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을 읽고세계사를 배우면 알았던 십자군 전쟁이 이 책을 읽은 후에는 확연히 다르게 느껴졌다. 역시 어떤 전쟁이던지 그것을 누구의 주관에 따라 해석하느냐가 역사를 바꾼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1096년부터 1291년까지 8차례나 일어났던 유럽인들의 아랍인에 대한 공격(십자군 전쟁)은 이제까지 수업시간에 배워왔던 것이나 여타 다른 책이나 방송 매체를 통해 접했던 것이 진실이라고 알아왔다. 과연 그것이 진실일까? 우리가 연일 신문과 방송에서 통해 듣는 전장의 소식은 어쩌면 그들의 입장에 유리한 정보만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을 진실의 역사, 참 역사로 인식한다.「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은 그런 점에서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사실, 진실이라 믿어왔던 사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를 갖게 한다. 어쩌면 이 책 역시 아랍인의 눈으로 본 일방적인 시선으로 진실이 아닐 수도 있지만, 우리가 이제까지 알고 있던 역사와는 다른 역사를 보여주며 아직도 완전히 끊나지 않은 미국과 이라크 전쟁을 바라보는 태도를 다시 한 번 고찰시킬 수 있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본다.이 책은 레바논에서 태어난 소설가이자 역사가에 의해 쓰여져 소설처럼 아주 쉽게 읽힌다. 우리나라의 고전 역사서를 보는 것처럼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영웅전이나 일대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그 당시의 사관의 눈으로 본 사실들도 첨가되어 있어 그 당시의 사회 문화도 이해 할 수 있다. 그래서 단순히 연도순으로 요약한다기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보는 십자군 전쟁이란 무엇이며 이 전쟁이 왜 일어나게 됐는지, 전쟁을 하고 난 뒤의 영향 등을 나름대로 파악해보았다.우리는 십자군 전쟁을 “예수님이 태어났던 예루살렘이란 성지를 이교도인 아랍인들에게서 되찾기 위한 crusade, 성전”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에 성지회복을 위해 온 프랑크인(아랍에서 서유럽인들을 대중적으로 부르는 말, 특히 프랑스인을 지칭)들은 오히려 무고한 시민들을 죽이거나 그리스도교인들을 그들의 교회당에 몰아넣고 산채로 태워 죽이는 등 그들이 성지를 회복하기 위해 전쟁이 일으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책 이곳 저곳에서 밝히고 있다. 또 예루살렘의 회복이 진정한 목적이었다면 200년에 걸친 원정동안 예루살렘을 거저 주겠다는 아랍 지도자들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고 본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행진을 주장했고 자신들의 경제적 실리만을 추구하다 끝내는 분열했으며 십자군 전쟁은 실패하게 됐다.그러나 이 책에서는 꼭 아랍인을 침략한 프랑크 인들의 침략이 잘못된 것이라고만 몰아세우지는 않는다.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아랍인 내부에는 여러 가지 모순이 산재해 있었고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그것이 더 심화되어 나타난 것일 뿐이며 이 전쟁은 그런 모순들로 인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가장 포괄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오래 전부터 교파나 종파로 인해 갈려진 아랍인 들 사이에 단결과 협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전쟁이 일어날 당시만 해도 프랑크인들보다 훨씬 뛰어난 문명과 의학, 과학 기술, 법 제도를 가졌다 하더라도 아랍인은 서로 분열되어 있었고 프랑크인들에게 형제 국가가 침략 당하는 사실을 알면서도 형제국이 없어지면 서로간의 영토전쟁에서 대결 상대가 하나 없어지는 것이므로 그들은 돕지 않았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다라 오히려 모든 아랍인들의 적인 프랑크인들이나 룸인(로마인)들과 동맹과 협상을 맺기도 했다. 하지만 점점 아랍인들을 통합시는 인물이 나타나게 되고 그 인물을 중심으로 아랍은 단결하게 되었다. 반면에 프랑크인들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뭉쳤던 처음의 단단한 연대력이 없어지고 와해되면서 처음에 그들이 아랍에 입성할 때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면서 상황이 바뀌고 십자군 전쟁은 프랑크인들의 패배로 끝이 났다.아랍인들에게는 국가나 왕, 군주에 대한 개념이 모호했다. 