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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감상문]브레이브 하트(Brave heart)를 보고... 평가A+최고예요
    『브레이브 하트(Brave heart)』를 보고...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경, 하얼빈에서는 몇발의 총성이 울렸다. 바로 도마 안중근 선생이 이등박문에게 쏜 총알이었다. 당시 조선을 침략한 일제를 겨눈 의거였지만, 이등박문이나 일본 입장에서 안중근 의사는 테러리스트요, 그의 행동은 테러행위였다. 이런 상황의 논리를 알고도, 중동지역 무장단체들의 테러를 보고 ‘무슨 이유에서든 테러는 용서될 수 없다’고 할 것인가? 혹 그들의 입장에서 ‘오사마 빈 라덴’, 이나 ‘알 자르카위’가 민족적 영웅은 아닐까? 역사는 승리자의 것일 수 밖에 없음을 생각하며, 『브레이브 하트』를 보기 시작했다.『브레이브 하트』는 13세기 말, 스코틀랜드를 배경으로 영국군에 저항하던 스코틀랜드의 지도자 ‘윌리엄 월리스’라는 인물의 일생을 그리고 있다. 스코틀랜드는 당시 중세 세계에 영향력을 지배하고 있던 잉글랜드의 침입에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당시의 스코틀랜드는 중세 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일부 서유럽 국가의 변방에 위치한 국가로 상대적으로 그 힘이 미약하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영화를 통해서 바라보는 중세 사회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중세 사회의 이면이며, 비주류의 입장에서 새롭게 고찰해 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를 통해 ‘암흑의 시대’라는 중세의 이미지, 그리고 강자가 아닌 약자의 입장에서 바라 본 중세 세계에 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AD 1세기에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북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접경지역에 방벽을 쌓은 후, 스코틀랜드는 독자적인 역사를 걸어왔다. 노르만의 최후의 정복(1066년)이후 영국은 잉글랜드의 주도하에 수백 년에 걸친 정복과 항쟁 끝에 한 국가로 통합하게 된다. 영국의 통합을 이끈 잉글랜드의 입장에서는 이 과정이 ‘통합’의 과정이었겠지만, 스코틀랜드의 입장에서 보면 이 과정은 잉글랜드의 ‘침략’이었으며 잉글랜드에 맞서 국가를 지키려 한 항쟁의 역사이다.스코틀랜드는 11세기에 이르러 멜컴 2세가 스코틀랜드에 통일에 성공한 이후 자신들의 독자적인 왕국 역사를 펼치게 된다. 그러나 1057년 즉위한 멜컴 3세는 잉글랜드의 윌리엄 정복왕과의 전투에서 패해 그를 스코틀랜드의 종주왕으로 인정하게 되고, 이로써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에 예속된다. 이 때부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오랜 시간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침략하고 저항하는 고난의 과정을 겪게 된다. 스코틀랜드는 1138년 데이비드 1세가 잉글랜드의 왕실의 내분을 틈 타 다시 독립을 하게 되지만, 잉글랜드의 헨리 2세에게 또 다시 지배당하게 된다. 두 국가는 스코틀랜드의 왕 알렉산더와 헨리 3세의 누이가 결혼을 하면서 평온을 되찾는다.그러나 이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1292년 왕실의 혈통이 끊기고 유력자들간에 왕위 다툼이 벌어졌을 때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는 종주왕으로서의 권리를 내세워 존 드 베일리얼을 스코틀랜드의 통치자로 지명하고, 프랑스와의 전쟁 비용 조달을 위해 스코틀랜드에 끊임없이 물리적 요구를 한다.베일리얼은 에드워드로부터 스코틀랜드의 통치차로 지명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에 대한 충성을 거부한다. 1295년 에드워드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는데, 에드워드 1세는 이에 대한 응징으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여 베일리얼의 군대를 대파하게 된다. 이후 새로운 스코틀랜드의 저항군 지도자로 등장하는 것이 이 영화의 주인공 윌리엄 월리스(Willam Wallace)이다.이 영화 곳곳에는 당시 잉글랜드의 군주였던 롱생크 왕이 매우 사악하고 포악하며 탐욕에 찬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특히 그는 스코틀랜드를 자신의 땅으로 만들려는 야욕을 불태우는 데, 이 과정에서 스코틀랜드 인들에 대한 가혹한 수탈과 학살을 자행한다.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스코틀랜드 인들이 집단적으로 교수형에 처해진 장면은 그의 잔인함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윌리엄 월리스는 어린 시절 이 집단학살 장면을 목격한 이후 오랜 시간 고향을 떠나 유럽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가슴 깊은 곳에는 어린 시절에 목격한 학살 장면이 깊게 새겨져 잉글랜드에 대한 저항심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윌리엄 월리스가 잉글랜드에 본격적으로 대항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바로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 머론의 죽음이다. 당시, 롱생크 왕은 스코틀랜드 인을 자신들의 세계로 편입시키기 위해 ‘프리마 녹테’라는 제도를 부활시킨다. 프리마 녹테란 중세 장원의 소유주인 영주들이 자신의 장원에 속하는 농노를 혼인시킬 때 신랑을 대신하여 신부와 첫날밤을 치르는 권리로서, 결혼하는 세계 각지의 미개민족에서 볼 수 있는 습속이지만 중세 유럽에서도 영주(領主)가 농민의 결혼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행사했다. 이 제도를 통해 중세 시대 장원 제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데, 토지를 매개로 한 주종 관계에서 봉건 영주들은 농민의 생활을 속박하였다. 중세 사회는 어떤 한 개인이나 집단에 절대 권력이 있지 않고, 각 봉건 영주들이 그 힘을 나눠 갖고 있었다. 이렇게 권력과 힘이 분산된 사회에서 유일하게 확고한 질서 체계를 유지한 것이 바로 장원제였다고 볼 수 있다. 프리마 녹테는 봉권 영주들이 이 봉건 사회의 틀 속에서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고, 농민들에 대한 자신들의 권리를 표현하기 위한 상징적 제도였던 것 같다. 하지만 이 프리마 녹테는 매우 비도덕적이고 야만적인 행위이며, 원초적인 제도이다. 따라서 중세의 세계가 점차 와해되기 시작할 무렵에 부활한 프리마 녹테는 농민들에게 큰 반발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월리스는 이 프리마 녹테를 피하기 위해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머론과 몰래 결혼식을 올린다. 하지만 머론은 결국 영국군에 의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다. 이렇게 자신의 아버지에 이어 사랑하는 여인마저 영국군에게 목숨을 빼앗긴 월리스는 반란을 일으킨다.