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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대장경판
    고려대장경목 차1.머리말1)연구동향2.고려대장경의 제작 배경 및 동기3.대장경의 판각1)판각시기2)경판의 제작 과정3)대장도감 설치와 판각장소4.해인사에의 전래5.맺음말1. 머리말대장(大藏)이라는 말은 중국대서 시작되었으며, 三藏이라는 즉, 경장(經藏),율장(律藏),논장(論藏)을 집대성한 것이다. 특히 중국에서는 북송 태조 때에 북송대장경을 처음으로 조조하였으며, 이러한 영향은 인근 국가에 미쳐 각국은 다투어 대장경을 조성하게 되었다. 대장경을 경쟁적으로 조조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각도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첫째는 각국이 불교국가로서 부처님의 가피로 어려운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신앙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다. 전 국민의 절대다수가 불교신자였던 당시로서는 국민의 의지력을 한곳으로 집중시키고 하나로 단결하기 위해서는 신앙적인 방법을 택하였다.둘째는 문화민족으로서의 긍지와 强大國임을 과시하기 위해서 이다. 문자로 정리된 자료로서는 가장 방대한 대장경을 조조한다는 것은 국가의 강력한 의지와 수많은 재원과 지식인들의 참여 없이는 불가능하다. 강대국이란 정치적인 안정과 군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모든 것을 구비한 나라를 의미한다. 즉 강력한 국방력과 수준 높은 고급 문화민족을 말하므로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다.당시의 국제적인 정세로 보아서는 한 국가에서 대장경을 보유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대장경을 조조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으로는 강력한 중앙집권력과 경제적으로는 엄청난 재원과 문화적으로는 수많은 인재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조건을 구비한 나라는 자연히 국방력도 튼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대장경을 조조할 수 있는 나라는 인근의 다른 나라들이 함부로 침입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님을 의미한다.따라서 고려로서는 송과 거란, 몽고의 미묘한 국제관계 속에서 불심으로 국민의 단결력과 가피력 및 인근국가에 대한 국가적인 능력을 과시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중국에서 북송대장경이 조조되고 얼마 후 고려 현종 때에 거란병이 강화도에서 전쟁을 하면서도 다시 대장경을 조조하였다. 이것이 현재 해인사에 보존되고 있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다. 경판의 수가 8만여 장에 달해 흔히 팔만대장경이라 부르는데 정식명칭은 고려대장경이다. 이 경판 한 장의 두께는 4㎝, 8만장을 전부 쌓으면 그 높이는 3200m로 백두산(2744m)보다 높다. 경판 앞뒷면에 글자가 빼곡히 새겨 있는데 한 면의 글자는 대략 300자 정도, 전부 합하면 5천만 자가 된다. 뜻을 헤아리며 읽을 때 하루에 많아야 4~5천 자 정도 읽을 수 있어 통독하려면 30년이 걸리는 셈이다.이처럼 방대한 분량뿐 아니라 팔만대장경은 질적으로도 우수해 마치 숙달된 한 사람이 새긴 것처럼 판각 수준이 일정하고 오?탈자도 거의 없다. 또한 근래 만든 것처럼 보존상태도 양호해 ‘목판인쇄술의 극치’, ‘세계의 불가사의’라는 찬사를 받는다.1)연구동향다른분야와 마찬가지로 강화경판에 대한 초기의 근대적 연구는 일제 식민지시대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때 일부 한국인 연구자가 있기는 하였으나 총독부의 관리나 일제의 식민주의 학자들이 연구자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비록 초기연구의 한계성을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이들의 연구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그것은 과거 일본의 역사적 과오를 은폐, 축소하고 대장경이 가지는 외적 격퇴와 같은 현실극복의 상징성을 종교적 미신으로 왜곡하고 있다는 점, 여기에 반영된 고려 불교 문화의 내적 능력과 수준을 부인하여 대륙의 외해성이나 모방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 연구 시각이나 방법론이 서지학이나 불교문화 및 출판?인쇄술에 편중되어 있다는 점 등이다.