항상 한 집단의 우두머리가 죽게 되면 그 집단은 왕의 자리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다투었으며 분열되었고 항상 혼란스러웠다. 반면에 아랍에 들어온 프랑크인들은 왕에 대한 개념만은 확실했다. 프랑크인의 지도자는 종교적인 명분을 잘 내세워 일반 시민들을 잘 통합시켰으며 시민도 만약 자신의 군주가 죽어 세습되는 군주가 뒤를 잇는다 하더라도 그 군주를 중심으로 통합되었다. 아랍인의 지도자들은 항상 왕권다툼에만 정신이 팔려서 그 때문에 쉽게 자신들의 땅에서 민둥이의 야만인을 쫓아낼 수 있었음에도 태만함과 군주 자신의 이익만을 따지는 행동으로 200년 동안 많은 아랍인들이 프랑크인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약탈당하게 내버려두었다. 십자군 전쟁은 길었던 기간만큼이나 프랑크인들과 아랍인들 사이에 종교적, 정치적, 사회 문화적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이 책에서 가장 돋보이는 변화는 전쟁을 통해 잡은 포로를 남자는 10디나르, 여자는 5디나르, 아이는 1디나르 이런 식으로 화폐와 교환함으로써 시장 경제가 점점 생성되었다는 점이다. 또 서로가 차지한 땅을 다른 국가가 지나가려 할 때는 세금을 받으면서 무역과 관세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농부들은 그들의 농산물을 시장을 형성해 팔기 시작하면서 상업이 활발하게 되었다. 또 십자군 전쟁이후 유럽의 문화는 신(神)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변화하게 되었지만 어쩌면 이 전쟁을 통해 부유하고 강력했던 아랍의 문화를 접하게 되면서 더 발전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당시에만 해도 아랍에서는 천명의 전문 의사들과 대규모 무료 병원, 정기적 우편제도, 중국에까지 지점을 두었던 은행, 제지 공장 등이 있었지만 아랍에서는 다리가 곪아 들어간 기사나 결핵을 앓아 쇠약해진 여인의 병은 악마 때문이라고 결론 내리는 단순히 신앙에 의지한 비과학적인 방법이 성행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전쟁당시 아랍인들이 서로 통합하지 못했던 내부의 여러 종파간의 싸움에서 아사신파가 적에게 겁을 주는데 선호한 무기는 바로 상인이나 수행자로 변장하여 사람이 많은 곳에서 상대편을 암살하고 그 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었다. 이것은 얼마 전의 미국과 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가 게릴라전을 펼치거나 자살 폭탄조를 형성해 미국에 대응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볼 수 있다. 또 아랍의 땅에서 그들의 적을 쫓아내기 위해 아랍은 통합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는 종교적인 이유 아래 자신이 신에게 부여받은 명으로 지도자가 되었고 정당화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아랍의 지도자는 단일 종교와 단일 국가, 단일 목표를 세웠으며 지도자는 신이 자신에게 아랍인을 구제하라고 천명한 운명이라 밝힌 것은 얼마 전의 후세인이 미국의 침공에 ‘성전으로 맞서라’라고 연설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그 당시의 십자군 전쟁은 아랍인들의 행동과 프랑크인을 생각하는 방법 등 여러 가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지금의 미국의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 하더라도 우리들이 한국전쟁 이후 미군정이 우리 땅에 뿌리를 내릴 때 보였던 성조기를 흔들며 환영하는 반응은 아랍인에게서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아랍인들은 당시 프랑크족 기사들의 매끈하게 면도한 얼굴모습 때문에 수염이 없는 것은 비난의 대상이 되고 턱수염을 남자다움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의 유럽인들에 대한 저항과 반목의 인식은 1000년이나 오래 전부터 지속돼 오던 것이기 때문이다.
[ 조지 오웰의 ‘1984년’]‘1984년’은 조지 오웰의 미래소설이자 정치소설이다. 먼저 소설의 줄거리를 살펴보겠다.1984년의 세상에서는 세계가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이스트아시아로 나뉘어 지속적인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래서, 물자도 풍부하지 못하고 모든 국가전력을 전쟁수행을 위해 동원해야 한다. 사람들은 당의 명령의 복종해야 하고, 조금도 당에 반항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현상을 지금에서 살펴보더라도 전체주의 국가와 유사함을 느낄 수 있다. 현재 세계에 남아있는 전체주의 국가는 그다지 많지 않지만, 세계2차 대전 당시만 해도 독일의 나치즘, 이탈리아의 파시즘을 비롯해서 많은 국가들이 전체주의 국가체제를 유지했다. 