이 영화에서 포악한 군주인 롱생크 왕은 바로 당시 영국을 통치하던 에드워드 1세이다. 영화에서는 롱생크 왕이 매우 극악하게 그려지지만, 실제 잉글랜드의 역사에서 에드워드 1세는 유능한 국왕이었다고 한다. 그는 왕권의 신장, 국가기구의 정비 등에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였다. 우선 법제(法制)의 정비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발달해온 관습법을 체계적으로 정비하는 한편, 귀족의 세력을 견제하고 그들의 군사력을 약화시키는 법률을 많이 제정하였다. 영화에 그려진 왕의 모습이 모두 사실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잉글랜드 인들에게는 유능한 군주였던 인물이 스코틀랜드 인에게는 자유를 빼앗으려는 잔인한 폭군으로 비춰졌다는 점이 참 흥미롭다. 역사와 인물에 대한 평가는 우리가 어떤 위치에 서 있는가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월리스는 머론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단행하며 이 과정에서 스코틀랜드 인들을 모아 잉글랜드에 대항하는 험난한 싸움을 시작한다. 잉글랜드는 월등한 군사력을 앞세워 스코틀랜드를 침략하지만, 윌리엄이 이끄는 스코틀랜드의 군대가 결국 승리하게 된다. 이 때 펼쳐지는 스털링 지역의 전투 장면은 당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경제, 군사적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잉글랜드의 군대는 모두 말을 탄 기병대에 화살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스코틀랜드 군인들은 말은 커녕 변변한 갑옷도 없이 긴 창과 방패만으로 대항한다. 즉 당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힘과 권력의 측면에서 잉글랜드 쪽이 상당히 우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행히 월리스의 군사적 전략 덕택에 스코틀랜드 인들은 승리하지만 이것이 최종적인 승리는 아니었다.에드워드 1세는 군사를 재정비하여 폴커크 전투를 벌이게 되고, 이 전투에서 잉글랜드 군이 승리한다. 윌리엄 월리스는 이 전투의 패배로 잉글랜드에 포로로 잡히게 되고, 런던으로 보내져 공개 처형을 당한다. 월리스는 온 몸이 찢겨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자유를 부르짖는데, 자유를 향한 그의 저항 정신은 후에 배녹번 지역에서 벌어지는 잉글랜드와의 싸움에서 스코틀랜드 인들을 승리로 이끄는 데 구심점이 된다. 그의 육체는 비록 세상을 떠났을지라도 자유를 염원했던 그의 영혼은 후대에 이어져 결국 그의 조국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되찾도록 만드는 것이다.윌리엄 월리스라는 인물을 보면서, 오랜 역사 속에서 자유를 향한 인간 근원의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사실 이전까지만 해도 인류가 자유라는 개념을 접하게 된 것은 프랑스 혁명이 그 계기였다고 생각했다. 자유라는 것은 근대 사회에서 발달한 개념이며 그 이전의 사람들은 인간 본연의 생존적 욕구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었을 것이라는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프리덤(freedom)'을 외치는 월리스의 모습이 생소하게 느껴졌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세인들은 기독교적 세계관에 얽매여 오직 신과 인간의 관계 안에서만 삶의 의미를 찾았을 것이고, 따라서 그 1000년이라는 암흑의 시간동안 자유와 같은 개념이 등장하였을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사회에서 비 문명화된 사회였던 스코틀랜드, 그리고 그 땅에서 살았던 한 인물을 통해 그런 생각들이 얼마나 편협한 시각이었던가에 대해 생각하였다. 중세의 한 단면만을 보고 그것을 중세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혔던 것은 아닌지 영화를 보며 반성해 보았다.
    독후감/창작| 2006.06.08| 4페이지| 1,000원| 조회(1,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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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미소설]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Hard Times`를 읽고... 평가A+최고예요
    Charles Dickens 『Hard Times』를 읽고...“...... 선생님. 그 꼴들은 매우 아름답고 유쾌한 것의 그림일 뿐이에요. 게다가 제가 상상하기에는…”“오, 이런, 이런! 상상을 해서는 안 돼.” 신사는 다행히 요점에 들어가게 돼서 몹시 기뻐하며 말했다. “그게 중요한 점이지! 상상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거야.“씨실리아 주프, 조금이라도 그따위 일을 하면 안 돼.” 토마스 그래드그라인드가 다시 엄숙하게 말했다.“사실, 사실, 사실만을!”이라고 신사가 말했고 토마스 그래드그라인드는 “사실, 사실, 사실만을!”이라고 반복했다.“모든 명에서 사실이 자네를 통제하고 지배해야 하는 거다.” 신사가 말했다. “우리는 사람을 사실의 사실만의 인간으로 만들 사실의 위원으로 구성된 사실위원회를 조만간에 갖기를 희망한다. 상상이란 단어를 완전히 버리도록. 상상과 자네는 아무 관계도 없으니까. 사용할 물건이든 장식할 물건이든 사실과 상충하는 것은 무엇이든 간직하면 못써. 꽃위를 실제 걷지는 않으니까 카페트에 그려진 꽃도 밟게 할 수 없는 거다. 다른 나라의 새나 나비가 네 도자기에 날아와 앉지는 않으니까 외국 새나 나비를 도자기에 그려서도 안 되는 거다. 네발 짐승이 벽 위를 기어다니지는 않으니까 벽 위에 네발짐승을 그려서도 곤란한 것이다. ......”공리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인 그래드그란드의 교육에 대한 생각을 나타내주는 부분이다. 그는 교육뿐만이 아니라 모든 방면에서 “사실”만을 강조한다. 수치로 계산되지 않는 사실은 무가치한 것이라고 자신의 자식들에게도 강조한다. 공리주의에서 강조하는 ‘합리성’이란 자본주의의 경제적 합리성에 부응하는 것이고 아동의 인격적 성장보다 산업체계가 요구하는 지식 주입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과도 상응한다. 학생에 대한 그래드그란드의 태도는 공장노동자의 대한 바운더비의 태도와 동일한테 이들은 학생이나 노동자를 독자적인 인격체로 대접하지 않는다. 사물에 대해 기계적인 사실의 암기만을 강요하는 교육인 산업현장과 생활현장의 획일성?구칙상?노동의 소외, 그 결과로서 노동자의 불구화?부품화의 표리상응의 관계를 지니는 것이다. 이러한 틀에 갖힌 교육방식이 ‘곡마단’에서 살아 말(horse)에 대해 누구보다 잘아는 ‘씨시 주프’가 누구보다 말에 대해 모르는 아이가 되는 것이다.그러나 공리주의의 대표자에 해당하는 그래드그란드를 디킨즈가 무조건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드그란드는 사기꾼에 불과한 바운더비에 비하면 훨씬 훌륭할뿐더러 “그의 성격에 균형을 잡아준 산술에서 오래전에 상당한 실수를 범하기만 했다면, 정말로 친절한 사람이 됐을 수도 있”는 인물로 제시된다. 그래드그란드으 공리주의 역시 “진지하게 간직하고 있는 이론이며 그 적용에 지적인 공정함”이 있는 이론인 것이다. 