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릿말2차 대전이 종식된 지 이미 반세기가 넘었다. 패전국이었던 일본은 전 세계 GNP의 15%를 차지하는 초(超)경제대국이 되었고, 그만큼 국제사회에서의 입지도 높아졌다.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최대 피해지역인 아시아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반일감정은 일본의 또 다른 세계사적 위치를 말해주고 있다.종전 이후 일본의 전후처리는 쉽게 말해 ‘눈 가리고 아웅’ 형식이었고, 이에 따른 문제의 확산은 당연한 결과였다. 한일 양국은 1965년 국교정상화를 통해 과거의 상처를 씻고 새로운 협력관계를 개척해 나가기로 합의하였으나 양국 관계의 표면적인 활성화와는 달리 그 저변에는 끊임없는 갈등이 내재되어 있었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군 강제 징병 입대 피해자, 강제 동원 노동력 착취 피해자, 일본군위안부 강제 연행 강간 피해자 등 상당수의 과거사 희생자들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피해의 원인 제공자였던 일본은 이들에 대해 별다른 대책이나 배상을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다.1) 일본군위안부와 위안소(1) 일본군위안부의 개념 정리)일본군위안부(이하 위안부)란 일제 강점기 시기 일본군 위안소로 연행되어 일제에 의해 조직적으로, 강제로, 반복적으로 성폭행당한 여성들을 일컫는다.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이들을 정신대라고 불러왔지만, 정신대(艇身隊)라는 명칭은 말 그대로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친 부대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당시 조선에서는 1940년대 남녀 각 조직에 정신대라는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정신대라는 용어가 법으로 제정, 일반화된 것은 1944년 “여자정신근로령”이 제정되면서부터였다.일제 강점기 당시에나 현재까지도 한국에서는 정신대를 곧 ‘위안부’라고 인식해왔다. 당시 여성이 일제에게 끌려간다는 것은 곧 순결을 잃는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자근로정신대에 간 여성 중 상당부가 위안부로 활동할 것을 강요당했다.일본군은 이 여성들을 ‘작부(酌婦)’, ‘창기’, ‘추업부’ 등으로 불렀다. 이런 용어들은 이 제도를 만든 일본군기도 했다. 파라오 등 더운 지방에서는 야자수 잎으로 대충 위안소를 만들기도 하였다.위안소에는 위안부와 관리자와, 그곳을 출입하는 군인이 있었다. 붙박이 위안소의 문밖에는 ○○위안소라는 문패가 있기도 했다. 2층도 있었는데, 아래쪽에는 홀이 있었고, 위층에 칸칸이 방이 들어 있어 홀에서 대기하던 여성이 군인을 만나 2층으로 올라가는 경우도 있었다. 방 문 밖에는 방 번호나 위안부의 일본식 이름이 써있는 경우도 있었다.위안소 안에는 군인의 군표나 돈을 받는 접수처가 있었으며, 이곳에서 휴지가 돈과 교환되기도 하였다. 또한 위안소 규정과, 위안부가 군인을 얼마나 받았는지를 표시할 수 있는 그래프가 벽면에 붙어있는 곳도 있었다. 또 민간관리자들은 군인의 눈길을 끌기 위해 일본말로 '身も心も棒ぐ 大和撫子のサ-ウス(몸도 마음도 바치는 일본 패랭이꽃의 서비스란 뜻)'이라거나 '聖戰大勝の 勇士大歡迎(성전대승의 용사 대환영)' 등의 선전 문구를 써 붙이기도 했다.)또 질 세척용 소독약(붉은 색)과 대야 등이 있는 별도의 세면장이 있는 곳도 있었고, 방에 단지 대야 정도가 있는 곳도 있었다. 그러나 군 막사, 참호 등에는 아무런 물품 없이 오직 위안부와 군인만이 존재하기도 했다.위안소는 크게 일본군의 군위안소 운영방식이나 이동 여부에 따라 그 형태를 나눌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군 직영, 군 지정 위안소 등으로 구분하는데, 군위안소 운영에 가장 깊숙이 개입한 것이 군 직영 위안소이다. 군이 감독 통제한 것만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운영과 관리를 맡았던 것이다. 여기에는 군속이나 군고용인이 운영하는 것도 포함되며 주로 중일전쟁 초기나 전선지역에 많이 설치되었다.군 지정 위안소는 군이 설립한 위안소나 민간 매춘시설을 지정하여 경영은 민간에게 맡기고 군은 감독과 통제만 하는 것이다. 동남아시아에선 곳에 따라 현지 일본인에 의해 조직된 사업 통제회, 기업연합, 실업단을 내세워 이 시설의 책임자로 삼았다. 어떠한 군위안소라도 이를 관리 감독, 통제한 것은 일본군이었다.)또 일본 육군과 해정부는 ‘위안부’에 대해 크게 두 차례의 독자적 조사를 실시하여 결과를 발표했다. 첫 번째 조사발표는 1992년 7월 6일 내각관방 내각외정심의실에서 발표한 이며, 두 번째는 1993년 8월 4일 내각관방 내각외정심의실에서 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발표 당시 일본정부는 조사한 문헌자료의 목록과 몇 가지 주요자료를 함께 제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1992년 발표 당시 소개된 이들 자료는 곧바로 한국정부에도 공개되었던 듯하며, 이를 한국의 외무부 산하 정신대 문제 실무대책반에서 『일제 하 군대위안부 실태조사 중간보고서』(1992.7)라는 이름으로 발표했고, 이 분석을 통해 보고서에서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이상과 같이 이른바 종군위안부 문제에 정부의 관여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일본정부는 당초 시종일관 민간업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위안부’ 정책을 수행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김학순씨의 고발로 아시아 각국에서 피해자들이 속속 드러나자 일본 당국은 자체적인 조사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일련의 조사 결과는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와 깊이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상 어떤 행태로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본국내에서 진행되는 가운데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보상에 대신하는 조치’였다. 