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PL(Photoluminescence)이란...포토루미네선스라고도 한다. 루미네선스란 물질이 빛이나 전기, 방사선 등의 에너지를 흡수하여 여기(勵起)상태가 되고, 그것이 바닥상태로 돌아갈 때 흡수한 에너지를 빛으로서 방출하는 현상이다.광루미네선스는 빛에 의한 여기로 생기는 루미네선스로 일반적으로 자극광(조사광)의 파장과 같거나, 그보다 긴 파장의 빛이 나온다. 발광중심이 직접 빛을 흡수하여 여기되어 발광하는 경우와, 빛의 흡수로 말미암아 생긴 캐리어가 발광 중심에 포착되어 발광하는 경우가 있다.광여기로 발광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여기광의 에너지가 이와 같은 여기 기구에 상당한 값을 갖고 있을 필요가 있다. 그런 값을 갖는 여기 파장 영역을 여기 띠라 부른다.고체에 강한 전기장을 걸면 형광이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는 전기에너지가 빛에너지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진성전기루미네선스와 전하운반체주입형 전기루미네선스, 전기광 루미네선스 등의 종류가 있다. 이에 의해 생성된 빛은 휘도가 낮아 시계의 문자판이나 라디오의 눈금판 등에 사용되고 있다.2. PL(Photoluminescence)의 원리? 자발 라만 효과(spontaneous Raman effect)들뜬 원자가 광자를 방출한 후에 초기 상태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다. 스토크스(george stokes)는 양자 이론의 출현 전에 이런 종류의 행동을 관찰하였고 광범위하게 연구하였다. 원자가 중간 상태로 떨어지기 때문에 입사한 원래의 광자보다 낮은 에너지의 광자를 방출하는데, 이것은 보통 스토크스 천이(stokes transition)라고 일컬어진다. 이 과정이 급격히(대략)일어나면 형광(fluorescence)이라고 하는 반면에, 상당한 지연(어떤 경우에는 수 초, 수 분 또는 심지어 수 시간)이 있다면 인광(phosphorescence) 또는, 광발광(photoluminescence)이라고 알려져 있다. 자외선 광자를 이용하여 가시광선의 형광을 방출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보통 일어나는 일이 되었다. 많은 일상적인 물질들(예를 들면 세제, 유기 색소 및 치아 에나멜)이 자외선을 비추었을 때 특유한 가시광선의 광자를 방출하며 빛을 내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상업적인 표시 목적과 의복의 “표백”을 위해 이 현상이 널리 쓰인다.만일 준 단색광이 어떤 물질로부터 산란된다면 주로 같은 주파수의 빛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높고 낮은 주파수를 갖는 매우 약한 부수적인 성분(측엽)들을 관측하는 것이 가능하다. 더욱이 측엽과 입사 주파수사이의 차이는 물질의 특성으로 나타나므로 분광학에서의 응용을 제시한다.분자는 원적외선과 마이크로파 영역의 복사 에너지를 흡수하여 회전 운동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다. 게다가 분자는 적외선 광자(즉, 대략으로부터 약 700까지의 파장역역 안에 있는)를 흡수하여 그 에너지를 분자의 진동운동으로 변환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분자는 원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자 천이의 메커니즘을 통해 가시광선과 자외선 영역의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다. 이제 그림 13.19(a)에 도표로 나타낸 것처럼 어떤 진동 상태에 있는 분자를 생각하자. 여기서 양자역학적 기호를 사용하여 진동상태를 |b>라고 나타내는데, 이것이 여기상태일 필요는 없다. 에너지의 입사 광자가 흡수되면 계가 어떤 중간상태나 가상(virtual)상태로 올라가게 되고 거기서 즉시 스토크스 천이를 하여로 여기 시키는데 사용된다. 전자적이나 회전적인 여기가 그와 같이 일어나는 것도 가능하다.한편 초기상태가 여기상태(단순히 시료를 가열하여)이면, 분자는 광자를 흡수하고 방출한 후에 더 낮은 상태로 떨어지는(그림 13.19(b)) 반 스토크스(anti-Stokes)천이를 할 수도 있다. 이 경우>이며, 이는 얼마의 분자 진동에너지(-)가 복사에너지로 전환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경우 모두와사이의 결과적인 차이는 연구되고 있는 물질의 특정 에너지준위 차이에 대응하며, 이와 같은 결과로서 분자 구조가 파악된다. 그림 13.20은 비교의 목적으로=인 레일리 산란을 보여 준다.3. PL(Photoluminescence)의 응용① 연소 해석 : 농도 및 온도의 측정결맞는 Raman 신호를 백그라운드 광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다. 결맞는 분광법의 이런 성질은 대부분의 경우 연소에 의해 빛나고 있는 광의 세기가 자연산란에 의한 신호를 훨씬 상회하기 때문에 연소해석에 특히 유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J. P. Taran에 의한 초기의 실험에서는 메탄-공기의 혼합 불꽃 가운데 열해리에 의해 생성된의 분포를 수 mm의 분해능으로 잡아 분포도를 얻을 수가 있었다.CARS의 공간 분해능은 두 가지 방법에서 개선할 수 있다.과의 빔을 작은 각도로 교차시키면 빔이 겹쳐진 활성화 영역의 길이가 대단히 짧게 된다. 두 개의 입사광 사이의 끼워진 방향의 상호작용 영역에서 나오는 반 Stokes 빔의 세기도 역시 감쇠하지만 보통은 원래의 신호세기도 대단히 크기 때문에 감쇠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1.머리말먼저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장자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고 책의 내용으로 들어가 내편인 의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한다, 제물론 부분에서는 ‘장자’책과 함께 읽은 윤대녕의 ‘옛날영화를 보러 갔다.’ 와 프로이트의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빌헴름 옌젠의 「그라디바」에 나타난 망상과 꿈’ 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겠다. 이들의 줄거리에 대해서는 발표문에 기제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도록 한다. 보고서는 주로 책의 내용 요약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책에서 인용한 부분이 많음을 미리 일러둔다. 결론부에서는 장자와 지금의 현대사회의 관계에 대한 나의 생각을 중심으로 마무리 짓는다.2.1.소요유(逍遙遊)-자유롭게 노닐다.‘소요유’는 인간의 누릴수 있는 자유의 경지를 이야기 한다. 