그렇다면 디킨즈의 공리주의 비판은 그래드 그라인드의 어떤 측명을 통해 공리주의의 장점은 인정할 만큼 인정하면서 가하는 비판이므로 더욱 무게있는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작가는 작품속에서 곡마단을 가장 긍정적인 집단으로 묘사하고 있다."그러나 이 사람들에게는 주목할 만한 온유함과 어린애 같은 면이 있었고, 어떠한 종류든 교활한 일에는 특별히 부적합한 면이 있었으며 서로서로 돕고 동정하는데 지치지 않는 준비성이 있었다. 이것은 이 세상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나날의 덕성들만큼이나 종종 존경을 받을 만한 것이고 또 언제나 관대하게 해석할 만한 것이다.““비록 그들의 집안은 전혀 정돈되어 있지 않았고, 사복 차림을 때는 그리 단정해 보이지 않고 학식이 다 합해 보아야 겨우 초라한 글자 하나 나올 뿐”이더라도 그들이 순수성, 남을 위한 배려 등은 존경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에게선 산업주의가 몰고 온 폐해를 찾아 볼 수 없다. 기계적인 생각에 의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인간이 아닌 사람냄새가 풍기는 그런 인간적인 조직이다. 이러한 조직 속에서 자란 Sissy의 모습이 어린애다운 건강함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다.『어려운 시절』에서 가장 눈에 띄는 노동자는 ‘스티븐 블랙풀’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불행은 산업현장과 무관하게 개인적인 환경(주정뱅이 부인)의 탓이다. 그래서 이 작품이 당시의 노동문제의 핵심에 접근하기는 처음부터 상당히 어렵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스티븐이 밀고자가 되기를 요구하는 바운더비에 맞서 끝까지 노동자 편에 서는 모습이나, ‘레이챌’과 동지적 애정을 유지하는 측면은 그의 훌륭한 자질을 보여준다. 남녀 노동자가 친하다는 사실을 성적인 방탕과 동일시하던 지배계급의 편견을 극복하고, 억압받는 민중 사이에서만 가능한 동지적 유대를 디킨즈의 민중성은 놓치지 않고 섬세하게 포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독후감/창작| 2006.06.08| 3페이지| 1,000원| 조회(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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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양고전]제자백가
    1.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 사회사상개관춘추전국시대는 중국역사상 가장 깊고 크게 사회전반이 변동했던 시기였다.혈연을 바탕으로 삼았던 주(周)나라의 사회조직과 제도와 이념과 규범이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정착하지 못한 과도기적 상황에서 영웅호걸들과 제자백가가 등장하여 각자 자기나름의 이상을 가지고 사회를 바꾸어 보고자 하였다.관중은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갖가지 기존제도들을 개혁하고 상과 벌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백성들의 생산력을 증진함으로써 부강한 나라를 만들려고 하였다.이에 대하여 공자는 법과 형과 같은 강제적 수단으로 다스리는 것을 반대하고 인(仁)한 사람이 사회를 주도하여 백성들이 넉넉하고 고르게 잘 살면서 윤리도덕이 지배하는 도덕적인 사회를 이룩하고자 하였다.묵자는 천하의 이(利)를 증진하고 해(害)를 제거하여 서로 돕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이상시하였다. 이러한 사회를 이룩하려면 서로 사랑하고 이롭게 하여 살아기를 바라는 하늘의 뜻[天志]에 따라 통치자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현자들이 적극적으로 힘과 지혜를 발휘하여 활동해야 한다.상앙은 관중처럼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제도와 사람들을 밀어 내고 국력을 효율적으로 증진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 천하를 제패할 수 있는 부강한 나라를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농전(農戰)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이 사회를 주도하고 국가의 토지와 관작과 권력을 국가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보상으로 주어야 한다. 이러한 상앙의 정책은 전형적인 패도정치의 노선이라고 할 수 있다.이에 대하여 맹자는 패도가 아니라 왕도를 추구하였다. 그는 인간들에 의하여 일으켜진 사회문제들을 해결하려면 그 무엇보다도 인화(人和)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인화를 이룩하려면 백성들과 희노애락을 같이 할 수 있는 마음에 의거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러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바로 남에게 차마 잔인할 수 없는 마음, 즉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이다. 맹자는 이러한 마음에 근거하여 사회문제들을 해결코자 하였다.장자이렇게 광의로 확장된 효와 박애는 사람이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사라의 합리적인 터전이 되었다.『논어』에는 효 및 박애와 유사한 두 개의 개념이 설명되었는데, 그것은 ‘충(忠)’과 ‘이타(利他)’이다. 충은 사람이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 정직할 때의 심리 상태를 말한다. 중국 한문자에서 충이란 가운데 ‘中’자와 마음 ‘心’자로 구성되어 있다. 마음이 똑바로 중앙에 있다면 사람은 타인에게 동정적이 됨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자의 말에 의하면 ‘인을 행하는 사람이란 자기 자신을 보신하기 위하여 타인도 보신하고, 자기 자신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타인도 발전시키는 사람’이라 한다.중국 문자에서 이타란 ‘자기 마음과 같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즉 나에게 자기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뜻이다. 이타의 의의에 대하여 공자는 “너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은 타인에게도 행하지 말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인을 행하는 소극적인 방법이다. 충이나 이타의 개념은 효나 박애의 개념과 유사한 것인데, 다만 효나 박애가 주로 가족간의 관례를 말하는 데 비하여 충이나 이타는 더 광범한, 또한 덜 특정한 의미를 자지고 있다. 그러나 어느 경우나 모두 문제되는 것은 진실되고, 이기적이 아닌 사랑의 지배적인 마음의 상태인 것이다.인의 원리는 중국 문화의 계승과 중국의 국가적 조속이라는 점에서 볼 때 중요한 요소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인의 원리는 그것을 극복할 만한 영향력을 가진 사상 체계와 맞서 본 적이 없다. 