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순강화(南巡讲话)에담긴 의의(意义)학번:11973494이름:황연권과목:중국현대경제론이정진 교수님들어가는 말2001년부터 2004년까지 개인적인 사정으로 해마다 심천(深圳)에 머물 기회가 있었다. 작년의 심천의 인상은 홍콩, 상해와 더불어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세계일류도시들이 갖추고 있는 조건을 충분히 충족하고도 남았다. 세계적 호텔체인은 없는게 없었으며, 거리곳곳에 건축중인 초고층 아파트와 빌딩들, 그리고 서울에서조차 보기 힘든 초대형,예술적 감각이 스며있는 인테리어의 섹스숍, 거리는 고급 외제차들로 가득차 있었다. 3년전과 비할 수 없는 굉장한 변화가 있었다. 2001년에 처음 갔을 때, 번잡한 거리에서 등소평의 인자한 모습이 담긴 초대형 그림을 본 적이 있다. 그 당시 나는 중국에 처음 가봤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알려진 등소평의 초대형 그림은 도시마다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심천의 그 그림은 다 이유가 있던 것이었다. 심천의 발전상은 모두 그의 계획의 일환으로 진행된 프로젝트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2004년 여름방학때 머물렀던 북경은 8월 22일 등소평(邓小平)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추모열기가 대단했다. 거리 곳곳은 등소평 100주년을 기념한 행사의 홍보에 관한 플랜카드로 가득했고, 중국혁명박물관에는 그에 관한 전시품과 업적을 대대적으로 전시하고 있었다. 8월 22일 거행된 인민대회당에서의 기념식에는 국가주석인 호금도(胡錦濤)를 비롯하여 강택민(江澤民), 온가보(温家宝)등 지도부 모두가 참석하여 거국적으로 진행되었다. ‘등소평’이라는 영화도 개봉되었으며, 관영 언론들은 매일 ‘백년소평’등 등소평 관련 특집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당시 나는 북경을 휩쓸고 있는 그 열기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서론현재 중국에서 다른 지도자가 아닌 그가 이처럼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이유는 현 중국지도부와 개혁개방의 필요성에 의한 것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고 본다. 사실 내용상으로는 평상시의 그의 통치철학을 정리하여 발표한 정도로 받아들인다 해도 무리가 없었을 남순강화가 어떠한 이유로 그처럼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이후의 정치적 일정이 이의 지지를 결의 하는 것으로 짜여져 있었는가 하는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본론1)개관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 지도부가 개혁개방 정책에서 상당히 후퇴하는 모습을 보이자, 등소평이 1992년 1월과 2월에 걸쳐 경제가 가장 발달한 심천, 주해, 상해를 돌며 과감한 개혁개방 정책을 중국 정부에 촉구하면서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것이 바로 남순강화이다. 등소평은 여행 중 다양한 발언을 했다. 그 중 “개혁개방은 마음을 크게 열어 결연하게 시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전족한 여자 같아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라는 말은 시원스럽게 개혁개방을 향해 전진하자는 결단에 찬 그의 태도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동시에 보수파와 아무런 실행의 결과가 없는 형식주의를 격하게 비판하였다. 겉으로는 개혁개방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지도자를 비판한 것이다. 이렇게 등소평이 사회주의시장경제 체제 건립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지방간부들을 격려함으로써 시장경제 도입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밝힌 사건이다.2)배경남순강화에서 보여진 그의 행보는 당시 중국사회가 갖고 있던 고민의 산물이었다. 1992년 당시 중국은 국내외적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1989년 천안문 사태의 후유증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중국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뚜렷한 목표가 없는 상태였다. 해외언론은 연일 중국의 민주화 열기를 전하고, 심지어 중국의 분열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그러나 중국 지도부는 개혁개방정책 속에서도 정확하게 인민에게 방향을 제시하지 못했다. 물론 변화의 초기에는 개혁개방이라는 구호 하나면 충분했다. 그 말은 곧 지긋지긋한 문화혁명기의 조건 없는 계급투쟁론과 개인숭배에 대한 반대를 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급속한 사회적 변화는 인민에게 새로운 지향점을 요구했다. 경제개발을 위한 시장의 논리와 기존 사회주의 사이의 괴리는, 곧 부(富)를 원하는 인민의 요구와 기존의 가치관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에 대한 갈등이었다. 이 시기의 혼란은 결국 정치적으로 해결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등소평은 자신의 생애 최후의 임무인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을 위해 남순강화를 강행했던 것이다.3)전개남순강화의 주요 내용은 '삼개유리우(三個有利于)표준'으로 집약된다. 당시 중국이 처한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성사성자(姓社姓资)논쟁, 즉 당시 중국이 걷는 길이 사회주의의 길이냐, 자본주의의 길이냐의 논쟁이 아니라 사회주의 생산력의 발전과 사회주의 국가의 종합국력의 강화, 그리고 인민생활수준의 제고의 세 가지 방면에서 어떻게 우위를 차지할 것이냐가 중요하다는 내용이다. 사실 성자성자논쟁과 같은 사상적 혼란을 제어할 힘이 당시 중국 지도부에 없었다. 천안문 사태의 여파로 조자양(趙紫陽)이 실각한 뒤 들어선 허약한 강택민(江澤民) 체제에 이 문제의 속시원한 해결을 바란다는 건 무리였다. 결국 이 문제 해결을 위여여 등소평이 나선 것이다. 그는 이 강화를 당시 경제발전이 가장 활발한 곳인 경제특구에서 발표함으로써 경제발전을 요구하는 많은 인민의 기대에 부합하며 사회주의 강국의 미래를 강조하는 노련미를 보였다.4)결과등소평의 남순강화는 당시까지 지식인 사이에서 만연하여 중국의 파벌싸움을 심화시킬 위기에 있던 성사성자라는 비생산적 논쟁을 종식시킴과 동시에 계획경제 숭배자들에게도 일침을 가하는 이중효과를 거두며 중국의 개혁개방에 날개를 달아준 것이다. 