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군대라는 조직의 근간을 뒤흔드는 상상치 못할 몇몇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군 자체내부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의 시민들까지 상당히 염려스런 시선을 군에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이러한 사건발달의 원인과 또 이에 대한 해결책을 상당부분 군의 지휘통솔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됩니다.90년대 이후 군 조직에 유입된 신세대 병들은 기성의 지휘관과는 여러 측면에서 다른 의식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에 반하여, 이를 인식하지 못한 지휘관의 구태의연한 지휘통솔과 일상적인 부대활동속의 병들의 의식성향의 장벽은 결국 최근 몇몇 사건으로 표출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이러한 문제의 책임은 신세대 병들의 의식성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이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한 지휘자에게 있다고 할 수 있으므로, 근본적인 문제와 더불어 그 원인을 찾고, 그에 따른 해결책으로 새로운 지휘통솔 기법을 창출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신세대라는 용어는 최초 미국과 일본의 광고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소비자를 확보할 목적으로 만들어 낸 말로써, 크게는 10대 초반에서 30대까지, 작게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까지를 의미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신세대는 기성세대와는 다른 성장배경을 지닌 탓으로,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때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행동하며, 조직과 단체보다는 개인의 공간과 사생활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며, 이러한 성장 환경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특징지을 수 있는 여러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신세대의 성장배경과 특징을 요약 제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신세대의 의식적 특성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먼저, 무한상상력과 도전정신입니다. 기성세대가 사회가 요구한 경제적, 정신적 부담에 눌린 위축되었던 세대라면, 신세대는 그러한 부담 대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즐기며, 무한한 상상력을 펼치는 세대입니다.다음, 개인주의 성향입니다. 신세대의 이성논리, 판단력의 퇴행은 일상생활에서 “나 중심의 사고”를 낳았으며, 이러한 생활 형태는 공동체 의식보다 개인주의 및 이기주의적 성향으로 발전되었습니다.다음, 사지선다형 사고입니다. 학력 위주, 입시 위주의 사회에서 “공교육”과 “사교육”의 중압감 속에서 성장해 왔으며, 이로 인해 문제해결의 고민보다는 정답만을 추구하고 OX적인 논리로서 모든 문제를 받아들여 객관식형 인간으로서 언제든지 좋고 싫음의 표현이 정확합니다.다음, 여가 중시입니다. 순간적인 느낌을 중요시하는 신세대는 3D 기피 현상과 더불어 3F선호 현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3F 란 Free from money, Free from time, Free from work, 이것은, 돈과 시간과 일로부터 자유로운 직업을 선호하는 현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마지막으로, 신 소비성향입니다. 쓰는 돈으로 최대의 만족을 구하고자 하는 신세대들의 소비는 개인의 정신적, 육체적 멋의 기대와 비례하여 차별화된 소비 행동을 통해 아무도 소유하지 않은 나만의 무엇인가를 가지고 싶은 것이 공통된 생각입니다.이러한 특성을 지닌 신세대들이 군에 들어옴으로써 이들의 독특한 성향은 병영 생활에 기존과는 다른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것을 긍정적 그리고 부정적 시각으로 구분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먼저 긍정적 시각으로는 첫째, 자기 성취 및 개인적 자부심이 강해 개인 의사 표현이 분명하며, 둘째, 공평성과 합리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합리적인 동기 유발 시 참여도나 책임의식이 강하게 표출되며, 셋째, 변화에 대한 긍정적인 수용 자세를 가지며, 디지털 세대로 첨단 장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군의 첨단화에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부정적인 시각으로는 첫째, 개인주의적 성향으로 단체정신이 미약하고, 둘째, 강한 자기 표현으로 상급자와의 갈등이 내재되어 있으며, 셋째, 권위주의적 지휘통솔에 대한 강한 반발과 자유분방한 사고로 군 계급의식 및 조직 체계에 대한 거부 의식이 팽배해 있고, 넷째, 인내력 부족으로 자살 및 구타 등 예상치 못한 악성 사고요인이 잠재하고, 다섯째, 체력 및 정신력 열세는 복무부적응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신세대 지휘통솔상의 문제점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알아보기 전에 먼저 지휘통솔의 개념과 그 요소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지휘통솔은 단순히 지휘와 통솔이 결합된 의미가 아닌 “주어진 책임과 권한을 바탕으로 통솔의 특성과 원칙에 따라 부하를 지도함으로써 충실하고 적극적으로 임무를 수행케 하고, 그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할 수 있도록 감화시키는 기술”입니다. 