특히 냉전시대에는 소련, 그리고 공산주의체제 국가들이 이러한 전체주의로서 국민들을 통제했다.1984년, 당은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있다. 이를 위하여 언어를 줄여 신어를 만들어 냄으로써 인간의 사고의 폭을 줄이고자 한다. 그리하여 신어에는 '과학'이란 말도 없다. 과거의 과학적 업적을 이루는 데 기반이 되었던 경험적 사고방식은 「영사」 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과 위배되기 때문이다. 기술의 진보라는 것마저 거기에서 생긴 소득이 인간의 자유를 감소시키는 데에만 사용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역사 역시 필요하면 깨끗이 지워버리고 다시 고쳐 쓰는 양피지와 같다. 이를 책에서는 '이중사고'로 표현하고 있는데, 과거를 지배하는 사람이 미래를 지배하며, 현재를 지배하는 사람이 과거를 지배한다는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당에서 과거를 변경시키는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전보다 지금이 향상된 것이라고 믿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당의 무오성을 보장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은 이러한 '이중사고'가 단지 책에서만이 아닌 현실세계에서도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대의 사람들은 너무나 똑똑해서 이와 같은 술책에 넘어갈 것 같지 않지만, 코소보사태에서 적용된 예만 보아도 이를 살펴볼 수 있다. 예컨대 이중사고는 과거의 사건들을 현재의 정치적 목적에 봉사하는 방식으로만 해석하도록, 그리고 기억하도록 강제한다. 유고내전의 경우 크로아티아계를 학살했던 세르비아계는 그 동안 화해하고 같이 잘 살았던 기억은 모두 던져버리고 오로지 그들이 2차 대전 당시 당했던 것만을 언급할 뿐, 그 책임자와 관계자들이 처벌되었던 것에는 언급을 하지 않고 민족주의 감정을 북돋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현실 교육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실제로는 용병으로 참전했던 베트남전을 두고 ‘자유세계에 봉사하기 위해’ 파병했다고만 가르친다. 이것 역시 역사를 왜곡하는 이중사고의 단적이 예인 것이다. 따라서 ‘사임’처럼 너무 똑똑하고, 지적이고 명백하게 관찰하여, 절제와 무관심 그리고 일종의 우매성을 갖추지 못하면 당에 의해 제거되고 만다. 1984년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드 역시 멋진 신세계의 버나드 마르크스와 같이 일종의 일탈자다. 물론, 일탈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해당 사회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행동기준에서 어긋나는 것을 일탈이라고 정의했을 때에는 확실히 일탈자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윈스턴은 당에서 금지하는 남모르는 무의식을 가졌고, 일기를 써서 기록을 남기기를 원했으며, 여자를 인간으로서 사랑했기 때문이다.전제군주가 "너희들을 이것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명령하며, 전체주의자가 "너희들은 이것을 해라"라고 명령한다. 이와는 달리 당에서는 "너희들은 이렇게 되어 있다"라고 한 인간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결국 윈스턴 역시 101호실의 가혹한 고통의 경험을 통해 당이 원하는 인간상으로 세뇌되어 대형(大兄)을 사랑하게 되어, 사형을 기다린다.
[펄떡이는 물고기 처럼을 읽고]주인공인 메리 제인 라미레즈의 회사에서 부딪힌 위기와 그 극복과정을 그리면서 읽는 이에게 삶에 대한 자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끔 하는 거 같다. 책을 읽으면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지금 난 대학교 생활을 하고 있는데 이 학교생활에 있어서 수업을 듣고 레포트를 쓰고 시험을 보고 너무나도 일상적인 생활에 익숙해져서 어쩔 수 없이 그래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생활하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는 겪어내야 할 통과의례인 마냥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그렇게 생활하고 있을 것이다.책에서 제인은 우연히 세계적인 파이크 플레이스 어시장에 들른다. 그곳에서 살아 숨쉬는 삶의 현장을 보게 된다. 물고기 비린내 나고 다들 생각하기에 비위생적이라고 생각하는 곳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다니는 남들이 우러러 보는 그런 고위급회사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생동감을 보게 된다. 