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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사보고서(강원도 일대)
    2007년 3월 27일 (첫 째날)오전 8시 10분 : 청주 출발오전 9시 19분 쯤 중부고속도로에서 영동고속도로로 이동오전 11시 07분 : 횡계리 도착청주에서 3시간 만에 이곳에 도착했다. 이것을 통해 교통이 많이 편리해졌음을 알 수 있다고 교수님께서 말씀해 주셨다. 이곳에 처음 와보는 나로서는 교통이 얼마나 편리해졌는지 잘은 모르겠다.원래는 삼양목장에 가려고 했지만 목장에서 허가가 떨어지지 않아 가보지 못하여 무척이나 아쉬웠지만 대신 목장 근처에서 대관령삼양목장에 대한 교수님의 설명을 들었다. 횡계리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려 교수님을 따라 걷다가 멈춘 곳에는 흙무덤이 많이 있었다. 이 흙무덤은 토지 개량을 위하여 쌓아놓은 것인데 이것을 보고 아직도 이곳에 토지개량이 많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관령삼양목장은 강원도 대관령 일대의 해발 850~1,470M의 600만평의 고산 유휴지를 개척하여 초지로 일구어 만들어진 목장으로 여름철에 젖소를 키워 한때는 규모가 큰 목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러 가지 다른 이유로 레저시설로 바뀌고 있고 가족단위의 교육과 휴식의 장으로 개발하려고 더욱 노력하고 있어 목장은 1/10로 줄었다.또한 태백산맥 중부지역인 이곳 대관령 부근은 고위평탄면지역으로 여름에도 기온이 낮아 고랭지 농업지역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이러한 서늘한 기후를 이용하여 무, 배추등이 재배 되는데 8월말에서 9월에 출하하여 높은 소득을 얻고 있다. 또한 영동고속도로의 개통으로 대소비지인 서울과의 접근도가 높아지면서 소득 수준이 상당히 높아졌다. 지금은 병충해 예방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교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특이하게도 이곳에서 옛날에는 고속도로를 경계로 한쪽은 무, 배추를 심고 다른 한쪽에는 감자를 심어 병충해를 예방했다고 한다.이곳은 토지개간으로 자연재해가 심화 되고 있다. 특히나 여름철에 비가 많이 올 때는 이곳에 아무것도 심지 않아 토사가 근처 도암으로 그대로 흘러들어가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도암댐의 물이 오염되고 이약하기 때문이라고 교수님께서 말씀해 주셨다. 석회암은 겉으로는 침식이 쉽게 일어나지 않지만 절리를 통해 한번 침식이 되면 침식활동은 활발해진다.오후 1시 49분 : 출발다음 목적지인 강릉수력발전소는 대관령 옛길을 통해서 갔다. 대관령 옛길은 구불구불해서 시간도 많이 걸리고 속도도 높일 수 없는데 신도로가 생겨 시간을 많이 단축할 수 있게 되었다.오후 2시 40분 : 강릉수력발전소 도착강릉수력발전소는 강원도 강릉시 성사면 오봉리에 있는 유역변경식 발전소로 동해안 최초의 수력발전소이다. 1985년 3월에 착공하여 1991년 1월에 완공되었다. 유역변경식 발전은 낙차를 크게 하기 위해 상류에 설치한 댐으로부터 유량의 일부 또는 전부를 인접한 다른 하천이나 분수령을 달리하는 다른 유역으로 변경하여 발전하는 방식으로 수력자원의 가치가 상승한다. 그러나 도암댐의 수질 오염 즉, 수질 오염의 근본 원인인 고랭지 채소밭과 대관령삼양목장에서 흘러드는 토사오염된 도암댐 물로 발전하는 것을 주민들이 중단을 요구, 2001년 7월에 발전을 중단했다.여기에서 강릉시의 주민들과 (주)한국수력원자력의 입장의 차이가 있는데 (주)한국수력원자력의 입장은 도암댐이 탁도가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실질적으로 강릉시의 식수원은 오봉저수지에서 해결하고 있는데 강릉시 주민들은 이것이 자신들에게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하고 민원으로 발전을 중지시킨 것이다 이고 강릉시 주민의 입장은 도암댐의 오염된 물이 우리 지역으로 흘러가니 배상금을 요구한 것이다. (주)한국수력원자력에서 정선에 배상금을 지불 했는데, 강릉시도 배상금을 요구함에 따라 g현재까지 입장차이가 줄지 않고 있다.오후 3시 21분 : 출발오후 5시 21분 : 화진포 도착석호란 빙기 때 생긴 골짜기에 후빙기 때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골짜기가 바닷물로 찼는데 연안류의 작용으로 인해 형성되는 사주, 사취 등이 만의 입구를 막아 바다와 분리 되어 형성된 호수를 말한다. 고등학교 때부터 배워왔던 석호에 대해서 쉽게 이해 할 수 있을 거라 자신했었지 유지되고 있으며 동해안의 여러 기수호 중에서 인간의 간섭이 가장 약한 곳이다.송지호 주변은 만구사주로 만구사주위에 해송이 자라고 있으며, 해송이 자라고 있으면 다른 식생도 자라기에 좋다. 또한 수면에 갈대를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이 갈대는 실트와 크레인을 잡아두는 역할을 하여서 호수가 점점 메워지는데 도움을 준다.오전 11시 08분 : 출발오전 11시 17분 : 청간정 도착청간정은 강원 유형문화재 제32호로 관동8경의 하나이며, 청간천과 동해안이 만나는 기암절벽 위에 세워진 팔각지붕의 2층 누각으로 12개의 돌기둥이 누각을 받치고 있다. 관동팔경 말 그대로 이곳에서 바라본 동해안의 풍경은 아름다웠다.청간정의 창건연대나 창건자는 알 수 없으나 조선조 중종 15년(1502년)에 간성군수 최청이 중수한 기록이 남아 있다. 1884년 갑신정변 때 소실되었다가 1928년 당시 토성면장 김용집씨의 발기로 재건하였고, 그 후 1980년 최규하 전 대통령의 동해안 순시 때 보수 지원을 받아 정자를 완전히 해체, 복원했다.