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에 대하여 우리 연등 축제의 역사 축제 소개 행사일정 정리등에 대하여* 등 문화의 발달 - 등의 사용 현재에는 전기를 이용한 등으로 밤낮에 구애 받지 않고 활동이 가능하였다. 하지만 1960년대 까지만 해도 전기가 들어 가지 않는 곳이 많아 등잔, 초 등을 유용하게 많이 사용하였다. 등 문화의 발달 요인 밥을 짓는 부엌에서도, 바느질 하는 안방에서도, 글을 읽는 서재에서도, 혼례를 올릴 때에도, 먼 곳에 신호를 전할 때에도 … 과거에 등은 용도와 종류가 다양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그 필요성이 적어진 지금에도 전통과 문화의 맥이 이어지고 있다.2. 우리 연등 축제의 역사신라 -간등(看燈) 신라 경문왕 6년(866) 정월 15일과 진성여왕 4년(890) 정월 15일 황룡사로 행차하여 연등(燃燈)을 간등(看燈)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2. 우리 연등 축제의 역사고려 -연등회(燃燈會) - 불교가 국교였던 시대 - 연등회는 팔관회와 함께 고려의 2대 명절 - 국가적인 행사로 연등도감을 두어 주관 - 화려한 연등을 밝히고 잔치, 가무를 즐김 - 고려 23대 고종32년(1245년)부터는 최이에 ㅁ 의해 연등행사를 초파일에 시행하여 오늘에 ㅁ 이르고 있다 .2. 우리 연등 축제의 역사조선 -호기(呼旗)놀이, 관등(觀燈)놀이 - 관청중심의 행사는 중지되었으나 민속행사로 - 남아 세시풍속으로 전승 - 등을 만들기 위해 아이들이 종이를 잘라 등대a 에 매달아 기를 만들어 들고 장안을 돌아다니a 며 쌀이나 돈을 구하여 등 만드는 비용으로 a 쓰는 호기놀이가 성행 - 초파일의 낮에는 절에 가서 공양을 올리고, 밤 _ 에는 온장안의 남녀들이 등을 들고 나와 거대 _ 한 산과같이 장관을 이룬 것을 구경하는 관등_ 놀이를 즐겼다.2. 우리 연등 축제의 역사현대 -제등행렬, 연등축제 해방 후에는 조계사-종로4가-을지로-시청앞-안국동-조계사를 도는 제등행렬을 하였으며 후에는 동국대-종로-조계사까지 제등행렬을 하였다. 1975년부터는 초파일이 국가공휴일로 되었으며 1976년부터는 여의도광장-조계사에 이르는 제등행렬을 하였다.3. 축제 소개* 시청 앞 점등식 (장소: 서울시청 앞 / 5.9)연등축제의 개막을 알리는 행사로써 서울시청 앞에는 부처님의 탄생을 상징하는 상징 등 개막식과 기원돌기가 있다.3. 축제 소개* 전통등 전시회 (삼성동 봉은사 / 5.18~24)- 한지의 은은함과 단청의 화려함을 볼 수 있다.3. 축제 소개* 연등놀이 (조계사, 인사동 / 5.19, 19시~21시)- 연등축제 전야행사로 장엄등과 연희단 그리고 갖가지 아름다운 등들을 미리 볼 수 있는 행사. 신나는 인사동 거리행렬과 조계사앞 거리에서 흥겨운 공연이 펼쳐진다.3. 축제 소개* 불교 문화 마당 (조계사 앞 거리/ 5.20, 12시~20시)'등 만들기', '외국인 등 만들기 대회', '풍물공연', '전래민속놀이', '탈춤공연', '짚으로 만들기', '연등축제', '외국인 공연', '수화공연', '선무도 공연', '장승 제작시연' 등 다양한 이벤트가 마련되어 있음.3. 축제 소개* 어울림 마당 (동대문 운동장 / 5.20, 16시30분~18시30분)제등행렬에 참여하는 불자들은 동대문운동장에서 신나는 노래와 율동으로 하나가 되고 불교전통의식으로 제등행렬을 준비한다.3. 축제 소개* 제등행렬 (동대문~조계사 / 5.20, 19시~21시30분)용등, 탑등, 흰코끼리, 봉황등, 연꽃등....다양한 장엄등과 10만여개의 갖가지 등들이 흥겨운 우리가락과 어우려져 신명나고 화려한 등의 바다가 펼쳐진다..3. 축제 소개* 대동(회향)한마당 (조계사 앞 거리 / 5.20, 21시30분~22시30분)우리의 서원을 태워 희망의 불씨를 만드는 '서원문 소지', 10만 개의 등이 희망을 가득 담아 커다란 등으로 하늘로 띄워 보내지는 '희망의 등 비상식',손에 손을 잡고 강강술래를 하며 불야성의 밤거리를 뛰는 '대동놀이' 등이 진행4. 행사 일정 정리5월 9일점등식 – 19시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5월 19일연등놀이 – 19시~21시 인사동, 조계사 앞길5월 20일* 연등축제 불교문화마당 – 12시~19시, 조계사 앞길 어울림 마당 – 16시30분~18시30분, 동대문 운동장 제 등 행 렬 - 19시~21시30분, 종로거리 대동한마당 - 21시30분~22시30분, 조계사 앞길(기타 불교 행사는 제외)5월 20일… 연등 축제 어떠세요?감사합니다.{nameOfApplication=Show}
