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urse of Shylock's Revenge1. 서론수업 중 Shylock이 Antonio를 죽이려 작정하고 배를 침몰 시킨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이 Shylock을 악마 같이 무자비하다고 비난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1막 3장에서 Shylock이 “Supply your present wants, and take no doit ... This is kind I offer.” 라고 Antonio에게 말할 때의 그 속내가 궁금했다. ‘그는 과연 진심이었을까? 심장에서 제일 가까운 살 한 파운드를 가져갈 그 계획을 다 세워놓고 제안을 한 것이었을까?’ 이런 의문이 들었다. 이 질문에서 출발해서 Shylock이 복수를 하는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겠다.2.본론2.1 Antonio에 대한 미움과 Bond의 체결1막 3장에서 Shylock은 Antonio가 기독교인이고, 무이자로 대출해 주어서 베니스의 고리대금 금리를 낮춘다는 이유로 그를 미워한다. 또 Antonio가 자신의 민족을 미워하고 자신에게 이자놀음을 한다고 욕을 한다는 이유를 말한다. 이때 그는 “If I can catch him once upon the hip,/ I will feed fat the ancient grudge I bear him...Cursed be my tribe/ If I forgive him!” 라고 얘기한다. 자신의 민족과 종교를 중요하는 Shylock이 “my tribe” 를 걸고 얘기한 것을 보면 이자를 받지 않고 체결한 Bond 는 순수한 의도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Shylock이 Antonio를 쉽게 용서 할 수 없는 것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Antonio가 Rialto에서 공개적으로 shylock의 돈과 고리대금업을 비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의 가버딘에 침을 뱉고, “cut-throat dog”라고 부르고 Shylock을 발로 차는 등 인간적인 모멸감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Antonio에게서 작은 호의는커녕 인간적인 대우조차 받지 못 했던 sh은 Antonio의 “But lend it rather to thine enemy,/Who if he break, thou mayst with better face./ Exact the penalty.” 란 말을 듣고 돈을 무이자로 빌려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이 말에서 돈을 빌려주는 것이 Antonio에게 복수할 기회라는 힌트를 얻게 된 것이다. 그리고 “If you repay me not on such a day,/ In such a place,.../... let the forfeit/ Be nominated for an equal pound/ Of your fair flesh, to be cut off and taken/ In what part of your body pleaseth me.” 의 제안을 한다. 하지만 이것은 Shylock이 “a merry sport” 으로 제안 한 것이지 Antonio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제안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즉 이전의 복수의 동기가 있었으니, 이 Bond를 체결해서 위약 시에는 본때를 보여주되, 심장 가장 가까운 살 한 파운드를 가져갈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이것은 “O father Abram, what these Christian are,/Whose own hard dealing teaches them suspect/ The thought of others!” 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언급하며, 기독교인들의 의심 많음을 비아냥거렸기 때문이다.2.2. Shylock의 분노Shylock이 복수의 칼을 세운 것은 Jessica의 도망 이후이다. 2막 8장에서 Solanio는 Shylock이 거리에서 내 딸! 내 돈! “Fled with a Christian! O my Christian ducats!” 라고 얘기했다고 말한다. Jessica가 Lorenzo와 돈을 가지고 도망감으로써 Shylock은 기독교인에 대한 반감이 더욱 커진다.또, Shylock이 Bassanio의 때문에, Shylock은 마치 이 기독교 인 무리가 자신을 속이고 또 자신의 불행을 기원하기 위해 각본을 미리 짜 놓았다고 느꼈을 수 있다.3막 1장에서 Solanio와 Salarino를 만난 Shylock은 “… He was wont to/ lend money for a Christian courtesy” 라고 얘기한다. 