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번호 1번 산업공학과 199900092 고성재예술 작품의 복제는 그 작품에 대해 해를 끼치는 일인가1.서론예술품의 ‘복제’라고 하는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시행되어져 왔다. 인간들은 누군가가 만들었던 것을 모방하거나, 비슷하게 만듦으로써 작품의 보급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대 사회로 오면서 ‘복제’라고 하는 개념이 다소 확대된 경향이 있다. 바로 기술복제와 디지털복제가 가능해지면서부터 예술작품이 대량으로 유통될 수 도 있었고, 원본과는 다른 어떤 형태로 변형될 수 도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예술작품이 사진과 파일에 담겨져 다른 형태로 이미지만 저장될 수 있게 된 것인데 현대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이 현상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있는 듯하다. 따라서 예술작품과 복제의 연관성에 대해 의문점이 생겼고 이 문제에 대해 논의 해 보고자 하였다.어떤 희귀한 예술작품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선망 받기 쉽다. 오직 하나의 대상만이 실재한다는 사실은 예술가와 감식가 모두를 욕구불만에 빠뜨렸으므로 고대인들은 모사제작을 실행했었다. 예술가들은 경우에 따라, 동일한 그림을 몇 벌씩 베껴두거나, 그 판을 몇 가지로 변형시켜 제작해 왔다. 도제, 조수, 추종자, 그리고 주조술사 또한 모사품을 제작해 왔다. 모사품들의 결함은 아무리 세심하게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결코 정확하지 못하다는 데에 있다. 또 모사품에도 거의 원작과 맞먹는 노동의 집약과 시간이 소요된다. 그래서 보다 정확히, 빠르게, 그리고 보다 많은 양을 산출할 수 있는 복제 방법에 대해 연구하게 되었다.보다 광범위한 유포 또는 이익을 위해 이미지나 디자인을 늘리려는 것은, 수세기에 걸쳐 예술가들의 야망이 되어 왔다. 15세기 이전, 그리고 짜맞추기식 목판과 그 조판술로 영상을 인쇄하는 방법이 있었다. 첫째는 음각된 부드러운 금속에 염료로 눌러 찍어 제작하는 각인이 있었고, 둘째는 석고 주형과 주물로 떠낸 금속을 사용하여 떠내는 주조방식이 있었다. 르네상스로부터 출발하여 복제 과정들은 세련된 방식으로 꾸준히 증식되었다없었다면 생각조차 없을, 오늘날과 같이 천연색 이미지의 과잉생산 양상을 사진복제술이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오래된 건물이 충분히 기록으로 남아 있게 때문에 그 원래의 건물이 화재나 전쟁으로 완파 되었더라도, 다시금 재건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또한, 디지털복제란 디지털신호(0과 1)로 구성된 산출물로 그것이 디지털 그림이든, 음향이든, 텍스트든 원본과 복제품간의 아무런 차별이 없는 것들을 말한다. 컴퓨터와 커뮤니케이션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지는 복제는 단순하게 복제가 아니라 정보의 가공, 활용과 연관하여 이의 처리과정에 주체가 개입하여 일방적 전달이 아닌 서로간의 의사소통, 주고받음이라는 상화 연관된 복제형식을 갖는 의미로 볼 수 있다.2.본론위에서 복제에 대해 살펴 볼 때, 일회적 산물로 생각되는 예술작품과, 애당초 하나의 원판으로 생각되는 예술작품과는 구별해 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 경우, 차후 여러 방식으로 복제 될 수 있는 하나의 원작이 있다. 그러나 그 특성은 결코 정확히 중복될 수 없다. 두 번째의 경우, 원작이랄 것이 따로 없고 그에 해당되는 한 벌의 오브제만이 있다. 여기에서는 보다 낮은 단가가 가능해 진다. 즉 보다 다량으로 판을 찍어내면 낼수록 각각의 판은 더욱 더 저렴한 가격으로 생산된다. 여기에서 예술가들은 갈림길에 서게 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몇 안 되는 원작을 찍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대량으로 제작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현대적 제조방식을 통한 대량 복제의 가능성이 순수예술의 ‘전반적 가치구조를’ 침식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기계화는 예술의 신비를 일소시킬 위협이 된다. 이런 이유에서 몇몇 이론가들은 인류가 자신의 목적에 봉사하도록 고안했음에도 불구하고, 기계는 예술의 치명적인 적이라고 말한다. 예술가들이 항상 다양한 종류의 도구를 사용해 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기계가 한층 정교해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도구의 발전일 뿐이다. 