이 후 한국인 연구자는 강화경판에 대해 해방 이후부터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대부분 초기 일제 연구자의 시각이나 내용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보여왔다. 조성 동기나 배경을 초기 일제의 학자들이 불교적 미신에 있었다고 평가절하한 설명에 대해, 한국 대부분의 연구자는 이규보의〈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서 염원하고 있었던 침략군 몽고의 격퇴를 당시 고려 지배층의 일치된 기원의 표는 건국이래 최대의 민족적 위기나 현실 모순을 경험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전 고려인은 이같은 위기와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실천을 경주하고 있었으며, 그 한 과정에서 범국가적으로 추진된 각성사업에 적극 참여하였던 것이다. 이같은 사실을 고려한다면 각성사업은 최이 부자나 정안의 개인적 차원이나 정권유지와 같은 방식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최근 김윤곤은 각성사업이 성공적으로 완성될 수 있었던 배경을 무인 최씨정권의 사업주도나 정치적 목적이 아니라 당시 민족적 위기의 극복과 왕정 복고를 갈구하는 전 민족구성원의 자발적인 동참에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아울러 각성사업의 주체 또한 국가 내지 고려 국왕으로 이해하고 있는 연구가 나오고 있다.2. 고려대장경의 제작 배경 및 동기이 경판이 제작되던 때 고려는 몽고와 전쟁을 치르던 중이었다. 당시 몽고는 아시아 대륙 거의 전역을 석권한 막강한 정복국가로 그런 몽고와 전쟁 중에 고려 최대의 프로젝트였던 대장경 간행사업이 진행된 것이다.당대 최고의 문필가 이규보의 문집 『동국이상국집』엔 그가 1237년에 지은「대장각판 군신기고문」이 전한다. 대장경을 새기며 임금과 신하들이 부처님께 올리는 글이다.지난 현종 때 거란이 쳐들어왔다. 그때 대장경판을 새기기 시작 했더니 거란이 스스로 물러갔다. 어찌 그때만 물러가고 지금의 몽고는 물러가지 않겠는가?널리 알려진 것처럼 불력에 기대 몽고를 물리치고자 경판제작에 나선 것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는 1232년부터 36년간 고려의 도성이었던 강화의 고려궁지, 몽고의 침입으로 당시 무신정권의 실력자인 최우가 이곳으로 천도를 하자 백성을 버렸다는 불신을 낳는다. 최우는 민심을 수습하는 방편으로 사재를 내놓고 대장경 간행사업을 벌인다. 백성들의 돈독한 불심을 자극해 민심을 하나로 모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그리고 불교국으로서 고려의 위상에 있다. 고려는 11세기 초인 현종 때 이미 대장경판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초조대장경’이라 한다. 이 경판의 완성으로 고려는 불교문화 우선 『고려사』를 들 수 있다. 이에 의하면 고종 38년 9월 임오에 백관을 거느리고 성의 서문 밖에 있는 대장경판당(大藏經板堂)으로 가서 행향(行香)하였는데 현종 때의 판본이 임진년 몽고침입 때 불타버려 왕과 군신이 다시 발원하여 도감을 세우고 16년에 걸려 마쳤다는 것이다. 이 기록에서 보면 고종 38년을 기점으로 16년 전인 고종 23년에 판각을 시작한 것으로 이해된다.또 고종 24년에 쓴 이규보의『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經刻板君臣祈告文)』에는 “이제 여러 재상 및 문무백관들과 더불어 큰 소원을 세우고 주관하는 관청으로서 귀당관사를 두고 이를 중심으로 공사를 시작코자 하옵니다.”하여 이 해에 판각이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지금의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에는 대부분의 경판이 각 권의 마지막 경판 맨 끝에 정유, 무술, 기해, 경자, 신축, 임임, 계묘, 갑진, 을사, 병오, 정미 등의 간지(干支)가 새겨져 있어서 실제 제작한 해를 알 수가 있다. 간지는 초조대장경에는 없는 팔만대장경만의 특징이고, 내용에서도 중국의 연호를 쓰지 않고 당당히 고려국 이라는 이름과 또 황제가 쓸 수 있는 용어인 봉칙(奉勅)이란 말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적어도 대장경판을 새기는 기간만은 몽골과 전쟁 중 이었으므로 우리의 역사 속에 항상 어깨를 짓눌러 왔던 대륙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 독립국임을 경판에 아로 새긴 것이다.그런데 경판에 새겨진 간지를 정밀 분석해 보면 경판을 새긴 기간이 고려사 기록에서 계산한 16년에 걸쳐 이루어졌다는 것과는 달리 실제의 기간은 약간 차이가 있다. 실제로 판을 조성한 기간은 고종 24년(1237)에서 35년(1248)까지의 12년간이고 고려사의 기록 16년과는 4년의 차이가 있다. 또 연도별로 경판을 만든 양도 크게 달라 1243년의 3년간에 새긴 것이 3,816권에 이르러 대장경 전체 6,265권의 절반이 넘는 분량이다. 