이 편에서 말하는 절대 자유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변화와 초월, 이것이 「장자」전체의 주제이며 가르침의 궁극 목표라 할 수 있다. 제1절에서는 ‘곤’이란 물고기가 ‘붕’이란 새로 변화해 구만리 하늘을 날아 남쪽으로 간다는 우화를 이용해 장자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다. 장자의 전체 주제는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변화 가능성과 그 실현인데, 붕새는 변화의 가능성을 실현한 사람을, 비상은 이런 사람이 경험할 ‘초월’을 상징하는데, 이러한 변화는 자연스럽게 발현한 것이며, 변화과정은 정신적 경지의 상승과정이라 볼 수 있다. 장자는 여러 가지 예를 들어서 초월적인 경지와 그런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알아볼 수 없는 우리 세속적 사람들의 인식능력의 한계를 보여준다. 붕새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비웃는 매미, 새끼 비둘기, 메추라기, 견오, 큰 박과 가죽나무가 필요 없다고 말한 혜자 등이 그 예이다. 장자는 ‘신인’이 절대자유의 경지에 올랐다고 여겼는데, 신인은 망공?망명?망기를 이루었고 주변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어 ‘쓸모없는 것의 쓸모’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이처럼 에는 궁극변화, 초월, 절대자유, 해방, 정신적 경지의 승화과정 등을 말하는 장자의 가르침이 잘 드러나 있다.2.2.제물론(齊物論) -사물을 고르게 하다.이편의 주제는 우리가 우리의 실존적 한계성을 초월하여 궁극적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립의 세계에서 대립을 초월한 ‘하나’의 세계, 실재의 세계를 꿰뚫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하나’의 세계, 실재의 세계란 어떤 것인가? 그리고 그 세계를 꿰뚫어 볼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사물의 한쪽만 보는 우리의 상식적, 분석적, 이분법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더 높은 차원에서 사물의 진상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예지와 직관과 통찰을 체득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마지막으로 나오는 ‘나비의 꿈’ 이야기는 ‘장자’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32. 어느 날 장주(莊周)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 보니 다시 장주가 되었다.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주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알 수가 없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별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일러 ‘사물의 변화’라 한다.- ‘장자’ p134 ‘나비의 꿈’ 참조 -이 나비의 꿈 이야기를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이 이야기의 주제가 ‘인생은 일장춘몽’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여기서 가장 핵심적인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여기서 가장 핵심단어는 ‘물화’이다. 이 단어가 결국은 제2편 의 마지막 결어인 셈이다. 그러면 ‘물화’라는 것은 무엇일까?장자가 보는 세계는 모든 사물이 이것과 저것으로 갈려 독립한 개물의 세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앞에서도 여러번 지적했다. 장자가 보는 세계는 모든 사물이 서로 얽히고 설킨 관계, 꿈에서 보는 세계와 같이 서로가 서로가 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들어가기도 하고 서로에게서 나오기도 하는 ‘꿈 같은 세계’이다. 이런 세계는 개물이 제각이 독특한 정체성과 함께 ‘하나’라는 전체 안에서 서로가 될 수 있는 불이성이 병존하는 세계이다.따라서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별이 있기는 있을 것”이지만 그러면서도 장주가 나비가 되고 나비가 장주가 될 수도 있는 세계라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런 세계는 만물이 상호 합일하고 상호 침투하는 세계, 만물이 상호 연관하고 상호 연기, 상호 존재하는 세계를 말한 것이다.궁극적으로 이런 세계는 이편 서두에서 말한 ‘나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진정으로 채득할 수 있는 세계요, 이런 세계를 체득할 때 쓸데없는 아집, 편견, 국지주의, 자기중심주의, 일방적 단견, 오만 등에서 풀려나 관용과 아량과 트임과 조화와 협력을 바탕으로 하는 자유 세계에서 노닐게 된다는 것이다.‘나비의 꿈’에서 보이는 꿈과 현실사이의 관계는 아래의 두 소설에서도 나타난다. 첫 번째가 윤대녕의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라는 작품이고 두 번째가 프로이트의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빌헴름 옌젠의 그라디바에 나타난 망상’이라는 작품이다.‘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 라는 소설에서 형섭은 잃어버린 과거의 기억을 통해서 현재의 자신을 되찾는다. 이는 과거가 단순한 과거만이 아니며 현재의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현재와 과거(꿈)과 구별되지 않고 상호작용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프로이트의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빌헴름 옌젠의 그라디바에 나타난 망상과 꿈에서는 젊은 고고학자인 하놀드가 상상 속의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여인이 실은 잊었던 어린시절의 친구였음을 환상이라고 생각한 여인과 대화를 나누며 깨달아 가는데 여기에서도 꿈속의 하놀드와 현실세계에서의 하놀드가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2.3.양생주(養生主) -생명을 북돋는 데 중요한 일들이편에서는 신나는 삶, 활기찬 삶, 풍성한 삶이 어떤 것인지 몇 가지 구체적 예를 들고 있으며 특히 주로 개인의 삶의 태도에 대한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장자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자연의 순리를 따르라’는 것이다,삶에는 끝이 있지만 앎에는 끝이 없다. 