인의 원리에서 말하는 정의와 공정, 또는 관용의 정신과 우애같은 교훈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적절한 것이며, 비단 중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대하여도 타당한 것이다.② 맹자(孟子)이름은 가(軻)로, 그 정확한 출생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기원전 372년에 공자의 고향에서 가까운 추읍(鄒邑)에서 태어나 기원전 289년에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정설이다. 기원전 4세기 전반에 태어나 3세기 초까지 활동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정치적, 군사적으로 패망의 길을 걸어야 했던 사람들의 거주지에서 생겨난 사상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또한 {논어}에 가끔 등장하는 은자(隱者)들의 인생관을 대변하는 사상으로 보기도 한다. 춘추전국 시대의 혼란에 실망을 느끼거나 패배하고 좌절한 사람들이 세속을 멀리하고 소극적인 인생관을 지니게 된 것에서 노자 사상의 연원을 찾는 셈이다. 그러나 노자 사상의 연원을 어느 하나로 소급하여 단정하기는 힘든 것이 사실이다.노자는 천신(天神)을 부정하고, 천(天)이 도덕의 근원을 부여한다고 하는 전통적인 사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만물생성의 근원을 도(道)라 불렀는데, 이 도(道)는 기존의 도(道), 즉 항상 인간이 지켜야 할 도덕으로서의 개념과는 다른 것으로, 우주 자체의 질서를 유지시켜주는 이법(理法)이다. 본래 천지생성의 근원은 말로써 설명할 수 없는 현묘한 것인데, 이를 굳이 이름붙이자면 도(道)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도(道)는 무(無), 즉 기존의 '공허'개념과는 다른, '현상적이고 상대적인 성격을 가지지 않는다'는 의미의 무(無)이기도 하다. 매우 난해한 이야기지만, 그의 도(道)는 '도(道)'로서 파악되는 순간 이미 도(道)가 아니며, 그가 말하는 무(無) 역시 유(有)의 반대로서의 무(無)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유(有)를 포함하는 무(無)가 노자가 생각하는 무(無)의 개념이다. 노자가 말하는 무는 아무 것도 없음을 가리키는 절대적이고 존재론적인 무라기보다는, 텅 비우는 것으로서의 무, 억지로 함이 없는 무를 뜻한다. 또한 노자가 말하는 무는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 즉 억지로 하지 않음으로써 하지 않음이 없는 무이기도 하다. 예컨대 수레바퀴에는 텅 빈 바퀴 구멍이 있어야 비로소 그 가운데 축을 넣어 수레가 수레 역할을 할 수 있다. 노자는 더 나아가 천하의 만물이 유에서 생기고, 유는 무에서 비롯되었다고까지 한다. 하늘과 땅이 텅 비어 있음으로써 비로소 그 사이에 만물이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이다.보존하여 너그러이 놓아둔다는 말은 들었어도 천하를 다스린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있는 그대로를 보존하는 것은 천하 백성의 본성이 음란해질까 두려워서이고, 너그러이 놓아두는 것은 천하의 백성이 그 본래 타고난 덕을 바꿀까 두려워서이다. 천하 백성의 본성이 음란하지도, 타고난 덕을 바꾸지도 아니했는데, 그럼에도 천하를 다스리는 자가 있어야 할까?"다스린다는 것, 즉 정치는 결국 획일적인 법률, 제도, 도덕률 등을 개인에게 강요하는 일이다. 그렇게 강요함으로써 각자의 타고난 본성을 헤치게 되고 결국 인간은 불행해진다. 획일적인 기준으로 다양성과 고유성의 차이를 없애버리려는 인위적인 노력이야말로 비극과 불행의 원인이다.(3) 법가(法家)- 중국 역사상 '법(法)'은 춘추시대까지만 해도 예(禮)를 보완하는 것으로서 기능하여, 양자 사이에 커다란 대립은 없었다. 그러나 전국시대의 급격한 사회변동을 겪으면서 법은 예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법가들은 대체로 실제적인 정치가로서 내외 정세를 법에 의한 정치로 대처하고자 하는 시도를 했던 인물들이었다. 그러한 그들의 기본토대는 순자(荀子)의 성악설(性惡說)이었다. 제(齊) 환공(桓公)을 도와 패업을 이룬 관중(管仲)이나, '형서(刑書)'를 만듦으로써 실정법을 공포한 정(鄭)의 자산(子産) 등에서부터, '법치(法治)'를 내세워 위(魏)에서 변법을 시행한 것으로 유명한 이회(李회), 신료들을 통제?제어하는 '술(術)'을 강조한 한(韓)의 신불해(申不害), 그리고 신하가 군주에 복종하는 것은 군주의 세력이지 결코 그의 덕행이나 재능때문이 아니라고 하여 '세(勢)'를 강조한 신도(愼到), 그리고 진(秦) 효공(孝公)을 도와 2차 걸친 강력한 개혁을 단행하여 이후 진(秦)의 통일기반을 제공한 상앙(商?) 역시 법가(法家)로 유명한 인물들이었다.① 한비자(韓非子)한(韓)나라의 공자인 한비(韓非:?-233 B.C)는 진시황제 밑에서 재상을 지낸 이사(李斯)와 함께 순자의 제자였다. 한비는 순자의 성악설에 기반을 두면서도 성는 것은 물론, 강자의 침략을 실제로 막아내려는 실천에 힘썼다. 각지에서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을 조직화하여, 일사불란하게 침략 전쟁을 막아냈던 것이다. 묵적을 추종하는 묵협 집단은 성곽의 축조, 수리, 방위 설비와 무기 제작, 실제의 전투 및 구호 활동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강력한 전사(戰士) 집단이었다. 때문에 묵적의 출신 성분을 몰락 귀족의 후예로서 전문적인 기술인, 즉 공장(工匠)으로 추정하기도 한다.『묵자』에서 '현자를 숭상하라'는 주장이 담긴 상현론(尙賢論) 부분은 전국 시대 말기에 가필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되기에, 그 전부가 묵적 자신의 주장이라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묵적의 겸애설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묵적 사상의 발전 내지는 계승으로 볼 수 있다. 상현론은 인재 등용에서의 겸애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 서민, 심지어 노예라 할지라도 그 능력이 뛰어나다면 관리로 등용해야 마땅하며, 심지어 군주의 자리까지도 그러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시의 계급 체계를 뛰어넘는 혁명적인 발언이었고, 이에 따라 나중에 순자는 묵적의 가르침을 평하여 '역부지도'(役夫之道), 즉 노동자나 하층민의 도라고 말하기도 했다.묵적은 하늘을 모든 것을 주재하는 인격적인 존재로 규정한다. 사람들이 서로 겸애하면 하늘이 복을 내리지만 다투면 벌을 내린다는 식이다. 요컨대 하늘의 뜻(天志)을 무척이나 중시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전통적인 천 관념과 별로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러나 분명 다르다. 우선 묵적이 설정한 하늘의 역할은 봉건 질서 유지의 정당화 논리에 가까운 전통적인 천 관념과는 달리, 신분적, 사회적 평등성을 뒷받침하는데 있다. 또한 묵적은 부귀영화, 길흉화복이 모두 하늘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는 숙명론적인 천 관념을 거부했다. 묵적은 사람의 의지와 노력에 따라 운명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보았고, 그렇게 노력하는 자에게 상을 내리는 것이 바로 하늘이라고 보았다.묵적은 예에 바탕을 둔 공자의 문화주의가 형식주의로 흐를 수 있다는 점을 인식했다. 이에 따깝다.