부서를 옮기면서 겪게 되는 위기를 그 안에서 해결하고자 로니라는 사람에게 조언을 얻는다 주인공 뿐아니라 나에게도 정말 가슴으로 와 닿는 말이 있었다.“비록 당신이 어떤 일을 하는가에 있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하더라도 당신이 어떤 방법으로 그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항상 선택의 여지가 있다”나 또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대학에 왔다. 그리고 아직 뚜렷한 나의 미래를 설계하지 못하고 공부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나의 현실을 내 스스로가 어떻게 받아 들이느냐가 결국 내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지 불행하게 사는지 좌우하는 것이다. 기왕에 대학생활을 한다면 좀더 보람있게 즐거운 마음가짐으로 적극적으로 학교생활을 해야 할 것이고, 나에게 닥쳐오는 사소한 근심거리들을 경주마의 채찍질로 여긴다면 더 보람된 대학생활이 될 것이고, 그 결과 또한 좋을 것이라 생각된다.책에서는 회사생활에 있어서 직원사이나 고객을 대하는 마음이 어떠해야 할지를 강조했지만 학교생활도 이익을 추구하지 않을 뿐이지 그 형식은 같다고 생각한다.“다른 사람의 날을 만들어 주려는데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은 지속적이고 긍정적인 감정의 흐름을 제공하게 된다.”“그들은 절대로 방심하지 않는다, 그들의 눈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고객을 바라보고 있다.”로니가 말해주는 파이크 플레이스 어시장 사람들의 성공 비결이다. 고객이 아니라 친구를 아니면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를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도 또 다른 성공의 지름길이 아닐까 생각 된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주로 역사의 이해이다. 역사는 변하는 것이다. 과거의 세계관이 거의 해체되고 보편적 세계 사상이 결핍된 현대는 사상적 기반이 흔들린 채 쇠락해져 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우리는 역사를 비판,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우리가 역사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역사의 정의를 먼저 바로잡아야 한다. 기록된 역사가 과거에 있었던 사실 그대로라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데 역사에 적힌 일은 단순한 사실이며 절대적인 사실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쩌면 역사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풀이일지도 모르며 더 나아가 예술적인 창작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역사의 생명은 사실의 뜻을 붙잡는 해석에 있었던 것이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운 것이 고려시대의 역사가가 보면 나라를 세운 것이지만 신라시대의 역사가가 보면 나라를 무너뜨림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참 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우주, 인생에서 역사를 굽어보고 쓴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사관 없이 쓴 역사는 참 역사가 아니며 사관에 이르지 못한 역사 이해도 참 역사의 이해가 아닌 것이다.함석헌 선생은 역사 이야기에 들어가기 앞서 세계 역사의 흐름을 마음속에 그려두라고 했다. 그렇다고 선생은 세계의 역사라고 해서 한국의 역사 자체를 잊어서도 안 된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지리적으로도 고난의 역사였다. 여기서 말하는 지리학적이라 함은 우리나라의 위치인데 문명이 발달하기에 적합하다는 북 온대 지역에 위치한 것도 그렇지만 해양 교통과 육상 교통이 가능한 반도에 위치한 것도 우리의 고난의 역사의 큰 원인이다. 이러한 위치는 문물 수입이 빠르고 문화가 퍼지는 데 유리하다는 좋은 점도 있지만 늘 남의 쳐들어옴을 입어서 독립을 지켜나가기 어렵다는 단점 또한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만주 그리고 일본의 세력에 둘러 싸여 있고 이는 우리나라의 역사상에 늘 되풀이되던 문제였음을 생각하면 쉽게 공감을 할 수 있는 부분이다.우리나라의 지리학적 위치가 역사에 미친 영향이 크다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역사는 지리적 위치의 역사가 아니라 사람의 역사이다. 지리가 미치는 영향이 크기는 하나 그것은 주어진 터전일 뿐 그 흥망의 원인은 되지 못한다. 역사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사람에 달려있다. 