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내의 태국적인 현상 ( 태류 현상 )현재 한국 내에서는 심심치 않게 태국적인 현상을 볼 수 있다. 특히 음식이나 일명 타이마사지로 유명한 마사지등은 예전부터 우리나라의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상을 태류현상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태류현상이란 동남아시아에서 한국의 대중문화가 열풍을 일으키는 한류현상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한류라는 말은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한국 대중문화의 열기를 표현하기 위해서 2000년 2월 중국 언론이 붙인 용어이다. 이후 한국 대중문화의 열풍은 중국뿐 아니라 타이완, 홍콩, 베트남, 타이,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한류 현상이 확산되었다.이러한 한류 현상처럼, 최근 한국의 대중매체에서도 태국 사람이 등장하거나 태국 음식과 마사지, 태국 영화와 드라마, 그 밖에 다양한 태국의 문화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흔해졌고, 일상생활에서도 태국의 음식을 맛보거나, 태국의 마사지를 받거나, 태국의 영화나 드라마를 접촉하는 일이 빈번해졌다.태류 현상은 동남아시아 전역에 걸쳐서 나타나는 한류 현상에 비하면 협소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나타나고 있는 태국적인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재 한국에서는 비교적 다양한 계기를 통해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태국의 요소들, 태국의 이주노동자와 국제결혼이민자,태국의 음식과 마사지, 영화와 드라마, 관광과 교육 등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태류현상을 다시 설명하자면 한국 사회에서 경험할 수 있는 태국과 관련된 사회적 문화적 면모들이 하나의 새로운 사회현상으로 의미가 있다고 전제 하고 그러한 사회현상을 범주화하는 것을 말한다.* 대중문화태국의 대중문화 중 우리나라에서 제일 널리 알려진 것은 영화다. 국내 에 처음 소개된 태국 영화는 2001년도에 개봉된 ‘방콕 데인저러스’다. 이후 부산국제영화제 등을 통해 태국영화는 부쩍 관심을 받게 되었다. 태국 영화 특별전, 태국 영화 관련세미나와 태국 영화의 밤 등 다양한 행사들이 영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소개되었다. ‘낭낙’은 국내에서는 정식 개봉된 적은 없지만 2001년 비디오로 출시되었다.2002년 8월‘디 아이’10월 ‘철의 여인들’ 12월에는 ‘방라짠’이 개봉되었다. 태국 영화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옹박’은 ‘옹박-무워이타이의 후예’라는 제목으로 2004년 5월 개봉되었다. 보디가드는 2004년 부천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 초청된 바 있고 2005년 6월에는 ‘더 셔터’가개봉되었으며 ‘테저렉’2005년 6월), ‘라스트 라이프, 라스트 러브’2005년 9월), ‘시티즌 독’2006년 8월), ‘메신져’2007년 6월), ‘카르마’ ‘보디 19’ ‘코핀’2008년 7월) 등이 개봉되었다.지금까지 한국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태국영화로 꼽히는 것들은‘연쇄살인사건’ ‘방라짠’ ‘방콕데인저러스’ ‘옹박 1, 2’ ‘짠다라1, 2’ ‘아이언 레이디’ ‘셔터’ ‘낭낙’ ‘샴’ ‘라스트 라이프 라스트 러브’ ‘쓰리’등이다.태국 영화가 국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몇 가지 원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1990년대 중반 후 태국 영화가 중흥기를 맞이한 데서 기인한다. 태국은 한국과 더불어 아시아권에서 주목받고 있는 영화의 메카다. 1970년대에는 연간 200여 편에 달하는 영화가 제작되었을 정도였지만 80년대 후반 할리우드 영화나 홍콩 영화의 영향과 가정용 비디오 공급 등으로 침체기에 빠졌다. 연간 200여 편에 달하던 태국 국내 제작편수가 1996년에는 연간 10편 내외가 되었다. 하지만 논씨 니미붓(Nonzee Nimibutra) 감독의 ‘댕 버럴리와 일당들’1997, 태국명, 안타판 크렁 므엉)을 시작으로 영화산업의 전반적인 변화를 모색하고 다양한 영화 장르가 개척되면서 다시 한 번 중흥기를 맞이하기 시작했으며 해외수출도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작품들이 ‘낭낙, ’철의 여인‘ ‘쑤리요타이’ ‘옹박’ ‘마이걸’ ‘전주곡‘ ’오케이 베똥‘등이다(배수경 2007).둘째, 태국영화는 부산국제영화제(1996년)를 비롯해 부천 국에 달한다.셋째, 태국영화의 흥행성도 인기의 원인이 된다. 국내에서 유행하고 있는 태국영화의 장르는 대개 액션, 코미디물과 호러물이다. 옹박 으로 대표되는 액션물이 인기를 끈 이유는 기존의 액션 영화가보여준 CG와 와이어를 쓰지 않은 100% 리얼 액션이란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기 때문이다.호로물은 가장 널리 알려진 영화장르다. 2008년 여름 시즌 라인업을채울 한국산 공포영화는 현격히 줄어들었지만 그 자리를 ‘바디’‘카르마’‘카핀’과 같은 생소하면서도 익숙한 태국산 공포영화들이 빼곡이 메웠다.본격적으로 태국산 공포영화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한국을 비롯해 여러 아시아 국가를 강타했던 팡 브러더스(Phang Brothers)의 ‘디 아이’다. 동양적인 원혼극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보다 단순하고 직선적인 표현방식으로 확실한 쇼크효과를 만들어 냈던 ‘디 아이’는제시카 알바 주연의 할리우드 영화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이후 ‘셔터’나 ‘샴’등의 영화가 ‘디아이’의 뒤를 이으며 태국판 공포영화 바람을 가속화 시켰다.