이러한 덩의 성과를 순발력 있게 체계화한 것이 바로 사회주의 시장경제 이론이다. 중국공산당 제14차 당 대회에서 공식적인 중국의 개혁목표로 확정한 이 이론을 정확히 표기하면 중국특색 사회주의 초급단계로서의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다. 중국특색사회주의란 말 그대로 중국 현실에 맞는 중국만의 고유한 사회주의를 뜻한다. 이러한 초급단계 사회주의에서는 일반적 사회주의 이론을 구현할 수 없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자본주의적 요소들 또는 시장기제들을 도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중국특색 사회주의 초급단계이론의 핵심이다. 이러한 초급단계에서 일반적 사회주의로 넘어가기 위한 체제 모델로 제시한 것이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이며, 이것의 주요 기준이 삼개유리우 표준인 셈이다. 이러한 일련의 이론 체계를 중국에서는 등소평 이론이라고 불리게 되었다.5)결론중국이 구 소련의 실패를 겪지 않고 성공적으로 자본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등소평이라는 위대한 정치가와 그를 뒷받침하는 뛰어난 경제이론가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상의 혼란기에 소모적 갈등을 종식하고 중국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했으며 이론가들은 일관성있는 정책으로 그것을 현실화했다. 등소평의 남순강화는 당시까지 만연하던 성사성자 논쟁에 종지부를 찍는 동시에 계획경제를 주장하던 사람들의 사상에 실질적인 행동을 촉구하며 중국의 개혁개방의 의지를 확고히 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조자양의 개혁이 인플레 등의 부작용으로 좌절하여 경제 조정정책이 실시되었으며, 천안문 사태 이후에는 사상통제가 강화되는등 과거 3년동안 정치면에서 뿐만 아니라 경제면에서도 마치 개혁이 멈추어 버린듯한 침체된 분위기에서 강력한 개혁개방 추진을 재천명한 최고실력자의 강화발표가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러한 조치는 중국의 정치관행상 곧이어 권력개편이 이루어질 것을 예고하는 것일 뿐아니라 개인의 생활면에서도 어느정도의 변화가 초래될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등소평은 그가 제시해 왔던 개혁에 대한 비젼이나 그 추진방향이 중국의 현실에서 최선의 선택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90을 바라보는 나이에 노구를 이끌고 남순을 강행해 이를 당과 인민에게 다시한번 생애 마지막으로 주지시키고 싶었던 것이다.참고문헌장경섭외(1993), 《현대중국사회의 이해》, 서울문화연구소박두복외(1993), 《중국의 정치와 경제》, 집문당김영화(1995), 《등소평 리더십과 중국의 미래》, 문원서진영(1997), 《현대중국정치론》, 나남김홍수(1998), 《현대중국의 권력분산》, 세종문응호(1996), 《13억인의 미래》, 당대총서가미무라 고지(2002), 《중국 권력핵심》, 청어람미디어찰리 호어(2002), 《천안문으로 가는 길》, 책갈피
Ⅰ.서론1. 하회탈의 역사와 보존2. 하회탈의 신비성Ⅱ. 본론1. 하회탈읜 전설2. 하회탈의 제작과정3. 하회탈의 특징 및 종류3-1. 하회탈의 전반적인 특징3-2. 하회탈의 종류 및 각각의 특징Ⅲ. 결론1.하회탈이 그리는 사회상2. 하회탈은 신비인가 문화인가*참고문헌「안동문화의 수수께끼」 안동문화 연구소 편.http://www.tal.or.kr/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1id=6&dir_id=6&docid=80107http://members.nate.com/hyhan87/han/tjing.htmhttp://members.nate.comhttp://myhome.naver.com/Ⅰ. 서론1. 하회탈의 역사와 보존하회탈은 오랜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적어도 하회탈은 가면극의 분장도구로 쓰인 탈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된 탈일 것이다. 그 역사가 현재 고려 중엽까지 소급되는 까닭에 700~800년 동안 이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다른 고장의 탈, 이를테면 봉산탈 이나 양주별산대탈 또는 고성 오광대탈 등은 역사가 그리 오래지 않다. 탈놀이를 한 다음 탈을 그대로 두면 뒤탈이 난다고 해서 불에 살라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회탈은 신의 탈로 여겨서 신성하게 섬겨왔으므로, 항상 탈 궤에 넣어서 동사 (마을의 신을 모시는 사당)에 보관하고 아무나 함부로 범접할 수 없도록 한다. 마을 사람들은 곧잘 ?아무 때 아무개가 함부로 탈에 손을 대었다가 혼절하여 쓰러졌다? 거나, 또는 ?피를 토하여 그 자리에서 죽었다? 는 말을 하면서 외지 사람들의 접근을 금지한다. 하회탈이 최근까지 전승되고 있으면서도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이러한 금기 때문이다.일제 때 탈을 보관하던 동사에 불일 났을 때, ?탈이 불타버리면 서낭님의 노여움을 어찌 할까? 하고 안타까워하다가 누군가 불 속에 뛰어 들어가서 탈이 든 상자를 안고 나와 무사할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신앙의 힘이 하회탈을 지금껏 보존하는 전승력의 구실을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국보 탈인 동시에 세계의 문화유산으로서 국제적인 탈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러한 하회탈은 나무를 깎아 만든 훌륭한 조각품이자 하회탈춤이라고 하는 민속극의 분장도구 구실을 하는 연극탈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회탈의 조형미를 미학적으로 주목하되, 민속극으로서 하회탈춤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인물의 성격창조에 이바지하는 분장도구라는 사실에 기초를 둘 것이다. 하회탈춤과 같은 민속극은 예사 연극과 달리 민중의 처지에서 전통적인 사회구조의 모순들을 드러내고 풍자하는 내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자연히 사회사적 시각에서 하회탈이 반영하고 있는 세계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하회탈이 고려중기의 탈로서 지금까지 전승되어 국보 구실을 하는 데에는 제의적 주술물로서 신성성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의적 탈로서 하회탈의 신성성 또는 역사성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모든 것이 구체적으로 밝혀져야 하회탈의 실상이 드러날 수 있고, 하회탈을 국보답게 하는 신비성이 해명될 것이다.