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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얼과 양반여성을 통한 유교적 양반사회 들여다보기
    < 庶孼과 兩班女性을 통한 儒敎的 兩班社會 들여다보기 >1. 머리말 ???????????????????????? 22. 서얼과 양반여성을 통한 유고적 양반사회 들여다보기??? 2(1) 반쪽양반 서얼 ??????????????????? 21) 서얼의 개념 ??????????????????? 22)서얼의 사회적 상황 ???????????????? 3(2) 족쇄에 채워진 양반 여성의 삶 ??????????? 51) 양반여성의 사회적 상황 ?????????????? 53. 맺음말 ???????????????????????? 74. 참고문헌 ??????????????????????? 8< 庶孼과 兩班女性을 통한 儒敎的 兩班社會 들여다보기 >1. 머리말우리는 우리나라 마지막 왕조인 조선시대를 흔히 양반 관료제(兩班 官僚制) 사회라 부른다. 이는 양반이 지배세력으로서 관료직을 독점하고 국가를 운영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반은 조선시대 이해의 핵심인 것이다. 이러한 양반의 특징을 파악하고 이해하는데 있어 우선 조선시대를 주도해왔던 양반 계층이 어떤 계층이었나 하는 것을 먼저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원래 양반이란 문?무 양반 관료(文?武 兩班 官僚)를 지칭하는 개념이었다. 그런데 차별적인 신분제가 필수적이었던 전근대 사회에서는 관료로 진출해 국가에 봉사하는 인물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자손들도 여러 가지 신분적 해택을 받았다. 그래서 양반이란 개념이 관료 및 그의 자손까지 포함한 신분개념으로 확대되어 사용되었던 것이다.고려말기(高麗末期)에 주자학(朱子學)이 수입되었는데 이를 처음으로 연구한 사람들이 신흥사대부(新興士大夫)집단으로 등장하였다. 이들은 이성계(李成桂)등 무신세력과 힘을 합쳐 조선을 건국하였다. 따라서 주자학 즉, 유교이념은 신흥사대부, 즉 양반에 의해 조선의 통치이념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이러한 이유에서 양반 사회의 특징을 유교적 이념을 통해 차별 받던 서얼(庶孼)과 양반여성(兩班女性)의 삶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2. 서얼(庶孼)과 양반여성(兩班 서자 외에 서녀라든가 서제, 서매 등과 같이 다양하게 조합하여 쓸 수 있었고, 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얼자, 얼식, 얼남, 얼녀, 얼제, 얼매, 얼숙, 얼손등의 용례가 보이고 있다.또한 서만으로 서얼을 지칭할 수 있기 때문에 서얼의 서와 노비의 천을 아울러 서천이라 표현할 수 있었다.그런데 한편으로 서는 중(衆)의 뜻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서자라 할 때 단순히 중자(衆子)를 지칭하는 뜻으로도 쓰였다. 중자로서의 서자의 경우에도 적서란 말을 쓰지만, 이때는 적자와 첩자를 뜻하는 거시 아니라 장자(長子)와 중자(仲子)를 가리키게 된다. 그러므로 서자라 하여 중자로 오해될 수 있는 소지가 있다면, 그 대신 얼자 또는 첩자라 하는 것이 더 명확한 표현이 될 수 있기도 하였던 것이다.실제로 첩자, 첩녀 등으로 직접 표현하는 경우도 많았다. 예컨데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도 거의 서자라는 표현을 피하고 중자, 첩자와 같이 직접적인 표현을 쓰고 있고, 또 첩자의 양천을 구별할 필요가 있을 때는 반드시 양첩 자녀, 천첩자손과 같이 그 양천(良賤)을 명기하여 표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어쨋든 서얼은 곧 첩자의 뜻이며, 양첩자와 천첩자를 아우르는 통칭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문자 그대로의 뜻이며, 하나의 신분개념으로서의 서얼이 내포하는 것은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서얼 신분은 조선 초기라는 특정한 역사적 국면 속에서 성립한 하나의 신분이며, 이런 점에서 통시대적으로 나타나는 일반적인 서얼 또는 첩자와는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또한 서얼 신분의 성립이 법적 규제에 의거하여 이루어졌다는 점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서얼에 대한 법적 규제는 1458년에 착수하여 1485년에 완성된『경국대전』으로 완결되며, 이것이 서얼 신분의 기본저긴 신분 상황을 규정하게 된다.그러므로 이러한 법적 규제를 받기 이전의 서얼 또는 첩자는 서얼 신분의 전사(前史)에 해당될 뿐이며 신분으로서의 서얼과는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또한 서얼 신분의 범위도 법적 규제에 의거하여 확정되었다는 점에 의 사회적 상황양반들은 정식부인 외에 첩을 여럿 두었다. 정처는 어떤 경우에도 한명 이어야 했지만 첩은 여럿 두어도 상관없었다. 그러다 보니 첩의 자손인 서얼이 정처의 자손인 적자보다 수적으로 많아지게 되었다. 조선시대는 그 어느 시대보다 서얼을 많이 배출하는 사회구조를 지녔으면서도 서얼에 대한 차별은 유독 심했다. 서얼은 양반의 혈통을 타고났지만 양반은 아니었고, 또 끝내 양반도 될 수 없었다. 서얼은 중인신분에 위치했지만 중인이라고도 할 수 없는 특수한 신분층으로 존재했다.양반들은 자신들의 자식이 모두가 양반이 될 경우 그 수가 많아져 양반의 신분적 특권을 유지할 수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자신들의 신분적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서얼은 양반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서얼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훌륭한 교육을 받고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 해도 그 재능을 쓸 곳이 없었다. 