이전에 Antonio가 무이자로 돈을 빌려준다는 얘기를 할 때 나오지 않았던 “a Christian courtesy” 말이 나옴으로써 Antonio 가 자신에게 불행을 가져온 많은 Christian들과 같은 Christian 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뒤에 나오는 “…If a Christian wrong/ a Jew, what should his sufferance be by Christian example? Why,/ revenge!…” 라고 말하는 Shylock을 통해 다시 확인 할 수 있다. 자신의 딸을 훔쳐가고 자신을 모욕했던 많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분노를 Antonio 에게 집중시키고 있다.같은 유대인인 Tubal이 Jessica를 찾지 못했고 그녀가 돈을 낭비하고 다닌다는 소식과 Antonio의 배가 침몰해서 파산하게 생겼다는 소식을 동시에 전한다. 이는 Shylock의 분노의 대상이 Antonio가 되는 것을 한층 더 강화시킨다.3막 1장의 마지막 Shylock의 대사는 “… I will have the heart of him if he/ forfeit, for were he out of Venice I can make what merchandise I will.” 이다. 그가 Antonio를 자신의 분노의 희생양으로 결정하고, 복수하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처음 표명한 대사이다.앞의 논리와 맞지 않는 것은 3막 2장에 나오는 Jessica의 대사이다. 아버지가 Tubal과 Chus와 대화하는 것을 들었는데, 빌려가 돈의 스무 배를 갚는다 해도 Antonio의 살을 갖겠다는 말을 했다고 하는 것이다. 이 때는 Shylock이 분다.2.3. 맹세와 집착3막 1장이 “meet me at our synagogue, go good Tubal” 의 대사로 끝나고 4막 1장에서 “… by our holy Sabaoth have I sworn/ To have the due and forfeit of my bond.” 라고 얘기 함을 보아, 위에서 언급한 복수의 다짐 후 맹세를 했다고 여겨진다. 맹세를 한 이상 Shylock은 어떠한 설득에도 흔들리지 않고 복수를 하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4막 1장의 Portia와 Shylock를 보면PORTIA Shylock, there’s thrice thy money offered thee.SHYLOCK An oath, an oath. I have an oath in heaven!Shall I lay perjury upon my soul?No, not for Venice.3천 더켓의 세배의 돈이라는 Portia 제안에 Shylock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시 잡듯이 “An oath, an oath, I have an oath in heaven!” 이라고 말한다. 그가 고리대금업자로 돈을 중요시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자신의 종교임을 보여준다.Duke, Portia, Bassanio, Gratiano, Magnificoes 가 Shylock을 비난하고 또 회유하는 과정에서 Shylock은 홀로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려다 보니 복수가 집착의 형태를 띠게 된다. ‘쥐를 독살하는데 일만 더켓을 쓰겠다’, ‘입을 버린 돼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 ‘고양이를 보면 미쳐나가는 사람’, ‘ 비음 같은 소리를 내는 백파이프 소리를 들으면 소변을 찔끔 거리는 사람’ 등의 예를 얘기하면서 이것은 자신의 “humour” 라고 한다. 자기의 마음이고 취향이니 회유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늘날 십대 아이들이 어떤 것에 대한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내 마음이야” 하고 간단하게 대꾸하는 것과 유사하다. 논리적인 이유가 없으니 더 이상 토를 달지 말라는 것이다.rong?” , “My deeds upon my heads!” 라고 얘기한다.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아무것도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는 모습이다.사족으로, Portia와 Duke는 “mercy” 에 호소하지만, Shylock은 자신이 살아오면서 기독교인들이 베푸는 자비를 경험한 일이 없기 때문에 이에 공감할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Shylock이 돈과 딸을 잃고 나서 Solanio와 Salarino 만났지만, 그들로부터 어떤 위로의 인사도 받지 못했다. 또 “all the boys in Venice follow him,/Crying his stones, his daughter, and his ducats.” 라는 Solario에 대사에서 보이 듯 그의 슬픔과 절망은 오히려 조롱의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Mercy”에 대한 회유는 오히려 Shylock의 분노를 가중시켰을 것이라고 생각한다.3. 