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우, 해체시로 이야기하다-시인 황지우의 시를 중심으로예술학부 문예창작학과52032304 강민희Ⅰ. 서론1980년대를 흔히 민중시의 시대라고 말한다. 사실 이 시기에는 이전의 어떤 시기보다 비판적인 시각들이 시대의 중심에 떠오를 수밖에 없던 시대였다. 이에 따라 시에 대한 것도 노동자시, 농민시 등 민중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민중시의 다양한 형색이 보여졌다.하지만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도 시인들은 개인의 자유를 말하고 시의 내면성을 주장하였다. 특히 이성복으로부터 시작된 이후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다양하게 나타났다. 그것은 대체로 지배체제에 대한 허무의식이나 반발로 드러나거나 부조리한 현실을 초월하려는 경향을 보였다.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가들로는 이성복, 황지우, 최승호, 기형도, 김광규, 장석주 등이 있다. 이들은 각자 다른 형태들로 시대를 비판했으며, 그때부터 시작된 비판 의식은 아직도 살아 여전히 한 줄기를 가지고 있다. 특히 이 중에서도 황지우의 시는 창작 당시에도 그랬고, 여전히 젊은 지성인들에게 대화를 시도한다. 황지우의 시를 통해서 80년대 모더니즘 시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Ⅱ. 본론Ⅱ-1. 80년대 모더니즘의 두드러진 양상80년대 모더니즘의 두드러진 양상은 기존의 관념과 기존 시 형식을 뒤엎으려고 하는 급진적인 경향을 EL는 점이다. 그것은 해체시로 불리는 시 형태에서 가장 특징적으로 드러나며, 이러한 흐름은 70년대 이후 급격하게 진행된 산업사회로의 구조적 변동을 기반으로 했다. 다시 말하면 근대성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반성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Ⅱ-2. 80년대 모더니즘의 큰 줄기들80년대 모더니즘 시는 크게 세 가지 계열로 나눈다.첫째, 전통적인 시 형태의 파괴와 해체를 통하여 시대적 상황에 대응하는 시적 흐름이다. 이성복, 황지우, 박남철, 장정일, 김영승 등의 시가 대체로 이에 속한다. 이들의 시에서는 과격한 형태파괴가 시도되고 있다. 물론 형식 파괴는 황지우의 시에서 처럼 정치적인 측면을 띠기도 하고 박남철 시의 경우와 같이 유희적인 측면도 드러내는 등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둘째, 자본주의 도시의 부정적 양상들을 드러내는 시의 계보이다. 최승호, 하재봉, 이윤택, 기형도, 윤성근 등의 시가 대체로 이에 속한다. 이들의 시에서는 자본주의 생산과 소비의 공간적 집중을 이루고 있는 도시에서의 삶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셋째, 일상의 무의식적 삶을 파헤침으로써 산업사회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계보이다. 김광규, 오규원, 이하석, 장석주 등의 시가 대체로 이에 속한다. 그것은 김광규의 경우와 같이 소시민의 자기반성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일상성에 대한 탐구로 나타나기도 한다.Ⅱ-3. 해체시에 대하여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에 나타난 해체시의 징후는 이후 황지우, 박남철 등 젊은 시인들에 의해 개화를 맞는다. 80년대 초, 이들 두 시인은 앞다투어 많은 충격적인 해체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들 두 시인의 시에 나타난 해체 는 다소 차이를 드러낸다. 우선 황지우가 궁극적으로 현실 정치의 해체를 지향하였다면, 박남철은 경직된 이데올로기의 해체를 지향하였다. 이후 해체시는 장정일, 김영승, 박상우 등에 의해 해체정신을 실현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진다.80년대 해체시는 그 이전 시기 한국 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충격적인 시 형태를 보여주었다. 