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by-Dick에 나타난 예언적 행위들과 순환- 선과 악의 상징적 이중성과그 추적의 문제와 관련하여 -과 목 명 : 19세기미국문학담당교수 :학과 : 영어영문학과학 번 :이 름 :들어가면서..."Forced into familiarity, then, with such prodigies as these; and knowing that after repeated, intrepid assaults, the White Whale had escaped alive; it cannot be much matter of surprise that some whalemen should go still further in their superstitions; declaring Moby Dick not only ubiquitous, but immortal (for immortality is but ubiquity in time)" (41장 158page)Herman Melville의 『Moby-Dick』에 등장하는 모비딕은 이미 사람들에게서 일종의 신성한 지위, 즉 영원히 죽지 않고 언제 어디 서든지 나타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신성한 지위가 신을 대변하는 신성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믿고 있는 신에 대해서 대결적 구도를 가지고 있는 악마성에 대한 표현인지는 앞으로 논의하도록 하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의미로든지 이미 모비딕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경외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고 이러한 모비딕은 쫓고 있는 것이 바로 Ahab이며 그가 타고 있는 Pequod호이며 그 선원들이다. 과연 이러한 신성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 모비딕을 쫓는 Ahab는 선한 신성을 지닌 인물인가 아니면 반대로 악마성을 띤 인물인가? 이와 같은 모비딕과 Ahab가 가지고 있는 신성의 상징적 이중성은 읽는 이들로 하여금 혼란을 자아낸다. 따라서 이 작품을 읽으면서 이러한 상징의 이중성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이 작품 전체의 흐름을 살펴보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에 그 자체로서 어떠한 가치를 지니고 있을 수 있다는 이중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의외로 자연에서 순수한 흰색을 쉽게 찾을 수 없다. 동물들의 경우만 보아도 흰색은 책에서 언급된 것처럼 일종의 유전적인 결함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어서 그 희귀성으로 말미암아 예로부터 많은 흰색 동물들이 인간세계에서 신성시 되어왔다. 이렇게 흰색이 가지는 상징성을 모비딕은 그대로 지니고 있다. 그러나 아울러 흰색이 지니는 공포심 또한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작가가 바라본 모비딕의 선과 악의 이중성은 근본적으로 여기에서 시작한다.“Nor can it be questioned from what stands on legendary record of this noble horse, that it was his spiritual whiteness chiefly, which so clothed him with divineness; and that this divineness had that in it which, though commanding worship, at the same time enforced a certain nameless terror." (42장 166page)위의 인용문은 42장에서 작가가 흰색이 가지는 이중적인 의미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White Steed'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흰색에 대해서 언급한 부분이다. 이렇게 희색은 신성함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동시에 사람들에게 일종의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렇듯 모비딕이 가지고 있는 공포감에 대한 것은 135장의 일부분에 직접적으로 묘사가 되어 있다. “Retribution, swift vengeance, eternal malice were in his whole aspect, and spite of all that mortal man could do, the solid white buttress of his forehead smote the ship's starboard bow, 흐름은 악으로 상징되는 Ahab가 역시 작가에 의해서 거대한 악의 상징물로 묘사되고 있는 모비딕을 추격하고 대결하는 구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작품 속에서의 모비딕은 보통의 고래들과 다른 존재로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작품의 중간 중간에 언급되고 있는 일반적인 고래에 대한 묘사가 자칫하면 모비딕의 이미지와 겹쳐져서 모비딕이 가지고 있는 악마적인 이미지를 희석시키거나 독자들로 하여금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작품은 악이 악의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그 과정이 순환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에서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는 뱀이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그림이 연상된다. 