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은 산업이다.기능성과 실용성으로 살펴본 현대 패션의 패러독스1. 서문패션은 산업이자 예술이다. 기능성과 실용성에 근거하여 생산라인을 밟는 산업인 동시에 조형성으로 무게중심을 옮기면 예술의 범주로 이동한다.그동안 내가 매체를 통해 패션쇼나 유명 디자이너의 작품을 보면서 일반인은 사서 입지도 못할 기괴한 저 옷들은 만들어서 뭐하나 라고 생각했던 몰이해(沒理解)는, 그 작품들이 이 사회와 문화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고 어떤 방식으로 새로운 트렌드를 창조해내고 있는 가를 볼 수 있는 눈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 옷들을 예술로서가 아닌 생산품으로서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오랫동안 많은 패션 디자이너들의 작품들을 보며 그동안 관심이 없었던 영역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예술로서의 감상뿐 아니라 디자인으로서의 분석이기도 했다.그것은, 그래픽이 2D를 기반으로 하고 제품디자인이 3D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면, 패션 디자인은 2D에서 존재하는 대상을 최종적으로 3D의 세계에서 구현해낸다는 점의 발견이었다. 이 같은 나의 생각은 패션 디자인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어설픈 고찰이지만, 이러한 차원의 변주에서 오는 특성이 다른 디자인 분야에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특히 이세이 미야케의 작품은 더욱 인상이 강렬했다.기초지식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에이 미야케의 작품 세계를 통괄하는 분석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코드 한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코드를 중심으로 세 가지 관점에서 그의 디자인 철학(동시에 예술 세계)에 접근하고자 한다.내가 발견한 코드는 바로 Paradox, 모순이었다.2. Paradox 1, 평면과 입체이세이 미야케의 작품 연보는 크게 5개의 시기로 나누어질 수 있는데 내가 처음 주목한 시기는 70년대이다. 70년대 이세이 미야케는 동서양을 오가는 여행을 통해 신체를 한 장의 천으로 감싼다는 A Piece of Cloth의 개념을 정립하였다. 이는 지극히 동양적인(혹은 일본적인) 개념을 서양 복식에 주입한 것이다.이 당시의 작품을 보면 한 장의 천으로 만든 옷들을 볼 수가 있다. 한 장의 천은 그 자체로 하나의 평면을 이룬다. 하나의 평면으로 하나의 입체를 감싼다. 여기서 첫 번째 패러독스가 발생한다.의복이라는 것은 실용성이라는 것이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된다. 입기 편해야 한다는 것도 여기에 해당되는 말이다. 당연히 인체의 형태에 제대로 맞는 옷이 편한 옷이라는 관점이 발생한다. 인체는 3D의 형태이므로 옷을 만드는데 역시 입체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세이 미야케의 작품은 하나의 평면으로 입체를 감싸려 시도한다.2D가 3D로 변주되는 동안, 평면으로의 속성과 입체로서의 속성이 공존하게 되는데, 이는 3D로 구현된 2D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것이 인체에 편안함을 줄 수 있는 것일까?내가 찾아낸 패러독스의 해답은 이것이다. 입체가 입체를 만났을 때, 그 하나는 다른 하나에 종속된다. 서로 같은 영역이기 때문이다. 인체의 경우엔 옷에(입체적으로 구성된 옷) 종속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옷이 허가하는 신체활동 영역이 규정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위 영역의 경우엔 상위영역에서의 구성체가 그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2D가 3D를 제어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동시에 3D 역시 2D의 속성을 망가뜨리지 않는다.매우 관념적으로 설명하였지만, 실제로 이세이 미야케의 옷은 그러하다. 평면이 입체를 감싸면 필연적으로 일정한 공간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 공간이 이세이 미야케가 만든 옷들이 가지는 특유의 속성으로, 그의 옷이 편할 수밖에 없는 요인이다.3. Paradox 2, 인체와 옷그렇다면 심미적(審美的)인 관점에서 생각해 보았을 때, 평면을 두른 입체는 어떻게 보일 것인가?애초에 평면이었지만, 사실상 옷은 입는 순간 입체적으로 구현될 수밖에 없다. 다만 평면이 곡면이 되어도 면(面)의 속성을 그대로 간직하게 하는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다.전술하였듯이 3D역시 2D의 속성을 망가뜨리지 않는다. 인체는 둘러 입음으로써 입는 방식의 자유를 얻었듯이, 옷 역시 자기 고유의 속성을 보전할 수 있게된다.그렇다면 다른 차원의 속성을 간직한 두 비균질적 요소가 어떻게 화합할 수 있는가? 이것이 내가 본 두 번째 패러독스이며 그 해답은 Pleats 에서 찾을 수 있었다. 사실상 해답이라기 보다는 새로운 모순의 발견이다.Pleats 역시 기본적으로 평면의 속성을 간직하고 있다. 컴퓨터의 3D 프로그램에서 보는 평면의 모습을 연상하면 되겠다. 이 플리츠의 주름은 기본적으로 평면으로 이루어져있다. 평면과 평면의 작은 접합들이 주름을 형성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이 평면들의 집합체가 입체의 공간으로 나왔을 때, 예상치 못했던 자유로운 곡선과 리듬감있는 섬유의 흐름을 탄생시킨다.