한국의 역사는 오직 한국 사람의 역사인 것이다. 그리고 고난의 역사의 주인으로써 한국 사람은 한국의 역사를 자기와는 관계없는 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슴속에서 찾아야 한다.고조선 이후 한국 문화를 크게 이끌도록 뽑힌 후보는 고구려와 신라 그리고 백제였다. 선생도 그러하지만 나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삼국 시대를 접하게 되면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고구려가 너무나 쉽게 망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만약 고구려가 그렇게 쉽게 망하지 않았다면 만주와 조선은 하나의 통일을 이루어 큰 나라가 되었을 지도 모르며 우리민족은 지금 중국 평원에까지 이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 민족 전체의 운명이 바뀌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한 고구려가 망했으니 고구려가 망한 것은 한 때의 실패만이 아니라 실로 길이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이었다는 선생의 말은 나에게도 큰 공감을 자아내었다.실패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 실패를 만회할 기회가 주어지기 마련이듯이 역사도 그러하다. 삼국 시대의 역사는 실패의 역사이다. 민족 통일을 하자는 것이 부서지고 말았고 문화 발달이 시들어버리고 말았으니 그것은 실패의 역사이다. 그것을 만회할 기회가 고려시대의 역사인데, 문제는 고려시대의 역사가 그러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고려가 삼국시대에 이루지 못한 과제를 이루기만 했어도 우리의 역사는 적어도 지금 같지는 않았을 텐데... 그런 의미에서 고려시대의 역사는 나에게 또 하나의 안타까운 시간이 아닐 수 없다.고려시대 있었던 가장 큰 사건을 들라면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의 성공과 실패가 가져다주는 결과가 너무도 상반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문제가 관여되어 있어서 인지도 모르겠지만 앞에서 말한 대로 기자조선이 우리 유교사회 형성에 시작이었다면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의 실패는 한국 역사가 보수적, 속박적 사상에 정복된 또 하나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채호 선생은 묘청의 난을 조선 역사 1천년 이래의 제일 큰 사건 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이 난은 보통 난이 아니고 유파 대 불파의, 종교적인 세력 다툼도 관여되어 있는 싸움이었다. 난 묘청이 정말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서경천도를 주장했는지 아니면 단지 자기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서 그랬는지를 알 수는 없지만 묘청파가 이겼더라면 당장 북벌은 못하더라도 그 정신은 이었을 수도 있고 조선시대로 이어지는 유교적 사상의 종살이는 면하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묘청의 서경천도 실패 후 고려는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하기 시작하고 고려를 이어 등장한 나라가 조선인데 조선이 건국부터 시대가 진행될 때까지에는 참 많은 우여곡절이 있게 된다. 여러 세력의 싸움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그에 대한 예로 고려와 조선이라는 나라가 교체되는 시기에 대두된 두 세력이 있었으니 그것이 최영과 이성계이다. 함석헌 선생은 이 두 세력의 대립을 섭리가 가장 중요한 위기에 두 반대되는 정신과 사상을 두 인물에 대표시켜 우리 민족을 시험한 것이라고 표현하고 계신다. 말 그대로 두 인물은 전혀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최영이 북벌을 주장하는 반면 이성계는 반대를 하는 입장이었고 결국 이들의 대립은 위화도 회군이라는 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물론 그 당시 상황을 비추어 볼 때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최영의 북벌론보다 현실적인 주장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꾸지도 않은 꿈을 꾸었다고 한 사실이나, 일부러 만들어 묻었다가 캐내고는 우연하게 발견된 것처럼 위장한 사실들은 이성계라는 한 인물에 아니 어쩌면 그 인물이 세운 조선이라는 나라에게까지 믿음이 가지 않게 만든다.그러나 한 나라를 세운 태조 이성계도 말년에는 자기 아들들의 왕위 다툼으로 괴로워하며 함흥으로 내려가 돌아오지 않는 신세가 되는 것을 보니 인간으로써 불쌍하기도 하다. 