이 그림은 주로 우주의 계속적인 순환이나 재생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또한 예전부터 악의 상징으로 묘사되어온 뱀이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다는 점에서 『Moby-Dick』이 보여주는 악과 악의 물고 물리는 자폐적이고 비생산적인 순환의 역사를 살펴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언급은 작품에 직접적으로 나타난다.“Ahab is for ever Ahab, man. This whole act's immutably decreed. 'Twas rehearsed by thee and me a billion years before this ocean rolled. Fool! I am the Fate's lieutenant; I act under orders. Look thou, underling! that thou obeyest mine.―Stand round me, men." (134장 459page)위와 같이 작품에 직접적으로 드러난 것처럼 『Moby-Dick』이라는 전체의 작품은 과거로부터 끊임없이 계속되어져온 인류 순환의 역사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서 예언되어진 행위이고 작품에 등장하는 Ahab나 모비딕은 단지 그 예언을 실현하는 매개체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또? Well, well, what's signed, is signed; and what's to be, will be; and then again, perhaps it won't be, after all. Any how, it's all fixed and arranged a'ready; and some sailors or other must go with him, I suppose; as well these as any other men, God pity 'em! Morning to ye, shipmates, morning; the ineffable heavens bless ye; I'm sorry I stopped ye." (19장 87page)이 부분은 Ishmael과 Queequeg가 Pequod호에 타기 전에 부둣가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을 때 나타난 Elijah라는 사람으로부터 들은 그들의 운명에 대한 예언이다. Elijah는 성경에 나오는 예언자이며 성경 속에서도 Ahab왕에 맞서는 예언을 했었던 인물이다. 그러한 인물이 이 작품에서 그대로 다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악을 숭배했던 성경 속의 Ahab왕과 그에 맞서는 예언을 한 Elijah. Herman Meville이 이들의 관계를 그대로 자신의 작품에 끌어다 쓴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아마도 그 둘의 관계가 이미 성경에 예시된 것처럼 자신의 작품에 있어서도 모든 행위는 성경에 예시된 행위들처럼 무엇인가에 의해서 미리 정해진 것이라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Elijah는 Ishmael과 Queequeg에게 그들의 운명에 대해서 예언을 하지만 그들은 지나가는 미친 사람의 소리처럼 그냥 흘려듣고 만다. 이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작품 "A Very Old Man with Enormous Wings")에서 나타난 것처럼 자신을 도와주려는 조력자나 천사가 항상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모습을 하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쉽게 그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그대로 보 그 처절한 순간에서 살아나게 됨으로서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언행위는 Ahab의 입을 통해서도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117장 "The Whale Watch"에는 Ahab가 ‘the Parsee’라고 묘사된 배화교도에게 자신의 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이 나온다.“But I said, old man, that ere thou couldst die on this voyage, two hearses must verily be seen by thee on the sea; the first not made by mortal hands; and the visible wood of the last one must be grown in America."“Aye, aye! a strange sight that, Parsee:―a hearse and its plumes floating over the ocean with the waves for the pall-bearers. Ha! Such a sight we shall not soon see." (117장 410page)이처럼 Ahab의 꿈을 통해서 두 관에 대한 예언행위를 살펴볼 수 있다. 물론 Ahab는 스스로 죽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결국 작품의 결말에 가서는 그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하나의 관 즉 모비딕에 의해서 바다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만다. 또한 나머지 하나의 관은 Ishmael이 살아날 수 있게 해주는 Queequeg의 관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Ahab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종의 예언행위는 작품의 결말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작품 전체를 통해서 작품 곳곳에서는 여러 가지 상징들을 통해서 작품의 결말에 관한 예언행위가 나타나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러한 예언행위는 위에서 언급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에서 나타난 것처럼 인류의 역사란 것이 그 누군가에 의해서 이루어진 예언과 그 실현이라는 과정의 순환이라는 것을 독자들에게 말하고각한다.