이것은 신체의 움직임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궁극적으로 이에 제어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인간의 몸과 잘 어울리지만 동시에 독자적이라는 것이다. 그의 옷이 육체의 자유를 증대시키고자 했듯이, 옷 또한 독자적 자유를 획득한 것이다.이로서 두 개의 비균질적 요소가 서로의 독자성을 바탕으로 화합하게 되는 모순된 장면을 보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소재의 선택은 이를 더욱 가능케 하였다.)또한 플리츠의 평면적 요소는 조형적으로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하는데 이것이 인체의 유기적 아름다움을 부각시키기도 한다. 형태적으로도 그렇지만 인간의 동세에서 파장되는 플리츠의 동적인 움직임은, 마치 스피커처럼 인체 자체의 속성을 확장시킨다. 그와 동시에 플리츠의 마치 조각을 해 놓은듯한 기하학적인 형태는 중요한 대비요소가 되는 것이다.4. Paradox 3, 전통적인 혹은 세계적인알다시피 이세이 미야케는 직관과 관습이라는 일본적 가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에 모리 나 켄조 와 확연히 구분된다. 전통에 가치를 둔 창조 라는 기치는 이세이 미야케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하지만 서양 복식의 전통을 매우 딱딱한 것으로 여기던 미야케가 일본적인, 동양적인 심미적 세계관 안에서 만족할 수 있었을까? 혹은 양 문화의 차이를 조화롭게 이용하는 것에 대한 서구인들의 암묵적 요구에 묵묵히 답해주는 것만으로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분명 그는 자신이 태생적으로 지닌 일본인으로서의 심미적 세계를 바탕으로 다른 디자이너와의 변별점을 생산해내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일본스타일도 아니고 서부스타일도 아닌 또 다른 스타일을 창조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라고 말한다.전통적인 것이 곧 세계적인 것이라는 등식은 애초에 납득하기 힘들다. 이 두가지 요소를 동시에 획득하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이다. 대신 미야케의 경우엔 자신이 가진 일본적인 심미관의 관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본질적인 접근을 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어떤 특정한 스타일에 갇히지 않기 위하여 천과 육체의 교류, 교감이라는 제1에 다가가고자 한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스스로 일본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탐구의 훈련과정이 선행되었기에 가능했으며, 이런 역설적 인과로 인해 오히려 전통적인 것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문화의 절정기, 진경시대제2의 황금기를 기대하며문화란 무엇일까 하는 고민 중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뜻밖에 김치였다. 김치라고 하면 우리 민족 음식문화를 대표할만한 것이고, 또 그 김치 중에서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고춧가루로 빨갛게 무친 배추김치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고추가 전래되어 온 것은 불과 17세기경에서였고 오늘날 우리가 먹는 배추김치의 모양은 19세기말에 이르러서야 지금의 것에 가까워졌다고 한다. 핵심 재료가 외래에서 보급되었고 그 이전에는 다른 형태의 것이 오랜 시간동안 유지되었음에도, 우리는 현재의 김치를 우리의 독자적이고 고유한 음식문화로 칭송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 것에 외래의 것을 결합하여 다시 우리 것으로 완벽하게 소화해냈기 때문이다.대저 문화란 그런 것이리라. 오장이 있어서 시간이 지나면 심장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피를 원하고 받아들인다. 또한 위장은 외부의 양식을 받아들여 이를 소화하려 한다. 하지만 묵은 피를 몰아낸 뒤 그대로 탈을 바꿔 쓰는 것이 아니라 결국엔 제 살로 돋아나게끔 하는 것은 그 민족이 지니는 문화자생의 에너지이다. 어떤 민족을 문화민족이라 부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현재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의 수준만이 아닌, 생멸을 거듭했을 그 민족문화 역사에서 증명되는 자생력의 유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안타깝게도 우리는 한동안 우리 스스로 이러한 자생력을 망각하거나 혹은 의심해왔다. 조선 왕조가 사라질 당시 일제에 의한 식민사관의 유령이 지금까지도 힘을 뻗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의 식민사관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말살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마침 조선말의 우리 모습은 이러한 사관에 적합한 예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조금만 주의 깊게 바라보면 문화의 성쇠기멸 중 가장 쇠약한 시기를 통해 그 문화사 전체를 평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때는 우리 문화의 황금기라 할만한 진경시대가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고 어떻게 우리 민족의 문화 수준을 논할 수 있겠는가.