가령 카메라 옵스큐라를 예술가들이 사용할 있다는 점이 기계에 대한 비평가들의 우려이다.많은 비평가들이 위의 문제에 대해 검토해 왔었다. 그 중 가장 논의의 관건이 된 것은 1936년 첫 판을 낸 발터 벤야민의「기술적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이다. 벤야민은, 전통적 예술작품은 늘 살아있는 어떤 성격, 즉 아우라(aura) 를 갖고 있었다. 비록 원칙상에 있어서 거의 모든 예술작품은 복제될 수 있어 왔지만, 기계적 복제의 도래는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그 위력은 아우라를 제거시킬 기세를 보일 정도였으며, 더욱 중요한 사실은 사진술의 발명 그 자체가 예술의 본질에 변화를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벤야민은 예술에 끼친 기계화의 영향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과학기술적 발전의 그 같은 효과는 진보적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과학기술의 혁신은 예술의 생산 수단에 민주화를 가능하게 하고, 더 나아가서 예술의 생산은 의식에 바탕을 두는 대신 다른 실제적인 것, 즉 정치에 근거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논쟁의 소지가 있는 벤야민의 사상은 1936년 이후로 말로, 윈드, 버거와 같은 필자들 손에서 다듬어졌다. 앙드레 말로는 벽없는 미술관 이론을 전개했다. 그의 논지는 이렇다. 1. 미술관의 존재가 예술이 체험되는 방식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바꿔 놓았다. 2. 수백만 점의 예술 복제품들의 이미지로 이루어진 상상적 미술관, 즉 벽없는 미술관으로서의 상상 미술관을 구축하고 있다. 따라서, 3. 비록 원작의 대체물이 제시되며 그 과정에서 어떤 문맥이 파괴된다는 대가를 치룬다고는 하지만, 상상 미술관은 실제의 미술관에 바탕을 두고 그 활동을 펼쳐나가, 각 개인에게 모든 시대, 모든 인간의 예술을 효과적으로 소유하게 한다. 그 상상의 미술관의 소유자들에게 이 영상의 미술관은 분명 대단한 효력이 있다. 즉 작품 사이의 다양한 물리적, 질료적, 조형적, 사회적, 그리고 역사적 차이점은 중성화된다. 그 이미지에는 동질성과 보편성의 인상이 유전되며, 이 이미지는 사실상 복제로 나타나는우리가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에 변화를 가져왔다는 생각을 재검토했다. 왜냐하면 예술가를 포함한 ‘우리’와 예술 그 자체는 활성적으로 상호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천연색 복제품과 인쇄물은 신선한 시각, 산뜻한 취향을 촉진시켜 왔는데, 이것은 전통적 작품들이 지각되는 방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더 나아가서 “전달매체는 대상에 대한 직접 체험에 우선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 대상 그 자체도 때로는 이런 목적을 겨냥한 모습이라 생각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영화화될 것을 염두에 두고서 쓴 소설이나, 복제되리라는 전망에서 제작한 회화 등이 그렇다.존 버거의 「어떻게 볼 것인가」의 첫 부분은 벤야민의 에세이의 일부를 재연하고 있다. 「어떻게 볼 것인가」는 원래 4회에 걸친 텔레비전 프로그램이었다. 이것은 사실상 영화였으나, 이후로 다른 많은 매체를 통해 소개 되었다. 이 내용들이 기사로 게재되기도 하였고, 하나의 책으로 발행되기도 했다. 이렇게 「어떻게 볼 것인가」가 몇 가지 다른 형태로 등장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버거의 기본적 관점을 예시한다. 즉 오늘날의 복제 방법으로 다양한 매체를 통해 동일한 이미지를 전파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버거는 예술 복제품이, 원작을 복제품의 원형으로 남겨두는 방식으로 원작의 유일성의 의미를 변질시켰다는 논지를 전개하면서 윈드의 관점을 거듭 확인한다. 버거의 주장으로는, 회화적 복제란 예술작품의 의미에서, 그 질료적 바탕을 제거시킨 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작품은 일종의 정보의 한 단위가 되며, 몽타쥬라는 메커니즘을 거쳐, 그 원작자가 결코 예상해 본 적 없는 용도에 가담하는 것이다. 벤야민과 마찬가지로, 버거도 이미지라는 ‘언어’ 혹은 이미지라는 ‘환경’의 새로운 역사적 상황 속에서 하나의 근본적인 정치적 잠재력을 잃고 있다.처음에 어떤 예술가들은 사진술이 회화의 죽음을 초래할 것이라고 두려워 했었으나, 그런 공포는 근거 없음이 증명되었다. 