그러므로 끝이 있는 것으로 끝없는 것을 알려하면 위태로워진다. 중간의 입장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포정이 소를 잡는 일도 정신의 자연스러운 작용으로 이루어졌다. 포정은 ‘하늘이 낸 결’, 즉 본래부터 있던 자연적인 결에 따라 칼을 움직이는 자기와 소와 칼이 완전히 합일된 상태에 이르렀던 것이다. 여기서 결은 ‘이(理)의 본래 뜻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포정의 말을 듣고 문혜군은 양생의 도, 즉 살아가는 법을 터득했다. 그 법이란 자연의 도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하늘로부터 받은 본분을 잊지 않는 것이다.우사, 못가의 꿩, 노자의 죽음, 장작불 이야기는 모두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는데, 우사 이야기는 어느쪽이던 자연의 순리를 따라야 함을, 못가의 꿩 이야기는 유유자적하는 삶이 신나는 삶이며 이러한 삶을 즐길 줄 아는 것이 양생의 필수요건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또 노자의 죽음에서는 사물의 본성을 배반하는 것은 양생의 도리에 어긋나는 일임을 말해 주고, 장작과 불 이야기에서는 죽음과 사후문제에 신경쓰는 일에서 벗어나는 것이 양생의 중요한 길임을 말해주고 있다.2.4.인간세(人間世) -사람 사는 세상‘인간세(人間世)’란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란 뜻이다.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정황에서, 특히 복잡하고 비정한 사회 ? 정치적 정황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개인적으로 훌륭하게, 자유스럽게, 훌륭하게 사는 길인지를 보여준다. 일종의 처세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안회가 공자에게 위나라로 가 젊은 폭군의 압제 아래서 신음하는 백성을 돕겠다는 뜻을 밝히며 여행을 허락해 달라고 하자 공자는 요청을 거부한다. 아직 완성된 ‘덕’을 쌓지 않은 안회가 위험하게 될 것을 걱정했고 안회가 위나라로 가려는 이유가 자신을 위해서인지 어떤지 다시 한번 되돌아 보기를 원했다. 공자는 안회에게 심재(心齋,마음의 재, 마음을 굶김)하라 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귀로 듣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듣고, 또 마음으로만 듣는 것이 아닌 기(氣)로 들어 공허함을 깨달아야 함을 이른다. 심재는 곧 기의 공허함인데, 공허한 기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참된 도가 모인다. 참된 도를 위해서는 스스로를 잊고 허심의 경지에 들어서야 한다. 심재(心齋)는 자신을 비움으로서 가능하지만 이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심재를 통해 경험하는 상태는 초월적인 힘을 발휘하는 새로운 의식의 상태가 될 것이며 모든 인간사에 효율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된다고 장자는 말한다.? 공자는 제나라 사신으로 가는 자고의 고민에 대해 충과 효를 말하면서 회피할 수 없는 일은 운명으로 알고 편안히 받아들이는 것이 ‘덕의 극치’라고 충고하며 이런 태도로 제나라로 가라고 한다. 또한 구체적 사항을 일러 주는데 말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마음이 사물의 흐름을 타고 자유롭게 노닐도록 하라’ 며 다른 사물의 특성에 구애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말하라고 한다. 이는 무위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거백옥은 안합에게 태자를 보좌할 때, 섣불리 말을 하지 말고 충분히 경계하고 삼감으로써 몸가짐을 올바르게 하여 겉으로 따르고 마음도 조화될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따르더라도 하나가 되거나, 조화되어도 겉으로 나타낸다면 곧 파멸이 뒤따를 것을 말하였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화려하고 가치 있어 보이는 나무도 그 진실을 알고 나면 쓸모없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그 나무가 인위적인 데에 벌써 효과적이었다면 그렇게 오래 살 수 없었다. 능력이 보장되면 그때부터 그것의 삶은 괴로워지는 것이다. 곧 유용은 해를 초래하며 무용이 그 천명을 다하는 것이다.에는, 무조건적인 형이상학적 초월의 정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인간 생활을 토대로 전개시킨 장자의 철학이 담겨있다. 즉, 이 세상에 속해 있으면서 삶을 엮어 가는 구체적 방법을 장자는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구체적 방법은 심재와 무용(無用)을 통해 기를 공허하게 만드는 것으로서 인위적으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닌 자연에 맡겨 사는 것(무위)을 말한다.
오리엔탈리즘-그 의미를 찾아서과목: 고전 세미나담당:학과:학번:이름:제출일:들어가기에 앞서.예전에 우연찮게 들었었던 이야기. 행여나 하는 생각으로, 인터넷 검색창에 ‘에드워드 사이드 돌팔매질’이라는 검색 단어를 입력해 보았다.역시나, 말로만 듣던 에드워드 사이드의 돌팔매질 하는 모습이 찍힌 사진이 떠오르고(솔직히 사진을 보기 전까지 나는 그 시간 때는 밤 일거라 확신했었다. 그러나 더없이 밝은 날 햇볕도 눈이 부신 초가을과 같은 날씨) 그 사진을 보고 난 뒤, 알 수 없는 통쾌함과 가슴 속의 시원함. 존경심과 경외감. 그 미묘한 감정들이 뒤섞여 얼굴로 번졌다.“대단하다.”오리엔탈리즘의 저자이자, 미국 컬럼비아 대학 교수이기도한 에드워드 사이드.2000년, 그가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 측 초소에 돌팔매질을 하는 장면이 미국전역에 방송되었다고 한다.그의 모습은 참된 지식인으로서의 바람직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바라는 이상향. 언행일치. 아는 것과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실천 하는 그의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으며, 그런 그의 용기 있는 모습에 감탄을 금할 수 가 없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그의 모습이었다. 인터넷을 통해 찾아본 그의 얼굴은 아랍인이라 하기엔 너무나 유럽인처럼 보였다. 