결론복수에 눈이 멀어 칼을 갈던 Shylock이 어떤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는지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가 복수로 발을 내딛는 과정은 무자비하기는커녕 너무나 인간적이다. 사람이 모욕과 상실에 익숙해지면 벽이 된다. 내 슬픔에 파묻혀 다른 이의 슬픔에 공감할 수 없고, 그래서 무정하고 잔인하게 변한다. 누군가에게 자비를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일방적으로 자비를 강요할 수 있는가?1막에서 Shylock이 Antonio에게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겠다는 제안을 할 때는 칼로 Antonio의 가슴을 도려내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약속을 어긴다면 뽐내며 위약 처분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약속을 지킨다 해도 자신이 선심을 베품으로써 Antonio로부터 감사와 예전보다 나은 대접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제안을 했었을 것이다.Shylock이 복수로 치닫는 과정을 설명함으로써 그를 변호하고 싶었다. 재판장에 홀로 서 있던 그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고집을 피고 있다고 설명하고 싶었다. Shylock이야 말로 누군가의 “Mercy” 가 간절하게 필요2)
1. 재일 조선인의 특수한 상황, 조선인 학교의 특수성에 대해 조사재일 조선인은 일본에 경제적, 정치적인 목적을 갖고 도일하여 일본에 자리 잡고 산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의 역사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조선인들의 저항의 역사다. 그리고 재일 조선인은 식민지 피지배와 민족 분단이라는 고난의 민족사가 낯은 이산민 (diaspora)이다.‘재일조선인’ 이라는 용어는 한반도에 뿌리를 둔 존재로서, 일본에 의한 식민지배의 결과 구 종주국인 일본에서 생활하게 된 민족 집단을 총칭한다. 한편 일본 사회와 매스컴에서는 ‘재일한국? 조선인’ 이라는 용어를 많이 쓰는데, 이 말은 분단 체제를 반영한 호칭이다.두개의 민족 교육북한에서는 적극적인 재일조선인 정책으로 1957년에 2억 2천만 엔의 교육자금을 송금해 공민화 교육을 적극 지원했다. 이에 따라 조총련은 민족교육을 계속 추진했고 재일 조선인은 여기에 호응했다. 일본 사회에서 극심한 차별에 시달리던 그들에게 민족교육은 자긍심을 찾는 것이었다.‘조선학교’ 의 교육목적은 인민 민주주의 원칙에 기초한 교육을 시행하는 것이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공민으로서 필요한 기초 지식과 기능을 습득시켜, 미주 조국 건설에 유익한 인재를 양성한다는 것이다.전성기 때의 ‘조선학교’의 학생수는 무려 5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점점 감소해 1978년에는 2만 8천여면, 1990년에는 1만5천여 명으로 줄었다. 이러한 현상은 재일조선인 학부모들이, 조총련계 학교의 북한지향 교육이 재일조선인 학생들이 일본 사회에 적응하는 일을 어렵게 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반면 민단의 경우 교육방침이 좀 달랐다. 초기에는 재일조선인의 귀국을 전제로 한 민족 교육과 한글교육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일본에 정착하려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일본 사회에 대한 적응 교육의 비중도 점차 높아졌다. 그러던 중 1949년 「조선인학교폐쇄령」이 시행되면서, 민단에 의한 민족교육의 열기도 약화되었다. 물론 민단에 속한 재일 조선인 중 일본에 정주하려는 사람이 많아졌던 사실 동포가 자녀를 ‘한국학교’로 전학시키면서 학생 수가 다소 증가했지만, 전체적으로 여전히 감소하는 추세이다.2. GO에서 말하는 “이름” (호명, 규정하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서술하시오.‘이름’은 정체성을 구별 짓는 하나의 기호이다.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에 관하여 고민을 할까? ‘나’ 는 그리고 ‘내 이름’은 내 아버지의 아들, 내 누이의 오빠, 학교의 학생이자 많지는 않지만 누군가의 친구라는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다. 즉 나의 이름 안에는 나의 사회적 위치와 기대되는 행위, 책임 등이 녹아있다. 예를 들면 ‘이00’ 라는 남자이름에 걸맞은 행동을 기대 받는 것이다. 내가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 동일 할 때, 나는 주어진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다.하지만 내가 보는 ‘나’ 와 다른 사람이 보는 ‘나’ 사이의 갭이 커질 경우 대안이 필요하게 된다. 『GO』 에서의 스기하라는 자이니치, 재일조선인, 재일한국인, 반역자, 똘아이 등 다양한 이름으로 주변인들에게 불린다. 