 마을을 돌아다녀보았다. 마을 곳곳에는 오래된 가옥들뿐만 아니라, 시내에서만 볼 듯한 전원주택들도 많이 있었다. 마을에는 유적으로 지정된 건물이 꽤 많이 있었는데 거의 대부분이 조선 후기의 건물이었다. 그 시대에 이 마을이 얼마나 번성했었는가는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마을은 아담하면서도 논과 밭이 풍부하고 주위의 산세가 빼어나 사람살기에 좋은 마을이라는 생각도 해보았다.솔직히 마을을 보면서 그곳에 대한 지식이 없이 일하러 가서 짬짬이 구경을 다닌 나로서는 이 이상 이 마을에 대해서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저 오랜된 가옥들이 많은 풍산 김씨 동성 마을이라는 것 외에는 말이다. 그런데 지난 주 금요일 안동의 동성마을이라는 주제로 열린 세미나는 그 마을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하게 해주었다. 오미동이라는 이름에 얽힌 유래나 그 곳에 풍산 김씨가 정착하게 된 사연, 풍산 김씨들이 안동에 어떤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것 등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동안 나는 안동에는 퇴계 이황 선생과 서애 류성룡 선생 그리고 학봉 김성일 선생만 있고 유명한 마을도 하회마을만 있는 줄 알고 있었다. 안동에 사는 나도 이럴진데 타지에 살고 있는 이들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안동지방은 유교적 전통의 역사가 아직까지도 살아 숨쉬는 고장이다. 그런 전통은 아직까지 안동 곳곳에 존속되어 있는 동성마을이라는 형태에서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안동지방에 남은 동성마을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급속한 현대화로 인한 도시로의 이주뿐만 아니라, 안동의 두 개 댐인 안동댐과 임하댐을 건설하면서 수몰된 지역에도 적지않은 수의 동성마을이 존재했었다. 수몰로 인해 마을을 이전했다고 하지만 많은 수는 도시로 나가 동성마을이라는 이름이 무색한 곳도 한둘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동의 동성마을에 대해서 연구하고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실일 것이다. 점점 사라져가는 안동의 동성마을을 알아가는 것 그것은 그곳의 유적을 보전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세미나는 참 커다란 의의를 가진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전체적인 의미에서 이런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안동의 오미동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동성마을에 대해서도 좀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오미동에 대한 연구를 시작으로 안동지방의 동성마을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아서 참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해본다.
    인문/어학| 2008.08.17| 3페이지| 1,000원| 조회(361)
    미리보기
  • 안동의 역사
    안동은 예로부터 경상도 일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이와 더불어 안동은 많은 인재가 나오기로 유명한데 옛말에 조선의 인재 반은 경상도에서 나고, 경상도의 인재 반은 안동에서 나온다는 말도 있다. 이렇듯 안동은 풍부한 고급인적 자원을 바탕으로 중앙정계에서는 물론 학자로서도 많은 역할을 하게된다. 이런 많은 인재는 국가의 환란이나 위기가 닥쳐올 때면 앞장서서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안동은 역사상 많은 부분 중앙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이제부터 해동지도{) 규장각에서 1740년대의 도별, 군현별 지도인 『해동지도(海東地圖)』 전체와 1872년에 제작된 군현별 지도 중 전라도(1996년 간행)와 경기도(1997) 충청도(1998) 경상도(1999) 강원도 함경도(2000) 부분을 간행한 바 있다. 이 지도들은 산천이나 문화재 등 군현의 자세한 사정을 담고 있어서 큰 도움을 준다. 그러나 근대적인 과학성 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당시인들의 시각을 이해하여야 잘 이용할 수 있다.와 영가지{)목판본. 8권 4책. 영가는 안동의 옛 이름이다. 1602년 권기(權紀)가 스승 유성룡(柳成龍)의 명을 받아 권행가(權行 可)와 함께 편찬에 착수하였으나, 유성룡이 죽자 작업이 일시 중단되었다. 이후 정구(鄭逑)가 안동부사로 부임 하자 권기 ·유우잠(柳友潛) ·이의준(李義遵) 등을 소집하여 1608년(선조 41)에 완성하였다. 