따라서 정확한 판각 기간은 16년이 아니라 12년으로 보아야 옳다고 생각되면 이와 같이 고종 35년에 실제적으로 경판이 완 수종으로 경판 제작 당시 엄청난 목재가 필요했던 고려인들은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를 택한 것이다. 물론 판각에 좋은 나무를 선별할 줄 아는 능력도 있었다. 경판자체가 부패하거나 벌레 먹는 것을 방지하고 나무 재질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원목을 바닷물에 삼 년 동안 담가 두었다가 꺼내어 판자로 짠 다음, 다시 그것을 소금물에 삶아내서는 그늘에 말려낸 뒤 깨끗하게 대패질 하여 판을 만든다. 그런 다음 판각을 하는데 먼저 필사본을 뒤집어 붙인다. 그래야만 나중에 인쇄할 때 글자가 바로 찍힌다. 필사본 위에 들기름을 한번 먹이면 기름 먹은 종이의 글자가 또렷하게 살아난다. 기름이 마르면 글자만 도드라지게 돋을새김을 하는데 선이 복잡해 까다롭다. 이럴 때는 조각칼도 한몫하는데 요즘 담금질로도 만들기 힘든 우수한 조각칼이라고 한다. 그만큼 금속제련술이 발달했음을 입증한다.목판 양옆엔 두꺼운 마구리용 목재를 끼운다. 인쇄할 때는 손잡이로, 경판을 보관할 때는 활자들이 서로 닿지 않도록 사이를 떼어 놓는 역할을 한다. 경판 네 귀퉁이의 금속도 단순한 장식용이 아니라 판을 단단히 고정시켜 오래 두어도 뒤틀리지 않게 만든 것이다.경판들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 옻칠도 하는데 두세번 정도하며 이렇게 함으로 방부, 방충, 방수 효과가 뛰어나고 화학적인 내성도 강하며 특히 나무와 친화력이 높아 경판을 보호한다.이처럼 고려인은 당시의 기술과 지혜를 총동원해 대장경 제작에 공력을 기울였다. 8만장의 경판을 만들기 위해선 상당한 물자와 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우선 벌목과정을 보면 경판을 만들 수 있는 목재는 통나무로 잘랐을 때 굵기가 40cm이상, 길이는 1m쯤 돼야 한다. 2m남짓한 나무를 하나 켜 나올 수 있는 목판은 14장, 하지만 옹이가 박혀 구멍이 나거나 갈라진 것은 쓸 수 없다. 따라서 1~2m짜리 통나무 한 개당 가능한 목판 수는 대여섯 장에 불과하다. 8만여 장의 경판을 만들기 위해선 이런 통나무 1만 5천 개 이상이 필요하다. 그런 다음 벌채한 나무를 이틀에 한 번각장소
    인문/어학| 2007.11.15| 7페이지| 1,500원| 조회(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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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원과 사우
    서원(書院)과 사우(書院)【목차】1. 머리말2. 서원(書院)1) 서원의 발생2) 서원의 역할3) 서원의 시설4) 유명 서원3. 사우(書院)1) 사우의 설립2) 사우의 건립주체3) 사우의 구성과 배치4. 맺음말5. 참고문헌1. 머리말조선조의 서원은 선현(先賢)?선사(先師)를 봉사하는 사(祠)와 사제를 교육하는 재(齋)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서원의 태동단계에서는 서원과 사우의 존립 목적과 기능이 크게 구별되는 것이었다. 사우는 처음부터 사현(祀賢)과 풍화(風化)만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그것은 충절인의 공덕을 기리는 보본숭현(報本崇賢) 사상에서 비롯되었고, 그 지방에서 공이 있는 인물에 대한 보답과 사현(祀賢)을 통한 향촌민의 교회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한편, 서원 설립의 일차적 목적은 인재양성과 강학(講學) 기능에 있었다. 선현과 선사에 대한 제향의식을 담당하는 것은 부수적인 것이었다. 서원과 사우의 성격과 사회적 기능의 차이가 있었음은 향사인(鄕祀人)의 성격에서도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사우에 제향되는 인물은 행의(行誼)와 충절, 효열(孝烈)이 존숭 대상이었던 것에 반하여, 서원에 향사되는 인물은 도덕과 학문이 사표가 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서원의 향사 대상자는 행의와 충절만으로는 미흡하며, 도학연원(道學淵源), 학문종사(學問宗師), 공적위국(功竇爲國) 등에 합당하여야 선택되었다. 이에 따라서 서원이 사우보다 높은 비율을 접하고 있는 향사의 명목은 가향(家鄕), 우거(寓居), 졸지(卒地), 적거(謫居) 등인데, 사우가 앞서는 명목은 부임지, 순절지(殉節地) 등이다. 이는 지방수렴을 제향한 생사당(生詞堂) 등이 사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거나 무신 등을 다수 제향 하였기 때문이다.서원과 사우의 비교를 통해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사우는 서원보다 상대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파악되어져 왔다. 