즉 서얼은 조선시대의 경계인, 즉 반쪽양반이었던 것이다.중국에서는 여러 명의 처가 있을 때 서얼은 신분이 낮은 여자의 자손만을 의미했고 고려에서도 서얼은 낮은 신분의 여자에게서 출생한 자손만을 의미했다. 또한 중국이나 고려에서는 서얼신분이 세습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서얼의 수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서얼의 수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증가하게 되었다. 양반의 여러 처 중 정처를 제외한 나머지 첩의 자손은 모두 서얼이 되었다. 첩의 신분에 상관없이 정처 한명 이외의 나머지는 모두 첩이 되었던 것이 조선의 처첩제(妻妾制)였다.조선에서는 서얼로 태어나면 그 자손은 대대로 서얼이 되었다. 조상 중의 누군가가 서얼이었다면 그 후손들은 어김없이 모두 서얼이 되었다.서얼은 조선초기만 해도 아버지가 고위관료일 때에는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얼도 양반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점차 적서의 구분을 엄격히 하려는 사조로 서얼의 관직진출을 제한하는 법이 제정되었다. 서얼과 서얼자손의 과거응시(文科)를 금하는 서얼금고법(庶?禁錮法)이 제정된 것이다.그러나 서얼은/10을 상속받는데 불과했다. 적자가 없이 서자만 있는 집안이라해도 양자를 들여 가계를 이어 재산을 상속시켰지, 서얼에게는 상속시키지 않았다.- 허균의 「홍길동전(洪吉童傳)」조선중기에 지어진 허균의 「홍길동전」은 한글소설의 선구가 된 유명한 작품이다. 또「홍길동전」은 조선 서얼차별의 실상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사회소설이기도 하다.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 서얼이라는 사회적 신분으로 자신의 한계에 절망하고 집안과 갈등하는 홍길동이 집을 떠나고자할 때 마지막으로 아버지 홍판서와 나눈 대화에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해 한을 품은 길동에게 “호부호형(呼父呼兄)을 허(許)하노라.” 하는 홍판서의 한마디- MBC 드라마 ‘다모(茶母)’황해도 신천 현감을 거쳐 평양부 서윤을 지낸 아버지와 첩으로 시집을 오게 된 어머니 오씨 사이에서 태어나?명문가의 서자?라는 삶을 살아간 황보 윤의 대사“내 어머니는 후실이었다. 어머니는 열 일곱에 나를 낳았고, 사람들은 나를 서출이라 불렀다. 황보윤 이라는 나의 이름보다... 서출이라는 말이 익숙해질 무렵...반은 양반의 피를 반은 천민의 피를 가진 나는 사람도 종도 아니었다.사람의 옷을 입고 사람의 밥을 먹고 사람의 말을 하고도 난 아버지나 내 형제와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차라리.. 종처럼 땀 냄새라도 풍기며 살고 싶었지만 아무도 날 종으로 살게 허락하지도 않았다.”에서 조선시대의 서얼에 대한 사회적 상황과 차별을 엿볼 수 있겠다.(2) 족쇄에 채워진 양반 여성의 삶1) 양반여성의 사회적 상황유교국가인 조선왕조는 부계 중심의 사회질서를 지향했다. 유교적 이념이 사회 저변에 배어들수록 조선은 남성 중심의 사회로 변해갔고 여성은 자꾸 소외되어갔다. 결국 조선시대의 여성은 삼종지도(三從之道)와 칠거지악(七去之惡)의 굴레에 묶여 순종과 인고의 세월을 살아야 했다. 특히 유교적 규범에 충실해야했던 양반가 부녀자들은 더욱 그러했다.조선시대 사회는 여성에게 지식을 전수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조절을 지킨다는 정도의 의미로 쓰여지는 ‘내외’의 의미가 조선시대에는 여성에게 족쇄를 채웠다. 즉 성리학과 결합하면서 남녀차별법인 내외법으로 변모한 것이다. 성리학에서의 남녀관계는 하늘과 땅의 관계였다.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으로 남자는 우주만물을 형성하는 근원이며 여자는 그에 종속되는 존재였다. 성리학에서의 남녀관은 근본적으로 남녀차별이었을 뿐 아니라, 남녀차별을 우주적 질서로 설명했다.단순한 남녀유별이었던 내외의 관념이 조선조에 들어 성리학적 남녀관과 결합하면서 남녀의 접촉을 아예 막으려는 내외법으로 나타났다. 조선 지배층은 남녀의 접촉을 아예 막는 강제적 조치를 다양하게 실행했고 어겼을 경우 법의 제재를 가했다.그런데 문제는 남녀의 접촉을 막는 규제를 남녀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부과하지 않고 여성에게만 일방적으로 부과했다는 데에 있었다.실제로 내외법은 양반여성들에게만 적용되었지 서민여성에게까지 적용되지는 않았다. 양반여성은 서민여성들처럼 고된 노동에 시달리지는 않았지만 대신 훨씬 많은 규범에 얽매여 있었다. 이 규범을 잘 지키는 여성은 부덕의 소유자로 칭송되었지만 그렇지 않으면 질책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의 내외법은 양반여성들의 족쇄였던 것이다.- 남녀관계내외법에 의해 조선시대의 남녀는 어렸을 때부터 철저하게 구분되어 키워졌다.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상 위에 눕히고 옥을 주어 놀게 한 반면, 여자아이는 바닥에 눕히고 기와를 가지고 놀게 했다. 자랄 때도 남자아이는 어른의 부름에 빨리 대답하게 하고 여자아이는 느리게 대답하는 등 모든 점에서 남녀를 구분하여 키웠다.교육내용도 달랐다. 남자아이는 선생을 붙여 글공부를 하게 한 반면 여자아이는 집밖으로 나가선 안되었고 집안에서만 양잠, 의복 짓기, 제사 차리기등을 배웠다.일상생활에서도 이러한 구분은 더욱 명확했다. 집의 구조 자체가 안채와 사랑채로 분리되었다. 안채는 여자 중심의 생활 공간이었고 바깥채에 남자가 거처하도록 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는 중문이 있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남녀는 중문을 넘어가지
    인문/어학| 2008.04.17| 8페이지| 1,000원| 조회(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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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어작문] 고교시절의 추억 영작 - My high school memories