그런 그는 자신의 권익이 아닌 신념을 위해 저술 활동을 하고, 정치적인 활동을 한다. 어쩌면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나에게 있어 더없이 우상화 될 수 밖에 없는 존재. 우리의 신념이자 목표인 돈과 명예는 뒷전에 두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 삶을 사는 그의 모습에서 참된 지식인, 지성인으로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한편으론, ‘강정구 교수사건’이 머리 속에 떠오르면서 이러한 한국 사회에서-이념이나 신념이 관습화되어버린 사회에서- 과연 진정한 지식인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 역시 소수자 혹은, 사회에서 악으로 치부할 테니 말이다.이러한 한국 사회에서 자라난 나 자신에게 있어, 이러한 수업을 통한 자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깨닫게 된 계기였던 하고자 하는 바는 나에게 있어 무척이나 획기적인 것이었다. 오리엔탈리즘 역시 그것에 비한다면 더없이 놀라우며 경이로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여태까지 사고해 오던 모든 것들이, 모두 누군가에 의해 조작되어, 내 스스로의 기호이자 개성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모두 허구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 대상이 알 수 없는 동경의 대상이자 우월성의 상징인 서양인들이었다면 더없이 허탈하고 황당할 수 가 없는 것이었다.나는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그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결실을 맺어, 내가 그랬고, 내 주위 사람들이 그러하며, 내 후손들 또한 그렇게 될 테니까.오리엔탈리즘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 역시 나에겐 몹시도 흥미로운, 새로운 깨달음이기도 하지만, ‘안다’ 즉 ‘인식?인지한다’라고 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 커다란 고통이기도 했다.그가 책을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물론 ‘오리엔탈리즘’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본 저서에서 그가 말하는 것은 현재와의 접목이 아니라,“중립적인 자세에서의 오르엔탈리즘이 갖는 의미에 대해 전달하고 있다’”라고 교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물론 객관적으로 책의 핵심은 그러할지 모르나, 그에 대한 본질에 있어서의 접근은 글을 읽는 개인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 본론에 들어가 과연 그가 책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이며. 이를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하는 본질은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본론솔직히 본문의 내용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지식의 함축이자, 그의 지식의 체계적인 요약. 매우 잘 정리된 요약집이기도 하였다. 어려운 책이니만큼 심혈을 기울여 책을 읽어 내려갔지만, 현재의 내 지식과 배경 지식으로는 도저히 책 내용의 절반도 이해 못할 거라는 생각에 책을 속독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잠시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도대체 논지의 범위를 설정할 수 없었으며, 중심 또한 잡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책이 아닌 인터넷이나 요약집을 뒤적거린다는 건, 나에게 더없는 수치였으므로- 작품을 읽으며 각자의 의미는 획일화 될 수 없다라고 생각하나지 않나 라는 생각과 함께, 온통 현재의 중동의 분쟁 문제, 세계 시사들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그리고 수업시간. 솔직히 전혀 감도 못잡은 채 질의를 해대고, 발표자들의 떠드는 이야기를 경청하다가, 비로소 교수님을 통해 책의 내용을 작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그리고나서 다시 책을 발췌독을 하기 시작했고, 어설프게 지나쳤던 부분이 바로 책을 통해 에드워드가 말하고자 했던 핵심적인 논점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서설 p.35따라서 오리엔탈리즘이란, 문화 학문 제도에 의해 피동적으로 비추어지는 단순한 정치적인 연구주제나 연구분야가 아니다. 또 동양에 관련된 방대하고도 산만한 텍스트들의 집합도 아니다. 나아가 ‘동양적’ 세계를 억압하고자 하는 극악무도한 ‘서양적’제국주의의 음모를 표상하거나 표현하고자하는 하는 것도 아니다. 나아가 동양적 세계를 억압하고자 하는 극악무도한 서양적 제국주의의 음모를 표상하거나 표현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오리엔탈리즘이란 지정학적인 지식을 미학적, 학문적, 경제적, 사회학적, 역사적, 문헌학적인 텍스트로 ‘배분하는 것이다’ 또한 오리엔탈리즘이란 지리적인 기본구분일 뿐만이 아니라 일련의 ‘관심’ 곧 학문적 발견, 문헌학적 재구성, 심리학적 분석, 중경이나 사회의 서술을 매개로 하여 만들어지거나 또 유지되고 있는 ‘관심’을 주도면밀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나아가 오리엔탈리즘이란 우리들의 세계와 다른점이 일목요연한 세계를 이해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지배하고 조종하고 통합하고자 하는 일정한 ’의지‘나 ’목적의식‘-그것을 표현하는 것이라기보다도 도리어-’그 자체‘이다. 무엇보다도 오리엔탈리즘이란 하나의 언설이다. 그 언설은 살아있는 정치권력과의 불균형적인 교환과정 속에서 생산되고 또한 그 과정 속에 존재한다.-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의 본질(학문과 지식의 요약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최초 중립적인 존재로서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하여.p.36그것은(식민지제도나 제국제도에서나 나타나는) 정치권력과의, 지적권력과의 문화적도리어 ‘우리들의 세계와 더욱 깊은 관계를 갖는 것’ 이라고 하는 점이다.