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천국 줄거리소록도는 전남 고흥군 도양읍 녹동항으로부터 5백m 거리에 있는 1백50만평 넓이의 자그마한 섬이다. 녹동항에서 소록도만을 오고 가는 페리형 도선은 오르는가 싶으면 어느새 건너편 잔교에 가 닿는다. 작은 사슴 모양을 닮았다 해서 이름이 붙은 소록도를 처음 찾는 이들을 맞는 것은 선착장에 세워진 시멘트 구조물이다. 흰 바탕에 검은색 세로 글씨로 쓰여 있으되, `한센병은 낫는다.' 일곱 글자로 이루어진 이 짧은 문장에 얼마나 기구하고 가슴아픈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을까.실제로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섬 소록도는 순전히 환자들의 치료와 생활 공간으로만 쓰이고 있어 자연이 잘 보존돼 있는 편이다. 자연 풍광이 살아있는 이 아름다운 섬은 나환자들에게 어찌하여 ‘천국’이 될 수 없었던 것일까.『당신들의 천국』은 조백헌이라는 인물이 소록도의 병원장으로 취임하여, 그곳의 나환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켜주기 위해 애를 쓰는 얘기이다. 1부는 현역 대령이 조백헌이 소록도 병원장으로 취임하여, 그곳 환자들에게 새로운 천국을 만들어주기 위해 득량만 매몰 공사에 착수하여, 그것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는 이십일 개월 동안의 나환자와의 싸움을 그리고 있으며, 2부는 매립 공사를 둘러싼 구개월간의 조원장의 정신적 방황을 그리고, 소설의 대단원을 이루게 될 3부는 조원장이 섬을 떠난 지 5년이 지난 후의 삼월에 한 사람의 시민으로 소록도에 되돌아와 이 년 후 사월에 미감아 두 사람의 결혼식 주례를 맡는 것을 그리고 있다.조백헌과 동상『당신들의 천국』은 표면적인 구조만 볼 때 조백헌이라는 야심 많고 정열적인 한 인물의 무용담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가의 진정한 의도는 그 조백헌의 단순한 제시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인물에 대한 복합적 비판에 있다.햇볕에 그을어서라기보다 피부 색깔이 원래 좀 그래 보이는 거무튀튀한 얼굴에, 여느 사람들에게서보다도 푸른색 유니폼이 훨씬 시원스럽게 어울려 보이는 이 장신의 현역 군인 원장인 조백헌에게서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 내기는 어렵지 않다. 이 소설은 박정희 정권의 파시즘적 성격에 대한 치열한 비판의 기록이며 작가가 꿈꾸는 이상적 정치형태에 대한 청사진이기도 한 것이다. 전체 서사를 지배하는 동상의 상징은 파시즘적 상황의 본질을 다각적으로 해명하는 모티프이다.그 다각적인 의미중 가장 기본적이고 극단적인 형태가 바로 주정수 원장의 동상이다. 피지배자에 대한 극도의 외적이고 폭력적인 강제에 의해 지탱되었던 체제를 상징한다는 점. 더구나 그런 체제의 폭력성 때문에 동상의 주인공이 동상 앞에서 살해되는 사건을 겪는 다는 점에서 그것은 극단적이다. 이상욱은 주정수의 동상이야기를 계속 끄집어내며 조백헌 원장이 소록도에 천국을 세운다는 미명하에 그가 실제로 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명예욕이나 과시욕을 충족시키자는 것이 아닌가를 경계한다.이 소설에서 동상은 기본적인 의미로 지배자의 내부에 명예욕과 인민을 위해 헌신하려는 자기초월 의지가 착종된 상태의 상징에서부터, 피지배자에게 알게 모르게 내면화되는 지배자의 동상, 그리고 작가에 의해 이상화된 사랑과 자유가 함꼐 존재하는 지배-피지배 관계의 누구나 품고 싶어하는 동상까지 다양하게 의미분열이 되어있다.조백헌 원장은 주정수와는 다른 인물이지만 ‘이제와서 그런식으로 슬그머니 섬을 쫒겨날 수는 없었다“ 에서는 간척사업을 자신으 손으로 마무리짓고 ‘화려하게’ 섬을 떠나고 싶은 그의 명예욕을 암시한다. 그의 내면에는 이런 명예욕과 섬주민들을 위해 낙토를 완성하고 싶은 자기 초월의 열정이 반성과정 없이 착종되면서 자신의 동상이 형성된다. 이런 지배자 내부의 동상은 은폐되어 있다는 차이점은 있지만 본질상 주정수의 동상과 유사한 것이다.조백헌 원장은 황장로와 이상욱의 청에 따라 달리 결국 조용히 섬을 떠나게 된다. 그 후 소록도를 천국으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 거기에서 ‘자유와 사랑을 행사’하려고 민간인으로 소록도로 다시 온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자기가 힘을 행사할 수 있는 행사자가 아니라 보조자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소록도에서 자생적으로, 같은 운명을 감수하고 있는 자들의 선택에 의해서,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않으면, 자유와 사랑에 의거한 힘의 행사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는 더 이상 동상의 망령에서 탈피한 깨달음이며 대안이다. 이처럼『당신들의 천국』은 한국적 파시즘 체제의 본질에 대한 집요한 성찰과 비판의 기록이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이 비판에 그치지 않고 통치자인 조백헌 원장을 이상적인 인물로 변모시킴으로서 그 대안까지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소설이라 할 수 있겠다.소외받은 자들-나병환자들, 문둥이우리나라 뿐 아니라 성경의 기록을 보더라도 예로부터 이 나병, 문둥병은 전세계적으로 가장 천시되고 꺼려지는 병이었다. 전염성이 있다는 병의 성격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문둥이 들의 흉측한 몰골은 측은함보다는 거부감이 먼저 드는게 사실이다. 소설에서도 문둥이들은 건강인들에게 항상 갖은 핍박과 멸시를 받고 이리저리 떠돌다 이 소록도에 안착한다. 조백헌 원장이 간척사업 시 나병환자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건강인에 대한 적대감을 이용할 정도로 문둥이들은 바깥 세상에 대한 원망과 두려움과 건강인들을 향한 알 수 없는 증오를 지니고 있다. 문둥이의 대표격인 황장로의 과거이야기를 살펴보아도 문둥이의 삶은 여타 병자의 삶과는 달리 일그러지고 어둡게 물들어진 면이 있다. 황장로의 소년시절 고백에는 문둥이패들의 시간(屍姦)을 돕고 머리털을 뽑다시피 자른다던가, 여자의 자궁을 도려낸다던가 하는 반인륜적 잔인성이 충격적으로 이미지화 되어있다. 그러나 이는 황장로 개인의 예외적 경험이 아니라 이 섬 주민 모두의 과거로 진술된다. 이는 살아가는 것이 가혹하리만치 어려운 ‘문둥이로서의 삶’ 속에서의 핍박과 좌절이 타인에게로의 잔인한 가해의식으로 전도된 결과이다. 이러한 점은 맹목적으로 헌신했던 간척사업이 난관에 부딪치자 한 사내가 일으킨 야만적이로 참혹한 강간사건에서도 반복된다.