    아침잠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지각 할 새라 숨을 헐떡이며 뛰었던 등교길, 쉬는 시간에 도시락 까먹기, 조회시간마다 항상 '5분만 더'를 외치시던 교장선생님, 학교 유일의 총각 선생님인 국어 선생님에 대한 짝사랑, '문학선생님, 경제선생님, 윤리선생님'보다는 '니콜라스태진아유관순'이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려진 선생님들, 두발 검사 때마다 가슴 졸이던 일, 꼴지는 항상 맡아놨었던 체력장, 비오는 날 체육선생님의 귀신이야기, 인심 좋은 분식집 아주머니의 푸짐한 떡볶이와 함께 한 하교 길.... 고교시절을 떠올려보니 참 많은 일들이 생각이 납니다. 그때는 규칙에 둘러싸인 답답한 고등학교의 매일매일이 지겹기만 했는데, 돌이켜보니 힘들기도 했었지만 그때만큼 생기 있고 즐거웠던, 때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고교시절의 많은 추억 중 유난히 기억에 남는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러브레터, 고인돌 그리고 두부'가 바로 그것입니다.2학년 무렵 누군가가 제 사물함에 몰래 러브레터를 꽂아놓고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후로 번호가 000으로 감춰진 고백문자도 받았고요. 호호호~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고요? 아니요. 이게 다냐고요? 네. 러브레터에 관한 추억은 이게 다입니다. 지금도 그 남학생이(혹은 여학생이었을 수도- -;)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남들이 들으면 재미없어할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저에겐 지금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어지는 소중한 추억입니다.고등학교를 막 입학하고 나서 '고인돌'이라는 문화유적 답사동아리에서 1년동안 수원성, 경복궁, 박물관등지를 돌며 활동한 적이 있었습니다. 역사학에 빠져들게한 두 번째 소중한 추억입니다.두부는 고교시절 제 단짝 친구의 별명입니다. 하얀 얼굴이 꼭 두부 같아서 제가 지어준 별명이었죠. 두부와 저는 3년 내내 같은 반이었습니다. 화장실이건 매점이건 음악실이건 두부가 있는 곳에는 제가 있었고 제가 있는 곳에는 두부가 있었을 정도로 저희는 항상 붙어 다니던 단짝 친구였습니다. 서로관심사와 성격, 식성까지 비슷해 마음이 척척 맞는 그런 친구였습니다. 주말마다 비디오 가게에서 무서운 영화나 재미있는 만화를 잔뜩 빌려서 두부네 집에서 떡볶이를 만들어 먹던 일들이 떠오르네요.그런 두부와는 졸업 무렵에 사소한 오해로 사이가 벌어져 지금은 서로의 친구와 친구들로부터 소식을 전해듣는 어색한 사이가 되었지만... 그래서 두부를 생각할 때면 괜히 마음이 불편하고 아프지만.... 두부와의 추억은 저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고교시절의 소중한 기억중 하나 입니다.When I was in the high school days, a lot of incidents come into my head : a road on which I would dash with one breath not to be late for a school after oversleeping in the morning, lunch which I had secretly in rest time, a principle who shouted '5 minute more' in gathering every morning, the Korean teacher with whom I fell in love, teachers called nicknames, Nicolas, Jina Tae and Geun-Soon Yu , rather than literature , economics, ethics teachers, a thing that I was nervous whenever hair inspection was performed in a school , a physical strength measurement that I always came into the last in finishing line, a ghost story that a physics teacher told us in a rainy day and the way to get back with delicious a boiled dish of slice rice cake gotten from a good- hearted old lady.At that moment, I was irritated to live daily life of high school with many rules around me. Looking back into the past, it was so much hard, but I think, there was no instant that I had been as happy and vital as it was.Of a great deal of memories, three events remain in my memory. These are just 'love-letter, a dolmen, and bean curd'. When I was in the 2nd grade, I had received a few love-letters and messages without any phone number. Maybe you wonder how's it going after that? You will ask me that that's all. Of course, that's all according to my memories.I don't still know who he was (or it might be a she). In the others' view , they might not be interesting, But it is still invaluable enough to feel a stir in my heart. As soon as I entered a high school, I had