    인문/어학| 2006.06.08| 13페이지| 1,000원| 조회(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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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속]한국문화 속의 용(龍)
    한국문화의 이해1. 용(龍)고대 중국인이 상상한 전설속의 동물이다. 뱀이 덕을 쌓고 오래 살으면 이무기가 되는데 여기서 덕을 더 쌓으면 용이 된다고 한다. 용은 기린, 봉황, 거북과 더불어 四靈이라 불려온 상상의 동물이다. 광아(廣雅) 익조(翼條)에 용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묘사해 놓았다. "용은 인충(鱗蟲)중의 우두머리이며 그 모양은 다른 짐승들과 아홉가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즉, 낙타(駝)의 머리, 사슴(鹿)의 뿔, 토끼(兎)의 눈, 소(牛)의 귀, 뱀(蛇)을 닮은 목덜미, 조개(蜃)와 같은 배, 잉어(鯉)의 비늘, 호랑이(虎)의 발, 매(鷹)의 발톱이다. 그 중에서 9×9 양수인 81개의 비늘이 있고, 그 소리는 구리로 만든 쟁반을 울리는 듯 하고, 입 주위에는 긴 수염이 있고, 턱 밑에는 명주(明珠. 여의주)가 있고, 목 아래에는 꺼꾸로 박힌 비늘(逆鱗)이 있으며, 머리 위에는 박산(博山)이 있다."또, 용의 턱 아래에 거슬러 난 비늘을 역린(逆鱗)이라고 하는데, 이것에 손을 대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그 사람을 죽인다고 한다.어느 문헌에는 용에게는 귀가 없기에 뿔이 귀를 대신하다고도 한다.특히 용은 물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관자(菅子) 수지편(水地編)을 보면 "용은 물에서 낳으며, 그 색깔은 오색을 마음대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 신이다."라고 적고 있다. 또한 용왕은 바다의 왕으로써 수계(水界)를 다스리는 신이기도 하고, 비 와 바람을 주재한다.물론 종류에 따라 달라서 불을 주관하는 화룡이 등장하기도 한다. 용이 가지고 있는 여의주는 일명 야광주(夜光珠)로서 달과 그 관련이 있다. 용은 이 여의주로써 비를 다스리고 바람을 조종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 여의주가 없으면 용은 그 권능을 발휘 할수가 없다.민간 설화에서는 용은 이지러진 달로서 여의주를 삼키고 머지않아 차게 될때에는 달로서 내뱉는다고 전해지고 있다.'미르'는 용의 옛말로 순수한 우리말이다.2. 용(龍)의 종류교룡(蛟龍)- 에 교룡은 용의 새끼로 모양이 뱀과 같고 길이가 한 발(10 이 이룡은 자연에 해를 끼치는 용이라고 할수 있다. 어느 자료에는 붉은색의 호랑이 형상을 하고 비늘을 가진 용이라고도 한다. '에밀레박물관에 이룡의 돌조각이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규룡(叫龍)- 에 뿔이 있는 용으로 되어 있고, 다른 자료에는 반대로 뿔이 없는 용을 규룡이라고 한다는 곳도 있다. 또한 빛이 붉고 뿔이 돋혔다는 용의 새끼를 말하기도 한다. 또한, 일명 두우(斗牛)라고 하며, 형상은 이룡과 비슷하나 소처럼 두 개의 뿔이 있고, 물을 좋아한다고 한다.응룡(應龍)- 응룡은 한마디로 전설적인 해태감독(^^) 이름이지만, 여기서는 비룡(飛龍)을 말한다. 에 하늘을 날고 비를 내리게 하는 용으로 나타나 있다. 중국신화를 보면 황제와 치우의 전쟁 때, 치우가 용을 무서워해서 황제가 응룡의 도움을 받아 치우와 과보를 물리친다. 그 이후로 응룡은 하늘을 오르지 못했는데 날이 가물때에는 응룡의 형상을 만들면 큰 비가 왔다고 전해진다.반룡(蟠龍)- 에 하늘에 올라가기 전에 땅에 서리고 있는 용이라고 하였다. 한마디로 아직 승천하지 못한 용을 가리키고 있다.잠룡(蠶龍)- 숨어 있어 아직 하늘에 오르기 전의 용을 말한다.신(蜃) : 이무기 신- 교룡의 일종으로 기운을 토하여 신기루를 일으킨다고 한다.이무기- 용이 되려다 못되고 물속에 산다는 큰 구렁이. 천년을 기다려야 용이 될 기회를 얻는다고 한다.촉룡(燭龍)- 에 나타나기를 "촉룡은 중국 종산의 신이다. 이 신이 눈을 뜨면 낮이 되고 눈을 감으면 밤이 되고, 입으로 입김을 세게 불면 겨울이 되고 숨을 들이 마시면 여름이 된다. 마시지 않고, 먹지 않으며, 숨쉬지 않는데 숨을 쉬면 바람이 된다. 몸의 길이가 천리나 되며, 그 형체가 사람의 얼굴에 뱀의 몸을 하고 붉은 빛이며, 종산의 아래에서 산다. 촉음(燭陰)이라고 불린다." 고 나온다. 또한 종산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고(鼓)라는 사람의 얼굴에 용의 몸을 한 신령도 나타난다.뇌신(雷神)- 에 뇌택 가운데에는 뇌신이 있는데 용의 몸에 사람의 머리를 하고 자신의 배를 火龍), 싸우기를 좋아하는 석룡(석龍), 울기를 좋아하는 명룡(鳴龍)이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3. 용(龍)의 상징(1) 풍습에 나타난 용의 상징▶ 임금용은 사령(四靈)중의 하나로 그 권위와 조화에 초능력을 지닌 상상적 동물이다. 이규보는『동국이상국집』에서 "용이 기운을 토하여 구름을 만들었으므로 구름도 영괴(靈怪)하고, 용은 그 구름을 탐으로써 신묘함을 부린다." 고 하였다.이러한 용은 그 권위로써 임금을 나타내었다.임금의 얼굴ː용안(龍顔)임금의 평상ː용상(龍床)임금의 옷 ː곤룡포(袞龍袍)임금의 즉위ː용비(龍飛) -『용비어천가』의 제목은 그뜻이다.▶ 천지 조화용은 뭇 동물이 가진 최상의 무기를 모두 갖추고 있으며, 구름과 비를 만들고 땅(바다, 강 등)과 하늘에서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로 믿어져 왔다. 작아지고자 하면 번데기처럼 작아지고, 커지고자 하면 천하를 덮을 수 있을 만큼 커질 수 있으며, 높이 오르고자 하면 구름 위에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믿었다.용은 대체로, 짙은 안개와 비를 동반하면서 구름에 싸여 움직인다. 