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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의 시각에서 본 조선시대의 패션감각
    조선시대의 패션감각序..서론본론 : 조선시대의 의복과 현대 시각으로의 해석1. 조신시대 미의 관점2. 조선시대 옷의 구성3. 직업복에 관하여4. 조선시대의 유행5. 옷감의 소재결론 : 당시 사회의 특수성과 패션에 대한 이해서론緖論기독교적 세계관에 의하면, 태초에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고 부끄러움을 알게 되어 옷을 입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상 옷의 태초의 기능은 정온동물定溫動物인 인간이 환경의 기온에 따라 체온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더불어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기능 역시도 하였다.하지만 오늘날의 ‘옷’이라는 것은 과연 이러한 1차적인 기능만을 하는 것일까?우리는 때와 장소를 가려 옷을 입는다. 옷이란 단지 몸을 가리는 용도만이 아닌, 타인에게 시각적으로 보여 지는 용도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자신을 위해 옷을 입는 것보다도 자신을 보는 타인을 위해 옷을 입는, 이를테면 ‘사회성의 증표’로서 기능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지금까지 의복의 양식이 수없이 변천해 왔음을 고려해 본다면 이것은 비단 오늘날의 이야기일 뿐만은 아니다. 조선시대에도 역시 패션은 있었고, 코디가 있었다. 흔히 조선시대라고 한다면 막연히 색동저고리에 다홍치마정도만 떠올릴지 모르지만, 그 시대에는 오히려 오늘날보다도 확실한 사회적 용도로서 옷이 기능하기도 했으며, 유행 역시도 있었다.‘미美’와 ‘사회적용도社會的用度’와 ‘옷衣’,’의 관계는 조선시대에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이러한 조선시대의 복식은 개국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이어 받았다가 성종 5년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편찬으로 의례복이 법제화되었고,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으로 백관들의 복식제도가 재정비되었다. 한편 서민 복식은 엄격 한 신분 사회제도에 묶여 직물의 종류, 색깔, 문양 등에 이르기까지 전 시대보다 한층 심한 규제를 받았다고 한다. 조선조 중, 후기의 복식은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외국 문화의 간섭을 배제하는 한편, 독자적인 복식문화를 형성해 나갔으며 이 과정에서 가장 뚜렷한 특징으 고(하의), 포(걸칠 것)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기본적인 틀에서 변화가 있게 되는데, 여성의 경우에는 하의가 고려시대에는 바지를 입었지만 조선시대 유학적 세계관의 지배로 치마를 입고 바지의 경우 속옷의 역할만을 담당하게 되었다.우선 유(상의)는 흔히 알고 있는 태권도복의 형태, 즉 허리까지 오는 긴 옷에 여밈을 하는 형태에서 조선시대에 오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저고리와 같은 형태로 변하게 된다. 이러한 저고리의 등장은 여러 가지 가설이 분분하지만 조선 초 상경농법常耕農法의 시작으로 인해 유의 형태보다 길이가 짧아지고, 이에 여밈의 필요성이 줄어들어 고름을 사용하여 저고리의 형태가 등장하였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이러한 ‘저고리’라는 명칭은 ‘적고리’, 혹은 ‘단적고리’라 하여 1420년 (세종2년) 원경왕후)에 의해 공식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저고리는 남녀노소 신분의 고하를 불문하고 대중적인 상의로 조선시대에 자리 잡았다.고(하의)는 남자의 경우 반월형의 통에 대님으로 가랑이 끝(발목 부근)을 묶어 고정하였고, 여자의 경우에는 바지는 성리학의 가부장적 사고방식에 의해 속속곳, 단속곳, 속바지로 대님을 매지 않고 속옷의 기능만을 하였으며 그 위에 치마를 입었다. 본래 고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단지 유한계층踰限階層의 사치품에 불과 하였던 치마가 조선대에 와서는 평민층은 물론 천민들까지도 입게 된 것은 그저 상경농법으로 인한 부의 축적만으로는 해석하기 힘들다. 더욱이 노동을 해야만 하는 평민, 천민의 여성들조차도 활동에 제약이 있는 치마를 입게 된 것은 그만큼 성리학이 조선사회의 전반에 걸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남자의 바지가 거의 획일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는 반면에 더욱 아름답고자 하는 여성의 욕망은 치마의 형태에 있어서 더욱 하체를 풍만하게 강조하는 형태로 변형을 이루어왔다. 스란)치마와 대란치마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는 치마 밑단에 금박(스란단)을 입힌 치마를 말하며, 지위에 따라 그 무늬가 달랐다. 왕비는 용 무늬, ·옥색이 있다. 학창의는 중국 송宋나라에서 전래된 옷으로 덕망이 높은 도사道士나 학자가 입었다.도포는 소매는 넓은 두리소매)이고 섶과 무가 있으며 뒷길의 중심선이 진동선)부터 틔어 있다. 그리고 뒷길에 한 폭의 전삼展衫을 덧붙여 뒷트임을 덮는데, 전삼이 바람에 펄럭이는 모양은 도포의 멋과 특징이 되어 다른 많은 웃옷[袍]들과 구별되는 점이다. 옷감은 명주, 비단, 공단, 모시, 생모시, 베, 광목 등이 사용되고, 색상은 초록색 ·청색 ·다홍색 ·미색 ·백색 등으로 다양하였다. 조선 후기인 영조 때는 겹도포도 있었지만 말기의 유물들은 모두 홑옷이다. 