joined a club for cultural inheritance investigation, ' a dolmen' and took a club activities, where I went around the Suwon Castle, the Kyung Bok palace and museums once a month for a year.Whenever I went to investigate, I was too difficult to walk for three or four hours. But the experiences provided a chance for majoring in Korean History as side major at the university. And it is the second invaluable memory, in which I could observe for myself and realize Korean culture inheritance.'Bean curd' is a nickname of my intimate friend in my high school days. Since she had a white face just like bean surd, So I gave her the name. She and I have been in the same class for 3 years. She followed me wherever I was regardless of a rest room, a school booth and music classroom, etc. She was a like-minded company, having the same interests, personality and eating habits with me.
    인문/어학| 2007.10.30| 3페이지| 1,500원| 조회(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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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사도에 대하여 평가A+최고예요
    < 무사도(武士道)에 대하여 >- 무사(武士)의 발생과 무사단(武士團)의 형성일본 역사에 있어서 사회변혁의 고비는 몇 번이나 있었지만, 메이지유신과 함께 가장 근본적인 것은 고대로부터 중세로의 변혁일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지배자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시대를 개척해 나간 것은 무사(武士)들이었다.고대 귀족?사원의 사유지였던 장원이 확대되는 대세에 장원 상호간, 장원과 국아(國衙)간의 대립이 격화되자, 장관이나 유력 명주를 중심으로 장원은 무장하여 이에 대처하기에 이른다. 국아령에서도 재청관인(在廳官人)이나 군사(郡司)등의 지방호족과 유력 명주들은 무장하여 국사나 장원에 대항하였고, 국사(國司)도 또한 스스로 무장하여 낭도(郎徒)를 거느리고 지배의 관철을 꾀하였다. 이리하여 전국적으로 개인적 무력집단 즉 무사계급이 발생하게 된다.무사층은 내부적으로 동족이나 소종(所從)?하인(下人), 지배하의 예속농민등을 무장시킨 소집단이었다. 그러나 점차 인군의 무사층과 접촉하여 상호 연결을 낳아 장원의 틀을 넘어 점자 주종관계를 성립시키면서 각지에서 소무사단(小武士團)이 잇달아 발생하였다.중앙에서도 치안 유지와 승병의 진압 등에 무사의 실력이 이용되었다. 이를 통해 무사도 중앙에 진출하여, 각각 귀족들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무사도(武士道)의 성립일본의 무사도(武士道)는 일본의 춘추전국시대에 전투를 업(業)으로 하는 계급집단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봉건제(封建制)의 확립과 함께 본격적으로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시기로는 12세기 전후인 일본의 평안시대(平安時代)이며, 초창기의 무사집단은 도성(都城)에서 멀리 떨어진 농촌출신자들이 대부분이었으며, 그들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용맹성은 인정되었으나 처음부터 학문과 도덕성을 겸비한 엘리트적 존재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거칠고 품위가 없이 만용(蠻勇)만을 부리는 집단이었다. 이러한 무사집단은 서로간의 개성이 인정되고 상호간의 윤리가 통용되는 규범이 필요한 법으로 이러한 집단 의 상호윤리규범의 필요성에 의해 탄생된 것이 바로 무사도(武士道)인 것이다.- 무사도(武士道)란주니치 마에오카(前岡純一)에 의하면 무사도(武士道)란 무사(武士)와 도(道)가 합쳐진 말이며, 다시 무사(武士)는 무(武)와 사(士)로 나뉘고, 무(武)는 지(止)와 과(戈)로 이루어졌으며 지(止)는 족(足)으로 발자취, 선다, 막는다, 간다의 뜻이고, 창을 가지고 전장에 나가는 뜻이며, 무자(武字)는 본래의 의미는 창을 멈추게 한다, 전쟁을 끝이게 하는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으며, 다음에 사(士)란 어떤 종류의 큰 도끼를 가지고 부릴 수 있는 재능 있는 자, 전사(병사), 전문적 도(道)와 예(藝)를 수업한 자의 지칭, 무사(武士)의 뜻이며 도(道)란 행한다, 바르게 한다, 다스린다, 이끈다, 펼친다, 돕는자의 뜻이다라 하여 무사도(武士道)란 봉건적인 집단의 계급인 무사가 항상 갖고 지켜야할 도덕적, 윤리적 규범의 그 자체를 말한다.무사도(武士道)는 충성, 희생, 신의, 염치, 예의, 결백, 검소, 검약, 상무, 명예, 정애(情愛)등을 중시한다. 무사가 지배계급이 되기전, 즉 싸움만을 직업으로 하였던 시대에는 죽음을 찬양하는 생각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했다. 이는 평화스러운 에도시대에도 남아 ‘무사도란 죽는것이다’란 사상이 강조되었는데, 이는 무사도의 중요한 사상이다. 무사도의 특징의 하나는 상무, 명예이다. 즉 상대방을 이기는것이다. 이긴다는것은 단지 힘만으로 적을 제압하는것은 아니다. 자기자신을 이김으로써만이 적을 이길수 있다는 정신적인 구조의 연마도 포함되어있다. 강함은 자기자신을 이길때 형성되는것으로 이는 적을 정신적으로 제압하여 적에게 한눈에 기가 꺾기도록하는 정신적인 강함을 표현하는 일부로서 예의가 중시되었다.