또한 청간정의 현판은 이조 현종 때 우암 송시열이 좌상으로 재직시 이곳에 들러 친필로 썼으나 유실되고, 그 후 1953년 고 이승만대통령이친필로 쓴 현판이 걸려있다. 아울러 81년 4월 최규하 대통령이 청간정의 절경을 본 감상을 적은 휘호까지 걸려 우리나라 전직 두 대통령의 글을 직접 볼 수 있다.원래 청간정은 관동팔경에 속해 있지 않았고 북한의 시중대가 청간정 대신 관동팔경중의 하나였으나 지금은 시중대 대신 청간정이 관동팔경 중에 하나이다.오전 11시 46분 : 출발오전 11시 56분 : 영랑호 도착영랑호는 답사 동안 본 석호들 중에서 가장 평범하게 보인 석호이다. 영랑호는 자연호수로 백사가 퇴적하여 발달한 것이며, 영랑교 밑의 수로를 통해 동해와 연결되어 있다. 유입수는 장천천이 유일한 하천으로 농경지를 관류하면서 호수로 유입된다. 특이하게도 영랑호는 다른 석호와 다르게 호수변을 콘크리트로 해놨는데 인공적인 느낌이 들어 별로 보기 좋지 않았다. 1974: 낙산사 도착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에 위치해있으며, 금강산, 설악산과 함께 관동 3대 명산의 하나로 손꼽히는 오봉산 자락에 자리 잡은 낙산사는 관음보살이 설법을 펼치며 항상 머무는 곳을 이르는 보타낙가산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역대로 지위와 신분을 떠나 관음진신을 친견하려는 참배객들의 간절한 발원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다.낙산사는 동해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천혜의 풍광과 부처님진신사리가 출현한 공중사리탑, 보물로 지정된 건칠관음보살좌상, 동양 최대의 해수관음상, 천수관음상 칠관음상 등 모든 관음상이 봉안된 보타전, 창건주 의상대사의 유물이 봉안된 의상기념관 등 숱한 성보문화재를 갖추고 있다.그런데 안타깝게도 지난 2005년 4월 대형 산불로 인해 많은 당우가 소실되고,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경관이 크게 훼손되었다. 낙산사를 한번도 가본적이 없었는데, 처음 가서 본 낙산사의 모습이 너무 황폐해 보여서 안타까웠다. 또 우리가 간 날은 비도 내리고 바람도 많이 불어서 제대로 구경을 할 수가 없었고, 땅도 질퍽해서 걷기도 힘들었다.의상대에 올라서 해안절벽과 파식대를 볼 수 있었다. 해안에 만과 곶이 있는데 만은 계속바다에서 퇴적물이 유입되어 퇴적되고 곶은 침식하여 해식애와 파식대가 형성된다.오후 3시 14분 : 출발낙산비치에는 모래가 많은데 그 이유는 남대천에서 모래가 많이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다. 보통 큰 하천이 흐르는 곳에는 큰 해수욕장이 형성된다.오후 3시 39분 : 인구리 도착이곳에서는 그동안 책에서만 봐왔던 타포니를 볼 수 있었다. 타포니는 지역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뉘는데 산지내륙에서 서릿발의 동결?융해 작용에 의한 것과 염풍화 작용에 의해 형성되는 타포니가 있다. 서릿발 작용에 의한 타포니는 역암으로 이루어진 마이산 남사면에 주로 나타나는데 겨울철 동결?융해작용이 반복되어 큰 자갈들이 암벽에서 떨어져 나와 구멍들이 생긴 것이다. 염풍화작용에 의한 타포니는 소두리와 인구리에서 볼 수 있는데 소금성분의 화학작용으로 인해 풍화작용을 받아 구멍이다. 수 백 만년 전 바다였던 이곳은 지반이 융기를 함에 따라 지금은 언덕 위로 올라오게 되었다. 정동진 바다 근처의 산사면을 깎아 만든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서 우리는 퇴적층과 원력을 볼 수 있었는데, 이것은 이곳이 융기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원력은 강물이든 바닷물이든 영향을 받은 돌로 파식대의 모가난 돌이 파랑에 의해 왔다갔다하면서 마식되어 원력이 된다. 그리고 파식대가 융기하면 마모된 원력은 그대로 있고 그 위에 토사가 빗물 등에 의해 쌓이게 되는 것이다.해안단구란 해안선을 따라 분포하는 계단상의 지형으로, 완만한 지반의 융기 및 빙하성 해수면 변동과 관련하여 형성된 해안지형이다. 정동진의 해안단구는 고도 약 80m 내외의 높이에 거의 평탄한 대지가 해안을 따라 연속되는 해안단구를 이루는데, 밭으로 개간한 곳이 많고, 평탄한 지형으로 주로 농경지 및 교통로로 이용되고 있다. 그런데 평탄한 지형도 어디론가는 물이 흘러가야 하기 때문에 작은 물줄기가 흐르던 곳에 계속해서 물이 흘러 점점 커져서 큰 골짜기가 생긴다. 즉, 평탄한 중간 중간에 골짜기가 있음을 볼 수 있었다.우리가 전날 밤에 잤던 숙소도 정동진 해안단구 위에 세워진 건물이다.오전 9시 54분 : 출발오전 10시 16분 : 동해 휴게소 도착동해안 휴게소에서 바라본 정동진의 해안단구이다. 정동진역에서도 해안단구를 볼 수도 있지만 이곳에서는 한눈에 해안단구를 볼 수 있다.오전 10시 21분 : 출발오전 10시 44분 : 추암 촛대바위 도착강원도 동해시 북평동 추암리에 있는 촛대바위는 석회암으로 되어있지만 눈으로 봤을 때 색깔이 칙칙한 것이 석회암 같이 보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불순물이 섞여 있어서 그렇다고 한다. 원래 어떤 암석을 보고 석회암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석회암에도 여러 가지 다른 불순물들이 섞여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같은 해안이라고 해도 촛대바위처럼 암석이 단단해서 남아 있기도 하고 계속해서 침식당하는 암석도 있다. 석회암은 마식에는 강하지만 용식에는 약하기 때문에 절리 셨다.