옛날에는 이것이 사대부와 유생의 상복常服인 한편 통상 예복도 되었다고 하나, 후에 다른 예복들이 모두 폐지되자 도포는 남자의 유일한 예장禮裝이 되었다. 이 옷은 원래 특권적인 복장이어서 서민들은 입지 못하였으나, 근세에 이 금기가 깨졌다.두루마기는 주막의周莫衣, 주차의周遮衣, 주의周衣라고도 한다. 양쪽 어깨 밑이 터져 3폭이 따로 도는 창의?衣에 대해, 옷 전체가 돌아가며 막혔다는 데서 붙은 이름이다. 종류는 백이두루마기·홑단두루마기·겹두루마기·솜두루마기 등이 있으며 계절에 맞추어 입는다. 옷감은 겨울용에는 명주 ·모직 ·무명 ·옥양목 ·부사견을 주로 쓰고, 봄 ·가을용에는 명주 ·항라 ·옥양목을, 여름용에는 모시 ·생모시 ·항라 등을 쓰며, 빛깔은 일반적으로 백색을 많이 쓰나 회색 ·고동색도 쓴다. 어린이들도 예를 갖추어야 할 때는 두루마기를 입는데, 모양은 성인용과 같으며 돌이나 명절에는 까치두루마기)나 오방장五方丈)을 입는다. 오늘날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두루마기가 있다.장옷은 장의長衣라고도 한다. 보통 초록 바탕에 흰색 끝동을 달았고 두루마기와 비슷하다. 조선 전기에는 남자들이 겉옷으로 착용하였다. 장옷의 형태는 두루마기와 거의 같으며, 다른 점은 소매 끝에 흰색 끝동을 넓게 대었고, 옷깃·옷고름·겨드랑이에 대는 삼각형의 무를 옷색 또는 다른 색으로 대었다. 장옷의 색은 기록에 의하면 분홍·보라·초록·유록색정과 다른 점은 3품의 품계에서 정3품을 2품과 같이하고 종3품을 그 다음 급과 같이한 점이다. 이것은 관료들을 크게 당상관(관리 중에서 문신은 정3품 이상의 품계를 가진 자)과 당하관(종3품 이하의 품계를 가진 자) 으로 나뉜 것과 관련되어진다.포의 색깔은 그 후 1744년에 편찬된 『속대전』)에서 일부 변동이 있었는데, 당상관의 공복 색깔이 분홍색으로 되고, 당하관의 공복 색깔은 적색으로 된다. 이리하여 이전의 공복 색깔에서 청색. 녹색은 없어지고 적색 계통으로 단일화 된 것이다. 그러나 이 규정은 1865년에 다시 고쳐져 당하관의 공복 색깔에서 적색이 폐지되고,『경국대전』에 규정된 것과 같이 다시 청색과 녹색이 복구된다. 공복의 색깔은 그 후 1884년의 의복 개혁 당시에 관복이 모두 흑단령(흑색의 둥근 깃 옷)으로 교체되면서 당상관은 무늬 있는 검은 사로, 당하관은 무늬 없는 검은 사로 만들게 된다. 이리하여 오랫동안 유지되어 오던 공복의 색깔 구분이 없어지고 흑색으로 단일화되는데, 이 변화는 실로 획기적인 것이었다. 관료제도가 근대화되어 가던 당시의 사회 발전에 따른 결과였기 때문이다.당시의 공복색을 충실히 검증해서 사극이 제작되었다면 인물들의 공복색 만으로도 대충 어느 시대였다는 추정이 가능하게 된다. 즉 청색 계통과 적색 계통이 모두 나타난다는 것은 영조20년 전을 뜻하는 것이며, 주로 조선 전반기와 붕당정치가 극심했던 시대였다는 점이며, 적색 계통만이 나타난다면 영조 말기와 정조를 거쳐 세도정치시대로 추정할 수 있다.공복색은 서열을 구분하는데 이용되는 경우가 많지만 흉배)의 문양과 허리띠인 각대의 형태에 따라서도 충분히 서열 구분이 가능하기에, 관리들의 같은 계통의 관복색 착용은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다.조선시대의 직업복으로는 대표로 들었던 관복 이외에도 재인才人(광대)들의 옷이라든지, 승려들의 옷, 군복과 같은 직업복이 존재하였다.4. 조선시대의 유행오늘날 유행이라고 하는 것은 매스 미디어를 통해 광범위한 지역에 매우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간다. 도록 유도한 패션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것은 후기로 갈 수록 지나쳐서 가슴을 가릴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양반가 규수들은 저고리 아래에 넓고 긴 띠를 둘러 가슴을 가렸고, 이것 역시도 유행을 거치게 된다. 하지만 반면에 가난한 여성은 이를 가리지 못하고 가슴을 드러내 놓고 다니는 경우까지도 생기게 된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저고리에 회장)을 달아 맵시를 더욱 강조하기도 하였으며, 깃, 고름, 소매 끝, 겨드랑이에 회장을 두른 삼회장저고리와 같은 화려한 형태도 등장하게 된다.이처럼 상의가 점차 작아진 것에 비해 치마는 점차 길어지고, 그 폭이 넓어지게 된다. 이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하체를 더욱 풍만해 보이게 하기 위함으로, 이를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당시 여성들은 무지기치마와 같은 보정 속옷을 착용하기까지 한다.)이러한 짧은 상의와 긴 하의는 오늘날의 하이 웨이스트 팬츠와 같은 시각효과로서, 하체가 길어 보일 수 있으며, 이에 폭을 넓혔으므로 더욱 풍만하게 보일 수 있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상체는 전체적으로 빈약해 보이는 느낌을 지울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여성 의복의 유행은 주로 기방에서 출발하여 양반댁 규수에게로, 그리고 일반 백성에게로 퍼져가는 양상을 띠었다.여성의 유행에 또 한 가지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가체加?이다. 머리는 보통 돈이 없는 가난한 백성들이 잘라서 판 것을 사다 쓰는 경우가 일반 이었다. 따라서, ‘가체를 쓴다’라는 것은 부의 상징 이었다. 많이 올리면 올릴수록 돈이 많다라는 증거였던 것이다.가체의 사용은, 우선 자신의 머리를 곱게 빗어 뒤로 쪽진 머리를 하고, 짧은 비녀로 머리를 고정 시킨다. 그리고, 가체를 자신의 머리와 이어 붙여서 위로 올린다. 또한, 여러 장식구로 머리를 치장 하였다. 계절과 기분에 따라 여러 모양의 장신구를 머리에 달아, 한 폭의 그림처럼 치장을 하였다.그러나 가체사용은 조선중기 임진왜란 이후 때 부터 사용이 금지 되었다. 영조대왕때를 전후로 가체사용이 전면금지 되었는데, 이유인다.
