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 차 >1. 서 론 ...(1)2. 본 론 ...(2)2.1 성장과정 ..........(2)2.2 유럽통합의 계기 .(4)2.3 유럽통합에서 장 모네의 역할 ................(5)2.4 유럽통합의 의의 .(6)3. 결 론 ..(7)4. 참고문헌 .(9)1. 서 론현재의 유럽이 있기까지 유럽인들은 물론 세계인들은 이 사람의 이름을 처음으로 거론 한다.물론 유럽 통합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산실이 한 인물 중심으로 회자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하지만 이런 결과를 만들어낸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을 빼놓는다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생소할 수 있는 그의 이름은 장 모네(Jean Monnet, 1888~1979)이다. 유럽인들은 장 모네를 유럽 통합의 아버지라는 명예스러운 칭호를 붙여서 부른다. 또한 1980년대부터 유럽통합사를 연구하는 대표적인 역사학자들에게 모네 석좌(Monnet Chair)라는 칭호를 수여한다. 어떻게 해서 장학진학을 포기하고 만다. 모네의 아버지는 결국 모네를 영국으로 유학을 보내고 보내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책은 한 권도 가져가지 마라. 많은 사람에게 말을 걸고 대화를 나누라’. 모네의 아버지는 모네에게 많은 것을 경험하기를 바랐고 그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를 더욱 중요시하게 여기라고 어렸을 때부터 가르쳤다고 한다. 10년간 영국을 거쳐 미국과 캐나다, 북유럽 3개국과 러시아ㆍ이집트를 돌아다녔던 여행은 결국그에게 기회를 안겨준 셈이다. 프랑스를 자기 시야에 두지 않았던 모네에게 어쩌면 유럽은 자국 프랑스보다 우선시 되었던 또 하나의 국가였을지도 모른다. 니체가 말한 것처럼 진정한 유럽인이 되기 위해서는 유럽 밖에서 유럽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을 장 모네는 이미 유년기 때부터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2.1.2 정치입문과정1914년 1차 세계대전 발발하게 된다. 주요 참전 국가인 프랑스는 연합국인 영국에게 민간물자를 공급하게 된다. 모네는 어린 시절부터 영국에서 10년 이상 유학생활을 한 탓에 영국에 저명한 인맥들이 많이 있었다. 이때부터 모네의 삶이 시작된다. 그 당시 프랑스에서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프랑스와 영국을 왕래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또한 프랑스의 코냐크 사업에 관여하고 있던 가문의 역할 또한 있었다. 결국 프랑스는 모네를 연합국의 해양위원회로써 영국에 민간물자를 보급하는 일을 맡기게 된다. 1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 군수물자 조달을 도운 인연으로 국제연맹 부사무총장으로 4년 일했다. 이후 그는 1차 세계대전 당시부터 경험해온 경력을 토대와 천부적인 비즈니스맨의 자질을 바탕으로 사업가로써 성공하게 된다. 프랑스계 미국회사인 ‘블레어 & Co.(Blair & Co.)’라는 투자회사를 설립하고 부회장직을 맡았고 또한 폴란드, 루마니아 정부의 고문 역할도 했따. 이후 대공활 시절이었던 1929년부터 1932년까지 미국으로 건너가서 샌프란시스코에 은행을 설립하고 그곳에서 3년 동안 일을 합니다. 그는 이렇게 직접 현장에서 숨은 노력은 전쟁을 이용하지 않고 그것을 빠르게 정리하고자 여러 고문들과도 친분을 쌓게 되면서 2차 세계대전이 빨리 종결되도록 애를 썼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노력과 관련하여 유명한 경제학자인 케인즈는 “장 모네의 활동으로 인해 2차 세계대전이 1년이나 단축되었다”라고 극찬한다. 또한 장 모네는 꾸준히 이러한 미국 정치 엘리트 그룹들과 지속적으로 깊은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때로는 사적으로 대로는 공식적인 활동을 통하여 의견을 교환하면서 미국의 유럽정치 방향을 제안하기도 했다. 특히 전쟁 전후의 유럽질서에 대해 고민했고 “유럽은 강력해져야 하고 또 강력해지기 위해서는 통합되어야 한다.”는 합의된 논리를 발전시켰다. 휴전 협정이 체결된 직후에는 워싱턴으로 건너가 영국 군사보급이사회의 이사장으로 취임했고 1942년 5월 알제리의 프랑스 국민해방위원회에 합류했으며 이듬해 4월 샤를 드골 장군에 의해 국제연합 특별판무관으로 임명되었다.2.2 유럽 통합의 계기사실상 유럽 통합의 이야기는 장 모네가 처음 거론한 발상은 아니었다. 이미 18, 19세기에 유럽의 많은 지식인들이 유럽통합사상을 설파했고 철학자 칸트는 1차 세계대전 직후에 범유럽공동체에 관해 이야기를 했었다. 1946년 9월 10일에 처칠은 취리히에서 유럽 국가들의 연합과 프랑스, 독일의 화해를 위한 ‘일종의 유럽합중국’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는 “유럽적 가족의 부활은 프랑스와 독일의 연합으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는 유럽을 도덕적으로 관리하는 책임을 맡을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와 독일의 정신적 위대함 없이 유럽의 부활을 없을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2차 대전 중에도 나치정권에 저항하는 세력들은 유럽통합을 갈망하며 유럽의 평화를 꿈꾸었다. 