오리엔탈리즘은 하나의 문화적, 정치적 사실이므로 고문서 저장고의 빈 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정반대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동양에 대한 사고, 발언, 심지어 행동까지도 명석하고 지적인 이해가 가능한 일정 궤도를 따르고 있음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또한 텍스츄얼리티의 여러 사실로서 뉘앙스와 정밀함을 부여하는 작용이 광범한 상부구조의 압박과 세밀한 텍스트구성 사이에서 상당한 정도까지 행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오리엔탈리즘의 변형과 오리엔탈리즘을 통한 새로운 재창조.제 1 부 오리엔탈리즘의 범위필시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하는 것은, 최초 그것이 명명되기 전엔 하나의 순수한 학문으로서 인정받았을 것이다.때문에 전체적인 책의 구성에 있어서 에드워드는 제1부를 통하여 ‘오리엔탈리즘의 범위와 정의’를 소개하고 있는 것이었다. 즉 순수한 의미에서의 오리엔탈리즘이 갖는 성격과 범위를 명명짓고, 그것이 최초에 어떠한 학문이었는가를 밝혀주는 것이 그의 작품, ‘제1부 오리엔탈리즘의 범위’-편이었으리라 생각되어졌다. 이 부분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바로 ‘제3장 사업’편에서 나온, 나폴레옹의 이슬람지역 점령기였으리라.여기서 최초, 오리엔탈리즘의 기능에 대해서 소개된다.(교수님 말씀에 따르면) 나폴레옹은 최초 이슬람(중동 지역)을 지배하기에 앞서 그들을 통치하기 위한 목적으로 오리엔탈리즘을 활용하게 된다. 이 부분에서 책에서 수 없이 나오는 ‘택스트츄얼’이라는 말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왜 그렇게 문헌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오리엔탈리즘’을 활용할 때, 과거 오리엔탈리스트들이 남겨놓은 문헌에 의해서, 즉 직접적인 체험이 아닌, 간접체험-책을 통한 간접 체험을, ‘택스츄얼하다’라는 표현으로 나타낸 것이었다.그 시대에 권력을 가진 통치자(나폴레옹)는 그들과의 생활과 경험을 통해서가 아니라, 책을 이용한 간접 체험을 통해 통치방법다. 따라서 이러한 오리엔탈리즘과 권력과의 융합은 서양적, 즉 그들 자신으로서가 아닌 관찰자에 의한 인식을 이내 동양인들, 즉 나폴레옹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배인들에 침투하게 되고, 그것은 그들의 의식을 서서히 잠식하여, 관습화, 내면화 혹은 진리가 된 것이다.동양오리엔탈리스트에 의한 관찰(오리엔탈리즘의 탄생)+권력동양 재창조된 오리엔탈리즘(주입)여기서 본문 내용 중 “동양은 스스로를 관찰하고 기술해 낼 능력이 없다”라는 말 이렇게 발생하게 된 것이다.제2부 오리엔탈리즘의 구성과 재구성에드워드는 ‘제2부 오리엔탈리즘의 구성과 재구성’을 통하여 오리엔탈리즘이 갖는 성격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즉 ‘사시’를 통한 오리엔탈리즘과 인류학과 문헌학을 통한 오리엔탈리즘, 그리고 어휘서술과 상상력을 통한 동양 학문에 대해서 밝히고 있는 것이었다.즉 언설로서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그는 수학에서의 증명처럼 그의 저서를 통해 밝혀내고자 했음이라, 책 전부의 내용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알 수 있었다.제3부 오늘의 오리엔탈리즘그리고 마지막 ‘제3부 오늘의 오리엔탈리즘’을 통하여 현재의 오리엔탈리즘이 권력, 이른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와 결부되어 의도하지 않았으나, 권력의 존속과 영속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변질되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었다.즉 현재의 오리엔탈리즘은 본래의 오리엔탈리즘이 가지고 있던 성질이, 권력과의 융합을 통해, 전혀 새로운 ‘통치체계’, ‘세계를 바라보는 세계관’, ‘동양에 대한 사고 인식’ 등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에드워드는 오리엔탈리즘의 서사 과정을 통하여 오리엔탈리즘이 어떻게 탄생되고, 변형되었으며 현재에 이르렀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과거 역사와 학문이라는 것의 한계일지는 모르겠으나, 오리엔탈리스트들의 편협된 자기 중심주의적 입장에서 탄생시킨 오리엔탈리즘은 역사와 함께하는 맥락에서 객관성 내지는 학문으로서의 본질을 잃고 새롭게 변형되며, 동양을 인식하는 하나의 방법론으로서 그리고 지배의 영속을 위한 하나의 체계로서 완성되게다.
제목: 환상과 꿈, 그리고 현실과목: 고전 세미나담당:학과:학번:이름:제출일:서론-문제제기1) 윤대녕의 ‘옛날 영화를 보러갔다’ 에 대해서‘옛날 영화를 보러갔다’라는 소설의 내용과 그 의미에 대해 알아 보도록 하자.2) 프로이트의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빌헬름 옌젠의 소설 ‘그라디바’에 나타난 망상과 꿈에 대해서위 소설에 대한 프로이트의 해석, 즉 심리학자로서 프로이트가 말하는 소설 속의 꿈의 작용과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자.3) 윤대녕의 ‘옛날 영화를 보러갔다’ 와 프로이트의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빌헬름 옌젠의 소설 ‘그라디바’에 나타난 망상과 꿈 - 두 작품의 공통적 이해첫 번째, 두 작품이 갖는 동일한 서사 구조두 번째, 두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4) 위의 두 작품과 히치콕의 ‘새’라는 작품이 어떠한 유사성을 갖는지에 대해 알아보자.-환상과 꿈, 혹은 망상은 단순히 그것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 또는 현실을 구성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존재’라는 것을, 세 작품이 어떠한 방식으로 전달하는지 알아보도록 하자.5) 위의 세 작품과 장자가 갖는 공통점은 무엇이며, 이러한 동일한 메시지를 통해 장자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자.-위의 세 작품과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이 어떠한 면에서 동일성을 갖게 되는지, 그리고 그 동일한 메시지 전달을 통해 우리는 어떠한 의미를 찾고 무엇을 배워야하는지 알아보도록 하자.본론1) 윤대녕의 ‘옛날 영화를 보러갔다’ 에 대해서 (발표자 ‘이지은’ 양의 발표문에서 발췌 )‘과거의 회귀와 현재로 돌아옴’이 소설은 잃어버린 자아의 회복에 관한 이야기 이며, 현실에의 정당한 편입으로서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소설의 회귀는 시원으로서의 회귀인 동시에 현실로의 복귀이기도 한 것이다. 