    인문/어학| 2010.12.21| 13페이지| 1,000원| 조회(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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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사보고서(기호지방)
    2008년 3월 25일 : 첫째 날[청주 출발 : 오전 8시 11분][천안 아산역(온양온천) 도착 : 오전 9시 16분]청주IC에서 나와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남천안IC에서 21번 국도로 갈아타고 와서 도착한 곳은 고속철도역인 천안아산역(온양온천)이였다. 천안아산역(온양온천)이라는 길고 부자연스러운 역명을 갖게 된 것은 역은 아산시 배방면에 소재하지만 일부 면적이 인근 천안시와의 경계에 걸쳐 있어(역의 약 5% 정도가 천안시) 천안시와 역명 분쟁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에 천안시와 아산시 간의 소송이 진행되어 법원에서 천안아산을 역명으로 하고 부역명으로 온양온천을 나란히 적기로해 일단락되었다.천안아산역은 다른 고속철도역과 다르게 1층~3층에 역사가 위치하고 4층에 승강장이 위치해 있다. 그 이유는 속도와 관련해서 지표의 기복을 해결하기 위해서이다.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철로가 일직선으로 일정한 높이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우리는 운이 좋게도 승차권 없이 4층 승강장으로 가볼 수 있었는데, 고속철도 선로와 일반철도 선로는 따로 사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여기서 역의 위치와 관련해 지리적으로 접근해 보자면 천안아산역(온양온천)의 개통으로 수도권과의 접근성, 또는 수도권과의 상호작용, 역 주변 시가지화 등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먼저 수도권과의 접근성과 상호작용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천안아산역의 개통으로 수도권과의 접근성은 좋아졌고, 2004년 4월 개통 이후 사용인원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접근성이 좋아졌다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천안과 아산의 인구 및 기능이 서울로 집중 될 수 있다는 측면과 또 다른 하나는 서울의 기능이 천안과 아산으로 분산 될 수 있다는 측면이다. 교수님께서 실제로 초기에는 수도권으로의 집중이 강화 되고, 시간이 지나면 주변으로 자연스런 분산화가 이루어진다고 하셨다. 또 수도권의 기능과 인구가 천안과 아산으로 분산되는 것은 정책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약하고, 아직은 수도권으로의 집중이 더5m로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성 주변에 탱자나무가 심어져 탱자의 한자음을 취한 지성이라고도 한다. 이 읍성에는 병마절도사와 겸영장이 집무하던 동헌을 비롯한 관아와 객사 등의물들이 많이 있었다. 특히 객사는 중앙권력의 상징으로 웅장하게 지을 뿐만 아니라 집무를 보는 건물 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고 한다. 성의 정문 역할을 하는 남문인 진남문은 다듬어진 돌로 된 아치형의 홍예문이고, 동쪽과 서쪽에 각각 하나씩 문이 있다. 우리가 갔을 때 서쪽의 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었고, 자물쇠로 잠가 놓은지 시간이 꽤 지나보였다.또한 해미읍성에 1579년(선조12) 이순신 장군이 군관으로 10개월간 근무한 적이 있으며, 특히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그 이유는 서산, 태안 등은 외래 문물이 들어오는 중요한 통로였기 때문에 천주교신자가 많았다. 따라서 천주교 순교자들도 많았다.[ 해미읍성 출발 : 오후 2시 42분 ][ 굴포운하 도착 : 오후 3시 14분 ]굴포운하는 가로림만과 인접한 팔봉면 오송리와 천수만과 연접한 태안읍 인평리와의 약 3km에 달하는 지협을 착통하는 운하를 말한다. 굴포운하의 개착공사는 지금으로부터 약 800년 전, 즉 12세기 초 고려 인종 때(1134년)부터 시작하여 조선 중기까지 약 400여 년간을 통해 우리나라 운하사상 가장 오래된 것이다.삼남지방의 세곡미를 서울로 조운함에 있어 배가 태안반도의 안흥량을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데 이곳은 곳곳에 암각과 억센풍랑, 빠른 조류 그리고 심한 간만의 차이로 서해에서 가장 험난한 항해지역으로 손꼽혀 조난사고가 빈번하였다. 이 같은 해난사고는 인명과 세미의 손실이 컸다. 따라서 세미의 안전 수송과 조운에 따른 지리적, 시간적 거리를 단축시키기 위해 태안반도의 가로림만과 천수만을 연결하는 굴포운하의 개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고려 인종 때부터 수천 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운하공사를 하였으나 개착지의 지질이 화강암층이라 당시의 기술로는 감당해낼 수 없었으며, 높은 간조의 차를 극복하지 못한 자연전 8시 49분]서해대교는 서해안 고속도로 구간 중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면과 경기도 평택시 포승면을 잇는 길이 7,310m의 다리로 1993년 착공하여 2000년 4월에 개통되었다. 서해대교의 개통으로 엄청난 시간단축이 이루어졌는데, 당진에서 평택까지 2시간에 걸쳐 가야했던 것을 서해대교를 통해 단 5분 만에 갈수 있게 되었다. 서해대교의 개통으로 인한 시간단축은 주변지역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주변지역에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기 위해 여러 공업단지들이 조성되었고, 평택?당진항도 현재 건설 중이다. 평택?당진 항은 항구이름을 평택항으로 할 것인지 당진항으로 할 것인지에 대한 분쟁이 생겼었으나 그동안 만의 매립으로 최심경계선이 애매해졌기 때문에 평택 관할인지 당진 관할인지 경계가 애매하여 현재는 평택?