지휘통솔에는 몇 가지 요소들이 있는데 여기서는 그냥 간단히 넘어가겠습니다.신세대 병사들의 지휘통솔상의 문제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첫째, 심리적 구속감을 들 수 있습니다. 군은 특수한 조직으로써 엄격한 규율이 요구되며, 명령과 복종에 대한 절대성과 단체원으로서의 행동을 요구합니다. 따라서 사회생활에 의해서 형성된 행동이나 태도 그리고 가치에 많은 간섭을 받게 되어, 심리적인 구속감을 느끼게 되며 이러한 심리적 구속감이 적절히 해소되지 않은 군 생활에 적응하기 힘든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둘째, 집단목표의 우선으로 피해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군대는 개인의 목표보다 집단의 목표가 중시되기 때문에 개인의 행동이 조직목표에 지향되도록 통제됩니다. 이 때문에 군 생활을 자기인생의 과정에서 공백 기간이나 퇴보기간으로 생각하게 되어 피해의식을 갖게 됩니다.셋째, 불확실한 미래로 인하여 불안과 긴장이 증대하게 됩니다. 군대는 유사시에 생명을 걸고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조직이며, 모든 상황의 전개가 상대적이며 우연성이 개입됩니다. 미래를 확실히 예견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불안과 긴장을 느끼게 됩니다.넷째, 사회와는 다른 열악한 주거환경을 들 수 있습니다. 열악한 주거환경은 어쩔 수 없이 부하의 복무의욕과 사기를 저하시키고, 불만감을 조성하여 군기문란이나 의사소통의 단절과 응집력 저해현상을 초래할 수 있으며, 이러한 주거환경 요인으로 인하여 지휘통솔 효과가 감소될 수 있습니다.마지막으로, 단조로운 근무 여건을 들 수 있습니다. 수행하는 업무는 주특기와 직책에 따라 다양하지만 크게 분류하면 교육훈련과 근무, 작업이 있습니다. 이러한 업무는 비교적 단순하고 반복되는 일이기 때문에 쉽게 권태를 느끼며 형식적으로 흐르기 쉽습니다.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신세대 의식구조를 고려한 효과적인 지휘통솔 방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첫째, 개성과 독창성을 존중해야 합니다. 신세대는 창의력이 강하고 개성이 뚜렷하며, 솔직하고 당당하게 자기의 의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부하들의 개성과 독창성을 중시하는 지휘통솔을 구사해야 하며 부하들 스스로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자율성과 책임의식을 부여해 주어야 합니다.둘째, 솔선수범입니다. 신세대들은 모든 사람들이 똑같다는 평등의식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계급과 직무를 앞세우며, 명령일변도의 지시만 하는 지휘통솔자는 존경하지 않고, 따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고동락하면서 어려운 일에는 행동으로 직접 참여하는 못브을 보여주거나 인간적으로 통하는 지휘통솔자에게는 맹신에 가까운 신뢰를 보이며 추종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간부 자신이 먼저 긍정적,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중국에서 등소평이라면 영웅으로 유명하다. 덩치도 작고 전략적 소신도 적어 모택동과 비교하면 한없이 작아보였던 사내 등소평은 1970년대 말 중국의 정권을 잡은 이래 중국식 사회주의로 오늘날 중국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가져오게 했으며, 중국 공산당에서의 시작부터 항일전쟁, 대장정, 국공내전, 문화혁명 등. 중국 현대사의 큰 흐름에는 항상 등소평이 있어 왔기에 등소평의 치열했던 삶이 곧 중국의 현대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등소평이 중국의 근대화를 이룩한 위대한 인물로 기록될 것인지, 아니면 천안문 민주화 운동을 발포로써 진압한 비정한 정치가로 남을 것인지 그의 역사적 공과를 평가하는 것은 중국인들이 판단할 몫이지만 등소평의 경제정책은 비밀스런 장막 속에 꼭꼭 숨어있던 중국을 세계 최강국의 대열에 당당히 올려놓은 주인공이다. 강택민, 후금도에 의해서도 계승, 발전되고 있는 개혁개방 정책의 입안자이며 강력한 추진력의 실권자였던 등소평. 오늘날 많은 중국인들에게서 인민의 아버지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자랑스런 아들로 기억되는 등소평은 사실 우리나라 국민의 입장으로 보면 어쩌면 적국의 뛰어난 지도자라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이런 등소평에 우리는 왜 집중하는가?나는 등소평을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중국 현대사에 등장하는 지도적 인물들 대부분은 “정말 대단하다” 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아니, 그 이상으로 표현해도 모자람이 없다. 