Ⅱ. 본론1. 하회탈의 전설하회탈이 만들어진 시기는 대략 고려시대 중엽으로 추정된다. 당시 하회마을엔 허씨들이 집성을 이루어 살고 있었는데, 그때 마을에 재앙이 들어 사람의 힘으론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때 마을에 살던 허 도령이라는 사람의 꿈에 신이 나타나 ??탈을 12개 만들어 그것을 쓰고 굿을 하면 재앙이 물러갈 것??이라고 계시를 하며 ??탈이 모두 만들어 질 때까지 누구도 들여다보게 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를 일러 주었다고 한다. 꿈속에서 계시를 받은 허 도령은 그때부터 목욕 재개하고 문밖엔 금줄을 치고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근 채 두문불출하며 오랜 시간 동안 탈 제작에 몰두하고 있었다 한다. 그때 같은 마을에 사는 허 도령을 사모하던 처녀가 허 도령을 너무나 그리워한 나머지 금줄을 넘어 허 도령이 탈을 만드는 방문의 구멍을 뚫고 들여다보았다 한다. "누구도 들여다보게 해선 안 된다"는 신의 금기가 깨어지는 순간 허 도령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면서 죽었다고 하며 그, 백정탈은 턱을 움직여 다양한 표정을 연출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초랭이, 이매는 좌우비대칭의 수법을 이용해 살아 움직이는 표정을 효과적으로 나타냈다. 이러한 형태는 사실주의적인 기법에 바탕을 둔 것으로서 좌우 비대칭적인 기법을 볼 때 11?12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2. 하회탈의 제작과정① 오리나무를 베어 제재소에서 통나무를 세로로 l0cm두께로 켠다. ( 각시는 12cm 두께 )② 켠 나무를 통풍이 잘 되는 음지에서 약 2년 정도 건조시킨다.③ 건조된 나무에 탈본 ( 합판으로 만든 탈의 얼굴 윤곽 )을 대고 연필로 외곽선을 그린다.④ 외곽선을 남겨놓고 톱과 끌로 나무를 깎아 낸다.⑤ 우선 탈의 면을 파낸 선에 따라 뒷면부터 끌로 깎아낸다.탈의 앞면부터 깎아내면 나중에 나무를 뒤집어서 뒷면을 파낼 때 앞면이 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탈의 뒷면을 앞면과 마찬가지로 탈의 요철에 따라 잘 파내야지만, 탈을 썼을 때 놀이꾼의 얼굴과 마찰하는 부분이 없게된다.⑥ 다시 나무의 앞면을 놓고 좌우를 먼저 끌로 깎아낸다.⑦ 코의 길이만큼 남겨놓고 나머지 아래 위의 부분을 톱으로 잘라낸다.⑧ 코 부분을 만든다.⑨ 나무에 눈, 눈썹 등 얼굴 각 부위의 윤곽선을 그리고 끌로 깍아 나간다.⑩ 눈과 콧구멍을 뚫고 주름을 넣어 탈의 얼굴 형상을 완전하게 조각한다.⑪ 한지를 조각내어 탈의 전면에 고르게 바른다. 풀은 화학접착제(오공본드)를 사용한다.⑫ 탈의 채색은 물감?황토가루?화학접착제를 섞어서 붓으로 칠한 다. 처음에 황색물감?황토가루?화학접착제를 섞어서 한 번 칠하고 하루 동안 말린다. 다시 한 번 황색을 칠한 후 하루 동안 말린다. 잘 마른 후 물수건으로 탈의 전면을 닦는다. 그러면 붓자국과 거칠게 칠해진 부분이 부드러워진다. 다음에는 주황색 물감?황토가루?접착제를 섞어 탈 위에 한 번 칠하고 하루 동안 말린다. 다시 그 위에 검은색물감?황토가루?접착제를 섞어 칠하 고 옻칠로 마감한다.⑬ 턱이 떨어져 있는 양반?선비 ?백정 ?중의 탈은 따로 턱을 만든 다음, 탈과 턱에 다른 탈에 비 해 뛰어나다. 특히 양반, 선비, 백정, 중 등은 턱을 따로 만들고 끈으로 얼굴과 연결 하 는데 이 때문에 광대가 말을 할 때마다 턱이 따라 움직여서 생동감 있는 표정을 다양 하게 표현 할 수 있다. 할미, 초랭이, 부네, 각시탈은 턱이 붙어 있지만 얼굴의 높낮이 와 얼굴선의 조화를 이용하여 움직이는 각도에 따라 표정이 달라진다.④ 비대칭성하회탈의 얼굴은 대칭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여 탈이 찌그러져 보이거나 하는 것 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비대칭성으로 인해서 더욱 많은 표정을 담게 되는 것이 하회 탈의 큰 특징이다.⑤ 양반탈의 웃음봉산탈춤이나 오광대놀이 등 다른 탈춤에서 보면 양반탈은 비딱하고 못생기게 표현 되 어 있다. 그 이유는 탈춤이 서민들의 놀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용도 양반들을 골리 고, 조롱하고, 애 먹이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신분차별이 심했던 조선시대에 이런 내용의 탈춤과 삐딱한 모양의 양반탈이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양반들이 눈감아 줬기 때문이다. 서민들은 양반들에 대한 반감과 불만을 늘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기회를 통해 양반들에 대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도록 해서 양반들에게 대한 불만을 해소시키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일부 지역에서는 양반들이 비용을 제공해 가며 권장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하회로 대표되는 안동지방은 예로부터 양반들의 세력이 강하기로 첫 손에 꼽히는 곳이다. 따라서 서민들이 양반들에 대해 함부로 할 수 없을 만큼의 세력을 양반들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탈의 모양도 인자하게 웃는 모습으로 만들었다.3-2. 하회탈의 종류 및 각각의 특징① 양반탈- 하회탈 중에서도 대표적인 가면 미술의 극치라는 평을 받고 있으며 대체적으로 부드러운 표정이다. 양반은 냉수 마시고서도 이빨 쑤신다 라는 말처럼 허풍스러움과 여유스러운 표정이 복합되어 있다. 턱을 분리하여 끈으로 매달아 놓음으로서 고개를 젖히면 박장대소하는 표정이 되고 고개를 숙이면 입을 다문 화난 표정으로 변한다.놀이마당에서는 부네와 소불알을 두고 선비와 지인물이다. 사회적 제약으로 인한 강요된 침묵과 부자유스런 수줍음이 깃들어 있다.머리를 조각하여 `ㅡ?? 자로 큰 머리를 얹었고 눈썹은 검게 했으며 연지 곤지 찍은 흔적이 있고, 입술은 붉게 칠했다.③ 백정탈- 대체로 심술궂은 표정이며 고개를 숙이면 살생을 할 수 있는 험악한 표정으로 나타나고, 뒤로 젖히면 살생으로 인한 죄의식 때문에 미쳐 버린다는 실성한 웃음으로 나타난다. 비뚤어진 이마는 성질이 불량하고 잔인성이 있다는 상이다. 놀이마당에서는 소를 잡아 염통과 소불알 등을 구경꾼에게 팔면서 민중적 삶의 이치를 일깨우고 양반, 선비의 위선을 적극 폭로하는 인물이다. 장방형의 건장하고 튼튼한 장정의 얼굴인데 턱의 움직임에 따라 험상궂게 보인다.얼굴은 검은 주홍색이고, 머리와 눈썹은 검은 색이다. 미간에 백호처럼 혹이 있고 이마와 양 볼에 주름살이 있으며 눈은 실눈이다. 콧날개가 넓고 크며 턱은 따로 달아서 움직인다. 미소짓고 있다.④ 이매탈- 전설내용처럼 턱이 없는 채로 전해져오고 있는 탈이다. 대체로 일그러진 모양이면서도 순박함을 볼 수 있다. 코가 삐뚤어진 것은 사지 중 어느 하나가 비틀어진 병신임을 말하며 눈 꼬리가 아래로 쳐진 것은 악의가 없다는 상이다. 놀이마당에서는 선비의 하인으로서 바보 같은 병신역할로 등장하여 양반, 선비를 적극 풍자함으로써 이들을 더욱 바보 같은 존재로 격하시키는 구실을 하는 인물이다. 언청이에다 계속 웃는 표정을 짓고 있으며 턱까지 없어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얼굴은 주황색이다. 눈은 실눈으로, 눈구석이 아래로 길게 쳐져 있고, 턱이 없다.⑤ 초랭이- 대체로 경망스러운 표정이며 또한 비뚤어지고 꼭 다문 입에서 불만스러운 표정을 볼 수 있다. 이마가 불거진(앞짱구)것은 윗사람과의 의견이 맞지 않는 고집불통의 상이며 코가 짧은 것은 성질이 조급하다는 상이다. 놀이마당에서는 양반의 종의 신분으로서 험악한 말투와 공격적인 행위로 양반, 선비를 여지없이 조롱하고 비판하는 가장 민중적이고 적극성을 띤 인물이다. 콧대가 꺾이고 입은 비뚤지만 다.
