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한국에서의 성장담론의 전개와 그것의 역사성’과강제병합 100년과 성장의 공공성을 읽고확실히 20세기 한국사는 교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성장’을 위해 질주한 ‘성장 사회’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기조에 맞춰 한국은 발빠른 산업화로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하였고 후발산업국가의 모범적 사례가 되었지만 그렇게 커진 ‘파이’를 재분배하는데 잇달아 실패했습니다. 이는 신자유주의의 기조와 맞물려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양극화가 심해지는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저는 이러한 양상과 더불어 남북으로 나뉘어 있는 우리 나라의 특수한 경우를 고려해 양극화로 인한 ‘사회적 냉전’과 남북 간의 냉전이 결합된 ‘이중의 냉전’으로 보는 교수님의 시선에 많이 공감했습니다. 또한 동반성장의 기조가 무너진 한국 사회에서 성장사회의 내용을 ‘후진’에서 ‘선진’으로 바꾸자는 교수님의 주장에 동감하는 바이고, 제가 바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우리 나라 대다수 국민이 동의하는 것이라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국민들은 그러한 기준으로 지도자를 선출했습니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 등 소위 ‘진보적’이라고 불리는 지도자들도 경제 정책에 있어서는 신자유주의적 기조를 유지했고 그 결과 정권이 보수 세력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뒤이어 들어선 이명박 대통령도 서민 경제의 발전을 약속 했지만 오히려 복지 예산은 줄고, 대규모 토목공사에 열을 올려 낙수 효과로 경제를 부양하려는 정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제가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지난 10년간 실패해 왔고 또 지금도 실패하고 있는 양극화를 극복하고 어떻게 선진성장사회로 갈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교수님이 쓰신 ‘20세기 한국에서의 성장담론의 전개와 그것의 역사성’에서 양극화의 진정한 연원이 박정희의 재벌중심 성장지상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고용없는 성장, 그리고 비정규직 문제 더불어 양극화 문제의 원인이 1997년 금융개방화로 인한 ‘세계 자본’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와 국가를 왔다 갔다 하면서 투자하는 세계 자본들은 단기간의 이득을 예상하고 투자합니다. 그래서 기업들은 단기간에 이득을 내기 위해 비정규직을 고용해 인건비를 줄이려고 하거나 수익으로 연구 개발에 투자하기보다 도덕성 없는 세계 자본으로부터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자사주를 매입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저는 재벌이 바뀌기를 기대하기 보다 정부 주도의 분배 정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부에서 나서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위해 기업을 독려하고 사회적 재분배 보다 복지 정책을 통한 재분배가 이뤄져야 합니다. 물론 거기에 앞서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려는 사회적 합의가 구축되어야 할 것입니다.‘이중의 냉전’으로 표현하신 내부적 갈등이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1910년과 1950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는 교수님의 말씀은 인상 깊었습니다. 내부에서의 작은 갈등이 궁극적으로 심각한 결과를 낳은 것을 보면서 지금 기득권층의 독점으로 인한 갈등과 좌우익의 대립이 심해지는 작금의 상황을 볼 때, 이러한 갈등이 나비효과처럼 큰 돌풍이 되지 않을까 우려스럽습니다. 힘의 논리에 의존한 약육강식의 사회보다 성장의 공공성이란 가치를 구현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민족주의에 빠지지 않은 ‘내재적 발전론’역사는 여러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언제나 다양성을 염두에 두고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좁은 스펙트럼만 가지고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위험할뿐더러 생산적이지도 않다. 