    인문/어학| 2009.11.26| 9페이지| 1,500원| 조회(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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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과정의 개발
    「R e p o r t」《교육과정 및 교육평가》제 3장 교육과정의 개발 요약학과학년학번이름Bobbitt와 Tyler 이후 학문적 발전. 교수법에 대한 변화와 같은 내적인 요인과, 정치적 격변 및 사회적 요구, 경제적 변혁 등의 외적 요인으로 인해 수많은 교육과정이 개발되어 왔다. 이번 단원에서는 그 중에서도 주요하다고 생각되는 Tyler의 합리적 교육과정 개발과 Walker의 실제적 교육과정 개발, Eisner의 예술적 교육과정 개발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1. Tyler의 합리적 교육과정 개발Tyler는 교육과정이 어떤 절차에 따라 구성되어 이것을 실제적 교육현장에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가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교육과정 개발 과정을 다음과 같은 4가지 단계로 설명하였다.학습결과의 평가학습경험의 선정→ → →교육목표의 설정학습경험의 조직우선 교육목표에 대해서는 교육프로그램의 모든 요소들을 교육목표의 성취 수단으로 간주하였고, 이러한 교육목표의 설정의 근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시하였다.첫째, 학생에 대한 여러 가지 형태의 연구에서 중요한 교육목표를 설정할 수 있다. 이는 학습자의 흥미나 욕구의 탐색을 중요시 여긴 것을, 학생들의 생활 실태나 문제의 활동이 양자간에 현격한 격차 있을 경우에 교육목표로 설정한다는 것이다.둘째, 학생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분석하면서 중요한 교육목표를 시사 받을 수 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을 학교 밖의 사태에 대해서도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질 때, 이를 실생활에 적용시키고 일반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셋째, 여러 학문분야의 교과전문가와의 협의를 통해서 중요한 교육목표를 얻을 수 있다. 교육과정의 개발에 있어서는 각 학문분야의 전문가들로부터 자문을 받아야 한다는 의견이다.넷째, 추출된 수많은 교육목표들은 교육철학 및 사회철학에 따라 그 경중을 가려지고 체계화 된다. 여기에서 교육철학과 사회철학은 교육에 대한 기준으로서, 이상적인 사회와 개인의 자아실현에 대한 신념의 체계라고 할 수 있다.다섯째, 추출된 교육목표는 그 가능성을 최종적으로 점검받아야 한다. 이론적으로 아무리 좋은 교육과정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실제 교육현장에서 학생들에게 적용될 수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이렇게 교육목표를 설정하고 학습경험의 선정에서는 설정된 교육목표가 시사하는 행동을 학습자로 하여금 경험할 기회를 제공하는 기회의 원칙과 교육목표로 하여금 학습자가 내적보상을 받을 수 있는 만족의 원칙, 학습경험이 학습자의 능력 내에 있어 그것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가능성의 원칙을 제시하였다. 또한 동일한 교육목표를 실현하는 데에는 다양한 학습경험이 존재한다는 동목표 다경험의 원칙과 하나의 학습경험이 여러 종류의 학습성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동경험 다성과의 원칙을 제시하였다.조 직)요인)요인요인학습경험의 조직단계에서는 이에서 파생될 수 있는 문제점을 4가지 차원에서 거론하였다. 우선 선정된 학습경험을 어떤 기준에 따라 묶는 것이 효과적인가에 대한 ‘조직기준’에 대하여 거론하였다. 그리고 교육과정 구성의 최저 단위인 조직요인 구성요인의 선정 근거에 대한 것과, 이러한 조직요인들을 어떠한 원칙에 의거하여 묶을지에 대한 조직원칙문제, 마지막으로 학습경험들을 조직하는 조직구조의 결정에 대한 문제가 있다.이렇게 학습경험을 조직하고 나면 학교가 의도한 학습자의 행동변화가 어느 정도 달성되었는지를 점검하는 학습결과의 평가에 들어가게 된다. 평가에서는 단순히 지필검사만이 아닌 학습자의 행동변화를 평가대상으로 삼고, 단 한번만의 평가가 아닌 프로그램의 초기와 후기에 실시하여 그 결과를 각각 비교해야 한다고 하였다.이러한 Tyler의 교육과정 개발 모형은 폭넓게 적용할 수 있는 유용성과 수용의 용이성, 광범위한 평가지침 제시와 교육과정 전반에 걸친 포괄성을 지니고 있으며 경험적, 실증적으로 교육성과를 연구하는 경향을 촉발시켰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반면에 교육목표의 선정의 모호성과 수업 중 부수적으로 파생되는 확산적 목표의 중요성 간과, 교육내용을 교육목표의 수단으로 전락시켰다는 점과 교육과정을 확인하는 절차에 치중한 나머지 교육내용에 대하여 소홀한 측면을 보였다. 또한 외형적 변화의 평가만을 강조하여 내면적, 인지적 발달에 대해서는 간과하였고, 실제 교육과정개발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점의 지적에 대하여 소홀했다는 단점을 드러내고 있다.2. Walker의 실제적 교육과정 개발Walker는 Tyler의 형식에 치우친 교육과정 개발을 비판하며 더욱 실제적인 관점에서 이를 정립하고자 하였다. 그는 교육과정개발위원회의 교육과정의사결정회의를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조사하였고, 이에서 자신이 확인한 것을 교육과정 계획을 설명하는 틀로 개발하였으며 이를 자연스런 모형이라고 하였다.토대다지기 단계설계 단계숙의 단계→ →토대다지기 단계는 교육과정 개발에 참여한 인사들이 각자의 교육적 신념과 가치 및 자신의 숨은 의도 및 선호 등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고, 이를 ‘강령(또는 기본 입장)’이라고 하였다. 토대다지기 단계에서는 이러한 다양한 인사들이 모여 설계할 교육과정에 대하여 기본적인 기준 또는 합의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토대는 다양한 개념, 이론, 심사숙고된 목적으로서 이루지고, 이 단계에서 의견일치가 빠르면 빠를 수록 후속단계로의 이행이 신속히 이루어진다고 설명하였다.그 다음으로 숙의 단계는 대안들의 충돌을 제가하고 여러 대안들과 대안적 지각들, 대안적 문들과 대안적 해결들을 찾아내어 체계화시키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이러한 숙의 단계에서 이상적인 숙의를 시행시키기는 매우 어려우며, 실제적으로 파당적 숙의, 제한적 숙의, 한정적 숙의, 유사적 수의, 공청회와 같은 수준으로 추락하고 마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이에 대하여 Walker는 주어진 교육과정 문제를 가장 설득력 있고 타당한 방법으로 논의 하고, 가장 적합한 교육과정 실천 대안을 검토하며, 대안을 제시하면서 거론된 관련 지식들을 고려하고, 사소한 결정에도 관련된 모든 집단의 입장과 가치를 분석하며 공적하고 균형 잡힌 판단에 이르도록 하는 것을 올바른 의미의 숙의라고 하였다.