이에 1994년 ‘국민기금’의 설립이 결정되었고,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 다음 해 발족했다. 그 목적은 “종군위안부가 되셨던 분들에 대한 배상과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관련된 오늘날 여성문제의 해결”이었지만 실제로 국민기금이라는 것은, 일본정부는 위안부 피해자에게 공식사죄와 보상을 할 수 없다는 점을 전제로 ‘보상에 대신하는 조치’를 취하기 위함이었다. 국민기금을 통한 배상사업 내용은 다음 표)에 간략히 나타난다.국가명배상사업의 3가지 내용기타사과금 200만엔의료ㆍ복지사업사죄의 편지한국(205명, 2002년 4월 현재)200만엔사업 첫 해에 228만엔이 현금으로 지급되고, 5년에 걸쳐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국내법에 있어서 예외가 인정되는 상황을 고려하여 국제법에서도 예외가 적용될 수 있다. 또한 행위 당시의 법으로도 일본행위의 국제법규위반성은 어느 정도 제시될 수 있다. 1930년 국제노동기구(ILO)가 채택한 「강제노동에 관한 협약」 제1조는 국제노동기구 회원국은 가장 가까운 시일 내에 강요된 노동의 이용을 억제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아울러 제4조에서는 당국이 개인, 회사, 또는 결사를 위한 강제노동을 허가하거나 부과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제6조에서는 그러한 강제노동이 부과된 것이 보고되는 경우 회원국은 즉각 완전히 억제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2) 국가 책임의 시행국가책임이 정립된 경우 그 책임을 해결하는데 있어서의 기본원칙은 “책임을 성립시킨 위법행위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존재했을 상황”으로 돌려놓는 것이다.)하지만 이 방법은 침해된 권리가 정조권 등 인격권이 주가 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채택될 수 없다. 따라서 손해 사항을 금전으로 배상하는 금전배상과 非금전배상 손해에 대한 사과 등의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방침이 적절할 수 있다. 아직 확립된 개념은 아니지만 국제적 형사책임의 경우 예외적으로 개인에 대한 생명 또는 자유 등의 형벌 부과도 고려될 수 있다.책임 이행과 관련하여 일본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을 가정해 보면 ①전범의 처벌 ②한일 청구권협정체결 ③일왕의 사과발언 등으로 성립된 책임의 해결을 위한 모든 이행행위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전범 처벌의 경우 두 가지 점을 지적할 수 있는데, 첫째 전쟁범죄행위에 대한 개인처벌은 국제법에 의한 처벌로써 개인의 의무위반에 대해 직접적으로 부과되는 처벌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 핵심적 전범이라고 할 수 있는 일왕의 책임이 어떤 방식으로든 평가되지 않았다는 것이 지적되어야 한다.)또한 한일 청구권협정에서 청구권 문제가 청산되었다고 주장하나, 청산된 청구권이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으로서 배상청구권까지 포함한 것인지 아니면 일제 강점기 기간 동안의 정당한 국가행위 결과 발생워 수상처럼 탑골 공원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닌 이상, 일왕의 방한은 한일 간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악화시킬 여지가 있는 것이다. 또한 김 대통령은 ‘인도적 조치’라고 주장한 위안부 피해자에 대해 한국정부가 지원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수년간 진행되어왔던 대일(對日)청구권 운동을 단순 민간차원으로 전락시켰다. 한국정부가 스스로 나서서 정부배상 불요구 등의 선물을 안겨줌으로써 일본 측의 부담을 덜어준 것이다. 잘잘못이 명확하게 공식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왕이 한국을 방문한다는 것은, 형식적인 “과거 청산의 완전한 해결”을 공식화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일본은 위안부동원 및 이용행위로 성립된 책임을 이행하지 않았고, 일부 이행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완전한 책임해제에 이르지 못한 불완전이행에 그쳤다. 한국정부는 형식적인 과거 청산을 위해 이 같은 책임을 묻지도 않은 채 덮어두지 말고 일본에게 국제법적 국가 책임을 물어야 한다.4) 독일과 일본의 전후 배상 비교2차 대전 이후 전범국이자 패전국인 독일과 일본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양국을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신뢰도는 완전히 다르다. 독일은 2차 대전기간동안 약 600만 명의 유태인을 학살했고 약 5,000여만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현재, 독일은 세게 각국의 신임을 얻었을 뿐 아니라 유태인과 주변 국가들에게 신임 받고 있다.) 이는 철저하고 진지했던 전후 독일의 과거 청산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종전 이후 독일의 초대 총리였던 아데나워는 나치 독일의 박해를 받았던 국가와 개인에 배상하는 것을 도덕상의 의무로 규정하였다. 2030년까지 계속 지불될 전쟁피해자 배상은 지금까지 지불된 금액만도 1,200 마르크를 초과하고 있고, 나치 전범들은 이미 9만 명이 넘게 심판을 받았다. 또한 독일 연방 국회는 1979년 나치 전범들의 살인죄 시효를 영구히 폐지하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독일이 도덕상 참회하고 있고 역사에 대해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독일은