1792년 초여름 정조는 정약용을 조용히 불러 수원에 새 성을 쌓겠다는 뜻을 밝히고 좋은 방책을 강구하라고 이른다. 정약용은 고심 끝에 기중기의 설계도면을 바치고, 정조는 1794년 1월부터 화성을 쌓는 공사에 착수하고 2년 9개월의 공사기간을 거쳐 1796년에 완공에 이르는데…….2006년 4월, 봄볕의 따사로움을 벗 삼아 화성을 찾았다. 210년이라는 시간의 길이가 느낌으로 잘 와 닿지는 않았지만, 화성을 향하는 버스 안에서 이 버스가 마치 210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타임머신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내 맘은 많이 설렜다. “효의 도시 수원”이라는 표지판이 먼저 나를 반겨주었다.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당파싸움으로 인하여 뒤주에 갇혀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 것을 항상 마음 아파한 아들 정조의 효심으로 탄생한 계획도시인 수원은 이제 그 후세들인 우리들에게 효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화성’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아버지의 묘소를 양주 배봉산에서 지금의 화산으로 옮기고 이성을 만들어 화성이라 명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배경이야기들을 조금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껏 찾아와 보지 못한 곳이었기에 나는 이번 리포트를 기회 삼아 화성을 찾게 된 것이다.드디어 도착한 곳은 화성의 북문에 해당하는 장안문이었다. 내가 사는 서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도심 한복판에 서 있는 동대문과는 달리 문의 양 옆으로 길게 뻗은 성곽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사적 제 3호, 화성은 성곽의 둘레가 약 5.7Km, 성벽 높이는 약 4 ~ 6m 정도이며, 현존하는 조선시대의 읍성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우며, 성을 쌓는 기술이 탁월하여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되었다고 안내 표지판이 알려주었다. 또한 성을 쌓는 방식은 기존의 전통 방식에 실학자들의 과학적 지식과 중국 방식의 장점을 살려 축성하였으며, 특히 녹로나 거중기 등과 같은 과학 기기의 사용과 재료의 규격화, 화포 공격에 대비한 방어구조가 특이하다고 한다. 아! 잠깐 5.7Km……. 평소에 운동도 잘 하지 않는 나로서는 참 멀고 기행이 될 듯싶어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힘차게 발을 내딛었다.장안문에서 화서문으로 향하면서 그사이의 성곽을 보며 너무 말끔히 보존되어 있는 것 같아 많이 놀라웠는데, 이것은 한국전쟁 등으로 파괴된 것을 1975년부터 1979년까지 5년간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화성을 보며 나는 문화유산을 파손시키지 않고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월의 풍파에 어쩔 수 없이 파손된 것을 복원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따금씩 TV에서 본 훼손되어진 문화유적들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후세들에게 그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게 해준 화성의 복원사업은 참 의미가 크다고 생각했다.드디어 화서문에 도착하였다. 화서문은 화성의 서쪽 문으로 돌로 쌓은 홍예문 위에 단층 문루를 세웠다. 