이범선 「오발탄」, 「사망보류」Ⅰ. 들어가며◎ 1950년대와 단편소설1950년대는 소설사적으로 볼 때 단편소설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의 경직성, 빈부의 양극화 현상, 정치와 삶의 분열, 사회의 사물화 등으로 규정되는 50년대의 본질적 모순들은 그것들을 극복하기 위한 진보적 사회세력의 결여와 결합되어 총체성에의 전망을 어렵게 만들었다. 따라서 현실에 대한 소설의 대응방식 또한 장편소설 형식으로는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왜냐하면 장편소설 형식은 진보적 사회세력의 현실 개혁 운동이 이루어져 총체성에의 구체적 전망이 가능한 역사적 성숙기에 융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50년대 단편소설의 역사적 필연성이 존재한다. 단편소설이 총체성에의 전망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소설이 아니라, 현실의 부정성의 본질을 객관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총체성에의 전망을 역으로 암시하는 방식을 취한다는 점에서, 50년대 역사적 현실 속에서는 단편소설이 더욱 적합한 소설 형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작가 소개 - 이범선이범선(1920~1982)은 1920년 평안남도 안주군 신안주면에서 태어났으며 30세 때 월남하여 거제고등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다가 36세가 되는 1955년 김동리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지에 단편 「암표」와 「일요일」이 실림으로써 문단에 데뷔하였다.1957년 『현대문학』에 「학마을 사람들」을 발표, 이어 『사상계』에 「사망보류」를 발표하여 50년대 작가로서의 새로운 자리를 마련하였다. 그 후 그의 대표작이라 불려지는 「오발탄」을 『현대문학』에 1959년 발표하여 61년 제5회 동인문학상을 탔으며, 1982년 작고하기까지 90편에 달하는 작품을 남겼다.이범선은 실향민의 한 사람이다. 이는 그의 작품 활동이 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의 작품 세계를 결정짓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전후 세대 작가군’)에 서게 된 그는 생애를 통해서 정치적 사회적 혼란과 많은 역사적 체험을 거쳤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실향’과 ‘전쟁체험’은 바로 그의 문학적 바탕이 되고 있으며, 작품 내의 주관적 세계가 당시 역사의 객관적 필연성과 일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러나 결국에는 운명론적 태도가 드러나 서사적 객관성을 상실한 채 서정적 주관성의 세계로 변질되어 버리고 만다.반면에 이범선의 서사적 단편소설들은 이러한 서정적 주관성을 극복하고 끝까지 서사적 객관성을 유지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 점은 50년대 소설사에 있어서 매우 의미심장한 일로서, 「오발탄」, 「사망보류」 등은 2~30년대 작가들이 보여주었던 정통 리얼리즘의 맥을 잇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작품들은 염상섭의 후기 경향과 비슷한 양상을 보여주는데, 이는 역사 변동의 진보적·조직적 양상이 나타나지 않았던 50년대에 있어서 정통 리얼리즘의 필연적인 현실 대응방식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시대에 있어서 가능한 것은 단편 형식을 통해 부정성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고, 따라서 단편 형식의 특성상 일상적 삶의 단면을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Ⅱ. 오발탄◎ 등장인물가난에 찌들리면서도 사회적 관습을 지키며 살아가려는 주인공 ‘철호’, 그러한 궁핍을 관습으로부터의 일탈을 통해 해결하려다 마지막 순간 양심선에 걸려 구속되고 마는 동생 ‘영호’,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하여 양공주 노릇을 하며 돈을 버는 여동생 ‘명숙’, 가난한 삶에 함몰되어 과거의 재기와 발랄함을 모두 잃어버리고 결국은 애를 낳다 죽고 마는 아내, 그리고 이북에서의 유복한 생활과 남한에서의 극도의 궁핍 사이의 괴리를 견디지 못하고 미쳐 버린 채 가자 소리만 되풀이하는 어머니 이들은 당시 궁핍 계급의 각 면을 리얼하게 보여주는 전형적 성격들이다.김현은 이러한 인물들은 부정부패와 생활에 대한 절망 때문에 정신적 지주를 잃은 사변 후의 현실에 대한 작가 나름의 독특한 고발이며 항변이라고 보았다.) 이들의 일상생활의 객관적 묘사를 통해 오발탄은 한 가족의 삶의 비극이 단지 그들만의 비극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비극임을 환기시켜 주며, 이러한 삶의 모순은 필연적으로 지양될 수밖에 철호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따르르릉 벨이 울렸다. 긴 자동차의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철호가 탄 차도 목적지를 모르는 대로 행렬에 끼어서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이렇게 어떤 구실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무능력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양심을 지키며 살려 하기 때문이다. 