본부도(本府圖)를 비롯하여, 임하(臨河) ·길안(吉安) ·감천(甘泉) ·내성(奈城) ·일직(一直) ·풍산(豊山) ·개단부곡(皆丹部曲) ·춘양(春陽) ·소천부곡(小川部曲) ·재산(才山) 등 부내 각 현과 부곡의 지도가 그려 있다. 각 현 지도 다음 에 수록된 목록을 보면, 연혁 ·읍호(邑號) ·강역(疆域) ·진관(鎭管) ·호구(戶口) ·산천 ·토품(土品) ·향 교 ·도로 ·제언(堤堰) ·성씨 ·인물 ·총묘(塚墓) 등으로, 당시 안동부의 행정조직과 사회경제 상황, 문화 ·풍속 등을 망라한 항목들이다. 이 책은 권기의 사후 초고본으로, 1899년 후손 권상학(權相鶴) 등 이 재간행하였다. 권말에 김도화(金道和) ·유도헌(柳道獻)의 발문이 있는데, 안동이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칭 해진다는 자부심이 나타나 있다.를 이용하여 안동지방의 특징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우선 안동이라는 명칭과 그 위상에 대하여 말하여 보겠다.◎안동의 명칭과 위상안동은 국가사회에 끼친 영향의 공과(功過)에 따라 여러 번 읍호와 읍격이 바뀌었으나 기본적인 고을의 행정체계는 유지되었다. 우선 안동의 본래 지명은 신라 시대에 고타야군이었으나 신라 통일 후 경덕왕 때 안동을 고창군(古昌郡)으로 고친다. 그 뒤에 고려 태조 13년 왕건을 도와 견휜을 물리친 공으로 안동부로 승격되었으며, 그 뒤 다시 영가군(永嘉郡)으로 고쳤다. 고려 성종 14년(995)에는 길주(吉州) 자사로 칭하다가 현종 3년(1012)에는 안무사가 되고 그 9년에는 길주자사로 고쳤다가 현종 21년엔 다시 안동부라 하였다. 그러다가 고려 명종 27년(1197)에는 김삼(金三) 효심(孝心) 등이 반란을 일으켜 각 고을을 약탈할 때 안동부에서 그를 평정하는데 공이 있어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신종 7년(1204)에는 동경 야별초 소속의 패좌 등이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킴에 안동 도호부에서 그를 막는데 공이 있어서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되었다. 그 뒤에 충렬와 34년(1308) 다시 복주목(福州牧)으로 고쳤다가 공민왕 10년(1361) 홍건적에 패하여 공민왕이 이곳에 머물 때 이 고장 사람들이 정성껏 모신 공으로 다시 안동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고려 때 안동부에는 많은 속군현(屬郡縣)을 거느리고 있었다. 속군으로는 임하군(臨河郡)과 예안군(禮安郡) 그리고 의흥군(義興郡) 등 3개가 있었고, 속현으로는 의성현(義城縣)과 일직현(一直縣)·은풍현(殷豊縣)·감천현(甘泉縣)·봉화현(奉化縣)·안덕현(安德縣)·풍산현(豊山縣)·기주현(基州縣)·흥주현(興州縣)·순안현(順安縣)·기양현(基陽縣) 등 11개가 있었다.조선시대에는 고려말 안동의 명칭인 안동 대도호부를 그대로 다. 따라서 수령인 대도호부사는 정3품의 고급 관원으로 주현인 안동대도호부와 산하의 속현들을 이끌어 갔는데 16세기초에도 안동부의 속현으로는 임하현·풍산현·일직현·길안현과 멀리 떨어진 현재 봉화군에 소속되어 있는 내성현·춘양현·재산현과 그리고 개단부곡과 소천부곡 및 현재 예천군에 소속되어 있는 감천현 등 모두 10개였다. 뿐만 아니라 세조(世祖) 때 편성한 진관(鎭管) 체제에 의하여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겸하고 있어서 군사 명령 체계상 그 일대의 수많은 고을 수령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청송 영해의 두 도호부(都護府)와 예천·영주·풍기의 세 군(郡)과 의성·봉화·진보·군위·비안·예안·영덕·용궁 등 8개 현의 수령들을 인솔하고 지휘했던 것이다.◎해동지도 안동부(海東地圖 安東府)해동지도는 간단하게 설명하면서도 중요한 관청 및 건물은 다 설명하고 있으며, 도로를 비교적 상세히 묘사해 두어 창고의 위치와 중요성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해두었다. 이제 성안에 있는 기구를 알아보도록 하겠다.{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태사묘로 이 곳은 고려 건국시 후백제 견훤을 토벌한 개국공신 김선평(金宣平:新安東金氏의 시조)·권행(權幸:安東權氏의 시조)·장정필(張貞弼:安東張氏의 시조) 등 삼태사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곳이다. 1481년(성종 12년)에 관찰사 김자행(金自行)이 묘우(廟宇)를 세울 터전을 마련하고, 1540년(중종 35년) 안동부사 김광철(金光轍)이 이 곳에 건립하였다. 그후 경상도 관찰사 권철(權轍)이 제전을 설치하고, 1556년 안동부사로 부임한 권소(權紹)는 권씨 성을 가진 수석 호장(戶長)에게 관리를 맡겨 매년 제사를 받들게 하는 등 제도화에 힘썼다.부속건물은 보물각과 숭보당, 동·서재, 경모루(敬慕樓), 안묘당, 차전각 등이 있다. 정문 경모루로 누각건물인데, 이곳을 들어서면 전면에 숭보당(강당)이 있고,좌우로 동·서재가 있으며, 그 뒤쪽으로 태사묘(사당)가 있다. 보물각에는 보물 제451호로 지정된 삼태사(三太師)의 유물 12종 22점이 보관 숭보당 안에는 퇴계 이황(李滉)이 지은 중건기문 등이 게판되어 있고, 묘정에는 삼공신비(三功臣碑)가 세워져 있다.