문 바로 바깥쪽으로는 한쪽이 터진 옹성을 둘렀는데 현재의 동대문과 달리 그 모습이 참 신기하였다. 이는 적군의 침입을 보다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서 쌓은 것이라고 하는데 문에 접근한 적군을 포위하여 공격할 수 있는 형상을 갖추었다. 이 옹성 위에는 안팎으로 낮은 담을 쌓고 총구의 구멍은 그 각도를 달리하여 가까운 곳과 먼 곳을 겨냥할 수 있< 화 서 문 > 도록 하였다. 이러한 총구는 다른 성벽을 따라서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었다.화서문을 통해 성 안쪽으로 들어선 나는 이제 성벽위로 걷기 시작했다. 먼저 서북각루에 도착하였다. 서북각루는 화성의 4개 각루 중 서북쪽 화서문 위 팔달산 자락 언덕에 위치한 각루로, 성곽의 비교적 높은 위치에 세워져 주변을 감시하고 군사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설치한 높은 마루식 목조건물이다. 특히 아래층에 군사들이 휴식을 할 수 있도록 온돌방을 꾸며놓았다고 하는 것이 매우 특이 < 서 북 각 루 >하였다. 그 구조가 어떻게 생겼을까, 포근한 방처럼 꾸며졌을까 하고 궁금했지만, 잠겨있는 문 때문에 볼 수 없어 아쉬웠다.서북각루를 지나 성벽을 따라 오르니 도시를 품에 안은 화성의 전체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210년의 세지나면서 커다란 빌딩이 들어서고 넓은 도로가 생겨나고, 몇 대에 걸쳐 사람들도 바뀌게 되었지만, 그 세월을 지켜온 화성과 화성행궁을 보며 가슴 뭉클함이 느껴졌다. 이는 바로 수많은 외침 속에서도 목숨을 아끼지 않고 지켜낸 조상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며, 이젠 조상들이 물려주신 문화와 더불어 눈부신 경제적 발전을 이룩해낸 현재의 모습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성벽의 모습은 매끈하게 쭉 펼쳐진 것이 아니라 곳곳에 돌출된 부분이 있어 전방과 좌우방향에서 성벽에 접근하는 적병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 있었는데 이는 “치”라는 것으로 화성에는 10개소가 있다고 한다. 치(雉)는 “꿩”이라는 뜻으로 제 몸을 숨기고 밖을 잘 엿보는 꿩의 습성과 이 시설의 용도가 상통하여 치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재미있었다.치가 기본적으로 누각이 없이 여장만이 설치되어 있는 비교적 간단한 모습이라면, “포루”는 치와 같이 성벽을 돌출시켜 있는 모습은 같으나 검정 벽돌로 쌓고 나무 마루판을 이용하여 3층으로 구획하였는데 지금의 초소와 같은 용도라 보면 되겠다. 화성에 5개의 포루가 있는데 벽면에 포혈을 내어 화포를 두고 위에는 담장을 둘러 적을 위와 아래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다가 정상에 오르자 서노대가 우리를 맞았다. 노대는 쇠뇌를 쏠 수 있고 성 밖의 적의 동향을 성내에 알리는 진지로서 벽돌로 높게 쌓아 만들었다. 쇠뇌라는 것은 여러 개의 화살이 연달아 발사되는 활로 일반 활보다 멀리 쏠 수 있는 장거리 공격용 무기이다. 이러한 노대는 화성에 서노대와 동북노대가 있는데 서노대는 특이한 형태로 8각형의 평면에< 서 노 대 > 위로 올라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를가지고 있었다.그리고 서노대 옆에는 서장대라는 건물이 있었다. “화성장대”라고도 불리는 서장대는 화성의 군사를 총지휘하는 본부였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여 사방을 내려다보면서 화성의 모든 군사들을 지휘할 수 있는 본부였다. 전화기나, 무선장비도 없이 성의 정상에 서서, 이 거대한 병사들을 어떻게 일사분란하게 지휘할 수 있었을까. 잘 상상이 되지는 않았지만, 눈앞의 서장대에 그 당당한 모습의 장군이 서서 호령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이러한 성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동, 서, 남, 북의 4개의 큰 문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중요지점에 작은 문을 두어 적 몰래 무기나 양식, 물자 등을 반입하고 은밀하게 사람들의 왕래를 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런 작은 문이 바로 암문이다. 