시원으로서의 회귀에 관여하는 매개자는 어린 시절의 친구였던 E인데 E는 이 책의 주인공인 형섭의 잃어버린 기억을 잃지 않고 있었다. E는 형섭의 회귀를 유도하고, 그의 유도에 따라 형섭이 회귀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소설 첫머리에서 겨울 종로 한복판에서 새떼가 날아가는 소리를 듣는 형섭은 소설 마지막 장에서 다시 되새떼가 시베리아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신문에서 읽는다. 그것은 긴 여행을 끝낸 선주가 찾아온 아침의 일이었으며, 겨울의 끝을 알리는 소식이었다. 다시금 이 소설은 겨울을 지내고 재생하는 형섭을 보여주는 것으로 작품을 끝내는 것을 알 수 있다.2) 프로이트의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빌헬름 옌젠의 소설 ‘그라디바’에 나타난 망상과 꿈에 대하여 (교수님의 수업中)프로이트가 말하는 빌헬름 옌젠의 소설 ‘그라디바’의 각 각의 장치들.? 주인공 하놀트가 고고학자라는 사실은 ‘죽은 것에 대하여 새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학자’인 자신이, 정작 자신의 과거를 복구해내지 못하는 모순된 상황을 설명해 주고 있다.?‘폼페이’가 주는 상징적 효과: 그곳은 과거의 기억을 간직한 유적지이기도 하면서, 그러한 과거를 되살리는 매개체, 고고학적으로 가치를 지닌 곳이면서 주인공으로 하여금 자신의 과거를 재생시키는 생명의 공간이기도 하다.? 빌헬름 옌젠의 소설‘그라디바’에서 말하는 꿈과 환상- 의식과 무의식의 나뉨. 즉, 무의식(꿈, 환상, 성적 욕망 등 )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인간에게 있어 이성적인 사고를 방해하는 존재들’로 치부된다는 의식에 대하여 프로이트는 빌헬름 옌젠의 소설 ‘그라디바’ 를 통해,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3) 윤대녕의 ‘옛날 영화를 보러갔다’ 와 프로이트의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빌헬름 옌젠의 소설 ‘그라디바’에 나타난 망상과 꿈 - 두 작품의 공통적 이해첫 번째, 동일한 서사 구조에 대하여-비논리적인 내용 전개, 개연성의 부족은 우리로 하여금 스토리 전개에 상당한 혼란을 겪게 하지만, 내용 구조의 분석을 통하여 ‘환상과 꿈’이라는 것이 ‘현실속의 나’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져다주는지, 혹은 어떠한 작용을 하는지 알아보도록 하자.환상과 꿈, 현실이 공존하는잃어버렸던 과거 기억 속의 나현재의, 현실의 나↓주변에서 일어나는 환상인지 현실인지구분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들.+논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기이한 내 자신의 행동 ‘잃어버렸던 나’를 찾는즉 문제 해결의 방법으로서 ↓ 그 문제를 푸는 열쇠로서 작용 하는문제의 자각 ‘환상과 꿈 그리고 과거의 현실’↓ = 현실과 맞닿아있는 환상과 꿈.현실속의 완연한 나 자신의 자각과 완성두 번째, 두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환상과 꿈의 작용을 통한, 현실 속의 완연한 나 자신의 완성’윤대녕의 ‘옛날 영화를 보러갔다’에서,미래의 혹은 과거의, 또는 현재의 자신인 E와의 만남, 그리고 누에 여인에 대한 기이한 환상들, 그리고 그것을 통한 잃어버렸던 과거 기억 속의 자신의 되찾음을 통해,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현재의 나’라는 것은 독립적인 하나의 개체이기도하면서, 또 연속적인 한 부분 속의 나 자신을 자각하게 된다. 그러한 연속선상에서 ‘현실의 나’를 깨닫는데 작용하는 것은 바로 ‘환상과 꿈, 현실이 공존하는 잃어버렸던 과거 기억 속의 나’ 인 것이다.프로이트의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빌헬름 옌젠의 소설 ‘그라디바’에 나타난 망상과 꿈-에서부조 속 여인에 대한 망상에 빠져있는 주인공은, 폼페이에서 만난 부조 속 여인이 자신의 유년 시절을 함께했던 실존하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통해 ‘현재의 현실속의 나’로 돌아오게 된다.부조 속의 그녀를 찾아, 꿈은 그를 폼페이의 유적지로 인도하고, 그곳에서 만난 환상 속의 그녀 (실제로 존재하는, 그리고 주인공의 유년 시절의 친구이기도 했던 그녀)는 그가 현실과 환상의 모호한 경계선상에서 혼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혼란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환상 속의 그녀가 되어 준다.-옌젠이 프로이트에게 보낸 세통의 편지 중- 프로이트의 답신에 대한 옌젠의 마지막 답신에서 발췌-“하놀트(주인공)가 어렸을 때, 비록 어떠한 감정도 개입시키기 않았다고 해도, 그라디바(현재의 그녀)를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으로 모든 행동의 진정한 동기는 바로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인이 된 이후의 하놀트에게 다시 젊은 처녀가 되어 나타났을 때 그에게 분명히 사랑의 감정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 사랑의 감정은 점점 증폭되어 갔고, 이성의 지배를 파괴했을 것이고, 마침내는 꿈의 성격을 띠고 있는 욕망의 우세한 힘이 이성을 대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즉 이 작품에서의 ‘꿈의 성격을 띤 욕망’은 단순히 ‘꿈’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나를 지배하고 장악하는,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자각하게 하는 역할로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2) 위의 두 작품과 히치콕의 ‘새’라는 작품이 어떠한 유사성을 갖는지에 대해 알아보자.-세 작품의 공통점은 ‘환상과 꿈’은 현실과 나누어지는 것이 아닌 공존하는 하나라는 것이다.그리고 그것은 또한 현실을 이루는 하나의 ‘사실’이라는 것이다.히치콕의 ‘새’라는 작품에서 ‘새가 인간을 공격한다’는 것은 단순한 망상이나, 허상이 아니라, 영화 속 현실에서 너무나도 자명한 현실이다. 즉, 현실 세계에서 논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그 망상은 현실에서 존재하는 한 일부분이며 간과해서는 안 될 실존하는 현실인 것이다.