태국 공포 영화는 우리나라 관객의 정서에 호소할 만한 요소가 많다고 볼 수 있다. 많은 태국 공포물에는 한을 품은 영혼과 세상의 순리를 거스른 자에 대한 단죄가 나온다. 같은 불교 문화권에서 공유할 수 있는 윤회사상이나 이국 적인 풍광이 뒤섞이며 만들어지는 개성적인 색채에도 충분히 공감 할 여지가 있다. 태국 공포영화는 익숙한 이야기의 형태가 반복되거나 단순하고 직선적인 표현방식으로 확실한 쇼크효과를 만들어 공포를 유발시키는 고전적인 호러기법이 자주 구사된다. 이 점은 태국 공포영화의 장점이자 단점이 된다.‘디아이’같은 영화가 보여준 확실한 쇼크 효과가 영화의 흥행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익숙한 이야기 패턴이나 쇼크효과에만 머무는 방식이 단조롭고 짜증스럽다는 반응을 보이는 관객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포란 원초적 감정과 장르 본연에 충실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태국산 공포영화들은 꾸준한 저변 확대를 이루고 있다.영화 이외에 최근xyNaughty Bitchy는 한국의 길거리에서도 많이 들을 수 있다. 그녀는 태국을 대표하는 아이돌 스타로 미국까지 진출했으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아시아 가수라고 말할 수 있으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많은 가수들과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최근에는 오리콘차트에 진입한 첫 태국가수가 되었다.한국 기획사가 태국인 가수를 영입하여 태국과 한국에서 활동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YP 엔터테인먼트는 소속 아티스트인 태국인 니쿤(Nichkhun)의 현지 데뷔를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고 밝혔다. 중국계 태국인이며 미국 시민권 소유자인 니쿤은 2005년 발탁되어, 2년간의 트레이닝으로 발군의 실력을 키워왔으며, 이미 태국, 중국 등 아시아 지역에서 초절정 꽃 미남이라는 입소문을 타고 많은 자생적인 팬클럽이 창설되고 있다.* 음식과 마사지2000년대 들어 국내에는 태국, 베트남, 인도 등의 음식이 소개돼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 중 세계 6대 음식 중 하나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태국 음식을 파는 음식점을 거리 곳곳에서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외국인의 거리인 이태원을 비롯해 압구정동, 청담동, 명동, 종로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나 맛 집들이 많이 집중된 곳에태국 음식점들을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한국 내 태국 음식점은 동남아 국가 중 베트남에 이어서 두 번째로 많이 개점되었다. 인터넷 검색 결과에 따르면 모두 27개 상호명(프랜차이즈)을 갖는 태국 음식점이 개점되었으며 매장수로는 42개다(베트남은 상호명 28개, 매점수 291개). 태국 음식이 붐을 이루는 원인들은 다양한다. 우선 최근 주 5일 근무로 외식업이 주목 받고, 웰빙이라는 건강 트렌드, 새로운 것을 추구 하는 신세대의 경향, 소비수준의 증가 등을 들 수 있겠다. 일본의 사례를 보면 국민소득 22,000달러를 기점으로 외국의 전통적 민속음식 소위 에스닉푸드(ethnic food) 레스토랑이 세력 확장의 원년으로 기록될 만큼 크게 성장했다.또 다른 이유는 태국 음식이콤하고 고소한 맛을 내는 볶은 국수 ‘팟 타이 꿍’을들 수 있다.이러한 태국음식의 인기 비결로는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는 다양한 맛과 향이 한 가지 요리에 담겨있다는 것. 더위를 이기기 위해 약 대신 사용하는 천연허브와 향신료가 많이 사용된다는 것도 한 요인이다. 기름지지 않아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세번째 비결이다. 튀기고 볶는 요리가 많지만 기름을 많이 사용하지 않는데다 소스와 허브가 오일을 제거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태국음식은 대부분이 담백하다는 것이다.태국정부의 적극적인 마케팅 공세도 태국음식이 붐을 이루게 되는 중요한 원인의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태국정부는 2006년 이래해외 주재 대사관을 통해 태국 레스토랑 인증제(타이 셀렉트 프로그램)를 운영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2007년 처음 실시된 태국 레스토랑인증제에 모두 9곳의 레스토랑이 신청, 이 중 3곳-쌀라 타이 잠실점, 타이 오키드 롯데백화점, 타이 오키드 이태원점-이 선정되었다.인증 받은 레스토랑은 영업기간이 6개월 이상이고 일류 태국요리사 혹은 최소 1년 이상의 경험 및 태국음식을 배운 보조주방장을 고용해야 하며, 태국에서 직수입한 식자재를 사용하는 등의 까다로운 기준에 부합하는 곳들 중에서 선정된다. 인증은 3년 동안 유효하며 인증된 레스토랑에는 타이 셀렉트 로고가 부착된다.음식 외의 태류현상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태국 식 마사지다. 최근 태국 마사지 숍을 찾는 이들이 부쩍 늘고 있으며 성별, 연령대별로도 다양해졌다. 중년 부부가 함께 찾아와 마사지를 받는 것도 전에 볼 수 없던 풍경 중 하나다. 하지만 이용객 중 상당수를 차지하는 것은 20대 후반부터 30대 후반까지의 직장인들이라고 한다. 마사지 선택의 폭도 넓어졌다. 최근에는 회사에서 직원 훈·포상을 위해서 마사지 쿠폰을 구입하는 사례도 생겨나고 있고 어버이날 효도 선물로도 마사지가 등장하고 있다. 뿐 만 아니라 회사들이 음주를 하던 단체회식 대신 동료들끼리 태국마사지를 받는 경우도 늘고, 연인들끼리 데이트장.