이런 곳은 적에게 쉽게 알려지지 않도록 성곽의 굴곡진 곳이나 후미진 곳, 수목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 곳 등에 설치되었다. 그리고 그 크기는 말 한필이 겨우 다닐 수 있도록좁아서 적에게 쉽게 들키지 않게 하고, 비록 들키더라도 방어하기 쉽고 적의 침입이 쉽지 않게 만들었다.< 서 암 문 입 구 >암문은 화성에 총 5개가 있는데 일반적 형태가 서암문의 형태라면 서남암문은 암문 위에 포사라는 건물을 지었다. 성밖으로 은밀히 빠져나갈 수 있는 다른 암문과는 달리 서남각루로 연결되는 길이 이어지는 용도를 가지고 있어 보다 튼튼한 방어를 위해 포사를 둔 것이다.< 서 남 암 문 과 포 사 >서남암문을 따라 화양루라 불리는 서남각루를 들르고 남포루를 지나 남문에 해당하는 팔달문에 도착하였다. 수원역과 더불어 수원의 중심지인 팔달문 부근은 시장의 시끌벅적한 분위기와 많은 젊은이들로 활기찬 분위기였지만, 그 중심에 서있는 팔달문은 따사로운 봄 햇살을 맞으며 여유롭게 이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팔 달 문 > 같았다.잠시 팔달문 부근의 도심을 걸으며 과거 여행에서 잠시 한숨을 고른 후 도착한 곳은 봉돈 이라는 매우 독특한 모양의 구조물이었다. 그 모습을 살펴보면 봉돈은 치성을 만들고 그 위에 전돌을 높게 쌓아 만들었는데 성안에서 보면 전돌을 쌓아 만든 부분이 3층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중요성 때문에 성안 쪽에도 별도의 담장을 쌓고 홍예문을 두었다 한다. 봉화를 올리는 화덕은 다섯 개로 전돌을 쌓아 둥글게 만들었다. 화덕 옆쪽에는 불을 지피는 네모난 아궁이가 있고, 그 위에는 뚫어 연기가 나가도록 하였다.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전달하였는데 이 신호는 지금의 용인 에버랜드 인근산인 < 봉 돈 >석성산 육봉으로 전달하였다고 한다. 5개의 화두가 있는 것은 5개중 남쪽 첫째 화두로부터 시작해서 평상시에는 밤낮으로 봉수 1개를, 적군이 국경 근처에 나타나면 봉수 2개, 국경선에 도달하면 3개, 국경선을 침범하면 4개, 전투가 시작되면 5개를 올림으로써 비교적 자세한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다음으로 동일치를 지나 창룡문에 도착했다. 화성의 동문에 해당하는 창룡문은 화서문과 그 구조가 동일하다. 창룡문의 벽돌에는 김명한 외 15인 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공사를 한 사람들의 이름으로 공사실명제의 한 예라 한다. 국가의 안위와 연결되는 건물인 만큼 그 중요성이 크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벽돌에 새겨 넣음으로써 보다 책임감을 가지고 튼튼한 성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선조들의 지혜가 담겨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동북노대를 지나 도착한 곳은 동북공심돈이었다. 처음에 장안문에 도착하여 화서문으로 향하면서 성벽 밖으로 걸어 그냥 지나치게 된 서북공심돈과 함께 화성에는 두개의 공심돈이 있다. 공심돈은 군사가 안으로 들어가서 적을 살필 수 있게 만든 망루의 일종으로 동북공심돈은 화성에서 가장 특이한 건물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공심돈은 중국 요동지방에 있는< 동 북 공 심 돈 > 평돈을 모방하여 벽돌로 동그랗게 돈대를 쌓아 만들었다고 한다. 그 크기가 굉장히 웅장하여 놀라웠고, 이렇게 높은 건물에 몸을 감춘 채 공격을 펼쳤을 공심돈은 적에게 굉장히 큰 위협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서장대와 함께 화성의 2개 지휘본부중 하나인 동장대, 그리고 동암문, 동북포루, 북암문을 지나 도착한 곳은 방화수류정이다. 동북각루인 방화수류정은 4개 각루 중 하나이지만, 수원팔경 중 하나라서 그런지 인근 경치가 무척 아름다웠다. 앞서 말했듯 높은 위치에서 주변을 감시하기 위한 장소가 각루이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 때문에 < 방 화 정 >