오발탄은 극도로 빈곤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무기력해진 인물이 방향성을 상실한 채 방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처럼 절망적인 인물상을 통해서 작가는 현실의 우울하고 어두운 단면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고 극복하려는 노력을 표현하고 있다.‘목적지를 모르는 대로 행렬에 끼어서 움직이는 차’는 갈 곳을 확실히 모르지만, ‘어디건 가긴 가야’하는 역사적 방향성을 암시하는 비유이다. 여기서 ‘가자’라는 외침은 소설의 전면에 걸쳐 곳곳에 효과적으로 배치됨으로써 바로 지금이 ‘더 이상 아님’의 시대라는 사실과 그를 통해 총체성에의 전망을 역으로 암시해주는 소설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따라서 「오발탄」에 나타난 작가의 태도는 전쟁을 겪은 전후세대가 그 전쟁의 상흔 때문에 어떻게 고민하고 좌절하고 있는지를,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고 있는지를 사실적으로 생생하게 보여주려고 하는 데 있다.◎ 전후의 사회상 고발 - 궁핍한 삶의 형상화한편 이 소설은 철호 일가의 비극적 삶이 당대 사회적 삶과 깊이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계속 환기시킴으로써 소설적 구체성을 획득하고 있다. 김윤식은 ‘이 작품이야말로 소설 속에 극명하게 드러난 이데올로기의 실체가 없다 해도 50년대 한국 사회의 중요한 과제인 분단의 문제가 가장 확실하게 일상성 속에 용해된 작품이’라고 평한다.)“세상에는 이런 세 층의 사람들이 있다고 봅니다. 즉 돈을 모으기 위해서만으로 필요 이상의 돈을 버는 사람과 필요하니까 그 필요하니 만치의 돈을 버는 사람과, 또 하나는 이건 꼭 필요한 돈도 채 못 벌고서 그 대신 생활을 조리는 사람들. 신발에다 발을 맞추는 격으로. 형님은 아마 그 맨 끝의 층에 속하겠지요. 필요한 돈도 미처 벌지 못하는 사기시켜 주고 있다. 즉 철호 일가의 궁핍상이 사회전체의 생산관계의 모순으로 말미암은 결과임을 암시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데, 이는 철호 일가의 비극적 삶의 사회·역사적 필연성을 환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철호가 신은 양말에 대한 묘사와 ‘가자’라는 어머니의 외침을 객관적 묘사를 병치시켜 놓음으로써 모순지양의 역사적 필연성을 충격적으로 형상화시키는 탁월한 소설적 기량을 보여주기도 한다.◎ 리얼리즘의 성취와 문학적 의의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손창섭의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압도적인 힘에 함몰되어버린 존재들이다. 그러나 손창섭의 경우와는 달리 철저히 객관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인물들의 현실성이 살아 있으며, 그들이 환경과 맺는 관계 또한 현실성을 획득하고 있다. 이는 「오발탄」의 등장인물 들 및 상황이 전형성을 온전하게 획득하는 기반이 된다. 즉 손창섭의 인물들 또한 50년대의 전형들 중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그들의 희화성과 과장성으로 말미암아 비현실적 존재로 보이는데 반해, 「오발탄」의 인물과 상황은 그러한 결함을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이 점은 이범선이 염상섭 류의 정통 리얼리즘의 맥을 잇고 있는 작가임을 말해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전후 작가들일 대부분 반리얼리즘 계열에 속하고 있고, 그 결과 또한 상당수 실패로 끝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오발탄」의 전후 문학사적 중요성은 한층 돋보인다 하겠다. 이범선의 「오발탄」은 서사 양식에 있어서 리얼리즘에의 충실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를 새삼스럽게 되새겨보도록 해주는 작품이다.Ⅲ. 사망보류◎ 줄거리스무나흗 날 밤이었다. 철은 이번에야말로 정말 대량으로 각혈을 하였다. 금시 얼굴이 파래졌다. 치명적이었다.(···)“뭐요?”“······”“뭐요?”아내는 귀를 그의 입으로 가져갔다.“며칠이오?”“이십사 일”철은 다시 눈을 감았다. 아내는 유난히 길어진 것 같은 그의 얼굴을 지켜보고 있었다. 잠깐만 떼어도 그 사이에 거품처럼 잦아질 것만 같은 불안에 아내는 벌써 며칠 밤 째 뜬눈으로 새운에서 결핵이 악화되어 죽어가고 있다. 그는 박 선생의 가족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게 하기 위하여 꺼져가는 숨을 버티면서 곗돈 타는 날까지는 어떻게든 자신의 죽음을 보류하려 한다.◎ 경제적 파탄상과 인간성의 상실곗돈 타는 날까지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철의 처절한 노력을 묘사하고 있는 이 부분은 그 당시의 경제적 궁핍상이 얼마나 지독한 것이었나를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그러한 상태에까지 빠지게 만든 사회적 모순에 대한 분노를 일으키게 한다.이러한 비극적 결말을 통해 「사망보류」는 지양의 역사적 필연성을 환기시키면서 총체성에의 전망을 역으로 암시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엄숙한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죽음의 순간마저 보류해야 하는 한 가족의 비극을 형상화시킴으로써 「사망보류」는 50년대의 경제적 파탄상을 환기시켜 준다.◎ 사회의 사물화한편 이러한 모순은 일차적으로 부의 양극화에서 기인된 것이고 나아가서는 사회의 사물화에서 말미암은 것이기도 하다. 「사망보류」는 부의 양극화 현상을 일상적 삶의 궁핍상을 통해 보여주는 동시에 그것이 사회의 사물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철은 서무실에서 조의금 봉투를 받았다. 그런데 봉투에는 돈 대신 종잇장이 하나 들어있었다. 철은 혹시 조의금을 수표로 넣었는가 해서 꺼내보았다. 그런데 그건 수표가 아니라 차용증서였다,“최선생이 머 거래가 있었다면서.”철의 안색이 달라지는 것을 본 서무실 직원이 변명을 하였다. 박 선생이 생전에 최선생의 곗돈ㅇ르 꾸어 썼더란다. 그래 조의금에서 그 돈을 받아갔다는 것이었다.「사망보류」는 경제적 궁핍상뿐만 아니라 이러한 사회의 사물화 또한 철이 ‘사망보류’를 부탁할 수밖에 없게 만든 중요한 요인임을 말하고 있다. 이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두 모순을 동시에 포착하려는 이범선의 세심한 배려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아님’의 상황을 더욱 극명하게 밝히려는 소설적 의도 또한 내포되어 있다.◎ 비극적 현실의 문학적 형상화「사망보류」는 극한적인 경제.