하지만 스기하라는 스스로를 ‘Korean Japanese’ 라고 부른다. 번역하면 똑같이 조선계 일본인이지만 의미는 스기하라가 “나는 나” 라고 말한 것과 같이 기존의 패러다임을 벗어나는 새로운 ‘이름’이다.이 새로운 ‘이름’ 에 관한 생각은 영화 곳곳에 나타나 있다. 2년 반만에 고깃집에서 민족학교 친구였던 ‘원수’를 재회했을 때 원수는 스기하라에게 “자본주의의 상징이 되어버린 거야?” 라며 비난한다. 이때 스기하라의 어머니가 “부모랑 같이 살고 있으면 일본이고, 한국이고, 조선이고 없어. 그저 아이일 뿐이야. 아이!” 라고 얘기한다. 이 역시 국적이 지닌 거대 담론들이 가볍고 경쾌하게 반전되며, 종래의 재일조선?한국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의 경계를 넘어선다. 스기하라의 아버지는 한때 스페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말하고, 또 “나는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니다. 그냥 뿌리 없는 잡초다.” 라고 스페인어로 얘기한다. 한 때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했던 아하지만 얘기를 통해 기억할 전설과 같은 뿌리일 뿐이며, 그들은 ‘재일한국인’이 아닌 ‘한국계 일본인’ 에 더 가까운 삶을 선택했다. 이와 다르게 한국이름으로만 불린 정일과 원수는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이다. 그들은 학생들이 빠져나가는 민족학교에서 교육받고 존재하지 않는 ‘나라’ 이지만 조선이라는 민족적 귀속 의식을 가지고 있다.수많은 이름에 관한 생각들이 『GO』안에 있다. 그 중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큰 줄기는 역시 로미오와 줄리엣의 인용구라고 생각한다. “이름이란 뭘까? 장미가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해도 달콤한 향기에는 변함이 없는 것을....” 이것은 사쿠라이가 “이름 같은 것은 어때도 상관없잖아?” 라고 얘기했던 것처럼 기성의 가치관으로 자기를 규정짓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나아가 주인공 스기하라가가 자신을 'Korean Japanese' 라고 명칭한 것과 같이 변모된 정체성을 포괄할 수 있는 새로운 이름, 패러다임을 구축하고자 한다.3.『GO』에서 이야기 되는 주인공의 정체성 찾기(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 찾기)는 과연 어떻게 전개되었고 어떻게 정리되는 것으로 보이는가?‘재일’ 2세이자 작가인 김석범은재일 조선인은(중략) 민족적인 것들이 풍화되어 가고 있다. 특히 그것은 2세?3세 경우는 심하고 일본인도 아니고 조선인도 아닌 존재가 된 것이 현실이다. 한마디로 말하 자면 그들은 자신의 인간적 존재로서의 아이덴티티를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들이 자기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민족적인 자각(아이덴티티)를 일단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서술하고 있고 ‘일본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닌 존재’의 정체성 위기를 호소하고 있다.재일조선?한국인은 일본에 동화하면서도 일본인이 될 수 없고 한국인이라고 말 할 수 없는 양자의 중간에서 흔들리는 동적인 경계인이라고 할 수 있다.주인공 스기하라는 조선과 한국 중 한국 국적을 선택하고 일본학교로 전학을 갔다. 조선(북한)보다 한국이 좋았다기보다는 민족교육을 혐오했기 때문에 한국을 위에서 인용한 김범석의 말처럼 ‘민족’ 적인 것은 계속 풍화, 희석되어가고 있어서 그에게 ‘한국’이라는 정체성이 없고, 또 스기하라는 종래 국적이 지니는 무게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인용하는 미토콘드리아 DNA의 새로운 설에 따르면 기존의 민족 뿌리설을 해체되며 국적을 해약 가능한 것이 된다는 그의 주장에서 나타난다. 또 사쿠라이에게 자신이 ‘재일’임을 밝힐 때 “중학교까지는 조선이었고 반 년 후에는 일본인 일 수도”, “국적 같은 것은 의미가 없다는 거야” 라고 말하며 보다 직접적으로 국적에 구애받지 않음을 표현한다. 혹은 다른 각도에서 보면 스기하라가 국적이란 굴레로부터 자유롭고 싶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국적을 가벼운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기도 하다.이렇듯 스기하라에게 자신이 재일한국인이라는 것은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었던 것이다. 일본경찰과의 대화 중 스기하라 했던 “숨기려고 했었는데 마음을 굳게 먹고 일단 말했습니다. 