사액의 경우도 서원이 465개중 208개가 사액을 받아 전체 사액률이 45%에 이르는데, 사우는 504개 중 71개로 고작 14%에 머물아니다.사림이라는 재야 지식인들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성종 때였다. 정몽주, 길재의 계열로서 일찍이 불사이군을 내세워 정치참여를 거부하였던 이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현실을 인정하고 정계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들은 성리학에 관심이 많아 도덕과 의리를 숭상하고 학술과 언론을 바탕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희구하였다. 그러나 부국강병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비리와 부정에 젖어 있던 훈구 세력과 대립되어 결국 4번에 걸친 사화를 유발하였다. 사화로 인해 심한 타격을 입은 사림들은 세력을 키우기 위한 궁극적 방안을 모색하였다.향촌에서 자란 사림들은 향촌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자 하였다. 사창제의 실시를 주장하고, 유향소를 다시 세우고, 향약을 전국적으로 시행하고자 한 것은 그러한 의도의 결과였다. 그 의도를 간파한 훈구 세력은 그것들이 자신들에게 위험한 존재로 작용할 것임을 알고 집요하게 방해하였고, 그로 인해 사림들의 노력은 쉽게 성사되지 않았다. 이에 사림들은 세력 결집을 위한 새로운 장으로서 서원을 구상하였다.서원은 명목상 어디까지나 교육 시설이었으므로 정치적 반대 세력으로부터의 견제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사림들은 서원을 통해서 학연성을 돈독히 하면서 자신들의 힘을 키울 수 있게 되었다.? 주자 숭배열의 고조16세기에는 사림의 대두와 더불어 주자에 대한 숭배열이 고조되고 있었다. 당시 사림의 주자 숭배는 훈구 세력에 도전하기 위한 이념적 무장으로서도 불가피하였다.조광조를 비롯한 당시의 사림들은 주자의 저술인 「소학」을 심신 단련의 기초로서 필수 과정으로 삼았고, 이 책을 항시 품에 지니고 다녀야 할 만큼 「소학」정신을 실천함에 힘썼다. 주자 숭배는 그의 학문 자체에서 더 나아가 주자 자체를 숭앙하였으니, 사림에서는 주자의 학문뿐만 아니라 주자의 언행까지도 배우는 것이 참다운 배움의 길이라고 여겼다.주자에 대한 숭배열은 교육 활동에도 곧바로 구현되었으니 주자의 ‘백록동 학규’가 그대로 답습되었다. 당시 선비들 사이에서는 주자의 백록동 서원을내용이던 성리학 본래의 성격에서 볼 때, 자신을 도덕적으로 완성시키고자 하는 ‘법성현’은 서원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이를 위해 서원의 원생들은 「소학」부터 읽기 시작하여 「대학」「논어」「맹자」「중용」「시경」「서경」「주역」「예기」「춘추」등의 순서로 배웠다. 이렇게 하여 윤리학적 체계를 갖춘 다음 서원에 따라서는 「가례」「심경」「근사록」「사기」등을 읽어 뜻을 넓히게 했다.서원에서의 교육 내용은 거의 성리학 위주로 구성되어 원생들은 그것을 근거로 사물의 이치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실천적 덕목으로서 유교 의례를 익혀 나갔다.한편 서원은 정계에서 쫓겨난 선비들의 재기 장소로서도 활용되었고, 붕당의 후방 기지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이 경우 정계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그 관문인 과거 교육 또한 소홀히 취급하지 않았다. 이황도 “국가에서 현인을 얻는 것은 서원에서”라고 하였다. 따라서 관리의 양성 곧 ‘양리’도 서원의 중요한 교육 목표의 하나였다.? 선현을 모시는 곳서원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개 선현을 받들어 모시는 곳으로 알고 있다. 이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교육의 기능보다 사묘의 기능이 더 강조된 때문이다. 특히 문중에 의해 서원이 건립되고 조상 가운데 뛰어난 인물이 제향 되면서 그리고 학덕으로 명망이 있는 인물보다는 충절로 이름 높은 인물들이 배향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을 받들어 모시는 것을 보다 중요시하면서 서원의 기능은 점차 변질되어 갔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 있어서의 서원은 단순한 사우까지도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이해되었다.충효를 중히 여기는 유교 사회에서는 조상을 공경하는 조상 숭배 사상과 그 은덕에 보답하려는 보본 사상이 특히 강조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오랜 세월 속에서 특정 위인이나 선현을 받들어 모시고자 하는 숭현 사상의 발생을 보여 마침내 사묘 제도를 낳았다. 