신대륙의 청교도주의와 미국문학의 흐름-미국문학을 지배한 큰 축으로서의 청교도주의와 그 반발에 대하여-과 목 명 : 미국문학의 흐름담당교수 :학 과 : 영어영문학과학 번 :이 름 :들어가는 글미국의 독립된 국가로서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역사에 견주면 그저 조선왕조가 견뎌낸 시간을 지속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미국을 단지 아메리카 대륙에서 새로이 시작한 나라로만 여길 수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 미국이라는 나라를 건설한 이들은 유럽이라는 전통을 가지고 새로운 대륙으로 이주했다. 그들이 당시의 유럽사회를 견디지 못해서 새로운 뜻을 가지고 이주를 했다하여 그들을 전혀 새로운 역사와 문화를 가진 이들로 보는 것은 심각한 논리적 비약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다만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그들이 과거로부터 얼마나 많은 변화를 시도했으며 그 변화의 방향이 어떠한 지향점을 향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가 그들이 남긴 기록이며 그 대표적인 것이 지금까지 남아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는 문학일 것이다. 물론 문학을 통해서 단순하게 역사의 흐름이나 사실관계만을 규명하는 것은 문학을 읽는 올바른 방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당시의 시대적인 변화를 한층 더 깊게 읽어낼 수 있다. 왜냐하면 문학은 단순한 사실관계를 넘어서 그 당시의 시대의식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미국문학의 흐름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미국문학이 대단히 급격하게 시대적 영향을 받고 있으며 때로는 그 흐름을 주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순수하게 작품 자체만을 읽기에 더해 그 작품이 만들어진 당시의 미국 사회의 변화의 맥락을 살펴보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당시 미국 사회를 지배한 거대한 종교 사상인 청교도주의를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최초의 식민지 건설의 원동력이 되었고 줄곧 미국 사회의 흐름을 주도했던 청교도주의는 미국사회를 이해하고 미국문학을 해석하는 데 가장 h, William Bradford, John Winthrop 등을 통해서 17세기까지 이루어진 미국 대륙에서의 기록적 문학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John Smith가 그의 작품 Virginia, New England, and the Summer Isles 에서 보여준 것처럼 어느 정도는 기존에 존재하고 있던 원주민들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가졌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피상적인 것이었을 뿐이지 그들을 자신들과 동등한 위치에 놓고 생각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경험하지 못한 미개한 종족일 뿐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미국 사회는 식민지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그들이 당면한 문제는 단순히 소수의 원주민과의 갈등의 문제가 아니었다. 급격한 시대 변화 속에서 나타나는 사회 내부의 반발의 움직임이 그것이었다. 또한 이는 유럽으로부터의 급격한 인구유입과 함께 당시의 식민지 사회를 그야말로 혼란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인 혼란상을 극복하기 위해서 미국사회의 지식인들이 택한 방법은 최초에 자신들이 미국에 왔던 이유이기도한 종교적 순결성의 회복이었다. 이를 주도한 인물이 Cotton Mather와 Jonathan Edwards였다.신대륙에 나타난 보수적 청교도주의의 강화 양상Wherefore the devil is now making one attempt more upon us; and attempt more difficult, more surprising, more snarled with unintelligible circumstances than any that we have hitherto encountered; an attempt so critical, that if we get well through, we shall soon enjoy halcyon days with all the vultures of hell trodden under our feet. {) Cotton중요하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물론 17세기에 이루어진 이러한 종교적 대각성 운동이 당시의 사회에 부정적 영향만을 끼친 것은 아니었다. 