왕위 다툼으로 자신의 아들들이 서로의 목에 칼을 내리 꽂는 모습을 보는 아비의 마음은 어떠하였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포은 정몽주와 최영의 목에 칼을 내리친 이성계에게 하늘이 내리신 벌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이처럼 피로 얼룩진 조선이라는 나라에도 백성을 헤아리는 어진 왕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세종대왕이다. 국사시간에 언뜻 들은 바로는 정말로 훌륭하게 나라를 다스린 왕에게는 대왕 이라는 칭호를 붙인다고 한다. 세종대왕이야말로 이 대왕 이라는 칭호가 어울리는 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의 언어인 한글을 만드신 분이어서 뿐만이 아니라 뛰어난 과학 분야의 개발이나 산업을 장려하신 분이 바로 세종대왕이기 때문이다.우리는 흔히 교과서에서 한글은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창제한 것이라고 배우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 따르면 그 당시 한글 창제를 반대하였던 세력들 중 하나가 집현전 학자들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백성을 위해, 민족을 위해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노력은 더욱 값진 것이라고 생각한다.세종은 여러 분야에서 빛나는 업적을 세웠지만 외정에 있어서는 그리 탁월한 능력을 보이지 못했던 것 같다. 물론 두만강과 압록강을 경계선으로 하는 오늘날의 국경을 확정짓기는 했지만 두 강을 결코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거칠 것이 없다고 표현한 북진 개척의 일등 공신 김종서의 시도 두 강을 넘지 못하는 자신의 갇힌 용기를 표현하고자 함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앞서 함석헌 선생은 우리 민족의 역사를 수난의 역사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에 비추어 볼 때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큰 수난은 임진왜란이 아니었는가 싶다. 물론 전쟁으로 우리가 입은 피해는 상당했지만 그 당시 조선의 정치인들은 정말 한심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당파 싸움에만 열중하고 자기 권력욕만 채우기에 급급하며 당장의 안위만을 생각했던 사람들... 만약 이 한사람이 없었다면 조선은 왜 국에 패하고 말았을 지도 모른다. 바로 충무공 이순신이다. 그는 왜 국의 자들도 조선에도 이런 영웅이 있었다 고 말할 정도였다고 하니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난중일기를 읽고][서론]사실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는 교수님께서 언급하신 전쟁에 관련된 책들과는 조금 거리가 있을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전쟁은 확실하니깐 반심반의로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평소 꼭 읽어보고 싶었던 책이었던 까닭에 집어 들게 되었습니다. 또한 제가 이순신이라는 인물의 내면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한 책이었기 때문에 시도를 해보았습니다. 이점 양해 부탁드립니다.[본론]‘난중일기’는 임진왜란(壬辰倭亂)에서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운 충무공 이순신이 전쟁 중에 기록한 일기이다. 그가 전쟁의 와중에 아무런 이름도 없이 7년 동안 써왔던 일기를 200여년 뒤에 간행하면서 누군가가 붙인 이름이 ‘난중일기’이다.부하가 군율을 어겨 처벌하는 이야기, 가족들의 이야기, 자신의 생활의 작은 일 등이 적혀 있는데 지극히 담담한 어조로 쓰여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그는 함경도에서 하급 무관의 직위에 있을 때도 일기를 꾸준히 쓴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 시절의 일기는 ‘진중일기’란 이름이 붙여져 있다.내가 난중일기를 통해 직접 확인하고 싶은 것은 크게 보아서 네 가지였다. 자신을 휘두르는 정치에 대한 생각, 내면의 인간적인 모습, 명량과 노량으로 나서는 그의 마음 빛, 그리고 문체의 지독한 담담함 이었다. 그 대부분은 정유년 (선조 30년, 1597)의 일기에서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이순신은 바다에서 패하지 않았다. 옥포에서, 한산에서, 당항포에서, 명량에서 그리고 자신이 죽음을 맞는 노량 앞바다에서도 그는 패하지 않았다. 옥포에서의 싸움은 임진년 조선의 육군과 수군을 통틀어 처음의 승리였다. 수세와 공세, 도주와 역공, 포위와 역포위에서 신속한 위력을 떨쳤던 학익진(鶴翼陣)으로 승리를 이끌어 내었던 한산도 앞바다에서의 해전은 전쟁 전체의 국면을 바꾸어 놓을 만한 것이었다. 