이념은 문화와 양식을 낳는다고 한다따라서 고유의 독자적 이념이 자리잡을 때 문화와 양식도 독자적인 모습을 지니게 된다. 조선 진경시대의 경우는 중국에서 전래된 주자성리학이 완벽한 이해를 통해 조선성리학으로 체화되면서 꽃피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퇴계 선생이 전해준 주자 이기이원론의 완벽한 이해는 율곡으로 하여금 이기일원론의 신학설을 발전시킬 수 있는 토대가 되었고, 이를 통하여 조선은 중국의 이념에서 벗어나 조선 고유이념을 획득하게 되었다. 조선성리학을 바탕으로 이를 지지하는 이들에 의해 문화 전반에 걸쳐 조선 고유의 색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경주되는데, 서포 김만중의 한글소설과 송강 정철의 한글가사의 국문학, 간이 최립의 조선 한문학, 석봉 한호의 조선고유서체 성립, 창강 조속의 조선 고유화풍 시도 등 여러 분야에서 괄목한 성과를 이뤄내고 있었다.특히 화성이라 불려 마땅한 대화가 겸재 정선은 이러한 진경 문화를 주도해가며 우리 고유의 진경산수화풍을 대성시킨 인물이다. 그로 인해 우리의 화풍은 진정으로 중국화풍에서 벗어나 우리 산과 들의 아름다움을 주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역시 조선성리학에 통달한 사대부로서 당시 조선중화주의가 사회 전반에 만연해있을 시기 그림을 통하여 우리 고유색을 찾음으로써 조선 고유문화 창달에 크게 이바지한 것이다.장안사 나 불정대 를 그린 겸재의 그림을 보면 중국 북방화법과 남방화법이 기가 막힌 조화를 이루며 우리 강산을 사생하기에 적합한 새로운 화법이 탄생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골산을 선묘로 표현하고 토산을 묵법으로 사생하는 것은 성리학의 요체중 하나인 음양의 조화가 한 폭의 그림 안에 온전히 살아있음을 보여준다. 중국에서조차 시도만 있었을 뿐 완성되지 못했던 이러한 조화가 조선의 땅에서 고유의 색채로 자생하여 대성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진정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고양시킬만한 큰 업적이다. 조선성리학과 주역에 능통했던 그가 과거에 떨어져 오히려 그림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문화 발전의 측면에서 볼 때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겸재는 이미 30대에 진경산수화의 기틀을 마련하고 그 후에도 연구를 거듭하는데 그 와중에서도 중국 그림을 계속해서 연구했다는 점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서양 문물과 사상이 판치고 민족고유의 이념이 그 자리를 계속 잃어가는 듯 보이는 현대를 살아가며 오히려 외래의 사상과 문물을 더욱 적극적으로 파헤치고 이해하려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후에 중국보다 뛰어난 남북통합화법을 오히려 중국으로 역수출한 겸재의 예에서 보듯이, 외래 문화의 완벽한 이해는 자기 문화의 더 큰 발전을 위한 초석같은 것이다.여하튼 겸재는 노년에 이르러서는 대가만이 지닐 수 있는 극도의 세련미와 추상미를 바탕으로 사물의 형태와 색채를 관통하는 본질에 접근하게 된다. 마치 서양에서 젊은 시절 완벽한 구상 표현 능력을 숙련하고 추상의 세계로 파고 들어간 피카소처럼, 우리에겐 이에 견주어 보다도 전혀 아쉽지 않은 겸재라는 대화가가 있었던 것이다.산수화가 겸재를 통해 진경의 조선 고유화풍을 완성해가는 와중에 조선 풍속화 역시 관아재 조영석을 통해 조선 고유색을 찾아가고 있었다. 겸재의 후배였던 관아재는 비록 자신의 장기인 인물 풍속화로도 겸재의 빼어난 실력에 비하면 밀리는 것이 사실이었으나, 겸재가 애써 풍속화의 영역에 자리하지 않으려 했던 것은 동문의 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어찌되었든 이제 풍속화 안에서도 조선인은 그 살던 모습 그대로의 조선인으로 표현되었고 드디어 중국 옷을 벗게 되었다.우리가 진경시대를 살피며 또 한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은 그 진경문화의 적극적 후원자로서 영조와 정조가 존재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미 그 시대를 대표할만한 최고의 학자이자 예술가이기도 했던 정조와 같은 왕이 있었기 때문에 진경시대가 우리 문화의 절정기로 자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새로운 이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를 꽃피게 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면 진경문화의 꽃이 그토록 화려할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정조는 차후 생명력을 다할 조선성리학을 대신할 새로운 이념을 모색하고자 했던 혜안을 발휘할 정도이니, 과연 오늘날 우리의 치정자들은 반드시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문화의 꽃이란 개인의 힘만으로 만개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Picasso 의 생애와 그의 작품세계Picasso, Pablo (1881~1973)스페인의 한 도시 말라가의 하얀 저택에서 피카소가 태어난 때는 1881년 10월25일...아버지는 시골 미술학교 선생님이자 비둘기를 소재로 많은 그림을 그린 화가였다.피카소는 말을 배우기도 전에 그림을 그릴 줄 알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용한 단어가 "연필"이였다.10세 때 이미 아버지를 능가하는 그림 실력을 가지고 있었던 피카소는 14세 어린 나이로 바르셀로나 론자 미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이 후 16세까지 스페인 미술학교의 모든 콩쿠르를 거의 다 휩쓸어 버려 더 이상 치러야 할 시험이 없었던 피카소는 이렇게 외쳤다. "나는 결코 어린아이다운 데생을 하지 않았다. 