식민지 건설이후 급격하게 유입되는 인구와 성장하는 사회의 경제기반 속에서 많은 부분들이 물질적인 것들에 치중되는 경향이 있었다. 종교적 각성운동은 사회의 이러한 분위기를 쇄신하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미 당시의 미국 사회는 새로운 지향점을 향하여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었으며 종교적 각성운동이라는 것은 미래를 지향하지 못하고 표류하는 일종의 난파선에 불과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미국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하게 되고 그들만의 새로운 국가관을 만들어 나가게 된다.실용적 물질주의와 결합해가는 청교도주의18세기의 미국에서 가장 기억할만한 저술들은 건국의 아버지들, 즉 1775년부터 1783년까지의 독립전쟁을 이끌었고 1789년의 헌법을 작성한 사람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소설가는 아니었다. 어느 편인가하면 그들은 실용적인 철학자들이었으며 따라서 그들의 가장 전형적인 작품은 정치적 소책자였다. 그들은 유럽의 이성의 시대 , 즉 계몽사상 을 숭상하였고 또한 그 운동에 적극적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지성 즉 이성 은 자연과 인간 두 가지를 모두 이해할 수 있다는 계몽주의 사상을 다 같이 믿었다. 인간을 죄많은 실패자로 보았던 청교도들과는 달리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인간이 스스로를 계발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들은 정의와 자유에 입각한 행복한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 Peter B. High. 송관식, 김유조 공역. 미국문학사 한신문화사. 1996. 13.이러한 맥락에 있는 사람들이 Benjamin Franklin과 Thomas Jefferson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founding fathers 로 불리면서 지금까지도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인물들이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그들이 추구했던 새로운 미국적 가치에 있다고 할 것이다. 물론 그들이 자신들INC, 2003. 732.이러한 시대적 변화의 흐름 속에서 미국 사회는 새로운 가치들을 찾아나가게 된다. 그것이 바로 초절주의로 나타난 전통적 기독교관에 대한 반발운동이다.초절주의에 의한 전통적 기독교관에 대한 반발이른바 초절주의(Transcendentalists)자들은 기존의 보수적인 청교도적 기독교주의에서 탈피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이는 이미 당시의 사회가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종교성만을 가지고는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해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초절주의자들은 오로지 신을 통해서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기존의 종교적 믿음에 반대했다. 그들은 직관적으로 진실을 알아내는 인간 내면의 능력을 인식하는 것이 감각을 초월하는 지식의 체계 라고 설명했다.{) Peter B. High. 송관식, 김유조 공역. 미국문학사 한신문화사. 1996. 44.이러한 초절주의 사상은 초기의 청교도주의와 함께 이후 미국문학과 미국사회를 지배하는 거대한 두 축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초절주의를 대표한 인물이 지금부터 소개할 Ralph Waldo Emerson와 Henry David Thoreau이며 그들의 사상을 작품에 가장 잘 표현한 이가 바로 Walt Whitman이라고 할 수 있다.I become a transparent eye-ball. I am nothing. I see all. The currents of the Universal Being circulate through me; I am part or particle of God. The name of the nearest friend sounds then foreign and accidental. To be brothers, to be acquaintances, master or servant, is then a trifle and a disturbance. I am the lover of uncontained and immortal beauty. In the wilderness, I find some신이 아닌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봄으로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미 더 이상 청교도적인 신의 가치가 자리할 곳은 찾아볼 수 없다. Walt Whitman의 이러한 시작 경향은 앞에서도 충분히 말했듯이 초절주의의 영향을 다분히 받았으며 그러한 사상을 자신의 시를 통해서 매우 적절하게 미국적인 가치와 조화시켜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Walt Whitman은 여기에서 나아가 기존의 작가들이 다루지 않던 주제인 인간의 몸과 성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표현했다. 