마지막으로 설계단계는 교육 프로그램의 상세한 계획을 수립하는 단계이다. 이의 실행 중에도 숙의는 여전히 계속 되고, 최종적으로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에 대하여 결정하게 된다. 이러한 설계단계의 궁극적 활동은 특정 교수자료를 생산하는 것이다.이러한 Walker의 교육과정 개발 모형은 교육과정 개발에 참여하는 인사들이 처음부터 서로 다른 토대와 입장에서 출발하였음을 인정하여 교육과정 개발 과정에서 일어나는 보다 실제적인 이론의 제시에서 각광받는 측면이 있지만, 반면에 교육모형이 거의 전적으로 교육과정의 계획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고, 이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제대로 언급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3. Eisner의 예술적 교육과정 개발Eisner는 질적인 연구양식이 개발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며 예술교육과 교육과정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질적인 형태로 조합시키려 하였다. 그는 교육과정 계획 국면들은 교육과정 계획의 일부에 불과하며 그 과정이 복합적, 순환적, 그리고 우발적이라고 하였다.교육목표의 설정교육과정 내용 선정학습기회의 유형내용영역의 조직제시양식과 반응양식평가절차의 유형학습기회의 조직→ → → → → →목적 > 목표 > 학습목표Eisner는 교육목표의 설정에서 목적, 목표, 학습목표를 구별하였다. 목적인 가치와 교육의 일반적 방향제고를 뜻하고, 어떤 의도의 구체적 진술을 목표, 그보다 더욱 구체적인 것을 학습목표라고 하였다. 이러한 학습목표는 미리 설정할 수 없으며, 교수활동이 전개된 이후 종합적이고 일반적인 용어로 표현되는 목표설정이 합당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또한 서로 다른 이해집단의 상충적 목표를 처리하기 위하여 예술적 기술과 재능을 강조하였다.
    교육학| 2009.11.26| 5페이지| 1,000원| 조회(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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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의 사회문화적 기초
    제 3장 교육의 사회문화적 기초인간은 사람과 사람의 틈바구니, 즉 사회 안에서 그들의 생활양식인 문화를 가지고 살아간다. 이 장에서는 이렇게 인간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맺는 사회, 문화가 교육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1. 사회문화와 인간인간과 사회의 관계는 물고기와 어항의 관계요, 인간과 문화의 관계는 물고기와 물과 같다는 비유는 참으로 잘 들어맞는 말이다. 이처럼 인간은 사회 안의 어떠한 문화 속을 헤엄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연에 적응된 존재가 아닌, 미성숙한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 자연환경에 열악한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는 인간은 사회라는 틀을 만들어 문화안에서 살아가게 된다.그렇다면, 이러한 사회가 인간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물론 여기에서 사회는 문화를 포함한 사회, 즉 사회문화적 개념이다.오늘날 거의 모든 사회학자들과 심리학자들에게 있어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견해는 일치되고 있는 부분이다. 인간은 사회를 떠나서는 인간일 수 없다는 것이다. 흔히 제시되는 도덕이나 윤리와 같은 덕목들도 따지고 보면 사회안에서 지켜져야 하는 규범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한 개인이 먼저인 이후, 그들이 모여 사회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확실히 잘못된 견해이다. 앞서 말했듯이 한 개인을 이루고 있는 성품―도덕, 윤리와 같은―은 이미 사회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와 완벽하게 고립된 개인은 관념적으로는 상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2. 사회문화와 교육인간은 생물학적인 불완전성으로 인해 살아남기 위해 사회문화를 창조했고, 이러한 사회문화는 다시 인간을 새롭게 창조한다. 잘못 이해하면 달걀과 병아리의 모순처럼 ‘무엇이 먼저인가?’와 같은 질문에 빠질 수 있지만, 인간과 사회문화는 그 보다는 서로 영속적인 상보 보충적인 관계로 생각하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사회문화가 없이는 인간이 존재할 수 없고, 인간이 없이는 사회문화역시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으로 거듭나게 하는 경우를 말한다.교육과 사회화의 관점은 오늘날 한국교육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자금까지 우리는 교육을 너무 개인중심으로만 생각해왔다. 이러한 사회화 종도에 있어서 부족한 인간상의 특징을 살펴보면, 크게 다섯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첫째, 의뢰심이 강하다. 둘째, 매우 이기적이다. 셋째, 한가지 일에 오랫동안 주의를 집중시키지 못한다. 넷째, 공상과 현실세계의 차이를 구별하는 힘이 부족하다. 다섯째, 시간에 대한 관념이 막연하다.이와같은 특징은 주로 사회화과정이 완벽히 이루어지지 않은 어린아이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으로서, 이미 사회안에서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해야만 하는 성인이 이와같은 특징을 나타낸다고 했을 때에는, 주위의 교육의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인간은 사회적으로 쓸모없는 불행한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다.그렇다면 사회화의 정도의 교육이 비교적 완성된 인간의 의식과 행동의 특성은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보자.첫째, 독립성이 있는 한 인격체이다. 이는 어려서부터 스스로 하는 습관을 길러줌으로서 자연히 습득되는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자신의 일을 결정지을 수 있으며,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질 만한 자신감이 있다. 사회적으로 잘 성장한 사람이라면 어려운 일에 부딪치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최후의 결정을 자신의 손으로 내릴 수 있다. 셋째, 현재를 넘어서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내일을 위해 실력을 연마하고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정신에서 참다운 사회적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넷째, 인생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 적극적이며 능동적으로 대처한다. 