사진술은 확실히 회화에 대해 부정적인 효과를 갖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이후로 회화가 사진술과의 대화에 뛰어들었던 사정은 오늘날까지도 산발적이긴 하지만 지속되고 있다. 사진술 자체가 회화의 종말을 야기시키지 않았는데도 1839년 이후로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미디어의 증식은 회화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고, 또 그 사회적 위상도 변화시켰다. 그 예로 채색 이미지의 생산을 장악하고 있던 회화의 실질적 독점이 붕괴 되었다. 단지 속도와 양이라는 측면만을 고려할 때 회화는 무용지물로 보이거나, 기껏해야 고졸한 듯 보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예술과 공예의 그 같은 위치 전도는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기계적 생산은 디자인의 익명적 마무리와 비개성적 스타일을 지향한다. 이런 맥락에서 수공의 자취는 종종 상승된 가치를 획득하는데, 그것이 장인적인 것, 개성, 진품성, 독창성 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량산업생산의 시대는 역설적으로 전산업적, 기예적 가치를 새로이 음미하는 관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수공예권의 작은 르네상스를 촉발시켰다. 예술에 가해진 기계적 충격이 무엇이건 간에 원작과 그것의 사진 복제품 사이에는 여전히 심각한 간격이 있다는 사실을 중시해야 할 것이다. 아직까지, 그 어떤 복제품도 현대 회화에 전형적인, 안료와 채색의 감각이 풍부한 재료의 효과에는 견주지 못하고 있다.3.결론결국, 새로운 과학기술적 복제술이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방식에 도움이 될 도구를 공급해 줄 수 있다는 사상을 펼쳤던 벤야민의 글에서 답을 찾아야 할 것 같다. 벤야민의 에세이 「생산자로서의 작가」는 사회적 상호관계는 생산관계에 의해 결정되며, 거기에 관여하고 있는 예술가는 그와 같은 관계를 변혁시키는 데 힘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예술가는 생산의 제도적 장치를 사회주의 이념이 지시하는 방향에 따라 그 변화를 추구하는 것과 동시에만 그 생산의 제도적 장치에 가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벤야민의 말처럼, 작가의 작업과 실천에는 유기적이며 조직적 기능이 있어야겠다. 즉, 한 작가의 작품은 하나의 모범적 성경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다른 작품을것이다.
일본 근대사를 아직 배우지는 않았지만 어느 교양수업에서 일본의 문명 개화와 관련해서 후쿠자와 유키치의 “일신독립 일국독립”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일신독립’을 이룸으로써 ‘일국독립’을 성취해 나간다. 라는 의미인데 독립에 대해 이같이 진보적인 생각을 했었기에 지금의 일본이 있었구나 라고 하는 생각 조차 들게 되었다. 그래서 “일신독립 일국독립”이란 말이 들어있는 책을 찾아 보게 되었고 그 책이 바로 [학문의 권장]이란 책이었다. 또한 일본 지폐에도 등장하는 후쿠자와 유키치 라고하는 인물에 대해서도 알아볼 수 좋은 기회였다.◇내용 구성과 내용상의 특징(1)전 17권의 간행연도와 구성①전 17편의 표제와 간행연도[학문의 권장]은 전17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편의 제목과 출판연도는 다음과 같다.초판 [학문의 권장](메이지 4년 12월 집필, 메이지 5년 2월 집필)2편 “서문”,”인간은 동등하다는 것”(메이지 6년 11월 출판)3편 “국가는 동등하다는 것”,”일신독립하여 일국독립한다는 것”(메이지 6년 12월 출판)4편 “학자의 본분에 대해 논함”(메이지 7년 1월 출판)5편 “메이지 7년 1월 1일의 축사”(메이지 7년 1월 출판)6편 “국법의 존엄성에 대해 논함” (메이지 7년 2월 출판)7편 “국민의 본분에 대해 논함” (메이지 7년 3월 출판)8편 “자신의 마음으로 타인의 몸을 억압하지 마라”(메이지 7년 4월 출판)9편 “학문의 취지를 둘로 나누어 기술하여 나카쓰의 옛 친구에게 보내는 글”(메이지 7년 5월 출판)10편 “전편의 속편, 나카쓰의 옛 친구에게 선사함”(메이지 7년 6월 출판)11편 “명문으로 인해 위선군자가 생긴다는 論”(메이지 7년 7월 출판)12편 “연설하는 방법을 권장하는 설”, “사람의 품행은 고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論”(메이지 7년 12월 출판)13편 “원망이 인간에게 해가 된다는 것에 대해 논함”(메이지 7년 12월 출판)14편 “심사의 재고조사”,”세와(世話)의 뜻”(메이지 8년 3월 출판)15편 “사물을 의심해 보한 메이지 5년(1872)에는 메이지 정부에 의해 ‘학제(學制)가 공포되어 모든 사람들이 학교에 가게 되었으며, 근대 학교로서의 ‘소학교’,’중학교’,’대학’이 설립되기 시작했다.2,3편이 간행된 1873년에는, 태양력이 채용되었고, 개인적으로 원수를 갚는 일 금지, 그리스도교의 묵인, 도쿄와 나가사키 사이의 전신 개통, 국립제일은행의 설립, 긴자의 연와가의 일부 완성, 교토의 공공 도서관 개설, 국민군 창성을 위한 징병제 공포 조선파견을 둘러싼 메이지 정부의 분열 오쿠보 정권의 성립 등이 있었다.4편부터 13편까지 10권이 간행된 1874년에는, 이미 참의를 사임한 이타가키등이 국회 개설을 요구하는 ‘민선위원설립건백서’가 정부에 제출되어 ‘자유 민권 운동’이 시작 되었다. 