이 시기 해체시는 시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던져줄 만큼 시 형태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있었다. 물론 80년대 해체시는 그 이전의 실험시, 가령 1930년대 모더니즘 시나 50년대 모더니즘시, 혹은 60년대 현대시 동인들의 시들과도 뚜렷이 구별되는 모습을 보인다.Ⅱ- 4. 황지우의 해체시황지우는 80년대 초반, 파괴를 양식화한다고 스스로 말할 수 있을 만큼 여러 시도를 보여주었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와 겨울-나무에서 봄 -나무에로 두 시집에서 황지우는 의식의 흐름을 연상적으로 진술하기도 하고 신문지나 잡지, 혹은 인쇄매체를 오려 붙인 콜라주 기법을 과감하게 구사하는가 하면, 활자조작, 비어와 속어, 산문적 진술 체계를 시에 도입하기도 하였다. 황지우의 시에서 신문 외신면의 , 만화 한 장면, 개인 연표, TV 아나운서의 발언, 게시판의 벽보, CM송, 전자오락실의 풍경 등은 그 자체로 시를 이루었다.숑숑숑숑숑숑숑숑숑숑숑숑숑숑숑숑숑띠리릭 띠리릭 띠리리리리리리릭피웅피웅 피우피웅 피웅피웅피웅피웅꽝 ! ㄲ ㅗ ㅏㅇ!PLEASE DEPOSIT COINAND TRY THIS GAME!또르르르륵그리고 또다른 동전들과 바뀌어지는숑숑과 피웅피웅과 꽝!-황지우, 한국생명보험회사 송일환씨의 어느 날 부분위의 시에서는 거리의 전자오락실에서 나오는 굉음을 소리대로 표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언어를 해체하고 있다. 이러한 표기들은 물론 80년대의 산업사회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데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즉 전자오락실의 굉음과 화면은 별다른 오락거리도 이상도 찾지 못하고 있는 도시인들이 전자오락실에서만 환상을 가질 수 있는 현실을 아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이와 같이 황지우는 시는 언어로 이루어진다는 시에 대한 기존 관념을 해체하고 있다. 황지우는 나는 말할 수 없음으로 양식을 파괴한다. 아니 파괴를 양식화한다. { ) 황지우(1986),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 , 한마당, 22-23쪽.고 고백하고 있는데, 이는 파괴의 양식화가 의사소통의 한 방법임을 의미한다. 황지우는 표현할 수 없는 것, 은폐되어 있는 진실을 양식의 해체를 통해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예비군편성및훈련기피자일제자진신고기간자 : 83.4.1.~ 지 : 83.5.31.- 황지우, 「벽.1」전문황지우의 시는 80년대 시 중에서도 가장 첨단의 전위성을 드러낸다. 황지우 시의 과격한 양상은 우선 그가 시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볍게 전복시키는 데서 온다. 위의 인용시는 벽보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전세대인 김수영과 오규원의 경우에도 일상은 시와 밀착되어 있었으나 황지우처럼 일상과 시의 경계를 완전히 허물지는 않았었다. 그의 시에서는 각종 벽보나 광고, 기사문이 그대로 옮겨져 적나라하게 현실을 증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의 도입이 시가 되고 더구나 강도 높은 정치적 비판을 이루는 데에는 의식의 선진성과 시적 대상의 절묘한 선택과 배열의 감각이 작용한다. 그는 시에 대한 고정관념을 허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시적인 것’의 영역을 대폭 확장시킨 것이다. 그의 다양하고 과격한 형식 실험은 철저한 지적 통제하에서 시도되었으며 언제나 단순한 파괴 그 이상의 의미를 창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창조적 전위성의 위력을 보여준다.