적들은 남해안의 제해권을 상실하고 바다를 통한 보급이 끊겼으며 퇴로가 막혔다. 적의 서해 우진을 좌절시킴으로서 조선은 전라, 충청, 황해를 지켜낼 수 있었다. 하지만형세가 기울어지니 하늘이 노여움을 푸는 줄을 알겠도다.라는 교서를 내리던 임금은 어전회의에서한산도의 장수는 편안히 누워서 무얼 하고 있는가 어찌 이순신이 가토의 머리를 가져오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다만 배를 거느리고 기세를 부리며 기슭으로 돌아다닐 뿐이다. 나라는 이제 그만이다. 어찌할꼬. 어찌할꼬.이순신이 부산에 있는 왜적의 진영을 불태웠다고 조정에 허위 보고를 하니, 이제 가토의 대가리를 들고 와도 이순신을 용서할 수 없다.이순신이 글자를 아는가?이순신을 용서할 수 없다. 무장으로서 어찌 조정을 경멸히 여기는 마음을 품을 수 있는가?해군의 선봉을 갈아야 겠다. 이순신을 털끝만치도 용서해 줄 수 없다.라고 말했고 이순신은 압송되어 심문 받는다. 임금은 일선의 작전 지휘관에게 전술, 전략적 명령을 내린 바가 있었다. 바다를 건너오는 가토를 해상에서 요격하라는 것이었다. 가토는 임진년, 조선 출병의 제 1진이었고 꽃놀이하듯이 가마를 타고 한양으로 진격했었다. 임금은 가토의 목이 필요했던 것 같으나 이순신에게 함대를 무작정 바다에 띄워서 언제 올지 모르는 적을 기다리라는 명령은 고려할 가치가 없었을 것이다. 신문 받고 나오던 그날도 이순신의 일기에는 표정이 없다.정유년 4월 초1일.맑았다. 옥문에서 나왔다. 남대문 밖 윤간의 종이 집에 이르러 봉, 분, 울, 사행, 원경 등과 한 방에 같이 앉아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지사 윤자신이 와서 위로하고, 비변랑 이순지가 보러왔었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 먹은 뒤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다. 그의 아들 기헌도 왔다. 이순신(李純信)공이 술병을 가지고 와서, 같이 취하며 간곡한 정을 나누었다. 영의정(유성룡), 판부사 정탁, 판서 심희수, 찬성 김명원, 참판 이정형, 대사헌 노직, 동지 최원, 동지 곽영이 사람을 보내 문안했다.고만 적고 있다. 이순신은 고문 받았고 백의종군하게 되었으나 담담하다. 그의 글에서 정치에 대한 그의 생각은 찾아볼 수 없었다.그 해 7월 16일, 원균의 함대는 칠천량 해전에서 참패했다. 조선 전다. 그는 여전히 정치에 대해 말이 없고 글에서도 감정은 묻어나지 않는다.정유년 7월 18일.맑았다. 새벽에 이덕필과 변흥달이 와서, “16일 새벽에 수군이 크게 패해, 통제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와 여러 장수들이 많이 해를 입었다.”고 전했다.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뒤에 원수(도원수 권률)가 와서,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어찌할 수가 없다.”고 했다. 사시 (밤 10시)까지 이야기했지만 대책을 세울 수가 없었다. “내가 바닷가 지방으로 가서 듣고 본 뒤에 대책을 정하겠다.”고 했더니, 원수가 기뻐했다. 나는 송대립, 유황, 윤선각, 방음원, 현응진, 임영립, 이원룡, 이회남, 흥우공 등과 함께 길을 떠났다. 삼가현에 이르자 새로 부임한 현감이 나와서 기다렸다. 한치겸도 왔다.그는 도원수 권률의 말에 바닷가로 가보겠다고 얘기한다. 확실한 것은 그에게는 뚜렷한 적이 있다는 것일 것이었다. 그가 입각해야할 현실은 조국의 산과 들을 헤집고 강과 바다를 피로 물들이는 ‘바다를 건너온 적’이 눈앞에 있다는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정유년 8월 3일.맑았다.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梁護)가 교서와 유서를 가지고 들어왔는데, 삼도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 숙배한 뒤에 삼가 받은 서장을 써서 봉해 올리고, 곧 길을 떠나 두치 가는 길로 들어섰다. 초경(저녁 8시)에 행보역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고, 3경(밤 12시)에 길을 떠나 두치에 이르니 날이 새려 했다. 남해현령 박대남이 길을 잃어 강가 정자로 잘못 들어갔으므로, 말에서 내려 불러왔다. 쌍계동에 이르니 모난 돌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데, 갓 내린 비에 물이 불어 간신히 건넜다. 석주관에 이르자 이원춘과 유해가 복병해 지키다가 나와서 보고, 적을 토벌하는 일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했다. 저물녘에 구례현에 이르렀는데, 온 고을이 쓸쓸했다. 성 북문 밖 전날 머물렀던 집에서 잤는데, 주인은 이미 산골짜기로 피했다고 한다. 손인필과 손응남이 곧 보러 왔는데, 이른 감을 바쳤다.그는 기어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했다.