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1960년 4월 민중항쟁은 이승만 독재정권에 항거해 일어난 민중의 민주항쟁이었고, 6?25전쟁 뒤 사회변혁운동의 첫 출발점이었다. 4월 민중항쟁은 식민지 민족해방운동과 해방 직후 자주적 통일민족국가 수립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4월 민중항쟁은 이승만 정권의 몰락이라는 가시적 성과를 가져왔으나 주도세력이 형성되지 못하고 뚜렷한 이념이 없이 진정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완성에는 실패했다. 특히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과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는 4월 민중항쟁이 좌절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4월 민중항쟁의 좌절은 이후 한국현대사가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묻어둔 채 군사독재체제를 경험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4월 민중항쟁에 대한 역사적?사회과학적 접근은 19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고, 1990년대에 와서야 객관적 연구성과들이 축적되기 시작했다.Ⅱ. 4?19의 성격4?19에 대한 명칭은 여러 가지로 불리어 왔다. 4?19의 주체세력들은 대체로 그것을 ‘혁명’으로 불렀으나, 박정희 군사정권은 ‘의거’로 불렀고, 박정권의 뒤를 이는 전?노 군사정권들도 대체로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군사정권의 시대가 끝나고는 대체로 다시 ‘혁명’이라 부르게 되었다.역사적 혹은 사회과학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1960년 4월 19일 전후해서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혁명으로 부를 것인가는 문제시된다.혁명이라고 부르기에는 한가지 결여된 점이 있다. 혁명은 정치적 변혁뿐만 아니라 사회적 변혁 혹은 사회혁명까지 수반해야 하는데 4?19는 그렇지 못하다. 사회혁명이란 한 마디로 말해서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에게서 국가권력을 탈취하여, 스스로 정권을 장악하고 새로운 사회?경제체제를 수립해가는 것을 말한다.즉 혁명이란 지배권력의 담당층이 다른 계급으로 바뀌는 것을 말하며, 이같은 사회혁명에는 당연히 정치적 변혁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4?19는 정치적 변혁이 있었지만 사회변혁이 수반되지 않았다.4?19는 청년?학생층과 지식인층 그리고 도시빈민층 등이 중심이 되어 이 장기간의 경제적?사회적 발전이 있은 후에 기대와 만족도 간의 참을 수 없는 갭이 커질 때 발생한다”)는 전제 아래 4?19의 원인을 규명했다.1950년대 교육과 도시화, 커뮤니케이션의 발달을 실증하고, 지식과 정보의 보급이 진전됨에 따라 대중들의 기대감은 비약적으로 커졌지만 객관전 현실은 여기에 미치지 못함으로써 심각한 불만을 야기했다고 파악했다. 특히 1960년 3?15부정선거는 이와 같은 간격을 가장 엄청난 형태로 증폭시켜 대대적인 대중봉기를 초래했다는 것이다.학생들의 불만과 분노를 정치현상적 차원에서 접근한 연구도 있다. 학생시위의 주된 요인을 이들이 학교에서 배운 교육내용과 이승만 정권의 도덕적 정통성이 불일치했기 때문이라고 규명한다. 또한 도시화는 비약적으로 진척되는 데 반해 경제발전은 그것에 미치지 못하여 일어난 지식인과 실업자의 불만이 항쟁을 촉발하는 데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고 본다.반면 최근의 연구들은 이와같은 원인규명이 현상적이라고 반론을 제기한다.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부정한 정치행태는 사실상 어떤 구조적인 원인이라기 보다는 그것이 발현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을 발생시킨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이다. 예를 들어 대중의 가장 중요한 불만과 분노의 표적이 되었던 것은 3?15 부정선거였고, 이는 4?19를 불러일으킨 중요원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여기서도 왜 이승만 정권은 부정선거를 저지를 수 밖에 없었느냐는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이 문제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정치행태를 보일 수밖에 없었던 이승만 정권의 권력구조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이승만 정권이 출발부터 반민중적이고 폭압적이며 사적 소유물로 전락한 경찰에 의존한 정권으로서 궁극적으로는 부정선거를 자행할 수밖에 없는 권력구조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 지적된다.사회?경제적 문제로서 4?19의 근본원인은 1950년대 후반부터 전개된 경제위기에서 비롯되었다. 해방 직후 우리나라는 민족자립경제의 실현을 위해 반제?반봉건개혁을 달성해야 했지만 이것이 좌절되고분의 외국 언론들은 한국에서 벌어지는 민주항쟁에 대해 우호적인 기사를 실었고, 이는 항쟁에 직접?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국제여론, 특히 미국의 태도가 그러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한국이 “자유민주주의의 진열장” 이었고, 이승만은 한일관계에 비협조적이었기 때문에 미국이 이승만 정권의 붕괴를 조장했다는 설명이 있다.1950년대 중후반 미?소 진영의 공존이 정착하면서 기존 냉전체제의 변동이 일어나고, 미국의 동북아정책과 대한반도 정책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공존의 정착으로 냉전대립은 과거의 군사적 대치 위주에서 경제적 경쟁 위주로 전환되었다. 따라서 미국은 한국을 비롯한 제3세계의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를 위해 일본을 견인차로 하여 동북아 자본주의권을 부흥시킨다는 지역통합전략을 본격적으로 실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미국은 부패?