등소평은 중국공산당 가입 이후 국민당과 손잡았다는 혐의를 받은 적도 있었고, 문화대혁명의 폭풍 속에서 실각당한 채 벽지로 쫓겨나 농사꾼으로 전락하였다. 그야말로 앞뒤가 완전히 막힌 막다른 골목이었다. 그나마 그의 오랜 혁명 동지였던 유소기 같은 큰 인물이 죽음으로 끝난 것에 비하면 살아남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막다른 골목 같은 처지에 임하여서도 한결같은 생각에 집중하였으니 만일에 하늘이 자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에 오르게 된다면 중국을 어떻게 살려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데 몰두하였다. 그는 작은 키에 뒷짐을 진 채로 조금도 비관하거나 위축되는 기색이 없이 당당한 걸음으로 걸으며 중국 인민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다시 복권되었다가 주은래 사망 이후 다시 권력을 잃었었음에도 그는 다시 일어났다. 그를 보며 오뚝이 같다고 생각을 했다. 자기가 죽은 이후 20년, 50년 너머까지 바라보며 경제계획을 세우게 한 인물이 등소평이다.한 사람의 지도자가 대중의 운명을 좌우한 일은 역사에 드물지 않다. 대중의 수가 10억을 넘어설 때 그 지도자의 영향력은 말할 수 없이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등소평은 모택동이 사망한 뒤 중국의 최고 실력자로서 18년 남짓 중국을 이끌어 왔다. 등소평은 모택동과 더불어 중국공산당정권을 가장 강력한 사회주의 체제로 만든 정치가이자 전략가였다고 생각한다. 모택동이 명실상부한 제1인자로 장개석의 국민당과 일본 제국주의를 상대로 한 싸움을 승리로 이끈 데 비해 등소평은 참모 또는 고위 전략가로서 그를 보좌해 왔다. 그러나 인민공사와 문화대혁명이라는 무리한 정책으로 체제를 강화하려던 모택동이 중국 대륙을 혼란에서 건지지 못한 채 숨을 거둔 뒤 등소평은 모택동과는 정반대의 노선을 가면서 나라와 인민에게 안정을 안겨 주었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국토에서 굶주림과 헐벗음에 시달리던 인민들은 먹고 입고 자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등소평이 주도한 개혁, 개방의 성과임은 틀림없다.중국은 등소평 체제하에서 세계에서 가장 성장 잠재력이 큰 나라로 꼽히게 되었다. 만약 중국이 개발을 미루고 사회주의에 집착해서 "중국식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를 모색하지 않았다면 인민들의 삶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부정적 견해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바로 이 점에서 등소평은 주린 배를 채우지 못했던 수천 만 명의 중국 인민의 추앙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이렇듯 등소평은 이념보다는 현실과 실리를 중시하여 100년 간의 쇠퇴기를 걷고 있던 중국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었다.역사의 혼란기를 거쳐 경제 부흥을 이룬 인물. 지금 이 시기에 등소평이 다시 떠오르는 것은. 분명 단지 그의 탄생 100주년이 넘어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한창 정치적, 경제적 혼란기에 있어 박정희가 회자되고 있는 현재의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중에 확실히 '나의 아버지 등소평' 은 상황 판단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다만 조금 위험한 것이, 저자가 등소평의 셋째 딸인 등용이라는 점이다. 당연하게도, 그녀는 아버지의 편에 서서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책의 가장 마지막 부분에 쓰인 글을 조금 인용하면 ‘이제 나는 아버지가 이 책을 보고 그 정도면 됐다는 식의 긍정만 해 주어도 나에게는 더 없이 기쁨이 된다.’는 말속에 이 책은 평전으로서 읽기는 조금은 무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세한 책 내용 또한 45세 까지의 등소평에 대해 묘사되어 있으며 마지막 끝나지 않은 이야기 부분에서는 등소평의 집권 후 은퇴 까지를 간략하게 소개하였으나 등소평의 일생에 가장 큰 오점이 되어버린 천안문 사태 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다. 어떠한 역사적 인물을 평가하는데 있어 장점만 봐서는 그 사람을 100% 알 수 없다. 등소평이 대단한 인물이기는 해도, 천안문 사태에 대한 언급없이 그를 평가하는게 과연 옳은가? 시위대가 있는 천안문 광장에 군대를 투입한 것도, 발포를 명령한 것도 그였다. 총서기직에서 물러나기는 했어도, 군사지휘권은 그에게 있었으니 그것은 명백한 일이다. 물론 서방 언론에서 공산국가인 중국의 상황을 확대보도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많은 사람이 천안문 광장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갔다. 그냥 지나쳐갈 수만은 없는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양녕대군은 누구인가?1394년(태조 3년)에 태어난 양녕은 태종 이방원의 장남으로 이름은 제, 자는 후백, 부인은광주 김씨 한로의 딸 김씨였다.양녕은 1404년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자유분방한 성격 탓으로 궁중 생활에 잘 적응하지못했다. 그는 궁중을 몰래 빠져나가는 일이 잦았고, 사냥이나 풍류를 좋아해 자주 태종의 화를 돋우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1418년 세자에서 폐위되고 말았다. 