제목 : 한국의 민속놀이< 목 차 >Ⅰ. 서 론Ⅱ. 본 론1. 놀이의 내용과 분포1) 내용 분석2) 분포2. 놀이의 특징1) 제의성2) 향토 의식3) 예술성3. 놀이의 종류Ⅲ. 결 론< 참고문헌 >? 김윤호, < 민속놀이와 명절 - 상 >,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2000.? 김윤호, < 민속놀이와 명절 - 하 >,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2000.? 김광언, < 민속놀이 >, 대원사, 2001.? 심우성, < 우리나라 민속놀이 >, 동문사, 1996.? 김광언, < 한국의 민속놀이 >, 인하대학교, 1982.? 이강로, < 세시풍속과 민속놀이>,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0.? 한국의 민속놀이 ( http://myhome.naver.com/hodol1735 )? 세시이야기 ( http://www.sesistory.pe.kr )Ⅰ. 서 론우리 조상들은 이미 부족국가)시대부터 멋들어지고 흥겹게 놀 줄 알았다. 이와 같은 멋과 흥은 오랜 세월 끊이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면서 우리 생활의 바탕을 이루는 민속놀이가 되었다. 다시 말해 민속놀이란 사람들이 민족의 전통적인 기질에 맞게 창조하고 지능과 체력을 향상시키며 정서적이고 낙천적인 생활을 위하여 여럿이 모여 즐겁게 노는 것을 말한다.민속놀이에는 여러 측면에서 유익하고 다양한 종목들이 포함되어 있다. 무술을 연마하면서 생긴 무술연마놀이, 몸을 단련하는데 유익한 체력단련놀이, 머리를 쓰며 재미있게 놀 수 있는 지능겨루기놀이, 노래와 춤이 한데 엉켜 있는 가무놀이, 탈을 쓰고 춤을 추거나 행동을 보여 주는 탈놀이, 인형을 조종하여 재미있는 이야기 줄거리를 보여주는 인형놀이, 어린이들이 즐겨 노는 어린이놀이 등 수많은 민속놀이들이 있다.이와 같은 우리나라의 민속놀이는 내용이 건전하고, 형식과 방법이 사람들의 흥취를 돋궈 주고 사람들의 생활에서 정신적 ? 육체적으로 유쾌한 것들이다.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민속놀이는 컴퓨터 게임과 오락에 밀려 점점 잊혀져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다음에서는 조상들의 흥과 지혜가 담겨있는 민속놀이내기, 불교 관련 놀이의 순으로 놀이 자체가 목적인 놀이가 가장 비율이 높고, 불교 관련 놀이가 가장 적다.민속놀이는 흔히 명절에 벌이지만 계절에 따라 다른 시기에 노는 것도 많다. 이에 따라 연중놀이, 정월놀이, 대보름놀이, 영등놀이, 한가위놀이, 사월초파일)놀이, 수릿날)놀이, 백중)놀이, 봄놀이, 겨울놀이 등으로 나눈다. 계절의 기준으로 보면 연중놀이가 반쯤 되고 봄놀이, 겨울놀이, 여름 놀이로 순으로 비율이 줄어든다. 명절을 기준으로 따져보면 대보름, 정월, 백중, 한가위, 수릿날, 영등날 놀이 순으로 비율이 줄어든다.2) 분포민속놀이는 지역에 따라 전국놀이, 특정 지역의 향토놀이, 한두 도(道)에서 벌이는 지역놀이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전국놀이가 가장 많고 향토놀이, 지역놀이 순으로 이어진다. 놀이의 분포를 지역을 기준으로 나누어 비율을 살펴보면 호남, 강원, 영남, 경기, 충청, 함경, 제주, 황해, 평안 순으로 호남 지역이 가장 많고 평안도가 가장 적다.2.놀이의 특징1) 제의성(祭儀性)우리 겨레는 농사를 ‘천하에 제일가는 업’으로 여겨 왔다. 농사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자연의 변화에 따라 좌우되는 일이 많았다. 자연에 대해 위력과 경이감을 느낀 나머지, 이를 지배하는 신에게 주술을 베풀고 또는 제사를 올리고 풍악을 울려서 풍년을 기원하였다. 더구나 재배 과정이 복잡하고 까다로운 논농사를 짓게 되면서 신에 대한 의식은 더욱 깊어졌다. 이에 따라 여러 신들을 위한 행사를 자주 베풀었다. 그래서 우리 생활 풍습이 농경의례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세시풍속은 물론이고 신앙이나 놀이의 대부분도 농경의례에서 싹트고 발전해 왔다. 우리 농경의례에는 정월의 기풍의례)와 오월 단오와 칠월 백중 사이의 성장의례) 그리고 팔월의 수확의례)가 있다. 이 가운데 기풍의례는 전체의 반이 넘는다. 성장의례와 수확의례는 그 다음이다. 이러한 비율은 농경의례 가운데 기풍의례가 가장 기본적이고, 또 농사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장 절실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신은 부여의 은산에서, 최영은 중부 지방의 무당들이 임경업은 서해의 어부들이 수호신으로 받든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었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안동 놋다리 밟기에서 공민왕의 딸이 등장하는 것도 부왕의 불행했던 일생과 관련이 깊은 것이다. 향토놀이 가운데에는 사흘에서 스무날 가량 이어지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줄다리기의 준비에는 한 달 이상이 걸리는데, 안동에서는 한해 전부터 동채감을 찾는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러한 준비 과정에서 마음을 합하고, 자기 고장에 대한 긍지와 애정을 실감하는 것이다. 줄을 당길 때에는 남녀노소의 구별이 없다. 줄 끝이 모자라면 여자들은 치마에 돌을 담아 누구의 허리든지 끼어 안고 버틴다. 또 인근의 여러 지역 사람들도 각 마을 서낭대와 풍물패를 앞세우고 참가한다. 그래서 줄다리기가 펼쳐지면 모이는 사람도 수천 명에 이르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로 뭉쳐서 서로 협동하는 가운데 자기 고장에 대한 애정을 느낀다. 이긴 쪽이 농사철의 물을 먼저 대거나 진 편에서 그해의 부역을 맡는 조건도 사람들의 협동과 단결을 굳히는 구실을 하였다.3) 예술성예술성을 갖춘 놀이는 대체로 재주꾼놀이와 집단놀이로 나눌 수 있다. 재주꾼놀이로는 탈놀이가 가장 많으며, 인형극, 굿거리, 줄타기 등으로 이어진다. 