※ LG디스플레이1. 도전적인 목표를 정하고 열정적으로 일을 추진했던 경험을 구체적으로 기술해 주십시오.특히, 일을 추진해 나가는 데 있어서 어려웠던 점과 그 결과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기술 해 주시기 바랍니다.대학시절 기획부장을 역임하였을 때였습니다. 매년 9월 열리는 경영인의 밤은 그 해 집행부 마지막 행사이자 최대 행사였습니다. 기존과는 차별화되는 행사를 기획하고 싶었던 저는 그전까지 으레 행사진행을 위해 외부사회자를 섭외 했던 것이 행사비용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제가 직접행사를 진행하는 방안을 내놓았습니다. 전통파괴에 대한 선배들의 비난이 쇄도했고 집행부원들 마저 위험부담이 너무 크기에 반대의 여론이 높았습니다. 교수님, 동문 선배님, 재학생을 포함 500명 이상이 참석하는 큰 규모의 행사였던 만큼 완벽한 진행을 위해 이벤트 행사장을 찾아가 사회자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보며 배워 나갔습니다. 말투나 제스처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았고 수업이 끝난 강의실에서 후배들을 앉혀놓고 수많은 리허설을 했습니다. 저의 열정적인 모습에 시큰둥해 하던 집행부원들도 하나 둘씩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그 결과 경영인의 밤은 최초로 외부사회자 없이 순수하게 집행부의 힘으로 행사를 끝 마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예산절감의 효과와 함께 저희 다음 학번부터 이러한 전통이 계속 유지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저에게 기존과는 다른 변화를 주도하기 위해서는 많은 위험이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열정적으로 도전한다면 이루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얻게 된 자신감은 LG디스플레이에서도 큰 힘이 될 꺼라 생각합니다.2. 부족한 지식이나 역량, 또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던 사례를 기술 주십시오.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게 된 계기와 그 결과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기술 해 주시기 바랍니다.외국인이 길을 물어봤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황해 하는 저에게 그 외국인은 천천히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을 해주었지만 한마디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제 자신이 너무나도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영어회화의 중요성도 잘 알고 있었고 나름 영어 공부도 하고 있었지만 그 사건을 계기로 어학연수의 길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고민도 많았지만 영어는 단순히 취업의 문이 아닌 삶의 필수라 여겼기에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호주로 어학연수를 떠났습니다. 무작정 학원을 등록해 다니면서 문법부터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서투르더라도 계속 의사를 전달하라는 반 선생님의 말에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 눈만 마주치면 무조건 인사를 하거나 길을 물어보는 등 많은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처음엔 굉장히 어색하고 힘들었지만 그러한 과정들을 통해 어느새 간단한 대화는 기본이고 학원 내 자체 레벨 테스트에서 3달 사이에 가장 큰 폭의 오름을 보여 이달의 학생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호주에서의 어학연수는 제게 단순히 어학실력만 높여 준 것에서 벗어나 영어를 통해 부딪히면 된다는 도전정신까지 배우게 되는 좋은 경험 이였습니다.3. ( 학창 생활, 사회 경험 등을 통해 ) 상대의 어려움을 지나치지 않고 도와주었던 경험을기술해 주십시오. 당시의 상황 및 그 결과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기술해 주시기 바랍니다.군 전역 후 얼마 지나지 않을 때입니다. 집에 가는 길에 갑자기 동네 술집 앞에서 사람들의 싸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길래 호기심에 슬쩍 가봤더니 3~4명 정도되는 학생들 중 한 명이 어른의 목을 비틀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다들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 역시 무시하고 지나갈까 했지만 아무래도 이건 아니다 싶어서 그 상황을 말리게 되었습니다. 겨우 상황을 수습하고 집에 가려는데 어른들 일행 중 다른 한 분이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귤이 들어 있는 비닐 봉지를 건네주시면서 다들 구경만 하고 있는 상황에서 제 덕분에 위기를 모면하셨다면서 보기 드문 청년이라고 연거푸 고마움을 표현하셨습니다. 별일 아닌 듯 생각했지만 그분의 그런 말을 들으면서 왠지 모를 씁쓸함이 느껴졌습니다. 어른에 대한 공경이 얼마나 사라졌으면 이런 일에 이렇게 고마움을 표현할까 라는 생각에 처음에 그냥 무시할까라고 잠시나마 느끼었던 제 감정마저도 다시 한번 반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4. 상황을 보는 시각과 견해의 차이가 많았으나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원만한 결론을 도출하였던 경험을 기술해 주십시오.