이러한 부분들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일종의 거부감을 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아무리 사회가 변했다고는 하지만 미국사회는 초기 건국부터 시작해서 청교도주의가 뿌리 깊게 박혀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자유를 지향하면서도 그 근본에는 보수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초절주의나 Walt Whitman의 이러한 사상적 경향이나 시작의 형태 등은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 강력하게 비판을 받게 된다. 또한 사회구성원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보수주의적 성향에 대해서 동조를 하게 되며 여기에는 Boston을 중심으로 한 보수주의적 지식인들이 한 몫을 했다. 이러한 흐름에서 중요한 인물을 꼽자면 그가 바로 Nathaniel Hawthorne이다.다시 고개를 드는 보수적 종교성향과 그 변화의 모습Nathaniel Hawthorne은 미국이 낳은 대표적인 작가로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잘 알려진 The Scarlet Letter(1850) 을 비롯해서 많은 장편과 단편 소설들을 남겼다. 그 중에서 지금까지 진행해온 논리의 흐름에서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작품이 있다. 그것은 바로 The Celestial Railroad 이다. 이 작품은 John Bunyan의 Pilgrim's Progress 를 개작한 작품이다. 고난을 겪으며 결국에는 천국에 이르는 John Bunyan의 소설을 풍자적으로 개작하면서 Nathaniel Hawthorne은 정면으로 초절주의자들을 다.
The Cask of Amontilladowritten by Edgar Allan Poe이 짧은 단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The thousand injuries of Fortunato I had borne as I best could, but when he ventured upon insult I vowed revenge." 이 부분에서부터 독자들은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다.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injuries', insult'에 대해서 주인공 I'는 특이한 반응을 보인다. 천번의 상처는 참을 수 있으나 한번의 모욕은 참을 수 없다는 주인공의 이 말로부터 독자들은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 대한 나름의 상상을 하기 시작한다. 또 같은 첫째 문단의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It is equally unredressed when the avenger fails to make himself felt as such to him who has done the wrong." 다른 사람에게 복수를 하고 나서 통쾌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에 대한 미안함 즉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그 복수는 실패한 것이 되고 만다는 이 말은 이 작품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작품의 Plot...이 작품은 앞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주인공인 Montresor가 Fortunato에게서 느낀 모욕을 복수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Montresor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온다. 카니발 기간에 Montresor은 술에 취한 Fortunato를 만나게 된다. 술감정의 전문가인 Fortunato에게 Montresor은 미끼를 던진다. 자신이 우연하게 제목과 유사한 'Pipe of Amontillado'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pipe'는 128갤론을 담을 수 있는 통을 말하는데 이에 흥미를 느낀 Fortunato는 Montresor의 같이 가자는 제안에 동의를 하고 Montresor을 따라나선다. Montresor은 Fortunato를 자신의 palazzo에 있는 지하실로 안내한다. 촛불을 들고서 어두컴컴하고 습기에 가득한 지하실을 두 주인공은 지나간다. 군데군데 널부러져 있는 사람들의 뼈다귀를 보며, 옛날 지하묘지로 쓰인 듯한 곳을 지난다. 이때 Fortunato는 3번씩 5번 총 15번에 걸쳐 연거푸 기침을 한다. 이때 Montresor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다. we will go back; your health is precious."라고 말이다. 그러나 Montresor의 의도를 알지 못한 Fortunato는 the cough is a mere nothing; it will not kill me. I shall not die of a cough."라고 말한다.그들은 계속해서 해골들이 쌓여있는 기다란 벽들을 지나치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갑자기 Fortunato는 Montresor이 알아채지 못하는 이상한 행동을 하고 의아해 하는 Montresor에게 자신이 'mason'이라고 털어놓는다. 술에 취한 Fortunato에게 Montresor은 자신의 팔을 기대게 하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간다. 그들은 드디어 Montresor이 의도한 움푹 들어간 작은 공간에 도착하게 된다. 이곳에서 Montresor은 Fortunato를 벽에 있는 두 개의 제책못에 족쇄를 채워버린다. 맹꽁이 자물쇠에 연결된 작은 체인으로 Fortunato를 묶어버린 Montresor은 키를 빼버리고 뒤로 물러난다.