굿은 신에게 드리는 제사임에도 굿놀이 또는 굿구경이라 하여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즐겨 왔는데 오락적인 요소도 짙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풍악을 울리는 풍물패와 사람들이 흔드는 깃발은 온통 축제의 분위기를 돋운다. 따라서 이들은 놀이의 관중인 동시에 주체자가 되어 신명을 떨치며, 이때 풍물이야말로 놀이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데에 가장 큰 구실을 한다. 많은 사람들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이끌고 통제하며 또 이들을 놀이의 분위기 속으로 끌어들이고 흥취를 불러일으킨다. 대부분의 집단적 예능놀이에 풍물이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놀이판에서 사람들이 흔드는 깃발도 큰 구실을 한다. 이러한 인위적인 요소 외에 자연적인 배경도 큰 구실을데, 이때는 각 편 사람들이 서로 순서를 바꾸어 윷을 던진다.2) 장기장기(將棋)는 두 사람이 청 ?홍의 장기짝을 규칙에 따라 번갈아 두면서 승부를 내는 민속오락으로 나이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언제 어디에서나 한가롭기만 하면 즐길 수 있는 놀이이다.장(將, 王 : 楚?漢)은 각 한 짝, 차(車)?포(包)?마(馬)?상(象)?사(士)는 각각 두 짝, 졸(졸, 병)은 각 다섯 짝으로, 한쪽은 16짝이며, 양쪽을 합하여 32짝을 가로 10줄, 세로 9줄로 그려진 네모꼴의 장기판에 포진시켜 적의 장(왕)을 진퇴불능의 상태로 만들어 승패를 결정하는 추리와 연상(聯想)과 적수(敵手)의 심리를 이용하는 지능적 오락이다.? 장 : 왕으로 절대 죽어서는 안되는 말이다.? 차 : 동서남북 어디로 가든지 일직선으로만 다닌다.그 선상에 상대편의 말(장기 씨)이 놓여있으면 무엇이든지 잡아먹을 수 있다.? 포 : 선을 따라 움직이되 반드시 말하나를 넘어 다녀야한다.자기편 말이든 상대편 말이든 상관없지만 같은 포끼리는 넘을 수 없다.? 마 : 반드시 일자 모양으로, 선 한 칸 다음의 사선으로 가야한다.? 상 : 마처럼 움직이는데 사선으로 두 칸씩 움직일 수 있다.? 졸 : 한 줄씩 앞으로 가거나 옆으로만 갈 수 있다. 임전무퇴의 장기 씨다.? 사 : 궁(장군이 있는 칸의 팔방)안에서 항상 상대방의 말의 공격해오는 길 점을 피해다녀야한다.길 점에 놓이게 되면 '장군'이 되기 때문에 그 길을 피하지 못하면 결국지게 된다. 장과 사를 제외한 모든 말은 상대편 장을 향하여 공격할 수 있고 움직이는 길 점에 놓인 것은 잡아먹을 수 있지만 길 점에 다른 말이 있으면 갈 수 없다. 말을 움직여 싸워서 상대의 '장'을 먹을 수 있을 때 '장군'이라고 소리내어 부른다. 이 때 상대방이 장군을 막지 못하면 이기게 된다.3) 격구고려와 조선시대에 무신들이 무예를 익히는 방법으로 하던 놀이이다. 궁중과 상류계층에서 "격구"라고 불리며 놀던 것이 점차 민간으로 흘러 들어 널리 보급된 민속놀이다. 격구는 "장치띠를 매고 하는 ?띠씨름?등 원래 세 가지가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대부분 ?왼씨름?만을 한다. 상대방을 완력이나 여려가지 기술로써 제압하여 쓰러뜨리는 씨름은 다른 격투기처럼 상대방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지 않고도 이길 수 있으므로 매우 신사적이다. 경기의 기술은 손을 이용하는 ?팔재간?과, 발을 쓰는 ?다리재간?, 두 손과 다리를 사용하여 상대방을 땅에서 들어올리는 ?들재간?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그 세부적인 기술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오늘날에는 씨름이 스포츠로서 체계화되어 공식적인 운동경기로 인정을 받고 있으며TV에서는 프로 경기로 정착하여 일년에 몇 차례 식 대회가 치러지고 있다.5) 매사냥매사냥은 매가 야생의 습성대로 사냥을 하게 한 다음 이를 낚아채는 간접 수렵술 이다.매사냥에는 매의 주인인 수할치와 털이꾼, 배꾼이 합세한다. 4,5 명으로 구성되는 털이꾼 들은 잔솔밭에 숨은 꿩을 날리기 위해 작대기로 두드리며 “우ㅡ, 우ㅡ” 소리친다. 꿩이 잔솔밭에서 날아오르면 “디워, 디워” 고함을 질러 수할치에게 알린다. 산마루에서 기다리던 수할치는 이 신호에 따라 매를 공중으로 날린다. 배꾼은 매나 꿩이 날아간 방향을 털이꾼 에게 알리는 구실을 맡는다. 수할치 손에서 벗어나 하늘로 치솟았던 매는 꿩을 보자마자 내리꽂듯 뒤를 쫓는다. 매는 꿩의 머리를 휘감고 부리로는 눈을 쪼은 다음, 목 부위의 털을 뽑아서 숨통을 끊으려 든다. 방울 소리를 따라간 수할치는 매의 눈과 마주치지 않도록 옆으로 다가가서 매의 발목 끈을 잡고 두 무릎을 세워 앉고 꿩과 매를 무릎 위에 올려 놓는다. 매가 한동안 털을 뜯도록 꿩의 몸을 돌려대 기다린다. 갑자기 빼앗으면 성질 급한 매는 화병에 걸려 죽기 때문이다. 그리고서 꿩을 슬그머니 무릎 아래로 숨기면서 미리 준비한 마른 닭이나 꿩 머리를 내어 준다.6)줄다리기줄다리기는 일정한 형태의 줄을 경계선에 갖다 놓고 두 편으로 갈라 서로 잡아당겨 승부를 내는 민속놀이이다. 마을 사람들의 단결심과 협동심을 고취하는 일종의 집단놀이로서 두
우리 시대의 능란한 이야기꾼!Ⅰ들어가며1979년「塞下曲」으로 등단한 이래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문열은 실로 수많은 소설들을 발표하였거니와, 그 소설들 가운데 대다수가 독자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에게 오늘의 작가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의 무게 있는 상이 진작에 주어졌다는 사실도, 그의 중요한 작품들 가운데 상당수가 여러 외국어로 번역되었으며 그렇게 번역된 작품들이 그쪽의 문학 전문가 및 일반 독자들로부터 상당히 호의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런 모든 사실들을 종합해서 판단할 때, 우리는 이문열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한국 소설을 대표하는 대형 작가의 한 사람이라고 하는 결론을 어렵지 않게 도출해 낼 수 있다.) 이런 이문열의 작품은 수없이 많으나 본고에서는 『젊은 날의 초상』을 집중적으로 조명해 보도록 하겠다.Ⅱ작가론1. 이문열의 삶과 작품이문열의 본명은 이열(李烈)로 1948년 서울 청운동에서 아버지 이원철(李元喆), 어머니 조남현(曹南鉉) 사이의 3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이문열의 가문은 재령 이씨로 유서 깊은 문중가문이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대지 200평에 40간짜리 본가를 둔 천석꾼에도 영국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로 서울대 농대 교수를 지냈고 수원 농대의 학장으로 밀려나 월북할 때까지 정치적 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런 그의 아버지가 9.28 수복때 가족을 버리고 월북하면서 그의 가문은 대공수사기관으로부터 끊임없이 감시 받는 사찰대상이 되었고 어려서부터 연좌제의 고통을 감내하고 살아야했다. 