    인문/어학| 2007.10.30| 2페이지| 1,000원| 조회(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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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이지 유신에 대해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새로운 시대의 시작.지금의 일본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며 세계정세에 영향력있는 위치에 올라서 있다. 몇 천, 아니 몇 백년전까지만해도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사회, 경제, 문화를 배워가고 얻어간 후진국이었던 일본이 어떻게, 언제부터 성장하여 지금의 위치에 올라설 수 있게 되었는가?그러한 것을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인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다. 그만큼 메이지 유신은 일본사에 있어 하나의 커다란 전환점이며 사건이었다.메이지 유신은 간단히, 일본의 에도(江戶)시대의 막부체제에서 메이지(明治)에 의한 왕정 통일국가 성립에로 옮아간 정치 개혁으로, 1868년에 도쿠가와 막부(에도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 통일 정권이 성립되어 봉건사회에서 입헌 군주사회로 옮아간 정치, 경제, 사회상의 변혁과 그 시기를 가리키는 말이다.(시기는 개항부터 세이난전쟁(西南戰爭,서남전쟁)까지 보는 것이 일반적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성립.메이지 유신 이전의 일본은 250년의 평화를 누리는 가운데 국민문화를 이루어 18세기에는 국학(國學)에 바탕을 둔 민족의식이 높아져 존왕양이(尊王攘夷))사상이 매우 강했다.하지만 19세기 중반 서구 열강의 식민지 쟁탈의 시대가 열리면서, 태평성대의 일본은 조금씩 흔들리게 되고, 1840~1842년에 걸친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했다는 소식은 일본인에게 불길한 위기의식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다 1853년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M.C.페리 제독이 미국 대통령의 개국(開國) 요구 국서(國書)를 가지고온 일로 위기의식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된다. 열강에 대한 공포의식과 개국하기로 정한 방침에 따라 부강을 꾀하려는 군국주의 사상으로 바뀌면서 통일국가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본은 미국과의 수교 후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하게된다. 그러나 이 조약은 칙허 없이 처리한 막부(幕府)의 독단적 처사였으므로 반막부세력(反幕府勢力)이866년 패배하였고, 1867년 10월 14일 대정봉환(隊正奉還))이 이루어졌으며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한마디로 메이지 유신의 성립은 역사의 변화와 함께하지 못하는 봉건체제의 구조적인 모순과 서구 열강의 외압이라는 이중 위기에 대한 결과로 이루어졌다 할 수 있다.?. 메이지 정부의 개혁.메이지 유신의 가장 큰 동향은 이때까지 해 온 구막부의 정치를 없애고 천황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체제인 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의 기초를 굳건히 하는 것이었다. 무진전쟁(戊辰戰爭))이 한창이던 1868년(明治 元) 3월에는 천황이 군신을 거느리고 신들에게 맹세한다는 형식으로 5개조(五箇條)의 어서문(御誓文)을 정해 새로운 정치이념의 기본을 선언했다.계속해서 정부는 정체서(政體書)를 발표하여 다죠우칸(太政官)으로 불리는 중앙정부에 권련을 집중시키고 관제를 정비했다. 또 민심을 일신하기 위하여, 같은 해 9월 연호를 메이지(明治)로 고치고 천황일대(天皇一代)동안에 한 연호를 쓰는 잇세이치겐(一世一元)의 법을 정했다.) 같은 해 7월 에도는 도쿄(東京)로 이름을 고치고 메이지 천황이 교토(京都)에서 도쿄로 옮긴 것을 시작으로 다음해에는 정부의 여러 기관을 도쿄로 옮겼다.이렇게 시작된 메이지 신정부의 일련의 정치적, 사회적 대변혁은 봉건적인 제도를 혁파하고 근대 일본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도래(到來)에 큰 기대를 걸게 되었다. 