터널을 지나면 무엇이 나오는가-서승만 연출 『터널』을 보고예술학부 문예창작전공52032304 강민희Ⅰ. 서론사춘기를 지나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힘든 시간을 함께 보낸 친구들일 수도 있고, 부모님께 했던 어설픈 반항이나 학교 생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첫사랑을 기억할 것이다. 첫사랑은 마냥 좋을 수 없다. 짝사랑이 아니라고 해도 철없는 마음에 상처를 받을 뿐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상처마저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들에게 첫사랑은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서승만 연출의 『터널』은 첫사랑의 기억을 생각나게 했고, 그 때의 나를 만나게 했다.Ⅱ. 본론Ⅱ-1. 왜 첫사랑인가『터널』의 큰 주제는 사춘기 시절의 첫사랑이다.사람들은 사춘기를 기점으로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 첫사랑을 만나게 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춘기에 첫사랑을 만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인식함과 동시에 이성에게 관심을 갖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관객의 대부분이 대학생이었다. 물론 고등학생이 너댓명 끼어있긴 했다. 아마 그들 역시 첫사랑을 경험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익숙한 것에 대한 애착을 보인다. 정치계에서 방송을 했던 사람들이 표를 얻을 수 있는 이유 역시 이런 것이고, 자기가 아는 사람과 닮은 사람에게 호감을 가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처럼 사람들은 보편적인 것을 받아들일 때 부담이 없으며, 더 많이 공감할 수 있다.『터널』이 호평을 받고 있는 이유 중에는 연출가가 집을 팔만큼 애착을 보인 것과 배우들의 열정은 물론이며 관객의 공감대를 끌어낼 수 있는 주제를 선택한 것이 한몫을 했다. 첫사랑이라는 누구나 겪는 성장 과정의 일부분을 주제로 사용한 『터널』. 첫사랑은 창작 뮤지컬이라는 위험 요소를 갖고서도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힘을 갖게 했다.Ⅱ-2. 왜 터널인가예전에 가족들과 여행을 하며 돌아오는 길에 터널을 지나게 되었다. 기차가 지나는 길도 아닌데 터널을 만난 것은 지금 생각하면 조금 독특한 경험이었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차에서 내려 나와 동생에게 터널을 달려서 끝까지 오라고 하셨다. 운동에 영 소질이 없었던 나는 몇 번이나 쉰 후에 터널 끝에 도착했다. 차를 타고 지날 때는 몇 초 걸리지 않았는데 직접 뛸 때는 한참이 건넜던 터널. 터널을 빠져 나왔을 때 아버지는 인생은 터널과 같은 것이라고 하셨다. 겉으로 보기에는 쉬워 보여도 실은 건너기가 어렵다고. 그리고 조금 시간이 걸려 도착하거나 도중에 잠시 쉰다고 해서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고 말하셨다.인생을 터널에 비유하는 사람은 비단 아버지뿐이 아니다. 연극 『터널』의 의미도 이와 같다. 실제로 주인공은 “나는 몇 번째 터널을 지나고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한다. 터널이라는 익숙한 주제와 겉으로 보이기에는 그다지 예술적인 뜻을 담고 있지 않을 것 같은 제목을 사용했다. 하지만 터널을 인생에 비유함으로서 가장 시적인 제목이 되었다. 또한 나는 몇 번째 터널을 지났으며, 어떻게 지나고 있는지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을 던져주었다.Ⅱ-3. 고등학생 역할의 배우들과 고등학생 관객『터널』의 주인공들은 사춘기의 고등학생이었다. 그들은 이제까지 아무런 불만 없이 다녔을 학교에 대한 불만을 갖기도 하고, 좀 더 멋져 보이기 위하여 포장하기도 한다. 나 역시 불만이 없었던 어린 시절과는 달리 고등학생 시절에는 괜스레 화를 내곤 했다. 다행히 가족들은 사춘기를 지나는 아이의 짜증으로 생각해서 대부분 이해를 해 주었고, 친구들과는 오히려 같은 고민을 안고 있다는 것에 신기해하며 가까워질 수 있었다.『터널』은 고등학생들에게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할만한 뮤지컬이었다. 그래서인지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러 갔을 때 눈에 띄지 않던 고등학생들이 너댓명이 앉아 있었다. 