삼대를 읽고는 1931년 1월 1일부터 그 해 9월 17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된 장편 소설로, 1920년대 식민치하에서 살아가는 3세대의 인물을 통해 당대 현실을 효과적으로 반영한 것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三代에 걸친 가족사의 전개를 통하여 식민지 시대인 당대의 사회적 현실을 제시함으로써 사회적 변천과 정신사의 이면을 함께 묘사한 1930년대의 '가족사 소설의 대표작'이다. 한말 세대의 보수성과 개화기 세대의 정신적 파탄, 식민지 세대의 진보성으로 대표되는 조·부·손의 라는 안정된 구도 속에서 가족 계보 안의 갈등과 세대간의 단층과 대치가 무리 없이 그려져 있다. 몰락과정과 이에 대한 의식, 당시 청년들의 정신적 갈등이 사실적 수법으로 묘사되고 있고 미묘한 인간 심리의 변전을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 유교 전통 사회에서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거쳐 근대 사회로 변모하고 있는 현실을 그린 이 작품은 가족사를 통한 시대사의 재구성으로 요약된다. 민족 항일기 동안 여러 유형의 한국인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갔으며 또 당시의 사회구조의 모순이나 세대 교체의 무제가 한국 근대사의 변천과정에서 어떻게 파악될 수 있는가를 문제 삼은 한국 근대 문학의 대표적 작품이다.에는 두 갈래 삶의 흐름이 보인다. 그것은, 덕기네 집안의 조 의관 부자가 구현하고 있는 현실 추구적, 소비적 삶의 양상과, 한편으로는 김병화가 하숙 들어 있는 필순네 가족을 통해서, 또 덕기와 병화 사이의 교량적 구실을 하는 홍경애를 통해서 보여 주고 있는 현실에 대한 반체제 지향적인 이념적 삶의 양상이다. 이것은 당시 억압적인 식민지 현실에 대처할 전형적인 삶의 양식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 이 작품에는 크게 두 가지의 갈등이 나타난다. 우선 가족 내부의 갈등으로, 이는 세대간의 갈등이다. 조 의관과 상훈 사이의 갈등은 보수와 개화라는 이념상의 갈등에서 시작하여 재산의 상속을 두고 심화된다. 상훈과 덕기의 갈등도 표면적으로는 홍경애를 둘러싼 도덕적인 문제인 듯하나, 재산권의 상속을 둘러싼 대립이란 측면이 강하다. 따라서, 가족 간의 갈등의 축이 되는 것은 돈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제목에서 말하는 그대로 三代 - 할아버지 조의관, 그의 아들 조상훈, 손자 조덕기 - 에 이르는 祖. 父. 孫 의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 의 인물 설정은 다분히 의식적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한국 사회를 구성했던 전통, 혼란, 신식 이라는 대략적인 세 개념하의 사람들을 대표적으로 드러낸 인물들이다.조의관은 조씨 가문의 가장. 보수적 인물로서 조선조 말기 중인 계층의 인물로 돈과 실리밖에 모르는 전형적인 현실주의자이다. 지난 시대의 고루한 사고 방식과 인습에 젖어 있는 봉건주의자이며 자기 개인의 이익과 집안의 위신을 높이는 일에 최대의 가치를 두는 완고한 인물이다. 을사조약을 전후해서 사회가 혼란해지자 2만냥이라는 큰돈으로 의관 벼슬을 사고 남의 족보에 끼어 들어가서 가문을 과시하려고 하며 이 때문에 큰돈을 들여 족보를 만드는 대동보소를 운영한다. 아들인 상훈이 기독교에 물들어서 제사를 지내지 않자 아들과 대립하고 손자인 덕기에게 가업과 유산을 물려주려 한다.조상훈은 신교육에 세례까지 받은 계몽주의적 지식인으로 그려지면서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했고, 그는 신실한 기독교 신자로 교회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했으며 교육에의 뜻도 품어 집안의 재산을 쏟아 붓는 열정도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도덕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뒷모습은 그를 위선자로 보이게 한다. 술과 노름, 게다가 명예로서 보살펴주던 운동가의 딸과 관계도 가져 아이까지 낳고도 무책임하게 있는 그의 모습은 더욱 위선자로 보이게끔 한다. 이렇게 보이는 그의 부패한 모습은 그의 신사상, 신지식과 그 시대와의 갈등의 결과가 아닌가 한다. 마지막에 가서도 조상훈은 아버지 조의관과 완전한 대립을 보이다가도 자신의 한계를 느꼈을 때 결국 황폐해진 모습을 보이며 재산에의 집착으로 끝이 났다.조덕기는 조부 조의관의 신임 받는 손자이다. 조상훈은 교회 사업에만 골몰해 집안 돈을 교회 사업에만 투자하고 제사를 부정하는 등 이미 조의관의 눈 밖에 났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조의관은 아들보다도 손자인 덕기에서 더 큰 믿음을 가진다. 재산 관리도 덕기에게 일임하리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실로 덕기는 두 세대를 모두 부정한다. 조부의 가치관도 아버지의 가치관도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단점은 우유부단한 성격에 있다. 그는 마지막 세대로 새로운 사회에 대한 동경이 있지만 아버지만큼도 강하게 부정하지 못한다. 오히려 때때로 그의 조부의 사상에 동정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념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고 동요하고 있다. 