근대법의 정비가 시작되었고, 긴자와 교바시의 연와가가 완성 되었다.14편이 간행된 1875년에는 상해와 요코하마 사이에 정기적인 할로가 개통 되었다. 운양호라는 군함을 부산과 강화도에 파견하여 군사적인 충돌을 일으켰다. 이 해 후쿠자와는 그의 중요한 저서라고 할 수 있는 [문명론의 개략]을 출판하였다.15편부터 17편이 간행된 1876년에는 우에노 공원의 개원, 여자사범학교부속유치원개설, 가나자와의 번사였던 사람이 성냥공장을 설립했고, 미국인 농학자를 초빙해서 삿포르 농학교를 개설하였다. 한편, 농민들의 잇키나 옛 무사 들의 반란이 각지에서 발생하는 가운데 불’평등조약이 일조수소규’가 체결 되었다.이와 같이 대내적으로는 제도나 물품의 차원에서 문명 개화가 진전되고 있었고. 옛 무사나 농민들의 불만이 자유민권운동으로 전개 되었으며 정부 내의 분열과 몇 번에 걸친 내전이 있었다.③내용상의 구성크게 세 편으로 나눌 수 있다.하나는 “초편”으로 전체 내용의 총론에 해당한다. 여기에서는 인간의 권리 평등, 배움과배우지 못함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빈부, 구체적인 생활 상태의 차이, 추구해야 할 학문으로서의 실학, 일신의 독립, 일국의 독립, [학문의 권장]의 전편에서 전개되어 있는 내용의 주제가 거 까지로 ‘moral science’,’인간교제’에서의 이상적인 방법에 관한 내용이다. 여기서는 신체론, 여성론, 맹신론, 효행론 등을 인간의 각자의 신체와 정신의 해방, 서양 제국과 윤리도덕에서 대등한 관계를 실현하는 것 등의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2)내용상의 특색내용상의 특징으로는 다음과 같은 점을 들 수 있다.①신체론·물질론첫째로는 신체론을 들 수 있다. 나카쓰의 주자학과 난학의 전통을 이어받아, 오가타 고안의 데키주쿠에서 의학까지도 공부한 후쿠자와의 사상 저변에는 항상 신체론과 물질론이 깔려있다. [학문의 권장]에도 초편에서 학문론과 국법론을 논하기에 앞서, ‘심신의 할동’으로 ‘천지간의 만물’을 이용하여 ‘의식주를 해결 하’는 것이 ‘만인 누구나 다 동등한 지위’를 갖게 되는 근거라고 말하고 있다.신체론에 대해 집중적으로 쓴 곳은 제8편이다. 여기서는 “자기의 몸은 타인과는 따로 분리된 하나의 육체를 가지고 있으므로 스스로 자신의 몸을 움직이고 마음을 이용하여 자신을 지배하며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한 뒤,”’신체’는 외부의 만물과 접해 있으며 그 만물에서 욕구를 충족시킨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을 전제로 해서 ‘지혜’,’정욕’,’지성의 본심’’의사(意思)등 마음의 활동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어서 “인간은 타인의 통의를 방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유자재로 자신의 신체를 활용하는 것이 이치”라며 권리론, 여성론, 효행론으로 전개해 갔다.②실업론과 실학론후쿠자와의 실학론은 전부 실업론에서 나온다. 후쿠자와가 실업을 중시하는 것에는 적어도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하나는 앞에서 말한 신체의 건강한 활동에 의해, 인간과 자연, 천연, 외계와 연결 하는 것으로의 실학이다. 또 다른 하나는 ‘문명’의 현실이다. 구체적으로는 일본이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의 외국의 식민지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한 실학을 말한다. 그것에 대해 후쿠자와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오늘날 우리 나라의 상황을 살펴보고 외국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열거해 본다면, 학술이가와 국가간의 동등론후쿠자와의 저작 속에서 [학문의 권장]이 지닌 특징의 하나는 ‘right’에 관하여 그의 견해가 잘 정리되어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에 대한 그의 기본적인 인식은 자연물인 인간에게는 상하의 구별은 없다는 것이다.