난 12살에 이미 라파엘로처럼 그림을 그렸다."1900년 19세의 피카소는 바르셀로나 뒷골목에 있는 '검은 고양이'라는 선술집에서 첫 번째 전시회는 갖는다. 150여 점의 데생들은 대부분 시인, 작곡가 등 예술가 친구들의 모습을 스케치한 작품이었다.그해 피카소는 천재 예술가들의 집합소인 파리로 간다. 피카소에게 있어 파리는 성공의 기회가 있는 곳이었고 파리에 머물러야 한다는 사실은 성공의 지름길이기도 했다. 파리에서 처음 몇 달 동안은 그 곳의 모든 박물관을 빠짐없이 순례했다.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 앞에서 넋을 잃었으면 드가, 툴루즈 로트렉, 고갱, 반 고흐의 그림들에 대해서는 정열적인 탐색을 하였다. 특히 툴루즈 로트렉의 기이한 그림에 가장 관심이 많았다. (로트렉은 초기 근대 판화부분을 개척한 거장 중의 하나다. 프랑스 무도회장과 무희들의 모습을 소재로 한 여러 인상적인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전세계의 관람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1890년대 당시로서는 새로운 기술인 칼라 석판 인쇄술 분야를 개척함으로써, 풍자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거리 광고의 표현형식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의 친구가 지적한 것처럼,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대담한 구성과 눈부시게 화려한 색상은 마치 뭔가에 얻어맞은 듯한 강렬한 효과를 발휘했다. 그리에 동행했던 절친한 친구 카사게마스는 실연으로 권총 자살을 하게된다. 이 소식은 피카소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시기에 그는 온통 푸른색으로만 세상을 본다.청색은 비참과 절망에 조화되는 차가운 색이다. (청색시대 : 1901~ 1904 )로맨틱한 파리생활의 또 다른 얼굴에는 잔인한 고통, 정신이상이 될 것 같은 현실이 있었다. 질병과 추위, 배고픔을 체험한 피카소는 밑바닥 삶의 근원적 외로움을 짙푸른 청색을 통해 나타낸다.그런데 왜?현대 도시에서 버림받은 비참한 사람들을 소재로 한 청색시대의 그림들이 다른 작품들은 제치고 부자들에게 그토록 인기가 있었을까?1904년 23세의 피카소는 파리에 완전히 정착하게 되는데, 이 곳은 지독히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탁선이라고 불리는 빈민굴이었다. 세탁선은 파리의 가난한 예술가의 집합소로써 르느와르, 브라크, 막스 자콥, 모딜리아니 등이 살았던 곳이다. 또한 삼류가수, 목수, 약장수, 건달 등 다양한 계층의 이웃들이 있었다. 피카소는 평생을 상상할 수 없을 무질서 속에서 살았다. 정돈은 곳 머리를 굳게 한다고 생각했다. 무질서는 풍부한 아이디어와 창조력을 키우게 하는 토양이었기에 무질서는 곧 질서였다.그 시기에 피카소는 조각가와의 결혼에 실패한 후 혼자 세탁선에 살고있던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게된다. 페르낭드는 "피카소를 처음 보았을 때 작고 까무잡잡했지만 눈빛은 너무도 강열했고 무척 불안스런 태도였지만 도무지 저항할 수 없었다" 고 했다.그녀의 등장과 질병의 호전으로 불안과 초조는 가시고 자기 미술에 대해 점차 장밋빛 자신감을 얻는다. 피카소와 같이 살게 된 페르낭드는 그를 위해 갈게는 며칠 동안 꼼짝 않고 모델을 서 주기도 했다. 이들은 사랑했으나 너무도 가난해서 외출할 때 신을 구두 한 켤레조차 없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피카소는 밥은 굶더라도 서커스 구경은 거의 매일 가다시피 했다. 또한 광대나 여성곡마사와 친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이 시기를 장밋빛 시대 (1904~1906)라고 하는데 장밋빛 시대에는 서도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다. 이 당시 미술품 상인 볼라르가 2000프랑을 주고 '장미빛 시대'에 해당하는 대부분의 그림을 사들였다. 이 일은 미술로 억만장자가 된 피카소 삶의 서막에 불과했다.20세기미술의 최고의 혁명이자 피카소를 세계적인 화가의 위치에 올려놓게 되는 '큐비즘'의 출발점이 바로 흑인미술이었다. 원시적이고 본질적인 감각들을 '직선적'으로 표현한, 흑인 조각품과 탈에 깊은 충격을 받는다. 그는 계시처럼 다가왔던 흑인미술에서 지극히 단순한 기하학적 상징성과 순순한 감각을 발견했던 것이다. 즉, 입은 장방형, 눈은 원주, 코를 표현하는 구멍 등의 새로운 조형세계로의 문을 본 것이다. '큐비즘'의 혁명적인 시각은 그 이후의 미술과 영화, 건축을 포함한 모든 예술장르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큐비즘'의 선구자로서 피카소의 전설적인 명성을 얻게 하는 작품이 바로 아비뇽의 처녀들이었다.1907년 늦여름 26세의 피카소는 몇 달에 걸쳐 수 백장의 데생과 습작을 거쳐 거대한 작품을 하나를 완성했다. 그 유명한 아비뇽의 처녀들을 처음 공개 하던날 많은 사람들은 경악과 분노에 빠져 말을 잃었다. 대 화가였던 마티스는 격분했고 이 후 입체파의 쌍두마차가 될 브라크는 이렇게 외쳤다. "이거 마치 우리들에게 밧줄을 먹게 하거나 불을 들고 석유를 마시게 하는 것 같다"친한 친구들조차 분노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단 한사람 현대 회화의 저명한 미술 수집상이 될 칸베릴러만이 칭찬을 하였다.피카소는 아비뇽의 아가씨를 세상에 내놓은지 2년만인 28세 때부터 극심한 빈곤에서 벗어나 돈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사회의 흐름을 본능적으로 깨달아 과감하게 표현한 피카소의 작품은 사람들의 의심 섞인 눈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독일, 미국인들에게 꾸준히 팔려나갔다.