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으니, 지금의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은 살려고 마음 먹지 말아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면 마땅히 군률대로 시행하겠다.“ 두 번 세 번 엄격히 약속했다. 이날 밤에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진다.“고 말해주었다.그는 전날 적의 배가 200척이 넘는다는 보고를 들었다. 그에게는 12척의 판옥전선이 있을 뿐이었다.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 하지만 기필코 이겨야만 하는 싸움. 그 싸움을 앞두고 그는 ‘살려고 마음 먹지 말라.’고 말했다. 그 자신의 마음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정유년 9월 16일.맑았다. 이른 아침에 별망이 나아와, “숫자를 알 수 없는 적선이 곧장 우리 배를 향해서 온다”고 보고했다. 곧 여러 배들에게 명령해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게 하자, 적선 330여 척이 우리 배들을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스스로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 생각하고, 회피해 살아날 궁리만 했다. 우수사 이억추는 아득히 먼 곳으로 물러나 있었다. 나는 노를 빨리 저으라고 재촉하며 앞으로 돌진해, 지자(地字), 현자(字玄)등 여러 가지 총통을 마구 쏘게 했다. 탄환이 폭풍우같이 쏟아졌다. 군관들이 배 위에 빽빽히 늘어서서 빗발처럼 화살을 쏘아대자,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다가왔다 물러났다 했다. 그러나 여러 겹으로 에워싸여 전세가 어찌 될는지 알 수 없으므로, 온 배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질린 얼굴로 돌아봤다. 그래서 내가 조용히 타일렀다. “적선이 비록 1,000척이라고 해도, 우리 배를 대적하지는 못한다.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말고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라.” 그리고 나서 여러 장수의 배들을 돌아보니, 먼 바다에 물러나 관망하면서 나아가지는 않았다. 배를 돌려 곧바로 중군 김응함의 배로 가서 먼저 그의 목을 베어 높이 내걸고 싶었지만,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들이 점점 더 멀리 물러나고 적선이 를 가겠단 말이냐?” 그러자 안위가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했다. 또 김응함을 불러 말했다. “너는 중군이 되었으면서도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벗어나겠느냐? 당장 처형하고 싶지만, 적의 형세가 급하니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 그래서 두 배가 적진을 향해 곧바로 들어가자, 적장이 그 휘하의 배 3척에게 지시해 (왜놈들이) 일시에 안위의 배에 개미 붙듯 달려들어 서로 먼저 올라가려고 했다. 안위와 그 배에 탄 군사들이 죽을 힘을 다해서 마구 쳤다. 거의 힘이 다하자, 내가 뱃머리를 돌려 바로 쫓아들어가 빗발치듯 쏘아댔다. 적선 3척이 남김없이 다 소탕되자, 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의 배가 뒤쫓아와서 힘을 합해 적을 쏘았다. 투항한 왜인 준사는 안골포 적진에서 항복해 온 자인데, 내 배 위에 있다가 (바다에 빠져 있는 적들을) 내려다보더니, “그림무늬가 놓인 붉은 비단 옷을 입은 자가 바로 안골포에 있던 적장 마다시(馬多時)다.”라고 말했다. 내가 김석손을 시켜 갈고리로 뱃머리에 낚아올리자, 준사가 신나 날뛰면서 “맞다. 마다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곧 명령해 토막토막 자르게 하니, 적의 기운이 크게 꺾였다. 여러 배들이 일제히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진격했다. 지자포와 현자포를 쏘고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대니, 그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다. 적선 30척이 깨어지자, 적선들은 달아났다.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가까이 오지 못했다. 이는 참으로 천행이었다. 물결이 몹시 험하고 형세 또한 외롭고 위태해, 당사도로 진을 옮겼다.그는 결국 승리한다. 명량, 물이 우는 진도 앞 바다에서 그는 12척으로 330척을 막아낸다. 그가 어느 해협보다도 물길이 빠르다고 알려진 명량 해협에서 적을 막아냄으로서 적은 서해를 돌아 한양으로 향할 수 없었다.말한바대로 명량은 현대의 기선들조차 쉽사리 거슬러 올라가지 못할 정도로 유속이 빠르고 육지와 섬(진도)를 연결하는 다리를 놓을 수 있을 정도로 폭이 좁다. 그가 전날 꿈에 나타난 신인이 일러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