무능하고, ‘북진통일’론 식의 구형 냉전논리를 주장하며, 한일관계 정상화에 열의를 보이지 않는 이승만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에 서게 되었다.모든 형태의 저항은 항쟁주체의 자각과 성장이라는 측면을 도외시하고는 설명하기 어렵다.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 노동자와 농민 등 기층 대중들의 저항과 활동이 한국전쟁 이후 계속된 침체에서 벗어나 다소 활성화했다. 1959년 기존 대한노총 조직을 벗어나 ‘전국노동조합협의회’가 만들어지고, 이 무렵부터 대구지역 교원들 사이에 이미 노조결성운동이 태동하고 있음에 주목해야한다. 또한 1950년대 후반 활동했던 학생 이념서클의 존재도 4?19의 배경으로 지적되고 있다. 따라서 1950년대를 ‘민중운동의 암흑기’라기보다는 한국전쟁 이후 침체에서 벗어나고 있는 ‘운동의 회복기’ 혹은 ‘운동의 내재적 성장기’로 파악하고, 4?19도 그 연장선 위에서 고찰해야 한다.Ⅳ. 4월 민중항쟁의 전개과정1.항쟁의 촉발과 정부의 미봉적 대응 (3월 15일~4월 17일)4월항쟁은 처음 3?15부정선거에 대한 반대운동에서 시작되었다.이승만정권은 이미 1959년부터 시위대는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고 도망치기 시작했으며 경찰은 이들을 뒤쫓아 총격을 가하였다.총격을 피한 시위대는 변절의원 허윤수)의 집과 자유당 당사, 서울신문 마산총국, 국민회 마산지부, 남성동 파출소 등을 부수었다. 마산봉기는 경찰의 발포 등 무자비한 폭력으로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낸 채 밤늦게 진압되었다. 그러나 마산봉기는 이후 항쟁의 전형적인 전개양상을 보여주었다. 평화적인 시위가 경찰과 정치깡패의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진압과 테러로 격화되었고, 시위대는 고등학생들과 기층 민중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시위는 폭력투쟁을 동반한 항쟁으로 변하였다. 그 과정에서 시위대는 독재정권의 하수인과 말단 통치기구인 자유당사와 자유당 의원, 경찰서, 각종 관제 어용단체(정부의 정치적 앞잡이 노릇을 하는 단체) 등을 공격하였다.이승만 정부는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공산당 지하조직에 의한 좌익폭동으로 조작하였다. 경찰은 병원 시체실에 옮겨진 시위 희생자의 호주머니에 불온 삐라를 집어넣는 한편 이날 낮의 시위 때 검거한 민주당 도의원 정남규를 남로당 비밀당원으로 둔갑시켜 정씨가 계획한 좌익 폭동으로 사건을 조작하려 하였다.이승만 정부는 마산사태의 책임을 물어 내무부장관과 현지 경찰책임자를 교체하고 구속되었던 시민 일부를 석방하는 등 임기응변책을 통해 사태를 미봉적으로 수습하려 하였다. 그러나 마산봉기에 대한 각지의 동조 분위기는 수그러들지 않았고, 대전, 충주, 수원, 오산, 포항, 인천 등 각지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꼬리를 물었다.이승만 정부의 폭압적 대응과 용공조작은 학생과 민중의 정당한 분노를 잠재울 수 없었다. 마산봉기에 대한 경찰의 무차별적인 폭력진압과 당국의 용공조작은 오히려 부정선거 규탄여론을 한층 확대,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마산봉기가 도화선이 되어 언론계, 법조계, 학계에서는 부정선거 규탄여론이 들끓었다. 마산봉기가 일어나자 국내 언론기관은 마산 현지로부터 사실보도를 적극적으로 보내기 시작하였고, 또 민주당 및 대한변호사협회도 진상조사활동을 벌였다.오른 불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하였다.4월 초순 각급 학교가 개학을 맞자 서울 시내 각 대학에서도 학교 단위로 시위의 사전조직화가 진행되었다. 4월 18일 고대생 3천여명은 교내에서 집회를 갖고, 시내 가두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여 국회의원들에게 “부정선거 거부와 학원의 자유 보장 요구, 기성세대의 불신”을 외치며 농성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이들 시위대가 귀교하는 도중 종로 4가에서 쇠갈고리와 곡괭이, 쇠사슬로 무장한 100여 명의 폭력배들이 시위대를 덮쳐 잔인한 폭력을 가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대생 10명, 시위대를 뒤따르던 소년들 20여명, 취재하던 기자 1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피의 화요일’로 불리는 4월 19일에는 서울 시내 대학교와 고등학교 학생들이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대거 시내 각처로 진출하였다. 시위대는 국회 앞과 세종로를 중심으로 “역적을 몰아내자”,“3?15선거를 다시 하라”,“기성층은 각성하라”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중앙청 앞, 경무대 앞에서 경찰과 혈전을 벌였으며, 왜곡보도를 일삼던 서울신문사와 반공회관에 불을 질렀다. 또 내무부, 시 경찰국,이기붕의 집 등을 공격하였다. 경찰의 발포로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자 시위대는 경찰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빼앗고, 동대문, 청량리 등지에서는 밤까지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총격전이 전개되었다.4월 19일 오후에 정부는 서울과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계엄군의 진주와 경찰의 무차별 살상으로 4월 19일 항쟁은 일단 진정되었다. 4월 19일 이후 항쟁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에 이승만정권은 전(全)국무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의 사퇴(4월 21일), 이기붕 부통령의 당선사퇴 고려선언(4월 23일), 고대생 습격사건의 책임자로 임화수, 유지광 등 정치깡패 구속(4월 23일), 이승만의 자유당 총재직 사퇴(4월 23일), 부상학생들에 대한 정부주도의 구호활동 등 타협적인 민심수습책을 계속 내놓았다. 이승만 정부는 부정선거와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