나 재일한국인이야 라고” 는 대사를 통해서도 그가 다수인 일본인과는 다른 재일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존경하던 친구인 정일이 일본인에 의해 부당한 죽음을 맞고 스기하라가 재일임을 알게 된 사쿠라이가 ‘피가 더럽다’는 반응을 보임으로써 스기하라는 조선·한국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자각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이는 다시 사쿠라이를 만났을 때 “난 어느 나라 사람이야? 난 어느 나라 사람이야? 난 뭐냐고? 대답해!” 란 질문을 하고 사쿠라이의 “재일 한국인” 이란 대답을 들었을 때야 비로소 담장을 넘어 사쿠라이에게 가는 모습에서 나타난다. 더 이상 재일한국인이라는 꼬리표로부터 도망 다니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이다.그리고 더 나아가 기존의 타자화된 재일이라는 이름으로부터 벗어나 “난 재일도 에일리언도 아니란 말이야! 나는 나란 말야!” 란 결론에 이른다. ‘나’ 라는 것은 혼재된 민족성(hybridized ethnicity)을 지닌 존재이다. 흔히들 일본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니라는 재일와 같이 일본에 있는 학교는 크게 조선학교와 한국학교(민단에 의한 학교)가 존재하고 있으며 조선학교의 수가 한국학교의 수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이는 기민정책을 기조로 했던 남과 달리, 북이 재일동포들을 해외공민으로 규정하고 그 동안 조선학교에만 149차례에 걸쳐 400억 엔이 넘는 교육 지원금과 장학금을 보내왔기 때문이다.)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북한은 재일조선인에게 성경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의롭고 선한 존재이다. 다시 말해 소외와 차별에 시달리는 재일조선·한국인에게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자금을 지원하여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조국이다. 영화 『우리학교』에 등장하는 훗카이도 조선민족학교의 경우 북한의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는 조선학교이기 때문에 교원들을 포함한 학생들은 북한에 우호적일 수밖에 없다.하지만 이들이 마치 분단의 현실을 반영하듯 한국에는 비우호적이고 북한에만 우호적인 것은 아니다. 영화 속 그들은 재일조선·한국인은 한국이나 북한 모두 조국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조선학교의 교육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귀국을 전제로 한 교육이었고 70년대 말 80년대 초에 ‘공생’을 위한 교육으로 바뀌었다고 해도 여전히 북쪽 일변도의 교육을 하고 있다.감독은 자신의 의도를 촬영, 편집, 나레이션을 통해서 표출할 수 있지만 그 형식이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에 감독의 이념이 직접적으로 묻어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속에 그려진 북한은 학생들과의 계속되는 인터뷰와 그들이 북한에서 찍어온 비디오 등을 통해서 ‘그들만’의 북한으로 재현된다. 교원과 학생들의 북한에 대한 시선은 사회주의 체제라는 이데올로기적 관점이 아닌 이상적인 고향의 모습이다.대한민국의 외교정책이 재외공민의 처우에 관심을 갖고, 경제적 지원을 했었다면 영화 속에 묘사된 북한의 모습은 분명 달랐을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생활하는 우리학교 학생들이 같은 자본주의 국가인 한국이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에 더 친근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더.
0481065 김성은1.청교도란 무엇인가?청교도 혹은 청교주의라는 용어는 애초 영국 국교회에 반대하는 신교도들을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폭넓게 사용되었는데,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순수성을 드러내는 표상으로 간주했고 특히 뉴잉글랜드에 정착한 신교도들은 공동체의 독자성을 대내외적으로 상징하는 의미로 썼다. 국교회와의 철저한 분리를 주장한 플리머스(plymouth)지역의 분리파(separatists)나 개인의 종교체험을 제외한 일체의 형식적 제약을 거부한 독립파(independents) 사이에서 국교회의 전면 부정이 아니라 전략적 제휴를 추구한 소위 비분리 회중론자(Non-separating congregationalists)를 지칭한다.2.청교주의의 기원1535년 영국의 헨리 8세가 후계자 문제로 로마 카톨릭을 떠나 카톨릭과 개신교를 기반으로 영국 국교회를 창설하여 재혼을 하였다. 이는 국왕의 권력을 강화시키기는 하였으나 교리나 교회 폐습의 순수한 개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 후 헨리 8세의 뒤를 이어 그의 장녀 메리(피의 여왕 메리)가 직위 한 후 신교도들의 박해는 시작되었다. 반면에 엘리자베스 1세는 신교도였다. 