당시 페르낭드와 사귀고 있었던 피카소는 그의 친구인 마르쿠스의 애인 '에바'에게 반하여 열열한 구애를 하게된다. 이 시기의 작품 밑에는 항상 에바에 대한 사랑의 문구가 기록되어 있었다.이때가 분. 철물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종이, 헝겊, 함석, 밧줄은 물론이고 물감에다가 모래와 톱밥을 섞어 사용하기도 했다. 이렇게 소박한 주제와 일상적인 재료들로 제작된 콜라주는 고상한 가치만이 예술이라고 여기던 부르주아 예술관에 맞지 않았으나 아이러니 하게도 오늘날 이런 작품들이 보험에 가입된 채 고상함을 찬양하는 작품보다 중요한 곳에 전시되어 있다.1915년 12월14일 1차 세계대전 이듬해에 젊은 여인 에바 구엘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에바가 죽은 후 무수히 많은 여인들을 사귀었던 피카소는 자신이 무대미술과 의상을 담당했던 퍼레이드라는 공연에서 25세의 러시아 무용수 올가 코클로바에게 흠뻑 빠지게 되어 1918년 7월 12일 36세의 피카소는 아폴리네르, 막스자콥, 쟝콕토가 증인으로 참석한 파리의 한 교회에서 첫아들 파울로를 낳아줄 올가와 결혼식을 한다.올가와 결혼생활을 하는 시기 에 피카소는 입체주의가 아니 감상자의 입맛에 맞는 강렬한 사실주의 작품을 그린 탓에 일부 비평가들은 입체주의를 배신한 기회주의자라는 신랄한 비평을 가하기도 한다. 마흔을 갓 넘은 화가로써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그림이 거래되었으면 점차 거부가 되어갔다.아들 파울로를 낳은 후 유모, 요리사, 하녀, 운전수까지 둔 한층 더 사치스런 생활이 계속되었다. 올가의 깔끔한 기질과 지나친 상류사회의 생활로 피카소는 속박과 외로움이 더해졌다.또한 1924년 불기 시작한 초현실주의 는 피카소에게 격렬한 분열과 더욱 부채질하면서 이혼을 생각하게 한다. 1927년 46세의 피카소가 만난 마리 테레즈는 17세의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미술에는 문외한이었지만 수영과 등산 등의 운동으로 단련된, 건강미 넘치는 천진한 소녀였다.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의 프로포즈를 육개월이나 거절했으나 끝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마리 테레즈의 18번째 생일이자 성년식 이였던 날 이후 피카소는 올가와 살고 있는 자신의 집과 멀지 않은 곳에 마리 테레즈를 위한 비밀거처를 마련해 준다. 피카소는 그녀의 성적 환상을 주제로 조각 쏟도록 격려했다. 한달 여만에 완성한 '게르니카'는 파시즘의 공포 앞에 의연히 맞선 분노의 외침이며 혁명의 상징이였다. 피카소는 이렇게 외쳤다. "회화는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항하는 공격적이고 방어적인 전쟁의 도구이다."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스페인의 프랑코와 더불어 다시 한번 전 유럽이 2차세계대전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1940년 59세의 피카소는 전재의 공포 속에서도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독일군은 피카소를 타락한 예술가로 보고 비난하였다.1944년 파리가 해방되자 피카소는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다. 비록 총을 들지는 않았지만 나치의 블랙리스트 첫머리에 기재되어 있던 화가였다. 파시즘에 대항한 레지스땅스의 간판인물이 되어 버려 프랑스는 파리 해방 기념의 첫 사업으로 피카소의 작품전을 열게 하였다.도라와의 관계를 유지하던 62세의 피카소는 1943년 어느 날 식당에서 21살의 프랑수와즈 질로를 만나 첫눈에 반한다. 피카소의 첫아들인 파울로보다 나이가 어렸던 프랑스와즈는 피카소와의 사이에서 아들 클로드와 딸 팔로마를 낳는다. 또한 날카로운 지성을 지녔던 바로 전 연인, 도라 마알은 피카소와의 이별로 인해 정신착란증을 일으켜 치료를 받아야 하는 불행한 여인이 되었다.피카소는 공산당에도 입당하게되어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의 예술가가 되었다. 그러나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위대한 인물이라는 명성은 얻었지만 예술은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도외시되었다.1949년 공산당이 평화운동을 상징할 수 있는 포스터를 피카소에게 의뢰한다. 그 포스터 한 중앙에는 한 마리의 비둘기가 앉아 있었다. 이 후 피카소가 그린 비둘기는 전 세계에서 평화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1950년과 1962년, 두 차례에 걸쳐 레닌 평화상을 수상하게된다.70대의 피카소는 도자기와 도기로 유명한 발로리스 시를 발견하고 흥분하다. 새로운 장르에 손을 댄다는 설레임 때문이였다. 피카소의 마지막 여자 쟈클린은 도자기공장 관리인의 조카로써 공장의 뒷일을 보살었다.
냉전은 끝나지 않았는가냉전과 대학 노엄 촘스키 외 지음"어떤 사회든 존경받는 지식인, 즉 진지한 지식인으로 인정받게 된 사람은 권력에 종속될 경향이 매우 농후하다. 권력에 종속되지 않는 사람은 지식인으로 인정받지 못하거나 혹은 비판자, 아니 어쩌면 '이데올로기적' 반대자로 주변화된다"노엄 촘스키의 말이다. 이 말이 단순히 미국의 경우에 한정되지 않음은 예상하기에 충분하다. 특히나 냉전과 분단논리가 대학과 지성인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박탈하고 억압했던 한반도의 역사에 비추어 보면, 반세기동안 우리 사회를 이끌어 왔던 대표적인 지식인들이 우리 민족에게 피드백 해온 많은 정신들과 영향력들의 건강성에 의문에 생겨난다.특히나 한반도의 많은 대학들은 냉전시대 이른바 미국적 보편 이라 할 수 있는 학문 패러다임, 행동주의라 규정할 수 있는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하지는 않았는가. 