당진항으로 이름이 붙여졌다.서해대교는 사장교(Cable-Stayed Bridge), FCM교(Free Cantilever Method Bridge), PSM교(Pre-cast Segmental Method Bridge) 세 가지 다리 형식으로 만들어 졌다.사장교란 높은 주탑을 쌓아 올리고 주탑을 중심으로 케이블을 경사지게 매달아 차량이 지나가는 상판을 지탱하는 형태의 다리를 말하는 것으로 서해대교의 990m가 이 방식으로 건설되었다.FCM교란 교각의 상단부에 이동식 거푸집을 이용하여 좌우 평행을 유지하며 약 4m길이의 세그먼트를 연속적으로 시공하여 상판을 완성시키는 공법으로 서해대교의 2,340m가 이 방식으로 건설되었다.PSM교란 제작 장에서 일정 길이로 제작된 세그먼트를 설치 지점으로 운반하여, 교각과 교각사이에 거치된 가설장비에 올리고, 강선을 이용하여 세그먼트를 접합하며 한 경간을 완성하는 공법으로 서해대교의 2,700m가 이 방식으로 건설되었다.서해대교를 여러 번 지나다녀봤지만 다리가 세 가지 형식으로 만들어 졌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고, 또 유심히 관찰하게 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행담도 홍보관에서 다리가 붕괴되는 영상을 보았는데, 마치 종이장이 휘수유통을 통한 시화호 수질 개선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시화호 조력발전소의 건설과 함께 관광단지도 조성될 계획이다.이번의 답사코스 중 시화호 조력발전소의 견학은 평생에 한번 볼 수 있을까 말까한 기회를 잡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완공된 시화호 조력발전소를 보는 것과 완공되기 전의 것을 보는 것은 많이 다를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아무리 조력발전소에 대해 설명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직접 눈으로 본 것만 못할 것이다. 교수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이번 답사 중에서 제일 값진 지식을 이곳에서 얻을 수 있어서 뿌듯하다.[시화호 조력발전소 건설현장 출발 : 오후 12시 32분][점심식사(전라도 먹자촌) : 오후 12시 45분~오후1시 25분][소래포구 도착 : 오후 1시 30분]소래포구는 인천광역시 남동구 논현동에 있는 어항으로 천연적인 포구이다. 간만의 차가 최고 9m로 썰물 때는 바닥이 완전히 드러나고 밀물 때가 되면 물을 따라 배가 들어온다. 80년대는 대단위 관광 어촌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 이곳은 점차 매꿔져 어항의 기능을 상실하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있으나 오늘날 과거의 어시장 명성이 남아 있어서 아직도 유명하다. 일일 수천명에서 주말, 공휴일, 고기가 가장 많이 잡히는 시기가 되면 3만~5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든다.또한 소래포구는 오래전부터 포구로서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유명했다고 한다. 특히 인천에서 소래포구로 협궤철도가 지나 이 협궤열차를 타고 데이트를 즐기려는 연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이용객이 없어서 관광용 이였다가 폐설되었다. 원래 이 협궤철도는 이 지역에서 많이 생산되는 천일염을 일제가 수탈하기 위한 수단으로 건설한 수인선이다.소래포구 어시장을 둘러보았는데, 둘러볼 때는 어시장도 기능이 분화되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버스에 타서 교수님 말씀을 듣고 그제야 알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어시장은 활어, 선어, 젓갈류, 건어물 등으로 분화된다. 어시장은 지난번 답사 때도 가866년 병인양요 때 이곳에서 프랑스 함대의 로즈 소장과 싸웠으며, 1871년에는 미국 아시아함대의 로저스중장이 이 곳에 침임 하였을 때 필사의 방어전을 전개하다 함락된 바 있다. 또한 1875년에는 일본 군함 운요호 와도 이곳에서 교전하였다. 성벽 아래쪽에 돌이 깨진 것이 하나 보이고 소나무 중간에 상처가 보이는 데, 이것 모두가 당시에 포를 한방 맞은 표시라고 한다.[초지진 출발 : 오후 5시 52분][광성보 도착 : 오후 5시 58분]광성보는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로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도로 천도 한 후에 돌과 흙을 섞어 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성이다. 고려시대의 성을 1618(조선 광해군 10년)에 외성을 보수하고 1656년 강화유수 서원이 광성보를 설치하였다.이곳은 신미양요의 가장 격렬했던 격전지로서 1871년 4월 미국의 로저스가 통상을 표방하면서 아세아 함대를 이끌고 침략하였을 때 상륙부대가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러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당시 지휘관인 어재연 장군이하 전용사가 용감하게 싸워 순국한 곳이다. 이 때 파괴된 문루와 돈대를 1976년에 복원하였으며, 당시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과 어재연 장군의 전적비 등을 보수·정비하였다.또한 이곳에는 돈대의 불쑥 솟아나온 모양이 용머리 같다하여 붙여진 용두돈대가 있다. 용두 돈대는 강화해협을 지키던 천연 요새로서 손들목 돈대에 속해 있는 외곽 초소겸 포대이다.용두돈대 앞의 수로 손들목은 조세를 운반하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다. 그러나 손들목은 침강해안의 바다 쪽으로 돌출해 나온 곳에 위치하여 물살의 세기가 밀물시를 기다려 거슬러 올라가야 할 정도로 세다. 따라서 이곳은 태안반도의 안흥량과 난파사고로 유명하던 곳이다. 실제로 물살의 세기를 보니 물이 소용돌이치면서 흐르는 것이 상당히 위험해 보였다.[광성보 출발 : 오후 6시 34분][저녁식사(길목식당) : 오후 7시 23분][숙소(마니산호스텔)도착 : 오후 7시 25분]2008년 3월 27일 : 셋째 날[.