이런 맥락에서 일제강점기 역사를 볼 때 민족주의적 시각을 지양하자는 에카트와 이영훈의 주장은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비판하는 내재적 발전론의 입장이 꼭 민족주의에 경도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또 다른 이분법을 낳는 논리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민족주의적 지식 담론에 치우친 한국 학계가 탈민족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역사가들의 해석 방식인 식민지 근대화론을 실증적 비판 없이 무조건 배척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들은 마치 내재적 발전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설득적인 사료 없이 일제에게 가혹한 수탈을 당한 우리 국민의 감정적 이데올로기에만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그러한 그들의 입장에 대해 몇 가지 의문이 들었다. ‘과연 내재적 발전론의 주장이 정확한 사료에 근거하지 않고 국민 정서에 기댄 포퓰리스틱한 것인가’ 와 ‘민족주의적인 시각을 철저히 배제하고 객관적 사료만 가지고 우리 근현대사를 보았을 때는 그 결론이 반드시 식민지 근대화론에 도달하는가’ 가 바로 그것이다.수업 시간을 통해 살펴본 허수열의 논문은 그들의 입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일제가 남긴 유산을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으로 나누고 그것이 과연 우리나라 50,60년대의 자본주의 성장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실증적으로 알아보고 있다. 그 논문에는 어떠한 민족주의적 시각도 국민 정서에 기대는 포퓰리스틱한 선동 문장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다만 당시의 정확한 통계기록에 근거해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큰 오류가 있는지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허수열의 작업을 통해 내재적 발전론이라는 것이 민족주의에 경도되지 않더라도 도출할 수 있는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들이 주장하는 ‘사료에 근거한 실증적인 주장’으로 강화된 내재적 발전론에 대해서는 어떠한 재반박이 오갔는지 아직 살펴본 바는 없지만 내가 읽은 논문을 통해서 한국 근현대사를 바라보는 합리적인 논리는 내재적 발전론 쪽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훌륭한 역사가에게 요구되는 또 하나의 자질과 윤리는 사료가 뒷받침되지 않은 주장은 어떠한 것이라도 삼갈 줄 아는 절제력’이라고 주장한 이영훈의 말은 역사를 전공하는 학생입장에서 귀감이 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자질을 지니고 역사를 연구했을 때 반드시 식민지 근대화론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었다.민족주의는 역사가의 입장에서 매우 매력적인 것이지만 그것에 너무 빠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본디 역사가가 지녀야 할 객관성을 잃게되면서 그 주장이 설득력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계기로 내재적 발전론과 떨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민족주의를 분리해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오래되지 않았기에 아직 현재 진행형인 일제강점기 자본주의 발생에 대한 연구에서 이러한 입장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관심 있게 지켜보고 싶다.
오키나와 전쟁, 기지화(化)로 인해 억눌린 오키나와의 정체성 되찾기-메도루마 슌의 소설에서 나타난 상징과 기지화의 역사적 과정을 중심으로1. 들어가며처음 ‘일본사 연습’을 수강하게 되었을 때, 나는 어느 정도 일본사에 대한 기본 지식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재미있고 우리나라와 많이 관련되어 있는 시대인 전국시대부터 명치유신까지의 시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사 연습’ 과목은 ‘오키나와’와 관련된 것이었다. 어떠한 기초 지식도 없었다. 지도에서 오키나와를 찾기도 쉽지 않았고 오키나와라는 단어마저 생소한 것이었다. 이렇게 인연을 맺게 된 오키나와는 배우면 배울수록 ‘일본’과는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오키나와는 그들 나름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독립국가였다. 당시 동아시아의 핵심 체제인 조공 질서에도 편입이 되어 있었고, 주변국으로부터 당당한 독립국가로 인정받기도 했다. 하지만 1609년 사쓰마 번의 침공 이후 류큐와 오키나와는 더 이상 국가로서 존재하기 힘들게 되었다. 일본 제국의 침략전쟁이 본격화 되면서 오키나와는 이른바 ‘기지의 섬’으로 변모한다. ‘예의를 지키는 나라’라고 해서 군비를 갖추지 않고 무역으로만 번성했던 오키나와가 역설적이게 군사 기지의 섬으로 변한 것이다.