보통 사묘하고 하면 각 가정에서 조상을 제사하는 가묘를 비롯하여 생사, 사우, 영당 등 여러 형태가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생사와 사우가 대체로 들었다고 한다. 또한 이후 사액을 받아내는 데에는 네 차례의 청액 과정을 거치면서 50,000냥이 넘는 비용을 지출하고 난 뒤인 1694(숙종20)이 되어서야 이들의 목표를 달성하게 되었다.지방의 사림들은 이처럼 많은 자금과 노력을 들여서 서원을 창건한 다음에 이곳에 정기적으로 모여서 지방 유림간의 단합을 도모하면서 그들 나름대로의 엘리트문화를 누렸던 것이다. 이들은 선현에 대한 제사, 그리고 강회 등을 통해서 그들 나름의 고급 유교문화를 유지, 보전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유교문화의 향유가 지나칠 때는 인근 양민들에게 폐해를 끼치기도 하였다. 특히 당시 청주에 세워진 화양서원에서는 서원에 제사지낼 때 제수 마련을 빙자하여 각 고을에 묵패를 보내어 이를 징수하여서 민폐가 심하였다는 점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이러한 양상은 18세기 후반~19세기가 되면 더욱 심해져서 문중이 자체적으로 서원을 건립, 운영하여 자기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도 하였다. 17세기부터 지방사회 내에서 조직화되기 시작한 문중세력은 결국 자신들 세력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서 아예 그들 스스로 서원을 건립, 운영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의 서원은 진정한 의미의 서원이라기보다는 제향의 기능만을 보유한 사우의 성격을 지닌 경우가 많았다.? 향촌 사회의 도서관서원이 향촌 사회의 도서관 역할을 하였다고 함은 서원이 1차적으로 배움의 장이라는 사실과 매우 연관이 깊다. 배움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것이 서적이다. 따라서 교육과 연구를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많은 책을 구비하고 이를 잘 활용해야 한다. 서원에 문고를 두어 여러 가지 서적을 수집, 보관하고 나아가 연구 성과 또는 선현의 사상을 보급하기 위하여 서적을 출판하는 것은 서원의 본래 기능이라고도 하겠다. 서원이란 용어 자체도 도서관적 기능에서 비롯되었다. 서원의 연원이라고 할 수 있는 집현전 서원이 그러하였고 신라 때의 서서원, 고려 때의 수서원 등이 모두 많은 책을 수장하고 교육활동을 지원하고 있었다.서원이 도서관이었음은 최초의 사액 서원인 서원에 따라서 약간 차이가 있다. 이는 시대가 흐름에 따라서 서원의 기능이 달라졌음에도 기인한다. 곧 처음에는 교육 시설이 중요시되었으나 17세기 후반 이래로는 제향 시설 중심으로 건물이 조영되고 있다. 또한 장판각이나 누각 등이 점차 사라져갔다.19세기에 와서는 대체로 사당과 강당만으로 구성된 단순한 형태의 모습으로 서원 구조가 바뀌고 있다.? 강당선비들이 모여서 학문을 토론하는 곳이다. 서원 안에서 제일 규모가 크며 넓은 대청마루와 온돌방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다. 건물 중앙의 처마 밑에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도동서원에는 중정당, 덕천서원에는 경의당, 둔암서원에는 응도당, 옥산서원에는 구인당, 병산서원에는 입교당, 필암서원에는 청절당, 남계서원에는 명성당이란 현판이 남아 있다.? 재실원생들이 잠자는 곳으로 보통 강당 앞에 대칭으로 자리하고 있다. 재실은 강당과 함께 교육 공간의 핵심을 이룬다. 강당을 향하여 설 때 오른쪽의 재실을 동재라 하고 왼쪽의 재실을 서재라 한다. 동재에 기거하는 원생이 서재의 원생보다 선배이다. 동재나 서재에도 역시 서원마다 고유의 현판이 걸려있다. 예컨대 도동서원에는 거인재, 거의재, 남계서원에는 양정재, 보인재, 필암서원에는 진덕재, 숭의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사당선현의 위패(또는 영정)를 모시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배향 인물은 보통 1인을 주향으로 시작하나 뒤에 다시 존중할 인물이 생기면 추가로 배향하였다. 도동서원에서는 처음 김굉필을 주향으로 하였으나 나중에 정구를 추가로 배향하였다.사당의 명칭은 도산서원의 상덕사, 무성서원의 태산사, 병산서원의 존덕사와 같이 대부분 ‘○○사’로 부르고 있으나 때로는 옥산서원의 체인묘와 같이 ‘○○묘’로도 부른다.? 장판고장판각, 경장각, 서고 등으로도 부른다. 서책이나 이것을 찍어 낸 목판을 보관하는 곳이다.둔암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필암서원 등에는 현재도 많은 목판본이 보관되고 있는데 주로 문집과 경서를 찍어내는 목판본이었다. 필암서원과 같이 장판각과 경장각이 따한다.