당연히 가세는 기울었고 그의 인생도 순탄할 수 없었다.아아, 아버지, 아버지.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 사진조차 본 적이 없는 그 막연한 추상, 그러나 집안 구석구석 살아서 떠돌며 끊임없이 재난과 불행의 먹구름을 몰고 오던 두렵고 음산 한 망령, 정액 몇 방울의 의미로서는 너무 무겁던 내 삶의 부하(負荷)였으며 알 수 없는 원죄(原罪)를 내 파리한 영혼에 덮씌우던 악몽, 깊은 이도 여의치 않았다. 훗날의 출세작 『사람의 아들』원고를 출판사에 보냈지만 문전박대 당할 뿐, 이도 저도 안 된 그에게 군대는 유일한 도피처였다.박필순(朴畢順) 씨와 결혼한 다음 1973년 군에 입대하여 제대하고 대구로 나와 2년간 학원에서 강의를 하였다. 그러다가 1977년 대구 매일 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나지레를 아십니까」가 가작으로 당선되면서 이문열(李文烈)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1978년에 대구 매일신문 22기 기자로 입사하여 편집부에서 근무하다가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새하곡」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게 된다. 같은 해 신의 구원과 인간의 논리 사이에서 고뇌하는 신학도의 갈등을 그린 「사람의 아들」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면서 80년대를 예고하는 신예로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데뷔 원년인 그 해 그는 「들소」,「제쳐논 노래」,「심근 그리하여 막히다」,「그해 겨울」을 발표하고, 이듬해 매일신문사를 그만두고 창작에 몰두하여「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어둠의 그늘」,「필론의 돼지」,「달팽이의 외출」,「이 황량한 역에서」를 발표, 다음해에는 자전적 소설인 『젊은날의 초상』을 출간하고「서늘한 여름」,「충적세 그후」,「사과와 다섯 병정」,「알 수 없는 일들」등을 계속 발표한다. 1984년 이문열은 ‘마침내는 내가 작가가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왔을 때 가장먼저 써야 할 “그 얘기”’인 『영웅시대』를 발표한다. 이 「영웅시대」는 「변경」과 함께 그의 체취가 가장 많이 들어있는 작품으로 6.25를 전후로 불행한 가족사를 그리고 있다. 「미로일지」,「달팽이의 외출」,「잘려했으니, 우리 그 낙일」등을 발표하고 재충전 시간을 가진 후에 1986년부터 연재를 시작하여 12년 만에 대하소설 《변경》(전 12권)을 완성하기에 이른다.그는 1997년 세종대 교수를 역임한 후 1998년 “영원히 혼자서 살 집은 이 지상에 없다. 내 한 몸 제대로 누이고 편안히 글 쓸 방 없이 보따리 하나로 이곳저곳 옮겨 다니던 내 젊은 날 궁상스러웠던작하여 12년 만에 완성한 대하소설 《변경》(전12권)은 1950년대 후반에서 1972년 유신 전야까지를 배경으로 전쟁과 왜곡된 자본주의 체제에서 몰락해가는 가족사를 그리고 있다. 작가 스스로 자신의 작품 중 '가장 거대한 서사(敍事)'로 꼽는 것으로 작가의 역사관과 세계관을 보여주며, 우리문학의 질적 향상에 기여한 공로로 1999년 호암예술상을 수상함으로써 작가적 역량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나자레를 아십니까」, 『매일신문』, 1977◎「심근(心筋), 그렇게 막히다」, 『한국문학』, 1979. 4.◎「사람의 아들」, 『세계의문학』, 1979. 6.◎「맹춘중하(孟春中夏)」, 『문예중앙』, 1979. 9.◎「들소」, 『세계의문학』, 1979. 9.◎「사라진 것들의 위하여」, 『한국문학』, 1979. 10.◎「그 해 겨울」, 『문학사상』, 1979. 12.◎「새하곡(塞下曲)」, 『동아일보』, 1979◎「어둠의 그늘」, 『한국문학』, 1980. 3.◎「충적세(沖積世) 그 후」, 『월간조선』, 1980. 4.◎「제쳐논 노래」, 『세계의 문학』, 1980. 6.◎「분호난장기(糞胡亂場記)」, 『현대문학』, 1980. 8.◎「황제(皇帝)를 위하여」, 『문예중앙』, 1980. 9.◎「달팽이의 외출」, 『문학사상』, 1980. 10.◎「사라진 것들을 위하여」, 『소설문학』, 1980. 10.◎「상처」, 『한국문학』, 1980. 10.◎「이 황량한 역(驛)에서」, 『세계의 문학』, 1980. 12.◎「하구(河口)」, 『한국문학』, 1981. 5.◎「서늘한 여름」, 『문학사상』, 1981. 6.◎「황제를 위하여」, 『문예중앙』, 1981. 6.◎「우리 기쁜 젊은 날」, 『세계의 문학』, 1981. 6.◎「알 수 없는 젊은 날」, 『한국문학』, 1981. 11.◎「금시조(金翅鳥)」, 『현대문학』, 1981. 12.◎「약속」, 『한국문학』, 1982. 4.◎「그 세월(歲月)은 가도」, 『문학사상』, 1982. 5.◎「비정(非情)의 노래」, 『정경문화』, 1982. 5.◎「과객(過삶은 하나의 유적(流謫)이 되었다고 말한다. ‘유적’은 귀양살이란 뜻의 ‘나’가 자주 쓰는 말로 자신의 고통스런 삶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병으로 인해 공부를 할 수 없어 번민과 고뇌로 음울한 나날을 계속 보내던 ‘나’는 철저한 외로움을 느끼면서 닥치는 대로 마을 사람들과 사귀기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사귀게 된 사람들이 김성구, 서동호, 별장집 남매 등이다. ‘나’는 그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며 관찰한다.이윽고 ‘나’는 검정고사를 무사히 합격하고 대학 시험까지 붙었다. 30대의 ‘나’는 ‘유적은 끝났다―적어도 그때의 내 생각은 그랬다.’라고 그 당시를 회상한다. 그리고 ‘나’는 강진을 떠난다.이 작품은 중년이 되어 강진을 찾은 서술자와 별장집 여자의 대화로 끝맺는다.「이제 복수를 하신 겁니까?」그러자 그녀는 여전히 쓸쓸한 미소로 대답 대신 물었다.「그럼 이 선생님은 유적이 끝나셨어요?」「아닙니다. 아직」나는 원인 모를 슬픔을 느끼며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저두요」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조용히 자기 앞의 잔을 잡았다.열아홉 살의 ‘나’는 대학에 붙어 정상적인 삶의 궤도를 찾으면 유적은 끝난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유적의 끝이 아니었다. 한차례의 관문을 지난 뒤 더 큰 고통과 방황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즉, ‘나’는 살아가면서 유적의 끝을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 삶의 기본적인 리듬이기 때문이다.2) 공간적 배경인 하구(河口)이 소설의 제목인 ‘하구(河口)’는 강물이 바다나 호수로 흘러 들어가는 어귀를 말한다. 강진은 낙동강이 다하여 남해바다와 합쳐지는 곳에 자리 잡은 포구로 바로 하구이다. 