나는 오키나와 역사의 정체성, 즉 그들 나름의 아이덴티티가 기지의 섬으로 변하기 이전에 있었다고 보고 어떻게 오키나와의 아이덴티티가 침해받으면서 변하게 되는지를 살펴보고 싶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문학적 작품으로 일본제국의 침략으로 인해, 미국의 점령으로 인해 혼란속에서 고통받는 오키나와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오키나와가 기지의 섬으로 변모해 가는 과정을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해서 객관적으로 살펴본 다음 오키나와의 정체성 회복을 위해서는 어떠한 방법이 있을 지 생각해 보기로 하였다.2. 메도루마 슌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상징들메도루마 슌의 소설 『브라질 할아버지의 술』은 따뜻하고 소소한 감성이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여기에는 마음을 동하게 하는 처절한 묘사도 극단적 수사도 없었다. 다만 일상생활둘러싸고 1945년 4월 1일부터 6월 23일까지 벌어진 태평양 전쟁 유일의 지상전이었다. 이 전쟁 중 민간인 사망자는 9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전쟁 당시 우타와 오미토는 피신해 있는 가족들을 위해 식량을 구하러 나왔다가 바다거북이의 알을 발견한다. 오미토는 그것을 포대에 담다가 사살당한다. 살아남은 우타는 오미토의 아들인 고타로를 친자식처럼 끔찍이 여기며 키우는데 그는 몸이 허약해서 혼이 자주 빠져 나갔었다. 어느 날 고타로의 혼이 빠져나가고 그의 입속에 소라게가 살게 되는 기괴한 일이 일어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작가는 고타로의 몸을 집처럼 생각하는 소라게를 오미토의 환생으로 그려냈으나 나는 그 소라게를 미군과 같다고 생각했었다. 일반 소라가 아닌 사람을 집으로 생각하는 기형성이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이미지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또 마지막에 소라게를 죽이는 장면에서 한번에 목숨을 끊지 않고 여러 번에 걸쳐서 잔인한 묘사와 함께 죽이는 것이 오키나와 주민들의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라 생각했다.‘브라질 할아버지의 술’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징이 등장한다. 이 단편은 ‘오키나와 반환’을 그 시기로 해서 직접적으로 오키나와 전쟁 때문에 가족을 잃은 사람을 주인공으로 정하고 그의 이야기를 통해 전쟁의 참화를 간접적으로 전한다.그러던 중에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시작했다. 오키나와 인 부락에서는 희극적일 만큼 일본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 … 이윽고 오키나와는 주민들까지도 전멸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 … 할아버지는 쉽게 동굴 입구를 찾아냈다. 라이터 불에 의지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수습하지 않은 유골이나 유품들이 아직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벽에 남아 있는 까만 그을음이 화염 방사기에 의한 것임은 나중에 얘기를 듣고 알았다. 동굴의 깊이는 기억 속의 반밖에 되지 않았다. 제일 안쪽까지 들어가 목덜미의 땀을 닦으려고 뜨거워진 라이터 불을 끄고는 어둠 속에서 숨을 가다듬었다. 이 동굴 속에 가족이 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이 미어지고분이다.이와 다르게 오키나와의 고유의 싸움 닭인 ‘다우치’를 둘러싸고 스토리가 전개되는 ‘투계’에서는 오키나와와 일본 간의 관계를 생각하게 해주는 것들이 많았다.1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오늘처럼 갑자기 찾아온 사토하라는 그 무렵 요시아키가 애지중지 키우던 자단 분재를 탐냈다. 뿌리가 어른 팔뚝만 한 것으로, 요시아키가 생명 줄을 달고 해안 절벽 중턱까지 내려가서 캐 온 것이었다. … … 자단을 비롯하여 값나가는 분재 열몇 점을 도둑 맞은 것은 그날 밤이었다. 분재 선반 근처에서 나는 사람들 발소리에 잠이 깬 다카시는 자갈을 밟는 소리와 남자의 목소리를 확인하고서 부모에게 알리려고 잠자리에서 빠져나왔다. 거실 문을 열자 불도 켜지 않은 채 두 분이 앉아 있었다.1609년 사쓰마 번의 오키나와 침략 이후 일본은 계속적으로 오키나와의 특산물을 수탈하였고, 일본 제국기 태평양 전쟁 때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오키나와를 군사 기지로 변화시키면서 일본 본토 수호를 위한 방패로 사용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오키나와 주민들이 피해를 입었다. 전 후 미군이 오키나와를 점령했을 때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모든 권리가 박탈당한 상태에서 기지화가 진행되었다.