다섯째, 인간관계가 원만하다.이와 같이 인간의 사회화 방향과 그 정도를 알고 그 중요성을 교육현장에서 강조할 때, 아동 ? 학생은 인간다워지고 그가 사는 사회는 정의롭게 이루어질 수 있다.4. 사회화의 과정과 방법한 개인이 사회 속에서 그 사회의 문화적 표준에 따라 행동하면서 그 풍속에 동화되고, 전통을 지키며, 사회적 상황에 적응할 뿐 아니라 집단의 일원혼으로 새로운 사회화가 시작되어, 중년 이후면 대개의 경우 사회화과정은 끝나게 된다.이처럼 결국 사회화 과정은 개인이 사회집단 내에서 적절한 것으로 알려진 것을 학습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본능적으로 습득되는 것이 아닌, 학습의 과정이다. 이처럼 사회는 개인이 발달하는 동안에 그 사회에서 인정된 행동양식을 따르도록 압력을 가하며, 개인은 이 압력에 따라 사회화 되어간다고 볼 수 있다.5. 사회계층과 교육1) 사회계층의 개념오늘날 학교교육의 성취도와 방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서 사회계층을 들고 있다. 이러한 사회계층이란 사회계급이라는 말보다도 한 단계 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회적 지위나 능력, 기술과 같은 요인으로 사회적 특권 ? 위신 ? 이익등에서 차이가 나는 사회계층을 포함한 재산 ? 교육 ? 직업 ? 사회적 지위 등이 비슷해서 생활습관 ? 태도 ? 행동 ? 가치관까지 비슷한 사람들의 집단을 말한다.2) 사회계층의 결정요인그러면 어떠한 요인들이 사람들을 특수한 사회계층에 속하도록 하는가?첫째, 재산과 수입은 사회계층의 중요한 결정요인이다. 이는 재산과 수입의 양 뿐만이 아니라 그 원천과도 중요한 관련이 있다.둘째, 직업종류는 사회계층의 중요한 결정요인이다. 직업은 현대사회의 생활에서 수입이나 생활수준 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직업에 관련된 요인으로서는 직업의 종류뿐만 아니라 직업에 따른 수입의 정도, 그 직업을 갖기 위한 필수적 훈련이나 교육의 정도, 직업의 사회적 중요성, 권위의 정도, 직업상의 조건 등 여러 가지가 직업의 위신과 관련되어 있다.셋째, 교육은 사회계층의 중요한 결정요인이다. 이것은 개인이 얼마나 많은 학교교육을 받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일생 동안의 사회적 지위와 직업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지금까지 설명한 수입, 직업, 교육의 세 가지 요소는 사람들이 특수한 사회계층에 속하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3) 사회계층 이동과 학교교육사회계층은 개인의 교육수준, 교육에 대한 원동력이 된다. 그 단적인 예로서, 고작 현재의 중학생 정도의 수학실력이 고대의 천재라 불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수학수준과 비슷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셋째, 사회의 구조와 사회구성원의 태도 및 가치관도 사회변동의 속도에 많은 영향을 준다. 사회의 여러 부분이 구조적으로 서로 얽혀있는 경우, 그 각각의 요소들의 저항으로 인해 사회변동이 더디게 나타나게 된다.넷째, 사회변동은 사회가 새로운 변동을 얼마나 절실하게 인지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 사회가 변동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면 느낄수록 사회구성원들의 주의를 집중시켜 사회변동을 촉진시키게 된다.2) 사회변동과 교육사회변동은 가치관의 갈등, 사회적 체제의 혼란 등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방해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변동이 극심할 때의 교육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하는가? 그에 대한 가장 이상적인 방법으로는 ‘전통적인 것과 새로운 것의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것을 들 수 있다. 전통적인 것만을 너무 중요시하면 결국에는 새로운 가치관으로의 점진적인 수정이 불가능해지고, 이는 곧 사회의 혁명, 반혁명의 악순환을 반복하게 할 뿐이다. 반면에 새로운 것만을 너무 강조하다보면, 개개인을 통제해 주던 전통적 관습이 너무 희박해져, 그러한 개인들을 통제하는 것이 힘들어지게 된다.따라서 올바른 교육이란, 사회변동에 있어 능동적이고 유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되, 전통적으로 올바른 것을 잊지 않게 적절한 조화를 이룬 것이어야 한다.3) 현대사회의 특질과 교육적 과제현대교육의 사회적 기초로서 핵심적 요인은 크게 다음의 여섯 가지로 정리된다.(1) 과학기술시대현대사회는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되고 있는 사회로서, 몇 가지 중요한 국면을 열거하면 다음의 여덟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첫째, 동력의 발달을 들 수 있다. 지금까지 문명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새로운 원동력의 개발과 그것을 더욱 유효하게 사용하는 동력발달의 역사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원자력, 핵분열 에너지의 이용과 같은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둘째, 지막으로 정밀측정기술의 발달을 들 수 있다. 이는 앞에 나열된 일곱가지의 발전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으로서, 모든 실험과 관찰에 있어서 그 정확성을 높혀주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이처럼 나열된 여덟가지의 기술의 눈부신 변화는 현대사회에 있어서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는 다음의 여섯가지 모습으로 크게 나타난다.첫째, 생산의 증강현상이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생산수단과 생산양식의 근본적인 변혁을 가져옴으로, 생산의 증강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둘째, 산업구조의 변화현상이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농림 ? 수산업과 같은 1차 산업 뿐만이 아니라 2차, 3차의 산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셋째, 직업구조의 변화현상이다. 이는 과학을 기술로 인해 점차 직업이 전문화, 세분화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서, 새로운 직업을 창조, 인구의 분배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넷째, 여가의 증대현상이다. 과학기술은 점차 사람들의 노동력을 줄여줌으로서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을 증대할 수 있게 되었다.