처음 접했던 강진은 나에게 안개와 갈대, 가난이라는 막연한 인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마음의 안정을 얻었을 때, 강진은 이윽고 하나의 실체로서 ‘나’에게 접근하여 온다.그러다가, 마치 상류에서 떠내려 온 찌꺼기들이 조금씩 쌓여 하구에 커다란 삼각주를 만들 듯, 이곳저곳에서 흘러든 사람들로 점차 마을이 커지기 시작했다.이런 강진의 ‘하구’라는 이 작품은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 연작 중의 한 편이지만, 그 내용을 보자면 8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연작 소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 내용이 단편 정도의 분량도 되지 않는 짧은 양이지만, 형식적 완결성이라는 의미에서 바라보자면 각각의 소제목들을 중심으로 대학생활의 몇 가지 단면들을 제시하면서도 총체적으로 그것이 〈기쁜 우리 젊은 날〉이라는 주인공 의 대학생활이라는 하나의 틀을 완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충분히 연작 소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작품 내용을 살펴보면 대학생활의 시작 - , 동급생 하가와 김형과의 만남 - , 문학회라는 써클에서의 활동 - , 대학생활의 흔한 추억거리인 술과 관련된 일들 - , 부잣집 딸 혜연과의 연애와 파국등의 이야기 - , , 신문팔이 소년과의 만남을 통한 젊음에의 회고 -, 김형의 죽음과 다시금 시작되는 방황의 출발점 - 등으로 이루어진 대학이라는 곳에서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일들이 그려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그런데 이 소설의 배경이 60년대 말임에도 불구하고) 요즘의 대학생활을 향유하고 있는 많은 대학생들에게 아직도 공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이 소설이 작가인 이문열의 실제 경력과도 거의 어긋나지 않는 그의 자전적인 작품인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記述에서 보여지는 독특한 방식 때문이기도 하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러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 소설 속에서의 주인공은 라는 인물이지만, 그것은 현재 대학생인 가 아닌 지난날을 돌이켜보는 회고적 입장에서의 이다. 그런데, 작품 속에서 의 오늘날은 거의 은폐되어 있고) 단순히 과거의 입장에 약간의 개입만을 유지할 뿐, 그 시점은 현재적 입장으로 자신의 개인적 체험과 추억담에 근거하여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다. 이러한 소설의 기술은 에피소드의 연결적 형식으로 소설을 구성할 수 있게 만든 특징이자 1인칭 소설이면서도 시간적 순서에 얽매이지 않고 중요한 사건들만을 다루어 독자들로 하여금 지루함을 느끼게 하지 않고 」
과목 : 한국문화사조원 : 황연권, 노영미, 조선영주제 : 우리궁궐의 숨겨진 아름다움발표일 : 2004년 11월 24일목 차Ⅰ. 머리말 ............3Ⅱ. 경복궁의 역사 .31. 경복궁의 창건과 발전2. 경복궁의 연혁3. 경복궁의 복원 계획1) 고종이후의 경복궁의 수난Ⅲ. 건물별 둘러보기 ...............71. 광화문2. 동십자각3. 해치상4. 영제교5. 근정문6. 근정전1) 근정전의 내부와 천정2) 근정전의 월대3) 월대의 해태가족4) 잡상5) 정6) 드므7. 사정전8. 수정전9. 경회루1) 경회루의 상징적 의미2) 경회루의 불가사리10. 강녕전11. 교태전1) 아미산12. 자경전1) 자경전의 합각2) 자경전의 십장생 굴뚝3) 자경전의 꽃담13. 향원정14. 시해터15. 건춘문1) 건춘문 홍예천정의 용그림16. 동궁1) 자선당2) 비현각Ⅳ. 맺음말 .............20백성광, 『궁궐 속 오렌지 문화, 한옥 속 낑깡 문화』, 해남, 2000.권삼윤, 『우리건축 틈으로 본다』, 대한교과서, 1999.신응수, 『천년 궁궐을 짓는다』, 김영사, 2002.정인국, 『한국의 건축』,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0.홍대형, 『한국의 건축문화재』, 기문당, 20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은 궁 안의 전(殿)·당(堂) ·누각 등의 건물을 헐어 민간에 방매(放賣)했다. 또 1917년 창덕궁의 내전에 화재가 발생하자 경복궁의 교태전·강녕전·동행각·서행각·연길당(延吉堂)·경성전·연생전·인지당(麟趾堂)·흠경각·함원전(含元殿)·만경전(萬慶殿)·흥복전(興福殿) 등을 철거하여 그 재목으로 창덕궁의 대조전·희정당 등의 내전을 지었다. 궁전 안에는 겨우 근정전·사정전·수정전(修政殿)·천추전(千秋殿)·집옥재·경회루 등과 근정문·홍례문·신무문(神武門)·동십자각 등이 남게 되었으며 정문인 광화문도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하였다. 또한, 근정전의 정면 앞에다 총독부청사를 지어 근정전을 완전히 가려버렸다.3. 경복궁의 복원계획경복궁은 조선 왕조의 정궁으로 1000칸이 넘는 전각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현재 남은 것은 10% 정도이다. 경복궁 복원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그 건물의 생김새조차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면 경복궁 복원사업은 잘못 복원될 수 있고, 반쪽짜리 복원이 된다는 것이다. 경복궁은 지난 수세기 동안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수없이 많은 수난을 겪어왔던 과거 때문에, 경복궁의 모습을 완전하게 그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1907년 무렵에 작성된 , 이라고 하는 대단히 크고 정밀한 도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림이 아니라서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경복궁의 모습을 알아보기는 어렵다고 한다. 그나마 1902년부터 일본인들이 찍어놓은 사진이 있으나, 개개 건물을 찍은 것 아니면, 물결치듯 이어지는 건물 지붕들을 찍은 것, 또는 남산에서 원경으로 찍은 것 등이어서 경복궁의 전체상을 담고 있지는 못하다. 또, 1953년에 미국인이 비행기에서 찍은 전경 사진이 경복궁의 모습을 한 눈에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 때는 이미 경복궁이 제 모습을 잃어버린 때여서 불구의 경복궁만이 담겨 있다.이러한 어려움을 속에서도 문화재청은 1990년부터 2009년까지 1.789억원을 예산으로, 5단계 복원 계획을 펴 현재 4단계 공사를 진행 중이다. 공사말았다. 뿐만 아니라 원래의 광화문 자리에서도 14.5미터 가량 뒤로 물러나 지금의 자리에 서있게 되었다. 