이런 방식으로 사토하라는 주인공 다카시가 애지중지 키운 다우치 ‘아카’도 앗아간다. 물론 도둑질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힘으로 굴복시켜 불공평하게 뺏어가면서 찍소리도 못하게 한다. 여기서 그려지는 사토하라와 요시아키의 관계가 항상 힘이 있는 자에게 자신들의 이권을 내줄 수밖에 없는 일본, 미국과 오키나와의 관계를 대변하는 것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3. 오키나와 기지화의 역사적 과정지금까지 메도루마 슌의 소설을 기반으로 해서 그의 문학에서 나타나는 오키나와 전쟁과 미군 점령기의 상징적 의미들을 살펴보았다. 아래부터는 ‘비폭력의 섬’ 오키나와가 ‘기지의 섬’이 되어가는 과정을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해서 개략적으로 알아보도록 하겠다.1609년 도쿠카와 막부의 허가를 받은 사쓰마 번의 침략 이 후에도 오키나와는 군사화가 진행되지 않았었라서 1941년 이리오모테섬에 임시요새가 건설되면서 오키나와는 처음으로 기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1942년과 1943년을 경과하면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오키나와는 후방 농촌이라기 보다 일본의 후방 기지이자 본토 침략을 막기 위한 마지막 방파제와 같은 의미가 커지게 되었다. 1944년 일본의 대본영은 본토 결전에 대비해 ‘육해군 이후의 작전지도대강’을 책정하여, 공격하는 적함선을 항공 병력으로 격퇴하는 작전을 세웠다. 이로 인해 오키나와에는 다수의 비행장이 건설된다. 이렇듯 오키나와의 기지화는 주로 1944년에서 1945년에 이르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다.작전명 ‘Iceberg’로 대표되는 오키나와전은 일본 영토 내에서 벌어진 유일한 지상전이자, ‘장기적이며 격렬한 지상전’이었다. 오키나와 수비군은 ‘지구전’을 염두에 두고 저항에 들어갔고 미군은 오키나와를 본토 공략을 위한 전방 기지로 삼을 심산으로 무차별적인 포격을 가했기 때문에 피해가 컸다. 미군이 이 전투에서 승리하고 최종적으로 태평양 전쟁의 승리자가 되면서 오키나와현은 미군이 점령하게 된다. 미군은 오키나와에 있던 비행장을 정비해 사용하는 한편, 후텐마 비행장과 같은 새로운 기지도 건설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오키나와의 주민들은 모두 미군이 설치한 수용소에 강제로 수용되었으며, 오키나와현의 모든 지역을 군사적 용도로 임의로 사용하였고, 미군에게 불필요한 땅부터 주민들에게 개방하였다. 따라서 군용지로 접수당한 지역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기지 주변의 개방지에 집단적으로 정착할 수밖에 없었다. 미군은 오키나와의 지리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군대를 계속 주둔시키면서 거점확보에 이르는데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오키나와의 군용지 지주들이 소유권을 주장하게 되자 포령 26호를 공포해 장기적인 영지 사용으로 그것을 인정하는 암묵적 계약이 성립되었다고 간주하여 기존 기지에 합법성을 부여하였다. 이후 오키나와의 미군기지들은 베트남 전쟁에도 요긴하게 사용되는 등 ‘태평양의 요석’역할을 하게 된다. 베트남미군기지는 겨우 몇%가 줄어들었을 뿐이었다. 이 후에도 계속되는 오키나와 민중들의 반전, 반기지, 평화운동들은 기지문제의 심각성과 함께 연대활동, 생명, 인권, 여성, 환경같은 보편적 이념들을 포괄하는 것으로 진보해나갔으며, 그것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4. 나오며오키나와는 ‘수예지군(守禮之郡)’이라고 하는 예의를 중시하는 나라였다. 군비다운 군비를 갖추지 아니하고 해상무역을 통해 번성하는 해양 국가였다. 나는 이것을 본디 류큐와 그리고 오키나와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전쟁’이라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비인간적인 방법에 의해 또 ‘전쟁’을 위해 파괴되었다. 이러한 오키나와의 정체성을 되살릴 방법은 없을까.메도루마 슌은 소설로서 이를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드러냈다. 또 다른 아픈 역사인 영국에 의한 카리브의 식민 생활을 겪은 시인 ‘데릭 월콧(Derek Walcott, 1930~)'의 극복 방법은 인상적이다. 그는 식민역사에 의해 무시, 왜곡, 소외 되어온 카리브 인들의 실존과 억눌린 삶을 발굴하고 재현하고자 하였으며, 기존의 인종적, 문화적, 경제적 의식구조를 전복적으로 해체하고, 인종간의 차이점 또는 타자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상호 주체성과 평등에 바탕을 둔 다민족, 다문화적 사회를 만드려고 노력했다. '투계’에서 다카시가 자신의 다우치를 가져간 사토하라의 닭장에 불을 지르듯이 문학적 치유는 감정의 위안과 억눌린 삶을 드러내는 효과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역사 연구도 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다. 아니 문학적인 방법보다 더 설득력을 가진다. 왜냐하면 역사 연구는 문학보다 더 객관적이고 실증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키나와의 역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식민지적 편견을 가지고 그들을 이용하려고만 했던 일본의 그늘에서 벗어나 오키나와를 오키나와로서 재조명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지만 오키나와의 전반적인 부분을 집중해서 공부한 이번 ‘일본사 연습’이라는 수강 과목의 이름은 약간 어울리지 않는다고 볼 수 있