너댓명의 고등학생들은 기쁘기도 했고, 우울하기도 했다. 다른 공연에서 볼 수 없던 고등학생을 너댓명이나 만난 것을 기뻐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고등학생 이야기를 하는 뮤지컬조차 볼 수 없을 만큼 공부에 치여 여유 없이 지내야하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전에 공연 예술의 문제점에 대해서 생각할 때 느꼈던 부분이기도 했다.아동극은 그 나라의 문화 수준의 지표라고 했다. 하지만 청소년을 위한 공연은 거의 없다. 있다고 해도 가요 순위권 프로그램뿐이다. 어른들은 연예인을 좋아하는 청소년들을 ‘빠순이, 빠돌이’혹은 ‘가수 꽁무니나 쫓아다니는 철없는 아이들’ 정도로 매도해 부르지만 실제로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버린 것 또한 어른들이다. 그들을 위한 공연은 만들지 않고, 그들이 좋아할 공연을 만들지 못하면서 매도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고등학생이 주인공인 공연에 고등학생이 없다는 것은 분명 서운한 일이다. 외국의 학생들은 학교 수업보다는 문화·예술에 대한 기본기를 다질 수 있는 수업 외의 활동을 더 많이 한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아이들의 교양을 쌓도록 도와주는 사람은 분명 어른이니까 말이다.Ⅱ-4. 왜 문화일보홀인가공연이 끝난 후 연출가 서승만씨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시간이 넉넉했다면 물어보고 싶은 것이 꽤 많았지만 만나는 시간이 워낙 짧아서 질문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연출가는 내가 물어보고 싶었던 것의 대답을 해 주었다.공연은 소극장에서 하는 것을 좋아한다. 배우와 관객의 거리가 짧은 만큼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생각이 잘 들기 때문이다. 물론, 운이 좋으면 배우의 옷을 들거나 배우가 말을 걸어주기도 하고 말이다.하지만 『터널』은 좀 달랐다. 무대가 답답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극장에서 하는 공연은 작고 간단한 소품들만으로 분위기를 살릴 수 있을 정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소품이 단상 하나 정도면 될 법한 그런 연극 말이다. 하지만 『터널』에는 포장마차도 나오고 방도 나오는 등 조금 부피가 큰 소품들이 등장한다. 의아스러웠다. 저렇게 소품이 많은데 왜 그 작은 문화일보홀에서 하는 것일까 하면서 말이다. 연출가 서승만씨의 인맥을 생각하면 왠만한 극장의 대관은 어렵지 않아 보이는데 말이다.답은 간단했다. 창작 뮤지컬의 위험 부담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그 부담 때문에 대관을 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답답한 일이다. 외국의 유명 뮤지컬인 『Cats』역시 유명해 지기 전에는 그저 하나의 창작 뮤지컬이었다. 단지 점점 유명해지다 보니 일회 공연으로도 몇 십억을 벌어들일 수 있는 대작이 된 것이다. 『터널』이 『Cats』처럼 되지 말라는 법이 없고, 우리 창작 뮤지컬이라고 해서 외국 창작 뮤지컬처럼 유명해지지 않으라는 법은 없다. 분명히 가치있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투자하지 않는 것은 소극적이고 결국은 투자를 모른다는 말이다.국가는 물론이며, 대기업에서는 창작 뮤지컬에 투자를 해야 할 것이다. 주식회사가 그렇듯 공연을 주식처럼 몇 %의 수익을 올리면 그만큼의 지분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수익의 얼마를 돌려주는 식으로 해야할 것이다. 이것은 곧 공연을 위한 길이기도 하다. 현재 우리나라는 공연예술의 과도기에 서 있다. 예전의 영화 과도기처럼 많은 작품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그것은 수준이 미흡한 것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공연 수익을 주식처럼 만든다면 나름대로 투자자도 생기고 경쟁력도 생겨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