그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할 때만이 그에 대한 대비와 대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영화 속 주인공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 속 여 주인공이 카페에서 만난 늙은 여 조류학자는 그러한 현실로서의 ‘환상과 망상’을 현실에 받아들이지 않고 부정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3) 위의 세 작품과 장자가 갖는 공통점은 무엇이며, 이러한 동일한 메시지를 통해 장자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장자 ‘나비의 꿈’에서 발췌어느 날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 보니 다시 장주가 되어 있었다.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주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알 수가 없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별이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일러 ‘사물의 변화(物化)’라 한다.-꿈이 꿈인 것을 알려면 그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장자가 나비였던 것을 꿈이라고 깨달았다는 것은 그 꿈에서 깨어났다는 뜻이다. 다시금 그 꿈에서 깨어난 상태를 다시 꿈꾸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은 이른바 그 깸에서 다시 한 번 깨어났다는 뜻이다. 이렇게 깸에서 깨어나는 것이 큰 깨어남, 대각(大覺)이라는 것이다. … 장자가 보는 세계는 모든 사물이 이것과 저것으로 갈려 독립한 개물의 세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앞에서도 여러번 지적했다. 장자가 보는 세계는 모든 사물이 서로 얽히고설킨 관계, 서로 어울려 있는 관계, 꿈에서 보는 세계와 같이 서로가 서로가 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들어가기도 하고 서로에게서 나오기도 하는 꿈같은 세계이다. 이런 세계는 개물이 제각기 독특한 정체성과 함께 ‘하나’라는 전체 안에서 서로가 서로가 될 수 있는 불이성(不二性)이 병존하는 세계이다. (오강남 풀이 ‘장자’ 中에서 p.134 ~ 137까지)< 장자가 보는 세계관을 통해 도출할 수 있는 점진적인 깨달음>환상과 꿈, 현실은 하나다.→모든 것은 하나로서 함께하는 병존 상태-이분법 타파환상과 꿈 = 현실 ⇒ →모든 것은 자연의 일부, 혹은 존귀한 생명체로서 통합되는 하나.→무궁무진한 평등의 단계< 모든 것은 하나로 병존하는 상태> →모든 것을 깨닫고 초월하고, 초극하는 ‘나’의 완성
파우스트-작가와 창작에 대하여과목: 고전 세미나담당:학과:학번:이름:제출일:서론대부분 ‘고전’이라고 하는 작품들은 그것이 갖는 의미와 해석에 있어서 상당한 개방성을 가지고 있다.그중에서도 ‘파우스트’라는 작품은, 소설이라고 하는 장르에 의해 해석될 때, 그 개방은 더욱더 넓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괴테가 쓴 이 소설을 그 시대와 혹은 현재와 비유하여 해석한다는 것에 대하여 크게 동의할 수 없었던 까닭은, 이 소설 내용이 ‘괴테의 삶과 닮아있다’라는 느낌과 마치 어떤 이의 삶의 이야기를 듣는 듯 한 아주 묘한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과연 그가 ‘파우스트’를 쓰면서 독자로 하여금 설득을 목적으로 하였을까? 아니면 정보전달과 깨달음을? 아니면 미래를 예지하기 위해?그렇지는 않았으리라.그는 단순히 글을 쓰고 싶은 욕망, 욕구에 의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었으리라.순수한 작가의 창작 욕구. 파우스트를 읽으며 느낀 것은, 그 속에는 그가 가진 생각과 사상이었으며 그가 바라본 세계관, 종교관, 윤리 의식, 자기 자신의 욕구의 분출, 그러하면서도 그러한 금기 내에서, 보이는 괴테 자신의 낙관적이면서도 윤리적인 성품이 글을 통해서 느낄 수 있었다.그리고 무엇보다도. 재미가 있다는 것. 흥미진진하다는 것. 소설이 갖는 오락성과 교훈성, 패러디와 리메이크를 통한 참신성 등이 모두 내재되어있는 것은, ‘파우스트’가 응당 소설로 평가 받는 가장 좋은 근거가 되리란 생각을 한다.특히 ‘파우스트’가 그의 나이 23세 때부터 쓰기 시작하여 83세로 죽기 1년 전인 1831년에야 완성된 생애의 대작이라는 점에서, 그 소설은 가히 괴테 자신의 삶의 투영이라 해도 괜찮을 것이다.그러던 중 문득 문득 파우스트를 읽으며 갑작스레 떠오른 글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를 통해 배웠었던 김현 선생의 ‘소설은 왜 읽는가?’라는 글을 인용해 본다.김현 선생의 ‘소설은 왜 읽는가? 중에서쾌락원칙이 현실 원칙을 이길 수는 없다. 쾌락 원칙이 현실 원칙을 이길 때, 사회는 유지될 수 없다크지 않다. 그러나 객관적 사실, 다시 말해 자아 밖에 있는 사실이 자아 속에 있는 욕망을 크게 자극할 때에 그 변형은 갑작스럽고 전체적인 것이 된다. 그 세계는 세계를 욕망하는 자의 변형된 세계이다. 그 세계는 작가가 해석하고 바꿔놓은 사회이다. 그 세계가 살만한 세계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작가에게 중요하지 않다.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그 세계가 자기의 욕망이 만든 세계라는 사실이다. 세계는 세계를 욕망하는 사람들에 의해 더욱 생생해지고 활기 있게 된다. 소설은 그 욕망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세계를 욕망의 대상으로 구체적으로 제시한다.소설은 소설가의 욕망의 존재론이 읽는 사람의 욕망의 윤리학과 만나는 자리이다. 모든 예술 중에서 소설은 가장 재미있게 내가 사는 세계는 살 만한 세계인가, 아닌가를 반성한다일상성 속에 매몰된 의식에 그 반성은 채찍과도 같은 역할을 맡아야 한다. 이 세계는 과연 살 만한 세계인가. 우리는 그런 질문을 던지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김현 선생의 소설에 대한 평가와 ‘소설은 인생의 회화이다.’ 라고 했던 P. 러복크의 말처럼, ‘소설은 인생의 해석이다.’ W. H. 허드슨의 말처럼 파우스트를 괴테의 창작물로서 평가하고, 괴테라는 작가와 밀접한 관계 속에서 해석될 때, 소설로서의 ‘파우스트’는 우리에게 있어, 또 다른 의미를 주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레포트를 시작해 본다.본론소설 파우스트의 ‘등장 인물’과 ‘내용의 구성’을 통하여 어떻게 괴테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고 실현하는지, 그리고 그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1) 등장인물과 괴테에 대하여1) 파우스트- 괴테, 자신과 동일 시 하는 인물.어렸을 적 괴테는 독일 민담의 주인공인 파우스트 박사에 대해 알아가면서, 단순히 호기심의 대상에서 ‘파우스트 박사’라고 하는 인물이 가진 지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때문에 괴테에게 있어 파우스트는 단순히 민담에 존재하는 인물로서, 혹은 자신의 소설에 주인공으로서가 아닌, 자신도 그와 같은 학자로서 스한한 인생에서 지식 습득에 한계를 느꼈으리라. 