막부말에서 메이지 초년에 걸친 변혁을 메이지 유신이라고 한다.(1) 정치와 외교.- 5개조 서문(誓文)과 정체서(政體書).신정부는 도바(鳥羽) 후시미(伏見) 전투에서 구 바쿠후 세력과 대결하게 되자 즉시 왕정복고를 구미의 조약 체결국에 통고하여 승인을 받았다. 이어서 천황은 5개조 서문(五箇條誓文)을 공포해 신정부의 기본 방침을 밝혔다. 이것은 공의여론(公儀輿論)의 존중과 개국화친(開國和親)등 신정부의 국가 정책을 제시한 것으로, 천황이 여러 다이묘를 인솔해 천황의 조상신에게 맹세하는 형식을 취했다.윤4월에는 정체서를 공포해 새로이 태정관을 위해 미국 헌법의 3권 분립제를 받아들여 근대 정치 형식을 모방한 것이었다. 또한 고급 관리를 4년마다 호선(互選)해 공론(公論)을 제도화하고자 했다.- 판적봉환(版籍奉還).대정봉환 뒤에도 각 한(藩)의 영주가 여전히 토지와 인민을 지배했기 때문에 각 한에 대한 정부의 지배력이 매우 약했다. 정부는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판(토지) 적(인민)의 봉환이 필요해 먼저 1869년 사쓰마?조슈?도사?히젠한의 네 영주가 토지와 인민을 천황에게 반환하는 판적 봉환의 상표문을 제출, 대부분의 한이 동조하여 그 결과 한은 중앙 정부의 정령을 집행하는 지방행정구역이 되고 영주는 지방 장관으로 지번사(知藩事)에 임명, 월급인 가록(家祿)을 받고 명칭은 화족(華族)으로 규정되었다.- 폐번치현(廢藩置縣).1869년 토지와 인민을 천황에게 반환하는 판적봉환 후, 각 한의 구영주들은 지번사로 임명되어 신정부로부터 월급인 가록을 받는 지방관이 되었지만. 지번사가 각자 가신단을 이끌고 한의 정치를 맡는 상황에는 변화가 없었으며, 각 한은 농민봉기와 민중저항을 통제할 수 없었다. 따라서 신정부는 사쓰마?조슈?도사의 3한군사 약5000명을 도쿄에 불러 친병(親兵)으로 조직 1871년 폐번치현을 감행 전국의 261한을 모두 폐지하고 전국을 부, 현으로 나누워 3부 (府) 302현(縣)을 설치하고 부현에는 새로 임명된 부지사, 현지사를 파견, 구 지번사에게는 도쿄이주를 명령하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그리고 중앙집권의 실적을 올리기 위해 태정관을 정원(正院.입법,사법,행정) 좌원(左院.입법자문) 우원(右院.행정실무합의)의 3원제로 하고 그 아래 각 성을 두는 태정관제를 창설하여 통일 국가 건설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신정부의 외교.메이지 정부는 1868년 정월, 해외 각국에 왕정복고를 알리고, 이어 2월에는 개국화친의 정책을 취하면서 막부가 체결한 조약의 계승을 선언하였다. 나아가 1868년 12월에 영국공사 팍스의 알선으로 각국은 신정부를 승인함으로써 대외관계는 일단 안정되었다. 그러나 막부 말약은 불평등 조약이었으며, 신정부는 구막부가 각국과 맺은 안세이(安政)의 불평등 조약의 개정을 추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첫 교섭국인 미국에서 조약개정 요구를 거부당하자, 이후의 교섭을 중지하고 각국의 제도와 문물의 시찰로 방문 목표를 바꾸었다.(이와 같은 구미제국에 대한 굴종외교의 대가로 정부는 조선과 중국에 대한 이익 우선권을 얻었다.)메이지 정부는 주변제국과도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하였다.(조선, 청국, 러시아)(2) 경제?사회.사회면에서의 봉건제 해체는 먼저 신분제도의 철페로 나타났다. 판적봉환 후, 족칭(族稱)정리가 행하여져 1872년(明治5年), 화족(華族), 사족(士族), 평민의 3족칭으로 정리되었다. 나아가 성(姓)을 붙일 수 있는 권리를 평민에게도 주어, 의복과 결혼의 차별을 철페한 것 외에도 작물재배의 자유?토지매매?직업?거주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사민평등의 사회 속에는 또 다른 권위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징병령(徵兵令).신정부에는 직속 군대가 없었기 때문에 무진전쟁은 여러 한이 제공한 군대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 때문에 신정부는 직속 상비군 편성이 중앙 집권 체제 강화하는 데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생각해, 근대 군대 창설을 서둘렀다. 먼저 정부는 1869년 병부성(兵部省)을 설치하고 1871년에는 여러 한의 군사로 편성된 친병(親兵)을 도쿄?오사카?구마모토?센다이의 4진대(鎭?)에 배치했지만, 국민으로부터 징병한 군대가 아니었다. 따라서 근대적 군사 제도를 정비하기 시작했다.신정부는 1872년 병부성을 페지하는 대신, 육군성, 해군성을 설치함과 동시에 국민 개병을 명시한 징병책을 공포하고 이듬해 징병령을 공포해 사족, 평민을 불문하고 만 20세에 이른 남자는 3년동안 병역의무를 지게 했다. 