    인문/어학| 2007.11.15| 13페이지| 2,000원| 조회(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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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훈요십조
    目次1. 머리말2-1. 훈요십조의 내용2-2. 훈요십조의 내용에서 볼 수 있는 사상과 문화3. 훈요십조 조작설4. 훈요십조의 의의5. 최승로에 대하여6. 최승로 상서문을 통해 본 그의 사상7. 맺음말1. 머리말고려초기의 유교적 정치사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료는 바로 훈요십조와 최승로의 상서문 시무28조이다. 훈요십조에 나타난 당시 고려전기의 정치사상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고 최승로 상서문의 주요 내용을 해석하면서, 그의 정치사상과 고려전기 유교정치 이념의 확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다. 또한 이와 함께 훈요십조와 최승로의 상서문에서 볼 수 있는 고려의 사상과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보고자 한다.2-1. 의 내용지역차별의 원조, 특히 호남차별의 원조 하면 항상 떠오르는 것이 훈요이다. 훈요십조는 고려의 태조 왕건이 남긴 열 조목의 훈계를 가리킨다. 그는 죽음에 임박한 것을 깨닫고 죽기 한 달 전인 4월에 측근은 박술희를 불러 일종의 유언서인 훈요를 남겼다. 훈요십조는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이 남긴 것이므로 후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태조는 뿐 아니라 「정계」와 「계백료서」를 남겨 국왕과 신하들에게 그들의 본분을 지키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남아있는 를 통해 그가 지향하는 고려 사회를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훈요의 내용 가운데 전체 혹은 일부는 태조가 남긴 유언이 아니라 후대에 정치적인 의도 하에 조작되었다는 주장이 종종 제기되어 왔다. 과연 그것이 어떠한 내용이기에 그러한 주장이 제기되었는지도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으며 보다 쉬운 이해를 돕고자 관련 항목별로 나누어 보았으며 이를 통해 고려의 불교사상, 유학의 영향 또한 살펴 볼 수 있다.)①고려의 불교其一曰; 我 國家大業, 必資諸佛護衛之力, 是故創立禪敎寺院,差遣住持焚修, 使之各治其業, 後世,姦臣執政, 徇僧請謁, 各業寺社, 爭相換奪, 切宜禁之.첫째, 우리 국가의 대업은 여러 부처님의 호위에 의거한 것이의례를 통하여 구체화하고 공식행사로 지속시키려는 강력한 의지표명이라 할 수 있으며, 그가 대업을 완수하기까지 경험한 초월적인 힘들을 승인하고 지속적인 의례를 통해 그 힘을 유지하고 통제하려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고려 조정에서는 매년 정기적으로 열리는 이 팔관회 의식을 통해 지방사회의 잡다한 신앙체계를 국가질서 속에 묶어놓고자 했다. 원래 제천의식은 천자만이 주관하는 의례였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천자만이 하늘에 제사지낼 수 있다는 유교적 명분론에 의해 하늘에는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팔관회와 같은 제천의례를 행하였고 이를 위한 원구단(圓丘壇)도 만들어졌다. 이 점에서 고려사회는 조선시대와 달리 제천의식을 행하는 등 자주적인 측면을 많이 보인다고 할 수 있다.그렇다면 팔관회가 시행될 수 있었던 사상적 토양은 무엇일까? 하나의 예로 훈요십조에서 고려시대 사상의 방향에 대해 매우 의미 있는 언급을 볼 수 있다. 곧 고려왕조가 불교에 힘입어 건국되었다 하여 불교의 역할을 중시하면서도, 함부로 사원을 짓거나 승려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억제되어야 한다고 했다. 장차 불교가 낳을 폐단을 경계한 것이다. 나아가 태조는 풍수지리? 제천행사의 중요성과 유교윤리에 입각한 제도의 확립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흔히 알려진 대로 고려의 국교는 불교, 조선의 국교는 유교라는 이해와는 전혀 다르다. 대조의 언급대로 실제 고려 왕조는 조선왕조와는 달리 매우 다양한 종교와 사상이 공존하는 사상풍토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고려왕조의 공식적인 종교행사에서는 불교뿐만 아니라 도교? 유교? 제천의식이 아무 거리낌 없이 시행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②-㉠고려의 대외관계고려왕조기 대외환경을 특징짓는 다원적인 국제질서는 고려왕조의 발전과정과 역사적 특성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려왕조가 건국될 무렵인 10세기 초 중국 당나라의 멸망은 동아시아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당나라가 무너지면서 당시 동아시아 세계는 대분열의 시대로 들어갔다. 중국대륙에서는 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킬 수 있겠다.고려 전기의 유학 양상은 태조부터 성종의 시기로 볼 수 있다. 고려는 송보다 28년 먼저 국내의 정치적 분열을 수습하고 안정된 체제를 구축한다. 중국이 오대말기(五代末期)의 혼란을 겪고 있는 동안, 고려에서는 최언위, 최응 등의 유학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새로운 국가운영체제를 수립한다. 이 당시 고려 유학의 주류는 최언위를 비롯한 경주계 출신의 유학자들이었다. 이들은 당(唐)의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거나 또는 유학했던 통일신라 말기의 학자들이거나 또는 그 후예로서 고려 초기 국가체제의 확립에 적극적으로 기여하였다. 