“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초편)“속담에 ‘하늘의 부귀를 인간 자체에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활동에 부여한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사람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빈부귀천의 구별은 없다.”(초편_‘right’가 지닌 첫 번째 뜻은 신체의 자유이다.“하늘의 도리를 따르고 인간의 정에 따르며 다른 사람을 방해하지 않고 자신의 자유를 실현하는 것을 말한다. 자유와 방종의 차이는 다른 사람을 방해하는가 안 하는가에 달려있다.”(초편)‘right’는 개인만이 아니라 국가에도 적용된다.“자유와 독립은 일신(一身)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일국(一國)에도 적용된다.”(초편)“일신도 일국도 모두가 다 하늘의 도리에 따라 불기자유(不羈自由)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만약 일국의 자유를 방해하는 자가 있으면 세계 만국이 다 적이 될지라도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일신의 자유를 침해하는 자가 있으면 상대가 정부의 관리 일지라도 주저할 필요가 없다.”(초편)2편 이후, 후쿠자와는 ‘권리통의의 동등’함에 대해 자세히 서술 하고 있다. 거기에서 후쿠자와는 ‘상태’와’권리통의’를 서로 나누어, ‘상태’는 사람들 각자가 서로 다르지만 ‘권리통의’는 대등 하다고 했다.④정부와 인민 간의 동등 및 국가와 국가 간의 동등개인과 개인 간은 서로 동등하다는 論은 인민과 정부 간의 ‘권리통의’의 동등론으로 연결된다.“정부와 인민의 관계는…단지 강약의 상태가 다를 뿐 권리에 차이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제2편)후쿠자와는 또한 개인과 개인이 서로 동등하고, 국내에서는 인민과 정부가 동등한 것처럼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도 동등하다고 했다.⑤일신독립 일국독립론지금까지 위에서 말한 일신의 ⑥인간 교제론, 남녀론모든 사람과 모든 국가가 독립한 문명의 상태와 사회를 만들기를 바라는 후쿠자와에게 , 당시 그가 ‘인간교제’라고 번역한 ‘society’에서 사람들간의 교제, 즉 사교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후쿠자와가 비판한 것 중의 하나는, 여성을 종속적인 지위로 묶어 놓은 ‘삼종지도’의 가르침이다. 이것은 [여대학(女大學)]에 나오는 내용인데 이 책은 여자 교육을 위해 출판된 것이다. 그 내용은 어렸을 때에는 부모를 따르고, 결혼 후에는 남편은 따르며, 늙어서는 자식을 따르라는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는 자는 자로 남자도 여자도 다 같은 사람이다”(제8편)라고 한 후쿠자와는, 남편이 어떤 문제를 일으켜도 부인은 항상 부드럽게 의견을 말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일방적인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당시의 무사 집안이나 돈 많은 사람들 사이에 묵인되어 왔던 사실상의 일부다처제, 시어머니의 며느리에 대한 시집살이 등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다.[학문의 권장]은 [서양사정]과 [문명론의 개략]과 함께 후쿠자와 유키치의 3대 명저로 꼽힌다. 이 책은 1871년 그의 고향인 나카쓰에 ‘나카쓰학교’가 설립되는 것에 맞추어 학생들에게 학문을 권장하기 위해 쓴 것이다. 그 내용은 한마디로 ‘일신독립(一身獨立)’을 이룸으로써 ‘일국독립(一國獨立)’을 성취하자는 것이다. 일본이 서양의 여러 나라로부터 독립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후쿠자와 고민과 해답이 이 책에는 잘 나타나 있다. 일본의 독립을 지키는 일은 그의 평생의 꿈이었고, 그것을 위해 그는 전심을 다해 저술작업을 했고 그것을 통해 국민들을 계몽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근대화는 외향적인 면만이 아니라 내면적인 면에서도 문명화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으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학문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학문은 일상 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학이어야 하며 실학을 함으로써 일본 국민 모두가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자신의 독립을 이루고, 그것을 국가의 독립으로 연결시켜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