다섯째, 인간수명의 연장현상이다. 이는 식량생산의 증대뿐만이 아니라 의학기술의 눈부신 변화로 말미암은 것으로, 우리나라 역시도 평균 수명이 70를 넘고 있다.마지막으로 시간과 공간의 단축현상을 들 수 있다. 이는 통신과 교통수단의 발달로 점점 지구촌을 현실화 시켰다. 뿐만아니라 앞으로는 우주세계와의 통신 및 교통 역시도 가능하게 될 전망이다.(2) 대중화 시대현대사회의 두 번째 큰 특징으로서, 소수 엘리트층보다도 대중의 사회적 역할이 증대되는 대중사회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1/ 대중의 정치참여정치체제는 국가에 따라서 동일하지는 않지만, 여론과 시위등이 중요한 이른바 참여문화는 현대사회의 공통적인 특징이다./2/ 대량생산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대량생산은 대중을 의식한 대중이 관여하는 대중을 위한 생산이라는 성격을 지닌다./3/ 대중교육현대사회는 대중 모두가 높은 교육을 받는 시대로서, 평생을 통한 계속적 학습이 강조되고 있다./4/ 대중문화영상문화의 발달에 .
    교육학| 2009.11.26| 10페이지| 1,000원| 조회(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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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인의 삶으로 본 교육 방향
    현대사회가 빠르게 급변함에 따라 우리의 사회 전반에 걸쳐 여러 가지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교육 역시도 예외는 아니다. 앞으로의 사회를 이끌어갈 교육현장 역시도 사회의 급변과 함께 점차 변모하고 있다. 이에 대해 긍정적인 변화만을 계속한다면 이것은 발전이라고 할만한 것이겠지만, 점차 획일화되어가고, 비인격적 교육현장 역시도 속속들이 모습을 보이고 있는 오늘날의 변화를 단지 ‘발전’이라고 정의 내리기는 힘들 것이다.이러한 사회와 교육현장의 변화에 따라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참다운 교육’에 다가가기 위해, 조선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성인들의 생애와 사상들을 알아봄으로써 고찰해 보기로 한다.1. 이이율곡 이이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경세가요, 유학자이며 대철인으로 오늘날 교육에 있어서도 큰 모범이 되는 인물이다. 이러한 율곡 이이는 현모양처의 표본으로 대표되는 신사임당의 슬하에서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큰 인품을 본받아 학문에 정진하고 인품에 있어 곧고 강직함을 배웠다. 그리하여 어려서부터 총명함으로 주위의 주목을 받으며 13살의 어린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21살에 이르러서는 한성시에 수석으로 급제하는 등, 도합 아홉 번이나 장원을 하여, 구도장원공이라는 별칭까지 얻게 되었다. 그 이후로 사간원 정언, 사헌부 대사헌, 홍문관 교리, 병조 참지, 대사간, 황해도 관찰사 등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가, 선조 17년에 49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그렇게 어려서부터 별세하기까지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했던 율국 이이가 생활했던 시대에는 내적으로는 여러 차례의 사화이후 당쟁이 극심해지고, 외적으로는 북쪽 변방의 야인들과 남쪽 일본족의 침략으로 안보상으로도 문제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 자연히 교육현실 역시도 그러한 세상을 등지는 퇴은주의파와 자신의 입신양명만을 추구하는 관료주의파의 횡포로 민초의 고생 역시도 심해지고만 있었다.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율곡 이이는 교육의 가능성을 믿고 그 필요성을 강조하며, 교육에 관하여 크게 네 가지의 중요한 부분을 지적했는데, 이것이 바 중요성을 강조하였다.이처럼 율곡 이이의 교육적 사상은 현대적으로도 인간중심의 교육, 지행합일의 강조, 일상생활을 통한 교육, 문제해결 중심의 교육 철학 등과 같은 현대교육 사상과도 많은 부분이 일맥하고 있다. 또한 국가사회의 근본적인 발전전의 원동력으로서 교육을 중요시하고, 교원의 높은 자질과 존중풍토 역시도, 현대교육의 ‘교사의 수준이 교육의 질은 능가할 수 없다’나는 현대 교사론과도 많은 부분이 일맥한다.물질만능주의가 점차 팽배해져가는 현대 사회에서, 교육과 교육자의 위치는 점차 낮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질적으로 큰 벌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뿐이며, 우수한 인재도 교육 쪽 보다는 사회적으로 더욱 인정받고, 물질적인 벌이가 큰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이제는 일반화되기까지 한 실정이다. 이러한 현대 사회에서 율곡 이이가 교육에 관해 남긴 큰 뜻을 후세의 우리는 다시금 되새겨 볼 필요성이 강조된다.2. 정약용오늘날 실학의 선구자라 일컬어지는 다산 정약용은 경기도 양주군에서 정재운의넷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아버지로 부터 경서를 배웠으며 새학문을 공부하였다. 1789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고 수원화성의 설계와 거중기를 발명하였으나, 천주교 박해에 연루되어 해미, 장기,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귀양지에서 목민심서 등 500여권의 저서를 남겨, 18세기의 외래문물의 유입과 고질화 되어가는 폐습의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조선시대 최고의 천재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다산 정약용은, 정치적으로는 의회민주주의를 방불케하는 민권의식을 가지고, 학문적으로는 성리학을 대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점을 지적하며 실용적인 실학을 연구하는 실학자로서도 유명한 인물이다.그러한 다산은 당시의 중국 중심의 비효율적인 교육방법에 반기를 들며, 국내 중심의, 더불어 실용적인 교육을 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한 다산 정약용이 제시한 교육목표는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첫째, 효제자孝悌子의 실천을 교육목표로 하였다. 여기에서 효제孝悌란 유단어를 ‘어떠한 방법’으로 ‘어떠한 순서’에 따라 가르칠 것인가를 궁리한 아학편兒學編에 잘 수록되어 있다.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과 사회,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토대로 한 독자적 교육사상을 가지고 있던 다산 정약용의 사상은 오늘날의 교육에도 큰 의의를 가진다. 