    인문/어학| 2010.12.21| 16페이지| 1,000원| 조회(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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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사보고서(호남지방)
    2009년 3월 24일 (답사 첫째 날)청주->보은 내북(옥천지향사)->상주 모동(분지지형, 토지이용)->영동 황간(구하도)->무주 양수발전소->무주 안성(분지, 단구지형)->마이산(역암, 타포니)->내장산(1박)?청주 출발 am 08:05?보은 내북 옥천지향사 도착 am 8:59지향사란 조산운동에 의해 습곡산맥이 형성되기 이전에 두꺼운 퇴적암층이 쌓인 퇴적분지를 말하는 것이며, 우리나라에는 남한의 옥천지향사와 북한의 평남지향사가 있다. 옥천지향사는 조선계 지층이다. 조선계 지층은 고생대 전반기 해침으로 인해 바다 아래에서 조개류 등이 퇴적된 층이 암석화된 것으로 지층에는 조개류의 성분인 석회암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후 조선계가 지각의 융기로 육지화되었다. 평남지향사는 평안계 지층이다. 평안계 지층은 고생대 후반기와 중생대 초반기에 조선계가 다시 침강하여 호수가 되면서 다시 퇴적물이 퇴적되어 형성된 것으로 퇴적물이 퇴적되는 과정에서 죽은 육상 식물도 함께 퇴적되었는데 이것이 높은 압력과 열을 받아 탄화되어 이 지층에는 석탄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본 옥천지향사는 남한 중부에 약 80km의 폭을 가지고 남서해안에서 북동해안까지(변산-진안-보은-청원-단양-삼척) 거의 북동방향으로 연장된 옥천대에 분포하는 지층군으로 경사는 서쪽과 동쪽의 융기량의 차이에 따라 서쪽보다 동쪽이 더 급하다. 버스에서 내려 교수님을 따라 걷다 보니 마치 옛날에 사용하던 빨래판 같이 생긴 넙적한 암석들이 층층이 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전판암이였다. 전판암은 무겁지 않고 얇아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다. 건축 재료로 담, 지붕, 온돌의 구들장으로 이용되었으며, 최근에는 음식점에서 고기를 구울 때 사용하는 불판으로 이용되기도 한다.?보은 내북 옥천지향사 출발 am 9:39보통 군이나 도의 경계는 고개로 구분되는데 충청북도 보은에서 경상북도 상주로 넘어가는 도 경계에서는 왜 아무런 장애가 없을까?전 산업시대에는 농업이 주가 되었기 때문에 용수를 공급할 수 있는 하천을 중심지로 끓어 올려 저장하였다가 전력 수요가 많은 시간에 저장된 물을 하부저수지로 낙하시켜 발전하는 방식이다. 고등학교 한국지리시간에 귀에 딱지 앉게 들었던 양수식 발전소를 처음 보게 되어서 기대가 컸는데 막상 가보니 실망이 컸다. 실제로 볼 수 있는 것은 하부저수지(무주호)였고 상부저수지(적상호)는 가지 않아서 보지 못했다. 상부저수지가 있는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참 좋았을 텐데 너무 아쉬웠다. 양수식 발전의 우수성은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발전원가 절감이다. 대용량 원자력 발전소의 전기에너지(여유에너지)를 위치에너지로 변환시켜 저장하기 때문에 전기를 저장하는 효과가 있어 발전 원가를 절감하는데 효과적이다. 둘째, 발전효율 향상에 기여한다. 전기수요의 변동에 따른 대용량의 화력 및 원자력발전소의 출력증감으로 인한 기기의 수명단축, 효율 저하 등을 보완하여 이들 발전소의 열효율과 이용률 향상에 기여한다. 셋째, 전력계통의 신뢰도가 향상된다. 양수발전은 다른 발전방식에 비해 기동 정지시간이 짧고 용이하여 급격한 부하변동에 신속히 대응할 수 있는 예비전력으로써 양질의 전기를 공급한다.양수식 발전은 무주 말고도 청평, 삼랑진, 양양, 청송, 예천 등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처럼 내륙 곳곳에서 양수식 발전을 하는 이유는 전력은 운반거리가 멀어질수록 소실율이 크기 때문이다.?무주 양수발전소 출발 pm 1:00-점심식사 pm 1:19-2:12?무주 안성분지 도착 pm 2:26내가 사는 안성지역과 지역명이 같아서인지 한번도 와 본적 없는 안성분지가 친근감 있게 느껴졌다. 분지는 차별침식에 의해서도 형성되고 석회암지대에서는 용식에 의해서도 형성된다. 차별침식에 의해 형성되는 분지는 암석의 경연차에 따른 차별침식에 의해 형성되는 분지와 암석의 절리 밀도에 따른 차별침식에 의해 형성되는 분지가 있다. 암석의 경연차에 따른 차별침식에 의해 형성되는 분지는 일반적으로 하천 중?상류에서 하천의 합류지점에 소규모로 형성되고 암석의 절리 밀도에 따른 차별침식에 의해 형니를 본 기억도 나지 않는다. 대학생이 되어 지리학도로서 이곳을 다시 찾아오니 감회가 새로울 뿐만 아니라 그 때는 본 기억도 나지 않는 타포니가 너무 신기했다. 여러 번 답사를 다니면서 타포니를 많이 봐왔었지만 마이산이 타포니는 규모가 매우 커서 지금까지 봐 왔던 타포니와는 정말 다른 느낌이었다. 역암으로 이루어진 마이산의 타포니는 일주적 동결융해와 관련된 활발한 빙정의 쐐기작용에 의해 원력들이 빠져나와 형성된 것으로 북쪽사면보다 남쪽사면에서 활발하게 형성된다. 북쪽사면은 동결과 융해가 년 단위로 이루어지지만 남쪽사면은 동결과 융해가 일 단위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진안 마이산 출발 pm 5:00?숙소 도착 pm 6:502009년 3월 25일(답사 둘째 날)내장산->장성호(농업개발)->담양(죽세공)->무등산(애추사면, 주상절리, 암괴류)->유달산, 갓바위(목포항, 염풍화)->해남(2박)?숙소 출발 am 8:30?