제남루(濟南樓)는 종루로써, 안동부 원님이 이 제남루 앞에서 백성들을 모아놓고 죄인을 다스려 일벌백계의 교훈을 주었다고 한다. 이 제남루 앞의 거리를 종루가 있는 거리라 하여 종로라고 하였다.강무당(講武堂)는 군사 교육을 하는 기관으로써 세조 이후 진관(鎭管) 체제하에서 안동의 강무당은 그 역할이 매우 중요하였을 것으로 보인다.그리고 가장 중요한 기관으로써 각 고을마다 있는 객사(客舍)와 아사(衙舍)를 들 수 있다. 객사는 객관이라고도 하는데 조선시대에 공적인 임무를 띄고 오는 귀빈들의 숙박을 위해 만들어 놓은 곳이다. 보통 객사는 성곽을 중심으로 가운데 위치하는 것이 보통으로 그 고을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사는 관아 가운데 지방관이 집무하던 곳이다.성밖에 대해서 알아보면 해동지도에는 많은 창고들이 보인다. 풍산창·임하창·감천창 등 모두 강 주변에 위치하여 모두들 조운(漕運)의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런 창고들이 조운의 역할을 한 것은 아니지만 강 주변에 위치한 것은 다른 어떤 이유보다 해상교통을 통한 원활한 수송에 그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그리고 안동지방에는 많은 역들이 있는데 안기역·금소역·옹천역 등이 그것이다. 이것들중 안기역은 안기역본(安奇驛本)이라고 표기하였는데 이것으로 보아 안동지방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역은 안기역으로 보인다. 안기역은 안동부 북쪽 3리에 위치하여 동으로는 금소역, 서로는 안교역, 남으로는 운산역, 북으로는 옹천역과 각각 30리 내외의 간격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역의 위치와 함께 해동지도에는 도로망이 비교적 상세히 나타나있는데 조선시대의 도로망은 창고와 역을 중심으로 발달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지방의 도로도 잘 발달해 있지만 안동지방의 도로망은 지도상으로 볼 때 타지역보다 더 많이 발달해 있다. 그것은 안동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높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 것이다. 해동지도에서 또 하나의 특징으로는 산지의 형세가 잘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산세는 강에 비해 옛 지도에서 그리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 않았다. 이것은 강이 운송 수단으로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 점에서 그 중요성이 산과는 비교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여타 지도에서는 산의 묘사를 봉우리 중심으로 간략하게 이루어졌다. 이에 반해 해동지도에서는 산이 뻗어 내려온 모양을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실용적인 면을 강조했다.◎영가지(永嘉誌)영가지에는 많은 지역의 명칭과 사찰·서원 등을 기록하고 있어서 후대에 안동연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가장 먼저 영가지에서 눈에 띄는 안동의 특징은 사찰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영가지에 나오는 불교 사찰은 약 15개 정도이다. 대표적인 사찰로 고려시대에 건립된 봉정사와 법룡사 그리고 수정사 등을 들 수 있다. 이 모두 고려의 대표적인 사찰로 조선 후기까지 그 영향력이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은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불교가 배척 당할 시기이며 더군다나 안동은 그런 유교 문화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고장이다. 이렇게 안동에서 불교 문화가 비교적 잘 보존된 이유는 아마도 지배층의 이념인 성리학이 하층민에게까지는 깊숙이 파고들지 못하였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성리학이 하층민에게까지 퍼졌다고 하더라도 지배 이념인 성리학이 종교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조선 말기는 물론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무속신앙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안동은 유교 문화권이기도 하지만 유교의 우위속에서 유·불이 공존하고 있는 문화권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안동 지방에 사찰이 많았던 만큼 지명에도 그 영향이 많이 남아있다. 영가지에 보면 읍성 북쪽에 법상사동이라는 곳이 나온다. 통일신라의 사찰인 법상사가 있었던 곳이라서 그렇게 불린다. 현재에도 법상동으로 불리우고 있으면 이외에도 법흥동·운흥동·관음절 등 많은 곳이 사찰에서 그 지명의 유래를 찾아.