그는 어떤 주체적인 입장을 갖지 못한다.1920년대 한국 사회는 서로의 지향과 가치관이 다른 이 세 세대가 공존했던 시기이다. 이처럼 ''에 등장하는 조의관, 조상훈, 조덕기는 각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며 작품에서 그려지는 인물간의 갈등은 당시 한국 사회의 사회.문화적 갈등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갈등의 원인은 바로 ‘돈’이다. 세대간의 갈등과 충돌은 크게 보면 모두 이 돈에서부터 시작된다. 1920년대 식민 치하에서 조선후기 자본주의에의 맹아가 크게 발아해가면서 자본주의적 최대가치인 ‘돈’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돈’은 인간의 추악함과 욕망을 드러내는 요소로 나타난다. 조의관은 늙은 나이에 아들을 얻기 위해 결혼한 수원집으로부터 죽임을 당하게 되는 그야말로 본말전도한 결과까지 나타나는 것이다. 물론 수원집의 목적은 조의관의 유산에 있었고 아주 타락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헌데 여기서 더 추악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그의 아들 조상훈이다. 조상훈은 재산이 덕기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자 유서와 토지문서가 든 금고를 훔쳐 달아나다 경찰에 붙잡히기까지 한다.앞서도 설명했듯이 ''의 등장인물은 모두 각기 시대와 이념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공통점은 이처럼 돈에 의해 갈등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조가의 를 살펴보면, 조의관은 자수성가를 한 인물로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고 그 재산을 노린 수원집과 최참봉, 창훈 일당의 음모가 있다. 조상훈은 역시 재력이 있었기에 홍경애와 김의경과의 만남이 가능했다. 상훈이 재산가였기에 홍경애의 부친을 도울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홍경애로부터 경외의 대상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상훈의 재산을 보고 붙은 김의경도 마찬가지이다. 상훈은 처음엔 기독교사상을 가진 신사상가 같지만 결국엔 돈과 애욕에 눈이 먼 주책스러운 늙은이의 한 사람이고 만다.
국어교육과 20042013 문민정서론중앙집권적 전제 군주국가였던 조선이 5백년간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한 권력분점에 의한 군주의 전제횡포를 막아내고 권력의 배분을 통해 서로 견제하면서 합리적인 정치운영을 해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조선시대의 권력은 삼공(영의정, 좌의정, 우의정)과 대간(사헌부, 사간원), 옥당(홍문관의 당상관), 시종이 서로 권력의 독점을 비판하면서 유교적인 이념의 이상국가 건설을 위해 분투했다. 그 과정에서 공론에 바탕을 둔 민본ㆍ문민정치를 구현함에 있어서 언론은 필수적이었다.조선 사회의 언론이 상당히 발달했음은, 관료 제도의 운영에서 그 실상을 알 수 있다. 급변하는 건국 초기의 상황에서도, 결코 대간의 폐지나 축소 등이 논의된 적이 없었으며, 대간의 기능을 약화시키는 것은 유교 이념에 위배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왕은 물론 관료 조직의 모든 구성원들은, 언론의 규제는 정치 도의상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인식했다.대간은 절대로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으며, 동시에 공론의 대변자요, 법의 수호자라는 점도 확신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섬겨야 하는 군주와 신봉하는 신념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그 신념에 따르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조선 사회 언론 기관의 실상과 구체적인 활동을 살피는 것은, 조선 정치의 실체를 이해하는 것과 직결된다. 지금부터 조선의 대표적 언론 기관인 '삼사(三司)와 직업 언론인인 '대간(臺諫)'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본론1. 조선의 대표적 언론기관 -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조선의 언론은 매섭고 적극적이었다. 군주의 통치 행위는 물론, 일반 관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탄핵의 대상으로 삼을 만큼 활발했다. 조선 사회에서는 언론 활동을 직접 담당했던 관청이 있었는가 하면, 일반 민중들이 자신의 의견을 왕에게 올릴 수 있는 장치도 마련되어 있었다. 대간 제도는 유교적인 통치 체제를 갖춘 국가에서 운영되었던 독특한 제도였다. 중국의 어사대(御史臺)에 기원을 두고 있었던 사헌부는, 제도적으로 국왕의 입장에서 관리들을 감찰하는 것으로察:정6품) 13명으로 규정하고 서리(書吏) 39명을 두도록 하였다.② 사간원(司諫院)조선시대 국왕에 대한 간쟁(諫諍)과 논박(論駁)을 담당한 관청으로 간원(諫院)?미원(薇院)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당(唐)?송(宋) 때에 정비되었고, 고려시대에는 이를 본받아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낭사(郞舍)가 간관이었다. 태조 1년(1392)에 관제를 제정하면서 고려시대의 제도를 계승하여 문하부(門下府)의 낭사)에게 간관의 기능을 담당시켰다. 그러나 태종 1년(1401)에 문하부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두는 동시에 문하부의 낭사를 독립시키면서 비로소 설치되었다. 관료는 첫째, 국왕에 대한 간쟁, 신료에 대한 탄핵, 당대의 정치?인사 문제 등에 대하여 언론을 담당했으며, 둘째, 국왕의 시종 신료로서 경연(經筵)?