바다 또는 연못등에서 하늘로 오르내릴 때에는 하늘과 땅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안개와 구름의 공간이 형성된다.그러나 용이 승천할 수 있고 온갖 조화를 부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의주(如意珠)를 얻어야 한다. 만일 여의주를 얻지 못하면 이무기고 남아, 여의주를 얻어 용이 될 때까지 기다린다고 한다.▶ 악역-이무기이무기는 용이 되기 위해 기다리는, 용이 되려다 못 된,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깊은 물속에서 사는 큰 구렁이로 상상되어 왔다. 그런데 용이 못 되고 오랫동안 이무기로 남게 되면, 심술만 남아 인간에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되었다.우리 나라의 전통 인형극『꼭두각시』의 이시미(이무기의 방언)와『동래야유』,『통영 오광대』, 등의 영노는 독특한 뱀의 형태를 지니고 사람이나 짐승을 함부로 잡아 먹는 역할을 하고 있다. 『못된 이무기 같다』는 속언은 심술 사나운 못된 사람을 이무기에 빗대어 하는 말이다.▶ 신이한 영물상상의 동물인 용의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신사임당은 용꿈을 꾸고서 이이(李珥)를 잉태했다고 한다.(2) 신화에 나타난 용의 상징▶ 물의 신용은 못이나 강, 바다와 같은 물속에 살며, 비나 바람을 일으키거나 몰고 다닌다고 여겨져 왔다. 용은 물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따라서, 용은 물의 신이면서 우사(雨師)의 성격도 지닌다.용과 물의 상관성은 전국 도처의『용정(龍井)?용호(龍湖)?용지(龍池)?용추(龍湫)?용담(龍潭)?용소(龍沼)?용강(龍江)』등의 지명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또, 용을 위한 제사 장소가 모두 물가라는 점도 용의 수신(水神) 성격을 방증해 준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가뭄이 계속될 때,『용정?용담?용연?용지?용추』등에 기우(祈雨)했다는 많은 사례가 있다.『삼국사기』에는 "용 2마리가 금성 우물 속에 나타났는데, 소낙비가 쏟아지고 번개가 치며, 성 남문에 벼락이 떨어졌다." 는 기록이 있다. 또, 서해 용왕의 아들 이목(璃目)이, 몹시 가물때, 보양선사(寶壤禪師)의 청으로 재멋대로 비를 내렸다가 하느님(天帝)의 노여움을 샀다는 이야기가 있다.농경 문화권과 용 신앙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우리 민족도 일찍이 용 신앙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단군신화에, 환웅이 태백산 꼭대기에 강림할 때 동반했던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도 용의 의인화로 보인다.▶ 시조의 어버이신화 속에서는 수신인 용과의 혼인이 많이 나타난다. 이들은 이른바 이류교혼(異類交婚)이라 할 수 있는데, 국조(國祖)나 군주, 씨족조(氏族祖)등 귀인의 어버이로 나타난다.신라의 석탈해는 용성국(龍城國) 왕과 적녀국(積女國) 왕녀간의 소생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작제건(作帝建)과 용녀(龍女)의 소생인 용건(龍建)의 아들이다. 고려 왕씨는 용종(龍種)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백제 무왕(武王)인 서동(薯童)은 그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지변(南池邊)에서 살던 중, 그 연못의 지룡(池龍)과 교통하여 출생하였다. 후백제 시조 견훤(甄萱)은 광주(光州) 북촌의 부잣집 딸이 지렁이돠 교혼하언하였다.▶ 제왕천후(天侯)의 다스림이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농경 문화권에서 군왕과 용은 자연스럽게 결합되었다. 양자 간의 동질감이 더욱 확대됨에 따라 군왕과 관련되는 사물이나 비범한 인물에게까지 용은 상징적으로 작용하였다.『삼국사기』에 "흑룡이 한강(漢江)에 나타났는데, 잠깐 동안에 구름과 안개가 끼여 캄캄하더니, 날아가 버렸다. 이어 왕이 죽었다."는 기록은 용이 왕과 결부된 예이다.여기서 흑룡이 왕의 죽음의 전조(前兆)가 되는 것은, 검은색이 북방 및 암흑 등과 아울러 상복(喪服)을 나타내는 상징성 때문일 것이다.『삼국사기』열전 궁예(弓裔)조에, 왕창근(王昌瑾)이 한 백발 노인에게서 옛 거울을 하나 샀다. 그 거울 속에, "사년(巳年)중에 두용이 나타날 텐데, 한 용은 청목(靑木:松岳)속에 몸을 숨기고 다른 용은 흑금(黑金:鐵原)의 동쪽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다.이 참언(讖言)속에 두 용은 고려 태조와 태봉왕 궁예를 가리킨 것이다.『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는 하느님(天帝)의 아들 해모수가 하늘에서 지상으로 하강할때, '5마리의 용이 끄는 수레(五龍車)'를 타고 왔다고 했다.이 용은 제왕 자체를 가리킨 것은 아니나, '제왕=용'의 관념이 왕의 부속물에까지 확대한 예이다.조선의 국조 신화가 담겨져 있는『용비어천가』 제1장에는 건국하기까지의 여섯 선조를 '해동육룡(海東六龍)'으로 표현했다.(3) 무속?민속에 나타난 용의 상징▶ 벽사?수신용은 민간신앙에서 비를 가져오는 우사(雨師)이고, 물을 관장하고 지배하는 수신이며, 사귀를 물리치고 복을 가져다 주는 벽사(벽邪)의 선신(善神)으로 섬겨져, 용신제, 용왕굿 등이 행해졌다. 이러한 신앙 대상으로서의 용은 바다, 강, 연못 등의 물을 지배하는 수신으로 숭앙되고 있다. 농경 민족인 우리에게 물은 생명처럼 소중하므로, 가뭄이 심할 때에는 용에게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또, 어로를 생업으로 삼고 있는 어촌에서는 아직도 용왕굿이나 용왕제 등을 지내면서 배의 무사고와 풍어, 마을여