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난지도 모른 채 Fortunato는 Amontillado를 발견했다고 외친다. Montresor은 Fortunato의 외침에 동의를 해준다. 그리고 나서 Montresor은 자신이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Fortunato가 갇혀있는 작은 공간을 막기 시작한다. 미리 준비했던 삽으로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Fortunato의 것이 아닌 듯한 흐느낌이 들려온다. 이는 Montresor이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에 계속된다.Montresor은 Fortunato가 갇혀 있는 공간을 자신의 머리 높이 가 될 정도의 벽으로 막아버리고 마지막으로 작은 구멍만을 남겨 놓게 된다. 그런데 Fortunato의 것으로 보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HaHaHa HeHeHe 하는 괴상한 웃음소리와 함께 Fortunato는 너무 늦게 얻은 것이 아니냐 는 말과 Fortunato부인과 다른 이들이 palazzo에서 기다리지 않느냐? 는 질문을 한다. Fortunato의 질문에 대답을 하던 Montresor은 for the love of God!"라고 말하고 나서 대답에 귀를 기울이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다시 한번 불러보지만 대답은 역시나 없다. 정적이 감돈다. 아까 남겨놓은 작은 틈으로 그는 횃불을 던져 넣어버리고 마지막 돌 하나를 그 자리에 넣어 완전하게 봉해버린다. 이때 Montresor는 아픔을 느낀다. 마음의 아픔을 말이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말한다. In pace requiescat!- May he rest in peace"라고 말이다.작품의 특징이 작품은 포우의 개성적인 작품 구성으로 인해서 추리소설의 느낌을 받게 한다. 마지막 부분에서 들려오는 Fortunato의 기괴한 웃음소리에서 이는 더욱 가중된다. 이미 죽은 이의 유령이 내는 듯한 소리에서 독자들은 이 소설이 주는 섬뜩한 느낌을 읽을 수 있다. 이미 계획된 Montresor의 의도와는 다른 일들이 이 소설에서는 일어난다. 술에 취해서인지 끝까지 주인공의 복수 의도를 알아채지 못하는 Fortunato. 이름과는 달리 불운한 Fortunato는 술에 취한 채 죽어간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의외의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다. 애초에 계획된 것이 깨지게 되는 순간이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Fortunato의 흐느낌과 기괴한 웃음소리가 들려 온다. 이는 마치 죽고 나서야 Fortunato가 Montresor의 의도를 알아챈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의문의 말소리들은 결과적으로 복수를 계획했던 Montresor에게 후회의 감정을 남겨주게 된다. 복수→통쾌함 의 구도에서 복수→후회 의 구도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 부분에서 독자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된다.
운명 속에서의 신과 인간의 모습문과대학 서양어문학부 99140314 조 계 영읽은 책 : 『아이네이드(Aeneid)』- 문학과 의식, 김명복 옮김『아이네이드』를 택하게 된 동기는 이 작품의 문학사적인 중요성 때문이었다. 호머가 중세를 지배했다면, 민족의 개념이 움트기 시작한 르네상스를 지배한 것은 『아이네이드』였다. 라는 역자의 말에서 이 작품의 가치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아이네이드』는 트로이 전쟁 후의 이야기이다. 트로이 전쟁에서 트로이가 패망하고 트로이의 왕자 아이네아스는 트로이를 탈출한다. 그는 갖가지 수난을 겪으며 신이 계시한 제 2의 트로이 즉 로마의 건설을 위해 앞으로 나아간다. 중간에 신의 계략에 의해 표류하기도 하지만 아이네아스는 운명에 따라 이탤리에 도착한다. 그러나 주노 신에 의해서 한번 더 수난을 겪게 된다. 주노가 아이네아스의 여인이 될 운명인 라비니아를 쉽게 넘겨주려 하지 않게 된다. 결국 아이네아스는 전쟁을 통해 라비나아의 청혼자인 투르누스를 헤치우고 이탤리반도를 차지하고 로마 건설의 초석을 닦게 된다.『아이네이드』는 버질이 로마 건국과 아우구스투스의 치세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쓴 서사시이다. 로마 건국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버질은 『아이네이드』에서 가장 중요한 연결고리 기능을 하는 운명 이라는 것을 사용한다. 운명이라는 것은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필연을 의미한다. 로마의 건국이 운명에 의한 필연의 결과였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함이다. 『아이네이드』에 나온 운명의 의미는 전 시대의 호머에게서 나타나는 운명과는 그 의미가 또 다르다. 호머가 보여준 운명은 신의지에 의해서 바뀔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아이네이드』에 나온 운명은 신의지로도 어찌할 수가 없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주노를 예로 들 수 있다. 주노는 트로이 인들을 매우 미워하며 아이네아스를 계속해서 방해한다. 아이네아스의 운명을 이용해 자신이 사랑하는 카르타고에 제 2의 트로이를 건설하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또 아이네아스가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결국에는 이탤리에 도착했을 때도 주노는 전쟁을 불러 일으켜 아이네아스의 운명을 방해하려 한다. 