그가 스스로 왕세자 자리를 거부해 기이한 행동을 일삼았다는 말도 있으나 정확한 내막은 알려져 있지 않다.그는 동생 충녕이 왕이 된 이후에도 감찰 대상이 되긴 했으나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고, 세종과는 지극히 우애가 깊어서 수십 차례에 걸쳐 탄핵된 바가 있었지만 세종에게 한 번도 처벌받은 적이 없었다. 그는 천명을 누리다가 1462년 67세를 일기로 죽었다. 시호는 강정이다.)일화 소개양녕대군은 아래 보는 일화들을 통해 술과 계집에 빠져 살았음과 명승 유람을 즐기는 등 자유분방한 성격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어질고 덕이 있고 효심과 우애가 지극하여 아우 충녕대군에게 세자 자리를 내어주는 부분에서 인자한 성군으로서의 자질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남대문의 현판의 글과 정향이라는 미희에게 써준 싯구 등으로 보아 시와 글에 능한 명필가, 시인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일화를 통해서 더욱 자세히 양녕대군에 대해서 알아보았다.① 미치광이 세자사랑 사랑 내 사랑술과 어리 내 사랑주야 장천 못올 님어화 어리 내 사랑아.이것은 미치광이 세자라고 불리던 양녕대군이 지어 부르던 노래다. 어리란 당시 미색으로 이름난 계집인데, 남의 집 소실로 있었던 것을 세자 양녕이 후려다 놓고 밤낮으로 그녀를 얼르면서 갖은 추잡한 짓을 다하였다. 그가 지어 부른 노래만 보더라도 양녕이 얼마나 술과 계집 어리에게 빠졌던가를 알 수 있다.원래 양녕은 태종의 맏아들로서, 세자로 책봉되어 춘방에서 거쳐하며 문장과 필법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태종이 경회루의 현판을 보고 그 웅건한 필치에 놀라 아들 양녕의 필법을 무수히 칭찬했다는 이야기로 보아도 알 수 있다.그러나 양녕이 어찌하여 술과 계집에 빠져, 장차 지존에 오를 세자의 자리까지 내팽개치고, 갖은 추잡한 행동과 미치광이 짓을 다하였던가?그가 세자로 책봉된 지 얼마 안 되어 부왕의 침전으로 문안차 들어갔을 때, 그는 문 밖에서 다음과 같은 부왕 태종과 모후 민씨의 소곤거리는 대화를 역력히 들었다.“참 아쉬운 일이야. 충녕과 양녕이 바뀌어 태어났더라면, 장차 백성들의 요순의 다스림을 받아 태평성대에서 살게 될 것을...!”이 순간 세자 양녕의 머릿속 에는 번갯불처럼 스쳐가는 어두운 생각이 있었으니, 그것은 지난 날 부왕 태종과 방석, 방번, 그리고 방간 등 삼촌들과의 자리다툼이라는 골육상잔의 참극이었던 것이다.“자, 그럼 어떻게 세자의 자리를 셋째 아우 충녕에게 내어줄 수 있을까?” 불시에 이런 생각이 양녕의 머리에 떠오르자, 그는 이윽고“에라 모르겠다. 발광할 수 없으면 발광한 체라도 해보자.” 이렇게 결심하였다. 어질고 덕이 있고 효심과 우애가 지극했던 양녕인지라, 부왕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그는 자기보다 월등한 셋째 아우 충녕대군에게 깨끗이 자리를 양보하려 한 것이다.그로부터 양녕은 돌변한 사람 미치광이가 되었다. 자신의 스승이 처음 오는 날 그 앞에서 개 짓는 시늉을 했는가 하면, 공부 시간에도 동궁 뜰에 새덫을 만들어 새 잡기에만 열중했고, 또 조정의 하레에 참석하기 싫어 꾀병을 부리기도 했다. 춘방별감을 대동하고 궁궐을 월장하여 외방 출입을 하면서 기생들을 상대하는가 하면, 남의 집 반반한 소실까지 낚아 내기도 하였다. 그가 끔찍이 사랑하던 어리도 이렇게 하여 낚아 들인 계집이었다.이 후 태종은 양녕을 폐하고 충녕을 세자로 세운 다음, 곧 충녕 세자에게 왕위를 전수하였다. 그런데 양녕의 거짓 미치광이 짓은 거의 고질화 되어, 상왕 태종의 미움은 더욱 심해졌다. )② 풍류 왕형의 평양 나들이부왕의 뜻을 받들기 위하여 왕위도 영화도 다 버렸던 양녕대군, 이제는 방탕이란 것이 그에게 있어 버리지 못하는 고질이 되고 말았다. 술과 계집, 그리고 명승을 찾아 유람한다는 것이 최대의 환락이자 그의 생활의 전부였다.그러한 그가 오래 전부터 벼르기만 하던 서경 유람의 길을 기어이 떠나게 된 것은, 특히 아우님 왕의 간곡한 부탁과 윤허를 얻고 나서는 일이었다. 양녕이 출발에 앞서 고별 차 세종께 배알하였을 때이다. 세종은 이번 유람의 길에 건강을 위해 주색을 금하기를 부탁하고 양녕 또한 일체 이번 길만은 일체 주색을 가까이 하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떠났다.양녕은 그야말로 한 필의 말과 한 동자와 더불어 천리 춘색을 감상하면서 길을 재촉하였다. 사실 이러한 지금의 양녕에게는 아무런 그릴 것도 부러울 것도 없었다. 그저 유연한 이생의 환락과 행복감만이 그의 가슴 속에 뿌듯하였을 뿐이었다.한편 형님을 떠나보내고 난 임금 세종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형님이 이번 길에 평양에 내려가셔서 미희 하나 가까이 못하시게 되면 나를 얼마나 원망하실고.’ 이렇게 생각한 그는 객향에 외로울 형님의 심사를 생각하고, 즉시 평안감사에게 밀지를 내리었다.“나의 형님께 미희 하나를 특별히 제공하되, 형님이 전혀 모르시게 할 것이며, 또 일단 상관된 미희는 즉시 서울로 치송케 하되 형님의 필적을 잊지 말고 받아가지고 오게 하라.”평안감사가 이러한 왕의 밀지를 받든 것은 양녕 대군이 아직 평양에 당도하기 전이었다. 감사는 비밀히 감영 기생 전원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수청 들 사람이 있느냐 물었다. 또한 많은 제약이 있음도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기생들은 저마다 거절하였다. 그 때 평양 제일의 미희라는 관기 정향이 지원하고 나섰다. 그녀는 젊고 아름다울 뿐 아니라, 지조가 높고 영리하기로도 이름난 명기였다. 감사는 그녀를 격려하며 무한히 기뻐하였다.이리하여 감사와 정향 간에 이미 비밀 약속이 정해진 후, 양녕대군은 평양에 당도하게 되었다. 