따라서 고려전기 유학은 통일신라 시기 당과 교류를 통해 발전하였던 유학을 기반으로 전개한다. 태조는 정계(政戒) , 계백료서(誡百寮書) 등의 반포뿐 아니라, 유훈을 통해서도 세자의 교육과, 왕위 계승, 관리의 등용과 제도의 운영 등 여러 부분에 걸쳐 유학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훈요십조의 내용으로 볼 때도, 고려의 새로운 집권층은 민심의 획득과 함께 권력의 사적 남용을 경계하는 유가적 이념을 국가운영의 기반으로 매우 중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교사회에서는 장남의 왕위계승을 당연시한다. 우리나라에도 삼국시대부터 유교가 도입되었으므로 그러한 관념의 영향을 받았다. 왕건도 훈요에서 맏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전제하였다. 하지만 원자가 못났을 때는 차남 이하가 계승하도록 융통성을 부여하였다. 우리는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중국을 따르는 유교사회가 아니라 우리 고유의 전통을 유지하는 사회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유교사회를 바라보는 눈으로 고려를 바라보아서는 안 되며 당시 고려만이 가지고 있던 특성을 훈요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3. 훈요십조 조작설에 대하여)열 조항 중에서 조작설을 주장하는 자들이 문제 삼는 조항은 주로 2, 3, 8조이며 특히 8조는 지역차별과 관련하여 논란이 많다.(조작설1) 역대 왕들에 대한 비평과 성종대의 당면한 정책을 담은 최승로의 상서문에 훈요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세움으로써 사면을 받은 지역인 것이다.여덟 번째 조항은 호남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후백제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 대상은 차현(차령)? 공주강(금강) 이남의 충청도 지역과 전라도에서 후백제의 영역이었던 지역이지, 고려의 영토였던 나주를 중심으로 한 전남 남서부 지역은 아니었다. 이 조항은 풍수지리를 빌려 후백제 지역 출신들을 등용하지 말도록 한 것이다. 고려 전기에 후백제 지역 출신은 광종 때 개혁을 위해 중용된 듯 보일 뿐 별로 등용되지 못하였다. 특히 핵심 지역인 전주, 공주, 광주 출신은 찾아보기 어렵다.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 출신이 활발히 관직에 진출한 것과 대비된다. 물론 후백제 지역 출신도 고려 후기로 가면서 그런대로 활발하게 관직에 진출하는데 이는 무신정변으로 고려사회가 변하였기 때문으로 고려 전기의 상황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조작설5) 도량이 넓은 왕건이 통일을 달성한 마당에 모든 지역 사람들을 포용했으면 했지 무슨 지역차별을 했겠느냐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다. 왕건 하면 후삼국의 통일을 완수할 만큼 포용력과 덕망을 갖춘 인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물론 이는 사실이지만 그렇지 않은 측면도 있다. 왕국을 창업하고 그것을 물려주는 데 성공한 왕은 거의 약점을 찾아볼 수 없다. 이는 그가 후계자들에 의해 미화되고 신비화되었기 때문인데 현재의 우리에게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었다. 왕건도 인간이었으며 더구나 정치가였다. 정치가는 결코 도덕군자가 아니다. 만약 그가 도덕군자였다면 결코 정변을 일으켜 왕이 되고 후삼국을 통일할 수 없었을 것이다.왕건을 끝까지 괴롭힌 후백제 지역을 차별하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그렇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통치자가 일정 지역을 소외시키는 정책은 효과적인 통치의 한 방법으로 애용되곤 하였다. 마치 유신정권 때 호남지역을 소외시킴으로써 장기집권이 가능했던 것처럼, 지역차별은 어느 시대나 있는 현상이며 그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기만일 뿐이다. 더구나 훈요는 원래 후계 왕들에게건설이란 목표가 밑바닥에 깔려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시무책은 남아 있지가 않아서 구체적인 것은 알 수가 없다. 거슬러 올라가면 ?聰의「諷王書」(花王誡)도 유교적 이념에 입각한 진언이었다고 볼 수 있다. 국왕이라 하더라도 장미꽃으로 비유되는 아리따운 여자를 좋아할 것이 아니라, 입에 쓴 말을 하는 할미꽃에 비유되는 老臣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 취지였다. 여기에는 국왕의 향락적인 행동을 억제하고 어진 신하의 의견을 존중할 것을 권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대체로 유교적 도덕국가의 건설을 희망하는 건의였다고 하겠다. 최승로의 상서문은 비록 28조목 중에서 6조목이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그 대부분이 남아 있는 것이어서, 당시의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면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로서 존중되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런데 이상에서 우리의 관심의 초점이 되는 것은, 최승로의 정치개혁안이 어떠한 이상국가상을 토대로 하고 구체화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의 상서문은 각기 다른 봉투에 넣어서 올려진 두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성종 이전의 다섯 임금, 즉 태조? 