리움 미술관을 다녀와서전공학번이름리움 미술관을 다녀와서…….4월 7일 리움 미술관을 찾았다. 사실 어렸을 적 놀이동산을 찾았다가 아빠 손을 잡고 몇 차례 찾았던 호암미술관이 내가 갔던 미술관의 전부였다. 놀이 기구를 뒤로 한 채 미술관을 찾았을 때는 나의 입이 오리만큼이나 나왔었지만, 오늘은 왠지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날씨가 화창하지는 않았지만,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만으로도 충분히 따사로웠다. 리움 미술관은 지하철 6호선 한강진역에서 내려서 5분가량 걸어서 도착할 수 있었다. 삼성그룹 소유의 미술관이라고 하는데 도심 속에 자리 잡고 있어 참 색다른 분위기였다. 이미 많은 젊은이들과 가족들로 미술관은 입구부터 꽤 북적거리고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미술관에 들어섰다.나는 상설전시관을 관람하기로 결정하였다. 상설전시관은 고미술 전시관과, 현대미술 전시관으로 나뉘어 있었다. 시대 순으로 보아야겠다는 생각에 고미술 전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미술 전시관은 4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는 순서로 관람을 하도록 되어있었는데, 4층은 청자, 3층은 분청사기와 백자, 2층은 고서화, 1층은 불교미술과 금속공예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청자는 참 우와 했다. 멀찌감치 서서 보았을 때 청색이 참 차분했는데, 다가가서 보았을 때는 세밀하고, 반짝이는 문양들이 참 화려하기도 하였다. 절제된 화려함이라고 할까. TV, 책에서 보았던 청자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3층에서 만난 것은 분청사기와 백자였다. 정교한 무늬로 장식되어 있는 것도 있었지만, 전체적인 흰색의 자기들은 참 단아하다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백자는 한국미의 원형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많은 외세의 침략이 있었고, 한을 마음속에 담고 있으면서도 굽히지 않았던 절계를 갖았던 우리 조상의 얼이 백자 속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듯 했다.고서화는 대부분 조선시대의 것들이었다. 사실 중, 고교 시절 미술책을 통하여 보았던 작품들의 대부분은 우리의 것보다는 화려한 문화를 꽃 피웠던 유럽의 것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던 우리의 그림들은 소박하다는 느낌이었는데, 리움 미술관에서 만난 우리의 그림은 참 흥미로웠다. 세밀하고, 정교한 작품들 속에서 나는 곳곳에 숨겨져 있는 사람들과 동물들을 볼 수도 있었고, 호랑이를 그린 어떤 그림에서는 마치 진짜 호랑이를 보는 듯 했다. 그 호랑이의 털은 진짜 털을 종이에 붙여 놓은 듯 너무나 정교해서 손으로 확인하고픈 충동을 느꼈다.1층 불교미술과 금속공예 전시실에서 여자인 나의 눈길을 끈 것은 역시 아름다운 금속공예들이었다. 금 귀걸이, 목걸이를 보며, 처음 보는 아름다운 우리의 문양에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런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들이 좀 더 연구되고 현재에도 재조명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그러고 나서 현대미술 전시관을 찾았다. 현대미술 전시관은 나에게 너무 어려웠던 것일까, 큰 감흥 없이 가볍게 돌아보는 정도로 관람을 마쳤다. 현대미술 전시관의 관람은 이번 기행문에서는 생략토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