장성호 도착 am 8:58영산강 유역개발사업의 일환으로 1976년 10월 장성댐이 완공되면서 생긴 호수로, 총저수량은 8,970만 톤이다. 백암산 계곡을 따라 흘러내리는 황룡강을 막아 광주광역시 광산구와 나주시·장성군·함평군 등 4개 시군의 관개용수와 생활 및 공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장성댐은 농업용수 공급을 목적으로 건설되었으며 댐의 형식은 중심점토 사력댐이다.우리나라는 강수의 하계집중이 매우 크기 때문에 댐의 건설을 통해 물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대부분 안정적인 용수 공급을 위해 하천 상류에 댐을 건설하고 곡류하던 중류는 제방을 건설하여 유로를 직선화하며 하구부에는 둑을 건설하여 바닷물의 역류를 막는다. 이러한 전형을 가장 잘 갖춘 곳이 상류의 장성댐과 하류의 영산강 하구둑이다. 우리가 장성호에 갔을 때는 가뭄으로 물이 많이 줄어 있는 상태였다.?장성호 출발 am 9:36?담양 도착 am 9:36우리가 갔을 때 담양 죽세공품 박물관은 리모델링 중이여서 아쉽게도 박물관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대신 밖에 있는 죽세품 가게들을 둘덕산 너덜은 중생대 백악기에 석영안산암 용암이 지표상에서 급속히 식으면서 수축하여 수직방향으로 갈라져서 현재의 입석대나 서석대에서 볼 수 있는 주상절리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주상절리가 현재보다 추운환경(마지막 빙기)에서 동결과 융해작용이 반복되면서 암괴가 떨어져 미끄러져 내려와 산비탈을 덮게 되었다. 너덜지대는 암석지이기 때문에 숲보다 햇빛이 강하고 복사열이 많은 곳이기 때문에 너덜 주위에서는 강한 햇빛과 복사열에 잘 견디는 생강나무, 신초나무, 병꽃나무, 고광나무 등 많이 살고 있으며 다른 장소의 식물보다 잎이 두꺼운 것이 특징이다.그런데 실제로 무등산의 토끼등 까지 올라가면서 들은 교수님의 설명에서는 애추사면이라는 말씀보다는 암괴류라는 말씀을 사용하셨다. 애추사면과 암괴류의 차이점에 대해서 궁금했었는데 마침 디스커션 시간에 질문이 들어와 교수님께서 설명해 주셨다. 애추사면과 암괴류의 성인은 동일하나 애추사면은 주빙하기후라는 기후조건에서 동결과 융해의 반복에 의해 암괴가 떨어져 중력방향으로 흘러내린 것을 말하고 암괴류는 기후조건보다는 큰 암괴들이 동결과 융해의 반복에 의해 떨어져 중령방향으로 흘러내린 것을 말한다.-점심식사 pm 12:40?무등산 출발 pm 1:43?목포 유달산 도착 pm 3:41무등산을 올라갔다 온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유달산에 도착했다. 답사코스 중에 산이 3개나 되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유달산은 생각했던 것 보다 해발고도가 228m로 매우 낮았다. 우리는 유달산 노적봉에서 교수님 설명을 들었는데 설명을 들으면서 소금기를 품은 바닷바람에 의한 염풍화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유달산은 비록 해발고도는 낮으나 산정은 매우 날카롭고 층층기암과 절벽이 많다고 한다. 동쪽 산 꼬리에는 기상관측소, 시청, 법원 등의 관공서가 있고 산 중턱에는 사찰이 많다. 서쪽 산록은 바다에 임하여 해수욕장으로 유명하다. 주거지는 평지가 없기 때문에 산비탈을 따라서 형성되어 있다. 시가지는 항구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양 옆으로 확장되어 갔다. 볼 수 있다. 마치 서월타워에 와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남악신도시는 15만 명을 목표로 건설하고 있는 신도시인데 안산의 경우 30만을 목표로 계획한 도시였으나 현재는 80만 명이 넘고 있다. 앞으로 남악 신도시가 어떻게 발전하고 얼마나 성장할 것인지는 미지수이다.?전라남도 도청출발 pm 5:36?숙소 도착 pm 6:41-저녁식사 pm 6:522009년 3월 26일(답사 셋째 날)해남->황산(공룡화석)->보성 회천(다원)->순천 낙안(낙안읍성)->순천만->여수 만성리 해수욕장->여수(3박)?숙소출발 am 8:14?해남 우항리 공룡박물관 도착 am 8:46이곳은 중생대 백악기 시대에 살았던 공룡들의 발자국들이 아주 잘 보존된 세계적인 규모의 화석산지이다. 공룡발자국은 우항리에서 신성리에 이르기까지 약 5km 해안에 걸쳐서 발견된다. 이 지역에서는 대규모 발굴에 의해 세계적으로 매우 희귀한 540여 점의 공룡발자국, 그 당시 하늘을 지배하였던 450여 점의 익룡발자국이 아시아에서 최초로 발견되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물갈퀴가 달리 새 발자국 화석들이 발견된다.이 곳에 공룡화석이 많이 발견되는 이유는 중생대 쥐라기에 대보조산운동에 의해 소백산맥 등이 습곡산맥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지름 수십~수백km의 호수들과 늪지대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 때 형성된 호수들은 후에 퇴적분지로 모습을 바뀌었는데 경상분지계(경남 고성, 전남 해남-진도, 함평, 능주, 전북 진안, 격포, 충남 공주, 강원 통리)가 이에 해당된다. 영화 쥬라기 공원에서만 보던 공룡발자국을 실제로 보니 이게 정말 공룡발자국인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신기했다. 박물관 산책로에는 공룡을 조형물로 만들어 놓았는데 실제로 공룡과 함께 있는 것처럼 실감나고 영화 쥬라기 공원처럼 실제로 공룡을 다시 살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외학습장에서는 조각류 공룡관, 익룡조류관, 대형초식공룡발자국 보호각 우항리 퇴적층, 공륭발자국, 익룡발자국, 물갈퀴새 발자국 등 실제로 화석을 볼 수 있다.?해남 우항리 공룡박.