동도서기론을 보는 새로운 시각우리는 종종 추상적 단어의 광의(廣義)성을 간과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바라보는 학자들의 시각도 그러한 이유로 다양한 것 같다. ‘박규수의 개화사상의 성격’의 초반부는 ‘동도서기론’을 개화사상의 범주에 넣을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내용이 나오면서 동도서기론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제시하고 있다. 학자들은 동도서기론을 척사론과 개화론과의 중간형태로서 변법개화사상으로 나아가는 가교의 역할, 개화사상의 한 분화형태로서 급진개화파의 대척점에 있는 사상, 개화사상의 맹아로서 개량적 부국강병론 등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생각은 동도서기론이라는 것이 ‘옛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도덕과 사회의 모습은 그대로 두고, 서양의 발달된 기술문명을 받아들이자는 생각’이라는 것이다.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우리 나라의 동도서기론을 중국의 양무운동과 너무 동일시하는 발상이 아닌가 우려스럽다. 청의 양무운동이 우리 나라에 많은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나, 그 궁극적인 목표가 사실은 민중 봉기를 진압하려고 했다는 점, 자신들의 도(道)를 지키려고 한 운동이 오히려 외세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는 점 등은 우리 나라의 동도서기론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문제의식으로 하여 먼저 우리 나라 동도서기론의 형성, 전개 과정을 알아보고 그 특징을 짚어본 다음 마지막으로 동도서기론이 지닌 의의와 영향에 대해 알아보겠다.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 두 양요를 거치면서 조선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 이유는 척사론에 입각한 대응이 서양의 앞선 군사력에 처참히 무너졌기 때문이다. 당시 기록을 보면 신미양요 당시에 조선군이 사용한 대포의 제조 연대는 1313년(충선왕 5)였다고 한다. 조선 군사들은 550여 년 전에 만들어진 대포로 미군에 대항했던 것이다. 잇따른 대외정책의 실패로 척사론은 힘을 잃었다. 이는 열렬한 척사론자인 승명주가 성균관에서 강연을 하다 야유를 받은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조선이 청의 양무운동에 관심을 가진 것은 어찌보면 필연적으로 볼 수 있다. 1872년 박규수는 고종에게 양무운동에 대한 긍정적 보고서를 올리게 된다. 그리하여 초창기 1860년의 동도서기론은 청의 무기를 배우고 들여오는 ‘양무’운동으로 첫발을 내딛는다. 1876년 일본과의 화의 조약을 맺게 되자 세력의 열세에 대한 울분과 함께 자강(自强)의 필요성을 더 부르짖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것에 더불어 강병을 위해서는 부국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생기게 된다. 1880년에 이르러서는 동도서기적인 경세론이 확립이 되며 앞서 학자들이 언급한 급진개화파로의 이행 이전의 과도기적 성격을 띠게 된다.개혁이 성공하려면 그 개혁을 뒷받침하는 사회세력이 필요하다. 동도서기론자들도 그들이 원하는 부국강병은 신분제의 질곡으로부터 자유로운 민중계급의 자각과 동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우리나라 동도서기론의 가장 큰 특징으로 볼 수 있겠다. 동도서기론자들은 국내외의 정세를 매우 합리적으로 파악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서구 열강이 패권을 쥘 수 있었던 요소로 ‘백성의 부(富)’를 꼽았다. 때문에 민부를 국강과 연결시킬 수 있었고 우리 나라에 부족한 점으로 민부를 짚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기술 도입으로 인한 단순한 군사력의 증대가 자칫 위로부터의 개혁에서 그칠 수 있었던 것에 반해 동도서기론은 민부 개념을 중심으로 한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했다. 