그러나 호주나 상속자 270엔이 대인료(代人料)를 지불하는 자들은 면제의 규정이 있으므로 실제로 병역을 담당했던 사람들을 하층농민의 차남, 3남이 대부분이었다.- 지조개정(地租改正).폐번치현 후의 통일 정권 확립에 따라, 정부는 주요 재된 제반 조치를 기초로 하여, 1873년 칙령과 함께 지조개정 관계의 법령을 반포하고, 1881년 무렵까지 지조 개정을 완료하였다.그 주요 내용은 첫째, 전국 토지의 장량과 토지 평균수확량의 확정, 그리고 그에 기초하는 지가의 결정이다. 둘째, 이 지가를 기입한 지권을 소유자에게 교부하여 토지소유권자를 확정한다. 셋째, 지가의 100분의 3을 지조의 정률(定率)로 정하여 현금으로 징수하도록 하였다.이상과 같이, 정부는 토지의 사적소유권 확립을 바탕으로 전국에 일률적인 금납지조를 징수하였다. 이 지조개정에 따라 막번체제의 해체는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나 개정 이후의 지조 부담은 종래의 공조부담액과 거의 변함이 없었으며, 여기에 지방세를 가산하면 더 무거운 부담이 되었다.이와 같은 부담의 과중은 농민의 불만을 가져왔고, 결국 잇키를 표출시켰다.- 식산흥업(殖産興業).신정부는 구미열강에 대항하기 위해 정부가 직접 나서서 근대산업의 육성에 힘을 기울인다. 종래의 봉건적인 여러 제한 철폐의 개혁을 실시하며, 직접적인 생산육성 정책을 펴나간다. 1870년에 설치된 공부성(工部省)을 중추기관으로 하여, 군사공업을 중핵에 두는 관영사업을 경영하고, 생사, 방적업 등의 민간산업을 육성하였다.이러한 과정에서, 미쓰이, 미쓰비시 등의 정상(政商)자본은 번벌세력과의 밀접한 관련 속에서, 상법사, 통상사, 외환 회사등의 정부 금융기관 및 그 후 설립된 은행에 관여하여 급속히 성장하였다.(3) 문명개화.정부는 1871년 단발과 복장의 자유를 인정하고 1872년 외교, 군사, 무역등에서 날짜와 시간 약속에 부적당한 태음력을 중지하고 1873년 1월부터 태양력을 채택, 1일 24시간제, 1주 7일제로 채용하고 일요일 휴일제를 정했다. 그리고 도쿄의 긴자에는 벽돌로 만든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고, 양복에 구두와 중사모로 치장한 신사가 가스등이 켜진 거리를 인력거나 청도 마차를 타고 달리는 모습도 볼 수 있게 됐다. 이로인하여 도시인의 생활에는 변화가 있었으나,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다.
    인문/어학| 2007.10.30| 6페이지| 1,000원| 조회(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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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감상문 평가A+최고예요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보고......1. 과정대학이라는 곳에 가면 정말 좋기만 할 것 같았던 고등학교때의 기대......하지만 막상 대학이라는 곳은 고등학교때 생각 했던것과는 달리 별 차이가 없었다. 집(수원)에서 학교까지 매일 통학버스를 이용해야 했기에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선 고등학교 때 보다 더 일찍 일어나야했고, 수업이 끝나면 버스 시간에 맞춰 집에 가기에 바뻤다.그렇게 반복되는 생활속에 특별히 하는일 없이 무료함을 느끼고 있던 나에게 문학개론 시간에 연극 또는 뮤지컬을 보고 감상문을 써오라는 숙제가 떨어졌다.연극? 뮤지컬?? 우~와!!정말이지 나에겐 몹시 흥미롭고, 신나는숙제(?)였다.제출기한이 매우 길었기에 뭘 볼지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했다. 그러다가 인터넷에서 여러 공연정보를 살펴보던 중 ‘오페라의 유령’을 알게 되었고, 친구들과 오페라의 유령을 보러 가기로 결정하였다. 4월 12일 금요일 친구들과 인터넷상에서 만나서 동시에 인터넷 예매를 하였다. 5월 25일 토요일 3시 공연이었다. 보러가는 날까지 나는 처음보는 뮤지컬인지라 큰 기대에 차 있었다.드디어 공연당일 날. 친구들과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만났다. 무척 더운 날이어서 팥빙수를 먹으며 시간 가는줄 모르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시계를 보니 공연시작 1시간 30분전이 아닌가? 나와 친구들은 서둘러 길을 재촉했고, 공연장소에 도착했지만 공연장이 어딘지 몰라 헤매다가 공연시작 5분전에서야 겨우겨우 자리를 찾아 앉을 수 있었다. 곧 불은 꺼졌고, 극은 시작되었다.이렇게 나의 첫 뮤지컬 관람기가 시작된것이다.2. 