    인문/어학| 2008.08.17| 6페이지| 1,500원| 조회(559)
    미리보기
  • 산업혁명
    산업혁명산업혁명은 18세기말부터 19세기 초 영국에서 일어난 공업화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것을 계기로 전 세계적으로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전환이 시작되었다. 이것으로 인류의 생산 능력이 크게 증대되었고, 인구증가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인구가 증가하면서도 평균적인 생활수준도 빠르게 향상되었다. 이렇게 인구증가와 생활수준 향상이 동시에 진행되는 과정을 '근대적 성장'이라고 한다. 근대적 성장은 생산기술 발전으로 가능하였다. 반대로 인구증가와 생활수준이 역관계가 성립할 때를 '멜더스의 세계'라고 한다. 영국 산업혁명으로 멜더스의 세계를 탈출하는 계기가 되었다.1. 멜더스의 세계와 근대적 경제성장의 세계일정 면적의 토지 위에서 일하는 사람 수가 증가할 때 생산량이 증가하지만 생산량 증가 속도가 차츰 느려지는 현상을 '수확 체감 법칙'이라고 한다. 수확 체감 법칙은 노동과 자본 투입의 증가 시 나타나는데 이렇게 수확 체감 법칙이 작용한다는 것은 토지 면적과 자본 사용량이 일정하고 이 위에서 일하는 사람 수가 늘어갈 때 한 사람당 생산물의 양(1인당 생산)이 감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 때문에 인구와 생활수준 사이에 역관계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기 어렵다. 인구 증가로 일정치 이상이 되면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약해지고 사망률이 증가하고 출산 능력이 떨어지므로 출산율이 감소해서 인구증가가 결국 중단되고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한다. 인구가 감소하면 생활 수준이 향상되고 사망률이 감소하고 출산율이 증가한다. 이처럼 인구가 적정 수준을 중심으로 증가와 감소의 사이클을 반복하는 현상을 '인구 순환'이라고 한다. 이러한 현상의 존재를 영국 경제학자 맬더스가 인구론을 출간하면서 널리 알려져 인구 순환이 지배하는 경제를 '맬더스적 세계'라고 한다. 20세기에도 계속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는데 기술발전이 그 원동력이다. 즉 같은 생산 요소를 투입하여 더 많은 생산량을 얻어내는 기술을 만든 것이다. 이렇게 인구증가와 생산성 향상에 따라 생활 수준 향상은 근대적 에서 발생하였다. 개인적 이익보다 공동체의 이익이 우선 돌아간 봉건제에서는 개발하고 찾으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공동 경작 제도가 사라지고 개인 농업 경영이 확산되면서 '인클로저'가 발생하였다. 이것은 영국농업혁명이 일어나기 위한 제도적 환경을 마련해 주었다. 개인토지를 한 곳에 집중시켜 주위에 울타리를 쳐서 소유 경계를 확실히 함으로써 배타적 권리를 확립했다. 그래서 종래 생산이 낮았던 늪지나 황무지도 개인 소유의 농토로 진화하였다. 즉 인클로저는 개간 활동을 자극해서 농경지를 확대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제 이 농토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적은 종류의 농산물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경영 즉 상업적 농업으로 바뀌는 '지역적 전문화'가 되었다. 상업적 농업으로 바뀌면서 자급자족 시절보다 농업부문 전체의 생산효율이 향상되었다. 참여계층으로는 요먼리(많은토지보유계층), 젠트리(중소지주,상인,변호사)가 적극 참여하여 규모를 확대시켰고, 일반농민들은 토지를 상실하여 농민층의 분해가 일어났다. 토지를 잃은 농민은 임금 노동자가 되어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가 형성되었다.3. 에너지 혁명16세기말까지는 석탄은 공업용으로 아주 제한 부분만 사용하거나 빈민층의 가정용 연료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인구증가로 인해 땔감 수요의 증가로 삼림 자원이 축소되자 목재 가격이 상승하였다. 5배 이상으로 오르자 태울 때 해로운 성분을 내뿜고 지저분하다는 석탄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고 석탄사용이 일반화되었다. 이렇게 석탄 이용의 확산으로 토지에 대한 인구 압력을 크게 경감시켰다. 즉 17세기 석탄의 광범위한 이용에 생활 물자를 토지에 의존하는 정도가 낮아지게 된 것을 말한다. 난방, 공산품, 건축 자제에 이르기까지 석탄이 나무를 대신하였다. 이와 같은 목재로부터 석탄으로의 연료 전환이 일어남으로서 갖는 경제적 의미를 살펴보겠다. 1톤의 석탄에서 얻을 수 있는 열량이 1에이커 규모의 숲이라고 한다. 즉 석탄을 사용함으로서 사용한 만큼의 에이커만큼의 경작지 확대 효과를 갖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숯과 노동력이 필요해 많은 철의 손실이 발생했다. 1780년대 코트가 교반법(선철을 코크스로 가열 죽 상태로 만들어 쇠막대기로 휘저어 탄소와 기타 불순물을 제거하는 방법)과 압연법(액체 상태의 철을 철제 롤러 사이로 통과시켜 그 속에 포함된 불순물을 짜내는 공정)을 발명함으로써 비로소 나무 대신 석탄을 연료로 사용해서 선철을 연철로 가공 할 수 있게 되었다.이런 제철업의 발명은 증기기관과 연결된다. 18세기 말 와트가 안전성과 효율성을 개선한 증기기관을 발명하면서 광범위하게 이용되었다. 증기기관의 송풍 동력으로서 수력을 대체함으로써 제철소는 수력을 이용하는 산악지역의 강가에 위치하지 않아도 되었고, 소비지로의 수송비가 절감되었다. 송풍 장치가 수력보다 강력하여 선철 제조 공정의 생산성도 향상되었다. 그에 제철의 생산성 증대에 기여하였다. 이렇게 선철 생산량이 18세기 후반 급속하게 증가하여 철 수입국에서 1812년 영국은 연철 순수출국이 되었다.면공업은 16세기 네덜란드, 벨기에에서 전파된 기술을 바탕으로 17,18세기 영국이 빠르게 성장하였다. 18세기 후반에 가속화되어 생산비중이 증대하였다. 이런 비약적 성장은 아크라이트의 수력 방적기, 하그리브스의 제니 방적기, 크럼프턴의 뮬 방적기와 같은 방적 기술 혁신에 주로 힘입은 것이었다. 