서연(書筵)에 참여하였고, 셋째, 의정부 및 6조와 함께 법률 제정에 대한 논의에 참여하였으며, 넷째, 5품이하 관료의 인사 임명장과 법제 제정에 대한 서경권(署經權)을 행사하였다. 이처럼 간관의 임무가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화요직(華要職)으로 인정되어 학문이 뛰어나고 인품이 강직한 사람 가운데서 선발하였고, 교체시에도 지방관으로 폄출하지 않았으며, 승진시에는 파직 기간도 근무 일수에 포함시켜 주었다.③홍문관(弘文館)홍문관의 법제적인 기능은 성립 때에는 궁중의 경서?서적의 관리, 문한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는 것이었는데 한말까지 계승되었다. 실제기능은 위의 법제적인 업무는 물론, 국왕의 호학, 정치분위기 등과 관련되어 성종 이후에는 감찰?언론 기능도 행사했다. 그리하여 홍문관은 1489년 이후에는 장내부경적(掌內府經籍))?치문한(治文翰))?비고문(備顧問))의 기능과 감찰기능, 언론기능을 행사하는 장서?문한?시종?감찰?언론 기관으로 확대 강화되었다.홍문관 관원은 대간원처럼 그 업무와 관련하여 능력이 있고 가문이 좋은 인물을 제수했고, 승자?체직에서 의정부?6조 관원에 다음가는 지위를 누렸다. 특히 홍문관관원은 시종기능의 수행과 관련되어 홍문록에 의하하기를,“...(중략) 어째서 대각의 풍토가 점차 무너져 가고 있다고 하는가 하면, 신이 삼가 생각건대 대각의 소임이란 빠뜨린 것을 챙기고 빈 곳을 메꾸며, 탁한 것을 맑히고 맑은 것을 드러내는 일보다 더 앞서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논의가 한번 나오기만 하면 사람마다 놀라서 쳐다보며, 이내 아무 대관이 아무 관원에게 감정이 있어서 저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갖는가 하면, 더러는 아무 관원은 아무 사람의 동료가 아니므로 필시 이 사람의 소행일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는 아무 관원은 바로 아무 사람의 친구인데 어찌 인정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기도 하고, 또는 아무 사람은 바로 그의 부형의 친구인데 어찌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려고 애쓰지 않겠는가 하기도 하며, 또는 아무개는 아무개와 인척 사이인데 어찌 이런 잘못을 저지르는가 하기도 하는 등, 떼지어 들고 일어나서 나무라고 꾸짖으므로, 쏟아지는 비난을 견디어 낼 수가 없으니, 누가 선뜻 몸을 돌아보지 않고 분연히 나서서 이러한 폐습 속에서 공(公)만 알고 사(私)는 잊으려 하겠습니까.”《효종실록》 권20, 효종 9년 4월 갑오조선초기에는 유교적 지배체제의 확립이 중심과제였으므로 삼사의 언론도 이와 관련되었다. 그러나 왕권이 비교적 강력했고 공신이나 고위관료들이 정국을 주도하였기 때문에 대간의 언론은 별 힘을 얻지 못했고 그 활동도 두드러지지 못했다. 삼사의 언론활동은 조선중기에 이르러서 본격적으로 시작 된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 사림세력이 삼사를 중심으로 등용됨으로서 삼사의 언론활동이 본 궤도에 오르게 되고 새롭게 정치세력으로 성장하던 이른바 사림세력은 주로 삼사에 자리잡고 기득권 세력인 훈구 세력의 부정과 비리를 논핵함으로써 자신들의 입지를 구축해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 언론 관행이 형성되었고 제도적으로 보장받게 되었다. 물론 연산군대의 비정상적인 정치상황에서나 명종대 윤원형의 전횡이 이루어지던 시기에는 삼사의 기능 역시 크게 위축되어 최고권력자의 하수인에 불과한 처지로 전락하기도 하였다.16세사(時事)를 의논할 때였다. 글로 하는 경우는, 차자(箚子 : 짧은 상소문)?계(啓)?소(疏) 등을 써서, 사헌부와 사간원의 양사 성상소(城上所)를 거쳐 승정원에 제출하면, 승정원에서 승전색(承傳色))을 통해 왕에게 전달되었다. 왕의 비답(批答)을 받을 때에는 그 역순이었다. 단, 2품 이상 관료들은 승정원을 통하지 않고, 직접 승전색을 통하여 아뢸 수 있었다. 이들 언관의 상소나 왕의 하교는, 사관(史官)이 반드시 초록하게 되어 있었다.국초의 대간의 언론은, 대체로 재상권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는 고려 귀족제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건국 과정에서 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대간의 언론이 약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태종이나 세조와 같이, 전제적인 왕권을 확립하고자 하는 왕들은 대간의 언론을 무단적으로 탄압하였다. 이러한 왕들은 경연을 폐쇄하기도 하고, 대간이 언론을 하지 못하게 하거나, 언론을 하더라도 들어 주지 않을 뿐더러, 대간들을 갈아치우거나 처벌하기 일쑤였다. 따라서 대간의 언론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였다.그러나 대간의 언론이 유명무실해지면서 국가의 기강이 무너지자, 이를 활성화라는 방안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현전이 언관화되고, 홍문관이 언론 삼사의 하나가 되어, 대간을 지휘 감독하게 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대간이 언론을 위한 언론을 하는 것을 금지하기 위해, 왕의 시신(侍臣)인 집현전?홍문관 관원이 나서게 된 것이다. 이것은 언론이 국왕의 입장에서 주도된 증거라 할 수 있다. 엘리트 문사인 집현전?홍문관 관원들은 특히 유교 이념을 지키고 이단 사상을 배척하는 것에 적극적이었다.② 탄핵경우에 따라서 양사가 함께 상소를 올리게 되는데, 이를 양사합계(兩司合啓)라 하였다. 그러나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에는 사헌부나 사간원 단독으로 상소를 올리기도 했고, 몇 사람이 공동으로 상소를 올리기도 했으며, 심한 경우에는 단독으로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개인이나 몇 사람이 따로 상소를 올릴 때는 해당 관부에서, 사헌부에서 올469년(예종 1)에 복구되어 경국대전에 그대로 법제화되었다. 