그녀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교의 체제 안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유지하여 많은 카톨릭 신자들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했다. 그렇다고 자신을 지지하는 신교의 개혁자들을 배제할 수 도 없는 입장이었으므로, 종교적으로 ‘중용’ 또는 ‘엘리자베스의 결정’ 등으로 다양하게 알려진 타협안 카톨릭과 개신교의 중간 노선을 가는 해결책을 내놓게 되었다. 이것을 영국 국교회의 기원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순교자의 반카톨릭정신 즉, 대륙의 Protestantism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 개혁자들이 바로 Puritans이다. 즉, 영국 국교회에 있어서 카톨릭의 형식을 (성서에 없는 의례) 일소하지 않으면 개신교의 진리는 발휘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주장이었다. 청교도란 용어는 국교회의 의식과 예배 형태가 로마교회와 너무 닮았다고 느껴서 '깨끗이 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부르는데 처음 사용한 것이다. 청교주의는 신앙상 계급제도가 없고 모든 신자는 성직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교를 벗어났다고 하는 영국 국교회는 국왕이나 여왕을 교회의 수장으로 받들었으며, 일반회원으로서는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귀족과 그 가신들이 존경을 받았다. 이런 이유로 국교회는 전제군주정치와 원칙이 동일했다. 거기에는 인간의 자유가 중시되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청교도들도 결국은 영국 교회 테두리 안에서 개혁을 주장하고 또 영국 교회와 잦은 교류를 하면서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따라서 국교회를 반대하는 단체가 생기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청교주의에 기초를 둔 것으로 반대자(Dissenter) 라고 불리는 것들이었다. 그중 제일 먼저 나타난 것이 장로교회였지만 장로에 의해 운영되는 장로교도 아직 일반 회원의 권리를 충분히 인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또 하나의 교회가 생기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빈곤하며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의 평등의 권리를 인정하는 조합 교회(분리파)였다.3.청교도의 성격청교도들의 이러한 사회윤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소명(Calling)설과 계약?예정(Contract)설이다. 먼저 소명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들 모두는 소명을 받아 하느님의 일을 지상에서 수행하게끔 되었다고 믿는 것이다. 칼뱅은 ‘직업은 신이 불러 맡긴 것이므로 귀천이 없으며, 여기서 얻어진 이윤은 신의 선물이’라고 하여 상공업자들의 입장을 두둔하였다. 자본주의 윤리의 기초가 되어 오늘날 서구 자본주의 경제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두 번째로 계약?예정설은, 인간은 자발적으로 하느님과 언약 또는 계약을 맺었으며 자신들이 맺은 언약을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구원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 계약 이론은 교회와 사회의 민주적인 제도 형성에 큰 역할을 했지만 하나님이 부여한 인간의 소명을 그들이 교회와 맺은 계약에 따라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는 의식 속에, 타락하기 쉬운 자신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강력한 중앙 통제 정부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데 쓰이기도 하였다.4. New England 공동체의 기본 질서와 가치1)종교적 사명청교도들은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성서 전례를 이용하면서 그들 스스로를 약속받은 땅을 찾은 신의 선민으로 묘사했다. 즉 신대륙에서의 공동체 실험은 종교적, 정치적으로 영국을 비롯한 유럽 종교개혁의 최전선이었다. 윈스럽(John Winthrop)은 이주의 근거가 청교도들이 신과 협약을 맺은 선택받은 소수라는 데 있으며 이러한 사명의 막중함으로 인해 이 협약을 위반할 경우 엄청난 재앙에 직면함을 경고하는 예레미아식 설교를 펼친다. 그는 이 협약의 장소가 영국이 아닌 새로운 땅, ‘뉴 잉글랜드’ 라고 말한다. 그의 의도는 ‘뉴 잉글랜드’가 영국이 중심이 된 유럽 종교개혁의 ‘새로운 현장’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1642년 청교도 혁명이 성공함에 따라서 윈스럽이 말했던 싸움의 최전선의 뉴잉글랜드는 의미를 잃는다. 그래서 미국 청교도들은 신대륙 공동체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재정립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고 매더(C. Mather)는 공동체를 단순히 유럽 종교개혁의 현장으로서가 아니라 예수의 재림과 같은 새로운 세계사가 열릴 신천지로 그린다. 이로써 ‘뉴잉글랜드’를 ‘아메리카’로 확장하는 동시에, 신대륙 이주에서 시작하는 미국 청교도 실험의 독자적인 역사를 정립하고자 한다.