혹 그들의 행동주의를 보편과학으로 상정, 세계 지식의 흐름에 쉽게 편입하고자 했던 안이한 구애는 아니었을까.홍기빈은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란 책의 서문에서 서울대 경제학과의 몇몇 교수들의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들은 경제학과의 커리큘럼을 하바드 경제학과와 똑같이 만들자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더란 것이다. 보편성 에 대한 맹신. 세계 주류라는 것에 대한 비판없는 애정. 혹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사회적 맥락을 살피려 하지 않는 현대판 사대주의. 이런 것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그 깊은 뿌리는 분단 이후 우리 사회에 끝없이 뿌리내리고 수 없이 많은 추종자들에 의해 자생해 오고 있을 것이다.굳이 우리 나라의 경우가 아니더라 해도 20세기 후반 인류의 삶을 규정한 건 뭐니뭐니해도 `냉전'이었다. 정치 경제 군사 뿐 아니라 그것은 역사를 사유하는 방식에서부터 다른 나라들의 문화 및 사회를 접근하는 방식까지 바꿔놓았다. 이미 냉전의 역사적 흐름 위에서 태어난 많은 세대들은 그것에 대해 비판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아니 그럴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맹목적 애국심에 젖어들었을 지도 모른다.냉전이 사라진, 혹은 사라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도 미국의 대중문화는 냉전시대부터 이어져온 핵무기와 팍스 아메리카나의 아이콘으로 대표되는 자신들의 내성에 대해 끊임없는 자가복제를 통한 향수를 지속해가는 모습은 아직도 다양한 코드를 통해 읽혀지고 있다. 그것이 새로운 시대정신에 어긋난다고 하더라도, 틀림없이 미국은 세계 1등 국가였으며 모든 것의 비교우위를 장악한 듯 보였다. 그 부작용은 차치해두고라도 말이다.대표적은 부작용은 지식층에서 더욱 뚜렷하게 각인되어 나타난다. 국가의 개입은 대학으로 이어졌으며, 당시 MIT예산의 90%가 펜타곤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대표적 사례 중 하나다. 하워드 진 교수는 대학에 대한 국가의 과도한 지원은 결국 학문의 자유를 담보했으며 정부를 비판하는 교수들의 목줄을 죄는 것이었다고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정치적 상황에 대한 공개적 비판이 금지된 미국 학자들은 철저하게 자기검열에 나서야 했고, 씌어지지 못한 책과 강의되지 못한 강좌, 그리고 수행되지 못한 연구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하게 측정할 길이 없다."하버드대의 생물학교수 르원틴은 기업가적인 교수들은 대학으로 유입되는 엄청난 금액의 공공자금을 받아쓰며 자신의 도덕적 정당성과 자존심을 버리고 냉전구도에 그럴듯한 논리를 제공해 줬다고 비판한다. 처칠이 1946년 선언한 냉전(cold war)은 세계대전으로 덕을 본 미국 행정부내 군부세력들에게 아주 매력적인 용어였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는 것은 그들에게는 하늘의 은총이었다. 냉전은 확실히 전세계 정치 경제 권력을 둘러싼 보다 큰 규모의 투쟁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더 큰 국가의 역할을 정당화했다 . 냉전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냉전을 필시 발명해 내기라도 했을 것이다.필자들은 냉전이 각각 전공분야에 끼친 영향을 논한다. 버클리대 인류학과 교수 로라 네이더에게 미국의 사회인류학은 원주민 착취와 지배를 위한 식민주의의 시녀 였을 뿐이다. 버클리대 역사학과 명예교수 하워드 진은 외교사 학자집단이 국제문제에 미국이 개입할 정당성과 대의명분을 이론화하는 데에 가장 열성적이었다 고 말한다. 가령 베미스같은 외교사학자는 역사학회 회장 취임사에서 우리는 덜 일하고 더 많이 받으려는 불순한 파업 때문에 국가적 목적과 군사적 대비를 망각해 버리곤 한다 라고 살벌하게 외쳤다. 웨슬리언대 영문학교수 리처드 오만은 냉전기에 영어교육이 군부 산업 정부 대학 복합체 라는 단단한 구조 속에서 어떻게 정치화되고 부패돼 갔는지 고찰하고 있다. 마침내 대학들은 미국의 대외정책뿐 아니라 미국 내의 정치사찰에 대해서도 침묵을 지켰고 스스로 나서서 저작물들을 검열하기도 했다.이러한 모습들은 현상면에서나 비판대상으로서나 우리 나라의 대학에 대부분이 대체로 적용 가능하지 않을까. 곳곳에 냉전과 분단시대의 낡은 논리를 견지하며 계층 지역 남북간 화해를 거부하고 있는 학자들은 사상의 자유로운 교환에 대한 갈구를 버리고 새로운 왜곡된 갈등구조에 대한 탐미에 시간을 버리고 있지는 않은가.대학뿐이 아니다. 한반도에서 냉전이 가져온 슬픈 역사의 현실은 아직도 주한미군 주둔이라는 안타까운 현실로 우리 땅 안에서 살아있다. 주한미군 주둔의 문제에 대해 무조건적 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젠 누가 보아도 철수에 대한 당위성을 찾을 수가 있다. 비단 최근 미선, 효순 양의 참혹한 희생을 언급하지 않더라 하더라도 말이다.그 당위성은 주한미군 찬성자들의 주장에 대한 정확히 반대쪽 입장에서 힘을 얻는다. 주한미군은 전쟁을 억지하기보다는 오히려 한국이 남의 전쟁에 휘말릴 위험성을 더 높이고 있다는 것이다. 호전적인 레이건 미국대통령 재임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와인버거는 주한미군은 북한보다는 소련을 겨냥하고 있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는 만약 중동에서 소련과 전쟁이 일어난다면 미국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했다. 그것도 일본군, 미군, 한국군이 합동으로 북한을 침공하고는 이곳 한반도에서 소련에 대한 핵공격까지 벌릴 것이라고 했다.