    인문/어학| 2010.12.21| 11페이지| 1,000원| 조회(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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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남지방 답사보고서, 문경새재를 중심으로
    답 사 보 고 서영남지방(2007년 9월18일~9월21일)주제 : 문경새재고사리분교-> 과거 옛오솔길-> 제3관문(조령관문)-> 점심-> 동화원터-> 이진터-> 색시폭포-> 귀틀집-> 제2관문(조곡관)-> 교귀정-> 조령원터-> 지름틀바우->태조왕건 촬영지-> 제1관문(주흘관)백두대간의 조령산 마루를 넘는 문경새재는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유역을 잇는 영남대로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사회 문화 경제의 유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문경-충주-여주-이천-서울로 통하고 낙동강과 한강을 잇는 가장 짧은 고갯길이었던 새재는 영남의 선배를 비롯한 보부상, 영남의 세곡과 궁중 진상품 등 각종 영남의 산물을 충주의 남한강 뱃길과 연결되어 서울 한강 나루터까지 운반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군사 요충지로 관문 주변에 돌담을 쌓아 군요새지 역할을 하였다. 새재(鳥嶺)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옛 문헌에 초점이라고도 하여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 또는 하늘재와 이우리재 사이의 「새(사이)재」, 새로 된 고개의 「새재」 등의 뜻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뒤에 이곳에 3개(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의 관문(사적 제 147호)을 설치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1960년대에 옛 새재 남서쪽으로 이화령이 뚫리면서 길로서의 구실을 잃고 관광지로 바뀌었다. 비록 길로서의 구실은 잃었지만 역사에 얽힌 갖가지 전설을 비롯하여 임진왜란과 신립 장군, 동학과 의병이 남긴 사담이 골골이 서리어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이 일대를 1974년 지방기념물(제18호), 198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 보호하고 있어 전국에서 관람객이 많이 찾고 있는 곳이다.우리는 고사리 분교에서 하차하여 제3관문인 조령관으로 출발, 제2관문,제1관문 순서으로 거꾸로 내려왔다. 제3관문인 조령관에 도착하기 전에 옛날 우리 선비들이 한양 과거길에 오르던 옛 오솔길을 지날 수 있었고, 주위환경을 둘러보면서 우리가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나무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대부분이 참나무, 떡갈나무등의 활엽수였다.이렇게 어떤 한 식생 생태계에서 비중을 가장 많이 차지하는 나무를 우점종이라고 하고, 식생 생태계에서 마지막 단계의 나무를 극상림이라고 한다.제3관문인 조령관문은 고려 태조가 경주를 순행차 고사갈이성을 지날 때 성주 흥달이 세 아들을 차례로 보내어 귀순하였다는 전설이 서려있다. 이 관문은 영남지방과 서울 간의 관문이며 또한 군사적 요새지이다. 삼국시대에는 이보다 동쪽의 계립령이 중요한 곳이었는데 고려초부터는 이곳 초참을 혹은 새재라고 하므로 조령이라 이름하고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하였다. 또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신립장군은임진왜란 때 충주 달천에서 배수진을 쳤으나 패하자 조령로를 막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하고 방비가 없음을 한탄하였다. 그후 충주에서 일어난 의병장 신충원이 오늘날의 제2관문에 성을 쌓고 교통을 차단하여 왜병을 기습하였다. 이로써 이곳의 군사적 중요성이 재확인되자 군사시설을 서둘러 숙종 34년(1708)에 이르러서야 3중의 관문을 완성하였다.조령관문에 올라 활구멍을 유심히 관찰해 보았는데 교수님 말씀대로 활구멍이 비스듬하게 뚫려 있는 것을 볼수 있었다. 이런 비스듬한 활구멍은 전쟁시 위에서 아래로 활을 쏠 때 유리하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제2관문인 주흘관으로 향하던 길에 동화원터, 상처난 소나무, 이진터, 색시폭포, 귀틀집을 보았다. 옛날 출장 중의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던 동화원터는 말그대로 터만 남아있어서 이곳에서 정말 숙식을 제공했는지는 실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조령원으로 전하는 제1관문에서 1㎞ 정도 떨어진 원터가 동화원이며 새재아래 동화원이라는 마을에 조령원이 있었을 것이라는 의문을 원터를 발굴한 신영훈 전문위원이 제기한 바 있는데, 1530년(중종25) 이행 등이 증보 개정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조령원은 새재의 고개 동쪽에 있다고 해서 지금의 동화원 동리를 지칭하고 동화원은 현의 서북쪽 15리에 있다고 하여 지금 조령원 터의 위치를 가리키고 있다. 