이로 인해 방적 부문의 노동 생산성이 향상되었다. 이런 방적 기술의 발전은 18세기 전반에 면제품수요가 빠른 속도로 커져가고 있었으나 면사 공급이 이에 따르지 못하여 면사 가격이 점차로 상승하는 배경 하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1784년 카트라이트가 동력을 이용한 면포 생산 기술인 역직기를 발명했으나 초기 역직기의 기술적 결함과 보급 시 직업을 잃을 것을 두려워한 수공업자들이 역직기 보급에 저항을 하여 오랬 동안 거의 보급되지 못했다.5. 교통혁명17, 18세기의 농업의 지역 전문화와 영국 북서부의 빠른 공업 성장으로 인해 농공 분업 체계 형성으로 지역간 인구와 물자 이동량이 급속히 확대되었고 교통 운송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증가우선 에너지 혁명을 들수 있다. 영국 산업혁명을 가능케 했던 가장 핵심적인 발전 중 하나인 에너지 혁명은 영국에 석탄이 풍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18세기 중엽까지 영국과 대등한 수준의 경제발전을 이룩하였던 프랑스에서 최초의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중요한 원인은 석탄부족이다. 둘째로 17~8세기 영국의 과학은 실용적인 측면이 강했다. 영국의 이런 실용적 과학은 영국 과학자뿐만 아니라 산업혁명 과정에서 기술발전을 주로 담당했던 사람들에게도 스며들어 산업혁명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셋째는 1688년의 명예혁명으로 영국에서 근대적 의회 민주주의가 확립된 것을 들 수 있다. 시민혁명은 국왕의 자의적 조세 수탈을 사실상 금지시켰고 이는 민간의 저축 및 투자 동기, 기술발전 노력을 자극했다. 이것은 18세기 내내 계속된 프랑스와의 전쟁 수행에 따른 조세 부담 증가와 이에 대한 민간의 저항을 완화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혁명은 영국의 정치적 안정에 기여했고, 정치적 안정 속에서 기술발전과 자본 축적을 이룰 수 있었다.그렇다고 영국정부의 경제 정책이 경제 발전에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영국 정부의 정책은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하고 민간의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많았다. 그리고 특허법같은 제도가 있다고는 하지만 이것이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보았을 때 결코 나은 제도는 아니었다.7.산업혁명의 경제적 결과18세기 중엽에서 19세기 중엽의 한 세기 동안 인구증가와 1인당 생산이 동시에 증가하는 근대적 경제성장이 진행되었으며 인구와 1인당 생산 증가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영국 산업혁명기(1760~1830)의 1인당 생산 증가는 이후의 경제 성장에 비하면 상당히 느린 것이었다. 이는 후발 산업혁명기의 경제 성장에 비하면 더욱 느린 것이다.산업혁명기에 1인당 소득이 이렇게 더디게 증가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자본 축적(자본 투입 증가) 속도가 느렸던 데 있다. 어느 해에 생산된 재화를 모두 소비하지 않고 이중 일부를 저축해서 투자하면 다음해에 사용업 인구가 더욱 많아지게 되었다. 영국은 최초의 공업 국가가 된 것이다. 공업화의 원인은 18세기말에서 19세기초에 걸쳐서 거의 전 부분에서 생산 기술이 향상되었지만 공업이 농업보다 더 빨리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농업 생산력이 꾸준히 향상되고는 있었지만 공업의 생산성 향상에 비해서는 현저히 느렸다. 공업 부문의 생산성 향상은 결국 수익률이 향상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공업 생산 수익률의 증가는 노동이나 자본과 같은 생산 요소들이 농업을 떠나 공업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초래했으며 따라서 총생산에서 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증가시켰다.8.산업혁명의 사회적 결과영국의 산업혁명은 공장제도라는 새로운 생산 조직을 출현시켰다. 18세기까지 주요한 생산 형태는 가내 수공업이다. 가내 수공업은 소비재 산업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생산 조직이며, 이런 형태의 공업은 18세기 중엽까지도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으로 들어오면 초기 공장은 본격적 공장으로 발전했고 공장제도가 주요 생산조직으로 자리잡았다. 공장 제도의 발전원인은 첫째로 가내 수공업 체재에서는 대규모의 동력 기계이용이 불가능했고, 둘째로 선대제 아래에서 수공업자의 횡령이나 문제들이 빈번히 발생했기 때문이다.기계의 도입과 공장제의 발전은 숙련 노동을 단순노동으로 바꾸었으며 다른 직종, 다른 지역의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을 비슷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교통의 발달로 지역간 노동자의 이동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끼리의 접촉이 많아졌고, 결국 노동자 사이에서 동질감 또는 계급의식이 싹트게 된다. 노동자의 계층적 동질감이 증대되었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자신들과 다른 계층, 또는 계급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노동자들이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영국 노동자들의 이질적 느낌은 지주와 자본가를 향한 것이었다. 지주는 중세이래 전통적으로 가장 부유한 계층이며 영국을 정치적으로 오랫동안 지배해온 계층이다. 그리고 영국의 주요 정책은 지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반해 자본한다.