    인문/어학| 2006.06.08| 8페이지| 1,000원| 조회(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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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양고전]맹자의 현대적 의의
    1. 서론(序論)얼마 전 김경일인가 하는 사람이 공자(孔子)와 맹자(孟子)로 대표되는 유교(儒敎)의 ‘허세주의’가 대한민국의 경제위기(IMF)를 초래했다며,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발간되어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조금만 과장해서 표현한다면 대한민국의 갖가지 병폐와 모순은 모두 공자와 맹자가 손을 잡고 저지른 짓이라는 것이다. 이 말에 많은 이들이 동의하였고 또 전혀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만, ‘잘되면 자신의 덕이요 잘못되면 조상 탓’라는 속담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그렇다면 공무원이 뇌물을 받아먹고 정치인들이 각종 비리를 저지르며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국회의원이 여기자를 성추행하는 모든 것이 다 그들의 탓이란 말인가. 2500여 년 전의 공자와 맹자가 자신들이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동쪽의 작은 나라에서 자신들이 주장했던 것을 딱 정반대로 해놓고 이런한 일들의 책임을 자신에게 뒤집어 씌우고 있다는 걸 알면 얼마나 억울할 것이가.이런저런 생각에 미치자 공맹(孔孟)의 사상이 과연 ‘이 사회를 망쳤냐‘ 보다는, 과연 이 사회에 어떤 의의가 있는지 그 쓸모가 궁금해졌다. 과연 공맹의 사상은 현대에는 불필요한 것일까. 그냥 삼국지나 서유기 따위의 중국 고전류의 읽을거리일 뿐인가. 이 점에 대해 조금 생각해 보도록 하자.2. 시대적 배경.(1)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춘추전국시대란 동주시대(東周時代)의 다른 이름이다. BC 770~476년은 공자가 편찬한 노(魯)나라의 편년체 사서 (춘추 春秋)의 이름을 따서 춘추시대라 하고, BC 475~221년은 대국들이 패자의 자리를 놓고 다투었으므로 전국시대(戰國時代)라고 한다.(2) 전국시대(戰國時代)춘추시대 초기에 200여 개가 되던 제후국은 말기에 이르러 10여 개국으로 감소했다. 각 제후국 내에서는 실력을 키운 일부 세경(世卿)이 독자적인 가계(家系)를 형성했다. BC 5세기말경 제에서는 진항(陳恒)이 간공(簡公)을 살해하고 실권을 장악했으며, 진(晉)에서는 한(韓)·위(魏)·조(趙)의 3씨(氏)가 구요(성공하지 못했다. 진(秦)은 6국 각각과 동맹하는 연횡책[連橫策]을 써서 합종을 방해하고 계속적인 침략으로 여러 중원 국가들 가운데 우위를 차지했다. 진(秦)은 BC 260년 장평(長平) 싸움에서 조를 이겨 조의 세력을 약화시킨 뒤 연합한 초·조·한·위의 마지막 저항도 물리치고, BC 221년 중국 전역을 통일했다.(3) 농업과 상공업의 발전춘추시대 이래 중국에서는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다른 문명과 달리 단철보다는 주철이 먼저 일반화되었는데 무기로 적당하지 않은 주철은 주로 농기구로 사용되었다. 철제 농기구의 사용과 전국시대 이후 우경(牛耕)의 출현은 농업생산력을 현저히 증대시켰다. 또한 수리관개 시설의 발달로 경지가 확대되었다. 이것은 농민의 이주를 촉진시켜 세수(稅收)를 증진시키려는 목적 외에도, 전통적인 공동체 안에서의 농민을 포함한 전토지와 백성을 국가가 장악하려는 새로운 경제정책이기도 했다. 농업의 발전과 함께 상공업 분야에서도 두드러진 변화가 있었다. 이 시기에 제철업·제염업·상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대상인들의 이야기도 전해지며, 민간수공업자나 중소 상인들의 활동도 활발했다. 상공업의 발달로 도시발전이 촉진되어 각 제후국의 수도가 상업도시로도 크게 번영했다. 결국 농업과 상공업의 발달은 춘추전국시대의 밑거름되었다 할 수 있겠다.(4) 제자백가(諸子百家) 사상춘추전국시대에는 열국이 분립하는 정치적 혼란 가운데 사상과 문화가 꽃을 피웠다. 또한 천문·역법·수리·토목·건축·공예에서도 전례 없는 발전을 보였다. 특히 예(禮)를 중심으로 한 유가사상의 성립은 주목할 만하다. 공자는 부자와 형제를 축으로 하는 가족도덕을 기본으로 하고 사회적 규율로 예를 중시했다. 또한 덕치주의에 의한 정치론을 전개했고 군신(君臣)의 의(義)를 강조했다. 그는 인(仁)의 사상을 확립하여 유교의 기본원리로 삼았다. 전국시대에 위의 문후, 제의 위왕(威王)·선왕(宣王) 때에는 유가를 비롯해 여러 사상가들도 자신의 교단을 이끌고 제후왕과 공(公)의 정치에 접근하여 자들은 추산하고 있다. 어찌되었든 맹자 스스로 “공자(BC 552~ BC 479년)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백여 년이 되었다.”『맹자(孟子)』(「진심(盡心)」하편)고 말하고 있는 것이 가장 혹실한 그가 살았던 시기를 알려주는 기록이다.아무튼 그는 공자가 죽은 뒤 백년 좀 넘어서 탄생했다. 공자와 같이 맹자도 그의 탄생에 대한 여러가지 전설이 있다. 한 천사가 그의 어머니에게 나타났으며 그를 낳을 때에는 오색의 눈부신 광채가 온 땅을 비쳤다고 한다. 맹자는 현 산동성의 추현지방인 주나라 사람이며 노나라의 귀족인 맹손씨 집안의 자손이라 전해지고 있다. 맹자는 일찌기 공자를 그의 가장 위대한 스승으로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인류가 세상에 나타났을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공자와 같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공자처럼 되기를 배우는 것이다. 내가 비록 공자 생전의 제자가 될 수는 없었지만, 그의 제자였던 사람들을 통해서 덕을 닦으려고 힘써 왔다."맹자는 일찌기 아버지를 여위였으나 역사상 유례가 없는 현모(賢母)의 훈육에 의해 어려서부터 학업에 힘썼다. 맹모(孟母)라 통칭되는 그의 어머니의 삼천지교(三遷之敎))나 단기지교(斷機之敎))는 유명하다. 