그는 우선 감사를 만나고 나서, 감사가 정해주는 감영 안 별당에 사처를 정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명승과 고적을 찾아 나섰다.평양은 과연 수려한 금수강산이었다. 모란봉, 부벽루, 대동강, 연광정, 능라도, 어디라 할 것 없이 웅건한 기상과 화려한 경개가 고구려 천년의 왕도로서 손색이 없는 풍경이었다.그러나 양녕은 갑자기 마음 한 구석이 텅 비는 듯함을 느끼었다.그는 문득 술과 아름다운 여인이 그리워졌고, 다만 이 아름다운 경개 속에서 미희와 더불어 술을 마시며 완상치 못하는 것이 지극히 서운하게 여겨졌다.‘유람도 주색이 곁들여야...’ 하고 그는 새삼스러이 쓸쓸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그 날 밤 뜻밖에 객사 문 밖에서 왁자하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양녕은 웬일인가 하고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자 어떤 하얗게 소복한 젊은 여인이 포교들에게 휩싸여 시달리고 있는 장면이 보였다. 양녕이 그윽히 그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니 가련하도록 젊고 어여쁜 모습이었다. 양녕은 무슨 일인지 물었다.“존전에 시끄럽게 떠들어 황공하옵니다. 실은 소인 누이가 망부의 제사에 쓸 닭고기를 고양이 한 놈이 물고 이곳까지 내빼와서 나졸들이 왁자하게 누이를 꾸짖었습니다.” 하고 능청스럽게 아뢰었다. 이 통인 아이와 개생 정향 사이에는 이미 밀약이 되어 있던 터이다.양녕은 머리를 끄덕하면서 여인을 굽어보았다. 정말 고운 자태였으며 흐르는 몸매의 곡선은 능라도 실버들이 따라올 수 없었고 고운 눈썹은 부벽루의 새벽 달이 무색할 정도였다.아무튼 잠시 동안의 일이었지만, 양녕대군의 마음은 이미 그 여인에게 가 있었다. 그는 마침내 결심을 하고, 가만히 밖으로 나와 그 여인이 사라져간 쪽으로 갔다. 토담이 무너진 곳에 한 초가집이 있는데, 창밖으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양녕은 혹시 저 집이 그 고양이를 쫓던 그 미인의 집이 아닌가 싶었다. 그는 성큼 걸어서 무너진 토담을 넘어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가자 영인은 힐끗 양녕을 쳐다보는데 그 눈매가 요염하도록 곱다.“놀라지 마오. 나는 서울서 평양 구경을 온 사람인데, 달은 밝고 객회가 쓸쓸하기로 이렇게 무례한 줄 알면서 들어왔으니 낭자는 용서하기 바라오.”하고 양녕이 말하니 여인은 새침하게 돌아 앉으며,“아무리 미천한 집이옵기로, 남녀가 유별한 터에 함부러 들어오시다니 안 될 말씀이옵니다.” 하며 은장도를 집어 들고 목을 겨눈다. 양녕은 엉겁결에,“그대의 정절은 과연 열녀요, 그러나 나도 사내 대장부로서 한번 이 방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그냥 물러날 수 있겠소. 그대가 나의 무례를 책한다면 나 또한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 나설 수 있겠소? 죽으려거든 나와 함께 죽는게 어떻겠소.”하고 달려 들어 칼을 빼앗았다. 여인은 이윽히 양녕을 바라보더니 그 고운 눈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양녕의 품에 안겼다. 이윽고 그는 여인의 가는 허리를 덥석 끌어안고 촛불을 불어 껐다. 이튿날부터 양녕은 감사가 천거하는 구경은 하는둥 마는둥 하고 여인에게만 파고들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정은들대로 들고 익을 대로 익었다. 이다음 반드시 그대를 데려다가 서울서 백년해로할 것이라고 굳게 다짐하였다.그러나 만나면 이별일 오고야 마는 것을 어이하랴. 양녕은 자기의 이번 길이 왕명으로 여색을 금하게 되었다는 말이며, 그러니 부득이 이번에는 못 데리고 간다 하더라도 다음 번엔 반드시 서울로 데리고 올라가서 그대와 백년해로를 할 결심이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여인이 흐느끼며,
지역개발정책시 부처간 중복 및 연계부족 사례목차1. 서론 - 지역개발의 필요성2. 지역개발 사례1) 농촌개발사업2) 영화제3. 개선방향4. 결론1. 서론90년대 후반 외환위기 이후 수도권의 경제력 집중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산업의 디지털화가 급진전되면서 지식산업이 대부분 대도시에 집중되고 있으며, 수도권 입지 규제에도 불구하고 산업 및 인구비중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또한 지역별 산업생산의 양극화가 지속되고 있으며 지방의 산업 공동화가 소득감소 및 실업 증가를 야기 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산업 활동의 지역적 편중 역시 심하다. 수도권과 동남해안 및 내륙권 등 전통 주력산업의 중심지역에 연관 사업의 집적이 더욱 강화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이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첨단기업, 대기업, 외투기업 등 파급효과가 크고 성장 잠재력이 높은 분야일수록 수도권의 집중도가 높은 실정이다. 일반 제조업 사업체나 종사자의 수도권 비중이 50%인데 비하여 벤처기업, 외투기업, 상위 1000대 기업의 비중은 70% 이상이인 점과 2004년 신설기업, 기업부설연구소의 수도권 집중도가 각각 80.1%, 72.9%인 점을 보아 지방의 창업 및 혁신 환경이 매우 열악함을 파악할 수 있다.