문경현지에서는 위치의 기록이 없고 열 개의 원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라고 간단히 적고 있다.내려오는 길에 소나무에 V자로 된 상처들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이것은 일제말기(1943~1945)에 자원이 부족한 일본군이 한국인을 강제로 동원하여 에너지원인 연료로 사용하기 위하여 송진을 채취한 자욱으로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 상처는 아물지 않고 있다. 이러한 소나무에 난 상처를 지난 여름방학 때 안면도 휴량림에가서도 보았었다. 누군가 하트모양으로 파 놓은것인 줄 알고 신기해하며 나무옆에 서서 사진을 찍은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내 행동에 언짢기도하지만 지금에라도 그 사실을 알았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든다.이진터는 임진년(1592)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가 18,500명의 왜군을 이끌고 문경새재를 넘고자 진안리에서 진을 치고 천혜의 요새인 새재를 정탐할 때 선조대왕의 명을 받은 신립(申砬) 장군이 농민 모병군 8,000명을 이끌고 대치하고자 제1진을 제1관문 부근에 배치하고 제2진의 본부를 이곳에 설치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신립장군은 새재에서 왜적을 막자는 김여물 부장 등 부하들의 극간을 무시하고 대신 이곳 조령산 능선에 허수아비를 세워 초병으로 위장하고 충주 달천(탄금대) 강변으로 이동하여 배수진을 쳤으나 왜군 초병이 조선 초병 머리 위에 까마귀가 앉아 울고 가는 것을 보고 왜군이 새재를 넘었다고 한다.한편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친 신립 장군의 조선 농민군은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맞아 끝까지 싸웠으나 모두 장렬히 전사하였다.색시폭포는 조령산 줄기와 숲에 가려 새색시의 수줍은 듯한 모습으로 그 자태를 감추고 있으며 겨울에는 큰 빙폭을 형성하여 장관을 이룬다. 3단의 큰 폭포와 여러 단의 작은 폭포로 이루어진 정상은 평평한 구릉인데 양지쪽에는 다듬은 듯한 큰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있고 그 끝부분에는 자그마한 동혈이 있으며 건너쪽은 도 하나의 바위가 마주하고 있다. 시민공모로 색시폭포라 이름 지어졌으며 주변경관과 잘 어우러져 많은 관광객이 즐겨 찾고 있다. 300m 더 들어가야만 색시폭포가 나온다는 표지판을 보고 그때는 너무 지쳐있어서 만사가 다 귀찮아서 가보지 않았는데 이제와서 이렇게 멋진 색시폭포를 눈으로 직접 관찰하지 못했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귀틀집은 주로 산악지대에서 사용되던 한국식 통나무집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면 우물정(井)자 모양이 되며 방틀집, 말집, 목채집, 틀목집, 투방집 혹은 정한식집이라고도 한다. 귀틀집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어 3세기 중국의 역사서인[삼국지] [위지동이전 진한조]에 “나무를 옆으로 쌓아올려 집을 짓는데 모양은 감옥을 닮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삼한시대에 이미 귀틀집이 많이 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북시베리아, 파르미고원, 북유럽, 남?북아메리카 산악지대등 세계적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고, 이곳에도 1970년대 말까지 화전민의 귀틀집이 주흘산 등산로변에 남아있었으며 현재 울릉도 나리분지에 남아있는 귀틀집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귀틀집의 건축 방법은 나무와 나무사이가 엇물리는 네 귀가 잘 맞도록 아귀를 지어 놓으며 나무사이에는 진흙을 발라 메꾸어 바람이 들지 않아 보온성이 좋고 특히 자연에서 얻은 소재를 그대로 주거생활에 반영한 것으로 방안의 습기를 조절해주며, 산림욕의 효과를 볼 수 있어 오늘날 옛 형식을 보완하여 현대인의 웰빙 주거공간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제2관문인 조곡관은 영남에서 서울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였던 문경 조령의 중간에 위치한 제2관문으로 삼국시대에 축성되었다고 전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조선 선조 25년(1592) 왜란이 일어난 후에 충주사 신충원이 이곳에 성을 쌓은 것이 시초가 되었고 중성이라고도 한다. 숙종조에 관방을 설치할 때 옛 성을 개축하였으나 관은 영성(3관문)과 초곡성(1관문)에만 설치하고 이곳에는 조동문 또는 주서문을 설치하였다. 그후 1907년에 훼손되어 1975년에 복원하였다. 이렇게 복원한 문루를 옛 이름 조동문이라 하지 않고 조곡관이라 개칭하였다. 누각은 정면이 3칸 측면 2칸이며 좌우에 협문이 2개 있고, 팔작(八作)지붕이다.주곡관에서 제1관문인 주흘관을 향하던 길에 교귀정과 조령원터, 지름틀 바우, 태조왕건촬영장를 보았다.
    생활/환경| 2007.12.03| 4페이지| 1,000원| 조회(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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