이것이 양무운동과 크게 다른 점이며 계속되는 특징들 또한 그들의 민중 의식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이 기본적으로 왕정을 옹호하고 공화정을 비판하고 또 그러한 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요소를 배척했던 것은 맞다. 하지만 그들이 세습적 신분제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점, 그리고 무엇보다 ‘재능을 기준으로 한 현우(賢愚)의 정도에 따라 귀천을 구분 짓는 사회질서체제를 지향하였다는 점’은 그들을 서양의 기술을 빌어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지키기에 급급한 모습으로 보이게한 색안경을 벗어버리게 한다. 덧붙여 어윤중이 동학교도를 ‘민당(民黨)’이라 지칭하고 그들의 봉기 이유를 가혹한 수탈로 생각한 것을 볼 때, 이들이 비로소 민중 세력을 인정하고 그 존재와 중요성을 인식했다고 볼 수 있다.동도서기론은 단순히 서양의 기술을 들여와 동양의 기존 질서를 수호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동도서기론자들은 현실에 대한 명확한 분석력으로 우리의 장단점을 파악했고 우리가 지닌 장점은 더 발전시키면서 단점은 서양의 방식을 차용해 보완하는 ‘상호작용’의 동도서기를 지향했다. 이런 의미에서 동도서기론을 청의 양무운동과 동일시해 변법개화사상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개화사상으로 보는 시각은 성급하다고 볼 수 있다. 동도서기론에서 의회제도도입의 시도, 양반들의 상업진출 강화 정책, 민중 의식의 성장과 신분제 폐지등의 특징을 고려할 때 동도서기론자들은 급진개화파에 비해 방법론적으로 다른 ‘점진적 개화’를 추진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때문에 개화사상의 흐름에서 동도서기론의 성격은 재고될 필요가 있으며 개인적으로 동도서기론이야말로 ‘가장 민족 주체적인 개화사상’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류쿠처분[琉球處分]’에서 엿볼 수 있는 독특한 특성과 그 사건의 여파‘일본사 연습’을 수강하기 전까지 류쿠, 오키나와라는 단어는 나에게 매우 생소한 것이었다. 아니 아예 몰랐다고 봐도 무방하다. 심지어 일본 지도를 보면서도 오키나와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정도였다. 전무한 배경지식덕분에 새로 배우는 개념들이 기존 지식과 충돌하는 일이 없었고, 강의에서 다루는 ‘류쿠’ 는 점점 흥미로운 것이 되어갔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알고 배운 류쿠에 대해 가지고 있는 느낌은 ‘독특함’이다. 국가적 정체성이 뚜렷한 동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한 나라에 복속되었지만 그들 고유의 언어, 풍습을 가지고 일본인이냐 오키나와인이냐는 물음 앞에는 오키나와인이라고 대답하게 되는 상황에 놓여있는 곳, 지리적 특성에 걸맞게 가지고 있는 유연한 사고 방식,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무비(武備)가 없어 ‘비무장의 섬’이라고 불리는 점등은 내가 그러한 생각을 가지게 한 요소들이다. 지금 다룰 두 논문들은 19세기 말 일본 메이지 정부에 의해 류쿠가 강제로 병합되는 ‘류쿠처분[琉球處分]’에 대해 다룬 것들이며, 각각 류쿠처분기 류쿠왕국 지배층의 정체성과 류쿠처분이 동아시아 국제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서술하고 있다.「琉球處分期 琉球지배층의 自國認識과 國際觀」에는 류쿠만의 특성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 첫 번째로 ‘양속체제’를 꼽을 수 있겠다. 양속체제란 중국과 일본 두 나라 모두에게 속해있다는 뜻으로 조공책봉체제로 청의 인정을 받는 동시에 일본에도 속한 존재임을 내세워 류쿠왕국의 안위를 다분히 생각하는 체제이다. 이는 각국 교역의 중심인 지리적 이점을 가졌지만 자신들의 힘으로 안보를 지킬 수 없는 류쿠왕국에는 지배권 유지에 핵심적이고 매우 효과적인 체제로 보인다. 류쿠의 지배층은 류쿠왕국이 소국이고 약국이며 무비가 갖추어져 있지 않은 나라로 인정했다. 따라서 류쿠의 지배층들은 주변 강대국에 의존하여 위기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였다. 메이지 정부의 류쿠처분의 야욕에도 청에게 계속적으로 자신들이 충실한 조공국임을 어필하면서 파병을 요청하는 ‘걸사운동’을 벌인다. 하지만 지배층들의 이권 유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운동이었기에 민중들의 조응이 없었고 결정적으로 청의 파병이 성사되지 않아 실패하게 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지배층의 왕국 부활운동이 끝난지 불과 십수년만에 류쿠 스스로에 의해 일본에의 동화가 강력히 추진되었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안위와 이득에 맞게 입장을 마음대로 바꾸는 행태는 류쿠의 지리적 특성과 큰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류쿠는 여러 개의 군도로 나뉘어 하나의 내셔널리즘이 작용하기 힘들었다. 