총량경제력지역내총생산제조업고용상위1000대기업비중2004년 신설기업경제활동 인구수출조세 수입수도권52.646.345.671.580.146.445.070.9지방47.453.754.728.519.953.655.029.1총량 경제력의 수도권과 지방간 비교단위: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지역 간 불균형 성장이 지속되자 참여정부는 국가균형발전을 국정의 핵심 어젠다의 하나로 채택하고 국가균형발전 5개년 계획, 행재정 권한의 지방분권, 공공기관의 지방이전 등을 추진하고 있다. 2008년까지 국비 44.5조원과 지방비 14.4조원, 민자 7.6조원 등 총 66.6조원을 국가균형발전을 위하여 투입할 예정이라고 한다. 중앙부처들은 혁신역량 강화, 산학연 네트워크 구축, 혁신 클러스터 육성을 핵으로 추진되어 중복되고 연계성이 부족한 정책들을 찾아 그 실황과 문제점, 개선방향 등에 대하여 논하여 보려고 한다.2. 지역개발 사례1) 농어촌 체험마을우리나라 지역활성화 정책은 ‘지역범위’와 ‘발전정도’의 두 축에 의해 구분이 가능하다. 대상지역의 범위는 그리고 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대상지역의 발전정도는 으로 구분 가능하다.특히 우리나라의 지역활성화 정책은 낙후지역의 시군구, 마을단위에 집중되어 있다. 낙후지역이나 정체지역에 대한 국가균형발전 정책의 수단으로 지역활성화 정책을 주로 활용하기 때문이다. 마을 단위로 낙후지역에서 시행되고 있는 정책은 ‘마을 가꾸기’나 ‘체험 마을 만들기’ 등 농촌관광 분야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는 농산어촌 체험마을, 관광마을 조성 등 낙후지역의 관광자원을 개발, 상품화하여 지역주민의 소득을 창출하는 사업이 해당된다. 그 외, 낙후지역의 마을단위 공간정책은 전원마을 조성사업, 정주기반확충사업, 농촌전통테마마을사업 등 부처별로 매우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여기서 우리는 많은 지역활성화 정책 중 부처별로 중복되고 연계성이 부족한 정책으로 문제점이 나타난 농어촌 체험마을 실시에 대해서 살펴보려 한다.농어촌 체험마을은 도농교류를 통한 주민소득 향상기반을 조성하기 위하여 시행되었다주무 부처별로 농림부는 ‘녹색농촌체험마을사업’, 농업진흥청은 ‘농촌전통테마마을사업’, 해양수산부는 ‘어촌체험관광마을사업’을 조성하고 있는 시점이다.농림부와 농진청은 농촌지역을, 해수부는 어촌지역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도시민들이 농·어촌을 방문하여 휴양·체험·특산품구매를 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여 농·어업 이외의 소득 기반을 마련하는데 그 주요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지역별로 1~2년의 단기사업으로서, 사업비는 개소당 2~5억원 가량이다.농어촌 체험마을사업의 비교사업명녹색농촌체험마을농촌전통테마마을어촌체험관광마을주무부처농림부농업진흥청해양수산부사업목적도시민의 농촌관광 수요를 유치하여 휴양·체험 공간을 제공하여 설팅, 설계비, 교육훈련·홍보비체험·학습시설, 숙박 및 편의시설정비, 프로그램 개발 및 보급, 교육(마을전문가양성),전문가 컨설팅, 홍보 및 마케팅, 캐릭터 개발주차장, 마을안길정비, 산책로, 종합안내센터, 다목적광장, 어촌진입로, 진입도로포장, 가로등, 조경식재 및 시설, 수상레저편의실, 해변광장, 먹거리장터, 야영장사업비개소당 2억원(국비 50%)개소당 2억원(국비 50%)개소당 5억원(국비 50%)추진기간1년2년1년자료: 송미령 외(2004), 「농촌 지역개발사업의 체계화 방안」,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문제점유사한 사업의 중복 실시 : 유사한 내용의 사업을 주관부서에 따라 달리 시행사업 추진상의 약간의 차이 이외에는 차별성이 거의 없음녹색농촌체험마을조성사업과 농촌전통테마마을조성사업은 사업 추진기간, 컨설팅비를 형식적으로 마을에 집행하느냐, 시·군에서 집행하느냐, 사업내용상 개별 지원 미 소프트웨어 사업을 얼마나 인정하느냐 정도의 차이를 가질 뿐이다.2) 영화제최근 우리나라 영화 산업의 급성장과 함께 국제영화제도 활발하게 개최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개최되는 국제영화제는 부산국제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광주 국제영화제 등 20여개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처럼 많이 개최되는 국제영화제는 차별화된 특성을 지니지 못한 채 일부 성공사례에 대한 모방에 그쳐 지방단체의 성과내기식 행사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여러 국제영화제 중에 성공사례로 꼽히는 부산국제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 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광주국제영화제의 비교를 통해 지역개발을 양면을 알아보도록 하자*부산국제영화제부산국제영화제는 한국영화의 세계화를 위해 오랫동안 그 필요성을 절감하여 준비해오던 부산 출신 영화인들과 새로운 도시상 마련의 필요성을 느낀 부산시의 노력이 부합되어 추진되었다.부산국제영화제 성과결산(단위 :백 만원)구분제1회(1996)제2회(1997)제3회(1998)제4회(1999)제5회(2000)제6회(2001)제7회(2002)참가국수27개국33개국0총 관객대비 유료관객수86.4%84.3%90.8%90.0%89.7%88.5%86.0%이는 전체 수입의 상당부분을 관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타 영화제에 비해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부분은 바로 유료관객수의 비율이다. 