1차 세계대전과 1920년대제1차 세계대전은 1914에 시작되어 1918년에 끝난 세계적인 참혹한 대 사건이다.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와의 격화된 분쟁이 각 나라의 동맹국을 끌어들여 인류의 역사상 최초의 세계대전이 되었다. 오스트리아 측의 동맹국은 독일, 터키, 불가리아 등이었고, 세르비아측 동맹국은 프랑스, 러시아, 영국, 이탈리아 등이었다. 미국은 1915년에 참전했다.제 1차 세계대전은 그 당시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대량의 사상자를 냈다. 그러면서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은 지원병이 되어 유럽으로 건너갔다. 이 중에는 작가를 지망하는 학생들도 많았는데, 이것이 그들에게는 전쟁을 실제로 느껴보고 특별히 파리의 문화를 접촉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유럽과 미국 동부의 문화를 거절하는 리얼리즘 운동에 이어 미국 독자적인 현란한 문학들이 이 시기에 많이 쏟아져 나왔다.1차대전이 끝나고 난 후, 미국의 경제는 호황을 맞았고, 국민들이 풍요롭게 살게 되면서 도덕의 혼란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러나 1917년의 러시아혁명은 30년대 사회주의 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1929년에 Black Thursday, 즉 월(wall)가의 주식 대폭락이 일어나면서 1930년대에는 실업률이 증가하기 시작했다.미국 사회에서 1920년대는 어떤 의미인가?미국의1920년대는 예술혁명, 풍속혁명 등의 키워드로 함축될 수 있는 화려한 시대였다. 1차 세계 대전을 치르고 난 후, 미국은 엄청난 경제적 호황을 누렸고, 실용주의가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은 물질적인 것에 치우쳐 질 낮은 경쟁을 유발시켰고, 사람들이 법을 공공연히 무시하며 온갖 범죄와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로 치닫게 하였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일군의 지식인과 예술가는 'modernism'이라는 고급문화의 창조만이 미국사회의 총체적 부패와 속물화를 치유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으며, 그래서 또 하나의 엘리트주의적이며 반동적인 'Lost generation' 과 같은 패배주의적 보헤미안들이 무리를 이루었다.20년대는 농민과 노동자의 불공평한 위치, 부유층의 지나친 금융투기, 할부판매를 통한 신용의 과다 팽창 등을 통해 불건전한 경제적 구조를 노출시켰으며, 또 한편으로 독점주의의 승리와 그에 따른 기업과 재정의 근본적인 힘으로 경영 통제의 기술 발달을 촉진하였다. 20년대에는 미국의 물질적 번영의 절정기이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세기가 지나감에 따라 정도가 더욱 심해진 심각한 사회적, 정신적, 불안정의 진입기였으며, 더 나아가서 노동운동의 쇠퇴결과를 초래한 결렬한 동맹파업으로 시작된 시대, 저곡 물가시대, 독선적 고립주의 정책으로 되돌아갔던 고집불통의 시대, 이상주의 쇠퇴의 시대였으며, 대공황으로 마감 지어진 시대였다.미국 문학 속에서 lost generation은 무엇인가?‘잃어버린 세대’라고 불리는 이들은 주로 1890년대 중반에 태어나 1차 세계대전 시에 입대하여 직간접적으로 참전체험을 한 사람들을 뜻하며, 1차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전쟁에 대한 환멸과 회의에 젊은 지식인들을 일컫는다. 또한 이들은 보헤미안의 생활방식을 찾고 미국의 물질주의적인 가치를 거부하는 새로운 가치관을 갖고 있어서 자국의 문명을 혐오하여 이 시기에 주로 파리로 망명했다. 패기 넘치는 이상주의를 꿈꾸었던 그들은 술을 마시면서 삶의 의미를 찾고 미국 문학에 길이 남을 문학작품들을 남겼다. 그 곳에서 여러 가지 문학활동을 하던 중 그들은 자국 문학의 전통을 재발견하여 자기들의 문학세계를 재확립하면서 20년대 말경에 귀국한 하였다. Lost generation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jazz age의 초상으로 기억되는 Fitzgerald, 잃어버린 세대의 리더였고 소설에 자연주의적인 테크닉을 도입한 소설가인 Hemingway, 그리고 Passos가 있다. Lost generation의 작가들은 20세기 문학에 큰 영향을 남겼는데, 그들 작품과 표현에 대한 과감한 도전과 혁신은 후대의 작가들에게 길을 열어준 셈이다.