때문에 각 섬마다의 이해 관계가 달랐을 것이고 자신들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렇게 끈끈하지도 않은 신념따위는 아무래도 좋았을 것이다. 게다가 분쟁이 일어났을 경우 ‘섬’이라는 특성때문에 퇴로가 없어 계속 싸우다가는 공멸해버린다. 따라서 가장 큰 가치를 ‘생존’에 두었을 것이다. 이러한 곳에서는 민족성 운운하며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건 투쟁을 하기보다는 강력한 국가의 보살핌을 받으며 안전하게 사는 것이 좋다는 편이 훨씬 우세했을 것이다. 이를 종합해 보았을 때, 필자가 결론내린 ‘상황에 따라 변용하는 琉球인 독특의 다중적 아이덴티티’라는 정체성의 정의는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한다.한편「일본의 유구병합과 동아시아 질서의 변동 : 한반도와의 정치적 관계를 중심으로」에서는 시각을 넓혀 ‘류쿠처분’이 동아시아 질서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고 있다. 여기서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것은 중국적 세계질서의 변동은 아편전쟁이라는 외부로부터의 충격에서 비롯되었으나, 동아시아 삼국 간의 구체적인 관계 변동은 메이지 유신이라는 일본 국내의 정치변동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가시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메이지 정부의 동아시아 질서 개편의 단초가 되었던 것을 ‘류쿠처분’으로 보고 있다. 이 논문은 류쿠처분의 과정은 간단히 처리하고 그 사건으로 인한 영향을 주로 다루고 있다. 즉, 저자는 류쿠처분으로 인해 일본의 제국주의 야욕을 깨달은 청나라가 일본으로부터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간섭을 시작하면서 대두된 ‘조선문제’와 그것을 둘러싼 일련에 사건에 대해 이홍장의 서신, 연행사절의 보고를 들은 고종의 질문 등을 제시하며 서술하고 있다. 역시나 아쉬웠던 것은 조선의 대응이었다. 조선에게는 ‘류쿠처분’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적 국제질서가 무너진 것을 망각하고 계속적으로 청에 의지하려 한 것을 반면교사삼아 좀 더 적극적으로 청과의 관계를 다시 모색하고 서양과 자주적인 조약을 맺는 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당시까지 척사론과 개화론으로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고, 조선의 조정은 고종의 언사를 볼 때, 상황을 불안하게 보는 정도로 그친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필자가 위정척사론자들이 작성한 상소문 등의 자료에 류쿠병합에 대한 언급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정보의 비대칭성’이 정치적 소통을 어렵게 하고 현실적으로 정치적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여, 한반도의 유연한 정치적 대응과 국내역량의 결집을 한층 어렵게 하였을 것 이라고 결론내린 부분이었다. 당시 고종이나 조정의 대신들은 류쿠의 병합을 왜 이슈화시키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것이 쟁점화 되었다면 일본의 침략 야욕에 좀 더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았다.두 논문 모두 동일한 시기를 다룬 것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지만, 나에게는 그 시대성과 상관없는 교훈을 주었다. 먼저「琉球處分期 琉球지배층의 自國認識과 國際觀」에서는 지리적 특성과 정체성의 형성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를 얻음으로써, ‘반도’의 특성은 우리나라의 정체성 형성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나 고민해보았다. 그리고 「일본의 유구병합과 동아시아 질서의 변동 : 한반도와의 정치적 관계를 중심으로」에서는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던 ‘류쿠처분’이라는 사건이 마치 나비효과처럼 우리나라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보고 시각을 넓혀 역사적 사건을 ‘관계’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배웠다.나는 이 두 논문을 퍼즐을 맞추는 느낌으로 읽었는데 아마 내 제한된 근현대사 지식과 새로 유입되는 류쿠왕국의 정보가 상호작용하였기 때문인 듯하다. 어려운 퍼즐을 맞췄을 때 기쁨이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듯이 나도 다음에는 좀 더 이 수업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 내 ‘지식의 퍼즐’을 맞출 수 있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