당시 의견 차이가 발생한 원인은 어떤 사항이었고 어떠한 방법으로 결론을 도출하였는지 중점적으로 기술해 주시기 바랍니다.대학3학년에 학과 축구동아리 회장을 맡았습니다. 지금껏 우리 팀은 선배는 공격, 후배는 수비를 했고 시합에서는 못하는 후배를 꾸짖기만 하였습니다. 메마른 팀의 분위기에 팀원들은 동아리 모임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후배 2명은 연락두절 상태였습니다. 회장으로서 협동심과 배려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우리 팀을 바꿔보고 싶었습니다. 우선 후배들을 한자리에 모아 불만사항을 귀담아 들었고, 나이를 떠나 실력으로 포지션을 정하기로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선배들을 설득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이제 곧 졸업이니 기회가 많은 후배들이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악순환이 반복되면 발전이 없는 팀이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선배들에게는 개개인을 찾아가서 우리의 이번 목표가 무엇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선후배를 떠나 실력위주의 선수선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선배들이 해주어야 할 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몇 번을 찾아 다니며 설득하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노력을 가상하게 생각한 듯 선배들의 마음이 조금씩 움직였습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우리 팀은 활발한 연습분위기와 열정적인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교내 축구대회에서 우승보다 값진 준우승이란 쾌거를 이루었고, 이는 팀원이 서로를 믿어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삼성혈 기행(三姓穴紀行)4월 7일, 화창한 봄 햇살을 한껏 맞으며 삼성혈로 향했다. 제주도의 시조들이 용출했다는 지혈들이 있는 곳, 초등학교 시절 현장학습 이후 제주도 문화유적지를 방문하는 것이 처음이라 어색하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하지만 해맑게 웃고 있는 햇살에 내 마음은 한껏 부풀었다. 지금까지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던 제주도 시조에 대해 확실하게 알고 오라는 제주도의 축복이 아니었는지. 이러한 날씨에 힘을 얻고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삼성혈을 향했다.나를 데려다 준 나의 자가용은 넓은 주차시설이 맘에 드는지 그 역시 몸이 상당히 가벼워 보였다. 뒤로 벚꽃나무들과 울창한 수목들을 등진 삼성혈의 입구를 보며 제주특별자치도가 제주도의 시조에 대한 예의를 갖춰 그에 대한 정비를 잘하고 있는 듯 했다.‘우리 할아버지께서 돈을 받으시겠어?’ (하지만 나는 고, 양, 부씨가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성큼성큼 삼성혈의 입구에 들어섰다. 하지만 표를 요구하는 삼성혈 관리자의 말에 순간 당황하여 빨개진 얼굴을 뒤로 하고 표를 구입하였다. 표를 사고 삼성혈에 들어가는 순간 전통양식의 게시판이 눈에 들어왔다. 삼성혈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었는데 우선 그것을 읽고 들어갔던 것이 도움이 많이 되었다.표를 손에 꼭 쥐고 나를 창피하게 했던 관리자 분에게 표를 제시하였다. 환하게 웃으며 좋은 시간 가지라는 말에 나의 창피함은 벚꽃과 함께 떨어지고 있었다. 우선 삼성혈이 눈에 들어왔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나무 들이 한 곳을 향하여 기이하게 굽혀져 있는 저 곳이 삼성혈이리라. 내 눈에 보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하지만 관람에는 순서가 있는 법. 관람순서라는 표지판이 나를 보려보며 한 곳씩 세세히 보고 가라고 말하였다. 나는 제주도민이어서, 이 곳에 몇 차례 온 적이 있어서(비록 초, 중학생 시절이었지만) 가졌던 알은체 하고 있는 내 자신을 버리고 보기로 하였다. 삼성혈 내부에서 눈에 가장 먼저 들어 온 것은 여러 개의 비석. 이것이 뭘까? 라는 궁금증을 가지고 관리자 분에게 물어보았다. 하지만 자신은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고 하였다. 이런. 분명 삼성혈은 제주도민만 찾는 곳이 아닐지라. 수학 여행단을 비롯한 국내 관광객들과 해외에서 온 관광객들이 만약 그것에 관해 물어보았을 때 그런 대답을 들었다면 삼성혈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을 가지게 될 것만 같았다. 다른 관리자 분을 찾아가 물어보니 삼성혈과 관련한 유공자 비석이라고 하였다. 그 비석이 성씨들을 보면 고, 양, 부. 더 물어볼 것이 있었지만 총총 걸음으로 사라지는 관리자분을 잡을 수 없어 혼자 고민을 하였다. 삼성혈과 관련한 유공자? 제주도에 위대한 인물이 나오지 않게 100개의 골을 99골로 만든 99골의 전설과 관련 있는 것인가? 관람이 끝나고 꼭 다시 물어보리라는 생각은 삼성혈과 전시관 등을 관람하며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다시금 삼성혈을 찾아 자세히 물어보리라.비석을 지나고 언덕으로 조금 걷자면 세월의 흔적을 지붕에 얹고 있는 정자를 보게 된다. 그의 이름은 모성각이라 불리운다. 다리는 아프지 않았지만 같이 간 친구의 간곡한 눈빛을 피하지 못하고 그 정자에 걸터앉았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곳에서 예전에 사진을 찍어 주었던 것 같았다. 