    인문/어학| 2008.08.17| 6페이지| 1,500원| 조회(295)
    미리보기
  • 사마광의 자치통감
    司馬光의 《自治通鑑》서론《資治通鑑》은 司馬光이 北宋 중기에 황제의 명령을 받아 편찬한 방대한 저작이다. 이 책에 포함되어 있는 시대는 周 위열왕 23(기원전 403)년으로부터 後周 세종 현덕 6(959)년에 이르기까지 1362년간이나 되고, 이 사이에 흥망한 왕조만 하여도 周·秦·漢·魏晉·隋唐·五代 등 16國이나 된다. 이 책이 이처럼 방대하기 때문에 사마광은 조수 劉恕·劉放·范祖禹 등을 선택하여 19년간이란 장구한 시간을 소비하여 편찬하였다.사마광은 공자 이래 直書, 是非褒貶의 역사관을 계승하고, 鑑戒精神을 선양하여 황제에게 통치의 자료 즉 중국사상 국가의 盛衰, 백성의 休戚을 총괄하여 제공하였다. 이 점에서 《자치통감》을 帝王의 교과서라고 한다.《자치통감》에 대한 평가는 매우 높아서 이에 대한 연구는 남송 이후 역대왕조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이어져오고 있다. 또 이책에는 국내 기록에는 없거나 없었던 한국고대사 관련기술이 군데군데 있어 역사학 전공자들에게 필독서로 꼽힌다고 한다. 그러므로 책의 저자를 비롯하여 전반적인 《자치통감》의 성립과 내용, 그 영향에 이르기까지 두루 고찰하고자 한다.1. 略傳사마광은 중국 북송의 인종·영종·신종·철종의 4대황제의 치세 때 활약한 관료정치가로서 자는 군실, 호는 우부·우수이다. 사망한 후 온국공에 봉해졌으므로 사마 온공이라고도 하며(소년시절 큰 물독에 빠진 아이를 그 둑을 깨서 구출한 일화는 물건보다도 사람의 생명을 존중한 그의 철학을 전하는 것으로 알려져 溫公이라 불린 연유가 됨), 산시성 사현 쑤수이향 출신이므로 속수선생이라고도 불린다.인종 보원초에 진사과에 급제하였으며 직비각·개봉부추관·수기거주·판예부의 관직을 역임했다. 얼마 후 동지간원이 되었다가 지제고로 승진했으나 사양하고 천장각대제로 옮겼다. 영종이 즉위하여 그를 한림학사로 발탁하였으며 사마광은 일찍이 역대사서가 번잡해 편람함을 알고 《通志》8권을 지어바쳤다. 영종은 크게 기뻐하며 서국을 설치해 계속 편찬할 것을 명했는데 책이 완성되기도 전에 당시 《자치통감》의 성립1) 편찬배경첫째, 사마광은 공자 이래의 경세사학의 전통을 이어받아 《자치통감》(통감이라고도 한다.)을 편찬하였다. 둘째, 북송 시대에 이루어진 대량의 편찬사업은 《자치통감》저작에 주요 배경이 되었다. 셋째, 당후기 이래 성행한 春秋學은 사마광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넷째, 사마광은 송대 역대황제의 적극적인 역사에 대한 관심과 저작에 관한 지원으로 《자치통감》을 저작하였다. 그 외에 과학기술 특히 활판 인쇄술의 발명으로 《자치통감》제작에 편리한 조건을 제시하였다.《통감》은 사마광의 조수로 당시의 석학이던 유서·유방·범조우, 檢字에 아들 사마강이, 수정작업에 황정견 등이 참여하였다.2) 편찬의도그가 통사 편찬을 마음먹은 것은 다음과 같은 까닭에서였다.1 종래의 사서는 방대할 뿐만 아니라, 그것은 대체로 왕조 단위의 단대사이며, 고대에서 5대에 이르는 역사의 흐름을 통람할 수 없다. 2 군주의 통치에 유익한 통사가 없다. 3 사대부는 역사를 배우려고 하지 않고, 또 그들이 읽기에 편리한 통사가 없다. 《자치통감》은 다스림(治)을 도와주는(資) 통감(通鑑) 이라는 책 이름이 뜻하는 바와 같이 첫 번째의 독자로 예상되었던 사람은 황제였으나 사대부에게도 열람이 허락되어 있었다. 바람직한 군신 관계를 사실에 의하여 추구한다는 것이 이 책의 일관된 주제이다.이렇듯 『통감』은 국가의 흥망성쇠와 백성이 휴척을 들추어 황제에게 제공하고, 이를 황제가 권계로 삼으며, 공자가『춘추』의 대의에 입각해 포폄의 법으로 혼란을 제거하고 정상궤도로 되돌리려 했던 것처럼 황제가 그런 태도를 구현할 것을 기대한 것이었다.3. 