그러나 운명은 바뀔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주노도 자신의 의지를 접게 된다. 12장 552page에 여신은 고개를 숙여 동의하고, 기꺼이 자신의 전 계획을 바꾸고 , 하늘로부터~ 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은 주노가 결국은 아이네아스의 운명을 인정하고 자신의 의지를 바꾸는 모습을 보여 준다. 성경이나 호머에 나타난 신의 전능함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신이 운명을 거스르지 못하고 결국은 그에 따르는 모습을 버질은 『아이네이드』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준다.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아이네이드』에 나타난 운명은 중요시되지 않는다.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이성이 진보한 지금 사람들은 운명이라는 개념 자체를 잊어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 전통 사회에 있어서 운명은 중요한 의미로 여겨졌다. 김동리의 『역마』에 등장하는 계연과 성기의 슬픈 숙명도 운명을 중요시 여긴 우리네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전통사회는 불교가 문화 저변을 차지 했었다. 불교의 기본원리인 연기설도 정해진 관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숙명을 표현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인지 현대인들에게서도 운명에 대한 느낌을 간 혹 엿볼 수는 있다. 내 팔자는 왜이런지~ 라고 한탄하는 모습 등에서 말이다.그런데 한편 과거 사람들이 운명을 중요시 했었던 것은 단순히 무지 때문이 아니라 아직 모르는 것에 대한 겸손함에서 우러나오는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현재 인류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매우 미세한 부분일 수 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자신들의 무지에 대한 겸손함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인 양 자만에 빠져있다. 모르는 것에 대한 겸손함이 현대인들에게는 필요한 것 같다. 운명이라는 것을 단순히 일종의 미신적인 것이라고만 치부하지 말고 그것에 담긴 깊은 의미를 되새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칼뱅이 이미 구원의 결과는 정해져 있으니 결과에 순응하고 현실의 삶에 충실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운명이 가지는 이면적 의미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을 해 볼 필요가 있다.『아이네이드』를 읽으면서 운명 속에서 방황하는 신과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너무 과장되고 스토리의 전개가 단순한 구조로 짜여 있는 것 같아 아쉬웠다. 물론 이 작품이 기원전에 쓰여졌고 당시의 문학적 풍토가 별로 갖추어지지 않아서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작품 전체를 통해서 작가 자신의 진실된 목소리를 찾기는 힘들었다. 대부분의 내용이 신화를 원용하고 또 나오는 인물들의 성격도 매우 고정적 이었다.현대의 문학작품에 나타나는 캐릭터의 다양성같은 것이 많이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물론 이러한 작품이 기반이 되어 다음 시대에 좋은 문학작품이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내용면에서 『아이네이드』는 로마 건국의 당위성을 운명의 필연성을 통해서 드러낸다. 그 운명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작가에 의해서 창조된 것 같다. 하여튼 작가는 로마의 건국의 역사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버질은 이미 있었던 일을 나름의 생각으로 각색하기도 하고 창조하기도 하고 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작가는 이미 아이네아스의 운명을 역사적 사실로서 알고 있다는 말이다. 거기에 신비성을 부여하고 좀 과장된 표현을 동원하여 로마 제국의 위대함 같은 것을 좀 더 부각시키려고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작품 전체를 통해서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10장 448page에 나온 예를 들면 카이디쿠스가 알카토우스를, 사크라토르가 히다스페스를, 라포가 파르테니우스와 장사인 오르세스를, 메사푸스가 클로니우스와 리카온의 아들, 에리카이테스를 죽였다. 라고 나온다. 이러한 방법으로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 이런 인물들은 어떻게 보면 내용이해를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생각에 버질이 이렇게 많은 사람을 등장시킨 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죽어가며 결국에는 로마가 세워졌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작품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도 결국은 로마 건국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였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I am Lady LazarusOut of the ashI rise with my red hair.And I eat men like air.