전통 한복을 입은 한 여인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사진이 있는 받침대가 있었는데 그 아래 ‘사진(액자포함) ; 50,000원’ 라는 글이 보인다. 하루 입장관광객이 얼마 안 되는 곳인지 알았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나 보다.모성각을 지나면 삼성혈에 대하여 한 눈에 들여다 볼 수 있는 전시관이 나온다. 그 곳에 가는 길을 가만히 걷고 있나니 ‘좋은 곳에서는 잠시 핸드폰을 꺼두셔도 좋습니다.’라는 광고 문구를 생각나게 했다. 날개 달린 짐승들이 기분 좋아 노래하고 다리를 땅 깊은 곳에 숨겨둔 나무들이 편안한 그림자를 만들어 주는 그런 길! 나는 그 광고의 장면을 머릿속에 그리며 스스로 황홀하였다. 싱그러움이 가득한 숲 속에서 두 남자가 이야기하는 광경을 선하게 그려졌다. 내가 마치 그 중 한사람이 라도 된 듯 휘파람을 불며 한 층 가벼워진 발걸음을 서둘러 움직였다.전시관 속은 유적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과 삼성혈이 역사를 만화영화로 만들어 상영하는 영사실 두 곳으로 나뉘어 졌다. 어린이를 동반한 몇몇의 가족들이 보였다. 사투리를 구사하는 능력을 듣고 있자니 도민들이었다.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제주도의 역사에 대하여 자상하게 이야기해주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뿌듯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영상물에서 전달하는 내용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진행이 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전시관으로 유물 전시가 상당히 잘 되어 있으며 영상물을 통하여 쉽게 제주도의 역사를 알게 할 수 있게 구성되어진 것에 대하여 박수를 치며 도민, 한국인 관광객과 더불어 외국인 관광객까지도 이러한 흥미로운 제주의 신화, 역사에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을 남겨두고 산책로를 따라 걷기 시작하였다.산책로를 따라 걷고 있으면 벚꽃과 어울려 삼신인의 위패가 있다는 삼성전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이 숨결이 주위를 감싸는 듯 하여 들뜬 발걸음은 차분해지기까지 하였다. 삼성전 입구에 들어서면 그들을 위한 분양소가 준비되어 있는데 한 주먹에 향을 가득 쥐고 절을 하였다. 당신들이 세운 제주도의 큰 빛이 되고자 하니 많은 도움을 달라는 부탁 역시 잊지 않았다.한층 경건해진 가슴을 앞세우며 다음 목적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분향소 바로 옆에 전사청, 수직사, 숭보당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각각 제향에 관한 일을 맡은 곳, 삼성혈을 지키는 사람이 살고 있는 곳, 예전 선비들이 학문을 갈고 닦던 곳이라는 설명이 귀에 들어왔다. 삼성혈이 예전과는 달리 정말 넓어진 느낌을 받았다. 어릴 때지만 내가 생각한 삼성혈은 단지 혈자리만 있는 그 혈을 향하여 나무들이 굽어있는 곳 정도였는데 이 곳에서 학문을 닦고 제향을 올리며 이 곳을 지키는 사람까지 있다는 사실이 매우 놀라웠다.
1. 김부식에 대하여 대게는 보수적 사대주의자로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올바른 이해를 논리적으로 서술하시오.‘지금의 학사대부가 ... 진한역대의 사기에 대하여는 자세히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우리나라의 사실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알지 못하니 매우 유감된 일이다.’위는 김부식의 진삼국사기표의 일부분이다. 삼국사기에는‘중국의 문헌에는 우리의 역사를 지나치게 간략히 서술하고 있어 다시 서술해야 하며 왕과 신하, 백성의 잘잘못을 드러내어 후대에 교훈으로 삼고자 한다.’라는 목적이 기록되어 있다.김부식에 관한 논란은 아직도 끊이지 않는다. 대게는 보수적 사대주의자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주장은 단채 신채호 선생이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을 묘청의 서경천도사건으로 평하면서 김부식은 사대주의자라는 평을 내린 후부터 우선시 되었다. 현재에도 국사교과서에는 이러한 주장이 담겨있다. 김부식은 유교사상에 바탕을 둔 보수적 사대주의자로, 묘청을 풍수지리사상에 바탕을 둔 개혁적 자주주의자로 기술되어 있다.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다소 객관적인 문제가 있어 보인다. 우선 그 당시 시대상황을 살펴보도록 하자. 김부식과 묘청, 그리고 왕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그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인종은 15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해 이자겸의 난 등을 겪으며 어지러운 정국을 겪는다. 이러한 이자겸의 난은 척춘경을 이용하여 일단 진압하였으나 국내외 정세는 극도로 불안하였다. 안으로는 이자겸의 난으로 궁궐이 불타오르고 왕권이 흔들리고 있었으며 밖으로는 금의 압력을 당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시기에 서경출신인 승려 묘청은 풍수지리설에 의거, 고려가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은 수도인 개경의 지덕이 쇠해졌기 때문이라며(지덕쇠왕설) 천도를 주장한다. 이에 인종은 서경천도를 결심하지만 곧 금과 송의 전쟁으로 대외정세는 안정국면으로 변하고 대내상황도 이자겸과 척춘경이 제거됨에 따라 왕권이 강화되었다. 또한 묘청의 지나친 농간과 유신들의 강경한 반대와 민심마저 흉흉해져 인종은 서경 천도 중주적이라 판단하기는 힘이 든다. 