이는 왕권의 소장에 따라 대간의 서경권의 출입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종국적으로는 왕권과 신권의 타협으로, 4품 이상은 서경 없이 국왕의 발령으로, 5품 이하는 대간의 서경을 거쳐 이조에서 관료를 발령하는 것으로 조정되었던 것이다.④ 권력의 견제와 균형성종대에 홍문관이 언론기관화 되면서 홍문관에 대간 탄핵권이 주어졌다. 홍문관에는 문벌과 학식이 두루 높은 엘리트 문사들이 모여 있었다. 이 때문에 홍문관은 공론을 대표하는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홍문관은 대간을 지휘?감독할 뿐 아니라, 대간과 협동하여 언론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에 1491년(성종 22)부터는 홍문관 관원의 대간 진출이 허용되었다. 홍문관 관원은 타 부서로 전출되지는 않았지만, 대간이나 이조의 낭관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또한 이조는 대간고공법(臺諫考功法 : 대간의 고과를 평가하는 법)을 통해, 대간을 조종할 수 있었다. 이 법은 이미 태조 대부터 실시되어 왔다. 이조는 인사 부서였기 때문에, 대간의 인사를 장악하고 있었다. 특히 대간의 인사권은 이조의 낭관들이 가지고 있었다. 이에 이조낭관은 대간을 조종하고, 대간은 의정(議政)이나 이조판서 등 고위관료들을 탄핵할 수 있었으며, 이조판서는 이조낭관을 수하에 거느리고 있어서, 힘의 삼각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이조의 정랑?좌랑 등의 전랑(銓郞)은 의정부 검상 사인, 대간 홍문관?예문관 등의 낭관 추천권을 가지고 있어서, 실로 정국을 이끌어 가는 중요한 지위에 있었다. 그러나 이조전랑의 뒤에는 사림의 종장(宗長)인 주론자(主論者)가 따로 있어서, 정국을 주도했다. 조광조와 같은 사람이 대표적인 주론자였다.조선 중기에 이르러, 이와 같이 낭관권(청요직 낭관들이 자기들의 후임자를 스스로 추천)이 강조되고, 이조전랑이 그 핵심이 되게 한 것은, 권세가의 발호를 막고 관계에 청신한 기풍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조선 후기 사림 정치의 한 특성이기도 했으며, 조선 왕조가 500여 년이나 유지다.
대금구帶金具 와 경鏡1)대금구그림1) 허리띠 부분 용어{(1)삼엽문 허리띠장식 - 5~6세기 적석목곽분1황오리 14호분 1곽 慶州皇吾里古墳群 (경북 경주시 황오동)신라의 허리띠 장식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고 생각되는 것은 경주 황오리 14호분 1곽 출토품이다. 은제품이며 위에는 허리띠에 부착하는 네모난 장식이 있고 그 아래에 심엽형{ 심엽이란 새싹을 말한다. 나무나 풀의 새싹처럼 하트형에 가까운 모양을 일러 심엽형이라 지칭한다.(心葉刑)장식이 매달려있다. 네모난 판에는 좌우대칭의 무늬가 베풀어져 있고 가운데에 삼엽문{ 이파리 세 개를 넣은 무늬(三葉紋)이 표현되어 있고 9개의 못을 박아 허리띠에 고정하고 있다. 심엽형 장식은 위쪽 과우에 1개씩의 엽이 마치 쇠뿔처럼 돌출되어 있고 내부에도 아래쪽을 향해 좌우 각 1개씩의 엽이 표현되어있다.2황남대총 皇南大塚 (경북 경주시 황남동-황남동 제 98호분)남분 - 황남대총 남분 출토품은 황오리 14호분 1곽의 그것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생각된다. 이 무덤에서는 모두 6벌 이상의 허리띠 장식이 출토되었다. 띠꾸미개에 베풀어진 무늬를 기준으로 보면 용무늬와 삼엽문 계열로 대별할 수있다. 용무늬를 표현한 경우 2벌은 은제품이고 1벌은 금동제품이다. 이 중 은제품은 띠꾸미개에 매우 형식화된 용무늬가 표현되어있고, 금동제품의 경우 내부에는 용무늬가, 가장자리에는 파도무늬가 베풀어져 있다. 또 허리띠에 부착되는 네모난 판의 뒷면에는 비단벌레의 날개를 붙여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신라에서 용무늬를 베푼 허리띠 장식은 그 예가 많지 않다.이 무덤의 가장 전형적인 허리띠 장식은 주인공이 착장하고 있던 금제품이다. 그간 신라에서 출토된 6점의 금제 허리띠 장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생각된다. 특이한 점은 띠고리가 2개란 사실이다. 띠고리는 그 모양이 D자에 가까우며 띠꾸미개에는 황오리 14호분 1곽처럼 좌우대칭의 이파리 무늬가 드리워져 있다. 드리개는 모두 7개인데 1개는 크고 다른 6개는 작다. 드리개 끝에 물고기,띠 아래에 매달려 있는 13개의 띠드리개는 경첩으로 허리띠와 연결하였다. 이 허리띠와 띠드리개는 출토될 당시 상태가 아주 좋아서, 착용법과 띠드리개의 배치순서를 아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그림2) 황남대총 남분 금동제 허리띠장식과 세부{{그림3) 황남대총 남분 금제 허리띠 장식과 세부그림4)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3금관총 金冠塚 (경상북도 경주시 노서동)금관총에서 금관과 함께 출토되었으며, 과대는 전체길이 109cm, 띠꾸미개는 가장 긴 것이 54.5 cm이다. 과대는 39개의 과판과 2개로 된 교구 1벌을 가죽 또는 섬유로 된 띠 위에 꿰어 달았으리라 짐작된다. 이 과판들은 정사각형의 판과 여기에 경첩으로 연결된 심엽형의 드리개로 이루어져 있다. 또 표면에는 동그란 금판의 작은 달개들을 꿰어 달았고, 그 바탕에는 인동무늬{ 길고 가느다란 잎사귀 모양의 부채꼴로 펴진 형태를 한 추상적인 식물무늬당초문{ 덩굴풀 무늬과 구름무늬로 보이는 무늬가 투각되어 있다.그림5) 금관총 금제 허리띠{그림6) 금관총 금제 허리띠 세부{4천마총 天馬 (경북 경주시 황남동-황남동 제155호분)천마총에서 출토되었다. 과대 길이 125cm, 띠꾸미개 최장 길이 73.5cm로 얇은 금판을 오리거나 두드려 만들었다. 과판 44개와 띠고리, 띠끝장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띠꾸미개는 13줄이다. 문양은 좌우대칭의 변형 인동문과 삼엽문을 뚫어 장식한 것인데 신라 과판의 가장 일반적인 도안이다.띠꾸미개중 가장 대형의 것은 대소형의 타원형장식 각 8개를 교대로 매달아 만들었는데 큰 장식에는 둥근달개를 금실로 매달아 장식하였다. 작은 띠꾸미개의 제일 하단에는 고기모양과 주머니모양 족집게, 곡옥을 매달았다. 1줄은 금사슬인데 맨 끝에 직사각형 모자장식 아래에 얇은 금판을 길죽하게 말아 끼웠다.