우선 새로운 학문을 통해서 사회의 구조를 개편하려는 시도가 그러하고, 교육제도의 새로운 확립과 동시에 사회윤리를 쇄신하고자 하였으며, 평등사상에 기초한 민권의식을 토대로 교육의 효과를 높이고자 하고, 합리적인 사고의 틀 위에 민족의 주체성과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자아의식을 심어주고자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점차 공교육이 획일화 되어가는 현대 교육풍토에 비추어 볼 때, 다산과 같은 시대의 흐름을 앞서간 진보적인 교육이 더욱 간절하다.3. 최제우19세기 후반 세도정치로 인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민초들의 민심을 얻은 것은 최제우가 창시한 민권중심의 평등사상을 내건 동학사상東學思想이었다. 최제우는 1824년 지금의 경상북도 월성군 한곡면 가정리에서 태어나 세도정치로 인한 폐해가 극에 달했던 시기를 살아가다가 1864년 대구에서 세상을 어지럽혔다는 죄로 순교하였다.최제우의 사상 중 가장 주목받아야 할 점은 모든 인간을 신과 같이 존중한 민권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모든 민중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내 몸에 모신다는 ‘시천주’사상은 인간을 신과 같이 생각하여 모두가 존귀한 존재임을 나타낸 것으로, 그의 교육사상 역시도 그러한 인간지상주의와 인간평등사상 위에 이루어지게 된다. 이는 곧 인간의 가능성을 신뢰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으로, 최제우는 이를 성成, 경敬, 신信이라 하였다. 우선 성成이란 한울님과 하나가 되는 첫 번째 방법으로, 성실한 마음으로 한울님을 모심으로써 자신 또한 무궁한 발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경敬은 주로 외적으로 올바른 관계를 맺음으로 한울님을 모시는 것을 뜻하고, 마지막으로 신信이란,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스스로의 확신과 신념을 뜻한다.이처럼 성, 심각한 사회문제로 두각되고 있는 오늘날의 교육현장에 큰 귀감이 된다.4. 박은식백암 박은식은 황해도에서 유학자의 아들로 태어나 10세 이후 부친에게 한학을 배웠고, 관서지방을 여행하며 주자학 연마에 심혈을 기울여 일찍부터 문명을 날려 1885년 향시에 합격, 1888∼1894년까지 숭인전참봉 ·동명왕릉참봉의 벼슬을 지냈다. 1890년대 서울에 거주하게 되면서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을 하였으며, 그의 사상도 종래의 정주학 중심에서 지행합일을 강조하는 양명학으로 변모하였다. 이러한 사상적 변화를 바탕으로 교육 ·언론가 또는 민족운동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1898년 9월 장지연이 창간한 《황성신문》의 주필로 민중계몽에 나섰고, 만민공동회와 더불어 반봉건 ·반침략 투쟁을 벌이던 독립협회에도 가입하였다. 또한 성균관의 후신인 경학원 강사와 한성사범학교 교관을 지내면서 교육개혁에 관한 글을 집필하는 한편, 서우학회를 발기하고 1908년 그 후신인 서북학회의 회장직을 맡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황성신문》이 복간되자 자리를 옮겨 10년 폐간될 때까지 일제의 침략상을 고발하는 언론활동을 계속하다, 1911년 가을 만주 위안런현으로 망명하면서 나라 밖에서 구국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그러한 노력은 나라 잃은 슬픔을 국사연구를 통하여 승화시키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1912년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신규식 등과 함께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를 조직했고, 상하이에 박달학원을 세워 교포자제를 교육했다.3 ·1운동 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사장이 되었고, 1924년 임정 국무총리 겸 대통령대리, 1925년 3월 이승만의 대통령 면직으로 제2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때를 전후하여 임정은 독립운동의 이념 ·방법 ·지연 ·인맥 등의 파벌 암투로 내분을 겪고 있었다. 그는 독립운동의 대동단결을 위하여 임정의 헌법을 개정, 대통령제를 국무위원제로 고치고 그 해 8월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국무위원을 선임하고 자신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그 해 11월 ‘하였다.그 이후로 1910년부터 1924년까지는 국혼배양의 강조하였다. 여기에서 국혼이란 민족문화, 민족정기, 민족정신 등을 포함한 개념으로, 경제, 군사, 영토, 기술 등의 물질문명을 뜻하는 국백과의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물론 이를 위해서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그러다가 마지막으로 그의 임종 직전인 1925년에 이르러서는 인격완성의 교육을 강조하였다. 이 시기에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인격수양과 인격완석을 위한 학문을 중시하였고, 그 결과물로 ‘학의 진리는 의로 쫓아 구하라’라는 유명한 논설을 발표하였다.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 극변하는 정세상황의 중심을 헤쳐 나온 백암 박은식, 그는 변화하는 현실에 대응해 적절한 대처를 한 참다운 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요, 교육자였다고 할 수 있다. 사회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그의 깊은 교육적 사상은 많은 교훈이 될 것이요, 또한 현실에 능동적인 대응 역시도 깊이 본받아야 할 점으로 보여진다.5. 안창호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민족현실에 하나의 등불과 같았던 도산 안창호는 평안도 강서군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가정에서 한문과 유학을 배우다가 17살에 서울로 올라와 구세학당에 입학하여 여러 가지 서양의 문물을 접하였다. 약관 20살이 되어서 민족적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보이기 시작하였고 1989년에는 자신의 고향인 평안도에 점진학교를 세웠다. 또한 그 후 좀 더 체계 있는 교육운동과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자신의 힘을 기르기 위해 미국을 다녀와서 신민회와 청년학우회를 조직, 1907년에는 대성학교를 설립하고, 그 이후 1913년에는 민족개조운동을 실천하기 위해 흥사단을 창립하였다. 그렇게 민족의 실력양성과 독립에 열과 성을 다한 도산은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중국 홍구공원 폭탄사건의 지휘자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광복을 7년 앞둔 1938년 3월 10일 ‘낙심마오...’라는 깊은 뜻의 유언을 남기고 별세하였다.이러한 도산 안창호는 다.