이에 전통적인 측면에서 살펴보아도 9세기 후반에 전래된 풍수지리설 보다 4세기 후반에 전래된 유교사상이 더 전통적이라 하겠다. 김부식은 사대주의에 빠져 고려의 정체성을 버리려 했던 것이 아니라 관료로서 국정을 안정시키고 정치질서를 확립하는데 유교이념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 사서에는 통달해 있으면서 정작 우리나라의 일을 잘 알지 못하며 책을 중국의 사서는 너무 간략하고 우리의 고기는 문자가 거칠어 삼국의 사실을 다 싣지 못하였으며 책을 간장병 마개로 쓰지는 말아 달라는 임금께 바치는 글이 있다. 이러한 부분은 김부식의 민족적 자주의식을 내보인 말이다. 또한 삼국사기 곳곳에는 문화의 상대성을 인정하려 한 흔적이 보인다.결론적으로 나는 김부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본다. 그는 삼국사기를 통해 국가의 자치자강을 토대로 이웃나라와의 평화공존을 추구하고 안으로 왕권강화 추구하려고 하였다. 물론 묘청을 비판하고 김부식을 지지하는, 어느 한쪽을 지지하는 마음으로 역사를 대하는 것은 아니다. 객관적 시각에서 다양성을 유지하며 역사를 대하는 자세를 가지고 김부식을 판단하여 본다면 그는 사대주의자라 하기 보다는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유교적 인물에 더욱 가까웠다고 보인다.2. 현재 학교나 가정에서 행해지는 체벌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올바른 방안을 모색하고 논리적으로 서술하시오.교사가 책을 학생 얼굴에 던진 일. 교사가 2백 대를 체벌해서 학생이 입원한 일. 교사가 학생의 뺨을 때려서 전치 4주가 나온 일 등, 현재 학교에서는 ‘과잉체벌’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가정의 경우에도 나타난다. 아동학대 수준으로 생각될 만한 체벌 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법적으로는 학교나 가정에서 교육적으로 불가피한 경우에 한해서 사회 통념에 맞게 체벌을 할 수 있도록 체벌이 제한되어 있지만 이 제한의 성격은 극히 모호하기 때문에 심한 체벌들이 사랑이 매로 둔갑하여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체벌은 교육적인 목적의 체벌이라기 사례가 많았다. 위의 태형과 장형의 집행은 죄수를 형대에 묶은 다음 하의를 내리고 둔부를 노출시켜 대수를 세어가면서 집행했는데 부녀자일 경우 옷을 벗기지 않고 그 위에 물을 뿌려 집행하였다. 또한 죄의 성격에 따라 발바닥, 허벅지, 종아리를 때리는 형태로 각기 부위를 달리 하여 집행되었다. 하멜보고서에 따르면 대정군인이 하멜일행의 물건을 훔쳐 발바닥 30~40대를 맞았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절도죄는 무척 무거운 죄로 그 범죄자의 발가락이 떨어져 나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이러한 집행의 남용을 막고자 각 곤장들의 사용법과 크기를 정해 놓았으며 집행방법을 엄격히 지켰다. 셋째, 도형이란 징역형으로 일정 기간동안 관아에 구금하여 두고 노역에 종사시키는 형태였다. 넷째, 유형이란 지은 죄가 크지만 사형까지 시키기엔 힘든 죄에 시행했던 것으로 임금이 있는 한양과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유배를 받을수록 그 죄인의 죄는 무거웠다고 한다. 즉 제주도 대정은 가장 큰 형벌이었으며 또한 그곳에서의 생활생도도 죄의 경중에 따라 달라졌다. 마지막으로 사형은 오늘날에 존재하는 사형과 같다. 즉, 죄를 지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며 사람을 죽인 살인죄나 반란 또는 그에 준하는 단체의 우두머리에 대한 형벌이었다. 사형은 형벌 중에서 극형에 해당하는 것으로 교형(목을 졸라 죽이는 것), 참형(목을 잘라 죽이는 것), 사약 등의 형태로 집행되었다. 이 사형을 집행하는 망나니는 항상 술에 취해 있어 참형 시 한번에 이루어지지 않아 느끼는 범죄자의 고통을 덜해주려 뒷돈을 얹어 한 칼에 베어달라는 부탁도 받았다.우리조상들의 체벌의 모습은 태형의 형태와 비슷하였지만 확실한 구분이 있었다. 서당의 선생님들의 손에는 항상 회초리가 들려져있었고 이는 교권이 상징이었다. 하지만 종아리로 체벌에 대한 집행부위가 일정하였으며 김홍도의 서당도에 나타난 체벌을 한 서당의 훈장님에 대하여 적개적인 눈빛보다는 당연하다는 주변의 인식은 현재 체벌교사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 찬 현대의 교실과 사뭇의 풍속화는 18세기 후반 조선후기 당시의 서민의 생활을 고증하는 사료로 쓰일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그러면 생활 주변 속에서 주제를 포착하고 이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김홍도의 그림에서 당시의 시대상이 어떻게 그렸졌는지 살펴보도록 하자.첫째, 산업적인 측면이다. 그 당시 우리의 경제구조는 농업을 기반으로 가내수공업과 상업이 발달하고 있던 시기였다. 좁은 경작면적으로 인해 2년작을 해야 하는 밀보다는 경지효용율이 높은 벼를 생산하던 그 당시 농업의 형태와 가내수공업이 발달로 행상, 보부상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김홍도의 그림 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을 더욱 자세히 살펴보면 소작농과 지주로 구성되는 당시의 농업 형태를 알 우 있다. 6명이 일하고 있는 옆에서 조는 듯한 자세로 갓을 삐딱하게 쓰고 쉬고 있다. 이는 지주 대신 소작농을 관리하는 마름이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둘째, 식문화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식사 형태는 같이 모여서 먹지만 자기 그릇을 두는 형태였다. 이는 김홍도의 을 통하여 더욱 자세히 알아보자. 당시 아침과 저녁을 주 식사로 섭취하고 점심은 가볍게 먹었지만 농번기철를 맞아 다같이 모여 맛있게 식사하는 모습이 담겨져 있다. 