이는 다른 영화제인 홍콩, 도쿄 영화제에 비해 약 1.8배정도 높은 수치이다.1996년에 민간조직으로 설립된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는 부산국제영화제의 모든 실무를 담당하는 곳으로 부산시의 직접적인 통제로부터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으며 운영 또한 민간영역과 관의영역이 조화를 잘 이루는 조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조직위원회의 위원장은 부산시장이 맡고 있으며 부산시의 정책적 의미를 원활히 하기위해 우선 그 전문성을 강화시킴으로써 관과 기업으로부터 신임을 증대시키며, 동시에 이들로부터 경제적 혜택을 받고 결산을 행하는 것으로 기본적인 운영을 지속시켜 나가고 있다. 부산시의 주 업무는 영화제의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담당하면서 동시에 부산에 영상산업을 육성시키기 위한 전략을 거시적으로 펼쳐 나가는 것이다. 운영의 자율성과 유연성은 행사 주체들 간의 이상적인 파트너십을 보여주었으며 이는 실제 영화제 성공에 중요한 조건으로 자리잡았다.*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부천국제 판타스틱 영화제는 성과설문 조사 결과 주제가 독창적이며 성격이 뚜렷하다 라는 평가를 받아 독창성이 강한 영화제임을 보여주었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확실한 정체성과 색깔을 가진 영화제로서의 입지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를 위해 문화관광부는 1997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조직위원회를 허가하고 이후 1999년부터 지원하고 있으며 2005년에 국고로 5억원을 편성하고 있다. 이를 위해 행사 약 4개월전부터 조직위원회와 끊임없는 교류를 통해 문제점을 파악하고 준비사항을 검토하는 등 지속적인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문제점이 발견될 시 조직위원회의 유동적인 변화로 인해 현재 부천시장이 조직위원장을 맡고 영화 전문인에게 집행위원장을 맡겨 운영을 일임함으로써 차차였다. 이에 따라 조직위원회는 자율성을 갖지 못하였고 전주시 또한 기대치를 충족할 수 없게 되자 제 2회 영화제 직전 프로그래머가 모두 사퇴하는 등의 갈등을 표출하게 되었고 지역주민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문제점이 드러났다.아래 표는 전주국제영화제의 결산수입이다. 전체 총합에는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여지지만 회가 거듭될수록 입장수입 등 순수입의 감소가 시비, 국비, 도비 등 지원수익으로 채워지는 것을 볼 수 있다.전주 국제영화제 결산수입단위: 천원연도제1회(2000)제2회(2001)제3회(2002)제4회(2003)제5회(2004)계2.046.4652.021.7641.901.4072.144.6612.158.790국비-500.000500.000500.000500.000영화진흥금고100.000----도비----200.000시비900.0001.030.359900.0001.150.0001.000.000입장수입178.604177.638109.589139.740102.559기타867.861563.767391.818354.921336.231출처 : 문화관광부 영상진흥사업부 (2005)* 광주국제영화제광주국제영화제는 2001년 제 1회를 시작으로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네 번째 종합 국제영화로서 도입초기 민간이 주도해온 영화제 였으나, 2003년 국비 5억원, 시비 5억원이 투입되면서 관과 결합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주로 지역인사들로 구성된 조직위원회와 실무진들 사이의 갈등이 노출되기도 하였다. 또한 광주국제영화제는 제 1회 때부터 개최시기가 계속 변화하고 있다. 제 2회 영화제는 부산국제영화제와 시기를 겹치게 기획함으로써 영화제 운영 및 홍보에 차질을 빚기도 했다. 이는 영화제 주도부인 문화관광부와 각 영화제 관할 단체들간의 긴밀한 접촉 없이 경쟁적으로 영화제 개최에만 급급한 나머지 벌어진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차별화되지 않은 영화제가 한 나라에서 자국민도 인식하지 못한채 실행되고 있다는 것은 예산의 낭비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점국제영화제의 중복시행의 구
쇼치쿠 다이가부키 지카마쓰좌지금까지 나는 아쉽게도 연극이나 뮤지컬을 본 적이 없다. 연극이나 뮤지컬이라 하면 왠지 사회고위층이나 고지식한 사람들이 본다는 생각이 내 무의식중에 있어서인지 몰라도 내 스스로 좀처럼 관람기회를 만들려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에 좋은 기회가 생겨 멋진 공연을 보러 가게 되었다. 바로 일본의 대표급 전통공연물이며 국가 상징물인 가부키 인 것이다. 이 공연은 2005년 한일 우정의 해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17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은 작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좀처럼 직접 접하기 힘든 일본의 대표적인 전통 극이었다. 게다가 이번 공연은 에 앞서 30분짜리 가부키 무용인 가 함께 선보여질 예정이었다. 그런 이유로 처음으로 접하게 될 이번 공연이 두 배로 기대가 되었다.금요일 날 오후 친구와 함께 국립극장으로 향하였고 공연 30여분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극장로비에는 명성을 듣고 찾아온 수많은 관객들과 더불어 이번 공연을 축하해주러 온 한일관계자들도 눈에 띄었다. 특히 일본인들도 상당 수 볼 수 있었던 점이 특이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연장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고 공연을 기다렸다. 