유기적 디자인, 기하학적 디자인1장 시작하며과연 디자인이란 무엇인가?흔히 말하는 'a mental plan'이나 a plan in art'{) 명승수, 현대 디자인학의 지평, 디자인하우스, 1986, pp 14의 의미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디자인이란 말은 우리 삶의 많은 부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 범위 또한 그래픽디자인, 패션디자인, 공업디자인, 건축디자인, 산업디자인, 제품디자인, 기업 통합 디자인, 디자인 프로세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하지만 이러한 다양성이 디자인의 정의에 대한 모호함과 만나면 오히려 디자인이란 무엇인지 애매해진다. 스티븐 베일리는 디자인을 하나의 주제이기 보다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주제 로 보았다. 또한 각기 다른 전문 분야에서 디자인이란 용어가 하나로 정의되기 보다는 함축적 어원에서 비롯된 새로운 의미를 파생해 나가는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 디자인은 매우 복잡한 신념 활동의 수행이다. {) C. Jones라는 정의에 이르면 그 개념 자체가 존재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문헌마다도 각기 다르게 정의되어있는 Design'이란 용어는 그래서 오히려 자유롭고 매력적이다. 이제 겨우 디자인(여기서는 산업디자인에 한정된 의미로)의 역사 170년 정도가 지났다. 공부할수록 디자인이 무엇인지 더 모르게 되는 알 수 없는 경험은 오히려 내가 밟는 길이 새로 만들어가는 디자인 역사이며 정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더욱 흥분되고 의욕을 준다. 여러 훌륭하신 분들의 디자인에 대한 정의는 (방법론과는 별개로), 안타깝지만 내게는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에 대해 억지로 인식의 틀 맞춤을 하고자 했던 것이라 느껴진다.따라서 본 레포트는 디자인이란 용어의 명확한 정의를 배재하고 시작한다. 비록 정의가 모호하지만 약 170년간의 흐름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기하학적 형태와 유기적 형태(여기서 유기란 물리적 성상으로서의 의미이다.)라는 두 가지 디자인의 경향에 비추어 현대 디자인을 이해하고 디자인의 미래를 예측해 보는데 그 목적을 두고자 한다. 또한 이것변모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는 그 목적과 의도, 목표 등에 따라 다양한 구조와 형태, 스타일의 산업디자인 발전 양상을 보여 왔다.하지만 그 줄기의 속성은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물론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 전성기 이후의 현상이다.), 장식과 탈장식, 기하학적 형태와 유기적 형태 등의 몇 가지 구분되는 상호 대립적 구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이중 형태적 측면의 한 관점으로 고찰해 본다면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을 아우르는 기하학적 요소와 유기적 요소의 상호관계를 찾을 수 있으며, 이는 디자인의 역사를 관통하는 중요한 대립구도이다.{일단 기하학적 형태와 유기적 형태가 디자인의 영역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알기 위하여 우리의 일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몇 가지 디자인 사례를 제품디자인 중심으로 살펴보자. 큐브 스트라이프 시계 {) 출처 : 디자인정글({www..jungle.co.kr), 9 work & tool이 시계(사진 1-1)의 디자인은 기하학적 형태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제품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입방체에 줄무늬가 넣어져 있는 기본적인 기하학적 형태를 띠고 있다. 또 다른 시계의 사진을 보자.{ 새순 시계 {) 출처 : 디자인정글({www..jungle.co.kr), 테마21위 시계(사진 1-2)의 모티브는 자연이다. 심플한 외형에 자연의 요소를 가미하였다.두 시계는 모두 금속소재(스테인레스, 알루미늄, 황동, 적동)를 사용하였는데 시각적인 느낌은 사뭇 다르다. 이것이 기하학적인 형태와 유기적 형태의 차이이다.일단 큐브 스트라이프 시계의 경우 인공적인 느낌이 나고, 이미지가 강하며, 차가운 금속성이 느껴진다.반면에 새순 시계는 자연적인 느낌이 나며, 편안하고, 봄의 이미지가 느껴진다.초침의 경우에도 직사각형과 유선형에서 느껴지는 차이가 분명하지만 무엇보다도 두 시계의 이미지를 다르게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는 선이다. 큐브 스트라이프의 기하학적 직선과 새순 시계의 유기적 곡선의 요소가 두 시계 디자인의 성격의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하여 비슷한 시기에 출시된 최신 핸드폰 두 제품을 비교하기로 하였다.우선 LG에서 출시된 LP-9200은 사각형의 레이아웃에 곡선적 요소를 배재한 기하학적 이미지를 보이고 있다. 메탈 소재 느낌이 강한 단순하고 정결한 디자인이 세련되고 모던한 느낌을 전해준다.삼성의 SCH-X4200는 부드러운 양감과 곡선미를 살린 유기적 디자인을 채택하였는데, 전체적으로 각진 부분이 보이지 않는 외관을 나타내고 있으면서 동시에 파지성을 강화했다.핸드폰의 경첩 부분과 안테나 부분을 보면 두 제품의 디자인 컨셉이 명확히 구분된다. 또한 액정부분의 형태 역시 사각형의 액자구조인 LP-9200와 둥근 타원에 둘러 쌓인 SCH-X4200의 경우에 상당히 다른 느낌을 전해준다.