다른 그림 에서도 같이 먹지만 각자 자신의 그릇으로 식사를 하는 독상문화가 나타나 있다. 또한 당시 담재는 약초의 한 형태로 담배를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폈다. 에 그러한 사실이 보인다. 셋째, 주거형태이다, 그 당시 가옥은 초가와 기와의 형태로 나누어졌는데 이는 각 그림에 나타난 초가주막과 기와대궐 등을 보면서 알 수 있다. 넷째, 놀이문화이다. 그 당시 씨름은 성인남자들만의 놀이로 에도 그러한 사실이 보인다. 씨름도를 자세히 보면 두 사람이 맞붙어 씨름을 하고 구경꾼들이 빙 둘러서 구경을 하고 있는 광경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대부분이 성인남자이다. 하지만 곧 승부가 날 것 같은 흥미진진한 순간인데도 엿판을 맨 떠꺼머리총각은 아랑곳 않고 장사에 열중이다. 또한 궁금증이 많은 아이들 몇몇이 삐지고 구경하는 모서 만들어진 것이오.”고종이 고려청자를 보고 이토 히로무비에게 물어봤던 말이다. 왜 고종은 고려시대의 청자를 알아보지 못하였을까? 그것들은 자신의 조상들의 묘에 고이 간직해져있다 일본의 도굴군에 의하여 조선시대 말에나 세상의 빛을 본 것이니 어찌 고종이 알 수 있었겠는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된 후 62년이나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친일잔재 청산 문제가 우리 사회의 주요한 과제로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것들 중 하나가 우리의 문화재이다. 한국의 문화재는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전 세계 구석구석에 놓여있다.우리가 월드컵 개최에 취해있을 때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지는 ‘잃어버린 한국의 문화유산’이라는 제목으로 일제의 한국 문화재 약탈 실상과 반환 문제 등에 관한 특집 기사를 실었다. 관심을 가져야 할 본인들은 알지 못한 채 세계적인 시간주간지가 우리의 문화재 약탈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고맙지만 부끄러운 일이다. 타임지 역시 한국은 약탈 문화재 반환에 무관심하다고 말했다. 일본은 일제강점기 때 많은 조상들의 묘가 파헤쳐지고 문화재를 도굴, 약탈해 갔다. 이러한 사례에 대하여 살펴보고 우리가 문화재 반환을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알아보자. 일제강점기에 자행된 문화재 피해사례를 국내 여러 곳곳에 쉽게 찾을 수 있다.이러한 피해사례를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본다. 첫째, 문화재는 있지만 완전하지 못하고 형태가 훼손되거나 파괴된 것들이 있다. 한송사 석좌보살좌상에의 이마에는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고 어디론가 도둑맞았다. 다보탑을 지키고 있어야 할 4개의 돌사자상은 현재 1개 밖에 전해지고 있지 않다. 이러한 현실은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 석굴암 역시 마찬가지이다. 석굴암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인조석굴로 과학적인 구조와 아름다운 터치를 자랑한다. 하지만 여기에 있어야할 오층석탑 및 불상은 지금은 찾아 볼 수 없다. 둘째, 한국에는 있지만 제자리에 놓여지지 못하고 이동된 형태가 있다. 이는 경천사 10층 석탑으로 반환이 되었지만 경천사는 개성이 있는 .
‘왜 관심을 가지고 보지 않았던 것일까?’나는 재작년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북촌 초등학교 및 여러 4.3 유적지를 기행 했던 경험이 있었지만 이 비디오를 보기 이전까지 4.3에 대한 원인과 발생과정을 자세히 알지 못하였다. 지금까지 4.3을 그저 막연하게 미군정에 의해 우리 도민들이 학살되었던 사건이라고 알고 있었다. 비디오가 끝나고 4.3 유적지를 기행하고도 4.3에 대하여 자료를 검색하지 않았던 내 스스로 자책하였다. 그 원인과 경과 과정을 보면서 스스로 뜨거운 피가 역류하는 느낌이 들었다. 4.3에 대하여 찾아보고 비디오에 내용을 추가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보았다.4.3은 1947년 3월 1일 관덕정 마당에서 3·1절 28돌 기념집회에서 진정한 해방을 꿈꾸며 시위를 한 군종에게 경찰이 총을 쏘아 6명의 희생자에서 시작되었다. 이에 반발하여 제주도민은 3월 5일 '제주도 3·1사건대책 남로당 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제주도청을 시발로 민·관합동 총파업이 단행되었다. 13일까지 166개 기관단체에서 41,211명이 파업에 가세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3월 7일 계엄령을 선포, 3월 14일 응원 경찰과 서북청년단등 극우반공청년단체를 파견하여 파업 주도 세력 등 약 2,500명을 무더기로 검거하고 고문한 다음 이 중 250여 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로 인해 총파업은 3월 18일 종식되었지만 미군정의 강경책이 지속되었고 분노를 느낀 도민들은 극우파의 암살을 요구하는 전단을 살포하면서 미군 축출, 경찰 타도 등을 외쳤다. 이에 미군정은 8.15를 기하여 다시 도민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를 단행하여 모두 투옥하였다. 이를 피하기 위해 수십 명의 도민 지도자들이 한라산으로 입산하기 시작하여 점차 많은 수의 도민들이 한라산으로 입산하였다.한편 미국은 남쪽만의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였고 유엔(UN)은 유엔 감시하의 남, 북한 총선거의 실시를 결정하게 된다. 이에 좌파세력은 남한 단독선거에 반대해 전국적으로 '2.7투쟁'을 전개하였으며, 미군정은 당시 반미감정이 높았던 제주 도민에 대해 집중적인 공세를 가했다. 이후 마침내 1948년 4월 3일 자정 무장 항쟁이 시작되었다. 