잿더미 속에서 빨갛게 달아오른 머리를 하고 Sylvia Plath(1932∼1963)는 부활한다. 그녀의 작품 속에서 그렇듯 그녀는 자살을 하고 나서 자신의 작품을 통해 다시 살아남으로써 세상에 있는 남자들을 한꺼번에 자신의 몸 속으로 끌어들인다.Sylvia Plath의 삶에 관하여Sylvia Plath는 스스로 선택한 불운한 삶을 살다간 여성이다.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써 또 한 명의 지식인으로서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두 아이와 남편을 남겨두고서 말이다. 그녀의 죽음에 대한 관념은 어느 정도 그녀의 아버지의 죽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어렸을 적 아버지의 죽음을 겪고 나서 그녀는 삶보다는 죽음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Sylvia Plath는 시인인 Ted Hughes를 만나 결혼생활을 시작했고 아이도 낳았다. 그러나 남편이 자신의 친구와 불륜적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을 알게되고 분노한다. 이로써 그녀의 죽음에 대한 생각은 남성에 대한 분노와 결합하게 된다.{) 최병현, 『시와 시론 미국 현대시 : 1950년대 이후』, 한신문화사, 서울, 1995. 97page∼ 103page의 Sylvia Plath의 전기적인 부분에서 참고 요약.죽음에 대한 의식과 남성성에 대한 거부그렇다. Sylvia Plath는 남성이 지배하는 세계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시에서 표현한 것처럼 남성을 먹어치우고 싶어한다. 남성이라는 존재의 이미지를 사라지게 하고 싶은 것이다. 시에서 이러한 이미지는 죽음의 이미지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시의 초반부에 나오는 유태인의 학살에 대한 이야기. ‘my skin/ Bright as a Nazi lampshade,/ My right foot// A paperweight,/ My face a featureless, fine/ Jew linen’ 또 결정적으로 시의 제목에서 언급되어 있다시피 이 시의 내용은 부활한 ‘Lazarus’에 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이처럼 Sylvia Plath는 죽음의 문제에 대한 강한 집착을 드러낸다.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Dying/ Is an art, like everything else./ I do it exceptionally well.’ 죽음이라는 것도 하나의 예술이며 자신은 그것에 대해 특별한 소질이 있다고 까지 말한다. 이미 죽음의 문제는 시인 스스로 많은 성찰을 거쳐 하나의 관념으로 자리잡은 상태에 있다. Sylvia Plath는 이런 죽음의 이미지를 남성에 대한 거부감의 이미지와 연관시킨다.‘So, so, Herr Doktor./ So, Herr Enemy.// I am your opus,/ I am your valuable,/ The pure gold baby’, ‘Herr God, Herr Lucifer,/ Beware/ Beware.’이처럼 모든 일반적인 직업을 상징하는 의사나 추상적인 적, 신과 타락천사는 남성으로 표현되고 자신 즉 여성은 남성들이 생각하는 하나의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표현한다. 독일어에서 ‘Herr’는 영어에서의 ‘Mr.’와 같은 기능을 하는 남성존칭이다. Sylvia Plath는 일반적인 의사라는 직업과 적이라는 추상적인 명사 앞에 남성존칭을 붙여서 남성에 대해 부정적 이미지를 표출하고 있다. 또 절대자인 ‘God’와 타락한 천사로 상징되는 ‘Lucifer’의 앞에도 다 같이 ‘Herr’라는 남성존칭을 사용하여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이라는 것, 악마라는 것도 모두 남성들이 만들어낸 남성성을 상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과감하게 남성성을 탈피하기 위해서 자살을 택한다.새로운 화해의 시도그러나 그녀의 죽음은 단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새로운 육체와 영혼을 가지고 잿더미 속에서 부활한다. 남성성을 떨쳐버리고 나서 진정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부활한 시인은 남성들의 모든 허울들을 단숨에 들이켜 버린다. 불 속에서 태어난 Phoenix가 되어 모든 것을 순결하게 정화시키는 불로써{) 이 부분은 T. S. Eliot이 그의 서사시 “The Waste Land”에서 불(fire)의 이미지를 정화 (purification)의 이미지로 파악한 데서 빌어 왔음.잘못된 남성의식을 불태워 버린다. 아마도 그녀는 자살을 통해서 이러한 부활과 정화를 추구했을 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죽음을 통해서 자신이 생각하는 남성성의 파괴를 통해 그 남성들과 진정한 의미의 화해를 시도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서 그레고르 잠자가 죽음을 통해서 가족과의 화해를 시도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의한 질병과 스스로의 삶의 포기에 의한 죽음으로써 대화가 불가능했던 가족들과 새로운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