혜종? 정종? 광종? 경종의 정치에 대한 평가이다. 그들의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을 가려서 자기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최승로는 이 다섯 임금의 치하에서 봉직해 온 것인 만큼, 그것은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바를 기초로 해서 적은 것이었다. 어느 왕에 대해서든 거울삼을 만한 장점과 경계해야 할 단점과를 아울러 지적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대체로 볼 때에 태조에 대해서는 초창기였기 때문에 제도가 미비했다는 정도의 비판적 언급을 빼고는 칭찬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광종에 대해서는 즉위 초기 8년간의 정치를 제외하면 비판적인 언사로 일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평가의 근저에는 그가 이상으로 하는 군주상이 가로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상서문의 둘째 부분은 성종에게 건의한 구체적인 시무책 즉 당면한 시책 혹은 개혁안이었다. 22조목의 개혁안
    인문/어학| 2007.11.15| 17페이지| 2,000원| 조회(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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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어일기
    My boyfriend has catched a cold since last Saturday.He always catched a cold in a change of seasons. It comes to this situations, I feel suffering about our relationship.Because he often frustrated to me, sometimes he has said its words directly. I have a very weak heart ,(Exactly My blood type is A, but I don`t want to acknowledge.) shocked and heart broken when he did it. I think he didn`t know this feelings how am I unhappy.That`s heart of women who loves some men.
    독후감/창작| 2007.11.08| 5페이지| 1,500원| 조회(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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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어일기쓰기
    Yesterday, I met my boyfriend and spend together all day, so Im tired today. Ill take a exam tomorrow, have to studied.But Im a great sleeper, I should sleep a little bit. I asked that call me at midnight to my boyfriend, and he did it. But I didnt get up. I said in my mind a little more, a little more.He tried to wake me several times, but all failed it.But I got up, It was time to go to school.I slept for 12 hours! Time is not waiting me. How lazy!I knew that Its no good but I was regret.I hurried and I can go to school early a hour.But a hour was short time to do memorizing all that.I took exam, my head confused, so I spoiled first exam in that class.I think It was reasonable result.But always Im not enough time, I attend lecture all major in 21units.In addition, I take double major, so I have many homework.It was very hard more than I think before.But Im already senior, I do go to school just a years.I want to directly work professional service job in anywhere.My family wasnt rich, so my older sister early worked.But she should go to college, graduated last years.Looking her I think Education is very important thing and great.she want to be a feminine fashion designer, so she work as jeans designer in seoul for a while.
    독후감/창작| 2007.11.08| 5페이지| 1,500원| 조회(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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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02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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