그런데 아쉽게도 3층 객석의 표 밖에 구하지 못해 조금 멀리서 공연을 지켜봐야만 했다.이윽고 막이 올랐고 화려하고 오묘하면서도 신비스런 여음구와 함께 깔끔한 무대배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배경 앞에는 붉은 층계에 전통악기를 든 사람들이 질서 정연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곧 무대 옆 천으로 된 문이 신속히 열리며, 얼굴을 하얀 분칠을 하고 화려하고 강렬한 느낌을 주는 일본 전통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무대에 등장하였다. 처음 시작과 등장부터가 나의 흥미를 이끌기에 충분하였고, 배경을 비롯해 배우들의 의상과 화장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점점 극에 빠져 들어갔다.는 무사 소네마쓰베가 자신이 집을 비우게 될 때마다 술이 줄어들자 종자인 지로와 다로의 양손을 묶어두고 외출하게 되는데, 그 두 사람은 소이 묶인 채 서로 도와서 술을 마시고, 이윽고 기분이 좋아진 두 사람이 춤을 추고 귀가한 무사가 화를 내지만 술이 취해 봉을 휘두르는 지로에게 내몰리게 된다는 간단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랬기에 일본어로 공연되고, 자막을 통해 말뜻을 이해해야 했지만 줄거리를 모두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위의 내용처럼 종자인 지로와 다로는 양손이 묶인 채로 서로 도와 술을 잘 마신다. 그 과정이 무척이나 우습고 흥미로웠다. 그리고 술을 잔뜩 마시고 술이 취한 두 사람은 양손을 봉에 묶은 부자유스러운 상태로 즐겁게 춤을 추는데 그 모습이 무척 짓궂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흥겹고 익살스러웠다. 또한 흥미로운 점은 처음 등장 때 뒤에 악기를 들고 앉아 있던 사람들이 두 주인공이 춤을 추는 것에 맞춰 반주와 노래를 직접 부르던 것이었다. 그 반주는 전체적으로 밝은 느낌이었고 곡절도 어렵지 않아 더욱 쉽게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밝은 느낌 뒤에는 신비로우면서도 말할 수 없는 오묘함에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이 밖에 배우들의 말투가 일반인과는 색달랐다. 억양과 말투에서 그들의 기교를 찾아볼 수 있었다.그런데 아직도 의문인 점이 있다. 공연을 보고 있는데 3층 객석 근처에서 여음구가 바로 옆에서 들리듯 하였다. 그래서 옆을 보니 실제로 양복을 잘 차려입은 한 신사가 3층 객석 우측 끝에 앉아 여음구를 넣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일본어여서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나라 창극의 ‘얼씨구’와 같은 여음구가 분명했다. 그 신사는 극이 끝날 때가 계속 무대를 주시하며 여음구를 넣었다. 무대 옆이 아닌 객석 맨 뒤에서 이와 같은 여음구를 넣는 방식이 참으로 신기하고 새로워 보였다. 하지만 왜 그렇게 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어였든 공연이 무사가 술에 취해 봉을 휘두르는 지로에게 내몰리는 익살스런 장면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본 공연인 의 막이 오르기 전 휴식시간을 가졌다. 휴식시간에 함께 온 친구와 함께 앞 공연에 대한 느낌을 서로 나누면서 다음 공연을 기다렸다. 20분쯤이 흘러 본 공연인 의 막이 올랐다.는 앞선 공연보다 더욱 사실적인 무대 배경과 진지한 분위기로 시작되었다. 그럴 법도 한 것이 이 극은 1703년 4월 오사카의 소네자키 숲에서 일어난 남녀 동반자살 사건을 기초로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모두 3막으로 이뤄져 있었는데 1막은 오사카에 있는 이쿠다마 신사 경내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특히 등나무가 멋들어지게 표현되어 있었다. 그리고 앞선 공연처럼 얼굴에 하얀 분칠을 하고 일본의 전통 옷을 입은 배우들이 등장하였다. 배우들은 앞선 공연처럼 화려하고 밝은 색상의 옷이 아니라 수수하고 무난한 색상의 평상복을 입고 있어 좀 더 사실적이었다.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극은 일본의 대표적인 사랑 이야기이다. 여기서 ‘신주’라는 것은 죽음에 이를 정도로 순수한 남녀 간의 사랑을 이르는 말이라 한다. 그 만큼 애틋한 사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극은 간강 가게 점원 도쿠베는 숙부에게 되돌려줘야 할 돈을 친구의 속임수로 빼앗겨 버리고, 궁지에 몰리자 사랑하는 여자 오하쓰와의 사랑을 관철시키기 위해 동반 자살을 택한다는 내용이었다.가 가볍고 여흥을 돋게 하는 극인 것과는 다르게 는 조금은 무겁고 마음 한 구석을 찡하게 울리는 감동이 있었다. 우리나라 작품이 아니며 지금 현재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조금은 공감하기 힘들 것 같았지만, 두 남녀의 애틋한 사랑을 전하기에는 손색이 없었다. 특히 제 3막에서 도쿠베가 마루 밑에 몸을 숨긴 채 오하쓰의 발을 껴안고 죽기로 한 마음을 은밀히 알리는 장면은 놓칠 수 없는 명장면이라 정평이 나있는데, 나 역시 그 장면을 최고의 명장면으로 뽑고 싶다. 그 장면은 그들의 슬픈 감정과 함께 애틋한 사랑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장면이기에 더욱 감동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