    교육학| 2009.11.26| 8페이지| 1,000원| 조회(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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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 분석 - 오규원의 바람은 분다 평가A+최고예요
    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오규원)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튼튼한 줄기를 얻고잎은 흔들려서 스스로살아 있는 몸인 것을 증명한다.바람은 오늘도 분다.수만의 잎은 제각기몸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들판의 슬픔 하나 들판의 고독 하나들판의 고통 하나도다른 곳에서 바람에 쏠리며자기를 헤집고 있다.피하지 마라빈 들에 가서 깨닫는 그것우리가 늘 흔들리고 있음을.사람은 간혹 지독하게 지치고 힘든 때를 거치기 마련이다. 학교에서 지칠 수도 있고, 직장에서, 혹은 가정에서 지칠 수도 있다. 그리고 개중에 그러한 상황을 이겨내지 못하는 경우를 볼 때도 있다. 자신에게 불어 닥친 큰 불행, 혹은 부정적인 상황에 대해 절망적이고 비관적으로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이 시에서 화자는 그러한 과정을 거친 이후라고 보여진다. 화자는 이미 그러한 큰 불행을 경험했고, 방황을 하다가 무언가를 깨닫게 된 것이다. 화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빈 들에 가서 깨닫는 그것’이 바로 그것이다.1) 『바람은 오늘도 분다.』‘바람’이라는 단어의 상징적인 의미는 방랑, 나그네와 같이 어디론가 흘러가는 ‘자유로움’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것이 불어가며 무언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 영향력을 받은 대상물에게 초점이 모아진다면 ‘시련, 고난’으로 그 의미가 바뀌게 된다. 이 시에서는 후자의 의미에 해당된다.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람’이 아니다. 바람으로 인해 흔들리는 대상물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바람으로 인해 흔들리며 고난과 시련을 겪는 수많은 줄기들과 잎들을 보여주며 ‘바람’이라는 고난의 의미를 새롭게 환기시킨다. 살아있는 것에게는 튼튼한 줄기를, 잎에게는 살아있는 증명을 부여해주는 매개체로서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지극히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고난’이라는 것마저도 긍정함으로서 이를 극복하는 방향을 제시해 준다.2) 『빈 들에 가서 깨닫는 그것』화자는 바람에 흔들리는(혹은 고난에 흔들리는) 대상물을 바라보고 무언가를 깨닫게 된다. 그것이 바로 ‘빈 들에 가서 깨닫는 그것’이다. 그렇다면 ‘빈 들에 가서 깨닫는 그것’은 무엇인가? ‘들판’이라는 단어의 이미지는 대부분 황량하고, 쓸쓸하고, 외로움을 나타낸다. 더구나 ‘빈 들판’이라면 황량하게 불어가는 바람이외에는 그 무엇도 상상해내기 힘들다. 고작해야 풀 몇 포기정도? 하지만 화자는 이러한 ‘빈 들’에서 풀 몇 포기가 아닌 것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바람에 그 풀들이 ‘늘 흔들리고 있음’이다. 또한 그러한 흔들림은 앞 연에서 말하다시피 줄기를 굵게 하고,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게 하는 등의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여기에서 화자는 ‘빈 들’이라는 텅 빈 공간에서 쉽게 느낄 수 있는(혹은 존재하고 있는) ‘외로움, 고독, 고통’을 대입시키게 된다. 화자의 표현을 빌려서 말하자면, 빈 들판에 ‘살아있는 것’과 ‘잎’처럼 존재하고 있는 외로움과 고독과 고통 역시도 어디에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바람에 흔들리며 자신을 헤집고 고난을 겪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그러한 바람으로 인한 고난을 긍정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바람이 지나간 ‘외로움, 고독, 고통’ 역시도 긍정적하고 있다.이러한 사실은 화자, 혹은 현재 불고 있는 바람에 힘겨워하는 독자의 대입으로 보여진다.3) 『피하지 마라』, 『우리가 늘 흔들리고 있음을』그렇게 외로움과 고독, 고통마저도 긍정한 화자는 마지막에 이르러 ‘피하지 말라’고 한다. 무엇을 피하지 말라는 것인가? 쉽게 생각하면 그저 지나가는 바람(고난)을 피하지 말라는 것을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화자의 말에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본다면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화자가 말하는 ‘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지나가는 ‘바람’이 아닌, 그러한 바람으로 인해 ‘흔들리고 있는 자신’이다. 앞서 밝혔듯이 화자는 ‘바람’이라는 것 보다는 그 바람으로 인해 ‘흔들리고 있음’에 더욱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그것을 피하지 말라고 말한다. 다가오는 고난을 피하지 않고 맞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원천적으로 그 고난으로 인해 흔들리는 자신을 피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인문/어학| 2009.11.26| 3페이지| 1,000원| 조회(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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