줄거리오페라 하우스에서 열리는 경매, 한 노인이 원숭이 음악상자를 낙찰받게되고(나중에 안 사실! 이 노인이 바로 라울이라고 함) 갑자기 커다란 조명등이 떨어짐과 동시에 음악이 울리며 이야기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오페라 연습도중 무대 장치가 무너지는 사고가 일어나자 프리마돈나 칼롯타는 출연을 거부하고, 한 무용수가 칼롯타를 대신하여 크리스틴에게 노래를 시켜보라고 추천하고 크리스틴은 노래를 완벽히 소화해내며, 그녀의 공연은 대성공을 거두게된다.공연이 끝난 뒤 분장실로 돌아온 크리스틴은 옛 친구인 귀족청년 라울을 만나게되어 기쁨의 재회를 하지만 곧 거울을 통하여 ‘오페라의 유령’에게 납치 당하게된다. 반쪽 얼굴을 하얀 가면으로 가린 유령은 크리스틴을 자신의 은신처로 이끌고 크리스틴은 호기심에 유령의 가면을 벗기곤 그의 흉한 몰골에 놀라게 된다.유령은 크리스틴을 놓아주고 새 극장 주인에게 자신이 만든 오페라를 크리스틴에게 여주인공을 맡겨 공연 할 것을 요구한다. 물론 자신의 5번 박스석도 비워줄 것을 동시에 요구하며...... 하지만 새로운 매니저들은 이를 거부하고 주인공역을 맡은 칼롯타는 공연 도중 유령의 저주로 인해 개구리 울음소리를 내게된다.한편 라울과 크리스틴은 서로에 사랑을 느끼게 되고 둘만의 맹세를 하게된다.오페라 극장은 잠시 문을 닫았다 파티를 하며 다시 문을 열고, 그때 유령이 나타나 자신이 만든 오페라를 공연할 것을 또다시 요구하고, 오페라 단원들은 두려움에 떨며 공연을 준비한다. 라울은 유령이 무대에 등장할 것을 미리 짐작하고 유령 잡을 계획을 세운다. 오페라는 막이 오르고 크리스틴은 공연에 열중하며 남자 주인공이 유령으로 바뀌어 있음을 짐작하고 그의 망토를 벗기고 놀란 유령은 다시한번 크리스틴을 납치해간다.라울은 발레감독인 지리여사의 도움을 받아 유령의 은신처를 알게 되고 곧 뒤를 쫓아 가지만 유령의 밧줄에 목이 매달리고 만다. 유령은 크리스틴에게 라울의 목숨을 구하려며 자신과 영원히 함께 살 것을 요구한다. 그때 크리스틴은 유령에게 키스를 하고 유령은 슬퍼하며 두 사람에게 어서 떠날 것을 요구한다. 떠나는 두사람을 보며 유령을 크리스틴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다. 이윽고 유령을 사라지면서 하얀 가면만이 남고, 그 후 아무도 그를 다시 보지 못한다.(원숭이 음악상자가 조용히 음악소리를 낸다.)3. 감상처음 보는 뮤지컬이라 그런지 뭐가 좋고 뭐가 나쁜지를 알지 못하지만, 나에겐 흠잡을데 하나없는 훌륭한 공연이었다.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들은 매우 훌륭했고 무대의 화려한 장치 또한 나에게 눈을뗄 수 없게 만들었다. 인간이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 수 있으며 인간의 목소리가 이토록 아름다웠는지를 새삼 느끼게 만드는 공연이었다.연인을 구하기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라울의 용기, 라울을 구하기 위한 크리스틴의 용기, 이런 그들은 지켜보며 결국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놓아주는 ‘오페라의 유령’.보다보면 ‘에~ 뭐 나중에 이렇게 저렇게 되겠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뻔한 스토리 였지만 나로 하여금 이렇게 감동이 들게 하는 이유는 뭘까? 배우들의 진지한 연기? 아름다운 노래? 마술같은 무대장치? 아마 이 모든 것들일 것이다.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든다. 과연 크리스틴은 라울을 깊게 사랑한 것일까? 그렇게될 계기도 없는데......차라리 자신에게 처절한 사랑을 보내는 유령에게서 더 사랑을 느끼지 않았을까? 혹시 크리스틴은 라울의 젊음과 지위, 유령의 생김새를 비교하여 라울을 택하고, 마지막에 밧줄에 매달린 라울을 구하기 위해 유령에게 키스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이 어찌될 것 같아 두려워 유령에게 키스한 것이 아닐까? 그렇게 크리스틴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살아가는 탐욕스러운 여자이며 유령은 그런 크리스틴만을 바라보는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가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감상을 마친다.
    독후감/창작| 2007.10.30| 4페이지| 1,000원| 조회(2,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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