《자치통감》論1) 찬수원칙사마광은 황제의 기대에 부응하고 자신의 의도를 구현하고자 몇가지 원칙을 정해 찬수하였는데 이는 〈진통지표〉,〈진자치통감표〉 등에 보인다. 이를 종합하면 이와 같다.첫째, 《左傳》을 이었다. 《좌전》은 춘추경의 해설서로 魯의 隱公으로부터 哀公14년까지 242년간의 편년체 魯史이다. 사마광이 《춘추》를 잊지 않은 것은 공자를 존승한오호 북조의 황제는 某主 라 했다. 이 점에서 주자의 비판을 받았으나 사마광은 국가의 흥쇠, 백성의 휴척에 관련된 자료로부터 그 선악·득실을 판별하여 군주에게 감계로 삼게 하고 《춘추》의 포폄의 법으로 反正케 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찬수의도는 정통론과 배치된다.다섯째, 인물과 사물에 대하여 포용하는 원칙이었다. 사마광은 모든 것을 포괄하고 모든 생각은 일치시킨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미신적인 색채는 감소시켰다.이상과 같은 찬수원칙 하에서 그는 엄밀한 서술상의 범례를 정하였는데 그것이 《通鑑釋例》이다. 이것은 《사고전서》에 12例가 전수되어 있는데 근래에 36例가 전부 수록된 《통감석례》가 발견되었다. 이것을 《사고전서》의 12例와 비교할 때, 증가시킨 부분이 있으며 심지어 같지 않은 곳이 있어 신뢰도가 떨어진다. 그러나 이 자료는 《자치통감》의 체례, 취재, 행문의 원칙을 이해하고 사마광의 저술사상을 연구하는 데에 홀시할 수 없다.2) 서법중국의 옛 사가들은 용어의 규정과 사용법을 서법이라 했는데 《통감》의 서법을 기술하자면 첫째, 사건을 연쇄로서 파악한다. 들째, 부가 셋째, 삽화 넷째, 대조 등이 그 주요한 방법이다.먼저 첫째를 살펴보면, 《통감》은 단편적인 역사사실의 시간계기에 의한 나열이 아니라 각각의 사실은 그 위치가 떨어져 있어도 인과관계로 맺어져 있다. 사마광은 결과만을 기록하지 않고 왕조의 멸망, 개인의 파멸에 대한 원인을 추구한다. 특히 陳왕실의 멸망을 서술한 부분은 극히 상세하며, 後唐의 멸망에 대한 기술도 그 필연성을 조목조목 열거해가는 정밀함을 보인다.둘째 부가에 대해서 살펴보면 《통감》은 편년체이므로 그 기술은 시간의 순서에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의 사건을 총괄적으로 기술하기 위해 시간을 무시하고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든가 미래의 일을 앞당긴다든가 하여 해당사건에 접합시키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서법은 사건본위로서 시간을 축으로 하는 편년체와는 모순되는데, 원추의 기사본말체는 이 방법을 발전시킨 것일 것이다.셋째의있다는 발분저서설이 그것이다.{) 田中謙二, 白永瑞 譯, 〈자치통감의 이해〉,《중국의 역사인식》p.341.아울러 이 설을 주장한 田中氏는 객관적인 역사의 서술이고 중화주의의 표출이라고 《통감》의 문장을 극찬했다. 따라서 사마광은 통치에 통틀어 귀감이 될 만한 정치적 자료를 모아 숨기거나 미화없이 그 선악·득실을 판별해 통치자에게 제공한 것이다.3) 편찬방법연해처럼 많은 자료를 분석하여 장편을 작성하는 작업은 쉽지 않다. 그리하여 사마광은 자료수집-총목작성-장편-완성의 단계를 거치는 방법을 사용했다. 여기에 혹자는 조성편 , 광본 을 넣기도 한다. 즉 사마광의 조수들은 그의 지시를 따라 먼저 총목을 작성하고 다음으로 항목을 전후좌우로 일목요연하게 체계화하는 장편의 단계를 거친다. 그리고나서 마지막으로 사마광이 그가 정한 원칙과 의도에 따라 작성되었는지를 검토하여 취사를 결정하고 원고를 완성한다. 이 마지막 완성단계는 사마광이 담당하고 이 단계에서 《통감고이》가 정비되었을 것이며, 총목은 사마광이 지시에 따라 만든 것으로 이를 모으고 점검하여 《통감목록》30권이 작성되었던 것이다.아울러 조수들은 사마광과의 견해 차이에서 자신들의 저작도 내고 있다. 범조우의 《唐鑑》, 유서의 《通鑑外記》,《十國紀年》등이 《자치통감》의 부산물이다. 