그림7) 천마총 금제 허리띠{표1 적석목곽분의 삼엽투조 허리띠 장식 띠고리(帶鉤)의 분류{띠고리 (帶鉤)띠고리는 테두리 평면 형태에 따라 크게 다음 세가지 군으로 구분된다.A군; 테두리가 D자를 좌우로 뒤결되며 내외로 엽(이파리)무늬가 돌출되게 표현되어있다.테두리는 단면이 장방형이다.상하테두리가 곡선적인 것(B1)과 직선적인 것 (B2)이 있다.C군; 테두리는 형태가 송이버섯 모양이다. 테두리 단면은 둥글다.A.B군은 공존하며 C군보다는 빠르다. 그 이유는 A1은 초기의 용문 허리띠 장식 띠고리와 비슷하고, C는 보문리 부부총 적석목곽묘 출토 띠고리 (帶鉤) 띄 6세기때에 유행하는 띠고리 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매납된 절대연대를 알 수 있는 백제 무령왕 출토 허리띠 장식이 또한 C군에 속한다. A군 중에서는 A1이 A2를 앞서는 것 같고, B1과 B2는 시간차보다는 공방이나 위계 차이를 반영할 가능성도 있다.표2 적석목곽분의 삼엽투조 허리띠 장식 띠꾸미개의 분류{띠꾸미개A군;허리띠에 부착되는 방형판의 아래쪽 중앙에 삼엽문이 위치하고 투조부분이 상하 1/3 이상 중복된다. 드림부에는 엽 2개가 표현되었다. 이를 좀 더 세분하면 다음과 같다.1;방형판의 투조 부분이 약 2/3가량 중복되어 있고 삼엽의 가운데 엽 표현이 뚜렷하다.2;방형판의 상하 투조 부분이 일부 중복되어 있고 엽 표현은 간략화 되었다.3;2와 같으나 드림부 외부에 엽 장식이 없다.4;3과 같으나 드림부 내부의 엽 표현이 간략해 지면서 고리모양의 투공으로 대체되었다.5;방형판의 중간에 삼각형의 조그마한 투공이 이루어졌다.6;방형판의 상하 투조부분은 일부 중복되나 엽의 표현이 사라지고 고리모양 투공으로 대체되었다. 신라의 띠꾸미개는 엽표현을 하기위해 보통 끝을 여러번 사용해 곡선적인 엽을 표현하지만 , 이경우에는 대롱처럼 생긴끌로 한번 찍어 내어 문양을 표현하였다.B군;방형판에는 삼엽문이 판 아래쪽 중앙에 위치하고 투조된 부분이 상하로 분리된다. 드림부에는 2엽,4엽,5엽 장식이 있다.1;삼엽의 좌우측 엽만 엽모양이고 가운데 엽은 줄기로 남았다.2;1과 유사하나 방형판과 드림부는 너비가 넓은 편이다.3;방형판의 엽 표현이 간략화 되었다.4;.방형판은 위와 같고 드림부에는 새로이 2엽이 추가된다.5; 한 문양을 구성한다. 드림부 문양은 방형판처럼 복잡하다.2)누암리형{ 전형적인 예가 출토된 중원 누암리 유적을 지표로 삼아 누암리형 허리띠 장식 으로 명명하였다.허리띠장식 - 6세기신라 무덤에서 황금이 사라지는 시점인 대개 6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가 되면 기존의 삼엽문 허리띠 장식은 없어지고 새로운 형태의 허리띠 장식이 출현 한다. 앞 시기와는 달리 비교적 작은 규모의 무덤에서 출토되며 띠고리, 띠꾸미개, 띠끝장식 등 간단한 부품으로 구성되어 있다.1보문리 부부총 돌무지덧널무덤 夫婦塚 (경북 경주시 보문동)띠고리와 띠끝장식,역심엽형(거꾸로 세운 하트모양) 띠꾸미개로 구성돼 있다. 띠고리의 테두리는 말발굽형에서 버섯형으로 이행하는 중간단계의 모습이며 속에 걸쇠가 없다. 띠연결부는 길쭉한 편이며 21개 못으로 허리띠에 고정했다. 못이 많은 점이 특징이다.띠꾸미개는 13개가 출토되었는데 띠에 고정되는 역심엽형 장식에 못이 사용된 것과 사용 않은 것 두 종류가 있다.띠끝장식은 끝판과 띠연결부가 고리로 연결되어 있어 유동이 자유롭다. 띠연결부 끝은 뾰족하게 처리되었고 6개 못으로 허리띠에 고정했다.2황남리 151호분 돌방무덤 慶州皇南里古墳群 (경북 경주시 황남동)은제 띠끝장식이 출토됐다. 띠끝장식은 끝판과 띠연결부가 경첩고리로 연결되어 있으며 띠연결부 끝은 뾰족하게 처리되었고 3개못으로 허리띠에 고정했다.3출토지 미상양산 부부총 보고서에 인용된 경주 신라 고분 발견의 과판 교구 는 전형적인 누암리형 허리띠 장식이다. 띠고리 (帶鉤) 테두리는 버섯 모양이고 걸쇠가 없으며, 왼쪽 테두리의 단면이 납작해 조각달 모양이며 상하 테두리 보다 안으로 휘어져 있다. 띠꾸미개는 2점인데 방형이다.유려한 인동초 무늬가 표현되어있다. 동제 주조품으로 추정된다.{그림8) 경주 보문리 부부총 외 출토된 허리띠3)황룡사형 허리띠 장식 - 7세기서기 645년에 완성된 경주 황룡사 목탑지 심초석 하부에서는 몇 점의 허리띠 장식이 출토되었다. 그 가운데는 6세기 후반의 누암리형 허리띠 장식도 있. 이 과정에서 신라는 당 복식을 공식적으로 수용하기도 했다. 648년 김춘추가 당 황제에게서 의복과 허리띠를 하사받아 귀국한 다음 신라는 의복제를 당식으로 바꾼다.{ 삼국사기 권제33(잡지 제2) 색복/신라 至眞德在位二年 金春秋入唐 請襲唐儀 太宗皇帝詔可之 兼賜衣帶 遂還來施行 以夷易華 진덕왕 재위 2년(648)에 이르러 김춘추(金春秋)가 당나라에 들어가 당나라의 의례에 따를 것을 청하니, 태종(太宗)황제가 조서로써 이를 허가하고 아울러 옷과 띠[衣帶]를 주었다. 드디어 돌아와서 시행하여 오랑캐의 복색을 중화의 것으로 바꾸었다.이 기록이 신라가 당허리띠를 수용하는 공식시점을 이야기해 준다.이러한 점을 미루어 본다면 황룡사형 허리띠 장식은 7세기 전반이 중심연대이고 수 및 초당기 허리띠 장식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고 판단된다.1황룡사지 출토품서기 645년에 완성된 경주 황룡사 목탑지 심초석 하부에서는 2벌 이상의 허리띠 장식이 출토되었다. 먼저 띠고리는 2점인데 테두리 형태가 동일하다. 왼쪽 테두리는 단면이 조각달처럼 날카롭다. 띠연결부는 2종으로 구분되는데 1점은 방형에 무늬가 없다. 다른 1점은 반원형이며 앞뒤에 연꽃무늬를 표현했다. 띠꾸미개는 20여점 확인됐다. 그것들은 방형과 원형으로 대별되며 문양종류에 따라 더욱 잘개 나눠지기도 한다.방형 띠꾸미개에는 꽃무늬 , 풀무늬를 표현했다. 원형 띠꾸미개에는 모두 연속반원점문과 유사항 문양을 넣었다. 그 밖에 띠꾸미개도 1점 출토되었는데, 전형적인 누암리형 허리띠장식의 그것이다. 뒷면에 돌출된 고리가 있어 허리띠에 부착할 수있게 했고 끝판과 띠연결부가 함께 주조되었기에 유동성이 없다. 황룡사형 허리띠 장식의 특징은 동제주조품이라는 점이다. 이는 누암리형 허리띠 장식이후 이어지는 특징이다. 그리고 띠고리의 띠연결부나 띠꾸미개및 띠끝장식에 다양한 문양을 좌우대칭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도 매우 주목되는 특징이다. 문양장식부에 직경 0.4 CM 내외의 둥근 구멍을 뚫는 점 역시 황룡사형 허리띠 장식의 특징으로 지적할 수 龍寺丈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