그의 고국인 추나라가 노(魯)나라의 옆에 있었으므로 일찍부터 공자의 사상을 접하게 되어 흠모했으나 당시 이미 공자가 사망한 훨씬 뒤였으므로 직접 배울 기회가 없어서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생에게서 들으면서 사숙(私淑)했다. 당시는 말기에 이른 주나라가 국력이 쇠미해 가자 제후국들이 서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이나 외교적 책모(策謀)를 획책하던 혼란한 시기였다. 진(秦)나라는 법가인 상앙(商?, BC ? ~ 338 )을 등용하여 변법을 실시하고 있었으며 초(楚)나라와 위(魏)나라는 병가인 오기(吳起 B.C. 440 ~ 381)를 초빙해 군비 확장에 힘쓰는 등 모든 나라가 서로 공벌(攻伐)에 의한 합종연횡책 등 패도(覇道) 정치가 판을 쳐, 영리한 것이 현명한 것으로 이해되고 정의 이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노년을 보냈다.(2) 맹자(孟子)의 사상① 성선설(性善說)- 사람의 본성이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다. 그 본성에는 인의예지(仁義禮智) 4덕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갖추고 있는 것으로 맹자는 이를 기초로 사람의 본성은 착하다는 성선설을 주장했다.② 인(仁)과 의(義)의 강조?- 공자가 인을 강조한 반면, 맹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과 의를 내세웠다. 그는 인은 사람의 이치요, 마음의 덕이라 하였고, 의는 일의 합당함이므로 사람의 바른 길이라 하였다.③ 유가 사상의 통일 추구?- 양주(楊朱)의 극단적인 이기주의인 자애설(自愛說)과 묵자의 박애주의인 겸애설(兼愛說)을 배척하고, 유가 사상의 정통성 확립을 추구하였다.맹자의 시대에 세력을 떨쳤던 학설 중 대표적인 것이 양주와 묵자의 학설이었다. 맹자는 "양주는 자기를 위하므로 털 하나를 뽑아 천하를 이롭게 한다 해도 결코 행하지 않는다." 고 비판하였다. 양주의 사상은 유가의 "몸을 죽여 인을 이룬다(殺身成仁)." 또는 " 생명을 버리고 의를 취한다(捨生取義)."는 사상과는 완전히 어긋난다. 이렇게 맹자의 비판을 받은 양주 일파는 조기 도가이다. 이들은 홀로 그 몸을 바르게 지키고 사회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태도를 지녔다. 양주의 학설은 「노자」와 「장자」에 잘 나타나 있다. 노자에 "이름과 몸 어느 것이 더 친한가? 몸과 재화 어느 것이 더 귀중한가?" 라고 묻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곧 경물중생(輕物重生)의 이론이라 할 수 있다. 맹자는 묵자의 겸애는 어버이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 시작이 부모로부터 비롯된다.' 고 하여 무차별적인 사랑을 강조하는 묵자의 사상을 비판하고 있다. 묵자는 '어진 사람이 할 일은 반드시 천하의 이로움을 증진시키는 데 힘쓰고 천하의 해로움을 제거하는 데 힘쓰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그 방법으로 차별 없는 사랑을 주장하였다. 그는 겸애가 국가와 백성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국가와 백성의 한 듯하다. 여러 학자들이 저술한 글에서 ‘맹자가 직접 저술했다’는 글이 보이지만 아무래도 『맹자(孟子)』자는 책 속에는 맹자가 직접 쓴 것으로는 보기 어려운 글들이 들어있기 때문이다.『맹자(孟子)』는 유가학파의 가장 중요한 저작 중의 하나이다. 서한의 문제(文帝) 때에 전문적인 전기(傳記)박사를 둔 적이 있었고, 한나라로부터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자부(子部)의 유가류(儒家類)에 편입되어있었다. 그러다가 송(宋)대부터 『맹자(孟子)』의 지위는 격상되어 유가의 '십삼경(十三經)' 중 하나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 후 남송의 주희에 이르러서는 『맹자(孟子)』를 사서중의 하나로 편입시킴으로써, 명청시대에는 지식인의 필독서가 되었다. 따라서 『맹자(孟子)』가 중국과 동북아시아 사상과 문화에 끼친 영향력은 쉽게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맹자(孟子)』의 예리하고도 호방한 문장은 문학사에 있어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4.공자(孔子)와 맹자(孟子)사상(1) 공맹(孔孟)사상의 영향봉건사회에 있어서 공맹학설이 끼친 영향은 그것과 비교될 만한 것이 없을 정도이다. 일단 중국에서는 한(漢)대 이후의 통치자들의 정치철학으로써 유학은 언제나 절대적이었다. 종교적인 의미의 유교(儒敎)가 아닌 사상의로서의 유학(儒學)의 위치는 언제나 확고했다. 다만 현대에 들어와서 5.4운동 시기와 문화대혁명의 10년동안 공자와 맹자는 역사의 죄인으로 간주되어 말과 글을 통하여 온갖 비난을 받았다. 공자와 맹자의 학문은 반동사상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비판과 성토가 가해졌고 전적으로 부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문화대혁명이라는 ‘십년간의 내란’이 매듭된 후에 사람들은 다시 정상적으로 공자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국가에서 자금을 지원하여 공자를 연구하기도 하고, 공자에 관한 학술지도 창간되었다.공자와 맹자의 학문은 한국?일본?싱가폴과 같은 세계의 많은 국가와 지역에도 비교적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는 3세기경에 공맹의 학문이 전해졌는데, 일본의 각지에는 공자를 기리는 공묘(孔廟이다.
    인문/어학| 2006.06.08| 8페이지| 1,500원| 조회(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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