광화문의 현판 또한 재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한글 친필로 '광화문'이라 써서 걸게 되었다. 현재의 광화문은 높다란 석축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문루를 세웠다. 좌우측의 협문 천장에는 각각 천마(天馬)와 영귀(靈龜)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콘크리트로 복원하면서 나름대로 추정을 통해 다시 그려 넣은 것이라고 한다.2.동십자각십자각이란 망루로서 고래로부터 있어온 궁궐조영제도에 따라 건립된 것이다. 동십자각은 경복궁 동쪽의 망루이다. 그러나 이 높은 망루에 도대체 출입문이 보이지 않는다. 원래 동십자각은 광화문과 연결되어 현재와 같이 차로 중앙에 있는 형태가 아니었다. 십자각 서쪽면에 아취형의 작은 문이 보이는데, 당시의 당직들이 이 문을 통해 드나들었을 것이다.동십자각이 홀로 외롭게 떨어지게 된 것은, 삼청동 들어가는 길을 넓히기 위해 궁의 동쪽 담을 안쪽으로 밀어 넣을 때 엉뚱하게도 담장과 이별하게 된 것이다. 동십자각의 반대편 서쪽 모퉁이에도 이와 똑같이 생긴 서십자각이 있었으나, 이것도 도로 확장의 미명하에 철거되어 지금은 그 자취조차 찾을 길이 없다.3. 해치상해치는 해태라고도 하며 이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책 속에서 여러 형태로 접할 수 있으며, 광화문앞의 해치는 화재나 재앙을 물리치는 신성한 수호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이태조가 한양(지금의 서울)에 도읍을 정하고 북악산 아래에 경복궁을 지었는데, 그 뒤로는 자주 궁궐에서 불이 났다. 그러자 일부 사람은 그 원인이 경복궁의 배치가 남쪽으로 관악산을 향하고 있고, 관악산이 화기(火氣)가 어리어 있는 화산(火山)인 까닭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광화문 좌우편 앞에 해태 한 쌍을 만들어 앉혀 놓았는데, 이는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또한, 경복궁을 호위하는 상징물 역할을 하고 있다. 이는 해태를 앞으로 거느리고 궁궐에 계신 임금은 바른 정사를 펴는 성군이라는 것을 나타내일월도는 임금에게 향한 백성들의 칭송과 나라 융성의 염원, 그리고 우주 질서에 대한 외경심과 오악의 숭배사상이 혼재되어 있는 그림이다. 정형의 틀 속에 이 모든 것들을 조화롭게 용해시켜 놓았으니, 내용을 알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신비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오봉산일월도는 세계어디에도 없는 우리 고유의 것이다. 이 오봉산 일월도 세계어디에도 없는 숭고한 뜻을 담고 있는 우리만의 것이다.)2) 근정전의 월대(月臺)근정전을 높직하게 올려 세우기 위하여 상하 이층의 돌계단이다. 근정전은 이 월대에 다시 첨계라는 외벌대 댓돌을 구성하고 건축되었는데, 월대의 뒷부분 넓이보다 앞쪽이 훨씬 넓게 되어 있다. 월대는 박석을 깔아 포장하였는데, 배수를 고려하여 물매를 세게 두어서 근정전이 서 있는 부분보다 돌난간이 설치된 가장자리가 현저하게 낮다. 근정전을 떠받치고 있는 두 층 기단에는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계단을 내었는데, 남쪽과 북쪽에는 하나씩, 그리고 동쪽과 서쪽에는 둘씩이다. 그 가운데 남쪽 계단은 근정문에서 근정전으로 향하는 삼도와 연결되어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그 중 가운데 부분은 좌우의 계단과는 달리 전면에 커다란 사각형의 돌이 비스듬히 박혀 있다. 이 돌을 답도(踏道)라고 한다. 밟는 길이라는 뜻이겠으나, 실제로는 이 돌은 밟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가마를 탄 왕이 그 위로 지나가는 길이라는 뜻이 되겠다. 거기에는 구름 속에 새 두 마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마주보고 있는 무늬가 새겨져 있다. 봉황이다. 봉황이란 기린, 거북, 용과 더불어 사령(四靈)이라 하여 신령스럽게 여기는 새이다. 실재하는 새가 아니라 중국 고대부터 사람들이 실재하는 짐승들에서 여러 부위를 조합하여 관념 속에서 만들어 낸 새이다. 봉황은 오색을 띠고 있으며, 산 짐승을 먹지 않으며, 산 초목을 꺾지 않으며, 무리를 짓지 않으며, 여행도 하지 않으며, 그물에 걸리지 않으며, 오동이 아니면 깃들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으며, 단 샘물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고 하며, 동방정사를 펴는 임금은 올바른 사람을 얻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으니, 올바른 사람을 얻어야만 '경회(慶會)'라고 할 수 있다"라고 하며 이는 곧 "임금과 신하가 덕으로써 서로 만나는 것을 말함 이다"이라고 하였다.태종 당시 원래 이곳은 사신의 접대 등을 목적으로 지어졌다. 하지만 그 외에도 과거시험이나 활쏘기 등을 열거나, 공신들에게 연회를 베푸는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어 왔다. 또한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그 뒤 성종 6년(1475) 퇴락한 경회루를 대대적으로 개축하게 된다. 이 때 경회루 돌기둥에는 용을 새겨 넣는 등 다소 화려하게 꾸미기도 한다. 이 화려한 모습을 보고 유구(오키나와)의 사신이 "용이 물 속에 비치어 그 모습이 장관"이라며 극찬했다는 이야기가 성현의 에 전하고 있을 정도로 경회루의 모습은 매우 화려했다고 한다. 또한 연산 12년(1506)에는 경회루 서쪽에 만세 산을 쌓고 금은 비단으로 화려하게 꾸미고 흥청(기생)에게 가무를 추게 하는 등의 사치를 일삼기도 했다. 하지만 경회루의 이러한 모습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완전 소실되어 폐허로 남게 된다. 그 후 경회루는 고종 4년(1867) 4월에 재건되었지만 일제시기에 경회루 주변 담장이 모두 헐린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현재 경회루 동쪽 돌다리 부근에는 일부 담장의 초석이 남아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경회루의 현판 글씨는 건립 무렵 세자였던 양녕대군이 썼으나, 지금의 현판은 '조일강화조약(1876)'을 맺을 때 접견대신을 지냈던 신헌(申櫶)의 글씨다. 이층의 난간 위로 멋지게 장식된 낙양각은 주변의 경관이 마치 잘 꾸민 액자틀 속에 담겨 있는 풍경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한다.1) 경회루의 상징적 의미경회루는 단일 누각으로 국내 최대규모의 웅장함을 자랑하지만, 그 건축적 특성 면에서 심오한 우주의 원리를 담고 있다.이는 고종 2년(1865) 경회루 재건공사가 시작될 무렵 경회루의 평면과 세부형태를 주역의 원리로 설명한 정학순(丁學洵)의 에 잘 나타나 있다. 정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