제주 도민의 무장전위대인 '자위대' 5백여 명과 그 동조자1천여 명은 도내 20여 개의 경찰지서 중 10여 개의 경찰지서를 습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숙사 및 국민회, 독립촉성회, 대한청년단등 우익단체의 요인과 관공리의 집을 공격하였다. 초기 공세에 성공을 거둔 무장세력은 곧 도민과의 협력체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조직개편을 단행하여 '지위대'를 해체하고 각 면에서 30명씩 선발하여 연대와 소대로 구분 편성된 '인민유격대'를 조직하였다. 위협을 느낀 미군정은 9연대에 진압작전 출동을 명령하는 등 병력을 증강하였고 부산 등 타 도로부터 차출한 1,700여 명의 경찰을 파견하였다. 또 제9연대장 김익렬에게 강경 진압을 요구했지만 김익렬의 거부로 유격대와의 협상을 명령했다. 그 결과 4월 28일 김익렬과 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이 대좌하여 72시간 내 전투중지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그러나 미 군정장관딘(W. Dean)은 평화협상을 거부하였고 미군정은 방화사건 등 제주도 내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련의 사건들을 유격대의 소행이라고 조작하여 사건의 책임을 9연대와 김익렬에게 물어 김익렬을 해임하고 강경파인 박진경을 기용하여 강경 작전을 준비했다. 이에 대해 유격대와 제주도민들은 5. 10총선거를 거부하기 위한 투쟁을 시작하였다. 이 결과로 제주도에서의 5.10총선거는 3개 선거구중 두 곳이 무효화되었다. 이에 정부와 미국은 1949년 3월 2일 제주도지구 전투 사령부를 설치하고, 김용주대령의 독립 유격대대를 투입하여 유격대의 잔존 세력을 일소하기 위한 최후의 총공세를 감행한다. 이 결과로 3윌 12일부터 4월 12일간의 한달 동안 2,345명의 '유격대'가 사상하였고 1,608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했다.5.10총선거가 실시되자 도내 각지에서 투표 거부사태가 발생하여 전국 200개 선거구 가운데 제주도 북제주군갑구(투표율 43%), 북제주군 을구(투표율 46.5%)등 2개 선거구만 과반수 투표 미달 사태를 초래했다. 이때 전국투표율이 94.9%였으나 제주도 전체 투표율은 62.8%에 그쳤다. 선거후딘 제주도 군정장관은 섬의 봉쇄를 위해 2척의 구축함과 전투기를 제주 상공에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미 군함 '크레이크'호 등이 출동, 북부 해안을 봉쇄하였다. 5월20일엔 9연대 소속 군인 41명 모슬포부대에서 무기와 장비ㆍ탄약 5,600발을 갖고 탈영, 무장대에 가담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후 육ㆍ해 경비대가 제주지역에서 토벌작전을 전개하였으며, 미군정은 탈영사건 일으킨 9연대 해체하고 제주도 토벌 부대로 11연대를 재편하였다. 이해 8월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정부수립 이후에도 군 작전지휘권은 미군에 귀속되어 있었고, 수도관구경찰청 소속 경찰관800명이 제주로 파견되었다. 한편 여수 주둔 제14연대 1개 대대 제주도에 증파 명령이 있었으나 여수 14연대 반란사건이 발생하였으며, 11월 군경토벌대가 조천면 교래리 주민30명 총살을 시작으로 중산간 마을에 대해 초토화 작전전개하였다. 이 초토화 작전은 3개월가량 지속되며 대부분의 희생사건이 이 무렵 발생하였다. 11월17일 이승만 대통령이 제주도에 계엄을 선포하였으며, 12월31일 계엄령이 해제될 때까지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후 54년까지 제주도에서는 무장토벌대와 인민유격대의 충돌이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무장대에 의해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비디오에서 이승만이 계엄령 선포 시 “제주도를 불태워버려라, 제주도 없어도 대한민국 민주주의 정부는 수립한다.”라는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이 흘러나올 때는 순간 나는 뭔가 가슴속에 뜨거움을 느꼈다. 화가 난 감정과는 다른 어떤 것이었다. 그 후 아직도 정부에 대하여 공식적인 사과를 받지 못하였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랐다. 하지만 이 비디오의 제작시기는 노무현 정권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2003년 10월말 노무현대통령이 제주 4·3사건과 관련해 사건 발생 후 처음으로 국가 차원의 잘못을 공식 사과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 당시 제주사회 뿐만 아니라 저자의 아버지조차 매우 기뻐했다는 사실을 떠올렸기 때문이다.또한 비디오에서 ‘아름다운 학살터, 처형장’ 이라는 말이 나온다. 제주 제1의 명승지로 꼽히는 성산일출봉 및 각종 오름, 해수욕장이 제주도민의 학살터로 이용되었다는 사실에 분통이 터졌다. 이러한 학살은 전 세계로 유래없는 한 지역을 초토화 시키는 ‘초토화작전’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것 또한 그 당시 참상을 말해준다. 아흔 살이 넘는 노인도, 아직 돌도 지나지 않은 젖먹이에게 까지 총구를 향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과연 인간이었는가라는 의심도 들게 하였다. 그들은 학살초기에 ‘메이데이’라는 조작적인 기록영화로 학살을 정당화하는 행위도 보였다. 또한 초토화 작전을 거부한 김익렬 연대장을 해임하여 새로운 연대장을 부임시켜 학살을 진행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자신들의 의도대로 5.10 총선이 이루어지지 않자 본격적인 학살을 하는 모습들은 일본 식민지 시대의 정부와 다를 것이 없는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