지금까지 공업디자인이자 제품디자인 영역의 두 가지 사례를 살펴보았다. 이를 참고하여 다음 장에서 기하학적 형태와 유기적 형태의 디자인이 가지는 특징과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3장 디자인 역사의 흐름에서 찾는 두 가지 형태의 의미현대 디자인의 원점으로 평가받는 바우하우스(독일,1919)는 기능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이를 모태로 하는 모더니즘의 창궐은 태생적으로 기하학적 형태를 더 좋아하였다.{) 김민수, 모던디자인 비평, 안그라픽스, 1994최초 모더니즘의 중심가설 중에도 문화적 양식을 버리고 버나큘라 양식을 거부한다는 측면 역시 모더니즘의 기하학적 형태에 대한 편향된 애정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모더니즘이 기하학적 요소만을 채택한 것은 아니었다.일반적으로 기계에 대한 혹은 공산제품에 미학적 해석은 크게 두 가지로 진행되어왔는데 첫째는 근대사회의 공업 활동으로부터 생산되는 모든 물건의 미학적 가치는 합리적인 가치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러한 양식의 발전은 유기적 양식으로부터 탈피하여 직선적이고 기하학적 형태를 주로 하는 1920년대 모더니즘 디자인과 하이테크 디자인 경향으로 나타났다. 둘째는 유기적 양식을 예찬하는 방향으로 생물학적 가치를 주장하는 방향이다. 이러한 유기적인 양식은 아르물의 유기적 형태를 모티브로 하는 동적인 생동감을 추구하지만 곡선적 과잉장식의 한계를 보인다. 이를 벗어나기 위하여 비엔나 분리파의 직선적인 기하학적 양식이 발전하였으며, 이는 바우하우스의 기하학적 디자인에 이르는 하나의 역사적 발전단계로 평가 받고 있다. 또한 1917년부터 시작된 신조형주의(드 스타일 운동) 역시 기하학적인 추상미술운동의 기원이 되었으며, 바우하우스를 지나 모더니스트들이 디자인의 전위적 근대운동을 벌인 초기엔 대부분 기하학적 형태를 선호하게 된다. 이후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의 아르데코 시대에 있어서도 아르누보의 곡선적인 양식으로부터 벗어나 직선적이고, 기하학적이며 간결한 것을 추구하였다. 1930년대는 미국에 있어 불황의 현대이자 유선형(流線型)의 시대라고 불렸는데, 유선형은 모든 제품에 지배적인 양식으로 나타났으며 필연적인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이 유선형은 당시의 스피드 감각을 가장 잘 구현화하는 형태로서 선호된 것 같다. 1940년대에 이르면 기하학적 형태의 모더니즘 디자인에 염증을 느낀 이들에 의해 본격적인 유기적 모더니즘 디자인이 선보이기 시작한다. 특히 스킨디나비아 디자인의 경우엔 독특하고 자연적이며 유기적인 형태의 디자인을 창조하였다. 하지만 유기적 모더니즘의 낭만적이고 낙관주의적이며 유기적 형태를 띤 경향에 대비하여 1950년대 후기부터 다시 절제된 양식의 컨템퍼러리 스타일이 등장하며, 이후 기능주의에 반발하는 경향과 포스트모더니즘(안티 모더니즘이란 말이 더 적합할 듯 하다.)의 등장과 함께 디자인의 기하학적 혹은 유기적 형태에 대한 고민은 다양한 방식으로 병행된다.지금까지의 디자인 역사를 살펴보면 기하학적 형태와 유기적 형태가 순차적으로 반복되어 등장하고 있다. 또한 현대에 이르러서는 그 두 가지 형태가 병행되거나 혹은 트렌드의 교체 term이 무척 짧아졌음을 느낄 수 있다.{... 유기적 형태 기하학적 형태 유기적 형태 기하학적 형태 ...혹은... 유기적 형태 기하학적 형태 유기적 형태 + 기하학적 형테크 디자인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말할 수 있고, 유기적 형태를 띤 제품은 아르누보나 유기적 모더니즘 계열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디자인 역사의 계보를 떠나 기하학적 요소와 유기적 요소는 디자인의 형태적 측면에서 주요한 두 가지 축이라 생각하는 편이 옳겠다. 이 두 가지 요소는 서로에게 끊임없이 영향력을 행사하며 디자인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것이라 생각된다. 다시 말해 기하학적 형태가 유행하면 그에 반해 유기적 형태가 등장하고 또다시 기하학적 형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반복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결국에는 절충적으로 혼합되며 보편적인 디자인 언어로서 활용되는 것이 현재의 경향이 아닐까 싶다.4장 오늘날 디자인의 경향과 의미, 인공 VS 자연개인적으로는 1980년대의 팝 디자인 이후 등장한 미니멀리즘과 젠 스타일 계열의 기하학적 모더니즘 디자인이 근래에도 큰 영향력을 미치며 각 분야에서 각광받고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포스트모더니즘 세력이 등장한 이후 모든 디자인 분야에선 모더니즘의 지속과 초월이라는 이중적인 구조 속에서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이 분명하게 혼재하고 있다.형태적인 측면에서 역시 장식적 요소와 탈장식적 경향이 혼존 하듯이, 유기적 디자인과 기하학적 디자인은 다른 영역에서 혹은 같은 영역 내에서 상호 영향을 주며 혼존 하고 있다.앞선 시계들의 예(사진 1-1, 1-2)를 보면, 두 시계 모두 모던하고 심플한 디자인이다. 하지만 인상은 상당히 다르다. 하나는 차갑고 하나는 따뜻하다. 하나는 딱딱하고 하나는 부드럽다. 하나는 인공적이고 하나는 자연적이다.핸드폰의 경우(사진 2-1, 2-2)도 마찬가지이다. 두 종류 모두 세련되고 하이테크의 이미지를 지향한다. 하지만 역시나 다가오는 이미지는 분명히 다르다.그렇다면 이건 디자인의 경향으로 해석될 문제가 아닌 소비자의 기호, 혹은 취향의 문제가 된다.이번 조사를 통해 느낀 것은 이른바 디자인의 다원화(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면)라는 것은 시장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