할렘 르네상스 (Harlem Renaissance))-시대적 상황과 원인-1. 흑인인구의 대이동1890년대부터 시작되어 1920년대에 이르는 흑인 인구의 ‘대이동’ (Great Migration)은 할렘 르네상스의 중요한 배경을 이루고 있다. 당시 미국 흑인의 총인구 1000여만 중에서 20%에 달하는 200만 명이 남부에서 북부 또는 중서부로 그리고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했다. 북부 도시로의 흑인 인구의 이동은 이민규제의 강화와 함께(1924년에는 강력한 이민법이 제정됨) 노동력이 줄어들고 반면에 1차대전 후 미국의 산업팽창으로 노동시장이 확대됨으로써 싼 노동력의 수요가 급증함에 따른 필연적 결과였다. 이는 농촌의 단순하고 동질적인 삶에서 도시의 복합적이고 다원적인 삶으로의 변화를 가져온다.2. 게토(ghetto)의 공동체 생활흑인 인구의 대이동과 관련하여 할렘같은 대도시에서 이루어진 게토(ghetto)의 공동체 생활이 할렘르네상스를 가속시킨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과거의 남부 농촌생활에서는 흑인들간의 유대의식이 같은 조건 밑에서 같은 문제로 고통 받고 있다는 비교적 단순하고 추상적 차원의 것이었던 반면 도시 게토의 공동생활에서의 유대의식은 현실적이고 복합적이다. 이 공동체 생활은 전체 성원의 생활수준 향상과 교육 기회의 개선을 위한 노력의 과정을 통하여 “자기 존중과 독립의 새로운 태도”를 기르게 하고 “새로운 공동체 경험은 그것을 해석할 새로운 문학운동을 요구”함으로써 지식인 계층을 만들어냈다.3. 조직적 흑인운동급진적이며 조직적인 흑인운동의 확산 역시 할렘르네상스의 주요 원인이다. 점진주의(gradualism)에 염증을 느낀 두보이스)를 주축으로 한 29명의 젊은 흑인지식인들이 1905년 나이아가라 폭포에 모여 완전한 시민권을 요구한 나이아가라 운동은 급진적 흑인운동의 기폭제 구실을 했다. 1910년에는 다른 흑인 및 백인집단과 결유하여 NAACP를 결성하게 된다. 1908년의 스프링 필드(일리노아주) 흑인 폭동을 계기로 흑인의 인종과 지위향상의 필요성을 절감한 흑백 자유주의자들이 가담한 NAACP의 결성에는 윌리엄 딘 하우얼스(William Dean Howells), 존 듀이(John Dewey) 등의 백인 지식인들도 발기인으로 참가하였으며 특히 흑인의 시민권, 균등한 교육기회, 흑백의 평등을 위한 법적 투쟁 등을 활발히 전개해 나감으로써 흑인들의 인종적 자각을 고취하는데 기여했다.4. The CrisisNAACP의 기관지인 『The Crisis』는 NACCP의 결성과 함께 두보이스를 편집인으로 해서 창간되었다. 흑인들에 대한 폭력 린치 행위, 흑인 폭동 사건, 흑인에 대한 부당한 행위와 추문들을 중점적으로 보도함으로써 흑인문제의 개선을 위한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랭스턴 휴즈의 유명한 시 「The Negro Speaks of River」등 흑인작가의 문학작품을 게재하여 문학 운동으로서의 할렘 르네상스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NUL(National Urban League)의 기관지인 『Opportunity』역시 흑인문제를 다루었고 특히, 흑인문학의 현상모집을 통하여 1925년에는 랭스턴 휴즈의 「The Weary Blues」를 일등 당선작으로 발표했었다.5. 백인 작가들의 관심과 Negro Vogue할렘 르네상스의 원인과 배경은 위에서 열거한 흑인의 특수한 상황이나 흑인 운동 단체에 국한 된 것이 아니다. 할렘 르네상스는 미국적 현상이었고 흑인의 삶과 문화에 대한 백인 작가들의 관심 또한 할렘 르네상스를 촉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유진오닐의 『Emperor Jones』,『All God's Chillun Got Wings』,셔우드 앤더슨의『Dark Laughter』칼 반 베흐텐의 『Nigger Heaven』모두 흑인의 삶을 소재하여 ‘흑인’이란 주제를 진지하게 다루고있는 작품들이다. 특히 칼 반 베흐텐은 할렘에 거의 상주하다시피 하며 문학, 미술, 사진 등 다양한 예술 활동뿐만 아니라 흑인 지식인들과의 밀접한 교류를 하여 할렘의 예술을 백인사회에 알리는 공헌을 한 바 있다.반 베흐텐의 행적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백인들 사이에 확산되어 간 당신의 Negro Vogue 또한 할렘 르네상스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Jazz Age라고 불리는 1920년대는 1차대전 이후 전쟁의 불안과 공포로부터 새로운 변화와 위안을 갈구하던 시대였다. 전후 물질, 상업주의적인 속물근성에 식상함을 느낀 백인들 중 특히 젊은 지식인층이 할렘을 술, 춤, 섹스가 확보된 쾌락 추구의 메카로 여겼다. 그러나 이는 부도덕한 쾌락의 상징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1910년대 중반 이후 특히 1차대전 이후 미국에 널리 알려진 프로이트의 심리학은 성과 원시성을 건강한 활력으로 정당화 시켜주었고 할렘은 바로 이러한 건강한 섹스와 원시성의 상징이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