하지만 2차 세계 대전 이후 피폐해진 유럽의 상황과 전쟁피해복구와 경제재건에 몰두하면서 유럽통합이란 말은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유럽 각 국의 유리한 정치적 상황이나 조건들이 갖춰져야 했으며 히틀러의 독일이 있는 유럽과 독일에게 많은 상처를 받은 프랑스의트루먼 독트린을 통해 미국은 유럽에 정치적으로 개입을 할 것임을 선언했고, 경제적으로는 마샬 플랜(Marshall Plan, 1948)을 통해 전후 유럽재건을 실질적으로 지원했다. 미국이 마샬 플랜을 위해 서유럽국가들에게 내건 조건은, 각국의 상이한 역사, 현조건 및 이해관계를 극복하고 단결하여 공동기구를 설립하는 것이었다.그 결과 1948년 17개의 회원국을 가진 유럽경제협력기구 (OEEC, Organization for European Economic Cooperation)가 창설되었다. OEEC는 실제적인 과제는 미국의 원조를 회원국들에게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실행 및 협조기구에 불과했으나, 유럽통합사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있다. OEEC는 독일이 전후 최초로 국제적인 기구에 의석을 차지했다는 점에서 독일에게는 대외정치상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마샬 플랜을 통해 미국은 유럽의 경제재건과 피해복구를 위해 무려 140억달러를 지원했다. 이로 인해 서유럽에는 경제복구의 희망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실제로 미국의 지원금 유입을 통해 유럽 16개국의 생산력은 마샬 플랜 시행 5년 후인 1952년에는 15-20%로 증가됐다. 프랑스 사학가 요셉 로방(Joseph Rovan)이 "유럽은 원치 않았지만, 미국은 어쩔 수없이 유럽공동체의 모체였다"라고 표현한 것은, 물론 OEEC수립에도 그 근거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미 그 보다 훨씬 전인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전반에 워싱턴에서 유럽통합의 싹이 트고 있었다는 점이다.2.3 유럽통합에서 장 모네의 역할그렇다면 유럽통합이 오로지 미국이 유럽을 정치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밖에 볼 수 없는가? 아니다. 장 모네를 주목해야할 이유는 여기서 부터이다. 전후 프랑스에 귀국한 모네는 국가의 철도와 도로재건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미국에서 스케치했던 유럽통합의 계획을 프랑스 여론을 통해 의식화시키기 시작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모두 겪은 그는 전쟁으로 인해 차원에서 출발했다. 모네는 20세기 유럽의 십자가였던 독일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기"라는 것을 인식했다. 힘찬 포옹으로 독일이라는 유럽평화의 위험요소를 제거하자는 "독일 안아주기 정책"이었다. 이것은 프랑스의 친독일 정책으로 귀결됐으며, 곧 유럽통합 노선의 기조가 된다. 프랑스는 이 정책에 영국을 동등한 파트너로 동참시키고자 했으나, 영국은 냉정했다. 영국을 비롯한 북유럽국가들은 정부 간의 협력 체제를 초월하는 유럽통합에는 무관심했다. 이에 비해 독일은 유럽통합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유럽통합을 통해 독일의 주권을 회복하고 타 유럽국가와 동등한 위상을 회복함으로써 효과적인 국가재건이 가능하다는 확신 때문이었다.모네 플랜이 현실화의 첫 걸음을 내디딘 시점은 1950년 5월 9일이었다. 모네 플랜을 바탕으로 프랑스 외교부 장관이었던 로베르 슈만(Robert Schuman, 1886~1963)은 1950년 5월 9일, 슈만 플랜(Schuman Plan)을 제창하게 된다. 슈만 플랜은 ‘국경을 초월한 협력관계를 유지하지 않고서는 서유럽의 미래는 없다’는 전제하에 서유럽 전체의 자원과 공장을 초국가적 기능에 의해 관리한다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유럽의 석탄·철강 생산을 프랑스와 독일 및 이에 참가하는 유럽 여러 나라의 공동관리 하에 두고, 생산의 합리화와 근대화를 기초로 한 공동경제시장을 창설해 결국은 유럽연합으로까지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프랑스와 독일간의 전쟁 가능성이 사라진다는 것도 부수효과로 제기됐다. 아데나워 서독 수상은 이 제안을 환영하며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라는 중요한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첫 걸음으로 평가했다. 서유럽 6개국(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은 이듬해 4월 슈만 플랜을 구체화시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조약을 체결하고 12월에 비준했다. ECSC는 EEC(유럽경제공동체), 유라톰(유럽원자력공동체)과 통합되어 1967년 7월 유럽공동체(EC)를 형성하였고 1993년 11월 1일 마스트리히트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