때문에 괴테는 자신인생의 역작 소설 파우스트를 통하여 그것을 실현하였으리란 생각이다.2) 메피스토텔레스- 괴테는 메피스토텔레스라고 하는 악마를 등장시킴으로서 소설이라고 하는 자신의 허구의 세상 속에 자신의 욕구를 표출할 수 있는 하나의 장치를 만들어 낸다.그것은 소설 이라고 하는 조작되었지만 현실과 맞닿아 있는 그 세상 속에, 주인공인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악마와의 계약’이라는 것을 토대로 자신의 일탈을 정당화하고 무마 시킬 수 있는 하나의 요소로서 메피스토텔레스를 등장 시키게 된 것이다.그리고 악마라고 하는 이성에 반하는 즉, 욕구와 욕망이라고 하는 자기 자신의 내면 속에서 이성에 반하는 본능과의 끊임없는 고뇌를 보여줌으로써 욕망을 초월하여 극기하는, 자아의 완성 과정을 보여준 것이리라. 즉 괴테 자신이 겪어왔던 삶을 토대로, 그리고 인생관을 토대로 한 인간의-자신의 자아 완성 과정을 보여주고자 노력한 것이라 생각되어 진다.3) 그레트헨- 괴테 자신이 15살 때 경험한 첫사랑을 토대로 설정한 인물.괴테가 이루지 못한 사랑의 대상이었던 실존인물 그레트헨을 아름답게 승화시켜주고자, 소설 속에 등장시켰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4) 헬레네- 이상적인 사랑. 개인적인 욕망의 성취 대상연애라고 하는 감정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순수하고 열정적인 감정(교수님 말씀 참고) 이라, 그러한 사랑의 충족을 신화 속의 절대 미녀 헬레네를 통하여 보여주고자 하였음이라.그 외 ‘주’를 통한 자신의 기독교적인 삶의 표현과 신앙심의 표현, 그리고 왕을 등장시킴으로서-혁명이나 반란이 아닌 왕을 도와줌으로서-절대 왕권에 대해 순응하는 모습 또한 소설을 통하여 보여주는 것이다.각각의 등장 인물들은 괴테 자신이 살아오면서 겪었던 인연에 대하여, 혹은 자신이 바라는 인연에 대한 욕망을 직?간접적으로 표현하였으리란 생각이다.(2) 글의 내용과 구성, 그리고 괴테1) 지성인으로서 깨달은 괴테 자신의 한계에 대하여.-괴테가 깨달은 지식과 그 허망함에 대하 학자로서 혹은 학문에 대한 지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괴테 자신 또한 삶의 마무리 단계에서 느꼈을 학문의 허망함에 대해, 파우스트를 통하여 논함이라 생각되어진다.그리고 이것은 마치 ‘장자’가 말하는 ‘진정한 앎, 깨달음’과 닮아 있다.인간이 인간으로서 깨닫는 앎은 진정한 앎이 아니요, 자신이 알아왔던 모든 것들이 덧없는 것, 허망한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만물에 비하면 자신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앎’.‘겸손함’이 장자에서 말하고자하는 그리고 괴테 자신이 도달한 앎일 것이다.2) 개인적 욕망의 표출괴테는 파우스트를 통하여, 그리고 메피스토텔레스와의 계약을 통하여 일종의 대리충족을 시도한다. 이는 패담(悖談)이라 할 수 있을 정도에 그릇된 이야기이나, 어디까지나 소설속이라는 세계의 제약에서, 그리고 ‘악마와의 계약’이라는 장치 속에서 정당성을 갖고, 그리고 괴테 자신의 윤리성과 도덕성, 삶에 대한 자신의 깨달음을 토대로 온전하게 승화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교육성, 혹은 교훈성으로 독자에게 표현된다.①첫사랑의 표현과 승화-괴테의 첫사랑, 실존인물 그레트헨과의 이룰 수 없었던 사랑에 대하여.솔직히 괴테와 그의 첫사랑 ‘그레트헨’과 어떠한 관계를 가졌었는지, 그리고 그에게 있어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 납득할 만한 근거를 제시할 수 는 없다. 그러나 그의 첫사랑의 대상이었던 그녀 ‘그레트헨’을 소설 속 파우스트의 연인으로 등장시킨 데에는 필시 어떠한 이유가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특히, 소설 속의 배경을 보면, 그 당시에도 ‘자유연애’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널리 인정받지 못한 사회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한 배경을 놓고 봤을 때, 분명 소설 속 ‘파우스트’와 ‘그레트헨’과의 사랑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사랑의 표현이었으리라. 그리고 그러한 사랑을 실제로 이루지 못한 괴테는 사랑의 대상 그레트헨을, 하늘의 구원을 받게 함으로서, 그리고 청순하고 순결하고 고결한 인물로서 표현함으로서, 괴 괴테 자신이 실존 인물 그레트헨에 대한 사랑이 살인 이상이라는 것. 즉 자신의 ‘사랑에 대한 욕망이 살인이라고 하는 극악을 이긴다’ 라고 하는 표현, 자신의 욕정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부분이기도하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무엇보다도 그레트헨의 오빠, 즉 과거 봉건주의와 의식에 사로잡힌 인물을 죽임으로서, ‘과거 시대 보수적인 의식에 대한 타파‘ 라고 하는 하나의 거대한 상징을 소설 속에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살인을 주인공 파우스트가 악마의 꾐에 빠졌다는 상황 설정을통해 무마시킨다. 이 또한 소설 속에서 작가인 괴테가 현실과의 괴리 속에서 그 살인을 악마라는 존재를 통해 정당화 시키고, 소설 속 세계에서 살인을 저지른 것에 대한 합리화, 그리고 자신의 욕구를 절제된 금기 속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괴테의 숨은 의도를 엿볼 수 있었다. 때문에 괴테의 이러한 표현은 선을 넘지 않는 경계선상에서 긴장을 유지하면서도 자신의 욕구 충족과 표현이라고 하는 두 가지 면을 함께 보여줌에 있어서 놀라움을 느낄 수 있었다.③사랑에 대한 욕구 충족-헬레네-인간의 개인적인 욕망의 충족과 그 허망함에 대하여-소설 ‘구운몽’과의 관련성괴테는 인간이 가진 개인적인 욕망의 극치, 가장 순수하면서도 열정적인 감성인 연애와 사랑-육체적인 사랑과 번식 본능의 충족-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에 대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신화 속 고전미의 현신인 헬레나와의 사랑 그리고 그녀와의 결합을 통해 얻은 오이포리온.그러나 파우스트가 추구한 개인적인 욕망의 표현인 사랑과 번식의 욕망 충족은 한낱 한 여름밤의 꿈처럼 더없이 허망하게 사라지고 만다.여기서 인생의 덧없음을 표현한 ‘구운몽’을 떠올릴 수 있었는데, 이 역시 괴테가 삶을 통하여 깨달은 것이었으리란 생각이다.- 김만중의 ‘구운몽’ 중에서 -스스로 제 몸을 보니 일백여덟 낱 염주(念珠)가 손목에 걸렸고, 머리를 만지니 갓 깎은 머리털이 가칠가칠하였으니완연히 소화상의 몸이요, 다시 대승상의 위의(威儀) 아니니, 정신이 황홀하여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