사마광과 그의 조수들은 마침내 《자치통감》294권을 찬수하였다. 사마광은 《통감석례》1권, 《통감고이》30권, 《통감목록》30권, 《통감학요록》80권, 《계고록》30권, 《역년도》5권을 찬수하여 명신의 면모를 내 보였다. 이러한 책들은 모두 《자치통감》과 함께 읽어봐야 할 것이다.4) 《통감》에서 채용한 사료감별방법《사략》권4의 기재를 보면 《통감》에 인용된 사료는 무릇 226종이라고 한다. 《문헌통고에 고사손의 《위략》을 인용해 《통감》은 정사 외에 잡사도 이용하였으며 인용서가 222종에 달한다고 했다. 지금 장수의 《통감학》을 보면 《통감고이》에서 착은 것이 332종이다. 그 중 정사류는 25종, 편년류는 29종이며 장력을 비롯한 연력정치적 수단을 약간 포함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權謀奇策의 도를 바탕으로 하여 나온 것은 비록 일시적인 효과를 얻을 수는 있지만 역시 교훈이 될 만한 것이라고 보지 않았다.6 무릇 군주가 비록 매우 현명하나 그가 행한 어떤 일이 善政에 방해가 되고, 그가 한 어떤 행동이 禍의 근원이 되었다면 반드시 그 잘못을 기록하여 질책하였다.7 비록 그 재주가 쓸모있고 일을 처리함이 족히 시국을 바로잡을 만하나, 그 사람됨이 名敎에 죄를 짓고 품행이 온전치 못하면 사마광은 필경 그를 칭찬하지 않았다.8 무릇 군주와 재상들의 행위 중에서 풍속을 두텁게 하고 교화를 이룬 것이 있으면, 사마광은 반드시 크게 칭찬하였으나 그들의 행위 중 예제를 무너뜨리고 經術을 위배한 바가 있으면 심히 유감으로 여겼다.6) ‘臣光曰’에 대하여《자치통감》에 실려있는 史論은 모두 218항목이다. 그 가운데 臣光曰 이 119항이고 앞사람의 것을 사마광이 동감하여 채용한 것이 99항목이다. 그는 한가지 일이라도 군주, 신하, 백성과 관련시켰다. 《통감》은 《좌전》의 ‘君子曰’로 시작하는 자유로운 비평형식을 모방하여 君臣에 관한 사적에 그 비판대상을 집중했다.‘신광왈’에 나타난 역사의식의 측면은 「易」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그는 역사가 인위적 노력으로 변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상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으나 또한 보수주의의 성향도 띄고 있다. 여기서 그는 수성의 군주의 충실함을 논하고 있다.《통감》의 중심적 주제인 군신의 의 또한 여기에 잘 나타나 있다. ‘신광왈’은 한마디로 「예」의 체계이다. 사마광은 〈名分論〉에 그것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즉 그는 군신관계를 禮로 파악하고 상하관계 유지를 주장하는 예지상주의자였다. 여기서 그는 황제가 用人의 공명, 관료와 군대의 기강 중시, 백성의 질고에 관심을 두며, 소수민족에 대하여 신의를 구현할 것을 제창하였다. 또 그는 이런 ‘忠’과 ‘節’, ‘分’만이 아니라 여기에 ‘隱’을 마련해두었다.‘隱’이란 자신의 재능이나 학문 또는 본심을 숨기는 것을 말하는데 믈었다.
    인문/어학| 2008.08.17| 8페이지| 1,500원| 조회(449)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8
8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1
  • A좋아요
    1
  • B괜찮아요
    5
  • C아쉬워요
    1
  • D별로예요
    0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4월 21일 화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1:34 오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